호남의 극장들(전주좌, 광주좌, 군산좌 등)
① 군산좌(群山座), 군산극장(群山劇場) 군산좌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군산부 노정(蘆町)에 있었으며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191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되는데 1926년 당시 군산좌의 좌주는 시마다(島田元三郞)였다. 그는 낡고 오래된 극장을 개축하려 시도하던 중 실패하였고 1929년 극장은 폐쇄된다. 이 무렵 군산 유지 미츠토미(光富嘉八) 등이 합자회사를 조직하여 극장을 개복동으로 옮겨 짓고 이름을 군산극장이라 지었다. 1932년 8월 군산극장은 채무 문제로 경매에 붙여졌고, 마쓰오(松尾仁平)가 낙찰 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군산극장은 조선인 상설관으로 활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쓰오(松尾仁平)이며 객석수는 61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② 희소관(喜笑館) 군산부 개복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2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와카미(河上榮)이며 지배인은 히로노(博野登四郞)였으나 화재를 당해 폐관 상태였다. 해방 직전 다시 개관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③ 전주좌(全州座), 전주극장(全州劇場), 제국관(帝國館) 전주 지역의 오래된 극장으로 191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무렵엔 이미 시설이 낙후해서 폐쇄된 상태로 새로운 극장 신축을 위한 조합이 조직되어 극장을 건설 중에 있었다. 전주부 대정정에 새로 건설된 극장의 이름은 전주극장으로 정해졌다. 전주극장에서는 각종 공연과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1934년 초등생도음악회 이후 제국관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츠나카 시게루(松永茂), 지배인은 마츠나카 키요시(松永潔)였으며 객석은 76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④ 이리좌(裡里座) 이리읍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914년 4월 개관했다. 1928년 2월 극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좌주는 가토(加藤方)이었다. 같은 해 7월 말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무라(三村德太郞)이며 좌석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⑤ 김제좌(金堤座) 김제읍 본정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2년 10월 25일 김제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극장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아수라장이 펼쳐진 사건이 있었다. 또한 1934년 8월 삼남수해활동사진이 이곳에서 상영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곽용훈(郭鎔勳)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⑥ 소화극장(昭和劇場) 전북 부안군 부안읍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7년 이곳에서 황군위문학예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광평(창씨명 金本光平)이고 지배인은 우에다(植田英二)였다. 객석수는 30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⑦ 남원극장(南原劇場), 보국관(報國館) 남원극장은 1931년 4월 낙성한 극장이다. 적은 비용으로 건립되었기에 시설과 설비가 좋지 못했다. 1936년 당시 관주인 최두일이 4천 8백원을 투입하여 수리하였다. 1940년대 들어 이름을 보국관이라 바꾸었고, 해방 후 다시 남원극장으로 개칭하였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쿠니사다(國定豊)였으며 객석수는 428석이었다. ⑧ 추산좌(秋山座) 정읍군 정읍읍에 있었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2년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명규, 지배인은 아라이(新井純二郞)였다. 좌석수는 355석이었다. 다음은 전라남도지역이다. ⑨ 광주좌(光州座) 광주 최초의 극장으로 광주읍 황금정에 있었다. 1918년 이곳에서 집회를 개최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양한 집회와 연극, 영화 상영이 펼쳐졌던 이곳은 1931년 11월 8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당시 관주는 후지가와(藤川)였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⑩ 광남관(光南館), 제국관(帝國館) 광남관은 1927년 설립된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다. 조선인 활동사진관이 없었기에 광남관의 전속 영사기사 조명덕(趙明德)은 1927년 연말에 이 곳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시민위안영화대회를 열었다. 그는 영사기사, 악사, 변사로 구성된 광주영화삼우회(光州映畵三友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1930년에 그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으며 다양한 집회장소와 흥행장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로세(黑瀨豊藏), 지배인은 미에(彌榮正己)였으며 좌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광주극장(光州劇場) 호남 갑부 최선진 외 4명의 사람들이 자본금 30만원 불입금 7만 5천원의 주식회사 광주극장을 조직하여 세운 영화관이다. 광주부 본정에 위치했으며 1935년 10월 1일 개관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최선진이며 지배인은 미야가와(宮川昌信)였다. 객석은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상반좌(常盤座), 목포극장(木浦劇場) 상반좌는 목포의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14년 2월 고토 료스케 일좌(後藤良介一座)의 공연과 1916년 5월 어대례활동사진배관회(御大禮活動寫眞拜觀會)가 이곳에서 있었다. 이와 같은 각종 행사를 비롯해 형설회나 토월회 같은 조선인 흥행단의 공연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1926년 11월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목포극장으로 바꾸었다. 김성두, 이상근과 같은 조선인 변사를 두고 있었으며 미국 유니버설회사와 특약을 맺고 있었다. 1934년 김원희(金源喜)가 인수하였으며 이후 2만 3천원의 예산으로 대개축을 하였다. 1936년 대대적인 수리가 끝났고 이후 목포극장은 광주극장과 더불어 호남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자리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무라(木村巴茂)였으며 78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희락관(喜樂館), 평화관(平和館) 희락관은 목포의 활동사진관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21년 통영청년회활동사진대일행이 이곳에서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의 유일한 활동사진상설관이던 희락관은 1926년 소실되었다. 희락관이 사라진 후 1927년 8월 새롭게 영화관이 신축된다. 새로운 영화관의 이름은 평화관이었다. 쇼치쿠 영화 중심의 흥행장으로 목포부 무안통에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모토(森本政治郞), 지배인은 모리모토(森本淸)이며 객석수는 513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여수극장(麗水劇場) 여수에 극장을 지으려는 시도는 1925년부터 있었다. 부사옥구락부(富士屋俱樂部)와 영좌(榮座)라는 극장이 있었으나 가설극장 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상설관의 건립은 1930년 시작된다. 여수의 일본인 니로(新納寅太郞)가 극장 여수좌(麗水座)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상설 극장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1월부터 여수극장이 신문지상에 보도되기 시작한다. 1943년 현재 여수극장의 흥행주는 나카무라(中村克己)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순천구락부(順天俱樂部), 순천극장(順天劇場) 1933년 1월 조선신문에 실린 순천구락부의 새해 광고에 극장 순천구락부의 이름이 등장한다. 마사무네(正宗義智), 키자키(木崎義男), 무라카미(村上義一), 타케우치(武內罷) 등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다. 1937년 7월 13일에는 순천극장이 개관한다. 순천 거주 일본인들의 발기로 3만원을 들여 극장을 지은 것이다. 순천극장의 건립과 함께 순천구락부는 사라진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순천극장의 흥행주는 마사무네(正宗義智)이다. 순천극장은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⑯ 송정리극장(松汀里劇場)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 있었다. 누가 언제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1943년 현재 광주극장 운영자 최선진이 운영하고 있었다. 객석 수는 407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⑰ 창심관(暢心館),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 제주도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극장은 창심관(暢心館)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5년 1월 23일 영화 상영 중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이어서 만들어진 극장이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이다. 1940년경에 개관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도 제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무라(二村守彦)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제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9.28. 광주극장 개관, 十월 一일부터 【광주】 조선에서 제일을 자랑할 만한 광주극장(光州劇場)은 당지 갑부 최선진(崔善鎭)씨 외 四명의 주식회사로서 총건축비 八만여원이란 거액을 들여 약 一년간을 두고 건축 중이든 바 근근 준공을 보게 되여 오는 十월 一일 부(府) 승격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일부터 개관을 하게 만단 준비 중이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5.10.04. 광주극장 준공, 一일에 개관 【광주】 기공 중이든 광주극장은 이에 준공을 마치엇슴으로 十월 一일부터 개관하고 동일(同日)은 관계자 수백명을 초대하야 개관의 피로공연이 잇섯든 바, 동 극장은 천이백명의 관람자를 수용할 수 잇는 당당한 철근 『콩크리-트』 二층 건물로 본정 五정목의 한 위관(偉觀)을 이루고 잇는데 그 총 공비 七만 五천원의 거비(巨費)를 투(投)하야 무대는 회전식 八간(間)의 대규모의 것으로 사장은 최선진(崔善鎭)씨 취체역에 유연상(劉演相) 조규림(趙圭林)의 양씨, 감사역에는 김희성(金喜誠)씨가 취임하기로 되엇다. [자료] 《매일신보》, 1931.04.27. 신축 중의 남원극장, 낙성식 거행 【전주】 작추(昨秋) 이래 신축공사를 급진(急進)하야 오든 전북 남원극장은 이 사이 겨우 준공됨을 ᄯᅡ 라 지난 二十일 오후 七시부터 당지 소방조(消防組) 주최로 성대히 낙성식을 거행하얏는데 당일 관람객은 남녀 수천여명에 달하야 장외 장내는 입추의 여지도 업시 대혼잡을 극(極)하야 남원 유사 이래 초유(初有)의 성황을 정(呈)하얏다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2.03.09. 군산에 우복(又復) 대화(大火), 극장 등 삼동(三棟) 전소(全燒), 七일 새벽 군산좌에서 발화, 손해는 약 三만원 【군산】 화신(火神)의 작란인지? 지난 三일에 군산 영정(榮町)에서 손해액 二만 二천원의 손실을 보는 큰 화재가 이러남은 본보가 솔선하야 보도한 바이어니와 지난 七일 새벽 一시 四십분 군산부 노정(盧町) 군산좌(群山座)(그전 극장)에서 불이 이러나자 ᄯᅢ 맛침 맹렬한 바람은 소방대의 출동도 못 밋처 부근은 큰 불바다가 되야 여섯 채의 집을 전소하고 세 채의 집을 반소하얏스며 전신주 한 개를 반소하야 손해액은 三만 천원에 달한 큰 화재인바 금년으로 二三일을 격하야 발행한 대화이니만큼 그 원인을 조사 중인바 군산좌주 도전원삼랑(島田元三郞)은 극장으로 쓰든 군산좌의 집을 오래동안 묵혀 비어둔 것으로써 일전에야 화재보험액 一만원을 가입한 관게와 그 집에서 불이 난 것을 미루어 색안경으로써 보게 되는 의혹이 불무하야 방금 군산경찰은 엄중히 조사 중이라 하며 소실된 가옥은 군산좌(群山座)와 동해루(東海樓)라는 중국료리점과 그에 린접한 집 一동 세 집과, 반소로는 주다야여관(ジタヤ)과 서천(西川) 모의 주택과 송미세탁소(松尾洗濯所)라고 한다. (사진은 화재현장 광경) [자료] 《매일신보》, 1913.05.01. 소인연예회(素人演藝會) 별항(別項)과 여(如)히 당지 소방조합에서는 소방용으로 정호(井戶) 16개소를 부내 적의(適宜)의 처(處)에 굴반(掘鎜)하기로 결정한 바 우(右)의 비용은 六白원을 요(要)할터인즉 차(此)를 충(充)하기 위하야 소인연예회를 개(開)하고 기(其) 수익으로 기부한 사(事)로 안무(安武)관리자 급(及) 의원 기타 유력자의 찬조를 득(得)하야 금회 인가를 득하야 래(來) 五월 二일부터 四일 ᄭᅡ 지 三일간 전주좌에셔 개최한다더라 [자료] 《동아일보》, 1928.11.12. 극장개관기념식 목포부 죽동(竹洞)에 잇는 목포극장은 목포의 유일한 오락기관으로 유관오(柳官五)씨가 경영하여 오는 바 지난 八일은 동관의 二주년 개관 기념일임으로 이를 축하하기 위하야 최저요금으로 명화를 영사하얏는데 입장자는 무려 六白명의 대성황을 정(呈)하얏스며 관람자에게 시상 추첨이 잇섯다는데 一등 一인에 금완권(金腕卷) 시계 一개, 二등 二인 은배(銀盃) 각 一개식, 三등 五인 수건 각 이타식(二打式) 주엇다더라. 【목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