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京鄕)의 시차
경성은 식민지 조선의 최대 도시이자, 가장 많은 극장이 ‘밀집’된 곳이었다. 오늘날과 견주어 보면 ‘밀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전국적인 극장의 분포 정도를 살펴보면, 식민지 시기 내내 경성은 극장의 도시였다. 1930년대 전쟁이니 불황이니 해도 경성의 영화 인구는 계속 늘었고, 그럴수록 경성과 지방 사이의 격차는 벌어졌다. 부산이나 평양 정도의 도시에는 규모가 있는 영화상설관들이 꽤 있었고 필름의 순환도 제법 빠른 편이었지만, 경성과의 물리적 거리가 일종의 ‘문화 지연’ 감각으로 전환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에서 본 영화를 경성에서 다시 보며 ‘지금 여기’에 묘한 회상의 감각을 덮어보는 엘리트 관객의 시간 감각만큼이나, 경성에서 본 영화를 지방 어느 극장에서 다시 보는 영화팬의 속내 또한 복잡했을 것이다. 카프(KAPF)의 직속 극단 ‘신건설(新建設)’ 창단을 주도했던 신고송은 1932년에 이른바 ‘『우리 동무』 배포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석방된 후 교사인 아내의 근무지였던 김해군 김해읍으로 이주했다. 김해에 살면서 1936년 『조선영화』 창간호에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을 기고하는데, 이 글은 경성의 지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을 취했다. 『조선영화』에는 한때 그와 함께 했던 ‘형들’―송영, 나웅, 최일숙, 고경흠 등―이 글을 싣고 있었는데, 그중 나웅이 이 글의 수신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2. 신고송,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 중에서 신고송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읍내 극장에 영화나 연극이 ‘올’ 때마다 극장에 갔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극장에서 <암로(강호, 1929)>와 <혼가(김유영, 1929)>,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양철, 1930)> 등 자신의 과거 어느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영화들을 보았다고 한다. 김유영이 연출하고 임화가 주연했던 영화 <혼가>는 엉뚱하게도 ‘나웅’ 주연의 영화 ‘어두운 거리’라고 광고되기도 했는데, “서울 사는 형들의 생각에는 어느 집 창고에 먼지에 파묻혀 있으리라고 할” 이런 영화들에서 임화의 맵시를 보고, ‘형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자신에게는 위락이 된다고도 적었다. 경성의 영화팬들은 기억도 못할 수년 전의 무성영화가 그가 사는 곳에서는 신작처럼 상영되는 것이다. 김해는 부산에서 가까워 갓 일본에서 들여온 ‘신작’들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어떤 영화들은 경성의 ‘형들’보다도 신고송이 먼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성영화 <벤갈의 창기병(The Lives of a Bengal Lancer, 1935)>을 무성영화 영사기로 상영하는 낙후된 극장 시설은 ‘경향의 시차’를 더욱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비슷한 무렵, 시인 이상은 평안남도 성천에서의 영화 경험을 기록해 놓았다. 1935년 9월의 어느 저녁, ‘공기는 수정처럼 맑고, 별빛만으로도 누가복음을 읽을 수 있을 듯한’ 평안남도 성천에 요양 차 머무르던 그는 금융조합 주최의 선전활동사진회 구경을 갔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들”이 모여든 밤,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 전등이라곤 본 적 없는 성천 사람들에게 움직이는 영상은 “홍모(紅毛) 오랑캐의 요술”에 비할 것이며, 영화를 보기 위해 학교 마당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이 아니라 축음기 그 자체가 신기해서 모여드는 펭귄처럼, 성천 사람들은 영화의 내용을 알거나 이해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 장치 그 자체에 매혹되어 모여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액션이 화려한 극영화도 아니고, 부산 잔교, 모란봉, 압록강 철교 등 그저 조선의 실경(實景)을 담은 필름의 영사가 끝난 것인데도, 성천 사람들은 마치 서양 명감독의 영화를 접한 듯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도회라는 ‘화려한 고향’에서 일상적으로 영화를 경험해온 그에게는 퍽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이 상영의 장에서 그 역시 성천의 ‘촌민’들과 더불어 ‘백성’ 혹은 ‘동포’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일체화되었던 경험을 짧게 적는다. 사진3. 이상, 「산촌여정 - 성천 기행 중의 몇 절」 중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조선에서 경성과 지방, 도시와 농촌 사이의 문화적 격차는 경성을 떠나야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터였다. 영화는 과학 기술이 탄생시킨 복제 미디어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사운드 도입 이후에도 조선에서의 영화 이동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벌, 많아도 겨우 몇 벌의 프린트가 경성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고 도는 식이었다. 더 많은 관객에게 영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순회 영사는 지역에 따른 경험의 차이도 계속 생성해갔다. 일제가 식민지 주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문화 선전 활동을 구상할 때, 경향 간 문화 경험의 차이는 더욱 문제가 되었다. 문화 기반 시설이 부족한 농산어촌과 공장 및 광산 지대의 주민에게 영사대를 파견하여 집단적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하는 이동영사가 전시체제기에 기획되고 치밀한 조직과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단시간 내에 수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과 지방 혹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가 추동했던 문화 향유에 대한 갈망과도 깊이 관련된다. 이동영사의 관객들은 거의 대부분이 문화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려면 겨울에도 20~30리 길을 걸어야 상영장에 닿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꺼이 먼 길을 걸어 보러 올 만큼 이동영사에 대한 호응이 높았던 것은 선전과 교화 수단으로서 영화를 이용하려는 당국의 의도와 오락과 여가, 문화로서 영화를 경험하는 식민지 주민의 수용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단사진1. 평양 순회 영사 관련 기사 출처: 《동아일보》 1934년 7월 29일자 2면 (뉴스라이브러리)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신고송,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 『조선영화』 제1집(1936년), 118~119쪽. 형! 중앙을 떠난 지도 벌써 오래되니 나의 전문이던 연극에까지도 인연이 멀어진 것 같거든, 하물며 영화와는 더욱 남이 된 것 같소이다. 행(幸)으로 부산에 가까이 있으므로 한 달에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영화는 보기가 됩니다. 그도 일본영화는 간혹 조선 첫 봉절도 있습니다마는 조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양 것들은 다, 형들이 감상하고 난 나머지를 얻어 보는 셈이지요. 형! 그래도 이런 시골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얼굴이 간지러우며 진땀을 흘리면서도 추억의 거리가 되는 재미나는―중앙에 있는 형들은 못 보는―것을 구경합니다. 이 읍에도 명색 극장이 있어 한 달에 한 번은 영화나 연극이 오는데 이러한 한거(閑居)에서 무위의 날을 보내는 나는 우리집 앞 논둑길로 악대가 불고 지나가는 밤이면 꼭 극장에를 가보는 것입니다. 이 덕택으로 서울 사는 형들의 생각에는 어느 집 창고에 먼지에 파묻혀 있으리라고 할 <암로>와 <혼가>와 또는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혼가>가 ‘어두운 거리’로도 되어 나오고 주연이 ‘나웅(羅雄)’이라고도 되어 광고됩니다. 그래 웃으면서 구경 갑니다. 가서 강호(姜湖)의 얼굴을 보고 임화(林和)의 맵시를 보고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에게 한갓 위락이 됩니다. 강호 군은 <암로> 이야기만 내면 아주 미안해하고 싫어합니다만 근 십년 전의 작품이오, 초기의 첫 작품이 그러하다는 것이 왜 강호의 불명예야 되겠습니까. 형! 이러한 시골 극장에서 얻는 에피소드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번은 <부라커 대학생>이라는 광고로 영화가 상영되기에 나도 무심히 구경을 갔었지요. 그랬더니 ‘부라커’는 정히 저 ‘프라-그’이고 영화는 그 유명한 <프라하의 대학생[Der Student von Prag]>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벤갈의 창기병[The Lives of a Bengal Lancer, 1935]>이 왔기로 나는 그것을 전에 볼 기회가 없어 못 보았는지라 가보았더니 사일런트 기계로 무성으로 올리겠지요. 영화로서 효과는 전연 없어졌지마는 영화에 의하여 느끼어진 적이 최근에는 없는 나로서는 느껴지는 것이 있습디다. 어떻게 해서 영국이 토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부를 축적했는가, 그것이었습니다. 소위 서부활극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아메리칸 인디언을 취급하는 데서도 흔히 보는 것이지만 인종적으로 모욕해서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형! 이래도 부산서 형들이 먼저 보기 전에 서양영화를 첫 봉절에 하나 보았습니다. <춤추는 브로드웨이[Broadway Melody of 1936]>, 그 어이 없이 시끄럽고 날뛰는 영화 말입니다. 늙은이 코 고는 것이 ‘상승음계형’, ‘하강음계형’, ‘권태형’ 등등 수십 종의 형으로 유별(類別)하는 재주에는 경탄했습니다만, 양키들의 끝없이 □□[식별 불가]하는 광조난무(狂躁亂舞)는 아메리카 문화를 경조화(輕燥化)하는 것이 발성영화의 죄일는지요, ‘엘레지 오브 아메리카’의 죄일는지요. <톱 햇[Top Hat, 1935]>, <오페라 해트[Mr. Deeds Goes To Town, 1936]>, <함대를 뒤쫓아서[Follow the Fleet, 1936]> 등등 끝없이 재즈문화는 재즈화해가고 ‘폭스 트로트’는 ‘룸바’에 가지로 증후는 악화해 가는 모양입니다. 아메리카의 영화가 내용적으로 저열해지건, 불란서에서 <마주르카>니 <에키파-쥬>니 우수하다고 하는 영화들이 뒤이어 소개되건, 조선영화의 소조(蕭條)한 비발전(非發展)에는 경탄을 마지않습니다. 그 원인은 허다하겠지요마는 한심한 일입니다. 이곳 극장에서 발성영화 <××전>을 구경했습니다마는 그러한 거액의 돈으로 그것밖에는 만들지 못한 원인은 기술의 부족으로 보아야 옳겠지요. 기술이 있는 이들이 그냥 썩어져 있건마는 기회는 항상 그것을 찾아보지 못하고 그렇지 않은 데서만 방황하니 기회 그놈이 무심타고 하겠습니다. 일본영화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고 중국의 영화도 최근 훌륭한 것들이 나온다고 하니 어이 남의 일만 같다고 하겠습니까. 이제는 아마 조선영화도 기업적으로 채산이 되는 듯하니 대중의 저속한 취미에만 영합하려는 통속화의 경향을 집어치우고 예술적 양심을 움직여 대중의 영화에 대한 감상안을 높여가야 영화문화의 진전이 있지 않겠나요. 외국영화 더욱이 불국(佛國) 영화를 보면 모든 것에 있어서 화면에 넘치는 여유작작한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조선영화에 있어서는 시나리오 그것에 그러하고 연기에 그러하고 감독에 그러하여 모두가 여유가 없으니, 이것은 기술의 탈일까요. 저들의 생활에는 여유가 있고 우리의 생활에는 궁박(窮迫) 그것이 모든 것에 반영되어 그럴까요. 형! 지금 나의 경우에는 이것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형의 건강을 빌고 마지않습니다. 2. 이상, 「산촌여정 - 성천 기행 중의 몇 절 (완)」, 《매일신보》, 1935년 10월 10일 및 11일 자, 조간 1면, 부분 발췌 이 마당[학교 마당]에서 오늘 밤에 금융조합 선전활동사진회가 열립니다. 활동사진? 세기의 총아—온갖 예술 위에 군림하는 ‘넘버’ 제8예술의 승리. 그 고답적이고도 탕아적인 매력을 무엇에다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활동사진에 대하여 한낱 동화적인 꿈을 가진 채 있습니다. 그림이 움직일 수 있는 이것은 참 홍모(紅毛) 오랑캐의 요술을 배워가지고 온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동포의 부러운 재간입니다. [...] 밤이 되었습니다. 초열흘 가까운 달이 초저녁이 조금 지나면 나옵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짧고도 기다란 인생을 적어 내려갈 편전지(便箋紙)—‘스크린’이 박모(薄暮) 속에서 ‘바이오그래피’의 예비 표정입니다. 내가 있는 건너편 객줏집에 든 도회풍 여인도 왔나봅니다. 사투리의 합음(合音)이 마당 안에서 들립니다. 시작입니다. 부산 잔교가 나타납니다. 평양 목단봉입니다. 압록강 철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태서(泰西)의 명감독이 바야흐로 안색이 없습니다. 십분 휴게시간에 조합 이사의 통역부(通譯附)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달은 구름 속에 있습니다. 금연—이라는 느낌입니다. 연설하는 이사 얼굴에 전등의 ‘스포트’도 비쳤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경동할 일입니다. 전등—이곳 촌민들은 XX행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 전등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 눈이 부시게 밝은 광선 속에서 창백한 이사는 강단(降壇)하였습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 사람도 박수치지 않았습니다—물론 나도 그 우매한 백성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