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테스트용으로 만들어진 영화글이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나는보리에 관한 영화글입니다.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 중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스크린 앞에 앉은 이들이 이미지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찾는다는 말은 꽤 미심쩍은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앞에, 뒤에 그리고 곁에 앉은 이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와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과의 차이를, 즉 간극을 향유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이 경우에, 그리고 오직 이 경우에만 영화관은 우정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뤼미에르에 대한 에디슨의 승리”(장-뤽 고다르)가 전면화된 곳에서, 관객들은 그저 “자신들이 찾은 것만을 욕망”(기 드보르)하게 될 것이다. - 유운성, 「우정의 이미지들」,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 이 글은 2024년 12월 중순에 쓰이고 있다. 12월 3일의 계엄령 선포 이후라는 뜻이다. 연말의 나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해의 영화들을 순위 매기거나 놓친 영화를 돌아보며 다가올 새해를 맞이했다. 지나간 이미지들을 되짚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는 했었던 것인데, 반대로 요즘의 나는 유튜브에 들어가 생중계되는 담화와 현안 질의 영상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와중에 마감 일자는 다가왔고 글을 써야 할 때가 되었는데, 청탁을 받았을 때와는 무언가 달라진 기분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을 외면하기에는 원래 준비했던 글의 주제와 지금의 내 상태가 관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꽤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준비하던 글을 버릴 수는 없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준비했던 대로만 쓰면 왠지 그건 평정심이라기보다는 뻔뻔함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 섞인 걱정을 하고, 그럼 준비했던 대로만 쓰는 건 뭔가 아니다 싶고, 굳이 올해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관련지을 수 있을 만한 사례를 가져와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와 관련된 옛날 얘기로 글을 시작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단일한 감상이란 있을 수 없다. 비평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유의미한 의견으로 정교히 언어화되어 세상에 나오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것에는 각자의 개별적 경험이 스며들며 그 분리 불가능한 총합은 또 하나의 경험이 되어 각자의 마음에 남기 마련이다. 김대환 의 장편 데뷔작 < 초행 >(2017)이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2017년 겨울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당시 이 영화를 본 친구들은 개봉하게 되면 꼭 보라는 말을 해주면서도, 어떤 내용인지 묻자 아무것도 모르고 보는 편이 좋고 결말이 참 인상적이라는 말을 더해 주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포스터나 시놉시스를 보건대 장르적이거나 플롯 운영에 있어 반전을 꾀하는 영화는 아닌 것임이 확실할 텐데,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초행> 포스터와 스틸 <초행>이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결말부는 2016년 가을 무렵부터 2017년 중순까지 이어졌던 광화문 촛불 집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다. 양쪽 집안을 오가며 고군분투하던 7년 차 청년 커플을 따라가던 픽션의 세계에 돌연하게 쏟아지는 저 리얼리티의 막대함에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이 선택이 단순히 허구와 현실의 구별이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는 개념적 차원 그 이상의 가치로 빛난다고 느꼈는데, 서둘러 말하자면 이 영화가 너무 빨리 도착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KOBIS에 따르면 이 영화는 내가 열심히 광화문 광장을 오가던 2016년 11월 26일부터 2016년 12월 20일까지 촬영되었다.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고, 이 영화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으로 공개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당시 촛불 집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와 시간은 이 현실을 살아가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망각하기 어려운 적잖은 충격이었을 테다. 물론 나는 이 영화를 개봉하고 보았지만, 그 물리적 간극을 상쇄시킬 정도로 <초행>의 끝이 주는 감흥은 생생하면서도 생경했다. <초행>에 기입된 광화문 광장의 생생한 이미지가 한편으로 생경했던 이유는, 영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다는 모종의 관습을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거의 생중계에 가깝다고 느끼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은 환기되는 이상야릇함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건, 작품 내에서 세계를 뒤집어놓는 급속한 반전처럼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지난히 이어지던 이 커플이 광장으로 향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상황은, 이야기와 멀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끈끈히 달라붙으며 세계를 입체화하기 때문이다. 수현과 지영은 그 역할을 맡은 조현철 과 김새벽 으로 존재를 전환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은 이 영화의 주된 무대인 삼척, 인천과 특별한 위계서열을 형성하지 않는다. 나의 사적인 경험, 역사적 현실, 영화적 허구가 한 데 섞여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이 기묘한 감각을 여전히 잊기 힘들다. <태풍클럽> 일본어 포스터(일부)와 국내 개봉 포스터 그 ‘너무 이른’ 경험으로부터 7년이 지나 2024년이 되었다. 올해는 정반대로 ‘너무 늦은’ 경험을 했다. 소마이 신지의 < 태풍클럽 >(1985)이 정식으로 개봉한 것이다. 처음 본 것이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이 영화의 영상과 자막을 구했으며 이불에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보았던 기억, 예상치 못한 영화 속의 거친 면모에 받았던 충격만큼은 선명하다. <태풍클럽>은 1985년 작이니 거의 30년이 되어서야 한국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다. CGV 아트하우스관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객석이 의외로 꽉 차 있어 놀랐고, 영화가 끝난 뒤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태풍클럽>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아름다운 청춘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소마이 신지의 다른 영화들과 그의 연출 스타일을 경험해 보았다는 차이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시네필 꼰대처럼 우쭐대는 것은 아닐까? 상영관에 함께 있던 이들과 나는 동등한 입장에서 영화를 본 것이 맞는 걸까?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영화 감상은 반드시 시차의 문제를 동반한다. 스크린 속 세계가 내게 익숙한지 생소한지에 따라 감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태풍클럽>은 개봉하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통과하며 몇몇 평자들에 의해 걸작으로 이야기되어 왔던 작품이었고, 이미 대다수의 시네필들이 시네마테크와 어둠의 경로를 통해 그 감각을 수용한 상태에서 너무 늦게 도착했다. 물론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처음 본다 해도 기존의 맥락을 신경 쓰지 않고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은 쓸 데 없는 우려일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하나의 유물을 목격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2024 월별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20위까지의 목록 중 재개봉 영화 목록 (출처: KOBIS / 회색 음영: 한국 최초 개봉 연도, 주황 음영: 당월 순위) 그 인상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올해 개봉한 수많은 재개봉작들 때문이다. KOBIS를 참고해 보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재개봉작들이 많이 출현했던 해다. 심지어 몇몇은 동시대에 만들어지고 개봉하는 영화와 경쟁해 당당히 1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나는 영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고, 어쨌거나 이 통계는 한국의 사례이기에 동일한 현상이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까지 고려하며 이 흥행에 대한 인과론적 분석을 할 수는 없다. 그저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영화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독립예술영화를 배급하는 입장에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테니, 새로운 영화를 가져오는 것보다는 이미 지나간 영화를 고르는 쪽이 경제적으로 나은 선택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그 선택들이 일으키는 변화다. 영화 홍보에 있어 언제부터 ‘개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봉하여 두었던 것을 떼거나 엶”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그 선택의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영화가 개봉한다는 건 무언가 기대할 만한 것이 빵 하고 튀어나오는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개봉박두’ 나 ‘대개봉’ 같은 한때의 표현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제 우리네 관객이 마주하는 표현은 ‘개봉’ 대신 ‘공개’라는 심심한 표현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지원 사격으로 부상한 OTT와 유튜브를 통과하며 우리는 이미지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고, 더 이상 이미지가 이전과 같은 환상성이나 신비로움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독할 정도로 체감하다 못해 익숙해졌다. 내 손안의 영화관인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속 릴스와 쇼츠로 맥락이 탈구된 수많은 밈(meme) 이미지들을 나의 취향에 맞는 알고리즘의 설계 아래 부지런히 스크롤링하며 갱신하는 것이 일상화된 우리의 감상 환경에서,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는 구속적 방식의 영화 감상은 그 자체로 만족을 주지 못하는 20세기의 시대착오적 산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올해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체감했던 해였다. 올해 나는 “무슨 무슨 영화가 재개봉한대” 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아니, 그게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재개봉이냐?” 가령 표의 4월부터 5월을 보면 < 남은 인생 10년 >(후지이 미치히토, 2022)이 1위를 차지했는데, 이 영화는 고작 1년 전에 개봉한 영화다. 차라리 재개봉 대신 재상영 내지 스크리닝이라는 심심하고 객관적인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니면 재개봉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그 사이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 ‘재개봉’에 대해 느끼는 어색함은 그 자체로 동시대 영화가 놓인 위치를 설명해 주는 것만 같다. 사실 나는 10년이 넘기는 했지만 < 비긴 어게인 >(존 카니, 2013) 같은 경우에도 ‘옛날 영화’라고 감각하지 않는 쪽인데, 이 영화도 ‘재개봉’을 해서 9월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20년이 넘었는데도 1등을 한다. 10월의 1등, 닉 카사베츠의 < 노트북 >(2004)이다. 이렇게 ‘재개봉’으로 소환되는 (너무 이른) 과거는 추억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2025년에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나카야마 미호의 출연작, 이와이 슌지의 < 러브 레터 >(1995)가 작품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을 예정 중이라고 한다. 심지어 세로 자막 버전이라고 한다. 아! 그때 그 시절 …… 농담이다. 나는 극장에서 세로 자막으로 영화 본 기억이 없다. 좌우지간, 그런 점에서 올해의 극장은 추억의 공간이다. 다른 한편, 올해는 과거의 수많은 걸작들이 극장에 소환된 해다. 이들은 박스오피스권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시네필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사례다. 앞서 말한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 오시마 나기사의 < 전장의 크리스마스 >(1983),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 < 우나기 >(1997), 다시 한 번 ‘재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 큐어 >(1997), 무엇보다 90년대 한국에 뒤늦게 개봉하여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 >(1986) 4K 리마스터 재개봉까지 …… 물론 이들의 방문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걸작’으로 소환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영화가 더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문제와 결부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덩어리 내지 가치 있는 유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들에 익숙한 시네필들은 기꺼이 극장에 갈 것이고, 그렇지 않은 관객들이라도 걸작이라는 은근한 압박에 둘러싸여 작품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상) <전장의 크리스마스>, <복수는 나의 것> / (하) <큐어>, <희생> 그런 감각을 더 강하게 느끼는 이유가 있다면, 이 영화들이 시네마테크의 기획과 같은 대안적인 방식으로 상영되지 않고, 정식 개봉 절차를 거치는 방식으로 CGV와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몇 년 전만 해도, 최신 개봉작은 멀티플렉스에서 보고 독립영화와 과거의 영화들은 시네마테크에서 보는 이분법적 감상 환경이 일반적이었다. 나 역시 2016년에 처음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고바야시 마사키의 < 할복 >(1962)을 보고, 노인이 된 나카다이 다츠야와 이준익 감독의 대담 상영을 경험하며 그 시간의 아득함을 체감한 바가 있다. (적고 보니 거의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미안하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예술영화 시장에는 큐레이팅이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홍길동 특별전,’ ‘임꺽정 배우전,’ ‘장길산 기획전’ 같은 문구는 굳이 대안적 상영 공간을 찾지 않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브랜딩 상품이 되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JR의 단편 < 알레고리 >(2024)와 레오 까락스의 단편 < 잇츠 낫 미 >(2024)가 동시대 영화 이미지의 존재론적 탐구라는 주제의식과 레오 까락스라는 공유점으로 매끄럽게 묶여 개봉하는 상황은 시네필을 위한 친절한 배려이자 선물이지만, 아무래도 이런 호의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잇츠 낫 미> 중 그러니 이와 같은 유물의 소환을 다른 말로 ‘교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올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던 또 하나의 사례가 떠오르는데, 다름 아닌 <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2023), <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2023)와 같은 작품의 예상치 못한(?) 흥행이 그것이다. 솔직히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는 자신이 없지만, 일개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떠올려볼 수는 있겠다. 개인적으로 이 세 작품의 흥행은 작품들이 그 자체로 특별한 자질을 품고 있다는 항구적인 특징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시대적인 요구에 의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저 세 편의 영화를 보고 사회적이든 미학적이든 정치적이든, 영화를 통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접했지만, 그 수많은 말들 속에는 왜인지 ‘나’의 시선이나 감상보다는 대체로 객관과 분석의 언어로 가득했다. 차이밍량은 “상업영화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이고, 예술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 ‘예술영화’들을 보고 나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했던 것 같다. <괴물>, <추락의 해부> 중 이제 영화관은 문자 그대로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라는 무맥락적인 성격이 아니라, 지나간 걸작을 만날 수 있는 시네마테크, 혹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네마천국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속에서 오래된 영화들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나’와 무관한 역사로 간주되거나, 반대로 ‘나’의 그때 그 시절 향수에 젖어드는 정서적 힐링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일까? ‘재개봉’이라는 말로 너무 이르게, 혹은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늦게 찾아온 과거의 영화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례를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비단 올해만 그렇지는 않지만, 영화관에는 전통적 의미의 영화 대신 다른 영상물이 걸린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제목을 짚지 않더라도, 가령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는 아이돌 콘서트 실황 영상이나 스포츠 중계 등은 코로나 이후 극장 수입에 있어 효자 상품이었다. 그런데 누가 보러 가는가? 당연히 해당 작품이 다루는 대상의 팬들이 보러 간다. 그러니 팬들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주변의 지인들 중에서 같은 종류의 영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타겟팅 기획물 중 올해 가장 성과가 좋았던 작품은 김덕영 의 < 건국전쟁 >(2023)이다. KOBIS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117만 관객을 동원하며 2024년 한국에서 상영된 독립예술영화 분류 작품 중 관객 수 1위를 기록했다. 이승만이라는 아이돌과 태극기 부대를 중심으로 한 팬덤 문화가 만들어낸 기념비적 성과라고 불러야 하겠다. 불현듯 “태극기 부대 속에 들어가서 <건국전쟁> 보기”라는 기획으로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그런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볼 사람과 보지 않을 사람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상품이다. 말하자면 죽음의 이지선다! 바이로이트 극장의 내부를 그린 삽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19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기존의 오페라를 상연하던 극장을 완전히 탈바꿈하며 바이로이트라는 이름의 극장을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호화로운 장식이나 발코니석 같은 부수적 기물을 전부 떼어버리고, 바닥을 깊게 파서 오케스트라를 안쪽으로 은폐하여 관객들이 오로지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관객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그너의 이 미학적 파시즘의 설계는 이후 영화관의 메인 모델로 채택되었고, 그를 총애했던 히틀러의 정치적 파시즘과 짝꿍을 이루며 < 의지의 승리 >(레니 리펜슈탈, 1934)와 같은 걸작으로 당시 독일 인민들의 정신을 통합해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자장 속에서, 쉽게 ‘우리’라는 말을 꺼내고 싶게 하는 환경 속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OTT 플랫폼에 둘러싸인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작품을 보는 식이었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식 관람 환경 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옆 사람이 무얼 보든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2024년을 돌아보면서 불현듯 영화관 모델의 역사를 떠올린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죽음, 극장의 죽음, 무엇보다 우리와 각자의 문제. 혼란스러운 연말 시국 속에서 그 말들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결산이 아니라 진행이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90년의 역사: 광주 지역 최초의 조선인 대상 상설관으로 출발하다 광주극장은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46번길에 있는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1일에 개관했다. *주1 광주의 향토극장으로는 지금은 사라진 ‘무등극장’을 비롯, 두 개 정도의 극장이 더 있었으나 이제는 오롯이 광주극장 하나가 남아있다. 광주극장은 현존하는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자, 인천의 애관극장 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극장이다. 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관극장으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 할 수 있다. 개관 이후 거의 90년의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광주극장은 단순한 극장이 아니며 영화인들은 물론 광주시민, 지역주민들에게 그 공간 자체가 갖는 가치와 상징이 크다. 광주극장이 광주 지역 최초의 극장은 아니다. 광주극장 이전 광주좌와 제국관 , 광남관 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극장은 일본인 극장주가 경영을 하였고, 주된 대상 관객 역시 광주에 있던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대상의 극장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1928년부터 광주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영화관 설립의 불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세워지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어, 1935년에야 조선인이 극장주가 된 광주극장이 개관했다. 광주극장이 세워진 위치 자체도 조선인들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에 그 의미가 더 컸다. 원래 충장로에서 남해당이라는 큰 상점을 경영하던 이준실이란 사람이 광주극장을 계획했는데,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학교법인 유은학원의 설립자이자 만석꾼이었던 최선진에게 건축 중인 건물을 넘겼다. 최선진은 1933년 30만원의 자본금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35년 1,250명 수용 규모의 광주극장을 개관했다. 광주극장의 역사를 1933년으로 헤아리는 것은 법인이 설립된 해 기준이다. 현재까지 그 자손들이 광주극장 건물의 소유주이자 서류상 광주극장 대표로 되어 있다. 광주극장 1층 로비와 출입문 광주극장은 충장로 5가에 위치했는데, 충장로 1가, 3가는 일본인들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반면, 5가는 조선인들 상권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었다. 즉 충장로 5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선인들의 접근성이 높았는데, 조선인의 자본으로 조선인이 세우고 직접 운영하다보니 조선인들을 위한 문화적 공간이 되었음은 물론, 단순한 극장을 넘어 민족적이면서도 지역의 구심점이 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광주극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영화 상영 외에도, 창극이나 판소리 등의 공연, 조선인 단체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면서 조선인 지역극장의 정체성을 지켰으며, 해방 후에는 김구의 강연회를 포함한 정치집회, 음악회, 연극제를 여는 등 문화교육운동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역극장으로서의 특성은 일제의 감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는데, 그 검열의 흔적은 아직도 극장 안에 남아있는 ‘임검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검석이란 상영이나 공연이 진행되는 현장을 점검하는 검열관들을 위해 만든 좌석으로, 임검은 사전 검열과는 다른 별도의 행정 단속 절차였다. 또한 호남지역 최초로 한국인이 세운 극장이었기에 일본인 소유의 극장에서는 올리지 않는 영화들인 < 홍길동전 >(김소봉, 이명우, 1935)과 < 춘향전 >(이명우, 1935) 등과 같은 영화를 광주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광주극장 내 남아있는 임검석 1968년, 극장에 큰 화재가 나서 건물 대보수를 했고 1968년 10월 4일 재개관했는데 현재의 광주극장(864석)이 재개관한 광주극장 건물을 그대로 유지 보수하여 쓰고 있다. (1997년에는 내부 좌석 교체와 개보수 및 건물 전면 일부를 변경) 화재 당시 건물이 타면서 극장 안에 보관 중이던 1968년까지의 자료도 함께 불타버린 점이 가장 큰 손실이다. 예술영화 전용관이 되다 광주극장이 지금처럼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98년 6월, 극장이 학교보건법 상 정화구역 내 유해업소로 지정되어(15m 안에 유치원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진 이전 하거나 2000년 12월 말까지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광주극장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야 예술영화 프로그램을 신설해 다른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 교육청은 행정명령 불이행으로 극장주를 검찰에 고발했고, 극장 측도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면서 맞섰다. 결국, 2004년 5월 27일, 헌재는 학교정화구역에서의 극장 영업을 금지한 학교보건법 관련 조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영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광주극장은 2016년경 한 번 더 위기를 맞이한다. 광주극장은 2002년부터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왔다. 그러다 2016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 전용관 사업’이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사업’으로 바뀌었는데, 위원회가 정하는 영화의 상영 기준을 충족하는 영화를 상영해야 지원을 하는 제도였다. 광주극장은 이 방침을 ‘사전검열’이라고 보고 지원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만의 특색과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운영 수익의 35%를 차지하는 지원금이 막히면서 광주극장은 극장 유지에 고비를 맞게 됐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후원회원 모집’ 캠페인을 진행, 현재 약 450여 명의 후원회원을 두고 있다. 현재는 영화진흥위원회와 광주광역시의 사업 보조금, 그리고 광주극장 후원회원의 후원금으로 운영 중이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광주광역시 동구청은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광주극장 살리기에 나섰다. 광주 지자체 최초로, 고향사랑기부제의 구체적인 사용처를 적시한 프로젝트다. 광주극장 상영관 1층 내부 전경 광주극장은 관객의 영화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영화 시작 전에 상업광고는 절대 하지 않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조명을 켜지 않는다. 비좌석제라서 들어가서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면 되고, 지금도 필름 영사기를 보관하고 있어서 일 년에 3~4번 정도는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20년 이상 극장에서 일하셨던 영사기사 두 분이 디지털과 필름 영사기를 돌리며 극장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역사를 간직한 채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광주극장에 들어서면 극장 곳곳에는 극장 역사를 알 수 있는 많은 기록과 자료, 기자재들이 가득하다. 아이스크림을 팔던 기계, 영사기, ‘개봉푸로’라고 적힌 오래된 안내판, 극장 간판을 그리는 박태규 화백의 작은 간판 작품이 놓여 있다. 박태규 화백은 1992년 광주극장에 입사하여 2004년까지 간판을 담당했다. 마지막 직함은 간판실 부장이었다. 박태규 화백은 단순한 간판 화가가 아니라, 민중미술가로서도 활동해 왔는데 최근에는 간판 미술을 전시하고 교육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2015년부터 광주극장과 함께 영화간판시민학교를 운영해오고 있다. 영화간판학교의 결과물이 전시된 광주극장 전면 포스터대 한편 광주극장은 극장 뒤편 관사를 개조한 영화의 집에 건립 당시의 극장 전경과 주변 거리 풍경이 담긴 사진첩과 그동안 광주극장을 거쳐 간 많은 사람의 근무기록부, 영화 및 공연 기록, 입장권 수불표 등도 보관하고 있다. 1960년대는 영화 상영 전 아나운서가 멘트를 하고 영화를 상영했는데 아나운서 멘트 노트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극장 자체가 영화박물관인 셈이다. 지금은 광주의 구도심이 되어 버렸지만 예전에 많은 한복집과 보석상들이 자리 잡았던 광주 충장로 골목은 해방 이전에는 호남상권의 중심으로 전성기를 보냈고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호남 사람들의 중심지이자 번화가의 역할을 맡아, 지금도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2020년 광주광역시 조사 당시 광주에서 30년 이상 된 가게 160곳 중 120곳이 충장로에 모여 있었는데, 이는 충장로에 위치한 가게가 2,000여 개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1935년 시작하여 90년 가까운 시간을 지켜온 광주극장에 이어 1946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전남의료기상사가 아직도 충장로 5가에 있으며, 이외에도 충장로의 흥망성쇠를 보고 자라며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가게도 많다. 충장로의 오래된 가게는 그 자체로 지역민들에게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광주극장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애정과 호응 역시 광주극장이 위치한 거리의 특성과 더불어 개관 당시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2020년 광주시 동구는 광주극장 옆 골목길을 ‘영화가 흐르는 골목’으로 조성하였고, 나아가 광주극장과 문화공간 ‘영화의 집,’ 독립서점 ‘소년의 서’ 등 골목에 소재한 문화자원을 적극 활용해 광주극장 인근 골목을 영화·문학·문화가 흐르는 광주의 대표 예술 골목으로 재탄생시킨 바 있다. 원래 광주극장 옆 골목길은 쓰레기가 넘치고 악취가 많이 풍겼는데, 박태규 화백이 직접 그리는 손간판뿐 아니라 광주의 극장 문화사를 담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전시하여 거리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영화가 흐르는 골목 벽면 전시-광주의 극장문화사 광주극장은 시네필들의 성지나 광주의 가장 오래된 극장(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극장)이나 랜드마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이자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소비자가 자부심 느끼며 영화와 공간을 모두 이용하는 상징적 소비를 하는 극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46번길 10 2. 설립일 : 1935년 10월 1일 3. 대표자 : 최용선 4. 규모 : 연면적 2,264.85㎡, 대지면적 1,286.6㎡, 건축면적 999.4㎡ / 지하 1층, 지상 4층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수) : 1개관, 856석, 장애인 좌석 30석 6. 운영시간 : 10:40 – 22:00 7. 입장료 : 성인 1만원, 청소년 9천원, 조조 8천원, 실버·장애인·초등학생·CMS 후원회원 7천원, 패키지 티켓(1인 사용) 5편(2개월) 4만원, 3편(1개월) 2만 7천원 8. 조직 구성 대표(최용선, 극장주), 전무이사(김형수, 실질적인 운영), 영사실장(정홍주), 매표직원 2인(비정규), 미술실 박태규 화백은 ‘영화간판학교’ 프로젝트로 참여 글/진행 : 김문경 사진 : 허 성 취재 일자 : 2023년 7월 27일 *** 주1. 위경혜의 연구에 따르면 10월 1일에 낙성을 하고 10일에 개관식을 했다고 한다. 위경혜, 『광주극장: since 1933』,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8, 46쪽. 이하 이 글의 상당 부분 내용은 이 책을 참고로 했음을 밝힌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존 중인 한국영화필름 중 최초의 국내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는 신동헌 화백의 < 홍길동 >(1967년 작)이다. 동생인 신동우 작가가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제작된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애니메이션 강국인 미국, 일본의 영향력 속에서도 < 로보트 태권V >, < 아기공룡 둘리 >, < 뽀롱뽀롱 뽀로로 > 등 우리만의 특색과 아이디어를 지닌 다양한 작품들을 꾸준히 만들어 온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의 첫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애석하게도 <홍길동>의 필름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2008년 애니메이션 연구자 김준양 선생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극적으로 발굴됐다. 물론 이 필름은 일본어 제목과 일어 성우 더빙을 거친 현지 판본이기도 했고, 2008년 당시는 한국영상자료원의 필름 디지털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나 아직 경험과 기술을 쌓아 나가야 하던 시기이기도 했으므로, 디지털로 변환한 디지털시네마가 1차적으로 공개됐고 본격적인 디지털 심화복원 작업은 훗날로 미뤄졌다. 무엇보다도 한동안은 극영화 필름의 디지털복원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했으므로, 한국영상자료원은 2021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애니메이션 필름을 디지털복원 하게 됐고, 첫 작품은 당연히 <홍길동>이어야 했다. 1960년대의 셀 애니메이션 필름은 극영화 필름과 달리 계조가 단순하고 색 면의 형태를 띠므로 디지털복원 작업도 비교적 수월하리라는 예상은 뜻밖에도 처음부터 어긋났다. 우리는 극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원본’의 범위가 전혀 다른 기준에서 정해져야 한다는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혼란에 빠졌다. 극영화 필름의 얼룩과 잡티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던 반면, 초기 애니메이션 제작에 쓰이던 재활용 셀에서 보이는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원본 특성의 일부로 볼 수도 있었다. 채색의 독특한 질감 또한 함부로 변형시키면 안 될 것이었고, 반면에 이 셀들이 필름에 인화된 후 필름 자체에서 발생한 얼룩과 흠집들은 어떤 면에서는 적절히 구분하여 제거할 필요도 있었다. 게다가 여러 레이어가 겹쳐진 컷에서 그 복잡도와 작업의 난이도는 훼손이 심한 극영화 필름 못지않았다. 아울러 여러 세대를 거쳐 인화되면서 그레인이 누적되고 먹선이 흐려진 필름 화면에서 셀화의 느낌을 최대한 되살리기 위해 수차례의 테스트와 시사도 필요했다. 또 다른 이슈는 일본 상영에 맞게 변형된 <홍길동> 필름으로부터 한국 국내 개봉 당시의 형태를 최대한 복원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한국영상자료원에는 <홍길동>의 한국어 음향 필름이 간직되어 있었으므로 일본판 필름이 발굴된 후에 대부분의 일어 성우 더빙 음향을 기존의 한국어 음향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타이틀, 오프닝 크레디트, ‘끝’ 자막이 모두 일본어로 삽입된 화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참고할 자료가 전무할 경우 유실된 부분을 최대한의 고증을 통해 제작, 재현하는 오늘날의 필름 아카이브의 관례에 따르기로 했다. <일본판의 오프닝 타이틀과 엔딩 타이틀> <포스터 이미지에서 추출하여 복원한 오프닝 타이틀> <엔딩 타이틀> 오프닝 타이틀은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인 <홍길동> 포스터의 캘리그라피를 기준으로 디자인했다. 자모의 열린 구조와 역동적인 경사 형태를 살리기 위해 끝 선의 질감을 디테일하게 다듬어 화면의 제 위치에 합성했다. ‘끝’ 자막은 같은 감독이 같은 해에 연출한 작품이자 <홍길동>의 속편 격이라고 볼 수 있는 <호피와 차돌바위>의 경우를 참고하여 제작했다. 동시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끝’ 자막은 조금씩 다양한 디자인과 효과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 경우 정황상 기존의 제작 기조를 거의 변함없이 유지했으리라 판단하여, 장평이 다소 넓고 꽉 찬 사각형으로 육중한 느낌을 주는 <호피와 차돌바위>의 한글 ‘끝’자를 <홍길동>에 적용했다. <크레디트 자막 디자인> 어쩌면 가장 까다로울 수 있는 부분이 오프닝 크레디트였다. 일본판 필름은 한국 제작진 부분의 크레디트가 한자로 표기되어 있었고 일본어 성우진의 크레디트가 장시간 이어지도록 편집돼 있었다. 국내 개봉판에 없었을 일본 성우들의 크레디트는 삭제하면 될 일이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우선 개봉 당시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분들의 기억에 의존한 구술과 기타 여러 정황을 미뤄볼 때, 한국 개봉판은 동일한 배경 화면에 동일한 한국 제작진이 한글로 표기됐으리라 추정할 수 있었다. 한편 <홍길동> 포스터에서 크레디트를 표기한 글씨체는 일본판 한자 글씨체와 공통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보였다. 넓은 장평과 하부, 획 끝을 둥글고 부드럽게 처리한 점, 활자 인쇄라기보다는 손으로 적은 느낌이 드는 획의 직선 부분 등이 그랬다. 따라서 일본판 크레디트의 글씨체가 지닌 색감, 번진 느낌의 음영을 동일하게 살리고 국내 포스터의 한글 글씨체 모양을 모사하여 크레디트 글씨체를 디자인했다. 재생 중인 필름 특유의 불규칙적인 그레인 변화와 미세한 배경 떨림, 음영 차이 등을 살리기 위해 일본판의 원색 크레디트 배경을 프레임단위로 수정하여 복원된 자막 뒤로 그대로 옮겨와 작업했다. 장편 애니메이션 필름 <홍길동>을 제작하던 당시, 국내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의 경험이 거의 없었으므로 신동헌 화백과 그의 스태프들이 열악한 여건 속에서 연구와 실험을 병행하면서 색감과 질감 표현에 대한 기준을 마련했다고 한다. 셀에 일일이 붓으로 쌓아올린 채색의 아름다움이 상당하다. 특히 어두운 밤중 길동이 야행을 하는 장면들에서 달빛에 어스름히 보일 듯 말 듯 한 어두움, 그 어둠속에서도 달빛 그림자가 주는 미세한 심야의 음영이 보여주는 색과 질감의 표현은 압권이다.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일반적인 시대지만 이런 셀 애니메이션만이 주는 미학과 풍부한 정서가 있다. 어쩌면 살아가며 경험하지 못했을지 모를, 고전 필름들의 영화적 체험과 감동을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복원팀은 경기 파주 모처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글 홍하늘(영상복원팀) 편집 김기호(학예연구팀)
어렸을 때 작은 외삼촌과 함께 < 빨간 마후라 >( 신상옥 , 1964)를 봤다. 마포 극장에서 리바이벌 상영이었다. 극장은 입추의 여지없이 만원이었다. 나관중 소령( 신영균 )이 부상을 입은 채 불타는 비행기를 몰아 다리 폭파의 임무를 완수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애가 닳았다. 전쟁이 끝난 후 에필로그, 시민들 앞에서 전투기들이 쉭 쉭 소리를 내며 곡예를 할 때 어린아이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나는 공군이 될 거야요. 이 다음에 커다랗게 자라면...”으로 시작하는, 육군, 해군, 공군으로 번갈아 바꿔 당시 아이들이 자주 불렀던 노랫말처럼. 다시 본 <빨간 마후라>는 클리셰 덩어리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불쑥 뚫고 튀어나오는 감독이자 제작자 신상옥의 기개가 화면에 넘친다. < 성춘향 >(1961)의 기록적인 흥행 성공 이래 충무로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힌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림은 작은 방송국과 맞먹는 규모였지만 <빨간 마후라>가 극장에서 흥행할 때 부도를 맞을 만큼 경영상태는 오락가락했다. 신상옥의 그릇은 할리우드식 스튜디오를 지향했으나 한국영화산업의 형편은 영세했고 전근대적이었다. 생전의 사석에서 신상옥 감독을 뵈었을 때 그는 지방 극장들에서 수금액이 제때 올라오지 않아 늘 자금난에 시달렸다고 회고했다. 그런데도 <빨간 마후라>는 한운사 집필의 원작료만으로 당시 영화 한 편의 제작비에 준하는 금액을 썼고 공중전 촬영에 세 대의 카메라를 동원했으며 당시 한국영화 표준이 흑백이었던데 반해 화려한 색채 필름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전투기들이 사천 기지에서 강릉 제10 전투 비행대로 향한다. 씩씩한 음악은 휘파람 소리로 바뀌고 묵직한 남성 중창의 주제가 ‘빨간 마후라’가 흐른다. 배대봉 중위( 최무룡 )를 비롯한 아홉 명의 젊은 조종사가 전대장에게 신고를 한다. 홍길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전대장은 모두에게 빨간 마후라를 나누어주면서 말한다. “전투나 사랑이나 비겁하지 말아라!” <빨간 마후라>에는 오글거리는 대사가 많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군인이 하는 대사가 많고 인간의 정념이 드러나는 대목에선 예외 없이 감상주의가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그 감상주의를 있는 힘껏 부정하는 또 다른 감상으로 틀어막는다. 이를테면 조종사와 벼락 결혼했다가 과부가 된 지선( 최은희 )를 연모하는 조종사 배대봉은 실의에 빠져 지내다 새 출발을 결심한 지선의 이사를 도와주는 장면에서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저희들 조종사들은 오늘만을 생각합니다. 내일은 알 수 없는 거고 오늘을 충실히 살기 위해서는 어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살기로 했었는데 이젠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럼 죽어야겠죠.” “네?” “그러나 살아 주십쇼. 제발.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는 겁니다. 자기만이 비극의 주인공인 것처럼 제발 생각지 말아 주십쇼.” 이런 장면 다음엔 가차 없이 출격에 나선 전투 비행단의 장면이 이어지고 화면엔 전투기 굉음과 그들이 창공을 횡단하는 수평과 수직의 움직임이 빠른 속도로 교차 된다. 매번 전투는 예상치 못한 질곡에 빠지고 누군가는 전투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며 누군가는 구사일생의 기회로 살아난다. 신상옥의 회고에 따르면 이 영화는 공군의 비협조로 애를 먹으며 찍었다. 비행기 조종간에 카메라를 설치해 전투 장면의 박력을 담아내려 했던 시도가 웬만한 장편영화 한 편 분량의 필름만 소모하고 실패하면서 신상옥이 직접 잡은 카메라는 정교한 사전 계획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대다수 전투 장면을 담아낸다. 화면에는 하늘에서 선회해 지상으로 다가오는 전투기들을 마치 실제 전투에서 맞닥뜨린 것처럼 다급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절박함이 담겨 있고 예전 기록 필름에서 가져온 듯한 북한군의 사격장면조차도 그 절박함에 응대하는 느낌을 준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군 편대를 하늘에서 쫓아다니며 황망하게 찍어낸 듯한 숏들이 기록영화적 질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이 하늘의 드라마와 병치되는 지상의 드라마는 급박한 전투 장면의 리듬만큼이나 빠르고 느닷없다. 나관중은 동료 고도원이 이북 출신 여성 지선과 벼락 결혼을 한 뒤 전투에서 사망한 걸 가슴 아파하며 지선의 안위를 위해 후배 배대봉 중위가 지선과 사귈 것을 권유한다. 고도원과 지선, 배대봉과 지선의 사랑이 지상의 드라마로 전개될 때 나관중은 그들의 보호자, 나아가 모든 후임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전투에서 죽어야 할 운명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가 죽은 뒤 그가 생전에 쓴 유서에는 “나는 전쟁에만 필요한 놈이다. 나 같이 무식하고 더럽고 쓸모없는 인간은 빨리 없어지고, 순수한 너희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너희들은 자라나라, 나는 그 밑에 깔릴 재다, 거름이다.”라고 적혀 있다. 신상옥은 자신의 대표작인 이 영화를 ‘반전영화’라고 자평했으나 거기에는 카레이싱에 임하는 카레이서의 심정에 준하는, 죽음의 경계에 임박해서야 삶의 절박함을 느끼는 살아 있는 자들의 흥분과 절망이 있다. 그것은 여자들의 보호자를 자임하면서도 여자들의 보호를 원하는 남성들의 이중적인 욕망과 겹쳐 있는데 이 모순을 헤집는 것은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들의 거침없는 속도와 에너지일 것이다. >> 빨간 마후라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로보트 태권브이>와 <외계에서 온 우뢰매>로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 영화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김청기 감독.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58년 18세에 단행본 만화를 발간하며 만화작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펜싱만화 <무적의 오프린>인데 펜싱영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그린 뒤 무작정 아리랑 문고를 찾아가 출판한 작품이었다. 당시 이화여대 근처에 인쇄소와 만화 총판들이 있었는데 만화책이 인쇄되어 나오면 자전거 부대가 각 동네의 대본소에 배달하는 방식으로 만화책이 유통되었다. 그래서 그는 때로 자전거부대가 대본소에서 신발주머니에 받아온 동전으로 작가료를 받기도 했다. 그가 만화작가 활동 중이던 1961년 5.16 이후 출판만화에 대한 검열이 생겨나 소재와 표현방법에 있어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예를들어 풍속에 위배 되기에 부모에게 반항적인 인물을 묘사할 수 없었고 한 컷 안에 총과 칼을 겨눌 수 없었으며 ‘이놈’, ‘이 새끼’, ‘이 자식’이라는 단어는 쓸 수 없었다. 결국 극적인 악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만화에 대한 공격은 심했고 어린이, 청소년 문제는 모두 만화 탓으로 돌려졌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작화가 서툴거나 느린 만화가의 그림 작업도 겸하며 수입 좋은 잘나가는 만화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59년 세기극장에서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를 본 뒤 그는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림1)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의 한 장면 196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신동헌)의 흥행을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방학시즌을 노리고 대거 제작된다. 그는 박영일의 애니메이션 영화 <손오공>(1968)과 <황금철인>(1968), <보물섬>(1969) 및 TBC 방송 애니메이션 <황금박쥐>(1968)의 원화 및 동화가로 참여한다. 그는 1968년 최초의 단편 애니메이션인 <개미와 베짱이>(1961)를 만든 박영일을 감독으로 세기상사가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인 <손오공>에 처음 참여했다. 작화가들 모두 만화를 그린 경험이 없는 시각디자인과 출신이다보니 작업이 도안 그리듯 늦어졌다. 결국 손이 빠른 그가 하룻밤에 120장씩 그리며 작업을 진척시켰다. 심지어 밑그림 없이 셀에 곧바로 동작을 그려낼 정도로 그의 작업속도는 빨랐다. 기여도가 커지자 월급 6천 원이 8천 원으로 올랐다. (그림2) <손오공>(박영일, 1968) 포스터. 그는 이 작품에 동화작가로 참여했다. 그는 <손오공> 제작 중에 TBC 방송국의 제안으로 TV애니메이션 <황금박쥐> 작업에 참여한다. TBC 방송국이 동화부를 두고 일본만화의 하청작업을 시작했을 때이다. 하지만 1초에 8장을 사용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었고 일본에서 지시받은 그대로 작업해야 했기에 그로서는 배울 것이 없었다. TBC에서는 월급 1만 3천 원을 받았지만 그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세 달 만에 나와 다시 <손오공> 제작 현장으로 돌아갔다. 이때는 월급으로 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만원이면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림3) <황금박쥐>(1968년 TBC방영)의 한 장면 그는 세기상사 제작의 <손오공>, <황금철인>, <보물선>에 참여할 때 세기상사가 수입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 <걸리버 여행기>(1939) 등의 필름을 보고 실사영화와 비교, 분석했다. 움직임을 기계적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 리듬을 고려해야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림4) 그가 작업한 애니메이션 광고의 한 장면 삼성제약 <판토> (그림5) 롯데 라면땅 <황금박쥐>편 그림이 빠르고 애니메이션 작업 경험이 있는 그에게는 곧 많은 기회가 생겼다. 애니메이션이 들어가는 광고와 문화영화 등의 작업과 연출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는 1970년대 초 보림영화사, 선진문화사에 입사해 방송 CF, 각종 타이틀백, 문화영화, 기록영화에 사용되는 애니메이션을 맡아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이 잘 맞지 않아 유현목 감독의 문화영화사인 유프로덕션으로 옮겨가 프리랜서로 일한다. 유프로덕션에서 때로 기록영화와 문화영화를 맡아 자율적으로 자기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청년 감독들이었던 김호선, 하길종, 홍파 등과 교류하며 실사영화에 대한 흐름을 익히게 된다. 하지만 주요수입은 광고 스토리보드였다. 최고의 광고기획사였던 제일기획, 한일기획의 감독들이 집까지 찾아와 스토리보드를 그려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그는 인기 있는 작가였다. 감각있는 그의 스토리보드만이 광고주에게 쉽사리 통과되었기 때문이었다. 종합적으로 그는 이즈음 CF나 문화영화 한 편을 온전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즉, 스토리와 구성, 작화, 음악, 녹음까지 가능한 연출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 준비가 되었다. (광고경험으로 그는 편집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이런 감각은 빠른 속도감으로 탄생했다. 당시 극영화는 700커트 정도였는데 <태권브이>는 1200커트였고 예고편 3분짜리가 극영화 20분 분량의 커트 수였다.)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는 애니메이터 육성을 위한 키프로덕션을 용산에 만든다. 키프로덕션에서 그는 중앙정보부로부터 통일전선에 대한 애니메이션을 수주받아 납품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 제1땅굴이 발견되자 아이디어를 얻어 <똘이장군>의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중앙정보부의 지원을 받아 완성, 개봉시키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1974년 박영일과 디즈니를 목표로 애니메이션 회사 서울프로덕션을 광화문에 설립한다. 우선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CF를 작업을 하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던 중 1975년 박영일 감독이 서거한다. 결국 그는 홀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도한다. 마침 TBC 방송에서 상영한 애니메이션 <마징가>가 일본만화인지 모른 채 어린들에게 인기를 끌고 완구가 마구 팔리는 등 애니메이터로서 경각심이 생겨나던 차였다.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화영화 라이센스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친분이 있던 유프로덕션을 찾아갔다. 유현목 감독은 지상학 작가의 시나리오 “마징가 태권”을 그에게 권했다. “마징가”라는 주인공 설정이 불쾌해 거절한 그는 제목부터 바꾸고 스토리도 지상학 작가과 함께 한 달간 새롭게 만들며 아이디어와 스토리를 글이 아닌 콘티로 풀어나갔다. 워낙 그림으로 생각하는 게 편하고 빨라 심지어 실제 작업에서도 원화 없이 바로 작화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로보트 태권 V>는 1976년 초 제작에 들어가 그해 7월 21일 개봉했다. (그림6) <로보트 태권 V> 얼굴 이미지 ‘태권 V’라는 설정은 ‘마징가에 대응할 우리 것을 뭘 하면 좋겠는가’라는 고민 속에서 탄생했다. 당시 태권도 액션 영화들이 등장하고 태권도가 군인들에게 국기로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주변의 반응 또한 ‘태권도라면 괜찮다. 제목이 좋다’ 였다. ‘태권 V’의 이미지는 사무실이 있던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힌트를 얻었다. 당시 모든 학교에 장군의 동상이 있을 정도로 군부정권은 정권의 정통성을 만들어내고자 무장 출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성웅화 작업에 열심히였다. 그래서 그는 국난의 영웅 중 최고로 칭송받는 이순신 장군에서 모티브를 따와 근엄하고 멋진 이미지를 태권브이에 심어줬다. (그림7,8) <로보트 태권 V> 중 훈이와 마사오의 대련장면 <로보트 태권 V> 대결장면도 월트 디즈니의 책을 참고해 <백설공주>의 ‘로토스코핑 기법’ 즉 실사영화로 찍은 뒤 화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왕호 도장 유단자들과 유승선이 선릉에서 대련하는 것을 16미리 카메라로 찍고 편집한 뒤 그대로 그려 훈과 마사오의 대련장면에 사용해 리얼한 연출 효과를 냈다. (그림9) <로보트 태권 V>의 캐릭터들 왼쪽부터 윤박사, 악당 카프박사, 훈이, 깡통로봇 철이, 카프박사가 만든 인조인간 메리, 영희 <로보트 태권 V>는 태권도를 하는 로보트 외에도 컴플렉스가 심한 ‘카프 박사’, 인간이 되고 싶은 안드로이드 ‘메리’, 엉뚱하지만 친근한 ‘깡통로봇 철이’ 등 캐릭터 하나하나가 굉장히 흥미롭다. 이중 ‘메리’는 매력과 연민을 지닌 복합적인 캐릭터였다. 당시 <6백만 불의 사나이>(1976년~1978년 TBC 방송), <소머즈>(1976년~1978년 MBC 방송) 같은 사이보그 캐릭터들이 인기를 끌어 ‘메리’라는 인조인간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예쁜 여자아이가 도둑질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도덕적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검열을 피하기 위해 선한 설정을 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케이스다. 깡통로봇 철이는 그가 어린시절 학교의 큰 주전자를 보며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캐릭터를 재현한 결과물이다. (그림10,11) 안드로이드 메리와 깡통로봇 철이 <로보트 태권 V>의 음악은 최창권이 맡았는데 금관, 목관악기 편성을 잘해 음색이 깨끗하고 화려했다. 활기찬 주제곡 또한 인상적인데 태권브이 주제가는 최창권의 큰아들인 가수 최효섭이, 깡통로봇 주제는 작은아들이 불렀다. 효과는 김벌래가 담당했다. OST도 발매해 좋은 반응과 큰 수익을 얻었다. <로보트 태권 V>시리즈는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적을 북한을 의미하는 붉은 제국으로 설정하는 등 반공정신이 투철한 작가의 작품으로 인식시키려 했지만 <로보트 태권 V 제2탄 우주작전>에서 3분 20초 즉, 일주일의 작업분량을 삭제해야 했다. 일본 선수 마사오와 훈이 대결하는 장면에서 마사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데 장발이었다는 이유에서 삭제됐던 것이다. (그림12) <로보트 태권 V 제2탄 우주작전> 마사오의 머리길이가 보이는 장면이다. 애니메이션에서도 장발단속이 행해져 바람에 날리는 마사오의 장발이 삭제되었다. <로보트 태권V>는 극영화처럼 지방투자자의 투자금으로 제작비를 충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CF 스토리보드로 직접 돈을 모아 대부분 자비로 제작했다. 처음에는 18,000매로 계획했다. 일본 TV만화영화가 30분에 4,000매가 들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많은 18,000매면 1시간 16분 정도를 유연한 동작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제작에 들어가자 32,000매가 필요했고 이 숫자는 작화 뿐 아니라 트레이싱, 컬러링, 셀까지 이어지다보니 각각의 재료비가 예상보다 훨씬 많이 들게 되었다. 총제작비 4500만원 중 유현목 감독으로부터는 지방투자자에게 단매하고 받은 진행비 200만 원과 후반 작업비용을 제공받았다. 나머지 금액은 김청기 감독의 사비로 빚을 져서 해결했다. 당시 애니메이션 재료들이 고가였고 또 많이 부족했기에 셀은 군사용 항공 필름과 엑스레이 필름을 구해 물에 불린 후 하이타이로 닦아서 사용했다. 종이며 연필 모두 질이 안 좋아 마루펜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다. 포스터 칼라도 국산은 색을 배합하면 색감이 탁해지는 등 재료에서 오는 고통이 컸다. (그림13) <로보트 태권V> 신문 광고 (그림14) <로보트 태권V) 개봉일 대한극장 앞에 즐비한 관객들 (그림15) <로보트 태권V) 극장 매표소 앞 행렬과 매진표시 작품을 완성시켜 개봉할 때도 고통은 이어졌다. <로보트 태권V> 1탄은 대한극장에서 개봉했는데 극장의 횡포가 심했다. 표돌리기로 극장은 관객수를 줄였고 상영중단 커트라인이 1200명이었지만 개봉 21일이 되자 1800명이 들어도 간판을 내리게 했다. 현금으로 수입을 챙긴 극장은 제작사에 어음으로 대금을 줬다. 그가 최종적으로 얻은 수입은 유현목 감독과 서울흥행수입 절반을 나눈 것이 전부였고 유현목 감독은 서울흥행수입의 절반과 부산흥행 수입을 가져갔다. 결국 그는 빚을 다 갚지 못해 당시 1800만원 상당의 사당동 단독주택을 팔아야 했다. 극장의 횡포에 부당함을 느낀 그는 <로보트 태권 V> 3탄부터 극장이 아닌 시민회관에서 개봉하며 어린이 영화의 새로운 흥행 관행을 만들어냈다. (그림16) <똘이장군> 포스터 그는 <똘이장군>(김청기, 1979)에서 수익을 냈고 <로보트 태권V>로 얻은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키프로덕션 시절 기획했던 이 작품은 『정글북』과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소재에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동아광고에서 대명해 제작했고 제작비의 일부는 지방 선판매로 해결했다. 개봉관 상영이 힘들어 서울 2번관 서너 개를 잡았는데 오히려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똘이’ 라는 이름은 <코주부> 김용환 선생의 <똘똘이의 모험>을 참고해서 지은 작명이다. (그림17) <혹성 로보트 썬더 A>(김청기, 1982) 포스터 그는 <똘이장군>의 흥행이 성공한 후 다시 로봇만화로 돌아온다. 로봇만화가 나오면 각종 완구들이 덩달아 인기였는데, 완구업체 ‘뽀빠이과학’은 <로보트 태권 V와 황금날개의 대결>(김청기, 1978)부터 완구를 만들어 수익을 보고 있었다. <혹성 로보트 썬더 A>(김청기, 1982)때부터 완구업체 ‘뽀빠이과학’은 독점 판매권을 얻고자 김청기 감독에게 제작비의 일부를 대고 판권을 사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완구 모델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할 때라 뽀빠이과학은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합체로봇을 가져와 “이런 모델로 영화를 만들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영화화되지 않는 모델일 경우에 한해 제안을 받아들였고 조금씩 변형시켜 작품에 사용했다. 회사를 유지하고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뽀빠이과학의 투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뽀빠이과학은 제작비의 3분의 1 정도를 부담했다. (그림18) <초합금 로보트 쏠라 원투쓰리>(김청기, 1982) 포스터 (그림19) <로보트군단과 메카3>(김청기, 1985)의 한 장면 (그림20) <똘이와 제타 로봇>(김청기, 1985)의 한 장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합금 로보트 쏠라 원투쓰리>(김청기, 1982), <로보트군단과 메카3>(김청기, 1985)는 이름을 빼고 싶을 정도로 작가로서 자부심에 상처를 입힌 작품이었다. 하지만 흥행을 위해서는 그의 이름이 필요했다. <똘이와 제타 로봇>(김청기, 1985)도 뽀빠이과학에서 제공한 완구를 모델로 한 작품인데 그래도 어려운 시기를 만회시켜준 영화였다. 소인국의 ‘파라셀 공주’가 완구 비행기에서 뚜껑이 열고 등장하는 것이 당시 아이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슈퍼 태권V>(김청기, 1982)의 경우 합체는 뽀빠이과학의 요구대로 갔지만 캐릭터의 얼굴과 태권브이의 이미지는 벗어나지 않았다. 1980년대 들면서 태권브이 모델이 조금씩 변하는데 이 또한 완구업체의 영향이 있었다. <84 태권브이>(김청기, 1984)에서는 3단 변신합체로봇과 칼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뽀빠이과학과 연출자의 의견 차이로 태권브이의 얼굴이 완구와 애니메이션이 차이가 날 정도였다. (그림21) <84 태권브이>(김청기, 1984)의 한 장면 (그림22) <84 태권브이>(김청기, 1984)의 한 장면 훌쩍 커버린 깡통로봇과 미나 <84 태권브이>(1984)는 <로보트 태권 V>(1976)를 본 아이들이 성장해서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주인공인 훈이, 미나, 영희의 외모나 체형 또한 성장하고 분위기도 현대적으로 바뀌는 변화를 보여줬다. 하지만 <84 태권브이>의 흥행은 LA 올림픽과 문화생활의 변화 때문에 기대 이하의 실망을 안겨줬다. 자가용이 늘어 아이들과 교외로 이동하는 레저가 생겨났고 주차가 힘들었던 극장에는 발길이 뜸해졌다. 게다가 1980년대 컬러TV가 보급되어 화려한 원색의 어린이 만화가 연일 방송되었다. 어린이 영화가 퇴조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타격을 받게 된다. (그림23)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 포스터 어린이 영화의 퇴조라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새로운 도전으로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합성한 로봇 영화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를 만들게 된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는 <황금날개>의 스토리를 각색해 만든 것이다. 순진하고 어벙한 주인공이 덤블링을 하면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에 디즈니의 <메리 포핀스>(1964)처럼 실사와 만화가 어우러지는 형식을 더해 만든 작품이었다. 마침 뽀빠이과학이 독수리가 로봇이 되는 우뢰매 완구를 가져왔는데 썩 괜찮았다. 하지만 실사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각각 따로 찍은 뒤 합성해야 했기에 제작비가 상당했다. 결국 뽀빠이 과학이 제작비 5천만을 투자해 제작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림24)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 장면. 우뢰매가 악당 로봇 캉가를 공격하려는 장면 코메디언 심형래가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다행히 덤블링이 가능해 <우뢰매>시리즈에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심형래를 주인공 ‘에스퍼맨’으로 설정하고 ‘데일리’ 또한 <로보트 태권 V>의 메리와 같이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가져갔다. 그는 이때도 만약 데일리가 지구인일 경우 검열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림25)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의 한 장면. 에스퍼맨 심형래와 데일리 천은경 <외계에서 온 우뢰매>(1986)가 흥행에 성공하자 그 수입과 <외계에서 온 우뢰매 2>(김청기, 1986)의 선판매금을 합쳐 잠실에 세를 얻고 3억을 들여 올림피아극장을 만들었다. 마침 소극장 붐이 일었을 때였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 2>는 겨울방학시즌 개봉 때 올림피아 극장에서도 상영했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 2>부터는 <스타워즈>를 모델로 특수촬영을 해보고자 애니메이션과 모형을 사용했다. (사진26) <외계에서 온 우뢰매 2>(김청기, 1986) 데일리 송금란과 에스퍼맨 심형래가 모형으로 된 우뢰매를 출동시키는 장면 그는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의 성공 후 성인 히어로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이오맨>(조명화·김청기, 1988)을 제작한다. 이 작품도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주인공을 <6백만 불의 사나이>나 <소머즈> 같은 사이보그로 그리고자 한 작품이었다. 홍콩, 태국 등지로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하는 등 평균제작비가 1억이던 시절 5억의 제작비를 투자한 대작이었다. (그림27) <바이오맨>(조명화·김청기, 1988) 홍보전단 <바이오맨>은 국도극장에서 개봉하기로 했으나 마침 개방화 물결 속에서 1988년부터 공산권 국가들의 작품이 대거 국내에 상영되고 화제를 모을 때였다. <바이오맨>은 갑작스럽게 중국영화에 밀려 국도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게 된다. 지방의 흥행사들은 서울 상영관의 개봉 이력과 선전물을 받아 흥행을 해야 했기에 궁여지책으로 어린이회관에서 <바이오맨>을 개봉하게 된다. 작품의 성격과 상영관이 전혀 맞지 않아 흥행은 요원했다. (그림28) 만화잡지 《월간 우뢰매》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의 흥행 속에서 1988년에는 잡지 《월간 우뢰매》를 창간한다. 본격 로봇 만화잡지였는데 어린이 대상 잡지여서 광고수입이 없었고 결국 적자를 보며 운영하다 18권까지 발매하고는 폐간한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국세청으로부터 잡지 90만 권의 판매에 대한 소득세가 부과된다. 당시 열악한 출판업계 관행상 영수증 처리가 미비해 제대로 된 비용 증빙을 할 수 없어 공제 없이 고스란히 세금을 내야만 했다. 그는 세금을 벌기 위해 비디오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당시 포화상태였던 비디오업계에 진입해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태권브이’의 아버지이자 한국 로봇애니메이션 영화의 창시자인 그는 1990년대 중반 안타깝게도 파산을 선언하고 낙향한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만으로 사업을 운영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이후 방송국과 주변인들의 요청으로 애니메이션 몇 편을 만들었고 1999년에는 영화사 ‘신씨네’ 신철 대표에게 <태권브이>의 저작권을 넘기고는 제작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림29) 2016년 ‘태권브이’ 탄생 40주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 ‘엉뚱산수화전’의 작품 현재는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며 조용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는 위기마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로보트 태권브이>와 <외계에서 온 우뢰매>라는 성공적인 시리즈를 만들어내 국내 애니메이션과 어린이 영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놓지 않고 있다.
(그림1) <홍길동>(신동헌, 1967) 신문광고, ‘한국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나왔다 홍길동’ 1) (그림2) <호피와 차돌바위>(신동헌, 1967) 신문광고. ‘약속대로 또 나왔다!’ 영화의 예고편을 TBC-TV를 통해 매일저녁 광고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2) 어쩌면 ‘홍길동(洪吉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홍길동’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견본용 이름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의를 실천하고자 한 가상의 위인이자 의적(義賊, Dark Hero), 홍길동이 평범한 인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16세기 경)에서 탄생한 홍길동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아마 이 두 형제의 역할이 혁혁하지 않았을까.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1300여회 연재)에서 홍길동은 그 모습을 찾고, 형 신동헌 감독의 한국 최초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에서는 드디어,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던 그 <홍길동>이 2008년 5월 41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소년 용자 길동(少年勇者ギルドン)>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이 영화는 일본 오사카 필름아카이브에 일본어판 16밀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를 복제해 한국에 남아있던 사운드 필름과 동기화시켜 복원, 10년 전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림3) 신동우의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연재) 3) 당시 신문기사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듯이 <홍길동>이 개봉된 1967년은 ‘특수오락영화 붐’이었다. 특수영화란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같은 공상과학 영화, <흥부와 놀부>(강태웅) 같은 인형극 영화는 물론 <홍길동>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의 영화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특수영화는 ‘사랑 타령의 극영화에 식상한 관객에게 무한한 공상과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4)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장르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관객으로 하는 장르로 일컬어지던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렇게 특수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신문들을 보고 자라 나름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일군의 관객으로 성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 상영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에 선두로 나섰다. 신동헌의 <홍길동>은 1967년 1월 21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만들어진 <호피와 차돌바위>는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 15일 또 다시 스크린에서 어린이 관객과 만났다. (그림4) 당시 방송인 전영우, 여성 산악인 김정심, 한글학자 양주동, 극작가 이서구 같은 명사들이 등장해 광고했던 한독약품의 소화제 훼스탈 광고에 신동헌 감독도 기용되었다. 5) 화백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화의 모든 유형-만화 삽화와 한 칸 만화, 서술형 만화와 단행본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까지-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한 가히, 한국만화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다. 벽성공립보통학교와 회령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부, 도서부, 미술부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학생잡지 《형설시대》와 《학생》에는 그가 그려 보낸 만화가 당선되어 실린 적도 있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의 교편을 잡다가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내려와서는 학원 교재 삽화일과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대학교 예과 이과 갑류에 진학하였다. 충무로에서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을 만나 인연을 맺어 『스티브의 모험』(1947)을 간행한 것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대부분은 인천, 거제, 동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부산 《연합신문》 문화부에 전속만화가로 근무하면서 4컷 만화 「주태백」을 그렸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신동헌은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잡지 《여원》, 《새벗》, 《학원》 등에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그가 신문사의 전속만화가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옮겨가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해 3월부터 극장과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달부의 ‘럭키 치약’ 애니메이션 광고, 엄도식의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인기를 끌었고, 신동헌 역시 진로소주의 제안으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에 뛰어들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1961년 12월 KBS가 개국하면서 이를 텔레비전용 16미리로 축소 프린트로 만들어 송출했다. 6) 그는 자신의 집에 ‘신동헌프로덕션’을 차려놓고, 해외 전문 서적을 찾아가며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연구했다. 신능파(넬슨 신), 정병권, 김대중, 신동철, 신동우 등 애니메이터와 컬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진로소주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다. (그림5) 진로소주 두 번째 광고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 (그림6) 진로소주 세 번째 광고 ‘파라다이스’ 첫 번째 광고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에 연료로 진로소주를 넣는 것이 그 내용이고, 두 번째는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라는 내레이션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직장인들이 진로소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제작한 ‘파라다이스’ 광고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라는 광고 음악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선원들이 파라다이스 섬에 내려 그곳의 여인들과 소주를 즐기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신문사 기자의 자격으로 해군 함정을 타고 하와이까지 항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이 광고에 삽입한 음악은 부산 MBC 피디였던 손권식이 작사하고, 허영철이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이 방식, ‘선녹음 후작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텔레비전 광고로서는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었다. 음악과 동작이 리듬감 있게 맞아떨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이후 신동헌프로덕션에는 제약회사, 양조회사, 섬유회사, 전자회사의 극장용·방송용 애니메이션 광고 문의가 쇄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사용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일부와 애니메이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어린이 대상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애니메이션의 제작의 포문을 열은 영화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계몽이나 선전을 위한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던 국립영화제작소를 제외하면 민간에서는 애니메이션 광고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계몽과 상품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는 중요한 매체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들은 애니메이션과 대중을 보다 친숙하게 해주는 매개였던 데다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인력들의 실질적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그림7) 신동헌이 제작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중,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이 제공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갖인 이 한표로’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장면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장면 정부는 공명선거 중요성 인식을 위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7) 의 제작을 신동헌프로덕션에 의뢰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국립영화제작소 이전의 담당기관)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공명선거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이후 새롭게 제정된 양원제를 담은 선거법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이 문화영화의 후반부 3분가량의 애니메이션은, ‘선거일 7월 29일이 참다운 민주주의 기초를 이룩할 뜻 같은 날이므로,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의사로 공명한 선거를 실시해야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두 번의 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와 정부 부처에서 의뢰하는 문화영화의 애니메이션 부분 제작을 통해 신동헌은 24프레임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렇게 경험이 무르익은 그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영화에 도전한다. 영화 선진국에서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그림8) 신동우의 연재만화 단행본 『홍길동』 1권 표지(근일문화사, 1968년 발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전」이 만화가 신동헌 씨의 총지휘로 완성되었다. 상영시간 1시간 15분의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양민을 괴롭히는 양반에 소년 「홍길동」이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에 현대적인 「코믹」 「스타일」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66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만 여 장의 그림을 그려 7개월 만에 제작 완료되었다. 일반영화완 달리 연기 「로케」 「세트」 등이 필요 없지만 「홍길동전」엔 백 8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애니메이터」 50여 명, 채색원 130여 명). 한국에선 처음 시도된 일이라 상상 이상의 노력이 들었고 많은 NG를 내야했다는 것. 화면의 한 동작에 필요한 그림이 60여 장씩이나 들었다고 한다. 녹음도 「배터런」성우인 김수일·이춘사 등이 맡았고 음악은 전정근. 【세기상사 제작】 8) 1967년 1월 21일 공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해 8만 5천 명을 동원하는 파격적인 흥행을 거두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상도 수상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은 1966년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수십 명의 동화부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간 애니메이션 광고 작업을 진행해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지만 장편 영화를 위해서는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보름이나 개봉을 연기하며 작업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긴 셀룰로이드 위에 비닐 컬러 (vinyl color) 물감이 없어 포스터 컬러(poster color) 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채화용 포스터 컬러 물감은 뜨거운 카메라 조명 아래서 금방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컬러리스트가 붓을 들고 촬영 현장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림9) <홍길동>의 주요 장면. 잘 알려졌다시피 원작 「풍운아 홍길동」은 신동헌의 동생인 만화가 신동우(1936~1994)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티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동우가 원작자였지만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는 신동헌의 조수로 활약했다. 지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는 배경과 인물, 움직임의 표현에 있어서, 또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매체 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신동헌은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바꾸었다. 또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눈은 까만 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는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담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눈처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홍길동>은 성우들의 녹음을 먼저 진행했는데 홍길동은 역은 KBS 성우 공채 1기의 김수일이, 차돌바위는 TBC성우 4기로 데뷔한 여성 성우인 김순원이 맡았다. 먼저 녹음을 진행한 성우들의 대화에서 원작자나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효과와 감정이 드러나 후작화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아낸 큰 수확이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 같은 만화왕국’을 꿈꾸었던 신동헌은 <홍길동>을 제작하고 난 직후 한국 만화영화의 가능성은 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가 고민한 것은 ‘외국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대로의 동작의 선을 확립해야한다. 우리 만화영화의 한국적인 동작을 어떻게 창안할 것인가’였다. 9) (그림10)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그림11) <홍길동>에 등장했던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뜻의 차돌바위 (그림12)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홍길동>이 대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서 세기상사와 갈등을 빚었다. 납품 일자를 어겼다고 수익을 배분해주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이후 작품에 재투자로 이어지기 만무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진 신동헌프로덕션은 곧 합동영화사의 제안으로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개봉했다. 원화 6만 장을 그려 상영시간 75분짜리로 찍었고, 그 제작비로 1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홍길동>을 만들면서 신동헌은 <속 홍길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속편이 여의치 않자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로 선회했다. 호피는 호랑이 가죽을 쓴 의로운 인물이라는, 차돌바위는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의미의 마치 배트맨과 로빈을 연상시키는 이 짝패는 「풍운아 홍길동」에서 단역으로 등장하는, 신동우가 창조한 서브캐릭터였다. 세기상사와의 생겨날 수 있는 판권문제를 염두 했던 신동헌은 『홍길동전』이나 <홍길동>에는 없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후속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경계 지역인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신동헌, 신동우 형제답게 이 영화에서는 여진족이 서사상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호피(명호)의 아버지(유세진 장군)가 정벌하던 오랑캐 여진족, 호피의 아버지를 모함한 사또 최진달, 또 그 사또가 연합한 세력인 여진의 욕심 많은 괴물 도마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몽적인 장면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사상의 적은 ‘여진족’으로 명시되지만 은유적으로 이는 북한의 공산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삭풍 선생 : 이 역적무리들. 봐라, 이것이 최진달 일파가 우리나라를 도마술에게 바치겠다는 문서다. 정신 차려라, 호피야. 북녘의 야만인의 피에 굶주린 발톱이 우리나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노리고 있는 이때에, 너 같은 젊은 놈이 그 좋은 칼솜씨를 지니고도, 나라를 위해서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도둑질만 일삼다니.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이놈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목숨을 투계와 같이 버리며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왔다. 알겠느냐? 북쪽 오랑캐들은 이 나라를 삼킬려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려왔으니. (그림13) <호피와 차돌바위>(1967) 중 삭풍 선생의 뼈아픈 훈계를 듣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호피의 모습 하지만 <홍길동>은 물론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흥행 수익을 둘러싸고 제작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다. 영화제작사들은 흥행 수입만을 챙기고 애니메이션 제작 재투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신동헌 감독은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극영화보다도 제작비가 더 많이 들고, 제작 소요 기간도 길며, 오랜기간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인력과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제작사 간의 불협화음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아쉬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림14)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타이틀 크레딧 장면들 신동헌 감독이 이렇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와 안타까운 결별을 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오프닝 크레딧은 조애희가 부르는 주제가 “말띠 신부”(음악 최창근, 작사 유호)의 멜로디에 맞추어 등장인물 커플을 애니메이션으로 캐리커쳐하여 소개하는데 이를 신동헌이 담당했다. 또 이어령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은 신동헌프로덕션의 크레딧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철훈이 구상한 소설 내용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동헌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10분가량 들어있다. (그림1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중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부분 그 외에도 TBC의 풍자해학 사극 <여보 정선달>(1971~1974)에도 신동헌이 참여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비상한 조선의 정선달이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 주제가에 맞추어 타이틀 크레딧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MBC의 장수 어린이프로그램 <뽀뽀뽀>(1983~1992)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뽀뽀뽀>의 고정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배경을 그려 넣었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꼭지에서는 예의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빛을 발했다. 2008년 유실되었던 필름을 되찾은 후 그는 애니메이션 관련 인터뷰나 강연으로 맹활약했고, 2014년 제14회 만화의 날에 기념공로상을 받았다. (그림16) <뽀뽀뽀>(MBC, 1989년 1월 9일) 중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만든 장면들 신동헌 감독을 회고하면서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홍길동>은 ‘프랑스 아네시영화제(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 10) , 실제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하지는 않은 것 같다. 1967년 <홍길동>이 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신동헌 감독이 직접 참관했더라면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신동헌』 편에 실린 필자의 「신동헌 해제」와 구술문,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시된 DVD <홍길동>에 포함된 필자의 「신동헌 감독 소개」를 참조해 재구성하였습니다. 1) 《동아일보》 1967년 1월 19일 5면. 2) 《경향신문》 1967년 8월 12일 5면. 3) 《소년조선일보》 1965년 9월 11일. 4) “[연예오락] 특수 오락영화 「붐」. 괴수물·만화 등, 영화로 뒤쫓는 우주시대 국내기술로 제작 가능”, 《한국일보》 1967년 6월 18일자 7면. 5)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 6) 광고정보센터 한국광고 100년 홈페이지 http://data.adic.co.kr/ 참고. 7)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명선거의 노래>는 “공명선거의 노래”(1분 41초)와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3분 8초)의 두 개 영상으로 나뉘어 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후자의 영상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영화의 제작년도가 1961년으로 오기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목록(1950~1993)』, 37쪽;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ehistory.kr. 8) “첫 선보인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전」, 7개월간 6만 여 장 그려”, 《한국일보》 1967년 1월 19일자 7면. 9) “만화영화 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동아일보》 1967년 1월 28일 5면. 10) “만화영화 홍길동 아네시영화제 출품”,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5면.
3편이 끝난 후, <애마부인> 시리즈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영화제작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정인엽 감독은 ‘두손필름’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고 < 파리 애마 >와 < 짚시 애마 >(1990. 이석기)를 내놓은 것. 판권이 연방영화에 속해 있기에 ‘애마부인’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못했고, 캐릭터 이름도 애마 대신 오해리( 유혜리 ), 필라 김( 이화란 ) 등으로 설정해야 했지만, 이 두 편의 외전은 이후 이어지는 정전보다 오히려 더 ‘애마 정신’을 구현하는 작품이었다. <파리 애마>의 유혜리, <짚시 애마>의 이화란 두 영화는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이라는 이국적 배경 속으로 들어간다. 1~3편에서 정인엽 감독과 호흡을 맞춘 이석기 촬영감독은 <파리 애마>에서도 기존의 애마 시리즈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화면을 선보였고, <짚시 애마>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이 영화들은 나름 당대의 파격이었다. <파리 애마>의 설정은 오해리가 이혼한 남편을 찾아 파리로 찾아간다는 이야기. 외국에서의 낯선 성적 경험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강한 남자’였던 전남편( 현석 )에게서 벗어난다. <짚시 애마>의 필라는 나이 많고 남편 몰래 짚시 남자와 욕정을 불태우지만 결국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패션 모델 출신의 이국적 외모를 지닌 여배우를 캐스팅해 당시로선 이례적이던 유럽 로케이션을 감행한 이 영화들은, 내용보다는 비주얼의 업그레이드를 노렸고, 두 편 모두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며 성공했다. 여기서 ‘애마 프랜차이즈’의 연대기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애마의 남편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의 현우(임동진), 2편의 현우(최윤석), 3편의 노 박사(이정길) 그리고 <파리 애마>의 장석환(현석). 특히 장석환은 가장 강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편이었다. 1편의 문호(하명중)와 2편의 성현(신일룡). 애마의 옛 애인과 현재 애인. 1편과 2편의 동엽(하재영), 4편과 5편의 호진(김호진). 애마를 사랑하는 연하남들. 3편에서 애마의 첫사랑과 현재 애인, 1인 2역으로 등장한 장승화. 11편과 12편의 김주철. 그들은 13편의 이대준과 함께 <애마부인> 시리즈의 ‘헝크’(몸 좋은 남자) 계보를 잇고 있다. 장승화는 외전인 <겨울 애마, 봄>(1991)에도 출연했다. ‘<애마부인> 2기’는 1990년에 시작된다. < 은하에서 온 별똥동자 > 시리즈(1987~88)의 석도원 감독이 < 애마부인 4 >(1990)의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후 그는 10편까지 총 6편의 <애마부인> 시리즈 정전과 외전인 < 드라큐라 애마 >(1994)를 연출한다. 석도원 감독이 등장하면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진화를 일단 멈추고 불균질적인 시기를 맞이한다. 어떨 땐 황당할 정도로 급진적이고(5편의 남편( 최동준 )은 하나코( 민희 )라는 정부에 의해 일본도에 찔려 살해된다), 어떨 땐 1960년대 신파 멜로를 연상시킬 만큼 보수적이었다(7편의 애마( 강승미) 는 성불구 남편( 이무정 )에게 돌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의 에로 영화는 극장이 아닌 비디오 대여점에서 경쟁하고 있었고, 흥행 성적도 서울 관객 5만 명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에로 영화 지형도에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어느새 ‘올드 스타일’로 밀릴 상황이었다. < 복카치오 > 시리즈(1991~94) 같은 새로운 감각의 프랜차이즈가 등장했고, <애마부인> 시리즈도 경쟁을 위해 변해야 했다. 석도원 감독의 뮤즈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4편의 주리혜, 5편의 소비아, 6편의 다희아, 7편의 강승미, 8편의 루미나, 10편의 오노아. 소비아는 이후 비디오 영화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배우 임옥경의 동생인 주리혜는 이후 비디오 영화 <쌍파울로 애마 신바람 났네>(1996. 유진선)의 주연을 맡았다. 소비아는 ‘10대 애마’ 진주희와 함께 <애마 섹시 월드>(1998. 조명화)에 출연했다. 오노아는 역시 석도원 감독이 연출한 <드라큐라 애마>(1994)에 출연했다. 이때 석도원 감독이 끌어들인 것이 바로 퍼포먼스다. 애마나 그녀가 우연히 만나는 남자들의 직업적 설정(행위예술가, 현대무용가 등)을 통해 구현되는 스테이지는, 전체적인 스토리와 분리되면서도 이 시리즈가 지니는 에로틱한 면모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때론 섹스 신에 실제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편엔 사도마조히즘 섹스 컨셉트가 도입되는데, 이때 아티스트 원석( 원석 )은 애마를 묶으며 “이것도 예술입니다”라고 말한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티스트 그룹의 토론 장면엔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과 아르토의 잔혹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거론된다). 5편에서 시작되는 퍼포먼스의 전통은 이후 김성수 와 조명화 로 감독이 바뀌어도 유지된다. 여기서 하나의 혐의는, 잘만 킹 영화의 영향력이다. <애마부인> 1편에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면,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에선 당시 한국 에로 콘텐츠 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 레드 슈 다이어리 >(1992. 잘만 킹) 스타일의 에로틱 느와르 톤이 묻어나며, 이것은 다소 난폭한 섹스와 결합된다. 퍼포먼스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행위이자 모티프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7편에선 바닷가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가 퍼포먼스를 한다. 6편엔 4대 애마 주리혜와 5대 애마 소비아 그리고 6대 애마 다희아가 자매로 나온다. 영화 초반부, 그들은 철로 위에 눕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8편엔 밴디지 컨셉트가 등장한다. 11편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공연 장면. 조금은 장황한 모놀로그나 대사를 통해 영화의 테마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영화의 감성적 측면을 고려한 석도원 감독의 의도로 여겨지는데, 그 의미가 모호하여(게다가 비문이 많다) 그다지 효율적이진 않았다. 6편은 ‘말 잔치’인데 애마( 다희아 )는 언니( 소비아 )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지금의 언니의 모습은 정상궤도를 이탈한 빗나감이며, 사랑의 배신에 대한 반항이고, 결국은 후회하게 될 독선의 모습이야.” 이후 이혼을 결심한 애마의 독백은 이렇다. “순수와 영혼의 진한 사랑의 연습이, 크고 작음을 모두 잉태해낸 너는, 이제 허공에 익숙해진 사랑의 노래다. 높은음 외마디 끓어오르는 진실, 사랑의 한 맺힌 신음으로 고뇌하는 아픔, 네 귀를 후려치는 듯한 울음소리로, 울음소리로, 사랑의 바람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슬픔이여, 내 앞에서 그대 눈물이었다. 어떤 고통의 미움이 들었나. 독하디독한 미움을 마시고 보면 새까만 허공, 침묵의 계절. 무거운 돌 바위 무너져 내리듯 슬퍼하자, 슬퍼하자.” 영화의 시작이나 끝은 선언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문장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8편은 “에로티시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에로티시즘은 우리들을 착각적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 또 다른 활력소일 수도 있다”는 문구로 시작해 “시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시를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시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사람이든 시든 모두가 사랑이었나”라는 자막으로 끝난다. 이외에도 “우리의 사랑은 짧게 빛나는 불협화음이었나.”(4편) “그대 영혼으로 그리움 엉기어 우리의 사랑은 눈꽃이 되었나.”(5편) 같은 한탄조의 대사들이 영화를 마무리한다. 김성수 감독이 발굴한 9대 애마 진주희. 최연소 애마였다. 이후 그녀는 소비아와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이때 등장한 김성수 감독은 < 애마부인 9 >(1993)을 연출하며 혁신을 일으킨다. < 색깔 있는 남자 >(1985)로 유명한 그는 ‘최연소 애마’ 진주희를 캐스팅하는데, 그녀는 기존의 애마들과 다른, 차라리 하이틴 아이돌이나 로맨스 히로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범죄 스릴러 요소와, <색깔 있는 남자>의 반전 엔딩을 장식했던 레즈비어니즘의 터치가 결합되면서, <애마부인 9>는 석도원 감독이 이식한 사변적 톤을 걷어내며 “몸은 주더라도 마음은 주지 마라? 그따위 논리가 어딨어!”라는 직설법으로 승부한다. 특히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애마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라는 자막이 뜨는 대목은, ‘애마 프랜차이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엔딩일 것이다. 조명화 감독의 11편에 출연한 이다연과 12편에 출연한 서지은. 10편으로 다시 석도원 감독에게 메가폰이 넘어간 시리즈는 11편과 12편에서 조명화 감독을 만난다. 액션 요소를 대거 도입한 조명화 감독은(그는 < 우뢰매 >와 < 슈퍼 홍길동 > 시리즈의 연출자 중 한 명이었다) 아마도 가장 거친 스타일의 <애마부인> 시리즈를 연출한 감독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 이 시리즈는 에로 비디오 시장에 거의 잠식 당한 상태였고, 마지막 13편은 김성수 감독이 돌아와 대미를 장식했다. 1990년대 중반은 ‘애마 프랜차이즈’의 대혼란기였는데, 1995년을 보면 11편과 12편이 나왔고, 외전인 < 애마와 변강쇠 >(김문옥) < 애마와 백수건달 >(김문옥)이 등장했으며, 비디오 시장엔 <적도 애마>(김인수)와 <빨간 애마>(유세기)가 출시되었다. 정전과 외전과 비디오 시장을 아우르는 상황. 이후 그 주도권은 완전히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갔지만 대세는 진도희 의 < 젖소부인 > 시리즈였고, 1998년 이후 ‘애마’라는 이름을 붙인 영화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가 2016년 < 애마부인 2016 >이 나왔다. IPTV 시장의 확산을 통해 18년 만에 애마가 부활한 셈이다. 외전의 여주인공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겨울 애마, 봄>의 애리(박엘리자), <애마와 변강쇠>와 <애마와 백수건달>에서 애옹(애마+옹녀)과 애미/미치코 역을 맡은 박양희, <빨간 애마>의 설희(정세희), <애마부인 2016>의 은혜(류현아). 애마 프랜차이즈의 조연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독고영재는 6편에서 주희(주리혜)의 전남편으로 등장하고, 이후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원석과 유병완은 석도원 감독의 단골배우였다. 그들은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원석은 종종 애마의 애인으로 등장했다. 맹찬재와 노현우는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와 외전에서 남편 역할을 주로 맡았다. 4편에서 에리카의 결혼 파트너였던 신성하는 12편과 13편에 남편으로 등장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 ‘애마 프랜차이즈’의 역사는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테마와 스타일과 산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여성들이 절규하듯 내뱉었던 대사들은, ‘에로 영화’라는 장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때론 강렬한 울림을 주었다. < 애마부인 9 >에서 강희가 애마에게 던지는 충고는 아마도 프랜차이즈 전체의 테마를 요약할 것이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애마에게 강희는 말한다. “진정 네가 필요한 남자를 선택해. 윤리, 도덕, 이런 거에 얽매일 필요 없어.” 그리고 못을 박는다.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최초로 ‘진솔한 욕망’과 ‘원초적 본능’의 세계를 가져왔던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 한국영화의 ‘위대한 유산’까지는 아니라도, ‘역력한 흔적’ 정도로는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2018년 6월 13일 민심의 향방을 가늠하는 무대인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정계 개편이 시작되었고, 결과를 분석하는 정치‧사회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선거의 힘과 영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지방선거는 대선이나 총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편인데 이전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투표율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투표율인 60.2퍼센트를 기록한 이번 선거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관심은 20.14퍼센트라는 사전투표율과 선거 당일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지방선거에 쏟아진 열렬한 관심은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확인한 참여하는 시민의 힘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선거와 투표의 중요성은 다양한 홍보를 통해 강조된다. 근래에는 사회 각 분야 주요 인물들의 캠페인 광고가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 따라 SNS를 통한 개개인의 홍보도 큰 영향력을 끼친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떠한 방식으로 미디어 캠페인이 이루어졌을까? 대표적인 예로는 정부 산하의 국립영화제작소나 미공보원(USIS)이 제작한 선전영화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애니메이션은 문해력이 떨어지는 대중에게 주제를 설파할 수 있는 최적의 매체였다. 196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신동헌)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를 위한 오락보다는 그 어떤 매체보다도 좀 더 용이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관객을 설득하는 교육계몽 교재로 활용되었다. 1960년 공보국 영화과가 제작한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 1) 와 1963년 미공보원이 제작한 <나에게 물어봐!(Ask Me!)>(김태환) 2) 는 애니메이션이 대중의 교육계몽에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 <나에게 물어봐!(Ask Me!)>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는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총선인 민의원‧참의원 동시 선거에 맞춰 제작한 3분 8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이다. 7.29 총선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붕괴를 가져온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후 출범한 제2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치러지는 선거니만큼 무엇보다도 공명정대한 선거가 될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 또한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부정선거들과의 손쉬운 비교를 통해 공명선거를 홍보했다.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바야흐로 우리의 자유의사에 의해서 공명한 선거를 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라든지 “여러분의 귀중한 한 표가 금력에 좌우 당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난날 여러분의 자유의사를 위협해오던 폭력배는 법의 심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젠 두려워할 것 없이 마음 놓고 투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와 같은 내레이션은 <코주부>로 유명한 만화가 김용환의 코믹한 그림에 더해져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영화과는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선전‧선동에 가장 폭넓게 이용된 기관이었다. 애니메이션의 홍보구호인 ‘공명선거’ 돈으로 매수하려는 후보의 모습 이승만 정권의 정치 건달들을 묘사한 모습 투표소의 모습 투표를 마친 후 만세를 부르는 모습 결과적으로 의원내각제로 변경한 제2공화국의 양원제 국회 구성을 위한 제5대 총선은 전 정권에 대한 심판, 달라진 선거 문화 등을 강조하며 많은 관심 속에 치러졌으며, 자유당은 민의원 2석, 참의원 4석을 얻는 데 그치며 몰락했다. 하지만 국민의 투표로 구성된 제5대 국회는 5.16 군사정변으로 불과 9개월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나에게 물어봐!>는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주의와 선거를 교육하기 위해 제작한 6분 26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이다. 감독은 앞서 살펴본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의 작화를 담당한 김용환의 동생 김태환이 맡았으며, 미공보원과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다양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한 정도빈이 작화를 담당했다. 각본은 미국 영화평론가이자 교육가인 리처드 다이어 매칸(Richard Dyer MacCann)이 담당했는데, 애니메이션 제작 당시 그는 미국 국무성 지원으로 한국에 머물며 국립영화제작소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에게 물어봐!>는 대통령 선거 한 달 전에 제작이 완료되어 불과 선거 보름 전 상영에 들어갔다. 4) 하지만 선거를 홍보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에서는 대통령 선거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애니메이션은 원시인과 현대인을 내세워 쉽고 단순한 그림 연출을 통해 이들의 차이가 참여하는 민주주의에서 발생하며, 투표를 통해 좋은 지도자를 선출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주제를 전달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동물처럼 행동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든지 “아무리 지도자가 좋아도 우리는 한 번씩 선거를 해야 합니다. 현존하는 두 명의 진짜 상대가 있는 선거지요. 우리는 사람입니다. 심사숙고하고 발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투표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기명 비밀 투표 같은 것 말이죠” 5) 와 같은 내레이션은 <나에게 물어봐!>의 제작 방향을 잘 보여준다. 원시인이 현대인으로 변한 모습 독재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는 사람들 투표를 하는 사람과 당선자의 행진 의회의 모습 제작 배경을 둘러싼 당시의 한국 상황을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나에게 물어봐!>는 공정한 선거, 균형 잡힌 정당 정치, 건강한 민주주의 등을 설파하는 교육계몽영화로 간주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7.29 총선을 홍보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와는 달리 <나에게 물어봐!>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와 투표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원론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당시의 한국 상황은 그 어떤 때보다도 혼란하고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제작 주체인 미공보원이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한국의 자세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대신 독재를 방지하고 좋은 리더를 선출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오직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국민이 주권자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1)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소장자료. 2) <나에게 물어봐!(Ask Me!)>, 한국영상자료원 험프리 렌지(Humphrey W. Leynse) 콜렉션 소장자료. 3)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4) 『동아일보』, 1963년 9월 20일자 6면. 5)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임원식 감독의 대표작은 일제감정기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에 관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일 것이다. 임원식 감독이 연출, 제작한 작품 중 두 편이 상영중지를 당했는데 그 중 한 편이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보극장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간판이 내려졌는데 당시 옥중에 있던 사회운동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에 항의해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에 갇히기도 했다. (사진1) 임원식 감독이 대표작으로 뽑은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포스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개봉 전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는 포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받았다. 임원식 감독은 그 전해에 새마을정신을 구현한 영화 <어머니>(1976)를 연출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황해도 월남민 출신인 그는 남한에 대한 첫 인상으로 ‘육탄 10용사’의 용맹함을 꼽을 정도로 애국심 투철한 인물이었음에도 당시 정부의 강박증적인 검열 관행은 피할 수 없었다. 해방정국과 월남,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장했고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감독으로 데뷔해, 70,80년대 검열로 위기를 겪고 파산해서 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줄곧 아이러니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 때로는 뜻밖의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임원식 감독은 1932년 생으로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의병 출신인 부친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자랐고, 곡창지대의 부농이었던 집안 덕에 일제 강점기는 큰 고통 없이 보낸다. 하지만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월남을 결심한다. 먼저 월남한 서북청년단 특공대장인 큰 형님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24일 38선을 넘어 서울 회현동 적산가옥에 자리 잡는다.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그는 얼마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의약품을 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경제적 안정을 찾을 무렵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한다. (사진2) 1948년 경 서울 성도중학교(현재 용문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임원식 감독 (사진3) 임원식 감독은 서울 성도중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간부로 지냈다.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있고 찍은 사진 중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4)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야외훈련 중인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 초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하게 된다. 징집연령이었던 그는 집에서 숨어 지내다 배고픔 때문에 결국 인민의용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전선으로 배치되기 직전 탈출해 누나와 함께 전주로 피난한다. 9.28 수복 직후 피난지 전주에서 임호 라는 예명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사진5) 1950년 학도의용군 서북지구대가 전주에 주둔하던 당시 단체사진이다.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6) 1950년 학도의용군 특공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찍은 것으로 오른쪽이 당시 특공위원회 특공대장으로 있던 임원식 감독이다. 그리고 학도의용군과 함께 대구로 이동한 후 전선에 배치되기를 기다리다, 대구에서 홀로 국민방위군에 입대한다. (사진7, 8) 1950년 19살의 앳된 나이에 국민방위군 즉 자신보다 나이 많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대원 2천명을 인솔해 도보로 경남 사천에서 한산섬으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을 때이다. 완장을 차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국민방위군에서 그는 대원 2천명을 경남 사천에서 한산도로 도보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다시 대구에서 벨기에 부대의 보급부대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240명의 부대원과 240개의 지게를 기차에 싣고 대구를 출발, 고랑포에 도착해 벨기에 부대에 합류한다. (사진9) 1951년 임원식 감독이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써 함께 종군했던 29영국 여단 벨기에 부대의 군복으로 환복해 입은 모습이다. 이제 그는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 벨기에 부대와 함께 전방에서 종군한다. 그는 고지에서 전투 중인 벨기에군에게 총탄을 조달하기 위해 지게에 총탄을 싣고 고지를 오르내리는 민간인 보급부대를 이끌었다. (사진10) 1951년 한국전쟁기 벨기에 부대 군복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0대 후반의 앳된 얼굴이다. (사진11) 벨기에 부대와 배구를 하던 네트 너머로 천막으로 된 막사가 보인다.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고 왼쪽은 함께 종군한 국민방위군 18중대 취사병이다. 국민방위군은 벨기에군이 제공하는 부식과 벨기에 군인들이 주는 팁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전투도 생활이 되어가자 국민방위군은 주둔지 주변의 주저 않은 집터를 뒤져 주인 잃은 쓸 만한 물건들을 내다 팔고 때로는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농작물을 거두어 팔아가며 생존을 이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으로 위장한 뒤 외인부대가 있는 전방까지 들어온 양공주들 또한 그가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일상이다. 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외인부대와 함께 종군하는 국민방위군 부대원들은 적절한 대우와 보수가 주어지지 않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불만에 공감한 중대장 임원식은 대구로 내려와 국민방위군 본부, 육군본부를 다니며 국민방위군의 권리와 보상에 대해 묻고 따졌지만 어느 하나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소득 없이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 우연히 대구의 우체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는 10대 후반의 어린나이에 겪은 전쟁을 통해 성장해갔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생존의 형태들을 목격하며, 요령 있게 살아 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성숙해갔다. 그리고 감악산 전투 등 치열한 고지전을 치르고 난 뒤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는 시기에 가족들이 피난 중이던 제주도로 내려간다.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사진12) 1952년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교복을 입고 제주도의 돌담위에 올라가 있는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13)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부산으로 수학여행 가 찍은 사진으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을 보여준다. (사진14) 제주도 오현고등학교에서도 임원식 감독은 자연스럽게 학도호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학도호국단 대대장 복장을 한 임원식 감독으로 배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제주도 육군훈련소 군예대로 내려와 있던 문화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며 연극에 눈을 뜨게 된다. (사진15, 16) 한국전쟁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예대가 주최한 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남자 학교에 배당되었던 <붉은 기 땅에 떨어지다>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임원식 감독은 제주도의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 시절의 연극경험을 살려 서라벌예술대학 2학년으로 편입한다. (사진17) 1954년 남산 후암동 교사 시절 서라벌예술대학 본관 앞에서 찍은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단체사진이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고, 앉아있는 인물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연출가 김규대,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무용가 은방초, 앉아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첫 번째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사진18) 8.15 해방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으로 임원식 감독은 이때도 서라벌예대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시절에는 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연출가 김규대 선생을 필두로 학생들과 함께 실험극단 창조극회, 원방각, 청협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19, 20)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대학연극경연대회 참여 작 유치진의 <통곡>에 출연한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21) 1960년 극단 원방각의 연극 입센의 <유령> 공연모습이다. (사진22) 학생들이 주축이었던 젊은 극단인 창조극회의 멤버들이다. 아랫줄 왼쪽부터 임원식 감독, 황용하 감독, 성우 남성우, 연극배우 조광일, 윗줄 왼쪽부터 촬영감독 전조명, 연극배우 김광도, 연극연출가 장순환, 사진에는 없는 배우 김보애까지 더해져 창조극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창조극회를 기성극단 청협으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제주도 출신 여성과 이미 결혼했던 임원식 감독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HLKY 기독교방송에서 성우와 연출자로 활동했고 이광래 선생의 추천으로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옮겨가 대북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극단과 방송에서는 임무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제작한 김수용 감독의 군영화인 <윤 일등병>(1957)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23) 김수용 감독의 <윤 일등병>(1957)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임원식 감독(미개봉 추정) 영화계로의 진출을 꾀하던 그는 일본 교포 출신인 유진식 감독의 <불멸의 성좌>(1959)와 <대원군과 민비>(1959)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유진식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연애전선>(1960), <부부독본>(1961)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필름에서 제작하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조감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돌아온 사나이>에는 4.19 당시의 거리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신상옥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촬영한 장면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24)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 촬영 당시, 4.19로 인해 촬영이 중단됐을 때 신필름이 있던 광화문 동아빌딩 옥상에서 스태프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부터 편집기사 오성환, 그 옆이 임원식 감독, 왼쪽 첫 번째가 배우 정동일이다. <돌아온 사나이>의 조감독이었던 그가 스웨덴 대사의 집에서 촬영한 가든파티 장면 준비를 탁월하게 해내자 신상옥 감독은 그를 스카웃한다. 신필름에 입사하게 된 그는 신상옥 감독을 도와 신필름이 다작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데 일조한다. 신필름에서 여러 번의 감독 데뷔 기회가 있었으나 1965년 개봉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가 그의 데뷔작이 된다. (사진25)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 1960)의 촬영장소였던 경복궁에서 민비를 연기한 최은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실 임원식 감독의 초기 연출작 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숙부인>(1966)이다. (사진26) <숙부인>(임원식, 1966) 포스터 당시 신필름의 제휴극장이었던 명보극장에 걸기로 한 영화에 문제가 생겨, 신필름에서는 열하루 만에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이때 임원식 감독이 <숙부인>을 9일 만에 완성시켜 검열을 받고 무사히 개봉 한 것이다. 신필름은 당시 전속 감독의 월급이 15만원이었는데 <숙부인>을 단시간에 무사히 완성하자 보너스로 15만원을 더 받았다고 한다. (사진27) <숙부인> 촬영현장의 임원식 감독 이후 그는 쇼브라더스와 신필름의 합작영화 <대폭군>(1966)의 연출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대폭군>의 로케이션 촬영은 한국에서, 세트촬영은 중국에서 이뤄졌다. (사진28) 1966년 <대폭군>의 촬영을 위해 홍콩에 갔던 시기 쇼브라더스가 초대한 식사 자리이다. 서있는 왼쪽 끝 남자는 쇼브라더스의 엄준 감독이고 그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엄준 감독의 부인이자 주연 배우인 리리화이다. 가운데는 묘장왕 역을 한 김승호가 앉아있고 서 있는 남자들은 오른쪽부터 장군역을 맡은 배우 성소민, 임원식 감독, 최경옥 감독이다. 앉아있는 오른쪽 끝 여자는 배우 고선애이다. 나머지는 쇼브라더스의 여배우들이다. (사진29)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의 모습으로 감독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뒤편에 안경을 쓴 이가 홍콩 측 프로듀서 미스터 주이다. 그 옆으로 미첼카메라를 잡고 있는 홍콩촬영감독과 조수가 보인다. 연출자가 신상옥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홍콩 스태프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이 홍콩에 들려 무마시키고 임원식 감독이 스태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며 <대폭군>을 완성한다. (사진30)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에서 홍콩 여배우 리리화와 세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배경에 있는 다리모형은 세트로, 한국의 팔당에서 찍은 강 장면에 이 다리를 합성하기 위해 무척 정교하게 촬영해야만 했다. 촬영현장에서의 갈등도 극복해야 하고, 대규모 촬영에 특수촬영까지 해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비자 갱신을 위해 들른 대만에서 <나는 매국노>(1966)까지 연출한다. 1년여를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머물며 대규모 합작영화를 연출한 것보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브러리와 편집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검객 영화들을 보며 연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돌아와 <풍랑객>(1968), <영>(1968), <맹수>(1969) 등을 연출하며 검술액션영화의 유행을 이끌게 된다. 독고성을 주인공으로 한 검객 영화 <영>은 사무라이액션과 <장고>(세르지오 코부치, 1966)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참고해 만든 작품으로 평단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만화 같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사진31) <영>(1968)에서 요동 실향민 마을에 등장한 주인공 영(독고성)의 모습이다. (사진32) <영>(1968)에서 마적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사진33, 34) <영>(1968)에서 독고성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후속작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남정임을 협객으로 출연시킨 <풍랑객>을 직접 제작하려고 했으나 신상옥 감독의 설득으로 제작을 양보하게 된다. (사진35) <풍랑객>(1968)에서 남정임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는 남정임에게 액션시범을 보이다 다리가 부러져 보름간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액션을 바탕으로 한 장르영화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신필름 파견 감독으로 대양영화사와 세기상사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한다. 제작자 한갑진의 요청으로 대양영화사에서 액션영화 <심야의 대결>(1969)과 액션사극 <의적 홍길동>(1969)을 연출했고 세기상사에서는 오수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벌거벗은 태양>(1970)을 시작으로 검술액션사극 <민비와 마검>(1970), 공포영화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에로틱사극 <대감신랑>(1971), 액션영화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을 연출한다. (사진36) <설야의 여곡성>(1972)의 촬영현장으로 분장을 한 신인 여주인공 윤세희의 모습이 보인다. 윤세희는 당시 유명한 워커힐 카지노 딜러 출신으로 세기상사의 국쾌남 사장이 발굴한 배우이다. 1970년대 중반 임원식 감독은 신필름에서 충무로로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첫 작품은 삼영필름의 우수영화인 <아리랑>(임원식, 1974)이다. (사진37) <아리랑>(1974)의 촬영현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그는 나운규 감독의 원작을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장윤환과 시나리오 작가 장천호 형제가 야심차게 각색한 각본을 보고 반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참의원 출신 부호의 아들 영진이 영화 <아리랑>을 보고 감화되어 광화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본 경찰이 그를 박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작을 왜곡했고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문공부 시나리오 사전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제작기간이 늘어지자 제작사는 원작대로 각본을 수정하도록 권했고 제작비가 들지 않는 방향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길 바랬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임원식 감독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한데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어 그에게 아쉬운 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삼영필름은 외화수입쿼터를 받게 된다. 임원식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교구에서 안수를 받은 장로였다. 어느날 이사례 여사가 찾아와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보>라는 영화의 연출을 그에게 의뢰한다. 그러나 그는 유신 초기,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기독교계를 예의주시하는 정부의 분위기를 고려해 교회전도용 영화로 만들자 설득해 이 작품을 16미리로 연출한다. 이 영화는 후에 그가 종교영화로 재기하는데 교두보가 된다. 1975년에는 몇몇 영화계 인사들과 함께 새마을연수원 지도자교육을 받는다. 이신명, 변장호, 최하원, 고영남, 임권택 감독 등이 임원식 감독과 함께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수원에서 교육받는 동안은 술, 담배를 끊어야 했기에 고영남과 임권택 감독은 금단현상 때문에 퇴소한다. 새마을연수원의 교육내용에 감동받은 임원식 감독은 정부에서 영화계에 의뢰한 새마을영화의 연출자로 선택된다. 이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상이군인에게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의 영화 <어머니>(1976)를 감독협회 기획, 합동영화 제작으로 연출하게 된다. (사진38) 새마을영화 <어머니>(1976)의 한 장면이다. 상이군인(이순재)에게 시집 온 여성(윤연경)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관객수 10만이 넘으면 홈런이라고 여기던 시절 16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흥행에도 성공하고 15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해 3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다. 그 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를 합동영화사에서 연출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다룬 종교영화로 이 작품은 문화공보부의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합동영화사는 외화수입쿼터를 받는다. 그러나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중지가 내려진다. 상영중지에 항의하는 임원식 감독은 남산 정보부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지만,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던 종교지도자를 떠올려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중앙정보부의 설득에 그는 결국 상영중지를 받아들인다. (사진39)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의 촬영 현장이다. 977년 상영중지를 당했으나 1981년 재개봉되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1981년 이 작품의 해금이 풀려 재개봉되자 20만 1천명의 관객이 들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차지한다. 그 덕에 1982년에 그는 영화인협회에서 흥행영화 감독들에게 주는 할리우드 연수여행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개봉이 중지되고 고초를 겪다보니 그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합동영화사에 들어가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으로 5편의 작품을 기획했고, 2년 뒤에는 화풍흥업의 기획실장으로 4편의 작품을 기획하며 영화계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에는 김태수 대표의 제안으로 태창흥업의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외화는 김태수 대표가 맡고 한국영화는 임원식 감독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중견영화사인 태창흥업의 사장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한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이다. (사진40)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 사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의 포스터이다. 일류 배우의 개런티가 2백만 원이던 시절 그는 조용필에게 5백만 원의 출연료와 추가로 2백만 원의 작곡료를 주고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과도한 개런티로 영화인들의 빈축을 사 영화인협회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 전에 이미 제작비의 두 배가 넘는 지방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몰려들었고 완성 후 흥행에도 성공해 큰 수익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은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이다. 첫 제작 작품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인권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기름밥』이라는 논픽션 단편에서 영감을 받아 버스안내양의 실상에 대한 각본을 작가 김승옥에게 맡긴다. 무사히 잘 완성되고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었으나 이 작품은 개봉 후 위기를 맞게 된다. (사진41)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에서 두 번째로 제작한 작품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의 한 장면이다. 자동차노조와 한국노총의 상영중지 요청이 제기된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삥땅검사, 알몸수색,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부적절한 관계, 노조를 어용화해 묘사한 점 등이 운수노동자들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작품은 상영 7일 만에 자진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영화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노동부와 문공부가 노동자들의 상영중지 여론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떠돌았고 영화인들은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4군데 장면을 자르고 1군데 장면을 재촬영해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을 다시 받은 후 1982년 6월에 재개봉을 했지만 흥행은 요원했다. 결국 임원식 감독은 지방 흥행사들의 이어진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재기불능 상태로 제주도로 낙향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던 중, 그는 교계에서 만든 종교영화제작소로부터 선교영화 연출을 제안 받는다. 그가 연출한 선교영화는 곧 교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즈음 비디오문화가 확산되어 그가 제작한 종교영화 비디오테이프 판매 또한 급증했다. 1990년대 중반 케이블텔레비전이 등장하던 때에는, 기독교방송국의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을 퇴직하고 난 뒤 1999년부터 8년 동안 20대, 21대 영화감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춘사영화제를 재개하고 스크린쿼터 투쟁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진42) 1999년부터 8년간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 21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임원식 감독 모습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제주도에서 지내며 제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제주 4.3항쟁에 관한 현기영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임원식 감독의 구술은 어린시절 고향인 사리원의 풍경, 청소년기 월남민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해갔던 경험, 한국전쟁기 국민방위군으로 종군한 경험, 학창시절 학도호국단 활동 등 한국현대사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 있는 경험들로 가득하다. 또한 영화계에 입문한 뒤에는 거대 영화 기업 신필름의 체계와 쇠락, 한홍합작영화 경험, 유신시기 영화검열의 폐해 등에 관해 의미 있는 증언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