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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뉴우스]더위를 피해서
연일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올여름은 1994년의 더위를 넘어설 것이라는 뉴스도 전해진다. 피서 방법과 피서지 추천 또한 다양한 뉴스를 통해 전달된다.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최우선으로 꼽히는 피서지는 바다이다.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뉴스는 전국 각지의 해수욕장 개장 소식이다. 1950~1960년대 초반 TV 방송이 활성화되기 전 ‘해수욕장 개장’ 같은 생활뉴스는 극장이나 이동 상영에서 볼 수 있는 정부의 <대한뉴스>나 미 공보원의 <리버티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주 단위로 발행되는 뉴스인지라 지금에 비하면 신속성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볼 수 있다. <대한뉴스>와 <리버티뉴스>는 정치‧사회 뉴스를 중심으로 공보선전에 치중했기 때문에 생활뉴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을 차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철 무더위 소식과 피서지 풍경은 매해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 뉴스였다. 이 뉴스들은 주로 바다와 강, 계곡에서 더위를 피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1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단조롭게 스케치하는 것이 전부지만, 피서지 풍경은 서울 중심이 아닌 전국 각 지역의 다양한 풍경을 살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영상이다. 다음의 뉴스들에서 1950~1960년대 전국 각지의 피서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영상은 1956년 <리버티뉴스 제169호>에 등장하는 대구 동촌유원지의 모습이다. 이 영상에서는 1950년대 사진작가들의 도시로 유명했던 대구답게 아마추어 사진대회가 열리는 모습과 더위를 피해 보트 놀이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여름철을 맞는 대구 시민들의 아름답고 서늘한 놀이터”로 소개되는 1956년의 동촌유원지와 현재의 동촌유원지를 비교하면 더욱 흥미로울 영상이다. 1956년 여름 대구 동촌유원지의 모습: 아마추어 사진대회 1956년 여름 대구 동촌유원지의 모습: 보트를 타는 사람들 1956년 여름 대구 동촌유원지 전경 두 번째로 소개할 영상은 1957년 <대한뉴스 제127호>에 실린 <성하(盛夏)의 메모>로 한여름 더위를 피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름철 과일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계곡, 강,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흑백 영상이나마 시원한 여름나기 모습을 전달하고자 하는 뉴스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1957년 여름: 과일 좌판 앞의 상인과 시민 1957년 여름: 야외 간이수영장 세 번째로 소개할 영상은 1960년 <대한뉴스 제274호>의 ‘어린이 풀 개장’ 소식이다. 1960년 서울시는 장충, 탑동, 인현, 사직, 묵정, 삼청, 영등포 등 7개 공원에 어린이 수영장을 마련해 초등학교 여름방학 시작과 함께 개장했다. 개장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였으며, 입장료는 초등학생 기준 두 시간 이용에 30환이었다. 1) 당시 국숫값이 30환, 재개봉관의 입장료가 150~250환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입장료는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서울 시내 각지에 대대적으로 어린이 전용 수영장을 개장한 것은 이 시기 어린이의 여가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상에서는 현재 충무로5가에 위치한 묵정 어린이 공원의 과거 모습인 ‘묵정 어린이 풀’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 여름: 묵정공원 어린이수영장 네 번째로 소개할 영상은 1961년 <대한뉴스 제325호>에 실린 <더위 95도 2분>이다. 섭씨 34도를 넘는 최절정의 폭염을 알리는 제목으로 이 영상이 여름철 주요 소재인 피서지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해수욕장과 피서객의 모습을 스케치한 영상이지만 이 뉴스를 선택한 것은 현재는 없어진 인천 송도해수욕장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인천 송도해수욕장은 한국전쟁 후 유엔군 전용으로 운영되다가 1958년 징발 조처가 해제되었지만, 복구공사와 권리자의 내분 등을 이유로 개방되지 않다가 1961년 임시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운영은 송도유원지로 이름을 바꾼 1963년 이후 이루어졌다. 영상에서는 전쟁 후 처음으로 대중에게 개방된 인천 송도해수욕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여름: 인천 송도해수욕장 마지막으로 소개할 영상은 1964년 <리버티뉴스 제574호>와 1965년 <리버티뉴스 제629호>의 해수욕장 풍경이다. 두 영상 모두 부산 송도해수욕장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부산 송도해수욕장은 해운대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과 함께 피서지 소식에 단골로 등장하는 해수욕장이었다. 두 영상 모두 송도해수욕장의 전경과 더불어 1964년부터 운행을 시작해 부산의 명물로 이름을 날린 한국 최초의 해상케이블카와 1927년 설치돼 수많은 피서객의 사랑을 받았던 해상다이빙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케이블카, 다이빙대와 더불어 피서객들로 빽빽한 해수욕장은 이 시기 피서지를 상징하는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상다이빙대는 1987년 태풍 셀마로 철거되었다가 2013년에, 케이블카는 1988년 운행 중단되었다가 2017년에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 ) 영상을 통해 송도해수욕장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무더위가 이어질 2018년 피서지는 어떤 모습으로 기록될지 상상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될 것이다. 1964~1965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전경 1964년 여름: 부산 송도해수욕장의 해상다이빙대 1964년 여름: 부산 송도해수욕장의 해상케이블카 2018년 현재: 복원된 부산 송도해수욕장의 해상케이블카 1) 『경향신문』, 1960년 7월 22일자 2) 『연합뉴스』, 2013년 7월 7일 자.
김희갑 – 눈물과 페이소스의 코미디언
우리나라 희극은 왠지 감상적이다. 희극이 갖는 밝은 웃음과 축축한 눈물은 상관이 없을 성 싶은데 우리 희극에선 그것이 이상하게 동거 하고 있다. 1) 김희갑은 1945년 반도악극단에서 데뷔했다. 무대 뒤에서 배우들의 대사를 읽어주던 프롬프터였던 김희갑은 김대봉의 대역으로 코미디 배우의 길에 들어서서, 노인역과 코믹한 조연, 고복수, 현인 등의 모창에 재능을 보이며 악극단에서 눈에 띄는 배우로 성장했다. 한국 전쟁 무렵부터는 ‘웃기는 역을 도맡아’ 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는 반도가극단의 스타 코미디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1957년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에서 그의 특기인 현인, 남인수, 고복수 등의 모창을 선보이면서 영화계에 진출했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비공식으로 700여 편, 공식적으로 약 300여 편의 출연기록을 남기며,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작품에서 활약했다. 김희갑은 1950년대 후반, 약 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 중 18편 가량이 코미디로 분류되며 그 외에도 <선화공주>(최성관, 1957),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 <인생극장>(김지헌, 1959), <사랑이 가기 전에>(정창화, 1959), <유관순>(윤봉춘, 1959), <박서방>(강대진, 1960)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조연 혹은 단역을 맡았다. 1950년대 후반, 양석천이나 양훈, 구봉서 등의 동료 코미디언들이 코미디영화의 주연 혹은 비코미디영화의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할 때, 김희갑은 비교적 비중이 작은 조연이나 단역도 가리지 않고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늘려갔다. 이 시기, 김희갑을 코미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1958)였다. 이 영화에서 김희갑은 이종철과 석금성의 네 명의 아들들(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여, 연애담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와 코미디를 선보였다. 이 영화는 개봉관인 국도극장에서 제작비를 다 걷어 들일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함께 발매되었던 <오부자>의 사운드트랙 음반 역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이 영화의 성공은 1950년대 말의 코미디영화 붐을 이끈 기폭제가 되었다. 양훈과 양석천이 이미 인지도 있는 라디오 및 영화계 최고의 스타였던 데 비하여, 이제 막 영화에 발을 들인 악극단의 작은 스타였던 김희갑과 구봉서는 이 영화를 통해 ‘합죽이’와 ‘막둥이’라는 평생을 따라다닌 애칭을 얻으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사진1) <오부자>(권영순, 1958) 포스터. 왼쪽부터 구봉서, 양석천, 이종철, 양훈, 김희갑. ‘뮈지칼코메듸’, ‘음악희극영화’라는 장르 명칭이 포스터 왼편 위쪽에 명시되어 있다. 김희갑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코미디영화의 공동주연뿐 아니라 비코미디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성춘향>(신상옥, 1961))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밖에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박서방>(강대진,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하거나 단역으로도 출연(<청춘쌍곡선>,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선보였다. 1960년대 초반, 양석천․양훈의 활동이 뜸해지면서 코미디영화의 인기 상승곡선이 소강상태에 이르고 제작 빈도가 줄어들던 시기에 오히려 김희갑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김희갑은 이 시기 코미디영화의 명실상부한 주연배우로 자리매김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제작되었던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들에서 코믹 릴리프 역할을 수행하며 가장 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양석천과 양훈, 구봉서나 곽규석 등의 코미디언들이 코미디영화와 코믹 시퀀스를 통해 '코미디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냈다면, 김희갑은 코미디 장르나 코믹함을 넘어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즉, 김희갑은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보다는 공동 주연을 맡거나 극의 코믹한 성격을 불어넣는 조연 역할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연기 초반에는 그의 특기였던 모창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영화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로 갈수록 코미디보다는 드라마적 성격이 강한 영화에 출연했는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 <팔도강산>(배석인, 1967), <속 팔도강산>(양종해, 1968),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등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1970년대까지 계속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를 거치며 본격적인 TV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을 때, 코미디 배우들이 대부분 <웃으면 복이 와요>나 <쇼쇼쇼> 등의 코미디, 쇼 프로그램 등을 주 무대로 삼았던 것과 달리, 김희갑은 <꽃피는 팔도강산>, <제삼지대>와 같은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사진2)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김희갑과 구봉서는 춘향이를 잡아오라는 변사또의 명을 받아 춘향의 집에 가는 포졸 역할로 등장했다. 춘향의 수난이 시작되는 시점에 등장한 두 사람은 점차 고조되는 춘향과 변학도 간의 긴장을 잠시 완화시켜 주는 ‘코믹 릴리프’의 역할을 수행했다. 1950년대가 홀쭉이와 뚱뚱이, 즉 양훈과 양석천의 시대였다면, 1960년대는 구봉서, 김희갑, 서영춘 등의 코미디가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김희갑 코미디의 특성 역시 1960년대 영화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1950년대 김희갑은 다수의 코미디영화에 출연했지만, 주연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는 많지 않았으나 1960년대 영화들에서부터 김희갑이라는 캐릭터와 김희갑의 코미디 스타일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장르'로서 ‘김희갑’의 독특하고도 연속적인 관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영화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워낙 다작이었기 때문에 김희갑의 코미디를 몇 가지 경향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글은 1960년대 김희갑이 주연 혹은 주연급 조연으로 출연했던 코미디영화들로 텍스트를 한정하여 김희갑 코미디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인용했던 신문기사가 언급했듯이 "왠지 감상적"이고 밝은 웃음과 축축한 눈물이 동거하며 희극의 페이소스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이 '한국형 코미디'의 큰 특징 중 하나였다고 한다면, 여기에 가장 가까운 것은 김희갑의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김희갑의 코미디들은 1960년대 초반 영화계를 휩쓸었던 홈드라마에 근사(近似)한 것으로, 김승호 주연 홈드라마의 '코미디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60년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와룡선생 상경기>나 <팔도강산> 시리즈는 드라마적 성격이 강화된 코미디들로,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코미디들은 '엎치락뒤치락'의 활기로 표현되는 양석천 양훈의 코미디나 '청춘 코미디'의 성격이 강한 구봉서의 코미디와 달리, '페이소스'를 내세워 감상적이고 구구절절한 사연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누선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김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은 동아방송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인 <김희갑쇼>를 영화화한 것으로, <김희갑쇼>는 김희갑이 시골에서 올라와 성공을 하게 되기까지의 인생사와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어가며 흘러간 옛 가요를 이야기 중간에 끼워 넣는 뮤지컬 코미디극형식이었다. 라디오극에서 비롯된 영화 <김희갑의 청춘고백>은 김희갑의 장기인 모창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출세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뛰어든 가난한 청년과 그를 의지하는 고아 자매의 이야기를 큰 축으로 하는 '애조 띤' 코미디로 제작되었다. (사진3) <깁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 포스터. 김희갑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에서 김희갑은 시골에서 올라와 ‘몸부림’빠의 전속밴드 멤버로 취업한 ‘김희갑’을 연기했다. 코미디언들의 성공담을 허구로 재구성한 코미디영화는 1960-70년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감상성이 가미된 김희갑 코미디의 경향은 천경자가 썼듯이 "카이젤 수염의 센티멘탈"과 "친근감을 주는 한국적 체취"를 갖는 "그야말로 코리언적인 체취가 풍기는 좋은 개성의 코미디언"2 ) 이라는 그의 페르소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공감과 풍자 김희갑이 출연했던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는 총 18편이었다. 이 중, 확인 가능한 작품에 한하여 김희갑이 주연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은 <오부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복도 많지 뭐유>, <구혼결사대>, <부전자전>, <청춘배달>, <오형제> 7편이다. 이 7편의 영화에서 김희갑은 구봉서 등과 함께 공동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들은 로맨스가 가미된 청춘코미디에 가까웠다. 김희갑 역시 구봉서의 형제 혹은 친구 역을 맡아 취업과 연애에 성공하는 인물로 등장했는데, 단 한 편 <부전자전>에서는 김희갑이 구봉서의 아버지로 출연하여 중심 서사에서 제외되었다. 구봉서가 1960년대까지 이러한 청춘코미디의 경향을 이어가 자신의 장르로 만들었다면, 1960년대 김희갑은 매우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1950년대의 명랑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감상성'이 1960년대 김희갑의 코미디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진4)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포스터. 김승호를 주연으로, 허장강과 김희갑은 그의 친구로 등장하여 코믹한 노인 3인방을 연기했다. 기본적으로 코믹한 캐릭터였지만, 김희갑은 가족도, 돈도 없이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는 가련하고 초라한 노인의 감상성을 보여주었다. 1950~60년대 코미디영화에서 김희갑이 맡은 내러티브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경우에서 모두 김희갑은 공감을 하거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관객들과 심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첫 번째 경우는 김희갑 단독 주연 영화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경향으로, 김희갑을 주연으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가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이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 <합죽이의 신혼열차>(황외천, 1962), <희갑 목욕탕 개업하다>(안성찬, 1963),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색무지개>(조긍하, 1963) 등의 영화에서 김희갑은 주연이되, 논평하고 공감하는 관찰자 입장에 더 가까운 역할을 맡아 다른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내러티브 사건들에 개입하여 화해를 이끌어내는 인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주요 내러티브 사건이나 사연들은 주인공 김희갑이 방문하는 서울의 제자들, 개업한 목욕탕의 손님들 혹은 김희갑이 소유주로 있는 아파트의 입주자이거나 김희갑의 자식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김희갑은 은퇴한 선생, 목욕탕 주인, 여행자, 아파트의 소유주, 아버지로서 대면하는 이들이 일으키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함께 겪고 공감해주는 인물이 된다. 김희갑의 초기 대표작 <와룡선생 상경기>를 비롯하여, 1960년대 후반에 제작되어 1970년대까지 속편을 거듭하고 TV 연속극으로도 제작되었던 <팔도강산> 시리즈 역시 이 계열에 속한다. <와룡선생 상경기>는 은퇴한 와룡선생이 서울 사는 제자들을 둘러보기 위해 상경하는데 대기업의 중역이거나 사업가로 성공한 제자들은 와룡선생을 박대하지만 소매치기, 빠 걸, 가난한 과부와 상이군인 등 근대화된 서울에 적응하지 못한 제자들만 와룡선생을 따뜻하게 맞는다. 그리고 '너무 출세하면 인간미가 없어진다'던 와룡선생의 교훈에 따라 잘못을 뉘우치고 제각기 변화한 제자들이 한 데 모여 와룡선생을 전송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제시된다. (사진 5)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의 한 장면. 영화가 시작되면, 와룡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년퇴임을 하고 정들었던 ‘신도국민학교’를 떠난다. (사진 6)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의 한 장면. 서울에 온 와룡선생. 제자(이대엽)가 결혼하게 될 여성(엄앵란)의 아버지(양훈, 왼쪽)와 계속 소동으로 얽히게 되는 와룡선생(김희갑, 오른쪽). <팔도강산>(배석인, 1967) 역시 ‘팔도’에 사는 자녀들을 방문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전국 일주에 나선다는 큰 틀을 가진 이야기로, 김희갑과 그의 부인(황정순)이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이되 내러티브 사건은 이들의 자녀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한 서사 전략을 취한다. <팔도강산>의 김희갑 부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에 적합한 음악 및 풍물을 소개하면서 근대화된 조국의 모습에 감격하고, 어렵게 살고 있는 자식을 도와주고 버릇없는 자식에게는 깨달음을 주면서 여행을 마감한다. 그리고 마지막 회갑연에서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을 불러 모아 우애 있게, 효도하며, '조국의 역군'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이러한 영화들에서 김희갑은 여타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크게 공감하고 안타까워하고 깨달음을 주기도 하면서 화해와 중재를 이끌어 내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사진 7) <팔도강산>(배석인,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 이후 속편과 3편, 문화영화에서의 다양한 변주 시리즈들을 거친 뒤, 텔레비전에서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지속되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김희갑의 아버지 역할의 전형이 된 작품이었으나,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친정부적이고 선전적인 색을 드러내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공처가, 난봉꾼, 촌로, 구두쇠 등 일상적인 생활인으로서 코믹한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로, 김희갑이 출연한 코미디영화의 대부분이 이런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전자전>, <오형제>, <월급쟁이>, <마이동풍>, <신사는 새 것을 좋아한다> 등의 주연작 뿐 아니라 <고바우>, <구봉서의 벼락부자>, <로맨스그레이>, <남자조종법>, <남자식모>, <특등비서>, <신세 좀 지자구요> 등 조연으로 출연했던 대부분의 코미디영화 및 여타 장르의 드라마에서도 김희갑은 주로 코믹 시퀀스를 연기하는 일상적 생활인으로 등장했다. 이 경우, 김희갑은 평범한 인물이지만 숨기고 싶은 비밀 혹은 결함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관객들의 공감과 함께 웃음을 이끌어내는 인물로 기능한다. 즉, 김희갑은 밖에서는 바람을 피우지만 집에서는 부인에게 꼼짝 못하는 공처가(<마이동풍>, <로맨스 그레이>, <남자식모>, <특등비서>), 급사를 사랑하는 회사 중역(<오형제>), 식모를 사랑하는 어리숙한 노인(<약혼녀>),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문제에 처하는 아버지(<부전자전>) 등의 역할을 맡아 소동을 벌이면서 웃음과 함께 페이소스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비극과 달리 코미디에서는 아무리 큰 결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물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통합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김희갑이 맡은 인물들은 의미심장하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바람난 공처가는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급사와 식모를 사랑하던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사랑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며,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야기되었던 문제는 돈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해결된다. 김희갑이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러한 인물형을 연기했던 것은 그 인물형이 코미디나 코믹함의 표현에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8) <마이동풍>(이봉래, 1961)의 한장면. 주당 3인방 김희갑, 구봉서, 양석천의 금주 소동을 다룬 영화로 김희갑은 ‘천하의 공처가’ 역할을 맡았다. (사진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의 한 장면. 도금봉과 김희갑 콤비의 사랑 이야기가 소소한 웃음을 주면서 현실적인 사랑의 모습을 그렸다. 공감하는 관찰자의 형상이든, 결함이나 비밀을 가진 채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이든 김희갑은 평범하면서도 코믹한 인물들의 캐리커처에 누구보다 강점을 보였던 연기자로, 김희갑이 그려냈던 인물들은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보다는 갈등을 해결하고 통합을 이루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코미디 속에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했다. 불과 세 살 차이지만 항상 연애 서사의 중심에 선 청년을 연기했던 구봉서에 비해, 30대 후반부터 중년 혹은 노년을 연기했던 김희갑은 선량해 보이는 얼굴과 인생의 희노애락을 알 법하게 겉늙어 보이는 외모,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과 코믹한 애드리브 능력을 바탕으로 평범한 중년/노년의 일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배우였으며 그의 눈물과 웃음을 통해 관객들은 그와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2) ‘생활과 윤리감, 그리고 페이소스’ 양석천과 양훈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 코미디가 무질서의 활력을 이야기하는 '아나키즘적 코미디'의 경향을 보였고 구봉서가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청춘코미디'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했다면, 김희갑의 코미디는 애상적 정서를 띤 코미디로 196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홈드라마와 깊은 친연성을 가진 것이었다. 1960년대 초반 김희갑과 김승호가 짝을 이루어 등장하던, 홈드라마에 가까운 일련의 코미디들에 대해 이영일은 "생활이 있는 희극" 혹은 "풍속적 희극"이라고 칭했다. 이영일에 따르면 풍속적 희극이란 일상인들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코미디로 "소시민 상인, 말단 샐러리맨, 말단 회사간부, 시골선비"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일상을 통해 세태풍속을 그리는 동시에, 세태를 풍자하고 페이소스를 표현한 희극을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생'과 '사회'가 "충실하게" 그려져야만 한다. 김희갑의 1960년대 초반 코미디들은 이영일이 가장 높게 평가했던 '풍속코미디'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3) 지금까지 살펴본 김희갑의 코미디들은 김희갑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혹은 김희갑 자신이 겪는 일상 속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했다. 그리고 공감의 중심에 서 있는 김희갑을 통해 가족 안에서의 화합과 더 나아가 새 시대의 질서 안에서의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희갑 코미디의 '통합'은 근대화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졌지만 '충', '효', '예'와 같은 전근대적 가치관을 간직하고 있는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는 인물들과, 속악한 근대화의 과정을 거쳐 '성공'한 희화화된 인물들 사이의 물질적 중재와 가치관의 중재를 포함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근대화된 환경들–구획된 도시, 서구적 생활환경, 개발 중인 팔도강산 등-의 전시를 통한 물질적 근대화가 강조된다. 특히 <팔도강산> 시리즈에서는 국가의 근대화 정책에 대한 찬양과 동조가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예컨대 <내일의 팔도강산(제3편)>(강대철, 1971)에는 전라도 농촌에 사는 사위 노식을 찾아간 희갑이 도시보다 농어촌이 더 많은 혜택을 입고 있다고 설교하는 장면이 삽입된다. 농어촌의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을 오히려 "혜택"으로 둔갑시켜 위로하는 한편, 사대강 개발이라는 국책을 편향적으로 선전하는 이 장면은 김희갑 코미디가 근간하는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분명히 적시한다. 또한, 물질적 근대화, 세속적 성공을 긍정하기 위한 전략으로 '남존여비', '엄한 가부장', '형제간의 우애'와 '동료의식' 같은 전근대적 가치관의 '회복'이 주장된다. <내일의 팔도강산>의 후반부에는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려다 망하게 된 허풍장이 첫째 사위 장강과 그를 도우려는 성실한 넷째 사위 영균,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모 정순과 훈계하는 장인 희갑이 등장한다. 즉, <팔도강산> 시리즈는 '근대화' 자체는 긍정하되 희화화된 인물들을 통해 그려지는 '속악한 근대화'만이 지양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면서 "올바른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합당한 '중재'와 '화해'로 나아가는 전략을 택한다. 그리하여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거나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물질적 "성공"을 긍정하여 그것을 추구하도록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지배질서에 편입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김희갑 코미디의 주제의식의 표명은 '근대국가' 형성의 논리를 앞세우던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책으로 후원되고 장려되었던 김희갑의 <팔도강산> 시리즈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지속되었다. (사진10) <속 팔도강산 – 세계를 간다>(양종해, 1968) 포스터. <팔도강산> 시리즈의 두 번째 편 (사진11) <내일의 팔도강산 – 제3편->의 한 장면. 전라도 사위 노식에게 농촌이 받고 있는 혜택에 대해 설명하는 희갑. 왼쪽부터 김희갑, 박노식, 황정순. (사진12)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 <팔도강산> 시리즈의 4번째 편 포스터 (사진13)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 <팔도강산> 시리즈의 5번째 편 포스터 1950년대 코미디를 대표하는 양석천과 양훈의 코미디가 무질서의 활력을 이야기하고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던 구봉서의 코미디가 낙관적 전망을 보여주면서도 점차 지배질서에 순응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제작되었던 김희갑의 코미디는 좀 더 생활밀착형 인물들을 등장시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이 인물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는 애상적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지배질서로의 통합을 보다 정교하고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신영화] 소시민적인 인정희극/ 이봉래 감독 <월급장이>”, 《한국일보》 1962. 7. 22. 4면. 2) 천경자, "웃는 얼굴 웃기는 얼굴 - 김희갑 편“, 《한국일보》1963.1.1.14면. 3)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소도, 2004, 360쪽. <참고문헌> “[신영화] 소시민적인 인정희극/ 이봉래 감독 <월급장이>”, 《한국일보》 1962. 7. 22. 4면. 천경자, "웃는 얼굴 웃기는 얼굴 - 김희갑 편“, 《한국일보》 1963.1.1.14면.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소도, 2004.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 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
[칼럼]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파리의 생동감 넘치는 풍경과 클레오의 불안한 마음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와는 별개로) 생동감이 넘친다는 인상을 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영화가 도시의 풍경을 담아낸 방법에 있다. 많은 장면에서 카메라는 롱숏을 통해 파리의 도로, 상점, 인파, 자연 등 다양하고 많은 피사체를 한 화면에 담는다. 그리고 현장을 거의 통제하지 않아 사람과 자동차 등이 자유롭게 화면 안을 움직이게 했다. 심지어 카메라를 쳐다보는 사람도 여럿 등장할 정도다. 또한 도시의 바쁜 리듬과 주인공의 느리지 않은 발걸음에 맞춰 카메라 역시 자유롭게 움직이며 운동감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꽉 짜인 인과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전개되는 즉흥적인 이야기 흐름과 툭툭 끊기는 편집까지 맞물려 영화 가득히 생생한 활기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만들어지는데, 그건 바로 영화에 정보가 많이 담긴다는 것이다. 먼저 눈으로 봐야 할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며, 동시에 귀로 들어야 할 사운드가 빼곡하게 채워진다. 즉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가득한, 볼 것 많고 들을 것 많은 영화이다. 잠깐의 실내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순간이 그러하며, 특히 클레오가 사람 많은 카페로 들어갔을 때는 눈과 귀로 밀려 들어오는 밀도 높은 정보 때문에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현장에서 직접 녹음했음이 분명한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와 커다란 거울까지 동원해 포착한 카페의 혼잡한 풍경은 감독이 하나의 장면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게 아닌가란 의문까지 갖게 한다. 그런데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특별한 점은 단순히 스크린에 정보를 많이 담는 연출이 아니라 이러한 특징이 주인공의 심리 상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클레오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미래와 일상 속 삶의 의미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이다. 타로 카드점을 보는 클레오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지금 클레오는 점술사가 뭐라고 하든 카드에 담긴 그림의 의미를 직접 읽어내려고 할 정도다. 그만큼 클레오는 자기를 둘러싼 사물과 풍경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런 클레오가 앞에서 이야기한 역동적인 파리의 풍경 속으로 들어갔으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불안할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검은 옷을 입으며 죽음을 떠올리고, 라디오 뉴스에 나오는 알제리전쟁의 참상을 귀 기울여 듣는다. 그런가 하면 사람으로 가득한 카페에서는 외로움을 느끼고, 개구리를 삼키는 마술사와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내는 차력사의 모습을 보며 마치 자신이 고통을 느끼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다. 즉 클레오는 영화가 충실하게 담아낸 도시의 풍경과 그 시청각적 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중 조금이라도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과 마주할 때마다 격렬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 그 결과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파리의 생동감 넘치는 도시 풍경과 주인공의 우울한 불안이 충돌을 일으키는 특별한 영화로 남는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대조되는 단순하고 차분한 결론이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기는 것도 이 맥락 때문이다. 암 검사 결과 여부에 그토록 신경을 쓰던 클레오는 의사로부터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짧은 답을 얻는다. 물론 앞으로도 치료는 계속 받아야 하겠지만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주위의 소음을 지우고, 그 시끌벅적하던 풍경까지 밖으로 밀어낸 채 클레오와 방금 만난 상대 남자의 얼굴만을 클로즈업으로 남긴다. 여기엔 불안한 기운은 없고 단지 상대를 향한 조용한 응시만이 남는다. 영화를 보는 내가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 클레오의 마음에도 안도와 평온이 자리 잡기를 바란다. ※본 작품은 시네마테크 KOFA 기획전 "영화와 공간:파리" (018.07.11.수 ~ 07.25.수)의 상영작으로 해당기간동안 극장에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영화걸작선]바람불어 좋은날: 7월의 영화
1980년에 만들어진 < 바람불어 좋은 날 >은 안성기 , 유지인 , 김보연 , 임예진 , 김영애 등 익숙한 중견 배우들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최근 극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임예진의 앳된 얼굴은 그녀가 한 시대를 풍미한 하이틴스타였다는 걸 한눈에 실감하게 했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 이들 배우들이 후일 어떻게 성장할지 알 수 없었겠지만 <바람불어 좋은 날>은 배우들의 면면만 놓고 봐도 오래 기억될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배우들 외에도 김성찬 , 이영호 , 김희라 , 박원숙 , 최불암 , 김인문 등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는데 그들 모두의 경력에서 중요한 영화가 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배우가 조명을 받은 이유는 <바람불어 좋은 날>이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그들 중 한 사람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덕배(안성기), 춘식(이영호), 길남(김성찬)이라는 세 청년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당시 시대상을 조망할 수 있는 남녀노소가 빠짐없이 나와, 작은 타일 조각이 모여 만드는 거대한 벽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목소리를 높여 뭔가를 외치는 영화가 아닌데도 <바람불어 좋은 날>은 당대 관객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면서 당시 영화인에게 지향점을 제시하는 작품이 됐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그리는 시대는 1970년대 강남 개발이 시작된 뒤의 서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강변 풍경을 보면 강 건너편엔 아파트들이 보이지만 등장인물들이 사는 쪽은 아직 개발이 덜 된 지역이다. 부동산 개발로 벼락부자가 된 김회장(최불암)은 말한다. “남들이 뭐라 손가락질하는지 안다. 배추 장사 하던 무지렁이가 악랄한 수단을 써서 졸부가 됐다고. 하지만 내가 안 한다고 세상이 그런 짓 안 할 리 없다. 나 말고도 그런 짓 할 놈은 많다.” 김회장이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영화는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땅을 뺏긴 노인이 목을 매 자살을 하는 장면을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런 김회장의 손이 이발소 미스 유(김보연)의 허벅지를 주무를 때 춘식이 느낀 혐오감은 노인의 자살을 목격한 뒤 살의로 발전한다. 그러나 김회장이 ‘악’이라고 춘식이 ‘선’인 것도 아니다. 김회장은 역겨운 존재지만 미스 유에게 희망이기도 하다. 병든 아버지의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미스 유는 김회장의 품에 안긴다. 미스 유는 거짓이라도 날 사랑한다 말해달라고 하고 김회장은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답한다. 춘식이 김회장의 몸에 칼을 그을 때 미스 유의 희망도 같이 찢어진다. 김회장이 상징하는 천민자본주의의 탐욕스런 모습 반대편에 상류 사회의 매혹을 전시하는 인물 명희(유지인)가 있다. 명희의 의상은 번쩍거리거나 매끄럽거나 하늘거린다. 의상 자체가 ‘유혹’이라는 단어의 대체물처럼 느껴진다. 명희와 덕배가 강가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잊을 수 없는 대목 중 하나다. 명희의 치마가 바람에 날려 팬티가 보일 만큼 펄럭인다. 마릴린 몬로가 < 7년만의 외출 >에서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치마를 날리는 장면 못지않다. 명희는 키스를 가르쳐준다며 입술을 내민 덕배를 바보로 만든다. 덕배는 내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이 올라갈 수 없는 나무에 올라가지 않기로 한다. 명희가 대변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은 그녀가 디스코 클럽에 가는 장면을 통해 더 선명히 드러난다. 매혹적이지만 선정적이고 위험한 그녀에게 덕배는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없다. 덕배는 디스코 클럽에서 농악을 떠올리며 몸을 흔든다. 덕배의 춤은 엉뚱한 박수를 받지만 그 이상 발전할 수 없다. 덕배가 돌아갈 곳은 중국집이고 덕배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모욕과 욕설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사를 상징하는 빈부 격차와 갈등을 <바람불어 좋은 날>은 이성과 이론이 아니라 감성과 경험으로 납득시킨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보여주는 사회 고발의 힘은 세월이 흘러 많이 퇴색했다. 그것은 1970~80년대의 사회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계속 회자되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한 차원 높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를 몰라도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면 알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한국영화 100선> 129쪽, 한국영상자료원 편) 오래전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다시금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고 나니 덧붙이고 싶은 말이 생겼다. 왜 지금은 <바람불어 좋은 날> 같은 영화가 안 나오나, 라는 궁금증이다. 상업영화 시스템이 이런 영화를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독립영화에선 어떤가? 상당수 독립영화가 젊은 세대의 가난과 절망을 다루고 있다.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 등 그들을 지칭하는 표현은 바뀌었지만 그들의 절실함은 그대로일 것이다. 아마 오늘의 청년 세대는 중국집, 여관, 이발소 대신 편의점이나 고시원에서 70년대 젊은이들과 비슷한 궁핍과 허기를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 1980년 덕배는 그런 어려움을 견디기 위해 말을 더듬고 매를 맞아도 참는 법을 배웠다. 2018년의 젊은이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누군가 그걸 제대로 알려주는 영화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다.
[칼럼]영화에서 ‘퀄리티’란 무엇인가?
올해 5월 31일에서 6월 7일까지 8일간 개최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20회를 맞아 지나온 역사를 축하하고 앞으로의 비전을 가늠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1997년 4월에 첫 회를 개최했었다. 영화제의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던 시절, 1996년 10월 출범한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국제영화제였다. 당시 내걸었던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See the world through women’s eyes)"는 지금까지도 영화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캐치프레이즈로 사용되고 있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여성의 삶을 여성(주의)의 시각으로 표현한 영화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스크린에서 사소하게 여겨지거나 왜곡되고 심지어 아예 배제되어온 소수자들의 비전과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조건의 마련을 뜻한다. 따라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영화 전체(여성영화와 남성영화의 총합이라는 실질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가정)’의 일부를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한정된 세계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가려져왔던 비전과 이야기를 드러내며 영화의 세계를 확장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페이스북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이를 보다 더 구체화하기 위해 최근 4년간 두 개의 문구를 더 내걸었다.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Women Make Great Films)”와 “여성이여 스크린을 점령하라(Occupy Screen!)”가 그것이다. 뒤의 문구는 현재 영화관련 교육기관의 학생과 관객은 여성이 50%를 상회함에도 영화현장과 재현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10년간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중 여성감독의 영화는 10%를 넘지 못하며 주인공이 여성인 영화는 20%대에 머무르고 있고, 이러한 수치가 나아질 기미 역시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큰 격차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으며 차별적 시스템의 문제다. 따라서 지속된 영화계의 불균형과 불공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관객운동도 필요하지만 정책적 개입이 시급하다. 한편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조금 더 담론적인 개입이다.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하면 많은 이들은 이렇게 되묻는다. 여성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여성이나 소수자들이 나오는 영화가 ‘재미없거나 작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제작·상영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일차적 문제는 이처럼 유의미하게 평가를 할 만한 영화들이 아직 충분히 제작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남성이 주연이거나 남성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도 혹평을 받거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영화가 무수히 많지만 그 이유로 남성이라는 성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지금도 실제 통계 수치는 우리의 막연한 추측과 다르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에 열린 "영화산업 성평등을 위한 정책과 전략들" 국제 컨퍼런스에서 주유신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은 최근 극장 개봉작의 편당 동원 관객수를 감독 성별에 따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놀랍게도 결과는 여성 감독의 관객 동원수가 남성 감독보다 약 13,600명이 더 높았다. 여성 감독은 충분히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고 만들 수 있지만, 충분히 실현되지 않고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셋째, 어떤 영화가 ‘좋다’ 혹은 ‘퀄리티’가 높다는 평가의 요소와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누구의 평가가 더 많이 가시화되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 기준은 영화적 스킬, 미학적 새로움, 이야기의 설득력과 응집력, 대중적 공감과 재미, 보편적 가치의 구현 등, 상황과 조건에 따라 여러 판단 기준이 있을 것이다. 특히 ‘퀄리티’라는 것은 많은 경우 미학적 완성도와 두리뭉실하게 동일시되어 논의되곤 한다. 하지만 미학적 완성도라는 것 또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촬영, 편집, 구도 등의 스타일적 장치들을 능숙하고 매끄럽게 사용하면 충족될 수 있는 것인가. 위에 언급한 컨퍼런스의 패널로 참석한 BFI(British Film Institute) 제작기금 집행이사인 리찌 프랭키는 토론 세션에서 다양성은 영화의 ‘퀄리티’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BFI는 이미 제도적으로 제작지원을 위한 공적 기금을 배분하는 데 있어 다양성을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고, 2020년까지 감독의 성별을 50:50으로 맞추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실천하고 있다. 인지하다시피 이 정책과 실천은 성별 다양성이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성이 미학적 새로움 및 완성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에 근거한다. 시점과 이야기 주체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세계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방식을 다르게 만든다. 다양성은 카메라의 앵글과 구도를 다채롭게 만들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가시화되었던 소수자의 눈과 이야기가 세계를 더 입체적이고 보편적으로 만들 가능성을 높여준다. 소수자의 시각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정했던 ‘보편적’ 가치와 공감에 질문하게 만들며 오히려 그것이 사실 단편적이고 편협한 것이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아녜스 바르다와 JR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아녜스 바르다와 JR의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은 다양성이 영화에 어떻게 영화적 재미와 새로움을 불어넣는가를 보여준다. 55년의 나이차가 나는 바르다와 JR이 공동 연출한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와 영화가 담아내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환기하는 진정한 시네필 영화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듯 이 영화의 재미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이자 대표적인 여성감독인 바르다와 젊고 성공한 사진작가이자 남성인 JR이 예술가적 주장과 삶의 태도를 서로 꺾지 않으며 차이를 인정하는 우정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바르다가 같은 여성이 왜 영화감독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온다. 둘은 포토 트럭을 타고 마을을 돌며 평범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인화해 낡은 벽에 붙여주는 퍼포먼스를 하던 중에 르아브르 항만을 찾게 된다. 주로 남성인 그곳의 노동자들은 파업 중이다. 바르다는 남성인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을 만난다. 그리고 인터뷰 중 자신의 남편을 지지한다며 “늘 남편 뒤에 있었어요”라고 답하는 여성에게 “왜 옆이 아니라 뒤죠?”라고 바르다는 묻는다. 바르다 감독은 이 여성들을 누군가의 아내, 보조자가 아니라 그녀들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개인으로 대한다. 그 마을의 산업을 함께 일궈온 그녀들에게 바로 그 노동의 현장에서 그녀들의 얼굴을 돌려주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얼굴마다 사연이 있”고 바르다는 그녀들의 이미지로 그것을 들려준다. 바르다는 항만에 세워둔 대형 컨테이너에 그곳을 지켜온 토템처럼 항만 노동자의 아내이자 스스로도 노동자인 세 여성의 대형 사진을 붙여놓는다. 그리고 기중기를 이용해 그녀들을 자신의 대형 사진이 붙은 컨테이너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그녀들은 높은 곳에서 바라볼 때 세계가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이야기한다. 그녀들은 일상과 관습에서 벗어난 자신의 대형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여성의 눈”이자 지가 베르토프, 발터 벤야민 등이 언급했던 해방의 잠재성을 품고 있는 영화적 매체의 특징 아닌가. 여성으로서 바르다의 시선은 ‘노동자’라는 통념이 배제했던 아내들을 스크린에 불러들여 가치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보편성을 강화하고, 소재와 미장센에 새로움과 다채로움을 불어넣는다. 그로써 영화는 더 재미있어지고 설득력을 갖게 되며 더 다양한 이들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다양성은 곧 보편성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획득하는 요소이자, 영화의 ‘퀄리티’를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된다.
[한국영화걸작선]어제 내린 비
유신체제기 청년의 정신병리 유난히 그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흡습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그것은 완성도나 흥행, 혹은 예술성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대개 그런 영화들은 모순되고 부조리하며 치기와 센티멘털리즘이 넘치는 가운데 혼종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당대에 수용되던 것과 후대에 이해되는 것의 차이가 커서 새롭게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것 또한 그런 영화들의 특징이다. 걸작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런 영화들이야말로 영화사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대상일 수 있다. 이장호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 어제 내린 비 >는 197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그런 영화다. 김홍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겉으로는 우드스탁을 표방하는데 몸은 아직 청계천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 당시의 절묘한 감수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1) 영화 중 하나이며, ‘청계천’ 2) 으로 제유될 수 있는 그 시대의 억압과 그로 인한 청년의 병리를 노출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3) 이 영화는 “< 별들의 고향 >으로 한국영화 흥행사상 최고기록을 세운 인기 작가 최인호 와 이장호 감독 콤비가 내놓은 제2탄”으로 개봉 전부터 주목받는다. 그리고 “대목 노린 설빔 영화”로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약 15만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1975년 ‘방화’ 흥행 3위에 오른다. 4) 그런데 이 영화는 가부장제가 공고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 한 여자를 사이에 둔 형제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대본 검열에서도 이것이 문제가 되어 “여주인공의 타락된 성도덕” 5) 이 지적되고, “근친상간의 인상을 주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 6) 하라는 개작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풍기(風紀)’ 쪽으로 집중되었고 당시 저널리즘에서도 이 영화는 “이복형제 사이에 끼어든 여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삼각관계를 그리고” 7) 있는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큰 문제없이 개봉되고 소비되었으나, 이 영화가 반영 내지 은닉하고 있는, ‘풍기’의 잣대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복잡한 이면이 제대로 독해될 기회를 잃기도 했다. 영후 주인공 영후( 김희라 )는 본처 자식보다 나이가 많은 사생아다. 그는 태생과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깊은 절망과 패배의식을 지니고 있다. 달리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음에도 대회에 나가면 제대로 승부하지 못하며, 머리맡에는 항상 교수대 밧줄을 걸어두고 때때로 자신의 목에 걸어보기도 하는 것은 그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웃음을 띠며 명랑하게 행동한다. 그가 지니고 있는 장난감에서 나오는 과장스러우면서도 위악적인 웃음소리는 영후의 웃음, 나아가 이 영화에서 웃음이 지니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한 그를 생모( 도금봉 )는 ‘멍텅구리’, ‘돼지새끼’라 부르며, “비위가 거슬리면 오히려 웃는, 웃을 때가 제일 무서운 새끼”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영후가 장성하여 아버지( 최불암 )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동생이자 적자인 영욱( 이영호 )을 만나게 된다. 영욱은 영후와 달리 합법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내성적이고 유약한 외동이다. 그는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약혼녀에게조차 미성숙한 남성으로 간주된다. 영욱의 성격은 무구한 얼굴로 카페에서 기타를 치며 포크송을 부르는 것으로 상징된다. 영욱의 어머니는 영후에게 이러한 영욱을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영후는 영욱에게 웃는 것부터 배우라며 자신의 장난감을 선물하고, 무작정 달리게 하는가 하면 윤락가에 데려가 성매매를 종용한다. 여기에서 ‘강해진다는 것’은 마음에 없는 웃음을 지을 줄 알고 앞만 보고 뛰어가며 여자를 쉽게 취할 수 있는 남자로 만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강한 남자’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동생에게 훈육하려 하는 영후 또한 그러한 남자는 못 된다. 그는 육상대회에만 나가면 뒤를 돌아보느라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는 상습적 패자인 것이다. 민정과 영욱 영후가 영욱의 약혼녀 민정 (안인숙 )과 사랑에 빠지면서 형제는 갈등에 휘말린다. 여기에서 영후가 민정과 연인 관계가 되는 계기는 생모의 결혼이다. 아버지와 비합법적인 관계였던 생모는 영후보다 더 나이 많은 아들들이 있는 늙은 남성의 합법적인 아내로 새출발한다. 이로써 사생아로 태어난 영후가 돌아갈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안식처가 없어지는 셈이다. 이는 “돼지새끼”, “멍텅구리 새끼”라 불리며 “우리 엄마 섹시하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영후와 생모 간의 원초적인 관계 또한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영후 생모의 결혼식 풍경이 가장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복을 갖춰 입고 예식에 충실하면서도 문득 문득 노출되는 두 사람의 표정과 눈빛은 협소하고 강고한 틀 안에 스스로를 길들일 수밖에 없는 야생동물을 환기시킨다. 평소에 가장 우울한 처지이면서도 겉으로는 제일 명랑한 척했던 두 사람이기에 그들이 유발하는 서글픔은 배가된다. 이렇게 생모가 결혼하던 날 민정이 영후를 위로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이는 영후의 생모를 향했던 욕망이 민정에게 전이됨으로써 민정이 생모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영후는 이미 아버지의 질서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인물이다. 더구나 민정은 동생의 약혼녀다. 따라서 영후는 민정과의 사랑을 부정하고 민정을 버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이미 이 삼각관계의 비극적 결말은 예비되어 있다. 영욱은 영후에게 애인을 빼앗겼음을 알게 되자 민정과 함께 죽으려고 한다. 그러나 민정이 영후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는 형을 찾아가 웃음소리 나는 장난감을 돌려주며 자신은 이제 명랑해졌으니 이 물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상영 당시 스크린 밖에서는 긴급조치가 발효되고 있고, 국가는 젊은이의 절망이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며 명랑하고 건전한 영화만을 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에게 애인을 빼앗긴 동생의 입을 통해 ‘명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는 < 바보들의 행진 > (하길종 , 1975)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어서 여자를 쫓아다니고 무의미한 스트리킹을 하며 시시덕거리는 청년들의 명랑과 상통한다. 결코 밝고 환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웃음마저 부정한다면 견뎌낼 도리가 없기에 쾌활을 가장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 영후는 원체 그것을 알고 있었고, 영욱은 믿었던 형과 애인의 배신을 통해 그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영욱은 민정이 형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 앞에서 민정을 포기하는데 반해 영후는 민정의 임신을 동생의 일로 미룬다. 여기에서 영후가 민정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명분은 ‘우애’이다. 영욱과 함께 있는 민정에게 “네 까짓 × 죽는 건 괜찮아. 영욱이 살려 올라오란 말이야.”라고 소리치는 것은 영후의 선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여자에 대한 사랑 대신 동생과의 우애를 선택하여 아버지의 질서에 편승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생물학적 아비로서의 책임조차 회피한 채 모든 책임을 적자인 동생에게 전가하고 스스로 가부장이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뿌리 깊은 패배의식에서 비롯된 왜곡된 순응이자 부도덕한 아버지의 질서에 대한 수락이다. 여기에서 유신체제기에 살아남아야 했던 청년의 심리가 포착된다. 이 영화가 숨 쉬고 있었던 유신체제기는 유일한 가부장의 권력만이 고수되던 시대이기에 청년 세대에게 권력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현실 질서는 자율적 주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남성 주체의 성장 또한 막아섰다. 그래서 그들은 미완의 자아 상태에서 자살하거나, 현실 질서에 수용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거나, 책임을 회피하고 현실질서와 타협하며 퇴행적 기성인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성을 타자화한 이기적인 주체로 비난받아왔으나 정작 그들 또한 (주어가 될 수 없었던) 시대의 타자들이었던 셈이다. 8) 영욱과 영후의 선택 아닌 선택은 그것을 보여준다. 영욱은 형의 궤변과 왜곡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민정과 함께 자살함으로써 미성숙 상태로 남게 된다. 그들의 죽음을 조롱으로 애도하듯 영욱과 민정의 피투성이 시체 위로 영후가 준 장난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남겨진 영후는 홀로 터널을 달린다. 터널 밖으로 밝은 세상이 보이며 영후가 그쪽으로 뛰어가고 있는데, 경쾌한 음악까지 배경에 깔려 일견 희망찬 결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후는 계속 뒤를 돌아보고 코치( 박암 )의 목소리로 “돌아보지 마라!”는 외침이 반복되며 영화는 끝난다. 이러한 결말에 대해 나중에 이장호 감독은 “슬픔 다음에 금방 감정 변화를 해서 냉정하고 멋들어진 걸 연출”하려는 데서 비롯된 ‘쿨’한 엔딩이었다고 말한다. 9) 그러나 이 엔딩은 지금 봐선 냉정하고 세련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도저히 ‘쿨’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뛰어간다는 것이 어쩌면 궁극적 좌절을 거부하는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하고, 뒤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는 명령 속에서 계속 뒤돌아보는 영후의 모습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안쓰러움을 유발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제 내린 비>는 명랑해지기 힘든 시대에 명랑을 강요받는 젊은이의 분열과 왜곡을 보여주고 있다. 씩씩함을 가장하지만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뛸 수는 있으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는 없으며, 욕망하면서도 책임은 질 수 없는 데서 비롯되는 절망과 비애를 웃음으로 위장할 수밖에 없는 정신적 상황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주인공들을 죽음 또는 극복할 길 없는 외상으로 이끄는 영화 속의 ‘가장된 명랑’은 국가가 강조했던 ‘명랑’과 겹쳐지면서 부조리한 강요 속에 무책임을 무한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정신의 병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유신체제로의 드라이브가 시작되는 1968년, 검열 당국이 < 휴일 >( 이만희 )을 두고 주인공이 머리 깎고 군대에 가면 개봉을 허가하겠다고 한 데서 드러나듯이, 당시 정권의 영화 통제에서 내세우는 ‘건전’이나 ‘명랑’과 같은 기준은 그 적용 범위가 탄력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되 기본적인 원칙은 이분법에 의거해 재단(裁斷)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웃음 이면의 반어적 슬픔, ‘불륜 멜로’가 내장하고 있는 현실질서와의 부조화와 같이 양가적이고 부조리한 측면들은 검열에서 포착되기 어려웠다. 강고한 검열 아래에서도 동시대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새로운 영화들이 명랑과 웃음을 내세우는 가운데 반어적 방식을 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제 내린 비>는 <바보들의 행진>과 더불어 그러한 표현 방식을 취한 대표적인 영화로 긴급조치기의 아이러니한 걸작이다. 아울러 파격적 불륜을 내세우고 명랑의 외피를 두르지 않고서 동시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식을 달리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유신체제기의 정신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리얼리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10) 1) 김홍준은 <별들의 고향>에 대한 당시 소개 글을 인용하며 이 표현을 사용했다.-김홍준 대담, 「별들의 고향_1974」, 『이장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도서출판 작가, 2013, 72면. 2) 1958년부터 1977년까지 청계천 복개공사가 진행되어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에 이르는 고가도로가 건설되었다. 이는 개발독재기 도시 근대화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3) 당시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특히 <별들의 고향>, <어제 내린 비>,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들의 행진> 등 신인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활력소 구실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는데 이 영화들이 본고에서 말하고 있는 1970년대 중반의 대표작에 해당한다.-이영일, 「영화 연륜 따르지 못한 질적 향상」, 『동아일보』, 1975.8.18.,5면. 4)「참패 거듭 방화 흥행」, 『경향신문』, 1975.10.1.,6면. 5)「국산영화 <어제 내린 비> 대본 개작 통보 지적사항」, 문서번호: 영화 1733-8124, 문화공보부, 1974.7.3. 6)「국산극영화 <어제 내린 비> 대본 개작 통보 별첨」, 문서번호: 영화 1733-1434, 문화공보부, 1974.11.14. 7)「대목 노린 설빔 영화」, 『동아일보』, 1974.12.28.,5면. 8) 박유희, 「‘그녀’라는 거울 속 타자들: <겨울여자>의 남성인물 고(考)」,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한국사회와 남성』, 한국영상자료원, 2017, 123면. 9) 김홍준 대담, 앞의 책, 110면. 10) 박유희, 「박정희 정권기 영화 검열과 감성 재현의 역학」, 『역사비평』 99호, 역사문제연구소, 2012.5, 71-73면 참조.
대만 합작을 비롯하여 아시아로 교류한 감독 강범구
강범구 감독은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지옥화>(1958)의 촬영을 맡아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12편을 촬영 후, 1962년 개봉한 <북극성>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연출자로서 그는 액션스릴러 혹은 범죄추리물에 특기를 보여 ‘아주 타프한 작품을 만드는 신인’ 1) , “액션 감독으로 정평이 높은 준재 강범구 감독” 2) 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그의 초기작들이 1960년대 초반 대만에서 흥행에 성공하였고, 1966년에는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대만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강범구 감독 작품의 대만 흥행은 이후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에 진출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강범구는 일제강점기 황해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척이 운영하던 사진관을 드나들며 카메라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해방 후 홀로 월남하여 한국전쟁을 겪고, 휴전 이후 국민대학교에서 연극부 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연극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박상호 감독이 영화 <젊은 그들>(신상옥, 1955)의 조감독을 맡았는데, 강범구에게 엑스트라 출연 및 동원을 부탁한다. 이를 계기로 영화 현장을 처음 접하게 된 그는 영화 촬영 카메라의 작동 원리가 자신이 다루던 사진 카메라와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남다른 관심을 갖는다. (사진1) <해정>(박상호,1956) 포스터.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촬영부로 참여하며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6년 박상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해정>에서 촬영부 일을 시작했고, 이어서 유현목 감독의 작품에서 김명제 촬영감독의 조수로 일한다. 김명제는 미국의 미첼(Michell) 카메라를 모방하여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한 ‘코첼’이라 불린 카메라를 만들어 사용했다. 강범구는 김명제와 같이 손수 촬영 기재를 고안해낼 정도로 기술력이 출중한 영화인 밑에서 촬영 기술을 익히는 동시에 일본영화촬영자협회에서 펴낸 『 일본영화촬영편람 』 을 보면서 영화 전문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 그가 촬영 조수로 참여한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1956)와 <잃어버린 청춘>(1957)은 전후 한국영화의 새로운 수준을 이룩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3) “카메라 앵글에도 많은 노력의 자취가 보인다”, “한국영화의 공통적인 폐단인 느린 템포가 시정되어 있어 유쾌”하고 “이동촬영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화면에 안정성이 있고 매끈”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잃어버린 청춘>은 ‘묘사가 착실’하고 ‘모방에서 독창으로’, ‘수준에 이른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강범구는 전후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인 “현대극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젊은이들” 4) 의 일원으로 작업하며 영화인으로 단련되었다. (사진2) <지옥화>(신상옥, 1958)의 한장면. 왼쪽부터 배우 최은희(쏘냐 역), 김학(영식 역), 조해원(동식 역) 강범구는 1958년 <지옥화>(신상옥)의 촬영을 맡아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다. 전후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그는 위험을 무릎 쓰고 달리는 기차 위에서 액션 장면을 찍었다. 덕분에 속도감 있는 기차 추격 장면이 박진감을 더 했고, 촬영 데뷔작에서부터 대담하고 힘 있는 스펙터클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진3) <지옥화>(신상옥, 1958) 기차 액션 장면. 영식 일당이 미군 수송 열차를 털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 것을 기차 지붕 위에서 찍은 화면 이어서 강범구는 신상옥 감독의 첫 번째 멜로드라마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을 안정감 있게 촬영하였고, 이 작품은 서울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에 성공한다. 그는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 후 1961년까지 약 3년 동안 총 12편의 영화들을 촬영하는데, 그 중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1961)을 촬영하면서 이 작품을 제작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와 연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한흥영화사가 제작한 <지평선>(정창화,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슬픔은 없다>(김묵, 1961)를 촬영했고, <북극성>(1962)으로 감독 데뷔하여 연출작 <동굴 속의 애욕>(1964)까지 최관두가 제작한 8편의 작품을 함께 한다. (사진4)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갱스터 범죄물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가 제작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사진5)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크레딧 (사진6)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만주를 배경으로 한 독립군의 활약을 담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액션 장면을 속도감 있는 몽타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지평선>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거대 제작비를 들여, 우이동에 4만 평의 대지를 잡고 건평 3천의 오픈 세트를 세워 독립군의 근거지가 된 만주의 한 소도시를 만들고,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5) 강범구는 영화제작자 최관두를 “한국영화 액션 원조”라고 칭했는데, 그가 운영한 한흥영화사는 “한국 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6) 이라고 불렸다. 한흥영화사는 주로 대륙물과 액션, 범죄 스릴러물 제작에 주력했다. 최관두는 특히 만주 대륙물의 효시인 <지평선>(정창화, 1961)부터 대륙 액션물의 완결판이라 불리는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까지 제작한 한국 액션영화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960년대 초부터 당시 주류 멜로드라마 장르와는 다른 궤적을 그린 작품들을 개척해온 한흥영화사에서 강범구도 자신의 감독작들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강범구는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연출자의 역량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좌우되는 점을 체감하고, ‘카메라맨’ 역할에만 만족하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작품을 지휘할 수 있는 ‘연출자’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북극성>(1962)을 직접 제작하고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주동운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것으로 한흥영화사 이름으로 개봉되었지만 눈에 띄는 반응은 얻지 못했다. (사진7) <북극성>(강범구, 1962) 포스터. 강범구가 제작하고 연출한 감독 데뷔작이다. 강범구가 두 번째로 연출한 <검은 꽃잎이 질 때>(1962)는 이경재 원작의 서울중앙방송국(HLKA) 라디오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신문기자인 주인공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간첩을 쫓는 이야기로 “본격 추리영화”, “본격적인 스릴러물”이라 불리며 평단과 흥행 면에서 두루 성공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7) , “강범구는 처녀작 <북극성>에서 평조하였으나 <검은 꽃잎이 질 때> 한편으로 이를 완전히 만회해서 기염을 토했으며” “지난날의 명 ‘카메라맨’답게 훌륭한 카메라워크를 보여주고”, “우리 영화풍토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본격적 추리극을 시도”하여 “제법 박력 있게” 연출했다는 호평을 받는다. (사진8) <검은 꽃잎이 질 때>(강범구, 1962) 포스터. 하단에 경찰기동대 오토바이와 백차가 등장하는 추격 장면이 보인다.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기존 영화들에서 등장했던 총격전과 차별되는 새로운 액션 스펙터클을 선보이길 원하던 차에, 당시 서울 시경에서 외제 오토바이를 새로 장만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수도경찰청은 경찰의 기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1961년에 미국에서 사십 대의 오토바이를 들여왔으며, <검은 꽃잎이 질 때>의 엔딩에 해당하는 간첩 추적 장면은 시경의 협조로 백차 5대, 시경 특별기동대 오토바이 20대, 세단 2대 등을 동원하여 서울 을지로, 종로, 돈암동을 빠져 의정부, 포천까지 내달리며 백주의 추격을 카메라 세 대로 촬영했다. 8) 감독 입장에서는 작품의 스펙터클 연출과 홍보 면에서 이득이었고, 경찰 입장에서는 방첩 의식 고취 및 시경을 선전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상업극영화를 통해 대중성과 정부 시책 양쪽을 만족시키는 협상이 흥행 성공으로 이어진 경우이다. 그리고 강범구는 <검은 꽃잎이 질 때>의 흥행으로 인해 “액숀·스릴러의 총본산”인 한흥영화사의 ‘감독’으로 입지를 얻게 된다. 다음 작품 <안개낀 거리>(1963)는 그가 한국전쟁 및 전후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연출한 영화이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함께한 전우가 전후 복귀한 사회에서 범인과 형사로 조우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선에서 범인(이향 역)은 뛰어난 사격술로 형사(황해 역)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현재 형사는 지난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체포해야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의 ‘기차 승강구 결투씬’이 백미로 꼽히는데, 형사와 범인이 서로의 손목이 수갑으로 묶인 채 달리는 기차에 매달려서 결투를 벌이는 액션 장면이다. (사진9)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포스터. 중앙에 두 주인공의 손목이 묶인 수갑이 빨강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안개낀 거리>는 196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수갑(手銬)>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우수한 흥행 성적을 올렸으며, 당시 대만 언론에서 강범구 감독을 ‘액션·스릴러’의 귀재로 주목했다. 대만에서 발간된 영화 서적 『 세계영화감상 』 (1967) 한국 편에는 <안개낀 거리>에 대해 “인물의 심리와 성격부터 감정의 노출 등이 전편에 걸쳐 긴장감 있게 그려지고, 인간의 인지상정의 모순된 점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기교가 훌륭하다. 카메라 워크와 컷트의 극적 운영이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 감독들의 작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 9) 고 평하고 있다. 강범구는 <창살없는 감옥>(1963)에서도 전쟁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겪는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전작 <안개낀 거리>의 인물 설정 및 주제가 변주된 것으로 보이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형사(황해 역)가 범인(이향 역)을 쫓는다. 범인은 수사망을 피해 한국전쟁 유격대로 잠입하는데, 형사가 뒤따라 자원입대하여 그를 추적한다. 둘은 격전지의 한복판에서 조우하고 목숨이 걸린 딜레마 상황에 처한다. 영화 제목은 동족상잔의 전쟁터를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처지로 비유한 것이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창살없는 감옥>을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와 함께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군대는 단순한 아이언 오거니제이션(철의 조직체)이 아니라 인간의 결합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들고 있는 점은 무척 대견한데, 나는 지난 2년동안 3천만 인구가 모두 군복 착용을 강요당하는 듯 한 환각에서 이런 작품들을 본 것은 적으마한 위안으로 여기고 있다.” 10) (사진10) <창살없는 감옥>(강범구, 1963) 포스터. 배경에 낙하산 부대가 보인다. <창살없는 감옥>에서도 강범구는 특색 있는 액션 스펙터클을 연출하길 원했고, 그 결과 당시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낙하산 부대가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적진에 투입되는 인물들이 진격하는 모습보다는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수직 낙하 이미지에 착안하여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그리하여 공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낙하산 부대를 촬영했고, 비행기와 카메라 두 대를 동원하여 공중 촬영을 진행했다. 이 작품 또한 대만에서 <제3특공대(第3特攻隊)>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더불어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불렀던 주제가도 중국어로 번안되어 동남아 지역까지 인기를 끌어모았다. 이듬해, 1964년 강범구는 연이어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극이 전후 사회에 지속되고 있는 문제를 짚어내는 작품들을 연출한다. 원제가 ‘목격자의 증언’이었던 <당신만을 위하여>(1964)는 가부장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이 주인공이고, <동굴 속의 애욕>(1964)은 한국전쟁 당시 남편을 찾으러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빨치산 생활을 하게 된 여성을 그려냈다. (사진11)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 왼쪽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옥녀(배우 김난영)와 오른쪽 끝에 동록(배우 박노식)이 공모하여 옥녀의 남편을 살해한 혐의에 관해 심문이 진행된다. <동굴 속의 애욕>은 권순영 판사의 수필집 『법창의 봄』(1955)에 실린 같은 제목의 재판 실화가 원작이다. 한국전쟁 당시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주민들이 겪은 전쟁 체험을 다룬 이야기로, 이 지역은 본래 북한 땅이었다가 휴전 이후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역이다. ‘수복(收復)’의 사전적 의미는 잃었던 땅이나 권리 따위를 되찾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수복 지구’가 대한민국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본래 북한 주민이고 본인의 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분단선의 이동이라는 순전히 외부적 요인 때문에 남한 사람으로 귀속이 변경된 비자발적 월남인들이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공식화된 월남 동기인 ‘북괴가 싫어서’나 ‘자유를 찾아서’라는 반북·반공주의가 적용될 수 없는 사례이다. 강범구는 이러한 수복 지구 주민의 경험을 자신의 월남인 의식에 빗대어 설명한다. “난 이북사람이고 그래서. (중략) 그게 굉장히 가슴에 사무친다고. 그건 우리의 그 사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거던, 예. 그 권력 잡은 사람들이 자기네들 권력 싸움 위해서지, 우리하곤 아무 관계 없는 거야. 내가 지금 해석을 해도 그래요. 그래서 인제 그걸 바탕에 두고 인간의 그 본성을 한번 그려볼라구 했던 거죠. 그 굉장히 그땐 새롭드라구, 그 책을 보니까.” 11) <동굴 속의 애욕>은 젊은 부부가 신문에 대서특필된 살인용의자 옥녀의 재판을 구경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재판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옥녀의 유죄 여부를 가리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피고인인 동록과 옥녀 및 증인들이 진술하는 내용이 과거시점의 액자 구성으로 재현된다. 즉 액자 구성의 가장 안쪽에서 재현되는 이야기가 옥녀와 같은 북한 인민이 겪은 한국전쟁이고, 이들이 전후 현재 시점에서는 죄수복을 입고 재판을 받고 있는 남한 주민이다. 영화는 제3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들의 전사(前事)를 액자 속으로 들여다보도록 배치함으로써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고 신문 헤드라인이 담지 못한 진실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사상 때문이 아니라는’ 감독의 의도와 같이, 옥녀를 북괴의 꾀임에 속고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은 빨치산으로 도식화하지 않고, 전쟁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무고한 양민의 전쟁 경험으로 열어둔다. 강범구는 <동굴 속의 애욕>이 한국전쟁을 그리는 데 있어 오래 남을만한 이야기라고 여기며, 기회가 된다면 리메이크 해보고 싶은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12)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옥녀의 재판을 보러 온 사람들이 법원에 모여있다. 영화의 오프닝을 여는 젊은 부부를 비롯한 ‘재판 구경’ 대중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주인공을 이해와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진13)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심경의 변화를 겪는 옥녀. 극한 상황에서 분투하는 인물의 생존 본능과 욕망, 그에 따른 복잡한 심리를 표현해낸 배우 김난영의 연기가 돋보인다. <소만국경>(1964)은 강범구가 다시 액션 연출의 특기를 살려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활약을 담은 영화이다. 소련과 만주 접경지역을 배경으로 독립군과 일본군, 비적떼 등이 출몰하여 다양한 액션을 펼치는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사진14) <소만국경>(강범구, 1964) 포스터 <탈출명령>(1966)은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가 강범구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만든 한국·대만 합작영화이다. 고인하는 1960년대 초반부터 한국영화계와 교류하며 한국영화들을 대만에 소개하는 데 관심을 쏟았고, 강범구가 연출한 작품들이 대만에서 흥행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앞서 언급한 <창살없는 감옥>을 수입하여 대만에서 <제3특공대>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고, 대만뿐만 아니라 동남아 지역에서도 큰 수익을 거둔 인물이 바로 고인하이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강범구 감독과 함께 대만에서 대규모 전쟁 액션 영화를 만들길 원했다. 한국 측에서는 기획자 박민이 대영영화사 소속으로 참여하여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감독과 배우, 조감독 등이 대만으로 향했다. <탈출명령>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일본군이 세운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인물들을 탈출시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대만 아리산(阿里山) 밑에 야외세트장을 짓고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여, 일본에서 필름 현상을 했다. 대만 촬영현장에서 강범구와 주요 대만 영화 스태프들은 일제식민지 시기 성장 배경을 공유하는 동년배들이었고, 서로 일본어로 소통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만 중앙전영공사의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와 최신 영화 기재, 일본 영화인들과의 기술 교류 등을 접하고 당시 한국영화계에 비해 격차를 느꼈다고 한다. <탈출명령>은 <최후명령(最後命令)>이라는 제목으로 대만에서 개봉했으나 흥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만 영화인 고인하는 이후 강범구를 비롯한 한국영화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과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15) <탈출명령>(강범구, 1966) 포스터. 배우 신영균, 박노식, 이대엽, 손미희자 그리고 대만배우 왕모초(王莫愁) 등이 출연했다. <탈출명령>의 필름 현상 작업이 일본 도에이 현상소에서 진행될 때, 이곳에 들렸던 신상옥 감독이 <탈출명령>의 해외 로케 촬영 화면을 보고 강범구에게 베트남전 영화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제작하는 <여자베트콩 18호>의 연출을 맡아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 작품은 당시 베트남전에 파병된 국군 비둘기부대의 협조를 받아 촬영했다. 촬영 중 전투 장면을 위해 묻어둔 폭탄이 뜻하지 않게 폭발하여 조명기사 이계창이 현장에서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고, 강범구 역시 부상을 당하여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다. (사진16) <여자베트콩 18호>(강범구, 1967) 포스터. 전시 중에 제작된 영화이고, 베트콩 등장 장면을 촬영 중 실제 베트콩으로 오인 받아 미군으로부터 포위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후 강범구는 가수 남진 주연의 <울려고 내가 왔나>(1967)부터 직접 제작한 <항구의 왼손잽이>(1971)까지 음악영화, 검객영화, 반공영화, 갱스터 범죄영화 등의 다양한 작품들을 연출한다. (사진17) <울려고 내가 왔나>(강범구, 1967) 포스터. 당시 가요계의 스타 남진이 주연을 맡았다. (사진18) <대검객>(강범구, 1968) 포스터. 당시 홍콩무협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이른바 ‘칼싸움 액션’이 펼쳐지는 검객영화가 유행했다. 이 작품은 정통검술을 익힌 배우이자 무술감독인 안일력이 검술지도를 맡고 고증에 충실하여, 한국 검객물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사진19) 1960년대 활동 당시의 강범구 감독 출처:“한국감독의 50인”,[1970 영화연예연감], 국제영화사, 1969 1974년에 개봉한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은 한국의 동아수출공사와 홍콩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가 합작으로 만들었다. 동아수출공사는 강범구와 대만 영화인 고인하를 통해 골든하베스트에서 제작한 이소룡 주연작 <맹룡과강>(이소룡, 1972)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골든하베스트와 돈독한 거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대표 이우석과 이웃 관계로 일찍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초중반 동아수출공사 기획실에 근무한다. 이 시기에 그가 참여한 <일대영웅>의 홍콩측 감독 팽장귀는 한국어에 능숙한 화교였고, 한국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사진20)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 1974)의 한장면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작품 기획, 시나리오 작가 섭외 및 완성, 감독과 스태프 구성, 캐스팅, 제작 현장 및 후반작업 진행 등 작품을 구상하여 완성하기까지 전 과정을 총괄하였다. <마지막 다섯 손가락>(김선경, 1974)부터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까지 9편을 기획했는데, 그 중 <남사당>(이규환, 1975)은 이규환 감독의 은퇴기념영화로 제작되었다. 이규환 감독은 일제강점기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데뷔하여 한국영화사 초창기부터 활동한 원로 감독이었고, <남사당>은 선배 영화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담아 기획된 작품이다. 같은 해에 강범구는 김기영 감독이 <만추>(이만희, 1966)를 자기만의 색깔로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김기영, 1975)을 기획하였고, 정소영 감독의 <애수의 샌프란시스코>(1975)를 기획하여 미국 로케 촬영까지 담당했다. 또한 <걷지말고 뛰어라>(1976)로 소설가 최인호를 감독으로 데뷔시키는가 하면, 1976년에 개봉한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는 관객의 호응을 얻어 ‘진짜 진짜 시리즈’로 후속편이 이어지며 하이틴 영화 붐을 이끌었다. (사진21)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의 배우 임예진, 이덕화. 이후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를 떠나 해외로 눈을 돌려 국내보다 나은 영화제작 여건을 찾고자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만 광고영화 프로덕션 회사에서 활동 중에, 한국영화진흥공사 홍콩 법인과 연계되어 대만에 수출하는 한국영화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당시 <증언>(임권택,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1974), <섬개구리 만세>(정진우,1972) 등의 한국영화들이 대만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관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대만에서 만난 로웨이(羅維) 감독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도 거주하며, 중화권 작품 거래를 위해 서울-홍콩-대만을 오가며 지냈다. 강범구는 홍콩 골든하베스트를 비롯한 중화권 작품들을 한국에 소개하고 거래를 중개하는 역할을 했으며 골든하베스트 대표 레이 초우, 홍콩에서 활동한 제작자이자 감독 로웨이, 이한상, 오사원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 대만 영화 감독 유가창 등의 아시아 영화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강범구는 1980년대에도 한국과 홍콩 혹은 한국과 대만 영화사와 연계된 일종의 합작 형태의 작품들에 참여한다. 1988년에 개봉한 <칠소여복성>(강범구·맥담웅)까지 협업하고, 1986년경부터 1995년경까지 중화권 외화 수입 거래 중개자 역할을 해왔다. (사진22) <괴시>(강범구, 1981) 한국 최초의 좀비영화라고 불리는 미스터리 공포물 강범구가 홍콩에서 관람했던 서구 좀비영화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용하여 연출했다고 한다. 대만 배우 유광옥, 강명이 출연했다. 강범구는 1960년대 초반 “액숀·스릴러의 본산” 한흥영화사에서 활동하면서 일찍이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해외 활동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냉전 시기 분단된 영토 안에 국한된 시야에서 벗어나 보다 ‘다른’ 영화 환경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6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편을 넘어가면서 한국영화 전성기의 정점을 찍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상영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작품들과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는 영화인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유신 이후 1970년대 국가주의 영화 제도 및 규제 하에서 영화 제작 환경이 더욱 악화되자 그는 한국을 떠나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를 비롯하여 홍콩과 대만에서 영화계 네트워크를 형성한 강범구는 ‘한국의 중국통’이라고 불리우며, 한국영화와 중화권 및 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본격적인 교류에 앞장섰다. 한국영화계에 1960년대 후반부터 홍콩 검객물과 무협물이 인기를 끌면서 액션영화가 부상되었지만 정부의 영화시책 제도 관점에서는 저속, 저질영화로 저평가되었다. 하지만 관객의 부응은 이와 반대였기 때문에 한·홍 합작 액션 영화 등이 7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제작되었다. 이 시기 강범구의 연출작 목록을 살펴보면 당대 한국영화 시장에 홍콩 무협물과 액션물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경험을 통해 과거 한국-홍콩-대만 간 다양한 방식의 합작 혹은 협업 제작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과 경위에 관해 들여다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제작 관행이 각자 정책적으로 혹은 자본력 측면에서 자국 영화시장 내에서 부족한 지점들을 보완하는 자구책으로 기능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각기 합작 주체의 입장에 맞게 완성한 작품들은 자국 영화로 변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 무국적성이 비난 받기도 하지만, 이들은 애초 기획부터 내셔널시네마 범주에서 미끄러져 비본질적이며 경계가 없고, ‘경계 없음’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위장 합작이라는 명명으로 단정하기 보다는, 당시 영화 제작 환경과 영화 시장을 둘러싼 생동하는 문화 경제 및 다층적인 문화 협상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다. 강범구는 문화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영역이나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에서, 폐쇄적이거나 제한적인 문화 규제 및 정책을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전쟁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신의 영화 인생에 있어 ‘풀지 못한 숙제’로 품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반공이 국시’인 시대에 활동하면서 남북관계에 관한 성찰적인 영화 창작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장차 그는 이북으로 교류하며, 여전히 영화를 통해 폭넓은 시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아무쪼록 그의 염원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란다. 1) 이영일,「특집 한국영화 1963년」,《국제영화》 1964년 1·2월호, 63쪽. 2) 『 1970 영화연예연감 』 , 국제영화사, 1969, 434쪽. 3) 〔신영화〕 묘사 착실한 멜로드라마/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 《한국일보》, 1957년 9월 21일; “[단평] <유전의 애수>”, 《경향신문》, 1956년 7월 30일; “[신영화] 모방(模倣)에서 獨創(독창)으로/ <잃어버린 청춘>”, 《조선일보》, 1957년 9월 21일; “[신영화] <잃어버린 청춘> 수준에 이른 작품”, 《서울신문》, 1957년 9월 22일 참고. 4) “[신영화] <유전의 애수>, 한성영화사에서 제작 완료”, 《조선일보》, 1956년 6월 13일. 5) “1천만환의 오픈·센 본격화하는 제작태도”, 《경향신문》, 1960년 11월 14일 4면 참고. 6) “재재정비된 영화사순력(巡歷) ① 한국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 , 《영화세계》, 1962년 11월호, 92쪽. 7) 《영화세계》, 1962년 8월호, 45쪽; “[새 영화] 처음 시도된 본격 추리극 /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 1962년 6월 7일 4면; “[새영화] 본격적인 추리극의 시금석 / 강범구 감독 <검은 꽃잎이 질 때>”, 《서울신문》,1962년 6월 6일 4면; “본격적인 스릴러물 기획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1962년 3월 30일 4면 참고. 8) “[방울새] 때 아닌 기동대/ 영화촬영에 총동원”, 《경향신문》, 1962년 4월 29일 4면; “[스타디오 소식] <검은 꽃잎이 질 때>/ 경찰기동대도 등장/ 백주의 추격전“, 《동아일보》, 1962년 4월 29일 4면 참고. 9) 魯稚子(LU CHIH-TSE), 『世界電影欣賞 APPRECIATION OF THE WORLD FILMS』, BOOK WORLD CO., 1967, 61~62쪽. 10) 이영일, 앞의 글, 1964년. 11) 박진호,「강범구」,『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2009, 한국영상자료원, 198쪽.
[칼럼]최근 단편영화들의 어떠한 경향, 그리고 우려되는 몇 가지
최근 영화제 단편심사를 보며 느낀 경향 중 눈에 띄는 것은 '여성'과 '젠더'에 대한 영화의 증가다. 그 중 한국에서는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으로 시작되어 최근에 ‘#ME_TOO’ 운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성차별, 성폭력을 주제로 한 영화가 단연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위의 주제를 담은 편수가 증가한 만큼 그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 아쉬움과 우려가 드는 작품 또한 많았다. 무엇보다 관련 주제를 소재로만 차용하는 한계를 지닌 작품이 많았고 또는 영화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은 것에 반해 영화적 태도에 의문을 갖게 하는 영화들도 있었다. ‘폭력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영화임에도 불필요하게 디테일한 묘사랄지 카메라의 관음적 샷, 피해자를 전형적(무기력하거나 히스테릭하거나)인 캐릭터로 구현한 영화들이 많았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여성혐오 범죄의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들도 있었는데 이 영화 중 동일한 우려가 드는 작품들이 있었다. 주인공의 가해행위에 대해 인과 관계의 서사를 부여하고 연민의 관점을 택한 영화들도 볼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위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들의 또 하나의 경향은 폭력을 재순환시키는 방식이다. 영화 속 가해자를 단죄하는 방식으로 실제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영화들이 많았다. 서사의 극대화를 위한 ‘반전’ 코드로 폭력을 재생산하거나 폭력의 정당성을 취하려는 방식이 많았는데 반전의 통쾌함보다 씁쓸함을 남겨 주었다. 이러한 영화들을 보며 영화가 지녀야 하는 윤리적인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고민이 들었다. 그 중 이러한 고민이 느껴지는 두 편의 영화가 눈에 띄었다. < 신기록 >과 < 증언 >이다. < 신기록 > 경찰 공무원이 되기 위해 체력시험을 준비 중인 소진을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일방적인 고백을 해오는 영민이다. 알려준 적 없는 집에 찾아오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선물을 놓고 가기도 한다. 그녀의 주변인들은 남녀 간의 밀당 정도로 여기고 소진의 정보를 무신경하게 알려주거나 훈수를 두기도 한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달리기 시험을 준비 중인 소진은 철봉에 매달리기 연습을 하는 현숙을 보게 된다. 요령이 없는 현숙은 자꾸 철봉에서 떨어진다. 영화 < 신기록 >은 약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전반의 혐오, 남녀의 사정으로 치부되는 데이트 폭력, 그를 벗어나기 위한 안전한 이별 등 최근에서야 주목을 받고 있는 여성이 겪는 불안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예민한 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얼마나 일상적인 것인지 영화전반에 세심한 태도로 배치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소진과 현숙이라는 캐릭터다. 기존 영화들에서 피해여성을 무기력하거나 불가해하게 그린 것과 다르게 소진과 현숙은 폭력을 탈피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각자의 불안을 극복하고자 서로가 연대한다. 엔딩에 이르러 그들의 잡은 손을 볼 때 뭉클한 이유다. < 증언 > 또 다른 영화 < 증언 >은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와 피해자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을 담고 있다. 혜인은 대기업 면접을 앞두고 계약만료로 그만둔 전 회사에 경력증명서를 받으러 간다. 하지만 그보다 오늘은 꼭, 간식 값을 핑계로 혜인의 돈 67,600원을 갚지 않은 이 과장에게 돈을 받을 예정이다. 하지만 이 과장은 5만원만 내밀고 심지어 그 돈으로 간식을 사오라고 한다. 간식을 함께 사러가던 오대리가 혜인에게 어렵게 말을 건다. 부장의 성희롱을 증언해 달라는 부탁이다. < 증언 >은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담고 있는 영화다. 피해자에게 원인유발의 책임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 그런 피해자를 대상화하거나 배척시키는 시선, 혹은 피해자의 말을 믿지 않고 증거와 팩트를 요구하는 심판관적 태도 등. 더불어 사건이 발생한 공간, 회사라는 권력구조의 공간 안에서 위계별로 위치한 개인들의 이해관계를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위계관계는 동성 간에도 발생하며 사건을 바라보는 각자의 입장 또한 각각이 위치한 위계관계에 기반 한다. < 증언 > 혜인은 영화 < 증언 > 속 여러 인물들의 태도와 관계 가운데 자신은 어떠한 시선을 지녀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런 혜인을 통해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저들 가운데 나는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 용기를 내기까지 거듭 고민하고, 고민가운데 옳다고 믿는 것을 찾아가는 혜인의 성장을 통해 영화를 보는 이들도 용기를 낼 수 있기를, 감독은 말하고 있다. 영화로써 소재를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사건과 피해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그 가운데 나와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 동일한 주제를 담은 작품들 가운데 이것들을 깊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 신기록 >과 < 증언 >이 눈에 띄는 이유다.
[한국영화걸작선]바람불어 좋은날: 7월의 영화
1980년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적인 개성은, 각자의 대사와 (완성형의) 자기 플롯이 있는 인물들이 무려 열다섯 명에 달한다는 것이고, 모두 뚜렷하게 구별이 가면서 그 필요를 인정할 만큼 생생하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세 청년을 중심으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도시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좌절과 상실을 주로 주목하지만, 그들이 만나는 여러 다양한 개성의 이웃들 또한 보기만큼 가볍거나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방향이 잘 설정되어 있고, 그 인물들이 틀림없는 순간과 장소에 정확하게 등장했다가 퇴장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성취인 것이다. 관심이 가고 주목이 되는 수많은 인물들을 스크린 위에 쏟아놓은 뒤, 교통정리를 잘 해가면서 각자가 내려야 할 도착지로 능숙하게 데리고 가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전 만들어진 영화의 것이라 해도 매번 놀랍고 감탄스럽다. 세 청년들의 쓰라린 정착 초기 모습을 발랄하게 스케치한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철가방을 든 젊은 얼굴의 안성기 가 등장한다. 덕배라는 이름의 어리숙한 이 중국집 배달부는 이후 유지인 이 연기하는 상류층 여성인 명희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로맨스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들의 플롯은 덕배로 하여금 결국 권투선수가 되어 이 영화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그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줄곧 맞아온 것처럼 생각되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맞아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를 내뱉게 하도록 작동한다. 그러니까 다들 엇비슷한 러닝타임을 가져가고 있는 터라, 딱히 누구의 이야기라 정리하기에 애매한 이들 청년의 플롯 중에서도, 굳이 ‘주인공’이라고 부를 만한 캐릭터를 꼽자면, 당시 가장 인지도 있는 배우( 안성기 )가 연기한 이 ‘덕배’라는 캐릭터일 것이다. 즉, 사나운 개가 핥고 있는 빈 그릇을 가져가지 못해 쩔쩔 매다 주인에게 비웃음이나 당하던 중국집 배달부의 앞모습이 이 영화의 오프닝이고, ‘이젠 맞아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는 보이스-오버와 함께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날리는 권투선수의 뒷모습이 엔딩이라면, 이 영화가 결국 ‘덕배’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이야기라 해도 무리가 없는 해석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종착점이었고, 그 마지막 보이스-오버가 이 영화를 정리해내는 한 줄 테마였다는 사실을 적용시켜보면, ‘덕배’야말로 수많은 인물들의 플롯이 씨줄날줄로 엮이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덕배가 권투선수의 마음을 가지고 영화 밖으로 퇴장하게 되기까지, 그를 조력했던 다른 두 청년의 플롯을 하나씩 짚어보자. 이영호 가 연기한 이발소 직원 ‘춘식’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미스 유( 김보연 )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단골손님이자 땅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김회장의 노골적인 추파를 받는다. 미스 유는 춘식에 대한 애정이 없진 않지만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아픈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춘식과 미래를 약속할 수도 없다. 유럽의 복지국가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하며 자신의 꿈을 부끄럽게 고백하는 송전탑 아래 두 사람의 데이트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사무치게 아름다운 씬이 될 자격이 있다. 결국 이들의 플롯은 춘식이 김회장을 살인미수하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돌진하는데, 버림받은 아이처럼 자주 울컥하던 춘식의 영화 속 마지막 얼굴이 카메라를 향해 죽을 듯 울부짖는 클로즈업이라는 사실을 적용시켜보면, 온통 공사판인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이나 높은 언덕에서 자주 만나 속마음을 주고받던 이 두 사람이야말로 영화의 진짜 심장이나 다름없다는 생각과 마침내 만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성찬 이 연기한 ‘길남’은 여관에서 일하며 근처 미용실 직원 진옥과 연애하는 청년이다. 그의 꿈은 언젠가 평등하게 누구나 입장할 수 있는 호텔을 여는 것이며, 아예 어리숙하거나 자주 울컥하는 다른 두 친구와는 달리, 길남은 세속적이면서도 대체로 긍정적이고 매사에 웃고 다니며 가끔 실없다. 그의 플롯은, 자신이 결혼상대로 생각해 맡겨둔 돈을 진옥이 들고 도망치자 망연자실하고 결국 군대에 끌려가는 것이다. 여기서 ‘끌려간다’는 표현은, 영장이 나왔다는 사실을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결국 다 끝나버렸다는 듯 오열하며 말하는 장면이 숨기고 있는 감정에서 짐작가능하다. 춘식은 감옥에 갔고, 길남은 입대했으며 덕배는 권투선수가 되었다. 아니, 춘식이 감옥에 갔고, 길남이 군대에 끌려갔기 때문에 덕배가 권투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들이 스치듯 만나고 헤어졌거나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고 미워했던 이웃들도 있었기에 더욱 더 그는 권투선수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영화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 안의 인물들도 모두 퇴장한지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2018년의 지금, 그들은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을까. 그 사람들은 어떤 현재를 보내고 있으며,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무엇보다, 아직까지 서로 만나는 친구사이일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은 볼 때마다 그런 궁금증들을 남기는 영화로 매년 나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