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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연재]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천당의 밤과 안개>(정성일, 2018)
1 < 천당의 밤과 안개 >(2018, 정성일 )는 정성일과 왕빙의 영화들이 함께 머무르며 생성되는 터이자 그곳에 세워질 집을 닮았다. 하지만 이 집엔 설계도가 없다. 구획된 면적과 적합한 수치도 없거니와 중요한 재료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완성된 집을 가늠할 수 있는 청사진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집이다. 게다가 이 집은 언제 완성될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영화가 짓고자 하는 집은 오랜 시간을 들여도 허름한 형태거나 미완의 상태에 가까울 것 같다. 집의 모양을 고수할 수 있는 굳건한 재료들보다 얽어놓고 간신히 기대놓은 나무들과 부석거리며 바스러지는 흙과 돌덩이의 질감이 드문드문 남아 있을 것이다. 공백과 진공만이 그 영화들에 허용된 재료일지 모른다. 계획이 별 소용없는 상황, 할 수 있는 것들조차 제한적인 상황, 사람의 의지로 이끌어갈 수 없는 상황, 목적지를 찾아가고도 길에서 시간을 버텨내야 되는 상황이 오히려 이 영화의 단호함과 투명함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정할 수 없는 집을 함께 짓기로 결단한 왕빙과 정성일의 단호한 태도 때문에 감동적이고, 좀처럼 나아가지 않은 지체된 순간을 견뎌내는 인내 때문에 특별하다. 이 영화는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삶의 가능성과 믿음을 가늠하는 영화이자 흙먼지와 광인들의 뜻 모를 노래와 중얼거리는 말, 농민들이 청하는 술 한 잔, 아이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눈과 안개 속에서 존엄함을 드러내는 영화가 되어간다. 제목에 표기된 천당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한다. 하늘에 있는 낙원 혹은 신의 집을 뜻하는 天堂은 뿌연 먼지로 둘러싸인 남산타워부터 중국의 하늘과 길, 영화의전당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가 스쳐 지나가고 잠시 머무르고 통과하는 모든 곳을 포함한다. 천당은 왕빙을 만나야겠다는 결심과 영화를 찍어가는 여정, 만들어진 영화와 마주하는 극장으로 번져가고 넓어진다. 그뿐 아니다. 중국의 인민들이 살아가는 고산지대와 농촌, 길게 뻗은 길을 따라 높아지는 건물과 공사 현장이 펼쳐지거나 터널을 통과하면 바뀌는 변화무쌍한 햇빛과 나무의 품종, 황갈색으로 변해가는 산세도 천당의 풍광이다. 높은 산을 오르는 노동자들의 사뿐한 걸음걸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는 농민의 주름진 얼굴, 타지를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노동자의 볼품없는 살림살이, <세 자매>(2012)를 찍으며 얻은 병으로 몸이 좋지 않은 왕빙이 잠시 누워 밤을 청하는 작은 소파와 정신병원에 갇힌 광인들의 작은 병상도 천당이다. 그리고 스스로 찾아온 스크린을 마주하는 또 한 편의 영화(배우 정인선이 연기한 그녀이기도 하다)와 극장도 천당의 모습으로 변주된다. 2 <천당의 밤과 안개>는 왕빙의 리듬을 헤치지 않으면서 조용히 뒤따르기로 결심한 정성일의 카메라 작동 원칙을 끝까지 고수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카메라는 왕빙의 카메라와 그의 스틸 카메라, 정성일의 카메라인데, 카메라들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카메라를 든 자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과 인민들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삶이란 간접적으로 배울 수 없다는 원칙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카메라들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프레임 안에 담기는 인물들은 카메라 주위로 몰려들어 빤히 쳐다보거나 흘깃거린 후 프레임을 벗어나며 카메라가 있건 말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그곳에 있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카메라의 투명성은 영화의 인민들뿐 아니라 왕빙과 정성일의 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들은 왕래하지 않고도, 서로 의논하지 않고도, 전작과 작업 중인 영화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도 서로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 왕빙은 정성일의 카메라가 작동을 멈춰야 된다고 생각하면 카메라를 꺼줄 것을 요청하고 정성일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원을 꺼버린다. 캠코더를 들고 가지 않은 왕빙이 정성일의 카메라를 빌려달라고 말한 후에 이어지는 쇼트는 정성일의 카메라로 왕빙이 촬영한 것인지, 정성일이 이어서 촬영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두 대의 카메라가 함께 활동하는 데 원칙은 단 하나,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영화에 담길 인민들이나 공간, 그들의 카메라가 투명한 시선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촬영 기계를 들고 있는 행위와 뷰파인더로 인민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두 대의 카메라가 기록하고 있는 시.공간이 관통해서 우리들에게까지 도달한다. 프레임에 카메라가 두 대나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기록 장치인 물질은 망각되고 공간을 채우는 인민들의 모습으로 채워진 영화가 되어간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카메라를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정신병원은 사각형의 건물이고 중앙에 마당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병원의 정문(정신병원이라는 간판)과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광인들이나 병원을 나서는 왕빙의 뒷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전체 공간을 조망하는 쇼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체를 찍을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다는 조건이 이 영화가 방문할 수 있는 장소를 제한했고, <천당의 밤과 안개>는 예측하거나 계획할 수 없기에 카메라가 다가갈 수 없는 곳을 엿보거나 기웃거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복도 이편에 왕빙의 카메라가 있으면 정성일은 건너편에 카메라를 놓아두고 광인들을 촬영하는 왕빙을 바라본다. 왕빙이 자리를 옮기면 정성일도 왕빙(과 광인들)의 동선을 거스르지 않는 위치에 카메라를 놓아둔다. 사각형의 건물을 따라가는 핸드헬드도 예외적으로 등장하고 상황에 따른 기민한 쇼트 전환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는 마치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들처럼 애초에 시선의 마주함이 불가능한 현실에 놓여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오즈의 영화에서 180도 가상선을 침범하는 카메라가 오히려 그들의 공간적 맥락을 지워버리는 것처럼 카메라를 든 두 사람과 이 영화는 카메라를 없는 존재로 여기면서도 프레임 가득 광인 개개인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끊임없는 움직임, 스산한 공간에 스며든 웅성거림과 휘갈긴 낙서들을 빼곡하게 기록한다. 3 <천당의 밤과 안개>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왕빙의 원칙과 태도를 탐구하기 위해 그 현장에 동행한 정성일의 요청이 모두 담긴 결과물이다. 두 사람의 협업이 아님에도 이 영화는 왕빙이 찍었던 영화(<세 자매>(2012))와 찍고 있는 영화(<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13))와 정성일이 찍었던 < 카페 느와르 >(2010)와 찍게 될 영화(< 녹차의 중력 >(2018))가 공존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같은 공간을 찾아가고 같은 인민의 삶을 지켜보면서 규정될 수 없고 쉽게 파악되지 않는 사건과 마주하면서 그들의 카메라 사이를, 그들의 영화들 사이를 지나가는 힘의 작용이 감지되는 것 같다. 정신병동을 예로 들면, 왕빙의 카메라에 담긴 광인들의 현실이 이편에 놓여 있고 다른 편에 광인을 찍고 있는 왕빙의 현실이 존재한다. 두 대의 카메라는 두 종류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천당의 밤과 안개>는 두 종류의 현실을 동일한 성질의 현실로 생각한다. 왕빙의 말처럼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 감정의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 곧 영화이며 카메라 앞에 있는 사람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과정의 실천이 곧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성일의 결단은 일체의 개입이 불필요한 현실의 힘들이 부딪히고 파열하고 사그라지는 삶의 강력함에 대한 항복이라 부를만하기 때문이다. 두 대의 카메라가 동일한 현실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 영화의 힘이다. 왕빙의 카메라 지척에 존재하는 광인들, 그들 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있는 왕빙의 카메라, 왕빙의 카메라를 위치삼아 자신의 자리를 조용하게 찾아가는 정성일의 카메라가 거리낌 없이, 불편함 없이, 침범함 없이 그곳에 놓여 있을 뿐이기에 감동적이다. <천당의 밤과 안개>에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불현듯 나타나고 불시에 사라진다. 나는 왕빙과 정성일이 겪은, 지체되는 상황으로 인해 더 오래 볼 수 있었던 얼굴들과 표정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자꾸만 어긋나는 약속, 정체되는 기다림,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몇 날을 달려가야 하는 머나먼 길,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산과 나무들, 수시로 바뀌는 햇살의 강도와 그림자의 길이, 우연히 만난 농민들의 주름진 얼굴과 친절한 미소, 긴 철근을 어깨에 받치고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노동자의 걸음,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고된 생활을 증명하는 살림살이와 얼룩진 벽, 마당을 한가롭게 돌아다니는 닭과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개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광인들의 눈동자와 천진한 미소, 마침내 이름 모를 마을에 멈춰선 정성일의 끈덕진 응시와 같은 순간들이다.
[한국영화사100년]2000 ~ 2004년 - 21세기 한국영화의 장대한 출발
<올드보이>의 시그너처 장면. 장도리를 든 오대수(최민식)는 장엄한 롱테이크 액션 신을 펼친다 200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산업 드디어 한국영화는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 100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바라마지않던 영화기업화의 실현을 목전에 둔 것이다. 2000년대 한국영화는 1990년대 후반에 감지된 르네상스의 기운을 주저 없이 밀고 나갔다. 무엇보다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이와 연동해 전체 산업 규모까지 확대되었다. 먼저 지표상의 수치를 확인해보자. 1999년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49편, 평균 제작비가 19억 원이었는데, 2003년부터 제작 편수는 80편을 넘었고 편당 제작비도 40억 원을 넘겼다. 영화산업의 기반인 전국 스크린 수는 1998년 507개, 1999년 588개에서 2003년 1132개, 2004년 1451개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전국의 영화관이 속속 멀티플렉스 체인으로 전환되며 스크린 숫자가 급증한 것이다. 이에 외국영화를 포함한 전체 관객 수는 1999년 5472만 명에서 2003년 1억 1947만 명, 2004년 1억 3517만 명으로 두 배 이상의 증가세를 보였다. 주목할 부분은 전체 관객 수 중 특히 한국영화 관객이 증가한 것이다. 1999년 2172만 명에서 2003년 6391만 명, 2004년 8019만 명으로 매년 폭증하면서, 제작 현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99년 <쉬리>(강제규)가 만들어낸 한국영화 붐과 포스트 <쉬리> 효과로 인해 1998년 25.1%에서 1999년 39.7%로 상승했던 한국영화 점유율은, 2001년 50%를 넘어서더니 2004년에는 59.3%에 달하며 60%대를 넘보게 된다(영화진흥위원회 각 연도 ‘한국영화산업결산’ 참조). 비록 스크린 수익에 한정되긴 했지만, 한국영화의 흥행 수익이 제작 비용으로 선순환되는 이상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의 영화산업은 충무로 토착 자본의 약화 그리고 대기업 자본의 지배력 강화로 설명할 수 있다. 새판을 짜기 시작한 대기업의 과감한 행보에 충무로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내준 것이다. 사실 1998년 IMF외환위기 여파로 시장에서 한차례 철수했던 대기업들은, 영화산업 규모가 커지고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부가 시장의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다시 흥행 게임에 나섰다. 바로 CJ엔터테인먼트(2000년 제일제당에서 독립), 오리온 계열의 쇼박스(2002년 설립) 그리고 롯데엔터테인먼트(2005년 설립)가 대표 주자들이었다. 2002~2003년은 충무로 토착 자본을 상징하는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의 2강 체제가 이루어졌고,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를 위시로 쇼박스가 두각을 나타내며 3강 체제로 재편되었다. 우선 각 회사를 살펴보자. 강우석 프로덕션이 모태인 시네마서비스(1994년 설립)는, 서울극장의 전국 배급망과 투자 배급에 대한 강우석의 뛰어난 감각이 만난 결과였다. CJ엔터테인먼트(현 CJ ENM)는, 1998년 CGV강변11을 위시로 멀티플렉스 극장 사업에 진출하며 배급과 흥행 기반을 닦아온 CJ가 만든 미디어 기업이다. 쇼박스는, 2000년 삼성동 코엑스에 메가박스를 지으며 멀티플렉스 사업에 뛰어든 오리온그룹이 출범시킨 투자배급사였다.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시네마서비스(2002년 플래너스로 사명 변경)는 각각 CGV, 메가박스, 프리머스시네마라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망을 확보하며 제작?투자-배급-상영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구축했다. 2004년 CJ가 시네마서비스의 프리머스를 인수하고 시네마서비스가 다시 프로덕션의 역할로만 물러난 것은, 한국영화산업이 기존의 충무로 질서가 아닌 대기업 자본 체제로 재편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이후 2010년대로 이어지는 CJ의 독주를 예견한 사건이기도 했다. <올드보이> 촬영현장. 왼쪽부터 대수 역의 최민식, 우진역의 유지태 그리고 감독 박찬욱 21세기 한국영화의 핵심 가치 한국 영화산업에서 2000년대 초중반 시기가 중요한 것은, 영화산업의 성장에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들이 과감히 시도되고 또 이것들이 성과로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키워드는 산업의 양적 성장을 대변하는 ‘천만 영화’, 질적 성장을 상징하는 ‘웰메이드 영화’ 그리고 글로벌 영화로 도약을 예견하는 ‘한류’ 등이다. 천만 영화의 기운을 만들어낸 것은 단연코 <쉬리>의 공이 크다. 1999년 ‘단돈’ 28억 원의 제작비로 전국 62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산업의 파이를 확장했다. 이어 한국영화산업은 2001년 810만 관객을 동원한 <친구>(곽경택)의 경험을 디딤돌 삼아, 2004년 두 편의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들어낸다. 2003년 12월에 개봉한 <실미도>(강우석)와 2004년 2월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가 각각 4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동시 개봉해 11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이는 분명 그전의 한국영화산업이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두 편이 촉발한 천만 관객 시대가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한국영화산업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슈인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이때 시작되었다. 영화 한류(韓流) 역시 <쉬리>의 역할이 컸다. 남북 관계를 첩보액션 장르로 밀도 있게 연출한 <쉬리>는 2000년 일본의 전국 150개관에서 동시개봉하며 130만의 관객을 동원한다. 잇달아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2000),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2001)가 흥행에 성공했고 <내 머리속의 지우개>(이재한, 2004)가 30억 엔 수익을 올리며 한류 열풍의 정점을 찍었다. 드라마와 공조한 영화 한류는 한국영화 수출의 일등 공신이었고, 이후 2010년대 한국영화가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글로벌 영화를 꿈꾸는 시험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영화 한류 또한 명암이 존재했는데, 영화의 주요 수출 지역이 아시아 권역, 특히 일본에 집중된 것이 한계였다. 2005년 말부터 일본 시장에서 한국영화 흥행이 참패하자 해외 수출액 자체가 급감한 배경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붐을 일으킨 한류가 글로벌 한국영화를 시도하는 한 축이었다면, 또 다른 축은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지역의 관심이었다.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등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가 예술영화 배급 라인을 타고 한국영화의 미학을 알렸다. 전자의 두 감독이 많은 관객을 목표로 하지 않는 순수한 예술영화 진영인 데 비해, 후자의 두 감독은 대중과의 접점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장르영화로 승부를 내며 스타 감독으로 등극했다. 박찬욱, 봉준호는 각각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2003년 <살인의 추억>을 내놓으며 ‘대중적 작가주의’라는 새로운 인식 기준을 제시한다. 이는 ‘웰메이드(well-made) 영화’ 논의로 연결된다. 이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이다. <살인의 추억>(봉준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올드보이>(박찬욱), <장화, 홍련>(김지운) 네 작품 모두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5위권에 들자, ‘돈 버는 영화’와 ‘공들여 잘 만든 영화’의 간극이 없어진 것을 포착한 영화 저널과 비평가들이 내놓은 용어다. 특히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한 <올드보이>(326만 명 동원)가 이듬해 제57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까지 받은 것은 웰메이드 담론의 핵심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덕분에 2000년 흥행 1위를 차지한 박찬욱의 전작 <공동경비구역 JSA>(583만 명)는 한국영화의 웰메이드 시대를 연 것으로 재정의되기도 했다. 상업영화라는 한계를 안고서도 감독의 연출력을 최대한 밀어붙여 만든 영화가 작품성도 인정받고 흥행에도 성공한다면 그것은 영화산업의 가장 건강한 모습일 것이다. 그 중심에는 박찬욱 영화가 자리한다. 그는 21세기 한국영화가 세계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세계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감독이 되었다. 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찬욱은 서강대 철학과 재학 시절 히치콕의 <현기증>(1958)을 본 뒤 영화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영화광으로 살아가던 그는 졸업과 동시에 충무로 현장으로 뛰어든다. 충무로 시절은 그에게 시련을 안겼지만, 단련과 성장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장호 감독의 ‘판영화사’가 제작한 <깜동>(유영진, 1988)의 연출부를 거쳐, 곽재용 감독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1989)에서 각본과 조감독을 맡았다가 중도 하차했다. 그리고 <달은…해가 꾸는 꿈>(1992)으로 비교적 빨리 감독 데뷔를 했지만, 소수 마니아들만의 지지로 그친다. 이후 영화평론가로 살던 그는 다시 <3인조>(1997)를 내놓았지만 역시 흥행에 실패했다. 그가 비주류 감독에서 흥행 감독으로 단박에 올라선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다. 충무로에 새로운 바람이 불던 시기, 명필름의 프로듀싱 능력과 장르영화에 대한 그의 감각이 행복하게 조우한 결과였다. 그리고 복수 3부작이 펼쳐진다.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 다시 대중적 화법과 멀어지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올드보이>에서는 대중성과 작가주의 미학의 접점을 찾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2005)로 대중의 영화 감각을 끌어올리는 그만의 연출력을 각인한다. 이후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서 디지털 영화 미학을 실험한 뒤, 2009년 <박쥐>로 다시 칸영화제의 선택(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이후 미국에서 영어 영화 <스토커>(2013)를 내놓았고, <아가씨>(2016)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과 428만의 관객 동원으로 대중적 성공까지 동시에 이뤘다. 영국과 북미에서 크게 성공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 최초로 영국아카데미영화상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라 수상까지 한다. 몬스터의 기억을 지운 오대수는 다시 미도와 만난다 <올드보이>가 개척한 대중미학적 경지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남자, 오대수(최민식)는 영문도 모른 채 사설 감옥에 갇혀 군만두만 먹고 지낸다. 15년 되던 해 겨우 벽을 뚫어 바깥 공기를 쐬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세상에 내보내진다. 우연히 들른 일식집에서 미도(강혜정)를 만난 그에게 이우진(유지태)의 전화가 걸려온다. 왜 갇혔는지 알고 싶으면 자신을 찾아오라는 것이다. 복수의 몬스터가 된 대수는 사설 감옥의 위치를 찾아내 스무 명도 넘는 패거리를 혼자서 상대하며, 그 유명한 장도리 액션 신을 펼친다. 수평 트래킹 기법으로 완성된 2분 40초에 달하는 롱테이크는 이제 세계영화사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하지만 감옥방 사장(오달수)은 진정한 복수 상대가 아니었다. 우진이 대수를 찾아와 말한다. 복수하면 즉 자기를 죽이면, 갇혀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없지 않으냐며 5일의 시간을 줄 테니 이유를 알아내라고 한다. 그러면 스스로 죽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우진이 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끌리는 대수와 미도는 관계를 가지고, 대수는 잊고 있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이우진, 이수아 남매의 관계를 기억해낸다. 이제 이유를 알았으니 그의 복수가 시작된다. 하지만 우진은 미도가 그의 딸임을 알려주고, 대수는 스스로 혀를 잘라 사죄한다. 결국 대수의 복수는 실패한 것이다. 우진 역시 완전한 복수에는 실패한다. 남매에 관한 소문의 근원인 대수를 단죄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지만, 누나를 죽인 것이, 정확히 말하면 죽도록 방조한 것이 우진이라며 대수가 그의 무의식에 새겨진 죄의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우진은 미도에게 대수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스스로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최면술사의 도움으로 기억을 지운 대수는 미도와 다시 조우한다. 이제 그는 미도가 딸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대수는 몬스터의 기억을 완전히 지웠을까? 영화는 스릴러에 액션을 가미한 장르를 취하고 시종일관 관객의 눈을 사로잡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또 장면 장면에 정교하게 설계된 블랙 유머로, 관객과의 소통에도 성공한다. 특히 대사와 내레이션을 오가는 대수의 문어체 화법과 이에 조응하거나 어긋나는 장면들이 그렇다. 영화는 지극히 폭력적이지만 영리한 연출 덕분에 고어(gore)적 이미지가 직접 제시되는 것은 피해가고, 이 역시 블랙 유머와 결합하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대수와 감금방 사장이 등장하는 신들이 인상적인 이유다. 또 이 영화에서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운을 뗀 그의 양식적 미장센이 본격적으로 발화한다. 이제는 박찬욱 사단이 된 미술감독 류성희, 촬영감독 정정훈 등이 합류한 덕분인데, 이후 그의 영화 세계가 공고해지는 결정적인 기반이 된다. 작가주의적 인장이 새겨진 공들인 미장센과 더불어 대중영화 특유의 몰입감까지 만들어내는 한국영화, 바로 <올드보이>가 출발점이었다. 웰메이드 영화의 또 다른 경지 2006년 한국영화는 최고의 호황을 기록하며 산업의 최대치를 보여줬고, 박찬욱이 선취한 대중적 작가주의는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한 봉준호의 <괴물>이 또 다른 수준으로 확장했다. 2000년대 이후 박찬욱, 봉준호가 구축해온 영화 세계는 진지한 관찰의 대상임에 분명하다. 이후 2010년대 한국영화는 산업적으로 더욱 성장했음에도 시스템의 안락함에 매몰돼, 2000년대 한국영화가 개척한 ‘대중적 작가주의’라는 야심만만한 시도를 더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엄밀한 학술 용어는 아니지만, ‘웰메이드’를 2000년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로 곱씹어봐야 하는 이유다.
[월간스크린]사랑이… 변한다: <봄날은 간다>(허진호, 2001)
2001년 | 싸이더스 감독: 허진호 | 각본: 류장하 이숙연 신준호 허진호 | 제작: 차승재 진가신 히데시 미야지마 | 촬영: 김형구 | 미술: 박일현 | 음악: 조성우 CAST 상우: 유지태 | 은수: 이영애 | 할머니: 백성희 | 아버지: 박인환 | 고모: 신신애 허진호 감독의 < 봄날은 간다 >(2001)는 그의 데뷔작 < 8월의 크리스마스 >(1998)과 함께 한국의 멜로, 로맨스 장르를 이야기할 때 영원히 언급될 작품입니다. “사랑이 변하니…” “라면 먹고 갈래요?” 같은 대사들의 일상적 울림과 함께, 이 영화는 ‘연애’라는 관계에 깃들어 있는 씁쓸한 감정들을 리얼하게 드러냅니다. 현장 공개는 2001년 여름에 있었습니다.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에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장면이었죠. 묵호시 삼본아파트 앞, 해안도로와 바다가 함께 하는 그곳. 버스에서 내린 은수는 상우에게 다가가 이별의 말을 전합니다. 현장은 너무나 조용했는데요, 가끔 새 소리나 동네 아낙들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습니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너 나 사랑하니? (침묵) 사랑이 변하니… (침묵) 헤어지자…” 연인이 이별하는 일반적인 장면이지만, 그 감정을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하는 건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허진호 감독은 ‘숏-리버스 숏’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테이크를 사용합니다. “두 사람의 시간이 실시간으로 한 번에 진행될 때와, 시간을 잘라서 붙여 놓았을 때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에요. 난 전자의 느낌이 더 좋았어요.” 이 영화의 카메라는 김형구 촬영감독(맨 오른쪽)이 잡았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데요, 김형구 촬영감독은 유 감독님의 촬영부 출신이었죠. 허진호 감독은 현장에서 스스로를 “헤매는 스타일”이라고 말하는데요, “설명도 안 하고, OK 사인도 잘 안 주고 그러는데, 스태프들이 많이 이해해주었다”고 고마움을 전합니다. 은수는 사랑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어쩌면 사랑을 믿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영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독님은 물론 배우와 스태프를 통틀어서 아무도 은수에 대해 똑 부러지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기가 참 어려운 인물이에요. 하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고요.” 버스 안 현장 모습입니다. 모자를 쓴 허진호 감독 뒤로 류장하 조감독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는데요, <8월의 크리스마스> 조감독이기도 했죠. 2004년엔 < 꽃피는 봄이 오면 >으로 감독 데뷔했고 < 순정만화 >(2008) < 더 펜션 >(2018)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2월 3일에 5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한번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두 배우의 연기를 허진호 감독이 미소 지으며 보고 있네요. 이영애는 자신과 유지태와 허진호 감독의 성격이 비슷했고, 그래서 현장에서 잘 맞았다고 하네요. 한편 허진호 감독은 “과연 사랑은 변할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변하는 것 같아요. 그게 나쁜 것도 아닌 것 같고. 사람 자체가 변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는 것도 좋지만, 변해가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한다면 행복해지는 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허진호 감독은 은수라는 캐릭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은수도 혼자 있을 때는 힘들어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는 활발하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여자예요. 그래서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우는 사랑을 처음 해보는 거니까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은수는 사랑이 없어지면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부정해버릴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에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가 자신에게 “일종의 실험”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채워나가는 느낌의 연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자연스러움’을 경계해야 했고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의 감정 연기가 조금은 달랐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짜 감정을 다루니까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정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하고 슬퍼하진 않잖아요. 실제로는 직장에 나가 일도 하고 그러죠. 영화 속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는 신이 있는데, 속으로는 슬프고 힘들지만 둘 다 겉으로는 슬퍼하지 않아요. 그런 내재된 슬픔이 보는 사람에게 전이될 수 있는 영화가 <봄날은 간다>라고 생각해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영애는 “슬펐다”며, 그래도 좋았던 건 ‘소리’였다고 합니다. “평소 자연의 소리에 민감한 편이었고 관심도 많았기에 소리를 채집하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한편 유지태는 “멜로 영화 같지 않다”는 게 첫인상이었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슬픔을 다룬 영화거든요. 누구나 슬픔이 있잖아요. 사랑하고, 헤어지고, 잊혀지는 슬픔.” “이 신에선 상우가 화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은수가 나가니까 좀 이상한데.”(허진호)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이영애) “그럼 이번엔 제가 나가는 걸로 한 번 해볼게요.”(유지태) 세 사람은 하나의 테이크가 끝나면 마치 오누이들처럼 소곤소곤 모니터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다음 테이크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은 쉴 새 없이 변했는데요, 은수가 상우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상우가 그 손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대사를 빼기도 하고, 은수와 상우가 번갈아 가며 화면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그렇게 10번이 넘는 테이크가 이어졌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봄날은 간다>에서 되도록이면 설정하지 않고, 콘티도 만들지 않고, 상황만 던져준 채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각자 포커스를 달리한 두 배우의 투 숏입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의 첫인상을 ‘맑다’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데요, 촬영 전에 상우는 어떤 사람일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영애는 첫 만남부터 조금 남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하네요. < 선물 >( 오기환 , 2001) 현장에서 바로 올라왔는데, 공항인가 역 화장실에서 막 세수를 한 맨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에서 “물이 안 채워진 유리잔처럼 배우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빈 잔에 물이 조금씩 채워져서 찰랑찰랑 넘칠 때쯤 영화가 개봉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백지상태에서 함께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가길 바라셨던 거죠.” <봄날은 간다>는 한국의 싸이더스의 홍콩의 어플라우즈 픽쳐스와 일본의 쇼치쿠가 공동 제작한 영화입니다. 제작 발표회에서 각국 제작진과 배우, 감독이 함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맨 오른쪽에 홍콩의 제작자인 진가신 감독이 보이네요. <봄날은 간다>는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의 이야기”라는 설정에서 발전한 영화입니다. 그러면서 작가들과 영화사 기획실 사람들의 연애담들이 하나둘씩 보태졌고, 그렇게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8월의 크리스마스>에 비하면 <봄날은 간다>는 훨씬 더 거칠고 현실적이며 기복이 큰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한국영화걸작선]수학여행: 3월의 영화 Ⅱ
눈이 바쁜 영화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모든 관객이 같은 스크린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극장의 스크린은 인간의 신체보다 크고 인간의 눈은 생각보다 작은 이미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 어떤 관객은 스크린 중앙에 등장한 주연 배우의 얼굴을 보겠지만 어떤 관객은 스크린 왼쪽 아래의 풀과 나무가 흔들리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다. 어떤 관객은 전경의 인물에 집중한다면 또 다른 관객은 후경의 건물에 집중할 수도 있다. 100명의 관객이 있다면 100개의 서로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어떤 관객도 옆에 앉은 관객과 같은 영화를 볼 수는 없다. 많은 경우 감독들은 화면의 구도와 배우의 연기, 클로즈업 같은 촬영을 통해 관객이 스크린 상의 특정한 지점을 보도록 유도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선택하는 감독도 있다. 즉 의도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연출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감독들은 스크린에 복수의 피사체를 한꺼번에 보여주거나 여러 가지 사건을 동시에 발생시킴으로써 관객이 어디를 보아야 할지 쉽게 결정 못 하게 만든다. 또는 관객이 자신의 시선을 던질 곳을 자유롭게 결정하게 만든다. 이런 미장센은 때로 기분 좋은 혼란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는 자크 타티의 영화들이나 오즈 야스지로가 연출한 세 사람 이상이 대화하는 장면들을 볼 때 이런 재미를 느낀다. 내 눈은 스크린에 맺힌 이미지를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이런 연출은 오히려 능동적인 감상의 계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유현목 감독의 < 수학여행 >(1969)도 이런 즐거움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섬마을 초등학생들의 짧은 서울 여행을 그린 이 작품은 필연적으로 많은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구봉서 배우가 선생님으로 나와 서사를 진행시키는 역할을 맡긴 했지만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고 스크린을 채우는 건 결국 아역 배우들이다. 이 아이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네마스코프 비율의 화면을 가득 채운 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관객들의 눈을 피곤하게, 그리고 즐겁게 만들어준다. 이 영화에 출연한 대부분의 아역들은 비전문 배우였다고 한다. 짐작건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거의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대사를 받은 배우가 화면 중앙에서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좌, 우, 뒤에 있는 아이들은 자꾸 몸을 움직이고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아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그 자체가 아이들의 지금 마음 상태와 개성을 보여주는, 생동감 넘치는 영화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겨우 숙소를 찾은 아이들이 방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이다. 낮 동안 열정적으로 뛰어 놀았던 아이들은 하나둘 잠이 들고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다. 뒤척임과 같은 작은 움직임만 허락된 그 조용하고 정적인 순간의 느낌은 매우 사랑스럽다. 또한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선생님만이 아직 잠에 들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걱정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송별회 장면이다. 영화 내내 ‘질서’와는 거리가 멀었던 시골 아이들은 도시의 초등학교를 방문해 처음으로 부동의 자세로 줄을 맞춰 선다. 영화는 이 모습을 롱숏으로 보여주며 질서정연한 미장센을 각인시킨다. 결국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몽영화의 역할을 수행하는 건가 싶어 조금 섭섭해질 때쯤, 감독은 다시 한번 아이들의 자유로운 몸짓을 통해 이 딱딱한 구도를 완전히 흐트러트린다. 시골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을 향해 뛰어가고, 도시 아이들도 시골 아이들을 향해 뛰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다시 제 맘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앞서 말한 기분 좋은 혼란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다. 결국 이 씬은 문자 그대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스펙터클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스크린의 어떤 곳을 봐야 할지 결정 못 해 매번 어리둥절하기는 하지만 <수학여행>은 영화 감상의 즐거움 중 하나를 생생히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활기 넘치고 혼란스럽고 자유로운 미장센과 그 분위기를 많은 관객들이 느끼면 좋겠다. <수학여행> VOD 보러 가기
[월간스크린]스님과 조폭: <달마야 놀자>(박철관, 2001)
2001년 | 씨네월드 감독: 박철관 | 원안: 이명석 | 각본: 박규태 | 제작: 이준익 | 기획: 조철현 | 촬영: 박희주 | 미술: 오상만 | 음악: 박진석 신호섭 CAST 재규: 박신양 | 청명: 정진영 | 불곰: 박상면 | 날치: 강성진 | 왕구라: 김수로 | 막내: 홍경인 | 노스님: 김인문 | 현각: 이원종 | 대봉: 이문식 | 명천: 류승수 2000년대 초 충무로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던 장르는 이른바 ‘조폭 코미디’였습니다. < 조폭 마누라 >(조진규, 2001)에서 시작된 이 장르는 < 두사부일체 >(윤제균, 2001) < 가문의 영광 >(정흥순, 2002)이 큰 흥행을 기록하면서 급속히 메인 스트림 안에 자리 잡았죠. 평단 일각에선 욕설과 폭력과 자극이 난무하는 이 장르의 관습이 한국영화를 저질화시킨다는 비난이 있었는데요, 일견 타당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조금은 다른 결을 지닌 영화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달마야 놀자>가 그런 영화죠. 한쪽에서 보면 조폭 영화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불교 영화인, 도저히 융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요소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의외로 심오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기도 합니다. 2001년 8월의 어느 더운 날, <달마야 놀자> 현장 공개가 있었습니다. 조폭들이 불당 청소를 하는 장면이었죠. 이때 불상을 닦던 왕구라(김수로)와 막내(홍경인) 사이에서 갑자기 논쟁이 붙죠. 부처는 중국 사람일까, 아니면 인도 사람일까. 불상의 밑바닥을 들춰 본 왕구라는 ‘Made in China’를 확인하는데요, 실수로 불상을 불당 바닥에 떨어트립니다. 이 사건은 스님과 조폭 사이에 갈등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죠. 적에게 쫓겨 고요한 암자에 뛰어든 재규파의 리더 재규 역을 맡은 박신양입니다. 1990년대 말 멜로 주인공으로 이미지를 굳혔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코미디 장르에서 성공을 거두죠. 재규파에 맞서 절을 지키는 청명 스님 역의 정진영입니다. 진짜 스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역할이 잘 어울립니다. 넘버 2인 불곰(박상면)과 넘버 3인 날치(강성진)입니다. 불곰은 큰 덩치의 해병대 출신인데요, 알고 보니 대봉 스님(이문식)의 해병대 후임이었죠. 한편 날치는 이후 속세를 떠나 출가하게 됩니다. 현각 스님(이원종)은 큰 덩치와 엄청난 힘의 소유자입니다. “칼에는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살리는 칼이 있습니다. 전 그걸 깨닫는 데 15년이나 걸렸습니다.” 출가 전엔 어떤 일을 했을지, 조금은 짐작 가는 대사입니다. 재규파의 넘버 4인 왕구라(김수로)는 엄청나게 말이 많은 캐릭터입니다. 막내(홍경인)는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았는데요, 동자승(권오민)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죠. 암자의 여섯 스님들입니다. 왼쪽부터 노스님(김인문), 동자승, 청명 스님, 현각 스님, 대봉 스님 그리고 청명 스님(류승수)입니다. 청명 스님은 묵언 수행 중인데요, 이 설정이 영화에 묘한 긴장감을 줍니다. 촬영 장소는 김해 신어산 기슭에 있는 은하사였습니다. 가야국의 수로왕이 세웠다는 사찰이죠. 사실 절에서 촬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요, 다행히 섭외가 되었죠. 개봉 때는 승단에서 단체 관람을 하기도 했는데요, 상당히 만족하며 영화를 봤다는 후문입니다. 왕구라가 불상을 훼손하는 사고를 저지르는 장면을 대웅전에서 촬영한 후엔, 요사채에서 공양 신 리허설을 했습니다. 사찰에서의 공양, 즉 식사 시간은 엄격한 예절 속에서 조용히 이뤄지는데요, 재규파 다섯 명에겐 낯설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노스님의 꾸중을 듣게 됩니다. 스님이 아닙니다. 이 영화로 데뷔한 박철관 감독의 모습입니다. 제작사 씨네월드에서 < 간첩 리철진 >(장진, 1999) < 아나키스트 >(유영식, 2000)의 연출부를 거쳤죠. 이후 두 번째 영화 < 미쓰GO >(2012, 박철관)를 연출했습니다. 현장에서 박신양은 쉬는 시간마다 캠코더로 촬영을 했습니다. 불당 안에서 레슬링을 하는 재규파 부하들의 모습을 찍은 영상을 동자승과 함께 보고 있네요. 정진영은 촬영 기간 동안 아예 은하사에 기거하면서 스님들과 생활했습니다. 그런 이유인지 영화에서 진짜 스님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기죠. 그 모습이 얼마나 리얼했는지, 은하사에 들른 어느 스님에게 혼이 났던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데 인사를 하지 않자 정진영 배우를 혼냈던 거죠. 이 영화의 ‘뜬금포’ 같은 존재인 ‘츄리닝맨’ 김영준의 모습입니다. 영화 내내 수맥 탐지용 안테나를 들고 다니죠. 촬영이 끝난 저녁, 불당 아래 공터에선 재규파와 스님들은 족구 게임을 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할 족구 장면을 위한 일종의 리허설이었지만, 시나리오와 상관없이 실제로 족구 시합을 했습니다. 축구화와 테이프로 동여맨 고무신 등을 신고 열심히 경기를 했는데요, 결국은 재규파가 이겼습니다. ‘불곰’ 박상면의 활약 덕분이었죠. <여인천하> 같은 TV 사극의 아역으로 낯익은 권오민은 <달마야 놀자>에서 동자승 역을 맡았습니다. 첫 영화였지만, 특유의 천진함과 귀여움으로 자칫하면 퍽퍽해질 수 있었던 영화의 정서에 숨통을 틔워 주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1949년 남한 영화산업의 현황: 향후 미국 무역 대상국으로서의 전망은 어떠한가?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해방 직후 남한 영화 장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남아 있는 영화가 많지 않은데다 혼돈의 국내의 영화계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의 존재가 미흡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이 시공간의 영화 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합국 소속의 미국의 점령지 영화 정책과 미군정의 영화 정책의 기조를 참조해야하는 국제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국외의 적극적인 사료 확보 노력을 통해 국내적 시각과 국제적인 정치·경제·문화의 중층적인 맥락 속에서 남한 영화계를 조망하는 시도와 연구 성과가 늘어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흐름에 기여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료를 널리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미국과 소련 간의 한반도 분단 점령이 결정된 후, 남한에는 1945년 9월부터 미육군 24군단의 A. V.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주한미군정청 체제가 본격 수립되었다. 미군정은 미국의 대외문화 정책과 문화 기조에 따라 남한의 영화 정책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설정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면서 남한 내의 좌익세력을 억압하고, 경제적으로는 남한을 미국영화의 소비시장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한편, 이 시기 남한의 영화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남한 영화계의 현실은 영화인들의 노력 여하나 영화계 고유의 논리가 아닌 정치동향에 좌우되고 있었다. 초국적 냉전 구도에 돌입하면서 정부 수립은 더디게 진행되어, 미군정기 체제의 남한은 국제무역을 할 수 있는 ‘국가’ 자격이 없었고, 같은 이유로 국제무역시장에서의 환율도 결정할 수가 없으므로 국내 생산이 되지 않는 생필름을 비롯한 자재와 설비가 수입될 방안이 전무했다. 게다가 이 시기 영화계의 인재들이 좌우로 나뉘었고,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제작 자본을 조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미군정의 민간 대행 기관인 중앙영화배급사(Central Motion Picture Exchange, CMPE)가 들여오는 미국영화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월등했기 때문에 남한의 극장은 미국영화로 가득했다. 새로운 영화와 ‘민족영화’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미군정기 남한 영화인들은 군과 관에서 흘러나오는 생필름을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해 구해, 군과 관에서 잠시 빌려 온 카메라를 돌려써가며 16미리 극영화를 제작했다. 점령지 일본과는 달리, 영화 제작에 있어서 미군정의 정책적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한 영화계는 이 시기 아무런 진전과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 남한 영화인들의 중론이었다 1 . 이제 소개할 사료는 1949년 잡지 《상품의 세계동향(World Trade in Commodities)》에 실린 남한의 영화산업에 대한 세 편의 보고서 형식의 기사이다. 이는 영화 사진부서 부서장 골든(N. D. Golden)의 “영화와 장비(Motion Picture and Equipment)”를 특집으로 한 기획의 일부로 보인다. 1949년 1월 먼저 ‘남한의 영화산업(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이라는 4쪽 분량의 보고서가 실렸다. 이어 4월호에는 “남한”이라는 꼭지의 1쪽짜리 보고가 실렸고, 9월호에는 2쪽 분량의 “대한민국의 16미리 오락 영화(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소개되었다. 《상품의 세계동향》은 미국 워싱턴의 국내외통상부 국제무역사무소(Bureau of Foreign and Domestic Commerce, Office of International Trade)가 1947년에서 1950년까지 발행하던 정기간행물이다. 매호는 통상(Commodity exchanges)과 관련한 특별 기획을 주요하게 담고 있고, 나머지 부분에는 여러 형식의 다양한 내용이 섞여 있다 2 . 정부에서 발행한 기관지이지만 잡지 가격이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관 배포를 위한 목적과 함께 국내외의 일반 판매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외 아카이브를 통해 수집되어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 장을 이해하기 위해 활용되는 사료는 대부분 주한 미군정청(U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나 미국 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 전쟁부(혹은 육군부)가 생산한 문서가 중심이 된다. 이들 사료는 점령지의 시민들을 재정향(re-orientation)하고 재교육(re-education)하기 위해 군과 관에서 제작한 계몽성과 교육성이 강한 다큐멘터리와 문화영화를 제작, 공급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유입되는 할리우드 영화는 군과 관에 있어 점령지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한 용도라는 면이 더 강했다. 이 사료의 생산주체는 미국 내 정부기관이지만 해방기 남한의 영화 산업의 현황을 철저히 ‘할리우드’ 즉 미국 시장과의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경제적 관점으로 미래의 투자자들을 위해 분석하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또 ‘인력, 자본, 설비와 기자재난이 심했다’는 정도의 서술로 남아있어 국내 사료가 포괄하고 있지 못한, 남한 내 영화 산업의 상세한 수치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그 분석 방법과 제공된 수치의 정확성을 교차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존재 가치가 크다 하겠다.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이 사료는 1949년 서울 소재의 미합중국 정치자문사무소(Office of United States Political Advisor)의 사무관 윌리엄 브라운(William B. Bruns)이 작성한 보고서 형태의 기사이다. 새롭게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이 과연 미국의 영화 및 각종 장비의 수입 시장으로서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 타진하기 위한 예비 조사서로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 보고서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고 난 뒤 남한의 영화 산업과 장비 현황을 몇 개월간(1948년 8월부터 1948년 12월)간 수집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의 민간 영화사와 생필름이나 현상 관련 약품 회사, 영화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생산하는 기업의 남한 시장 진출에 도움을 주고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 보고서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미군정의 여러 기관들. 특히 남한의 영화산업을 통제하는 부서인 공보부 영화과를 통해서 얻은”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고서의 정보를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미군정기(1945년 9월 8일~1948년 8월 15일)간의 전체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1948년 8월 15일 이후 12월까지 4개월간 대한민국 정부 설립 이후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인지 혼돈스럽다. 하지만 이후 4월 폴 스트럼이 작성한 “South Korea”에서 추가적으로 밝히는 바로 추측하면, 이 보고서의 내용은 전자, 즉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산업 현황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보고자는 ‘서장(Introduction)’에서, “미국적 기준에서 보면, 한국은 빈곤했고 현대적인 삶에 필수적인 산업적 그리고 기계적 장비에 대한 중대한 결핍이 있다 …… 철수한 일본인들의 산업화의 공백이 메워지지 않는 한, 영화 산업에 있어서 물리적인 성장에 대한 희망은 거의 없다”고 부정적으로 전망한다. 동시에 그는 “영화산업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근대적 경제를 지원할 한국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전제한다. 이 보고서의 행간에는 당분간 남한 영화 산업의 성장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며, 할리우드의 완성된 영화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시장으로 설정할 수 있겠지만 생필름이나 약품,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원활히 판매할 수 있는 무역대상국으로 설정하기는 다소 힘들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그럼 이 사료를 개괄적으로 훑어보자. 보고서가 중점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은 우선 남한의 무역 제한(Trade Restrictions), 검열(Censorship), 배급(Distribution), 저작권 규제(Copy Regulation), 제작(Production), 세금(taxation), 상영(Exhibition), 광고(Advertising)의 현황에 대해 요약하고 미국의 상품 판매의 영향(Influence on Sales of United Merchandise)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16미리 극장 영화(16mm Theatrical Motion Picture)가 남한에서 어떤 식으로 무역제한, 배급, 상영,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지와 장비(Equipment)의 보유 현황이 어떠한 지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남한의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Visual Education and Equipment)의 현황에 대해서 기록하고, 남한 극장이 보유하고 있는 영화 시설(Theater Motion Picture Equipment)에 대해서는 영사 시설과 음향 시설(Theater Projection and Sound Equipment), 스튜디오 시설(Studio Equipment), 장비 생산과 판매(Production and Sales Equipment)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림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gure Industry in South Korea" 보고서 1쪽 ‘남한의 무역 제한’ 부분은 35미리 극장용 영화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1948년까지 미국영화를 들여오는 데에 있어서 수입허가는 필요하지만, “사실상 미국영화의 배급을 막거나 감소시킬만한 스크린 쿼터나 대표적인 규제는 없다”고 밝힌다. 그리고 당시까지 들여온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들여온 것은 없고, “CMPE가 뉴욕을 거쳐 할리우드에서 한국으로 들여오는 미국 극영화는 연합국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의 지휘권 하에서 운용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법으로 모든 외화에 10%의 수입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영화는 군을 통해 들여오는 셈이므로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다른 외화 주로 중국영화가 수입관세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적고 있다. ‘세금’ 에서 보면, 관세 외에 영화에 붙는 유일한 세금은 극장 입장세로 30%라는 점을 명시한다. ‘검열’ 에서는 남한에 수입된 외화를 관할하고 검열하는 기관인 미군정 공보부 영화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허가된 모든 영화는 검열을 거쳐야하고 허가권 없이는 상영이 금지된다. ‘검열위원회’는 한국인 1명, 보통 영화과장과 같은 책임의 미국인 1명으로 구성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들여오는 미국영화는 이미 미육군 부서에서 한국에서 미국의 점령과 민주주의에 해로운 내용에 대해서 기본적인 검열”을 실시하여 이미 “한국인의 감수성을 해칠 것 같은 내용”이 통제되고 있으므로, 공보부의 검열위원회는 “한국인에게 낯선 생활을 묘사하는 것들”만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 된다. ‘배급’ 부문은 1948년을 기준으로 한 남한 영화 배급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기간 중 85편의 극영화, 뉴스릴 그리고 외화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적으면서, 인플레이션과 노후한 기자재로 영화 배급이 원활하지 못하며 극장은 영화상영보다 무대공연이 더 이익을 발생시키는 오락이라는 난점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이 나라에 매년 150편의 극영화가 수입된다면 각 극장은 매주 다른 영화를 선보일 수 있다.” 상업적으로 배급되는 극영화는 대부분 포지티브로 공급을 받으며, 극장보다는 이동영사가 더 많은 다큐멘터리는 16미리로 프린트한다고 전한다. 1948년 남한에서 “미국영화에 대한 매표수익은 연간 60,000,000에서 70,000,000원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대한영화사(Korea Motion Picture Company), 조선영화사(Chosun Yun Wha Sa) 그리고 이 프로덕션(Lee Production)”, 남한의 영화 제작 조직은 3개가 있다고 ‘제작’ 에서 적고 있다. 이필우가 이끄는 “이 프로덕션은 현상, 녹음, 프린트 복사, 축소, 특수효과 그리고 자막 등을 한다. 다른 두 회사는 자신들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남한 영화인들의 필름, 기자재, 인재 부족이라는 열악한 제작환경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다. “남한 내 극영화 제작비는 평균 2,000,000원에서 3,000,000원이 든다”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상영’ 에서는 한국인들이 뮤지컬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좋아한다고 밝힌다. 미국영화는 인기가 좋아 모두 단독으로 상영되었고, 한국영화와 다른 외화(주로 중국영화)는 동시상영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적고 있다. 남한은 96개의 극장에 54,120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인이 보기에 80%정도는 좋지 못한 상태였다. “주 평균 영화관객은 425,000명, 대도시 상영은 보통 1시에서 자정까지 연속으로 이어진다.” 입장료는 50원이 기본인데, 특별한 영화의 경우는 80원, 또 남한의 극장 연 수입은 300,000,000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6미리 극장영화’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의 보고는 앞부분 35미리 극장영화와 대동소이하다. “검열비용은 없지만 16미리 상영에 대한 허가비로, 3개 릴 이하에는 400원, 4~7개 릴은 700원, 7개 릴 이상은 900원이 부과”된다는 사실이 추가되어 있다. 또한 남한에서는 16미리로 된 외화는 사실상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개인 사업자나 사회단체가 사적으로 상영하는 정도가 가능하다. ‘제작’과 ‘장비’현황을 보면, 현재 남한에서 영화제작이 요원하고, 16미리 현상과 축소 기구는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상영’ 부분까지 포함해서 보면 남한에 16미리 상업 영화극장이 없으며, 인구 대부분이 농촌에 분포해 있음에도 극장 시설이 부재하고 극장 설치 역시 요원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곳들에 16미리 영화를 상영하고자 미군정 민사처는 전국 지부에 16미리 프로젝터 300개를 보유하고 이동영사단(mobile unit)을 운영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군정은 점령지의 재정향과 재교육을 위해 영화를 비롯한 시각 미디어를 적극 사용했는데, 관련 내용을 바로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 당국은 시각 교육을 목적으로 16미리 교육영화와 슬라이드, 교사 매뉴얼을 수입하였다. 이와 관련한 법도 없는 상태였다. 특히 미군을 위한 영화는 허가도 허가비도 없다. “남한에 있는 3,415개의 초등학교, 425개의 중등학교, 29개의 대학”을 대상으로 한 시각교육 보조 수단들은 면세가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교육 영화들은 공보부 영화과 검열을 거쳐, 400원의 허가비를 내고 상영되었다. 민간 조직에 25개, 정부기관인 민사처에 300개 정도 있었지만, 16미리 영사기에 대한 요구는 당시 엄청났다. “교육에 영화가 사용되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자료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내용은 ‘극장의 영화 장비’로, 영사 및 음향 시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35미리 영사기, 아크 램프, 악세서리, 모터 발전기와 정류기, 커튼 트랙과 장치 등 전반적으로 너무 노후했고, 상당히 많이 수리되어 사용되고 있어 형편없는 상태이다. 96개의 극장 중에 서울에 있는 3개만 에어컨 설비(팬 유형의 강력 송풍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적고 있다. 남한에서 운영 중인 유일한 ‘스튜디오 설비’는 아마도 조선영화사를 의미하는 듯한데, 시설 상태가 좋지 않은 길이 65, 폭 35, 높이 40(인치)의 작은 무대가 2개 있다. 이 사료에서 살피는 바, 미군정기 및 초기 대한민국 정부 시절 남한의 영화 산업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다. 보고자가 보기에 남한의 외국 무역은 아직 충분히 신뢰를 얻어낼 만큼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산업에 있어서도 미국과 교류가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외화 시장 점유에 있어서 중국영화의 유입을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당시 미국과의 영화 관련 무역 교류에서 가장 큰 난점은 “통화에 대한 환율이 설정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 당시 “남한으로의 수입은 물물교환(barter) 기반”인데다가, 본국으로 송금이 허가되지도 않은 상황은 “CMPE가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재정적 손실을 낳게” 했던 것이었다.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의 미국사절단(United States Mission) 폴 스트럼이 4월호에 실은 1쪽 분량의 것이다. 이전의 보고서인 “남한의 영화산업” Vol. 7, Part 4, No.1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영화 관련 남한의 정치적 변화 상황을 짚으며 글을 시작한다. “남한이 자치를 하고 있고, 그 세법이 변화하는 중이며, 미국영화에 대한 수입관세와 검열이 부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지난 1월의 기사 내용과 달라진 점들을 중심으로 보충적으로 기술한다. 내용은 무역 규제, 배급과 검열, 세금, 상영, 제작 부분을 포괄하고 있다. [그림 2] Paul J. Strum, "South Korea" 보고서 ‘무역 규제’ 에서 보면 “CMPE는 1947년 4월 이래로 60,000,000원의 잔고”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환율도 정해지지 않았고 송금도 불가해 이전과 달라진 점은 없다. ‘세금’ 부문에서 기술하는 것처럼 “외화에 대한 세금 역시 유보된 외환문제의 해결에 달려있다.” 반면 남한 정부 수립 이후 관세에 변화가 생겼는데 “수입한 오락 영화는 임의로 피트 당 50원으로 임의로 계산한 후 여기에 10%의 관세에, 30%의 물품세가 더해져 매 피트에 부과되는 비용이 21.50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미군정기와 달리 “최근 미국 영화에 대한 관세와 물품세는 극영화 당 175,000원에서 245,000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전에는 없던 수입영화에 대한 소정의 검열비가 생겼고, 극장 입장권에는 1948년 6월부터 100%의 유흥세가 붙기 시작했다. ‘배급과 검열’ 에서도 미군정기와 비교해 미국영화에 대한 검열이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다. “2편의 미국영화를 상영금지 시켰고, 다른 영화에서 200피트를 삭제했으며, 원칙적으로 폭동 장면과 탈옥 장면이 삭제”된 것이다. 그래서 1948년 동안 “66편의 미국 오락영화가 한국으로 수입되었고 41편이 배급”되었다. 이 보고서가 추론하는 바 한국영화의 수입은 “전체 수입의 15~20%” 정도이다. ‘상영’을 통해 1월의 보고서와 비교해볼 때, 55,110개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 극장은 116개로 늘어났고, 주 평균 관객은 22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입장료는 작은 상영관 50원에서 큰 도시 상영관 150원까지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대중의 지불 능력을 따져볼 때 퍽 높은 편이라고 언급한다. 이 보고에서는 남한의 영화인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다. 제작자와 제작사를 통틀어 25개가 있는데, 이중 7개 정도가 실제적인 영화제작이 가능할 것이며 합리적이고 능숙한 영화기술자는 6명 정도라고 적는다. 35미리로 극영화 5편, 2~3개의 단편이 제작되고 10~11편의 16미리 영화가 제작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암시장에서 팔리는 생필름 가격이 피트 당 30~40원 정도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보고서는 필자가 어떤 경로로 해당 부문들의 정보를 취합하고 조사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아 아쉽다. 글의 말미에서 폴 스트럼은 스튜디오나 극장의 설비 대부분은 거의 폐기해야할 정도이고, 이런 상황에서 남한 영화산업에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는 자체가 극도로 힘들 것이라 마무리한다.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의 프란더가스트(O. M. Prandergast)가 작성한 것으로, 이제 활발하게 제작활동이 가속화되고 있던 남한의 극장용 16미리 오락영화에 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기술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보고서와 다르다. 이 시기 16미리 영화제작이 증가한 이유는 미공보원의 활발한 활동 때문이었다. 현재 확보된 사료의 분량은 1쪽인데 이전의 보고서들의 형식과 내용을 참조하면 전체 2쪽에서 1쪽이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무역 제한, 배급, 상영, 제작 등 기술 항목과 형식은 4월의 보고서와 유사하다. 1949년 7월 드디어 환율이 책정되어 미국통화 1달러가 900원으로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한 영화제작자와 상영업자들은 열악한 장비와 생필름 부족으로 여전히 애를 먹고 있고, 이 부족을 해결해 줄 외화 교환 방안도 없”는 상태였다. [그림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보고서 ‘무역 제한’ 에서 보면 수입 허가는 여전히 필수이고, “관세는 10%의 종가세, 30%의 국내소비세가 필름과 세금 가치의 합으로 부과되어 세금과 국내소비세는 총 43% 종가세”로 되었다. ‘배급’ 에서 남한 공보부 영화과의 검열을 문제 삼는다. “미국영화에서의 폭력과 열정의 장면들이 삭제당”하고 있는 반면 “한국이나 중국영화는 폭력을 그들 나름대로 그려내”고 있다면서 검열을 빠져나간다고 묘사한다. 게다가 “일본의 전쟁 범죄자들을 교수형 시키는 실제 처벌 장면을 보여주는 미국공보원의 뉴스릴은 한국 관객들에게 광범위하게 매우 인기가 있”어 검열을 피한다고 원칙 없는 검열에 대해 불만을 피력하고 있다. 검열비는 없지만 검열을 선행조건으로 하는 상영허가비용을 상세히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국영화 1-3릴 4,500원, 4-7릴 7,800원, 8-13릴은 10,200원. 외화의 경우는 1-3릴 6,500원, 4-7릴 11,400원, 그리고 8-13릴은 14,700원.” 1948년 1월 이후 미공보원에서는 “매달 15편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고 각 영화는 12개에서 15개의 프린트를 뽑는다. 전후 미공보원의 생산량은 현재 총합으로 대략 330편정도”이다. 매달 생산하는 영화는 6개의 뉴스릴, 4,5편의 극영화, 나머지는 다큐멘터리이다. 미공보원의 영화는 무료로 배급되지만, 16미리 다른 오락영화의 대여료는 다양하다는 점도 명시하고 있다. 미국 영화 이외에 수입된 외화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1948년 11월 15일에서 1949년 7월 3일까지 공보부 영화과의 기록에는 일본영화 4편, 영국영화 1편, 독일영화 6편, 프랑스영화 2편, 이탈리아 영화 3편 그리고 스웨덴의 16미리 영화 1편의 극장용 영화가 상영허가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중국의 16미리영화도 한국에서 상영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한국에서 해방 후 제작된 16미리 극장용 영화는 13편인데, 이중 8편이 1949년 1월 이후 조선영화사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으며, “16미리 장편 제작에 소요되는 비용은 5,000,000원”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상영’ 에서는 남한에 115개의 극장이 있고 모두 35미리 영사기를 가지고 있다고 적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16미리 영화가 상영가능하다면 모두 16미리 장비를 빌리려고” 한다. 입장료는 지방 최고가 120원, 서울 최고가 200원이며, 마찬가지로 입장료의 100%가 흥행료라 기술한다. 이 자료의 작성자가 16미리 극장 영화 설비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지역사회의 기초시설로서 영화관 설립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농촌 인구 분포가 높은 남한은 미공보원의 이동영사대가 아니면 많은 이들이 1년에 영화 한 편을 볼 수 없으나, 근본적으로 한국 마을에 16미리 극장 장비가 부족하므로 영화관 설립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래서 미공보원의 “사륜구동과 윈치(winch: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작은 크랭크)가 장착된 자동차는 일 년 내내 한국도로를 달리며 여행”한다. 1. 심혜경, 「안철영 텍스트를 통해 본 대한민국 설립 초기 ‘조선영화’ 연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2, 14~20쪽. 2. 이 간행물의 서지는 호주국립도서관의 정보를 참조했다.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https://trove.nla.gov.au/work/31968523?q&versionId=38809543
전쟁부 민사처(CAD) "Reorientation Branch Work Program-Fiscal Year 1947" 해제
이 문서는 국무부에서 전쟁부(War Department)로 영화 정책 관련 업무를 이관한 이후 민사처(Civil Affairs Division) 산하 재정향 부서(Reorientation Branch)에서 작성한 1947년 점령지 사업 프로그램에 관한 내용이다. 재정향(Reorientation)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교육 시스템의 탈나치화와 탈군사화 그리고 민주주의화를 위하여 마련한 재교육(Reeducation)에서 유래한다. 재교육을 재정향으로 순화된 표현으로 사용하면서 민사처의 사업은 대안적인 시스템을 알리고 물질적인 원조에 중점을 두는 사업으로 변하였다. 1 1946년 9월 16일 작성된 이 문서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기록되지 않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재정향 부서의 1947년 회계연도(1946년 7월 1일부터 1947년 6월 30일)의 사업 내용과 예산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주목된다. 이 문서는 모두 11장에 달하며 개괄적인 설명 없이 ‘미디어국’과 ‘교육 및 종교 정책국’ 그리고 ‘특별 기획국’으로 구분하여 기술한다. 원문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살펴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참고로 이 문서에서 쓰이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정한다. 즉, Department는 부(部), Branch는 부서(部署), Division은 과(課), Section은 국(局), 그리고 Unit은 반(班) 등이다). 미디어국(Media Section)은 신문, 정기 간행물 그리고 영화 및 극장 등 세 개의 반(Unites)으로 구성된다. 미디어국은 DANA(독일어), KYODO(일본어), 뉴스 대행사 그리고 미국에서 발행한 독일 잡지의 편집과 관련된 서비스를 포함한 점령지의 미국 라이센스 도서 및 정기 간행물에 대한 소식과 관련된 자료를 준비하고 조달한다. 또한, 교육적인 이용과 대중 상영을 위하여 극영화를 제작하고 공급한다. 미디어국은 국무부가 제작한 라디오 프로그램 - ‘미국의 소리 Voice of America’ - 을 점령지에서 이용하는 정책과 관련하여 국무부와 공조한다. 미디어국 각 반의 사업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문반(Press Unit) 담당자는 점령지에 다음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첫째, ‘주요 사건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picture)’을 제공하기 위하여 매일 6위까지 선정한 세계 뉴스를 평균 500 단어 이내로 제공한다. 이들 이야기는 독일의 DANA와 일본어 KYODO 통신사에게 제공한다. 둘째, 독일과 일본에 특히 관련된 분야의 미국식 생활과 사건을 묘사한 뉴스 특집 기사(news feature stories)를 제공한다. 강조할 내용은 음식, 세계 평화 기구, 과학, 경제, 점령지에 대한 미국의 정책 그리고 국제 문제이다. 셋째, 사설(editorials), 칼럼, 라디오 단평 그리고 외국 특파원의 분석 기사(analytical stories)을 제공한다. 또한, 일주일에 두 차례 편집 코멘트를 준비하여 전보로 발송한다. 국무부의 언론 및 출판과(Press and Publication Division)는 미디어국에서 다큐멘터리 작품(articles)과 극영화 그리고 사진(pictures)을 정기적으로 제작하도록 만든다. (2) 정기 간행물반(Periodical Unit)은 세 개의 하부 단위(Sub-Unit) 즉, 독일 공개 출판(German Overt Publications Sub-Unit), 비공개 잡지 서비스(Non-Overt Magazine Servicing Sub-Unit) 그리고 저작권 허가(Copyright Clearance Sub-Unit)로 구성된다. 이들은 각각 독일 미군정의 공식 출판물 편집과 제공, 미군정 허가 정기 간행물 이용과 관련하여 점령지에 보급할 출판 자료의 선택, 그리고 점령지에 필요한 모든 자료에 대한 저작권 취득과 면허 통관 업무를 담당한다. [그림1] 재정향부 사업보고서 첫 페이지, 신문반과 정기간행물반 사업 관련 (3) 영화와 극장반(Film and Theaters Unit)은 독일과 일본의 교육을 목적으로 기획한 120릴(reels) 분량의 특별 다큐멘터리 조달을 주요 업무로 한다. 이 반은 새로운 영화 제작과 점령지에서 각색 가능한 기존 필름(footage)을 조달하기 위하여 영화 산업 및 기타 에이전시와 사업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한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큐멘터리와 단편(Documentaries and Shorts) 영화 제작 담당자는 52주 동안 매주 2~3개 릴의 다큐멘터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점령지에서 사용할 120릴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계약한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미국적인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하여 보여준다. 영화 주제는 점령국 국민의 심리적인 태도를 세심하게 분석하여 선정한다. 영화는 점령지 국민의 재교육과 관련된 전문가들의 지도를 받아 기획하고 제작한다. 전쟁부 담당자는 테스트용 영어판(pilot English version)을 계획 및 제작하여 한 세트의 영화가 4개 점령국의 요구를 모두 충족하도록 한다. 한편,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 가운데 점령지에서 ‘입수한 영화의 각색(Adapting Acquired Film)’의 경우, 계약을 맺은 영화는 여타 미국 정부 기관과 민간 영역(private source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를 입수하여 보완한다. 이들 영화는 농업, 과학, 산업 그리고 기술적인 주제를 다루며 교육 프로그램의 이용을 위하여 〔더빙, 편집 그리고 기타 작업 등과 같이〕 개작한다. [그림2] 영화와극장반 사업 중 오리지날 다큐멘터리 제작 관련 페이지 둘째, 대중 상영을 위한 할리우드 영화와 단편 영화의 주제(Hollywood Feature Films and Short Subjects for Public Showing)는 점령지의 요청에 따라 정한다. 담당 직원은 점령지에 적합한 극영화와 단편에 대하여 영화업계에 추천을 요청한다. 〔상영〕 적합성(suitability) 여부는 영화업계의 승인 기준에 따라서 결정하며, 영화업계로부터 제목 리스트를 받아 점령지로 보낸다. 영화 리스트를 발송할 때 점령지 책임자가 기존 계약 조건과 정책 그리고 공공의 의견을 바탕으로 선정할 수 있도록 신문사 비평과 해설을 동봉한다. 점령지에서 영화를 선정하면 영화업계로 보내서 네거티브 필름(negative film)과 프린트를 복사하여 조달하도록 한다. 셋째, 뉴스릴 자료(Newsreel Material) 담당자는 점령지에서 준비된 뉴스릴에 대하여 ‘날짜가 없는 자료(non-dated material)’을 선택하고, 뉴스릴 회사가 제공한 자료를 매주 조달 및 전달한다. 마지막으로, 무대 연극(Stage Plays) 담당자 역시 점령지 무대 연극 업무에 대한 책임을 진다. 위의 계획에 따라서 영화 프로그램 예산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영화 제작의 경우, 할리우드에 준하여 테스트용 영어판 다큐멘터리 제작비는 52주 동안 매주 2~3개의 릴을 만들어 총 120 릴을 제작한다면 1,700,000달러가 필요하다. 이들 다큐멘터리 단편 영화의 주제는 학교와 대학 그리고 성인 교육에 적합한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점령지 언어로 전환할 때 소요되는 생필름 비용은 독일 221,440달러, 오스트리아 21,600달러, 일본 167,940달러 그리고 한국 76,800달러가 든다. 4개 국가 모두 35mm보다 16mm 필름을 더 많이 제작한다. 둘째, 민간영역에서 구입한 영화의 경우, 여타 미국 정부 기관과 민간 영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의 네거티브 필름 총 구매 비용과 필름의 각색과 재작업(rescoring)에 필요한 생필름 비용은 다음과 같다. 즉, 독일이 72,300달러로 1위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일본 48,300달러와 한국 20,000달러 그리고 오스트리아 8,000달러이다. 한국이 오스트리아보다 앞선 이유는 16mm 프린트를 더욱 많이 구매할 계획을 세운 결과에 따른 것이다. 셋째, 점령지의 뉴스릴 또는 단편 영화와 다큐멘터리 제작 관련 생필름 예산은 독일과 일본에만 책정한다. 넷째, 학교와 대학에서 16mm 영화 상영에 필요한 영사기 비용을 보면, 독일과 일본 모두 영사기 관련 부품을 1,000개 구매할 계획이다. 이와 달리 오스트리아는 50개 그리고 한국은 300개를 구매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는 한국에 상설극장이 부재한 지역이 다수 존재함을 방증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점령지 연극 공연과 관련하여 저자에게 지급할 저작권 사용료 비율은 일괄적으로 균등하게 책정한다. [그림3] 오리지날 다큐멘터리와 구입 영화의 복사에 소요되는 생필름 및 예산 배정 내역 다음으로, 재정향 부서는 교육과 종교 정책국(Education and Religion Policy Section) 사업을 다음과 같이 수립한다. 그것은 교육, 종교, 사회 조직, 청년 운동을 포함한 국가 간 인적 교류 정책과 관련된다. 해당 사업의 책임자는 시청각 도서와 교과서 그리고 음악 및 자료 조달과 관련된 부서 활동을 감독한다. 이를 위하여 교육과 ‘문화 자료반’은 세 개의 하부 반 - 도서관과 교과서, 음악, 그리고 예술과 사진 전시 – 을 구성한다. 도서관과 교과서 담당자는 정보 센터(information center: 정보 센터는 점령지에 따라서 공보원 또는 문화원으로 불림)를 설립하여 도서관과 교과서 자료를 선정하고 조달한다. 음악 부서 담당자는 점령지의 음악 도서관과 관현악단에 공급할 자료를 대여하고, 소규모 비관현악단과 대중음악 도서관 설립을 위한 자료 선정과 조달 그리고 배송을 책임진다. 예상 비용은 새로운 오케스트라 작품, 악보 그리고 관현악단 자료의 대여까지 포괄하여 정한다. 음악반의 주요 작품은 민속악(folk music), 밴드 음악과 학교 실내악(chamber music), 성악, 독주 기악 그리고 관현악 작품(orchestral score) 등을 다룬다. 대중음악을 포함한 리코딩 도서관 역시 점령지 정보 센터별로 예산을 편성한다. 예술과 사진 전시 분야는 유채화 및 수채화 복사를 포함한 예술 쇼(art shows)와 미국 예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미디어를 점령지에 조달하고 발송한다. 또한, 점령지 대중이 미국식 풍경에 익숙해지도록 사진 벽화(photo-murals)와 같은 시청각 자료를 해당 사업에 포함한다. [그림4] 교육과종교정책국의 사업 내역이 담긴 페이지 마지막으로, 1947년 재정향 부서 사업은 특별 기획국(Special Projects Section) 사업으로, 재교육과 재정향에 관련된 법률과 저작권에 대한 조언과 자료 조달을 설정한다. 더불어 일반인부터 명사(名士)까지 국제 간 인적 교류에 관한 운영상 문제를 다룬다. 이와 관련된 비용 산출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즉, “미국 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점령지로 보내어 교육과 종교 그리고 정보 관련 담당자들에게 조언하기를 권한다. 점령지 지도자들은 그들의 문제에 관하여 미국인들과 논의하기를 갈구하고 있으며, 미국의 전문가들과 어디에서든 1개월에서 3개월 또는 그 이상 그들의 문제를 생각할 기회를 환영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전 세계로부터 오랫동안 고립되었거나 편향된 정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면대면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점령지 사람들은 민주주의에서 그들의 특정한 작업과 기능이 어떻게 다뤄지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따라서 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적합한 미국식 실천 방법과 범위에 관하여 미국의 전문가들과 토론함으로써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서 설정된 점령지 파견 사업을 위한 예상 비용은 다음과 같다. 즉, 60일 동안 매달 1인당 500불의 여행비를 산정하여 독일과 일본에 파견할 전문가 200명과 오스트리아 및 한국에 파견할 전문가 50명에게 제공한다. 예상 비용은 독일과 일본은 각각 200,000달러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한국은 각각 50,000달러에 이른다. 위의 문서에서 기획한 바와 같이, 재정향 부서의 프로그램이 점령지 각국에서 실행되었는지 여부와 그것의 효과에 대해서 점령지 국가별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유럽의 경우, 재정향 부서가 언급한 ‘정보 센터’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의 “Amerika Häuser” 사례는 재정향 사업이 적극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미국 문화를 전파한 Amerika Häuser는 도서관과 갤러리 등으로 이용되는 한편으로 오스트리아에서 ISB (Information Services Branch)가 제작한 선전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하도록 조치한 기관이었다. ISB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전 연합군 사령부가 설립하여 미국식 태도에 대한 경의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물질적 · 정신적 수단을 동원하는 데 주력하였다. 2 다시 말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의 점령지 재정향 프로그램은 전쟁 종료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재정향 부서의 한국에서의 사업은 영화 제작과 ‘정보 센터’ 활동을 통해 확인된다. 1947년 8월 미공보원은 서울역 앞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영화 제작과 문화 사업을 시행하였다. 영화의 경우, 미군정청 공보부 영화과를 포함한 농림부와 내무부와 같은 기타 정부 기관 그리고 미공보원이 문화영화를 제작하였다. 3 또한, 미국문화연구소(Office of Civil Information)에서 출발한 미공보원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미공보원 사업은 ‘정보 센터’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미공보원이 직접 나서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경우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현지 지역민을 주체로 세운 문화원(Culture Center)이 문을 열고 사업을 수행하였다. 1947년 10월 9일 한국 최초로 개원한 ‘강화문화관’은 박물부와 도서부 그리고 대중 사업부를 두었는데, 이는 재정향 부서가 기획한 사업 내용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4 강화문화관의 부서는 향후 전국적으로 증가한 문화원 프로그램의 원형을 제시한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재정향 부서의 ‘교육과 문화 자료반’ 가운데 음악 관련 프로그램 역시 1949년 강원도 춘천 미국 공보원의 오케스트라 설명과 연주회 개최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나아가 재정향 부서의 사업 수행은 한국전쟁 이후 지역 문화원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초반 충남 대전의 대전문화원이 참여 대상자의 특성을 세분화하여 고전음악 감상부터 영화 관람까지 다방면에 걸쳐 사업을 수행한 것은 재정향 부서 프로그램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5 1. James F. Tent, Mission on the Rhine: Reeducation and Denazification in American-Occupied Germany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 254. 2. Reinhold Wagnleitner, “The Irony of American Culture Abroad: Austria and the Cold War”, (Ed.) Lary May, Recasting America: Culture and Politics in the Age of Cold War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pp. 286-288. 3. 심혜경, 「안철영 텍스트를 통해 본 대한미국 설립 초기 ‘조선영화’ 연구 - <무궁화동산>과 『성림기행』을 중심으로 -」,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논문, 45~46쪽, 각주 89 참고. 4. 위경혜, 「문화냉전의 지역성 - 대전문화원의 활동을 중심으로 -」,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49집, 2018, 124~126쪽. 5. 대전문화원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다음을 참고. 위경혜, 앞의 논문, 134~148쪽.
[테마연재]홈(김종우, 2017)
‘시네마테크 KOFA가 주목한 2018년 한국영화’의 리스트가 발표됐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이 리스트에 참여한 초기에는 열 편의 작품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편에 다 넣지 못한 작품의 수가 항상 대여섯 편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매번 깊은 고심 끝에 그만큼의 작품을 제외시켜야 했다. 그런데 근래 몇 해에는 그런 작품의 수가 한두 편 정도밖에 안 된다. 글쎄다, 정확한 이유는 나 자신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계속 참여하다 보니 내 결정 기준이 단호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사이에 한국영화가 빈곤해진 탓인지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후자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말했듯이 올해도 10편을 선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작품과 전체 결과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선에서 사무송(使無訟)한 모양새다.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해 아쉬운 작품의 리뷰를 의뢰받고 고민했다. 개인의 리스트를 별도로 발표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가 그 이유였다. 내 리스트와 상관없이 우선 몇몇 작품의 제목을 (ㄱㄴㄷ 순으로) 언급만 하자면 < 1급기밀 >( 홍기선 ), < 곤지암 >( 정범식 ), < 누에치던 방 >( 이완민 ), < 인랑 >( 김지운 ), < 춘천, 춘천 >( 장우진 ), < 파란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구분과 별개로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했고 또렷한 목소리를 낸 작품들이다. 위 작품들은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작년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만든 이름들임을 확신한다. 리뷰 대상으로 선택한 작품은 < 홈 >이다. 신인 감독 김종우 의 데뷔작인 <홈>은 작년 5월 30일에 개봉해 8천 명 정도의 관객을 모았다. 비평적인 수난은 더욱 심해서 이 영화를 제대로 조명한 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연말에 발표된 리스트에서 이 영화가 언급조차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청소년 인물, 가족과 사회를 다루는 점잖은 태도나 영화가 이야기하는 소중한 주제를 감안하면 이 영화가 감내해야 했을 외면의 정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나는 작년에 정부 정책을 다루는 매체에 이 영화에 관한 칼럼을 보낸 적이 있다. 리뷰는 아니었고, 영화가 다루는 이런저런 문제를 놓고 정책적인 해결책 등을 물어보는 글이었다. <홈>의 특성은 그러한 데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는 선에서 영화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런 경험이 실제 생활로 넘어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주인공 소년에게 닥친 환경의 안타까움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해결 방안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변화를 초래하는 경험을 보통 다큐멘터리로부터 얻곤 하던 나로선 각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홈>은 졸지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의 이야기다. 고아는 아닌데 고아보다 더한 상황이 준호( 이효제 분)에게 일어난다. 소년의 가족 관계는 조금 복잡하다. 준호의 어머니는 준호의 아빠와 이혼한 상황에서 다른 유부남 강원재( 허준석 분)와 관계를 맺었고 그들 사이에서 성호( 임태풍 분)가 태어났다.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 딸 지영( 김하나 분)을 두었다. 어느 날 아침, 원재의 부인이 준호의 엄마를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해, 두 여인은 의식불명의 상태로 나란히 병실에 누워 있게 된다. 원재가 아들 성호를 데려가면서 준호는 홀로 집에 남는다. 소년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원재는 준호에게 두 동생과 함께 살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원재의 착한 결정은 상황을 알아차린 처가의 분을 사고 만다. 청소년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아이와 성인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때가 묻은 폭력적인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고전적이지도 않고 별다른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영화가 두 개의 세계 사이로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시선 아래 만들어진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래 만들어진 어린이 혹은 청소년의 성장영화는 영화의 시선을 인물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홈>의 제작사인 ‘아토’는 이 영화 외에도 < 우리들 >(2016, 윤가은), < 용순 >(2016, 신준), < 살아남은 아이 >(2017, 신동석) 등의 작품을 연이어 제작해왔다. 내면적으로 충실한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방식은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중학생인 준호의 나이로 치면 <홈>은 <우리들>과 <용순> 사이에 놓인다. 두 동생 앞에서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준호는 아직 성인의 세계가 낯설고 두려운 소년이다. 무엇보다 성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다. 그런 준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홈>의 태도다. 엄마가 병실에 누운 후, 준호가 처한 상황은 급변한다. 영화는 덜컹거리는 상황을 곱게 포장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영화의 태도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소년의 시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극중 복잡한 어른들의 관계, 어른들의 처지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은 건, 그것을 대하는 소년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친부는 딱한 상황에 처한 아들을 거두지 않으며, 원재는 처가와의 갈등을 소년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준호가 주변 상황에 대처하는 수준은 더욱 어수룩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지 못할 때마다 소년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든다. 원재의 호의에 보답한답시고 편의점 물건을 훔쳐간 아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끝내 물건을 되찾아온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힘들다. 소년은 상처투성이의 입으로 온 힘을 다해 “같이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아니라 소년의 마음을 따라가다 얻게 되는 그런 출렁거림이 <홈>의 미덕이다. 소년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일은 <홈>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소년은 아주 어두운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년에게 어마어마한 시련이 닥치는 것으로 끝맺지도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로 전개되는 과정은 얼핏, 준호라는 어린 존재가 세상에서 홀로 서는 성장담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로 돌아가 보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준호는 패스를 하지 않고 홀로 골을 시도하려다 실책을 범해 친구들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엔딩에 앞서 영화는 소년이 거쳐온 공간들을 한 번씩 마주한다. 그 공간을 거치며 보낸 시간 속에서 소년은 성장했을까. 영화의 엔딩, 다시 운동장에서 선 준호는 별 무리 없이 친구들과 함께 호흡을 나눈다. 표정도 밝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만 하면 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일순간의 응원에 스스로 만족하고 떠나려던 나를 돌려세우고 만다. 카메라는 줄곧 소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으나, 문득 나를 향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홈>은 ‘함께 사는 것’을 박탈당한 소년의 외로움에 관한 영화다, 소년에게 그런 세계를 던져주고도 담담하게 지내는 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는 영화다. 끝으로 소년 준호를 아름답게 연기한 배우 이효제가 연기상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은, 이 영화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묻힌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글을 다 쓴 뒤 김종우 감독이 「씨네21」과 나눈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8살 때 형과 헤어졌다. 형은 영천 시골에 있었고 나는 부산으로 이사왔다. 형이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부터 형은 혼자 살았다. 왜 형이랑 떨어져 사는지 몰랐는데, 중학생 때 어머니가 우리 가족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그때 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족관계를 떠나 당시 형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너무 힘들고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밝혔다. 영화에서 유달리 진실함이 느껴졌는데, 감독 자신에게서 출발한 이야기라 더 그랬던 모양이다.
외국영화 <비트 걸(Beat Girl, 1960)> 검열서류 해제
1960년 영국에서 제작된 <비트 걸, Beat Girl>은 10대들의 성(性)과 비행을 다룬다는 이유로 제작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59년 3월, 영화의 오리지널 대본인 <스트립티즈 걸, Striptease Girl>은 영국영화검열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ensors, BBFC) 1 에 제출된 뒤 “기계로 찍어낸 쓰레기(machine-made dirt)”, “몇 년 사이에 본 최악의 스크립트(the worst script I have read for some years)”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영화의 제목을 <비트 걸, Beat Girl>로 변경하고 누드 장면들을 대폭 삭제했으나, 검열위원회는 스트립티즈에 대한 묘사와 소년범죄, 그리고 기차 레일에 누워 담력을 시험하는 십대들의 치킨 게임 장면이 지닌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결국 영화는 스트립 클럽에서의 노출 장면을 비롯한 문제적인 장면들을 삭제당한 뒤, 관객 제한 수위가 가장 높은 X등급을 받고 개봉하였는데 2 작품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영국 박스오피스에서 성공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3 . <비트 걸>의 상영을 둘러싼 논란은 동시대적으로 영화를 개봉되었던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했다. 특히 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사회의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면 <비트 걸>의 상영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비트 걸>의 국내 상영은 4.19 혁명 이후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제도적 변화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영화를 둘러싼 정책적 기조가 국가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통제에서 민간기구에 의한 문화예술의 보호육성이라는 관점으로 이동하면서 영화 상영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변경되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 아래서 시장의 자율성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될 수 있었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장 주체들의 도발적인 기획은 영화심의를 둘러싼 논란을 야기했다. 1960년 10월 4일, 영화윤리위원회의 심사를 마친 후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연인들(Les Amants, 1958)>이 불륜을 소재로 삼기에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문교부가 일방적으로 상영 중지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 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 추천권을 지닌 문교부는 수입업체인 세기상사가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해당 영화를 배급하고자 했을 때 이를 승인하였고, 오히려 영화윤리위원회(이하 영륜)에서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상영보류판정을 내렸다. 이후 세기상사는 해당 조치에 불응하며 상영을 강행하는데, 세기상사와 문교부, 그리고 영륜 사이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개되는 <비트 걸> 논란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와 맞물려 비로소 일단락되게 된다. 물론, 세기상사는 수입한 영화를 상영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군부 정권이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수립한 시점에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하게 된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KOFA)에서 보관하고 있는 <비트 걸> 검열 서류는 영화의 수입과 상영, 그리고 보류통보와 재상영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시간상으로 가장 앞선 서류를 살펴보자면, 1960년 11월 9일,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리버티 상사(Liberty Trading Company)가 도쿄 지부를 통해 세기상사로 계약관련 내용을 확인하는 전신(cable) 내용이다. [그림 1] 리버티 상사가 세기상사에 보낸 계약 내용 확인 서신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해당 전신은 1960년 10월 29일에 세기상사가 “BEAT GIRL”이라는 제목(안건)으로 리버티상사에 보낸 문의사항에 대한 회신이다. 리버티상사는 세기상사에 <비트 걸>에 대한 복사 권한을 허용하되 프린트 복사를 5본으로 제한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는 내용은 10월 29일 이전에 양자 간의 영화 수입 계약이 체결되었고 원본 네거티브에 대한 듀플리케이션은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다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검열 서류에는 계약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판권대금을 비롯한 라이센스 기한과 같은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상영신고서’에 판권 대금이 “35미리 필름 10권 US $4,000”로 명시되어 있어 계약 사항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영화상영신고서’에는 “35미리 필름 10권 3편”만이 신고 대상에 올라와있는데, 복사판 계약을 5본으로 진행했던 정황을 미루어볼 때, 해당 시점에 나머지 2편에 대한 국내 배급 계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2] <비트걸> 영화상영신고서 ‘영화상영신고서’의 경우는 해당 서식이 없어 기존의 ‘허가신청서’를 ‘신고서’로 수정한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이 그만큼 급격하게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해당 서류에는 제명이 “젊은 육체들”로 변경되어 있다는 점과 1961년 1월 18일에 사단법인 외국영화배급협회를 경유하여 문교부에서 승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영화배급협회는 배급업자들의 이익 단체인 만큼, 영화에 대한 심의권한을 독점하려는 영륜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협회는 영륜의 권한은 심의 결정이 아닌 권고 수준에 그쳐야 하며, 영화에 대한 최종적 검열 권한은 배급협회에서 자율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 수입사이자 배급사인 세기상사는 자율적인 심의를 통해 상당한 분량을 삭제하였다. [그림 3] 세기상사에 의한 자진삭제분 一 대사삭제부분 1. 사랑이란 섹스를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죠(204) 2. 늙은 바보야(365) 3. 우린 양친과 무관계. 나는 나…. 제니에요. 완전히 독립된 신인간(632-634) 4. 내주엔 펑하고 세계가 연기로 화해 제로에요(650) 5. 법률엔(902, 905,906, 909, 913) 6. 굶주려선 정도를 못 지켜요 (985) 二 화면삭제부분 1. 나이트클럽 장면(5권) 단축 2. 무대 뒤에서 스테이지가 보이는 장면 단축 (529) 3. 노래 장면 삭제… 입과 입, 엉덩이와 엉덩이, 그대 욕적으로 수평선(846~847) 4 4. 제니가 옷을 벗는 장면(8권) 5. 스트립쇼에 유방 나오는 장면(10권) 6. 장면 변경 (1001에서 1010으로) [그림 3]은 1961년 1월 27일자 영화상영신고 품의서로서, 세기상사가 자체 심의를 통해 삭제한 항목이 명시되어 있다. 대사 6개처, 화면 6개처에 해당하는 삭제된 부분은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선정적 장면과 지배질서에 반하는 반사회적 내용에 주로 해당된다. 문교부는 자체 검열 결과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덧붙이지 않고 기안이 올라온 일자에 영화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한다. 그런데 영화상영신고에서부터 신고필증이 발부되기까지 영륜의 심의과정을 반영한 문서는 보이지 않는데, 1961년 1월 28일자 《한국일보》의 기사를 참조해볼 때, 영륜에서는 상영신고 일주일 전인 1월 21일에 <비트 걸>에 대한 실사 심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전문위원 11명 전원일치로 상영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세기상사는 영륜의 판정에 불복하여 재심을 청구하였는데, 재심은 1월 27일 오후 7시에 재심이 열린 것으로 확인된다 5 . 그런데 주목할 점은 1월 27일은 세기상사가 자체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장면을 삭제하여 상영신고필증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신고필증이 정확히 언제 발급되었는지 구체적인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비트 걸>의 러닝 타임이 90여 분인 점을 감안하면, 신고필증의 발부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제출되기 전에 문교부의 일방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륜의 최종 심의의견은 다음날인 1961년 1월 28일에 언론을 통해서 공개되는데, 영륜은 전원 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제출한 상황이었다. 세기상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젊은 육체들>로 개봉할 영화는 문교부가 고시한 행정적 절차에 따라 상영신고필증을 받았기에, 상영보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는 권고였다. 따라서 예정대로 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며 “강렬한 장면의 연속! 숨막히는 애욕묘사!”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로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였다. 물론 세기상사의 행보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단지 권고일 뿐 근본적으로 어떠한 구속력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영륜은 언론을 통해 사건을 쟁점화하고 문교부와 세기상사의 행태를 비판하는 여론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륜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화심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명시하게 되는데, 1월 28일 기사를 필두로 영륜의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문교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고, 검찰도 풍기단속을 위해 절차상 직무 유기를 한 이들에게 형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게 됨으로써 <비트 걸> 논란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다. 결국 문교부장관은 영륜의 존재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단순한 사무적인 실수일 뿐이라고 한발 물러섬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지을 출구를 마련한다 6 . 이후,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는데, 검열 서류에는 재심에 참여한 위원의 명단을 비롯하여 재심 과정의 내막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4]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회수 관련 문서 [그림 4]는 1961년 2월 9일, 문교부가 세기상사에게 보내는 공문으로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의 결과 상영신고필증을 회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영화 <젊은 육체들>의 상영을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류함 (2) 앞으로 상영 시에는 제명을 원명대로 할 것 (3) 현재 이후 모든 선전 및 광고에는 '젊은 육체'의 제명과는 일체 무관하게 할 것 신고필증 회수를 통보한 날로부터 나흘 뒤인 2월 13일에는 각 도지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이미 흥행허가가 시행되었다면 긴급히 흥행을 보류시켜 주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4일에는 세기상사에 다시 공문을 보내어 복사판 2편에 대해서도 상영신고필증을 반납할 것을 요구한다. 앞서 전신(cable) 내용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세기상사는 복사판을 5본 제작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는데, 첫 번째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에는 3편만을 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2편의 복사판에 대한 상영신고는 별도로 신청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영화를 개봉할 예정이었던 극장이 대한극장(서울)과 문화극장(부산) 그리고 천일극장(광주)이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세기상사는 1차적으로 위의 세 극장과 상영계약을 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편의 복사판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고 그에 대한 상영신고필증을 발부받았을 것인데, 2월 14일의 문서는 해당 건에 대한 보류 통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교부의 일방적인 신고필증 회수통보는 세기상사가 수입추천을 받을 시점인 1960년 11월 29일에 작성하였던 “각서”에 근거한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문교부는 세기상사로 하여금 회수 통보를 받은 즉시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포괄적인 내용의 ‘각서’와 ‘서약서’는 행정적 절차의 미비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민원인에게 지우고 그에 따른 행정적 처분을 받게끔 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사후적인 검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즉, 4.19 혁명 이후 검열제도의 폐기는 그 의의와 함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각서”의 억압적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 5]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재교부 관련 문서 [그림 5]는 2월 15일 세기상사가 제명을 <비트 걸>로 변경 후 신규로 상영신고필증을 발급받기를 희망하고 이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는 품의서이다. 상영을 보류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교부에서는 “<비트 걸>에 대한 선전 및 광고에서 ‘젊은 육체들’과 전혀 무관하게 할 것”과 “문제의 영화 운운하는 문구를 삽입치 못하게 할 것” 그리고 “영화 상영 시에 있어 관람객을 비롯한 일반여론을 충분히 파악하시어 물의가 있을 시에는 즉시 보고할 것”을 명시한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화배급사인 세기상사가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이용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 판단된다. 그러나 세기상사는 다음날인 2월 16일, 영화의 선전과 광고가 아니라 “사과문”의 형식으로 신문광고란에 “사회 저명인사 중에는 극력 <젊은 육체들>을 찬양한 바도 있었으나 당국의 요청에 의해 <젊은 육체들>을 <비트 걸>로 개제하여 상영 7 ” 하게 되었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기상사의 행태는 결국 문교부로 하여금 상영을 중지케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 [그림 6]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문교부의 공문 1961년 2월 19일 문교부는 서울특별시 교육감과 각 도지사에게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해당 문서에는 상영중지 처분의 이유를 “상영 후의 제반 사항을 고려하여 동 영화상영을 당시에 배급회사인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으로부터 수리한 별첨 각서와 상영계획서에 의거하여” 상영계획에 있던 극장에서 “재상영 및 동일 극장의 장기 상영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의 개봉이 계획된 극장은 대한극장, 문화극장을 비롯하여 대구의 제일극장, 광주의 동방(東方)극장, 그리고 인천의 동방(東邦)극장 5곳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후의 신문기사와 관련 검열 서류를 참조해보면, 서울지역에서는 2, 3류 극장은 제외한 개봉관 상연은 제한적으로 허가된다. 2, 3류 극장의 경우 청소년들의 입장을 단속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영화 상영을 개봉관에 한정한다는 논리인 것 같으나, 어째서 서울 지역만 예외로 두었는지는 현재의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수입추천에서부터 상영신고필증의 발부까지 문교부의 고시에 따라 절차를 밟아왔던 사안이었던 만큼, 세기상사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입힐 수 없어 마련된 일종의 중재안 정도일 것이라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비트 걸>을 둘러싼 논란은 영륜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서울의 개봉관에 한정하여 상영을 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된다. [그림 7] <비트 걸> 재상영 허가 관련 서류 [그림 7]은 5.16 이후 정부조직이 개편된 뒤 세기상사가 공보부에 상영보류 해제를 신청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서류이다. 해당 문서는 1961년 12월 6일에 작성된 품의서인데, 그보다 앞서 1961년 11월 14일, 세기상사는 공보부 장관에게 상영보류해제와 관련하여 서신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개봉 후 영화의 교육적 가치”가 인정되었고, “혁명 후(5.16 쿠데타를 의미) 이와 유사한 수편의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된 사실”을 참작하여 상영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후, 1961년 12월 6일, 공보부로부터 해당 영화가 “2월 18일로 상영보류된 작품이나” “서류고사 및 실사고사를 통하여 내용을 검토한 바 관객으로 하여금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는 스트립쇼-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함이 무방하다”고 판정을 받고 재상영을 위한 허가증을 받게 된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해당 영화에 대한 검열이 8월에 이미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군과 법무부, 민간 인사(추정)로 구성된 검열 위원회는 해당 영화에 대해 양가적인 결과를 내어놓는데, 역설적이게도 군에서 파견된 오세용 소령만이 “반항이 그 생리가 된 젊은 세대가 범하기 쉬운 악풍조의 감염을 부모들의 사랑과 조언으로 미연에 방지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한 영화”로서 이를 검토한 결과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야비하고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으니” 해당 “장면만 삭제하면 상영하여도 가하다고 사료”된다는 입장을 내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상영허가가 되었고, 그 권리는 2년간 보장이 되었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1971년 6월에 세기상사가 다시 한 번 <비트 걸> 상영허가를 신청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검열 당국은 해당 영화에 대한 권리가 세기상사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상영허가를 반려한다. 이후, 세기상사는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입증함으로써 권리 상에 문제가 없음을 보이고 문제가 되는 장면을 삭제하여 재심을 요청하는 의견을 전달한다. 그러나 검열당국은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이 문제되므로 화면 일부를 제거하여도 상영이 불가하다고 사료되어, 현재로서는 허가할 수 없으니” 이를 반송한다는 의견을 통보함으로써 상영금지처분을 내린다. <비트 걸> 검열과 관련된 일련의 서류들은 동일한 영화가 정책 당국의 입장에 따라 어떤 처분을 받게 되며, 그 과정에서 시장 주체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그리고 그들 사이의 역학 관계는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한국영화사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리라 생각된다. 1. 1912년에 설립된 영국영화검열기구(BBFC)는 비정구기구로서 현재는 영국영화등급분류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lassification, BBFC)로 그 명칭과 기능이 변경되었다. 2. 1960년대의 영국의 영화 등급분류 기준은 U등급(Universal, 전체관람가)과 A등급(Adult, 성인동반 관람가능), 그리고 X(16세 이상 관람가능)등급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비트 걸>의 X등급은 한국의 현행 영상물등급분류 기준으로 따지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정도라 할 수 있다. 3. 「Beat Girl」, Wikipedia. (URL: https://en.wikipedia.org/wiki/Beat_Girl) 4. 의미를 알 수 없음. 5. 「<젊은 육체들> 말썽, 사회적 악영향을 우려하여」, 《한국일보》, 1961.1.27. 6. 「패륜영화의 상영과 극장가의 환경정리」, 《경향신문》, 1961.2.9. 7. 「영화 <젊은 육체들>에 대한 사과문」, 《경향신문》, 196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