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서 해제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해방 직후 남한 영화 장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남아 있는 영화가 많지 않은데다 혼돈의 국내의 영화계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의 존재가 미흡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이 시공간의 영화 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합국 소속의 미국의 점령지 영화 정책과 미군정의 영화 정책의 기조를 참조해야하는 국제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국외의 적극적인 사료 확보 노력을 통해 국내적 시각과 국제적인 정치·경제·문화의 중층적인 맥락 속에서 남한 영화계를 조망하는 시도와 연구 성과가 늘어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흐름에 기여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료를 널리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미국과 소련 간의 한반도 분단 점령이 결정된 후, 남한에는 1945년 9월부터 미육군 24군단의 A. V.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주한미군정청 체제가 본격 수립되었다. 미군정은 미국의 대외문화 정책과 문화 기조에 따라 남한의 영화 정책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설정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면서 남한 내의 좌익세력을 억압하고, 경제적으로는 남한을 미국영화의 소비시장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한편, 이 시기 남한의 영화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남한 영화계의 현실은 영화인들의 노력 여하나 영화계 고유의 논리가 아닌 정치동향에 좌우되고 있었다. 초국적 냉전 구도에 돌입하면서 정부 수립은 더디게 진행되어, 미군정기 체제의 남한은 국제무역을 할 수 있는 ‘국가’ 자격이 없었고, 같은 이유로 국제무역시장에서의 환율도 결정할 수가 없으므로 국내 생산이 되지 않는 생필름을 비롯한 자재와 설비가 수입될 방안이 전무했다. 게다가 이 시기 영화계의 인재들이 좌우로 나뉘었고,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제작 자본을 조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미군정의 민간 대행 기관인 중앙영화배급사(Central Motion Picture Exchange, CMPE)가 들여오는 미국영화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월등했기 때문에 남한의 극장은 미국영화로 가득했다. 새로운 영화와 ‘민족영화’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미군정기 남한 영화인들은 군과 관에서 흘러나오는 생필름을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해 구해, 군과 관에서 잠시 빌려 온 카메라를 돌려써가며 16미리 극영화를 제작했다. 점령지 일본과는 달리, 영화 제작에 있어서 미군정의 정책적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한 영화계는 이 시기 아무런 진전과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 남한 영화인들의 중론이었다 1 . 이제 소개할 사료는 1949년 잡지 《상품의 세계동향(World Trade in Commodities)》에 실린 남한의 영화산업에 대한 세 편의 보고서 형식의 기사이다. 이는 영화 사진부서 부서장 골든(N. D. Golden)의 “영화와 장비(Motion Picture and Equipment)”를 특집으로 한 기획의 일부로 보인다. 1949년 1월 먼저 ‘남한의 영화산업(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이라는 4쪽 분량의 보고서가 실렸다. 이어 4월호에는 “남한”이라는 꼭지의 1쪽짜리 보고가 실렸고, 9월호에는 2쪽 분량의 “대한민국의 16미리 오락 영화(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소개되었다. 《상품의 세계동향》은 미국 워싱턴의 국내외통상부 국제무역사무소(Bureau of Foreign and Domestic Commerce, Office of International Trade)가 1947년에서 1950년까지 발행하던 정기간행물이다. 매호는 통상(Commodity exchanges)과 관련한 특별 기획을 주요하게 담고 있고, 나머지 부분에는 여러 형식의 다양한 내용이 섞여 있다 2 . 정부에서 발행한 기관지이지만 잡지 가격이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관 배포를 위한 목적과 함께 국내외의 일반 판매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외 아카이브를 통해 수집되어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 장을 이해하기 위해 활용되는 사료는 대부분 주한 미군정청(U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나 미국 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 전쟁부(혹은 육군부)가 생산한 문서가 중심이 된다. 이들 사료는 점령지의 시민들을 재정향(re-orientation)하고 재교육(re-education)하기 위해 군과 관에서 제작한 계몽성과 교육성이 강한 다큐멘터리와 문화영화를 제작, 공급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유입되는 할리우드 영화는 군과 관에 있어 점령지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한 용도라는 면이 더 강했다. 이 사료의 생산주체는 미국 내 정부기관이지만 해방기 남한의 영화 산업의 현황을 철저히 ‘할리우드’ 즉 미국 시장과의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경제적 관점으로 미래의 투자자들을 위해 분석하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또 ‘인력, 자본, 설비와 기자재난이 심했다’는 정도의 서술로 남아있어 국내 사료가 포괄하고 있지 못한, 남한 내 영화 산업의 상세한 수치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그 분석 방법과 제공된 수치의 정확성을 교차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존재 가치가 크다 하겠다.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이 사료는 1949년 서울 소재의 미합중국 정치자문사무소(Office of United States Political Advisor)의 사무관 윌리엄 브라운(William B. Bruns)이 작성한 보고서 형태의 기사이다. 새롭게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이 과연 미국의 영화 및 각종 장비의 수입 시장으로서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 타진하기 위한 예비 조사서로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 보고서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고 난 뒤 남한의 영화 산업과 장비 현황을 몇 개월간(1948년 8월부터 1948년 12월)간 수집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의 민간 영화사와 생필름이나 현상 관련 약품 회사, 영화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생산하는 기업의 남한 시장 진출에 도움을 주고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 보고서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미군정의 여러 기관들. 특히 남한의 영화산업을 통제하는 부서인 공보부 영화과를 통해서 얻은”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고서의 정보를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미군정기(1945년 9월 8일~1948년 8월 15일)간의 전체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1948년 8월 15일 이후 12월까지 4개월간 대한민국 정부 설립 이후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인지 혼돈스럽다. 하지만 이후 4월 폴 스트럼이 작성한 “South Korea”에서 추가적으로 밝히는 바로 추측하면, 이 보고서의 내용은 전자, 즉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산업 현황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보고자는 ‘서장(Introduction)’에서, “미국적 기준에서 보면, 한국은 빈곤했고 현대적인 삶에 필수적인 산업적 그리고 기계적 장비에 대한 중대한 결핍이 있다 …… 철수한 일본인들의 산업화의 공백이 메워지지 않는 한, 영화 산업에 있어서 물리적인 성장에 대한 희망은 거의 없다”고 부정적으로 전망한다. 동시에 그는 “영화산업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근대적 경제를 지원할 한국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전제한다. 이 보고서의 행간에는 당분간 남한 영화 산업의 성장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며, 할리우드의 완성된 영화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시장으로 설정할 수 있겠지만 생필름이나 약품,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원활히 판매할 수 있는 무역대상국으로 설정하기는 다소 힘들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그럼 이 사료를 개괄적으로 훑어보자. 보고서가 중점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은 우선 남한의 무역 제한(Trade Restrictions), 검열(Censorship), 배급(Distribution), 저작권 규제(Copy Regulation), 제작(Production), 세금(taxation), 상영(Exhibition), 광고(Advertising)의 현황에 대해 요약하고 미국의 상품 판매의 영향(Influence on Sales of United Merchandise)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16미리 극장 영화(16mm Theatrical Motion Picture)가 남한에서 어떤 식으로 무역제한, 배급, 상영,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지와 장비(Equipment)의 보유 현황이 어떠한 지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남한의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Visual Education and Equipment)의 현황에 대해서 기록하고, 남한 극장이 보유하고 있는 영화 시설(Theater Motion Picture Equipment)에 대해서는 영사 시설과 음향 시설(Theater Projection and Sound Equipment), 스튜디오 시설(Studio Equipment), 장비 생산과 판매(Production and Sales Equipment)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림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gure Industry in South Korea" 보고서 1쪽 ‘남한의 무역 제한’ 부분은 35미리 극장용 영화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1948년까지 미국영화를 들여오는 데에 있어서 수입허가는 필요하지만, “사실상 미국영화의 배급을 막거나 감소시킬만한 스크린 쿼터나 대표적인 규제는 없다”고 밝힌다. 그리고 당시까지 들여온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들여온 것은 없고, “CMPE가 뉴욕을 거쳐 할리우드에서 한국으로 들여오는 미국 극영화는 연합국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의 지휘권 하에서 운용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법으로 모든 외화에 10%의 수입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영화는 군을 통해 들여오는 셈이므로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다른 외화 주로 중국영화가 수입관세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적고 있다. ‘세금’ 에서 보면, 관세 외에 영화에 붙는 유일한 세금은 극장 입장세로 30%라는 점을 명시한다. ‘검열’ 에서는 남한에 수입된 외화를 관할하고 검열하는 기관인 미군정 공보부 영화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허가된 모든 영화는 검열을 거쳐야하고 허가권 없이는 상영이 금지된다. ‘검열위원회’는 한국인 1명, 보통 영화과장과 같은 책임의 미국인 1명으로 구성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들여오는 미국영화는 이미 미육군 부서에서 한국에서 미국의 점령과 민주주의에 해로운 내용에 대해서 기본적인 검열”을 실시하여 이미 “한국인의 감수성을 해칠 것 같은 내용”이 통제되고 있으므로, 공보부의 검열위원회는 “한국인에게 낯선 생활을 묘사하는 것들”만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 된다. ‘배급’ 부문은 1948년을 기준으로 한 남한 영화 배급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기간 중 85편의 극영화, 뉴스릴 그리고 외화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적으면서, 인플레이션과 노후한 기자재로 영화 배급이 원활하지 못하며 극장은 영화상영보다 무대공연이 더 이익을 발생시키는 오락이라는 난점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이 나라에 매년 150편의 극영화가 수입된다면 각 극장은 매주 다른 영화를 선보일 수 있다.” 상업적으로 배급되는 극영화는 대부분 포지티브로 공급을 받으며, 극장보다는 이동영사가 더 많은 다큐멘터리는 16미리로 프린트한다고 전한다. 1948년 남한에서 “미국영화에 대한 매표수익은 연간 60,000,000에서 70,000,000원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대한영화사(Korea Motion Picture Company), 조선영화사(Chosun Yun Wha Sa) 그리고 이 프로덕션(Lee Production)”, 남한의 영화 제작 조직은 3개가 있다고 ‘제작’ 에서 적고 있다. 이필우가 이끄는 “이 프로덕션은 현상, 녹음, 프린트 복사, 축소, 특수효과 그리고 자막 등을 한다. 다른 두 회사는 자신들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남한 영화인들의 필름, 기자재, 인재 부족이라는 열악한 제작환경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다. “남한 내 극영화 제작비는 평균 2,000,000원에서 3,000,000원이 든다”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상영’ 에서는 한국인들이 뮤지컬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좋아한다고 밝힌다. 미국영화는 인기가 좋아 모두 단독으로 상영되었고, 한국영화와 다른 외화(주로 중국영화)는 동시상영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적고 있다. 남한은 96개의 극장에 54,120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인이 보기에 80%정도는 좋지 못한 상태였다. “주 평균 영화관객은 425,000명, 대도시 상영은 보통 1시에서 자정까지 연속으로 이어진다.” 입장료는 50원이 기본인데, 특별한 영화의 경우는 80원, 또 남한의 극장 연 수입은 300,000,000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6미리 극장영화’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의 보고는 앞부분 35미리 극장영화와 대동소이하다. “검열비용은 없지만 16미리 상영에 대한 허가비로, 3개 릴 이하에는 400원, 4~7개 릴은 700원, 7개 릴 이상은 900원이 부과”된다는 사실이 추가되어 있다. 또한 남한에서는 16미리로 된 외화는 사실상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개인 사업자나 사회단체가 사적으로 상영하는 정도가 가능하다. ‘제작’과 ‘장비’현황을 보면, 현재 남한에서 영화제작이 요원하고, 16미리 현상과 축소 기구는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상영’ 부분까지 포함해서 보면 남한에 16미리 상업 영화극장이 없으며, 인구 대부분이 농촌에 분포해 있음에도 극장 시설이 부재하고 극장 설치 역시 요원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곳들에 16미리 영화를 상영하고자 미군정 민사처는 전국 지부에 16미리 프로젝터 300개를 보유하고 이동영사단(mobile unit)을 운영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군정은 점령지의 재정향과 재교육을 위해 영화를 비롯한 시각 미디어를 적극 사용했는데, 관련 내용을 바로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 당국은 시각 교육을 목적으로 16미리 교육영화와 슬라이드, 교사 매뉴얼을 수입하였다. 이와 관련한 법도 없는 상태였다. 특히 미군을 위한 영화는 허가도 허가비도 없다. “남한에 있는 3,415개의 초등학교, 425개의 중등학교, 29개의 대학”을 대상으로 한 시각교육 보조 수단들은 면세가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교육 영화들은 공보부 영화과 검열을 거쳐, 400원의 허가비를 내고 상영되었다. 민간 조직에 25개, 정부기관인 민사처에 300개 정도 있었지만, 16미리 영사기에 대한 요구는 당시 엄청났다. “교육에 영화가 사용되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자료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내용은 ‘극장의 영화 장비’로, 영사 및 음향 시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35미리 영사기, 아크 램프, 악세서리, 모터 발전기와 정류기, 커튼 트랙과 장치 등 전반적으로 너무 노후했고, 상당히 많이 수리되어 사용되고 있어 형편없는 상태이다. 96개의 극장 중에 서울에 있는 3개만 에어컨 설비(팬 유형의 강력 송풍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적고 있다. 남한에서 운영 중인 유일한 ‘스튜디오 설비’는 아마도 조선영화사를 의미하는 듯한데, 시설 상태가 좋지 않은 길이 65, 폭 35, 높이 40(인치)의 작은 무대가 2개 있다. 이 사료에서 살피는 바, 미군정기 및 초기 대한민국 정부 시절 남한의 영화 산업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다. 보고자가 보기에 남한의 외국 무역은 아직 충분히 신뢰를 얻어낼 만큼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산업에 있어서도 미국과 교류가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외화 시장 점유에 있어서 중국영화의 유입을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당시 미국과의 영화 관련 무역 교류에서 가장 큰 난점은 “통화에 대한 환율이 설정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 당시 “남한으로의 수입은 물물교환(barter) 기반”인데다가, 본국으로 송금이 허가되지도 않은 상황은 “CMPE가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재정적 손실을 낳게” 했던 것이었다.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의 미국사절단(United States Mission) 폴 스트럼이 4월호에 실은 1쪽 분량의 것이다. 이전의 보고서인 “남한의 영화산업” Vol. 7, Part 4, No.1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영화 관련 남한의 정치적 변화 상황을 짚으며 글을 시작한다. “남한이 자치를 하고 있고, 그 세법이 변화하는 중이며, 미국영화에 대한 수입관세와 검열이 부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지난 1월의 기사 내용과 달라진 점들을 중심으로 보충적으로 기술한다. 내용은 무역 규제, 배급과 검열, 세금, 상영, 제작 부분을 포괄하고 있다. [그림 2] Paul J. Strum, "South Korea" 보고서 ‘무역 규제’ 에서 보면 “CMPE는 1947년 4월 이래로 60,000,000원의 잔고”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환율도 정해지지 않았고 송금도 불가해 이전과 달라진 점은 없다. ‘세금’ 부문에서 기술하는 것처럼 “외화에 대한 세금 역시 유보된 외환문제의 해결에 달려있다.” 반면 남한 정부 수립 이후 관세에 변화가 생겼는데 “수입한 오락 영화는 임의로 피트 당 50원으로 임의로 계산한 후 여기에 10%의 관세에, 30%의 물품세가 더해져 매 피트에 부과되는 비용이 21.50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미군정기와 달리 “최근 미국 영화에 대한 관세와 물품세는 극영화 당 175,000원에서 245,000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전에는 없던 수입영화에 대한 소정의 검열비가 생겼고, 극장 입장권에는 1948년 6월부터 100%의 유흥세가 붙기 시작했다. ‘배급과 검열’ 에서도 미군정기와 비교해 미국영화에 대한 검열이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다. “2편의 미국영화를 상영금지 시켰고, 다른 영화에서 200피트를 삭제했으며, 원칙적으로 폭동 장면과 탈옥 장면이 삭제”된 것이다. 그래서 1948년 동안 “66편의 미국 오락영화가 한국으로 수입되었고 41편이 배급”되었다. 이 보고서가 추론하는 바 한국영화의 수입은 “전체 수입의 15~20%” 정도이다. ‘상영’을 통해 1월의 보고서와 비교해볼 때, 55,110개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 극장은 116개로 늘어났고, 주 평균 관객은 22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입장료는 작은 상영관 50원에서 큰 도시 상영관 150원까지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대중의 지불 능력을 따져볼 때 퍽 높은 편이라고 언급한다. 이 보고에서는 남한의 영화인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다. 제작자와 제작사를 통틀어 25개가 있는데, 이중 7개 정도가 실제적인 영화제작이 가능할 것이며 합리적이고 능숙한 영화기술자는 6명 정도라고 적는다. 35미리로 극영화 5편, 2~3개의 단편이 제작되고 10~11편의 16미리 영화가 제작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암시장에서 팔리는 생필름 가격이 피트 당 30~40원 정도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보고서는 필자가 어떤 경로로 해당 부문들의 정보를 취합하고 조사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아 아쉽다. 글의 말미에서 폴 스트럼은 스튜디오나 극장의 설비 대부분은 거의 폐기해야할 정도이고, 이런 상황에서 남한 영화산업에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는 자체가 극도로 힘들 것이라 마무리한다.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의 프란더가스트(O. M. Prandergast)가 작성한 것으로, 이제 활발하게 제작활동이 가속화되고 있던 남한의 극장용 16미리 오락영화에 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기술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보고서와 다르다. 이 시기 16미리 영화제작이 증가한 이유는 미공보원의 활발한 활동 때문이었다. 현재 확보된 사료의 분량은 1쪽인데 이전의 보고서들의 형식과 내용을 참조하면 전체 2쪽에서 1쪽이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무역 제한, 배급, 상영, 제작 등 기술 항목과 형식은 4월의 보고서와 유사하다. 1949년 7월 드디어 환율이 책정되어 미국통화 1달러가 900원으로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한 영화제작자와 상영업자들은 열악한 장비와 생필름 부족으로 여전히 애를 먹고 있고, 이 부족을 해결해 줄 외화 교환 방안도 없”는 상태였다. [그림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보고서 ‘무역 제한’ 에서 보면 수입 허가는 여전히 필수이고, “관세는 10%의 종가세, 30%의 국내소비세가 필름과 세금 가치의 합으로 부과되어 세금과 국내소비세는 총 43% 종가세”로 되었다. ‘배급’ 에서 남한 공보부 영화과의 검열을 문제 삼는다. “미국영화에서의 폭력과 열정의 장면들이 삭제당”하고 있는 반면 “한국이나 중국영화는 폭력을 그들 나름대로 그려내”고 있다면서 검열을 빠져나간다고 묘사한다. 게다가 “일본의 전쟁 범죄자들을 교수형 시키는 실제 처벌 장면을 보여주는 미국공보원의 뉴스릴은 한국 관객들에게 광범위하게 매우 인기가 있”어 검열을 피한다고 원칙 없는 검열에 대해 불만을 피력하고 있다. 검열비는 없지만 검열을 선행조건으로 하는 상영허가비용을 상세히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국영화 1-3릴 4,500원, 4-7릴 7,800원, 8-13릴은 10,200원. 외화의 경우는 1-3릴 6,500원, 4-7릴 11,400원, 그리고 8-13릴은 14,700원.” 1948년 1월 이후 미공보원에서는 “매달 15편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고 각 영화는 12개에서 15개의 프린트를 뽑는다. 전후 미공보원의 생산량은 현재 총합으로 대략 330편정도”이다. 매달 생산하는 영화는 6개의 뉴스릴, 4,5편의 극영화, 나머지는 다큐멘터리이다. 미공보원의 영화는 무료로 배급되지만, 16미리 다른 오락영화의 대여료는 다양하다는 점도 명시하고 있다. 미국 영화 이외에 수입된 외화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1948년 11월 15일에서 1949년 7월 3일까지 공보부 영화과의 기록에는 일본영화 4편, 영국영화 1편, 독일영화 6편, 프랑스영화 2편, 이탈리아 영화 3편 그리고 스웨덴의 16미리 영화 1편의 극장용 영화가 상영허가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중국의 16미리영화도 한국에서 상영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한국에서 해방 후 제작된 16미리 극장용 영화는 13편인데, 이중 8편이 1949년 1월 이후 조선영화사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으며, “16미리 장편 제작에 소요되는 비용은 5,000,000원”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상영’ 에서는 남한에 115개의 극장이 있고 모두 35미리 영사기를 가지고 있다고 적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16미리 영화가 상영가능하다면 모두 16미리 장비를 빌리려고” 한다. 입장료는 지방 최고가 120원, 서울 최고가 200원이며, 마찬가지로 입장료의 100%가 흥행료라 기술한다. 이 자료의 작성자가 16미리 극장 영화 설비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지역사회의 기초시설로서 영화관 설립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농촌 인구 분포가 높은 남한은 미공보원의 이동영사대가 아니면 많은 이들이 1년에 영화 한 편을 볼 수 없으나, 근본적으로 한국 마을에 16미리 극장 장비가 부족하므로 영화관 설립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래서 미공보원의 “사륜구동과 윈치(winch: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작은 크랭크)가 장착된 자동차는 일 년 내내 한국도로를 달리며 여행”한다. 1. 심혜경, 「안철영 텍스트를 통해 본 대한민국 설립 초기 ‘조선영화’ 연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2, 14~20쪽. 2. 이 간행물의 서지는 호주국립도서관의 정보를 참조했다.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https://trove.nla.gov.au/work/31968523?q&versionId=38809543
심혜경
201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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