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의 너
- 감독
- 증국상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주동우, 이양천새, 팡 인, 황각, 오월, 주 이
대정관은 1912년 11월 7일 앵정정(櫻井町)에 설립되어 1935년 12월 16일까지 존속한 대표적인 일본인 전용 영화관이었다. 대정관의 설립자는, 고급 여관 천진루(天眞樓)의 주인 닛다 마타베(新田又兵衛)의 셋째 아들인 닛다 고이치(新田耕市)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에 있던 천진루를 남산에 옮겨 지었을 정도로 이토와 막역한 관계였던 닛다 마타베는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으로 이주하여 활동했다. 장남 닛다 신기치(新田新吉)는 천진루를 이어받았고, 차남 닛다 슈키치(新田秀吉)는 닛다 고이치와 함께 대정관을 운영했으며, 막내 닛다 마타헤이(新田又平)는 인천에서 표관(瓢館)이라는 영화관을 운영했다. [자료] 닛다 고이치의 가족 사진(《조선공론(朝鮮公論)》, 제4권 3호, 1916년 3월) 1882년 태어난 닛다 고이치는 1899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미쓰이(三井)물산에 입사하여 사업 수완을 배운 후,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던 1910년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건너 왔다. 조선에 와서는 가족과 지인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개발 예정지였던 앵정정 일대 5천평 정도의 땅을 매집했다. 자금은 동경건물회사(東京建物會社)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아 변통했는데, 그 땅을 관통하여 지금의 을지로가 뚫리게 되면서 짧은 기간에 큰 시세 차익을 얻었다.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고도 2만원의 현금을 손에 쥔 닛다는 1만 2천원의 예산으로 활동사진관 건립을 추진한다. 영화관 건축이 완성될 무렵, 메이지(明治)시대가 끝나고 다이쇼(大正)시대가 시작되자 닛다는 애초 생각해둔 유락관(遊樂館)이라는 이름 대신 대정관이라는 이름으로 1912년 11월 7일 극장 문을 연다. 대정관은 경성의 영화 흥행을 주도하던 경성고등연예관과 차별화한다는 의미에서 극장 광고에 “아사쿠사식(淺草式)”이란 용어를 적극 활용했다. 태국에서 온 일본인들이 세운 경성고등연예관의 흥행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여, 월 2회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던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자주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또한 입장료를 특등 50전, 1등 30전, 2등 20전, 3등 10으로 책정하여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관객들을 유치했다. 나아가 위생 설비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의 설치, 난로와 선풍기의 구비, 양장(洋裝)의 여성 안내원 배치 등을 통해 편리함과 청결함을 강조함으로써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대정관과 경성고등연예관은 관객 구성 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경성고등연예관은 대정관이 개관하기 전인 1912년까지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를 함께 두어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들을 함께 받았다. 반면 대정관은 일본인 변사만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일본인 관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 되었다.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관을 운영하다 보니 대정관의 프로그램은 일본의 구파, 신파 영화가 중심이었다. 일본영화 필름을 공급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대정관은 닛카쓰(日活)와 대리점 계약을 맺는데, 일본의 4대 메이저 영화회사인 요시자와상점(吉澤商店), 요코다상회(橫田商會), M파테, 후쿠호도(福寶堂)가 통합하여 1912년 설립된 닛카쓰는 당시 일본 영화 산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사진] 대정관 개관 사진(오카 료스케(岡良助),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 도쿄: 하쿠분샤(博文社), 1915년.) 닛다 고이치는 극장 운영과 흥행업을 체계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닛다연예부(新田演藝部)를 세워 운영했다. 1914년 1월 닛다연예부의 영업주임은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 지방부장은 스즈키 도라타로(鈴木虎太郞)였다. 닛다연예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대정관을 중심으로 전국의 영화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필름 유통망을 조직하는 것이었는데, 닛다연예부는 우선 계약을 통해 지방 영화관과 관계를 맺었다. 1913년에는 경쟁 영화관이던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입하여 제2대정관으로 삼았으며, 닛카쓰와의 계약 이래 ‘닛카쓰 만선지방부(滿鮮地方部)’로 운영되던 1916년에는 인천의 표관을 직영했다. 나아가 경성의 우미관(優美館), 평양의 앵좌(櫻座), 원산의 수관(壽館), 부산의 보래관(寶來館), 대구의 금좌(錦座)를 특약관으로 두고 영화배급망을 구축했다. ‘닛카쓰 조선총대리점’으로 운영되던 1917년 1월 당시 닛다연예부가 관리하던 극장으로는 경성의 대정관(감독원: 노무라 신(野村新)), 인천 표관(감독원: 스즈키 도라타로), 부산 상생관(相生館, 감독원: 미요시 마타로(三好又郞)), 용산 용광관(龍光館, 감독원: 다카하시 류타로(高橋立太郞)), 대구 칠성관(七星館, 감독원: 기리야 도쿠노스케(桐谷德之助)), 평양 가무기좌(歌舞伎座, 감독원: 요시즈미 신고(吉住新吾)), 원산 가무기좌(감독원: 히가시우라 도쿠마루(東浦得圓))이 있었다. 1920년 1월에는 경성의 대정관, 인천의 표관, 부산의 상생관, 대구의 칠성관, 원산의 수관, 평양의 가부키좌를 회원관으로 두고 있었다. 1918년 닛다 고이치는 주식중매회사인 오사카의 다케하라 유자부로(竹原友三郞)상점과 조선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뒤 본격적으로 주식중매업에 뛰어든다. 이후 1920년 5월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설립되자 영화흥행업 관련 사항들은 형제들에게 넘기고 주로 주식중매인으로 활동했다. 닛카쓰 영화를 배급하며 조선의 흥행업을 주도하던 닛다연예부는 조선 내 다른 일본 영화회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큰 타격을 입는다. 특히 1921년 닛카쓰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橫田永之助)가 희락관(喜樂館)의 대주주가 되면서 대정관의 닛카쓰 독점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에 대정관은 1921년 12월 15일부터 쇼치쿠(松竹)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하는데, 쇼치쿠 역시 경성의 황금관(黃金館)을 직영하면서 독점이 어려워지자 또 다른 영화회사인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하기로 한다. 그러나 중소영화회사인 곳카쓰 영화보다는 쇼치쿠 영화가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다 1925년 1월 닛다 형제들은 결국 대정관을 매각한다. 대정관의 운영은 앵정정에서 오복점을 경영하던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가 넘겨받았다.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없던 후쿠자키는 요코야마 도미오(橫山富美雄)와 나카미즈 도모노스케(中水友之助) 등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많은 인물들을 중용하여 경영의 안정을 기하는 한편,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郎)나 하야지 조지로(林長二郞) 등 유명 스타가 출연하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며 관객들의 인기를 끌어 올린다. 하지만 시설이 열악했던 대정관은 토키영화 시대가 도래하자 다시금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33년 쇼치쿠의 최고 화제작이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토키영화 <충신장(忠臣藏)>이 상영되는 도중, 소리가 중간 중간 끊어져 관객의 원성을 들었던 것이다. 이전부터 대정관의 열악한 시설에 불만을 가졌던 쇼치쿠는, 1934년 대정관과 경성 봉절관으로서의 관계를 끊고 황금관의 후신인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경성의 새로운 봉절관을 삼기로 결정한다. 이에 쇼치쿠 영화의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1934년 11월 15일 후발 영화사인 PCL과 계약을 체결하고 PCL 봉절관이 된다. 하지만 PCL 봉절관 시절도 오래가지 못한 채 1935년 12월 16일을 기해 폐관하기에 이른다. 대정관의 흥행권은 약초정 큰 길가에 신축 중이던 약초영화극장으로 넘어갔고,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참고문헌 한상언, 「대정관의 설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영화연구』 제70호(2016년), 163~188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25~140쪽. * [사진](상단). 대정관 개관 기념 광고(≪매일신보≫, 1912.11.08) [자료] 제2대정관 전단지 來 八月 十七日 부터 第二大正館 新消息 特 히 撰拔 ᄒᆞᆫ 三大寫眞 을 ------------------------------------ ◎ 泰西奇談 三百年 全三卷 六千呎 三百年 以前 의 秘密 寶箱 은 如何 히 發見 지 一見 戰慄 만 大寫眞 ------------------------------------ 時節柄 見逃 치 못 逸品 ◎ 軍事大活劇 千軍萬馬 全二卷 四千尺 他館 의 寫眞 과 同視 치 勿 ------------------------------------- 特 히 當館 에 移入 封切 大寫眞 ◎ 破天荒 冒險劇 秘密使命 全三卷 八千尺 王妃 의 秘密 ! 飛行家 의 使者 ! 戰慄 大臣 의 奸謀 ! 疑問 의 首飾 ! 空中 飛行機 의 燃燒 ! 惡漢 의 追跡 ! 飛行機 , 自動車 , 滊車 의 競爭 何 가 勝利 ? --------------------------------------------- 順序 滑稽 담우 君 決鬪 喜劇 好一對 奇談 三百年 大活劇 千軍萬馬 冒險劇 秘密使命 ---------------------- 登場辯士 辯士長 金德經 說明主任 李丙祚 次席 崔炳龍 辯士 韓圭成 女辯士 康鏡玉 辯士 姜信五 少年 李丙浩 ------------------------------------ 注意 !! 寫眞 長尺 인 故 로 午後 七時 三十分 開演 黃金町 第二大正館 電話 一四三四 [자료] 《매일신보》, 1915.04.24. 朝鮮人 觀客 을 獨占 優美館 과 衆口 / 셰상 맛난 우미관 / 샤진에 물론 죵로 경셩에 잇 활동샤진관 ( 活動寫眞館 ) 으로 죠션 사 을 쥬장되 손님 삼아 흥 곳은 황금뎡 이뎡목에 데이대졍관과 죵로통 이뎡목에 우미관 ( 優美館 ) 의 두 곳이 잇셔 뎨이대졍관은 그 큰집 되 뎨일대졍관에셔 샤진을 공통 야 쓰 것이 만앗고 우미관에셔 대졍관의 뎍되 황금관 ( 黃金館 ) 과 샤진을 공통 야 두 곳식 두 곳식 엄연히 한 뎍국의 도로 셔로 야 경 을 고로 그 경 의 결과 연 셔로 됴흔 샤진도 빗최여 셔로 손님을 만이 랴 를 쓰더니 기간 ▲ 우미관의 흥 쥬 와 대졍관의 흥 쥬와 계약이 되야 죠션인을 주장되 손님으로 영업 던 뎨이대졍관은 디인 젼문으로 곳칠 죠건으로 뎨이대졍관에 가 손님을 밧을 우미관 흥 쥬 그 보슈로 대졍관 흥 쥬의게 삭 이 원식 주고 뎨이대졍관에셔 빗쵸이 활동샤진을 우미관과 공통 야 쓰고 우미관에셔 그 셰금으로 삭 오 원식 이기로 작뎡되야 뎨이대졍관은 지난 십오일브터 셰계관 ( 世界館 ) 이라 일흠을 곳치고 디인 손님 젼문으로 영업 졔도 곳쳐 죠션인 변 젼부 이 폐지 얏고 우미관은 황금관과 관계를 코 세계관의 샤진을 공통 야 쓰 이외에 모양좃케 경셩에 죠션인 전문 활동사진관으로 ▲ 독졈 디위 엇엇 원릐 대졍관에서 뎨이대졍관을 일본인 젼문으로 곳치기 황금관의 샤진이 평판이 됴흔 고로 그와 경 기 위 야 진고 셔편의 손님은 셰계관에셔 밧고 동편의 손님은 황금관 가 목쟝이 되 대졍관에셔 밧아 아못조록 손을 만히 고져 이오 우미관은 경셩에 독졈으로 조선인 젼문의 영업을 야 죠션인 손님은 혼 맛흘 마암으로 계약 인 한 달에 샤진셰 오 원이라 은 일본 디에셔 활동샤진 회샤와 샤진관 흥 쥬 간의 달 셰음으로 소위 갑죵 ( 甲種 ) 이라 야 그즁 낫다 지만은 이 젹은 디방 활동샤진관에셔 이러케 회샤와 계약 고 샤진을 갓다가 쓰 것이오 ▲ 경셩 치 큰 도회 에셔 더구나 독졈으로 이십만에 갓가운 죠션인 젼부 손님으로 흥 큰 활동샤진관에셔 치 안이 일이라 륙칠만의 디인을 손님으로 흥 대졍관 , 황금관에셔도 한 달에 샤진셰 수쳔원식 허비 을 보면 우미관에셔 디인 활동샤진관과 입장료를 치 밧 것이 빗 다고 안이 수 업스며 우미관에셔 세계관과 대졍관의 샤진을 갓다가 쓴다 되 일본 람 젼문의 활동샤진관에셔 여러 시간 빗초이고 미잇 일본 연극의 활동샤진을 주장 삼 고로 우미관에셔 그 일본샤진은 죠션인 미에 맛지 못 닛가 이고 남아지 셔양 것만 갓다가 흥 하닛가 우미관에셔 쥬장 삼 샤진이라도 대졍관에셔나 셰계관에셔 주장 샤진이 안인즉 연 샤진이 갑 젹은 것 될 것은 분명 며 갑 젹으면 샤진도 그러케 ▲ 좃타고 슈 업슨적 자연 구경가 사 의 입에셔 여러 가지 비평이 나와 사진이 쟈미 업나니 몃 가지 안되 사진을 가지고 시간을 우노라 길게 느리나니 말마다 젼거로 활동샤진을 몃 차례식 가져오 데 시간이 걸리나니 이젼에 보던 것을 다시 빗초이 것이 잇나니 구경갓던 사 이 리약이가 ᄌᆞᄌᆞᄒᆞᆫ 오락긔관이 업ᄂᆞ 경셩에서 일본말를 모르ᄂᆞᆫ 샤ᄅᆞᆷ이 활동샤진 구경을 랴면 엇지 얏던지 긔밧게 업스닛가 구경을 가기 가겟지만은 경 뎍이 업다고 죠흔 샤진을 구경식이지 안이 진 아모리 독졈이라도 손님의 그림 가 로 령셩 모양이라고 엇던 활동변 말 더라 .
<집 없는 천사>: 팬톰 시네마의 귀환 이 영화는 세 번의 삶을 살게 된다. 1941년 무렵 첫 상영 시기의 < 집 없는 천사 >( 최인규 , 1941), 필름이 망실된 이후 망령, 유령, 환상적 “팬톰 시네마”로서의 삶, 그리고 영상자료원으로 귀환 뒤 2005년 이후의 삶 . 이 세 번의 삶 속에서 <집 없는 천사>는 비평의 집들을 축조해냈다. 이 프레임들은 조선, 한국 영화사 비평 기반을 조성한다. 친일 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념적 논의 , 흥행 영화라는 산업적 접근, 법제도에 관한 논쟁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엔딩 부분, 아이들이 황국신민 서사를 낭독하는 장면이 문제적이다. 이 부분은 『한국 영화 전사, 이영일 저』에서 <집 없는 천사>를 한국 영화사의 눈부신 리얼리즘의 궤적에 소재시킨 것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기존 논의들에 대한 참조를 권하면서, 두 개의 토픽을 도입하고자 한다. 아동의 문제와 토폴로지다. 특히 고아 소년, 소녀와 일본 내지, 조선이라는 외지의 장소성과 경계이다. 이 영화에서 시네마틱한 정교함이 특히 드러나는 장면은 방성빈( 김일해 )이 고아들을 데리고 향란원을 세워나가는 과정을 실화에 근거, 재현한 고아 아이들의 노동과 일상 장면이다. 목가적 풍경 위로 해가 뜨면 기상나팔, 행진곡 풍 음악이 장쾌하게 이어진다. 땅을 파고, 함께 국수를 뽑고, 빨래를 하며, 아이들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신나게 일한다. 고아원 향린원은 이들의 노동으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 일본 내지와 조선 외지라는 지정학적 장소성을 비껴나는 헤테로토피아로 보인다. 또한 내지도 외지도 아닌 불확정 지대(zones of indetermination)로 나타난다. 소년, 소녀에 관한 이렇게 쾌활하기 그지없는 재현은 아래 표현과 그리 멀지 않다. “아동은 친화성, 방산적(放散的)사고, 유머, 뇌의 가소성(可塑性), 낙천성 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관계적인 면에서는 어른들에 비해 높은 감수성과 유연성, 관계의 탄력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호기심, 모방, 탐색적 사고, 실험정신, 상상력이 높다.” 1938년 7월 내무성 경보국도서과의 내부자료 제 32호「유소년소녀잡지에 관한 답신안(幼少年少女 雑誌に関する答申案)」에 나온 글이다. 일본에선 아동의 문제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게 된 것은 만주사변 전후의 긴박한 시기였다고 한다. 일본의 <소년클럽>과 조선의 <소년>잡지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인기를 누렸는데, “외지 조선의 소년들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일본, 조선, 만주, 타이완, 사할린, 브라질 등)에서도 자신과 동일한 생각과 이상을 품으며 생활하는 동년배가 있다는 잡지의 ‘전시’ 효과는 기울어가는 전쟁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소년독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는 심리적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1) 최인규 감독의 다른 작품 < 수업료 >(1940)와 <집 없는 천사>와 비교되는 <미가헤리의 탑>(시미즈 히로시, 1941) 등이 조선과 일본의 대표적인 아동 영화들로 위 소년클럽의 시대적 무드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자로 훈련된 이러한 고아들은 이후 징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1942년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방성빈의 실제 인물 방수원은 향린원 원아들을 징병하려는 일제를 피해 제주도에 남진소년개척단을 꾸리기도 했다. ( 이효인, 「집없는 천사와 미가헤리의탑의 비교연구」, 영화연구 44 , 2010, 254쪽). 이렇게 방수원이 맞닥뜨린 실제 상황에서처럼 징병을 피해볼 수 있는 집단이기도 하다. 미성년으로서의 아이들은 불확정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방수원의 활동은 제국 군대의 기제를 슬쩍 돌려놓는 것이다. 전쟁 동원령 시기, 일본 외지, 반도의 조선인으로서 행하는 사회적 실천은 독립운동을 제외한다면 필연적 아포리아에 빠진다. 재생산을 위한 긍정적 실천자체가 일본 제국에 가세하는 형세를 띄기 때문이다. 감독 최인규는 방성빈(방수원)의 아이들이 종국엔 제국의 황국신민 서사를 읊조려야 하는 과정을 영화 실천과 포개어놓았는지도 모른다. 흥행, 친일, 반일의 동요 속에서 영화 속 아이들의 신체는 어떤 불확정 지대인 장소를 생산하고, 지리적 장소인 향린원은 이것을 미학화 한다. 고아들의 집을 다룬 영화의 토폴로지다. 1)서기재, 「소년클럽의 독자 생성과 외지조선의 소년」, 일본문화연구 68,2018. 10. 210쪽 주 5에서 재인용. > > 집 없는 천사 VOD 보러가기 <<
(그림1) <홍길동>(신동헌, 1967) 신문광고, ‘한국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나왔다 홍길동’ 1) (그림2) <호피와 차돌바위>(신동헌, 1967) 신문광고. ‘약속대로 또 나왔다!’ 영화의 예고편을 TBC-TV를 통해 매일저녁 광고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2) 어쩌면 ‘홍길동(洪吉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홍길동’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견본용 이름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의를 실천하고자 한 가상의 위인이자 의적(義賊, Dark Hero), 홍길동이 평범한 인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16세기 경)에서 탄생한 홍길동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아마 이 두 형제의 역할이 혁혁하지 않았을까.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1300여회 연재)에서 홍길동은 그 모습을 찾고, 형 신동헌 감독의 한국 최초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에서는 드디어,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던 그 <홍길동>이 2008년 5월 41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소년 용자 길동(少年勇者ギルドン)>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이 영화는 일본 오사카 필름아카이브에 일본어판 16밀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를 복제해 한국에 남아있던 사운드 필름과 동기화시켜 복원, 10년 전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림3) 신동우의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연재) 3) 당시 신문기사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듯이 <홍길동>이 개봉된 1967년은 ‘특수오락영화 붐’이었다. 특수영화란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같은 공상과학 영화, <흥부와 놀부>(강태웅) 같은 인형극 영화는 물론 <홍길동>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의 영화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특수영화는 ‘사랑 타령의 극영화에 식상한 관객에게 무한한 공상과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4)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장르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관객으로 하는 장르로 일컬어지던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렇게 특수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신문들을 보고 자라 나름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일군의 관객으로 성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 상영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에 선두로 나섰다. 신동헌의 <홍길동>은 1967년 1월 21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만들어진 <호피와 차돌바위>는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 15일 또 다시 스크린에서 어린이 관객과 만났다. (그림4) 당시 방송인 전영우, 여성 산악인 김정심, 한글학자 양주동, 극작가 이서구 같은 명사들이 등장해 광고했던 한독약품의 소화제 훼스탈 광고에 신동헌 감독도 기용되었다. 5) 화백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화의 모든 유형-만화 삽화와 한 칸 만화, 서술형 만화와 단행본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까지-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한 가히, 한국만화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다. 벽성공립보통학교와 회령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부, 도서부, 미술부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학생잡지 《형설시대》와 《학생》에는 그가 그려 보낸 만화가 당선되어 실린 적도 있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의 교편을 잡다가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내려와서는 학원 교재 삽화일과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대학교 예과 이과 갑류에 진학하였다. 충무로에서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을 만나 인연을 맺어 『스티브의 모험』(1947)을 간행한 것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대부분은 인천, 거제, 동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부산 《연합신문》 문화부에 전속만화가로 근무하면서 4컷 만화 「주태백」을 그렸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신동헌은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잡지 《여원》, 《새벗》, 《학원》 등에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그가 신문사의 전속만화가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옮겨가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해 3월부터 극장과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달부의 ‘럭키 치약’ 애니메이션 광고, 엄도식의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인기를 끌었고, 신동헌 역시 진로소주의 제안으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에 뛰어들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1961년 12월 KBS가 개국하면서 이를 텔레비전용 16미리로 축소 프린트로 만들어 송출했다. 6) 그는 자신의 집에 ‘신동헌프로덕션’을 차려놓고, 해외 전문 서적을 찾아가며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연구했다. 신능파(넬슨 신), 정병권, 김대중, 신동철, 신동우 등 애니메이터와 컬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진로소주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다. (그림5) 진로소주 두 번째 광고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 (그림6) 진로소주 세 번째 광고 ‘파라다이스’ 첫 번째 광고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에 연료로 진로소주를 넣는 것이 그 내용이고, 두 번째는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라는 내레이션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직장인들이 진로소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제작한 ‘파라다이스’ 광고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라는 광고 음악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선원들이 파라다이스 섬에 내려 그곳의 여인들과 소주를 즐기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신문사 기자의 자격으로 해군 함정을 타고 하와이까지 항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이 광고에 삽입한 음악은 부산 MBC 피디였던 손권식이 작사하고, 허영철이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이 방식, ‘선녹음 후작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텔레비전 광고로서는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었다. 음악과 동작이 리듬감 있게 맞아떨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이후 신동헌프로덕션에는 제약회사, 양조회사, 섬유회사, 전자회사의 극장용·방송용 애니메이션 광고 문의가 쇄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사용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일부와 애니메이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어린이 대상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애니메이션의 제작의 포문을 열은 영화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계몽이나 선전을 위한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던 국립영화제작소를 제외하면 민간에서는 애니메이션 광고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계몽과 상품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는 중요한 매체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들은 애니메이션과 대중을 보다 친숙하게 해주는 매개였던 데다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인력들의 실질적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그림7) 신동헌이 제작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중,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이 제공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갖인 이 한표로’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장면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장면 정부는 공명선거 중요성 인식을 위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7) 의 제작을 신동헌프로덕션에 의뢰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국립영화제작소 이전의 담당기관)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공명선거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이후 새롭게 제정된 양원제를 담은 선거법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이 문화영화의 후반부 3분가량의 애니메이션은, ‘선거일 7월 29일이 참다운 민주주의 기초를 이룩할 뜻 같은 날이므로,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의사로 공명한 선거를 실시해야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두 번의 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와 정부 부처에서 의뢰하는 문화영화의 애니메이션 부분 제작을 통해 신동헌은 24프레임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렇게 경험이 무르익은 그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영화에 도전한다. 영화 선진국에서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그림8) 신동우의 연재만화 단행본 『홍길동』 1권 표지(근일문화사, 1968년 발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전」이 만화가 신동헌 씨의 총지휘로 완성되었다. 상영시간 1시간 15분의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양민을 괴롭히는 양반에 소년 「홍길동」이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에 현대적인 「코믹」 「스타일」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66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만 여 장의 그림을 그려 7개월 만에 제작 완료되었다. 일반영화완 달리 연기 「로케」 「세트」 등이 필요 없지만 「홍길동전」엔 백 8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애니메이터」 50여 명, 채색원 130여 명). 한국에선 처음 시도된 일이라 상상 이상의 노력이 들었고 많은 NG를 내야했다는 것. 화면의 한 동작에 필요한 그림이 60여 장씩이나 들었다고 한다. 녹음도 「배터런」성우인 김수일·이춘사 등이 맡았고 음악은 전정근. 【세기상사 제작】 8) 1967년 1월 21일 공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해 8만 5천 명을 동원하는 파격적인 흥행을 거두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상도 수상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은 1966년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수십 명의 동화부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간 애니메이션 광고 작업을 진행해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지만 장편 영화를 위해서는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보름이나 개봉을 연기하며 작업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긴 셀룰로이드 위에 비닐 컬러 (vinyl color) 물감이 없어 포스터 컬러(poster color) 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채화용 포스터 컬러 물감은 뜨거운 카메라 조명 아래서 금방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컬러리스트가 붓을 들고 촬영 현장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림9) <홍길동>의 주요 장면. 잘 알려졌다시피 원작 「풍운아 홍길동」은 신동헌의 동생인 만화가 신동우(1936~1994)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티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동우가 원작자였지만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는 신동헌의 조수로 활약했다. 지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는 배경과 인물, 움직임의 표현에 있어서, 또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매체 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신동헌은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바꾸었다. 또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눈은 까만 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는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담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눈처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홍길동>은 성우들의 녹음을 먼저 진행했는데 홍길동은 역은 KBS 성우 공채 1기의 김수일이, 차돌바위는 TBC성우 4기로 데뷔한 여성 성우인 김순원이 맡았다. 먼저 녹음을 진행한 성우들의 대화에서 원작자나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효과와 감정이 드러나 후작화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아낸 큰 수확이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 같은 만화왕국’을 꿈꾸었던 신동헌은 <홍길동>을 제작하고 난 직후 한국 만화영화의 가능성은 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가 고민한 것은 ‘외국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대로의 동작의 선을 확립해야한다. 우리 만화영화의 한국적인 동작을 어떻게 창안할 것인가’였다. 9) (그림10)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그림11) <홍길동>에 등장했던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뜻의 차돌바위 (그림12)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홍길동>이 대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서 세기상사와 갈등을 빚었다. 납품 일자를 어겼다고 수익을 배분해주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이후 작품에 재투자로 이어지기 만무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진 신동헌프로덕션은 곧 합동영화사의 제안으로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개봉했다. 원화 6만 장을 그려 상영시간 75분짜리로 찍었고, 그 제작비로 1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홍길동>을 만들면서 신동헌은 <속 홍길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속편이 여의치 않자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로 선회했다. 호피는 호랑이 가죽을 쓴 의로운 인물이라는, 차돌바위는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의미의 마치 배트맨과 로빈을 연상시키는 이 짝패는 「풍운아 홍길동」에서 단역으로 등장하는, 신동우가 창조한 서브캐릭터였다. 세기상사와의 생겨날 수 있는 판권문제를 염두 했던 신동헌은 『홍길동전』이나 <홍길동>에는 없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후속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경계 지역인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신동헌, 신동우 형제답게 이 영화에서는 여진족이 서사상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호피(명호)의 아버지(유세진 장군)가 정벌하던 오랑캐 여진족, 호피의 아버지를 모함한 사또 최진달, 또 그 사또가 연합한 세력인 여진의 욕심 많은 괴물 도마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몽적인 장면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사상의 적은 ‘여진족’으로 명시되지만 은유적으로 이는 북한의 공산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삭풍 선생 : 이 역적무리들. 봐라, 이것이 최진달 일파가 우리나라를 도마술에게 바치겠다는 문서다. 정신 차려라, 호피야. 북녘의 야만인의 피에 굶주린 발톱이 우리나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노리고 있는 이때에, 너 같은 젊은 놈이 그 좋은 칼솜씨를 지니고도, 나라를 위해서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도둑질만 일삼다니.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이놈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목숨을 투계와 같이 버리며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왔다. 알겠느냐? 북쪽 오랑캐들은 이 나라를 삼킬려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려왔으니. (그림13) <호피와 차돌바위>(1967) 중 삭풍 선생의 뼈아픈 훈계를 듣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호피의 모습 하지만 <홍길동>은 물론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흥행 수익을 둘러싸고 제작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다. 영화제작사들은 흥행 수입만을 챙기고 애니메이션 제작 재투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신동헌 감독은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극영화보다도 제작비가 더 많이 들고, 제작 소요 기간도 길며, 오랜기간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인력과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제작사 간의 불협화음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아쉬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림14)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타이틀 크레딧 장면들 신동헌 감독이 이렇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와 안타까운 결별을 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오프닝 크레딧은 조애희가 부르는 주제가 “말띠 신부”(음악 최창근, 작사 유호)의 멜로디에 맞추어 등장인물 커플을 애니메이션으로 캐리커쳐하여 소개하는데 이를 신동헌이 담당했다. 또 이어령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은 신동헌프로덕션의 크레딧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철훈이 구상한 소설 내용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동헌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10분가량 들어있다. (그림1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중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부분 그 외에도 TBC의 풍자해학 사극 <여보 정선달>(1971~1974)에도 신동헌이 참여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비상한 조선의 정선달이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 주제가에 맞추어 타이틀 크레딧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MBC의 장수 어린이프로그램 <뽀뽀뽀>(1983~1992)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뽀뽀뽀>의 고정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배경을 그려 넣었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꼭지에서는 예의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빛을 발했다. 2008년 유실되었던 필름을 되찾은 후 그는 애니메이션 관련 인터뷰나 강연으로 맹활약했고, 2014년 제14회 만화의 날에 기념공로상을 받았다. (그림16) <뽀뽀뽀>(MBC, 1989년 1월 9일) 중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만든 장면들 신동헌 감독을 회고하면서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홍길동>은 ‘프랑스 아네시영화제(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 10) , 실제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하지는 않은 것 같다. 1967년 <홍길동>이 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신동헌 감독이 직접 참관했더라면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신동헌』 편에 실린 필자의 「신동헌 해제」와 구술문,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시된 DVD <홍길동>에 포함된 필자의 「신동헌 감독 소개」를 참조해 재구성하였습니다. 1) 《동아일보》 1967년 1월 19일 5면. 2) 《경향신문》 1967년 8월 12일 5면. 3) 《소년조선일보》 1965년 9월 11일. 4) “[연예오락] 특수 오락영화 「붐」. 괴수물·만화 등, 영화로 뒤쫓는 우주시대 국내기술로 제작 가능”, 《한국일보》 1967년 6월 18일자 7면. 5)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 6) 광고정보센터 한국광고 100년 홈페이지 http://data.adic.co.kr/ 참고. 7)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명선거의 노래>는 “공명선거의 노래”(1분 41초)와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3분 8초)의 두 개 영상으로 나뉘어 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후자의 영상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영화의 제작년도가 1961년으로 오기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목록(1950~1993)』, 37쪽;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ehistory.kr. 8) “첫 선보인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전」, 7개월간 6만 여 장 그려”, 《한국일보》 1967년 1월 19일자 7면. 9) “만화영화 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동아일보》 1967년 1월 28일 5면. 10) “만화영화 홍길동 아네시영화제 출품”,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