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다큐 산
- 제작년도
- 2006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 본문에 삽입된 각주를 별도 페이지( 링크 )로 정리했습니다. 위 링크에 연결된 각주 페이지를 본 페이지와 나란히 놓아두고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이 글은 2000년 겨울, 언젠가 영화로 만들기 위해 써두었던 글을 2024년 겨울에 수정한 글이다. 과거, 문자로 남겨진 이 미완성 영화를, 현재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읽고 듣고 보며, 미래의 눈과 귀로 만들어지길 희망하였다. 이 가능성을 하나의 ‘포스트-시네마’ *주1 로 꿈꾸며 이전 글을 다시 손보고 주석을 추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면,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의 강과 산들을 둘러보셨으면 이제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그래야 모든 백성이 마음을 놓을 것입니다.” 1866년, 조선을 찾아온 이유를 그에게 물으니, 그는 ‘며칠 후에 있을 월식을 관찰하러 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주2 1958년, 그 *주3 는 다시 조선을 방문한다. 그는 시대에 취해 있지 않은 유예된 순간들을 좋아했다. 그는 지나가며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겼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그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취약한 슬픔을 바라보았다.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눈부신 어둠 속에서 월식을 관찰하던 그에게 ‘어떻게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는지’ 묻자, ‘빛나는 해와 그 빛을 반영하는 달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시간을 찾아보라’라는 말을 나에게 남겼다. 그리하여 나는 2019년 겨울, 어둠 속의 월식이 아닌 밝음 속의 일식을 찾아 스리랑카의 동쪽 해안 도시 트링코말리(Trincomalee)로 떠났다. 이 여정은 그의 시선에 대한 나의 답장이다. 그의 편지 *주4 는 ‘인간의 얼굴과 선한 고양이는 태양이며 달’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의 편지는 조선이라는 낯선 땅에서 그를 향해 돌아보던 하나의 얼굴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마주친 낯선 궤적을 사라져가는 우리의 언어로 담는다. 우리의 언어는 지진 통신(seismic communication)이다. 그중 영화는 움직이는 빛의 그림자로 태어났다. *주5 하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로 인해 영화는 빛을 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섬광을 더듬지 않는다. 그림자 없는 빛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희망과 절망을 엮어 어떤 기억을 다시 쓰고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트링코말리의 한 작은 마을, 이곳에서 우리는 2004년 12월 26일 *주6 에 일어난 금환일식을 추적한다. 어둠 나라에서 파견된 불개가 이번에는 태양을 삼켜보지만, 너무 뜨거워 다시 뱉어낸다. 일식의 그림자는 15년 후 같은 날 *주7 이곳을 휩쓴 지진 해일을 기억하며 노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를 부른다. 해와 달이 나뭇잎을 연주하며 지구에 떨구는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카말 알-딘 알-파리시(Kamal al-Din al-Farisi), 이븐 알-하이삼의 『광학의 서』 개정판 Kitab Tanqih al-Manazi (The Revision of Ibn al-Haytham's Optics) 필사본, 1309. “이것은 시각이 작동하는 원리- 수천 년 전 까마귀가 본 것을 중국에서 묵자(墨子) *주8 가 메기가 본 것을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주9 가 두꺼비가 본 것을 아랍에서 이븐 알 하이삼(Ibn al-Haytham) *주10 이 기록하였네” 까마귀는 쉬운 희망과 값싼 절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노래한다. 메기는 후퇴하여 돌아온 곳을 새로운 곳으로 만들며 다시 나아가기 위해 노래한다. 두꺼비는 동굴 신화 속 그늘 아래 은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래한다. 게임의 규칙 1. 세 개의 산(山) 정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바라본다. 2. 눈을 감는다. 겜마 프리시우스(Gemma Frisius), 천문학과 기하학 광선(De radio astronomico et geometrico), 1545. - 그 순간 색이 반전되고, 하늘은 어두워지며, 그림자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주11 어둠이 실종된 밤 - 구석과 구석 사이에서 우리는 귀 기울여 침묵을 끌어안는다. 새로운 것을 능숙하게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관점을 서툴게 취하며- 적정 거리를 찾기 위해 시선의 속도를 끊임없이 바꿔가며- 빛으로 시든 눈을 드러나는 어둠으로 씻는다. 우리는 절망과 희망을 엮고 찰나의 시간 축을 빌어 겹쳐진 실천적 기억 속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긴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코다(Coda) - 네 개의 벽 안에서 *주12 조용하고 소박한 작은 방, 뚫을 수 없는 그림자, 응답 없는 그림자; 깊은 생각, 슬픈 노래; 뛰는 마음 속 소중한 희망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먼 행복에 대한 움직임 없는 시선 많은 의심과 많은 인내심 여기, 나의 밤, 고독의 밤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 카메라 옵스큐라 광고 홍보물 (사진: Museum Crush )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덤프리스(Dumfries), 1836년 덤프리스와 맥스웰타운 천문학 협회 (Dumfries and Maxwelltown Astronomical Society)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인 풍차를 개조하여 핼리 혜성(Halley's Comet)을 관측하기 위한 망원경과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였다. *주13 우리는 이 오래된 어둠의 공간 안에서 실종된 밤을 탐색한다. 어두울수록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에서 우리는 물구나무를 서고 내부의 바깥쪽과 외부의 안쪽을 바라본다. 우리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취약한 슬픔들을 바라본다.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가운데,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우주의 구멍 아닌 구멍 지각할 수 없는 기묘한 천체 - 블랙홀로 만들어진 카메라 옵스큐라 우리는 이곳에서 블랙홀 *주14 의 그림자를 겹쳐가며 그 적정 속도와 거리를 찾는다. 어둠이 더 이상 빛을 증언하지 않는 이 위태로운 시대를 말하지 않고 말하며, 보지 않고 바라본다. 우리는 조용하고 소박한 이 작은 방 에서 우리의 회환을 감광제와 섞고 톱밥을 가득 채워 박제한다. 사건의 지평선 속 기억이 유일한 언어가 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공명하는 순간들을 현상한다. ‘너희가 눈멀었다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말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 *주15 라는 외침에 조응하며- 우리가 오랫동안 마음 속 깊이 새긴 기억조차 떠도는 섬망의 언어인 것을 기억하며- 광기로부터 반성적 성찰을 건져내 지나간 그림자의 반영을 이어 붙이며 - 언젠가 그는 행복이라 부르던 순간을 화산재로 짠 장막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들이 여기에서 행복을 볼 수 없다면 적어도 어둠을 볼 것’ *주16 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비균질적인 이미지의 표면 위에 어둠을 함께 밝힌다. 우리의 밤은 이 암흑의 빛 속에서 후퇴한 그림자의 목소리를 말없이 조절한다. 우리의 지각이 후퇴하고 탈선하고 겹쳐질 때 이 어둠 속 구멍 이면에는 어떤 잔상이 있을까? 우리는 이 유예된 그림자에 여전히 같은 감각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병렬하고 교차하는 시간은 우리의 취약한 기억을 다시 쓸 수 있을까? 겸허하면서도 눈부신 시선들 사이를 우리는 어떻게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이 여정의 끝에는 우정이 있다. 나머지는 침묵이다. *주17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경계는 없지만 한계가 있는 끝은 없지만 유한한 -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연다. 어둠과 침묵 속 다정한 밤 - 그 운동과 정지 사이 현전과 부재 사이 도둑맞은 우리의 편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필자 제공, 2019년 12월 29일 금환일식, 트링코말리 *** 주1. ‘포스트-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필름 매체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며 기술 장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선형적으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 산업으로 생산된 경제 상품으로서의 가치, 혹은 권력의 정치적 작동 수단으로 도구화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포스트-시네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영화의 원형으로 돌아가 다가올 ‘포스트-시네마’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주2. 앙리 쥐베르, 「조선 원정기」,《세계 일주(Le Tour du Monde)》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M.H Zuber)는 사관으로 강화도 원정에 출정하였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며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 및 풍습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을 남겼고, 그 기록은 1873년 프랑스 여행 전문 주간지 《세계 일주(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주3.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는 1958년 프랑스 대표단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다음 해 그는 이때 남긴 사진과 글을 엮어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을 쇠이유(Seuil)출판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한국에는 눈빛 출판사가 1989년 「북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집을 번역 출간하였다. 주4. 크리스 마커는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를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 마지막에 실었다. 주5. 움직이고 변하는 그림자로서의 영화; 끊임없이 여러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비추고 반영하는 영화.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 직물을 짜고, 풀고, 다시 짜기를 반복하는 영화. 우리 안의 타자를 위한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영화. 복수의 힘과 규칙이 복합적으로 배치되는 사회적 혼합물로서의 영화. 움직이는 시적 감각과 사유가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는 가변적 구성물로서의 영화. 주6.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진도 9.0 지진에 의해 발생한 쓰나미는 총 12개국에 전례 없는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쓰나미다. 사망자 숫자만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주7. 2019년 12월 26일 오전 8시 10분부터 11시 26분까지 스리랑카에서 금환일식이 관측되었다. 달이 태양의 중심을 완전히 가리지만, 달의 그림자가 태양보다 작아 태양의 가장자리가 원형 빛으로 남는 불의 고리는 9시 38분부터 2분 43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의 시점을 교차하여 이야기한다. 주8. 기원전 400년경 중국의 철학자 묵자는 빛이 바늘구멍을 통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대상의 반전된 이미지가 어두운 방 안에 만들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핀홀 현상(Pinhole effect)을 최초로 기록한 역사로 여겨진다. 주9. 기원전 350년경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나뭇잎의 겹쳐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핀홀 현상이 관찰된다고 기록하였다. 주10. 기원후 935년경 태어난 아랍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현대 광학의 아버지이다. 세계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어 일식을 관찰하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11. 『한국인(Coréennes)』의 여섯 번째 장 「아홉 뮤즈」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썼다. 주12.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의 연가곡 ‘태양 없이(Song cycle Sunless, 1874)’의 첫 번째 곡 ‘네 개의 벽 안에서(Within Four Walls)’를 인용하였다. 주13.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에는 1836년 이래로 지금까지 작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가 있다. 처음에는 천문학 협회의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851년부터는 박물관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였다. 주14. 1997년 크리스 마커는 『한국인(Coréennes)』을 재발간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간 후기를 추가한다. "알렉산더 메드베드킨(Alexander Medvedkin)에게 헌정한 영화에서 그는 이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인류 역사상 우리와 같은 세대는 없었습니다... 마치 천문학에서의 ‘검은 별들’과 같아요. 제 삶은 이런 블랙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블랙홀 반대편에서 폭탄을 맞을 수 있었던 우리는 블랙홀의 실패의 깊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주15.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주16. 1983년 크리스 마커의 영화 < 태양 없이 Sans Soleil (Sunless) > 속 문장을 다시 썼다. 주17. 크리스 마커의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 속 문장을 인용하였다. 임고은(영화감독, 시각예술가) l 영화를 둘러싼 시선의 주체와 객체,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구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엮어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최근에는 야생을 회복하기 위한 시적인 언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
영화 <낙동강>과 교향시 <낙동강의 시(詩)> <낙동강의 시(詩)>는 윤이상의 미발표곡이다.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7년에 자필 악보가 발견되어 2018 통영국제음악제 공식 공연 프로그램으로 추진되었고, 2018년 4월 5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한스-크리스티안 오일러가 지휘한 하노버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세계초연했다. 윤이상이 1956년 11월 30일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윤이상은 한국에서 <낙동강의 시>를 작곡하다가 1악장과 2악장을 파리에서 완성했고 그곳에서 3악장을 써서 11월 29일 저녁에 전곡을 완성했다[편지상의 제목은 '낙동강시'이며 자필악보상의 제목은 'Poems of the Nak-tong River'이다]. 윤이상은 같은 해 4월 <현악사중주 1번>으로 서울시문화상을 받고 6월에 유학길에 올랐으며, 처음에는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유학하다가 서베를린 국립음대(현 베를린 예술대학)로 옮겨서 그곳에서 학업을 마쳤다. 제목과 작곡 시기 등을 고려하면, 관현악곡 <낙동강의 시>와 영화 < 낙동강 >의 관련성을 의심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낙동강의 시>가 초연되던 2018년 당시에는 영화 필름이 유실된 상태였으며, 인터넷 검색으로 접근 가능했던 주변 정보에는 영화 음악을 담당한 사람이 김동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낙동강의 시> 세계초연을 앞두고 쓴 프로그램 노트에서, 글쓴이는 영화 <낙동강>과 교향시 <낙동강의 시> 사이에 간접적인 관련성 정도가 의심된다고 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의혹을 남겼다. "1악장은 웅장한 팡파르로 시작하고, 핵심이 되는 4도 상행 음형이 악곡 전체의 씨앗이 됨으로써 작품을 지탱하는 형식적 일관성을 확보한다. 이 팡파르와 그에 이어지는 선율 사이의 급격한 텍스처 대비는 마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에서 실제 영화로 이어지는 장면전환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이 과연 영화 <낙동강>과 무관한지 의심해볼 만한 대목이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유실된 영화 필름을 발굴함으로써, 이제 기존의 잘못된 정보를 다음과 같이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 오해 ①: 영화 <낙동강>의 음악을 맡은 사람은 김동진이다. ☞ 진실: 영화 크레딧에 김동진 이름이 없으며 '음악·작곡: 윤이상'이라고 되어 있다. • 오해 ②: 영화 <낙동강>에 나오는 윤이상 작곡 <낙동강>은 오늘날 알려진 <낙동강>과 다른 곡이다. ☞ 진실: 영화 <낙동강>에는 오늘날 알려진 곡과 동일한 윤이상의 <낙동강>이 사용되었다. • 오해 ③: 윤이상이 <낙동강> 제목으로 쓴 노래는 두 곡이며, 윤이상의 또다른 <낙동강>은 '경남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다. ☞ 진실: '경남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던 노래는 윤이상 곡이 아닌 박태현 곡이다. • 오해 ④: 영화 <낙동강>과 윤이상 교향시 <낙동강의 시> 사이에는 간접적인 관련성 정도가 의심된다. ☞ 진실: 영화 <낙동강>에 사용된 음악은 윤이상 교향시 <낙동강의 시>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확인된다. 영화의 도입부와 교향시의 도입부 영화 <낙동강>은 트럼펫 팡파르로 시작하며, 그 주제선율은 윤이상 교향시 <낙동강의 시>의 1악장 도입부 주제와 사실상 동일하다. 4도 상행 음정을 핵심으로 하는 팡파르 주제는 영화 곳곳에서 변형·반복되며 국면 전환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팡파르와 함께 화면에 나오는 짧은 시는 이은상 시 <낙동강>의 3연 구조와 호응한다. (윤이상 <낙동강의 시> 1악장 팡파르 주제) 낙동강 / 흐르고 흘러서 / 쉬임 없는 낙동강 겨레의 전통을! / 겨레의 승리를! / 겨레의 희망을! 한줄기 물결에 / 담아싣고 / 오늘도 / 낙독강은[sic] 흘러간다 팡파르에 이어서 윤이상 작곡 <낙동강>이 합창으로 나온다. 이때 화면으로는 무용수의 춤, 강변의 풍경 등과 더불어 '구상 양성봉, 원작 이은상, 음악·작곡 윤이상' 등의 크레딧이 나온다. 이은상 시 <낙동강>은 ① 전통의 낙동강 ② 승리의 낙동강 ③ 희망의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3연 구조로 되어 있고, 영화 <낙동강>의 플롯 구조는 이은상 원작시와 호응한다. 윤이상의 <낙동강>은 이은상 시 <낙동강>을 가사로 하며, 3절까지 이어지는 노래가 영화 도입부에 모두 나옴으로써 이은상 시 전체를 노래하는 동시에 영화 전체 내용을 개괄한다. 이것은 오페라에서 서곡(overture)이 오페라 전체 내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것과 비슷하다. (윤이상 <낙동강의 시> 2악장 오보에 주제) 영화 <낙동강> 제1절: 전통의 낙동강 보아라 신라 가야 빛나는 역사 흐르듯 담겨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줄을 오 낙동강 오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윤이상 곡 <낙동강>이 3절까지 끝나면, 음산한 현악 트레몰로 음형과 더불어 구슬픈 오보에 독주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오보에 주제와 현악 음형은 윤이상 교향시 <낙동강의 시> 2악장 주제와 사실상 동일하다. 강변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과 더불어 '낙동학원' 현판이 보인다. 남녀 주연인 박일령(이택균 분)과 백옥남(최지애 분)이 등장하고, 옥남이 낙동학원 홍보물로 짐작되는 전단지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때 어린이들이 배를 타고 노래하는 모습을 일남이 지켜보는 장면이 지나가듯 나온다. 노래는 이은상 시 <낙동강>을 가사로 하며, 1절 전체와 2절 일부가 영화에 나온다. 작곡자는 알 수 없다. 박일령이 낙동학원에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낙동강의 문명사적·문화사적 의미에 관해 강의한다. 수업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변하며, 관객은 마을사람의 일부가 되어 수업을 듣게 된다. 이때 <영산회상(靈山會相)>을 비롯한 한국 전통음악이 배경으로 나온다. 영화 <낙동강> 제2절: 승리의 낙동강 산 돌아 들을 누벼 일천 삼백리 구비 구비 여흘 여흘 이 강 위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정의의 칼로 반역의 무리들을 무찔렀나니 오 낙동강 오 낙동강 소리치며 흐르는 승리의 낙동강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하고, 실제 전쟁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일령과 옥남이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발언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식량과 귀중품을 땅에 묻어두고 피난을 떠난다. 피난 장면과 함께 비통한 합창곡이 흐른다. 이 곡의 음 소재와 영화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관현악 음형이 유사성을 띄는 것으로 보아 이 합창곡은 윤이상이 영화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짐작된다. (가사는 '낙동강'으로 시작하는데, 글쓴이는 그 이상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령이 옥남에게 입대 결심을 밝히는 듯한 장면과 더불어 이은상 시 <꽃다발>이 자막으로 나온다. "조국을 구하려고 뛰쳐나선 그대앞에 / 황금을 바치리가 진주를 바치리가 / 값주고 못살 꽃다발 한아람을 바칩니다." 일령이 배를 타고 마을을 떠나고, 마을 사람이 태극기를 흔들며 일령을 환송한다. 옥남은 높은 곳에 올라가 마지막까지 일령이 탄 배를 지켜본다. 일령의 입대를 기점으로 전황은 반전된다. 영화 <낙동강> 제3절: 희망의 낙동강 두 언덕 고을 고을 정든 내 고장 불타고 다 깨어진 쓸쓸한 폐허 돋아 오는 아침 햇빛 가슴에 안고 나가라 네 힘으로 다시 세우라 오 낙동강 오 낙동강 늠실늠실 흐르는 희망의 낙동강 군복을 입은 일령이 아내 옥남에게 돌아온다. 옥남이 묘비를 세운 '장송의 무덤' 앞에서 일령이 묵념한다. 마을 곳곳에, 나룻배에, 아이들의 손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연다. 아이들이 박태현 작곡 <낙동강> 중 1절을 부른다. 사람들이 마을을 재건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오고, 일령과 옥남이 함께 강물을 바라본다. 윤이상 작곡 <낙동강> 중 3절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가 끝난다. 윤이상의 '영화 주제가' <낙동강>과 교향시 <낙동강의 시> 영화 <낙동강>은 1951년에 제작이 시작되어 1952년에 발표되었고, 음악학자 김용환에 따르면 윤이상이 <낙동강> 노래를 작곡한 것 또한 1952년이다. 또 영화 개봉 당시의 기억에 관한 진의장 전 통영시장의 증언에 따르면, 윤이상이 작곡한 <낙동강>이 영화에 삽입된 사실은 그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진의장은 박태현이 작곡한 <낙동강>을 윤이상 곡으로 오해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윤이상의 노래가 영화 개봉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윤이상은 처음부터 영화에 삽입할 목적으로 <낙동강>을 작곡했을 가능성이 있다. (좌측 박태현의 <낙동강>, 우측 윤이상의 <낙동강>)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추측하자면, 처음에는 김동진이 영화음악을 맡기로 했다가 영화 제작 도중에 윤이상이 맡는 것으로 바뀌었을 수 있다[김동진은 양명문 시에 곡을 붙인 <낙동강>을 1951년에 남긴 바 있으나 영화 <낙동강>과는 관련이 없다]. 또 영화음악에 관한 전권이 윤이상에게 있었을 것 같지는 않으며, 영화 곳곳에 삽입된 음악의 완성도가 고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윤이상은 영화음악을 작곡한 이후 그 일부를 따와서 관현악곡 <낙동강의 시>를 별도로 작곡하겠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낙동강의 시> 자필악보의 목차는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黃昏(황혼)이 물들 때, 3악장 嘉俳節(가배절; 한가위), 4악장 갈대밭, 5악장 豐年歌(풍년가), 6악장 에필로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3악장 짜임새로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洛東江(낙동강)의 저녁, 3악장 舞曲(춤곡)으로 되어 있다. <낙동강의 시>는 1·2악장과 3악장 사이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3악장은 윤이상이 유학을 떠난 이후에 작곡한 것이며, 어쩌면 윤이상이 6악장 구성을 3악장 구성으로 바꾼 것 또한 이와 관련 있을 수 있다. 윤이상이 이은상 시의 3연 구조 또는 영화의 세도막 구조를 의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악곡의 음악적 서사 구조는 영화 또는 이은상 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윤이상은 파리 시절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때때로 배움에 대한 조급함을 드러냈으며, <낙동강의 시>에 관해서는 "너무 통속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자신 없는 태도를 보였다. 음악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여기서 '통속성'이란 영어 'conventional'에 대응하는 말로 유럽의 최신 아방가르드 음악이 아니라 전통적인 기능화성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윤이상은 오늘날 서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 현대음악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낙동강의 시>는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이 서구적 의미에서 전통적인(conventional) 음악 어법으로 작곡한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곡가 생전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윤이상은 3악장에 나오는 민요풍 선율을 훗날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에 사용한 바 있다. 백기완의 시를 사용한 해당 부분의 가사는 "북을 쳐라, 새벽이 온다." 등이다. 참고문헌 김용환, "윤이상: 그의 삶과 음악." 『음악과 민족』 (부산: 민족음악학회, 1996), 제11권 0호, pp.11-48. 김원철, "윤이상: 낙동강의 시(詩)." 『Returning Home (2018 통영국제음악제 프로그램북)』 (통영: 통영국제음악재단, 2018), p.122. 노동은, "새로 발굴한 윤이상의 50 년대 글과 노래." 『민족음악의 이해』 (부산: 민족음악학회, 1994), 제3권 0호, pp.325-341. 박태현, "낙동강." 『한국애창가곡 88』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3), pp.90-91. 윤이상, Poems of the Nak-tong River. 미출판 자필 악보. 윤이상,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 1956년 11월 30일. 이용민, "영화 <낙동강> 개봉 당시의 기억에 관한 진의장 전 통영시장 인터뷰." 2018년 2월 경. 이용민, "박태현 작곡 <낙동강>에 관한 진의장 전 통영시장 인터뷰: 영화에 삽입된 음원을 듣고 한때 '경남 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던 노래가 맞다고 증언." 2022년 8월 4일.
※ 이 글은 2022년 10월 11일(화)부터 19일(수)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되는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미완의 사가: 아오야마 신지(1964-2022) 추모전’과 연계한 기획입니다. 기획전에 대한 정보는 아래 링크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428 아직 건강했던 즈음의 모습이나 목소리의 억양 등을 부족하나마 기억에 남겨두고 싶은 생각에 고인 화장을 한 채로 말도 없이 누워 있는 아오야마 신지--그건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표정이었다고 후에 들었다--의 마지막 모습을 접하는 등의 일은 이 서글픈 늙은이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 마음을 배우자인 도요타 마호에게 전화로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다부지게 대응하는 마호의 씩씩함에는 그저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오야마 신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밖에 없었던 노령의 나는 그 시각, 식이 행해지고 있을 공간을 생각하면서 어느 일간지 덕분에 영화작가로서의 그의 특이한 매력과 생각지도 못한 훌륭함을 이것저것 쓰고 있었지만, 쌓이는 생각과 그것을 전하려는 말이 신문 특유의 행수와 글자수의 제한에 막혀 마냥 공전할 수밖에 없었고, 생각처럼 글이 잘 진행될 리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도 끝날 무렵에는 역시 피곤한 나머지 축 늘어진 채 일하던 책상에서 벗어나 소파로 도망쳐, 담배를 물어야 할지 아니면 TV 수상기를 향해 리모컨 버튼을 눌러야 할지 잠시 고민한 끝에, 결국 아마도 태생적인 나태함 때문일 거라고 생각되지만, 이렇다 할 확실한 이유도 없이 심야 흡연과 심야 TV 화면 점등을 거의 동시에 시작하고 말았다. 그러자 작은 화면에는 뭔가 돌계단 같은 경사진 공간에 서 있다가 앉아 있다가 하는 남녀가 비쳤는데, 아무래도 연속극의 마지막회스러운 그 화면 구도가 하나하나 완벽하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심야의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치고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이것은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의 작품이구나 싶어 묘한 흥분을 느끼면서, 이야기의 줄거리도 작중 인물들의 관계도 전혀 모른 채 뜻하지 않게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 화면의 연쇄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오야마 신지적인 부분도 있어, 도대체 누가 이런 드라마를 찍었는지 궁금증이 커졌고, 마지막에 흐르는 캐스트와 스태프 이름의 연쇄를 눈여겨보다 보니, <시쥬카라>(シジュウカラ)라고 하는 제목인 것 같은 그 드라마의 연출가 이름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大九明子’(오오쿠 아키코)라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름은 그날 오후 집에 도착한 단행본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필름아트사, 2022)의 목차에서도 봤던 이름이어서 그 사실에 새삼 놀랐고, 발행사의 편집자인 다나카 류스케 씨에게 메일로 문의했더니, 그 사람은 영화 < 제멋대로 떨고 있어 >(2017) 등을 통해 관객을 매료시킨 여성감독이라고 알려줘서, 나 자신의 무지--그것을 나이 탓이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를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바로 그다음 날 아침부터 오오쿠 아키코 감독과 메일 교환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이메일 교환을 통해 감동을 받고, 더불어 알게 된 것은 <시쥬카라>의 연출가가 영화미학교 1기 수료생으로 아오야마 신지를 스승으로 추앙했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오야마 신지의 장례식 날 심야에 완전한 우연으로, 아오야마 세미나 출신자가 연출한 ‘양질’이라고 하는 말에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극상’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마음이 깊이 움직여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아오야마 자신이 그 명함--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을 곁들여, 이 여성 감독을 나에게 소개해준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 DVD를 그 자리에서 즉시 구입한 것은 물론이다. 앞서 언급한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에는 아오야마 신지 또한 마치야마 히로미(町山広美)와의 대담 「영화의 틀은 이미 사라졌다」(映画の箍はすでに外れている)를 실었기 때문에, 오오쿠 아키코 감독은 자신이 쓴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특별 강의」가 스승 아오야마 신지에게 읽히게 될지도 몰라 멋쩍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스승인 아오야마 신지의 서거로 인해 그 기회는 영원히 상실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거의 불합리하게 우리들의 곁을 떠난 아오야마 신지는, 말로 하지는 않았으나 오오쿠 아키코가 만든 탁월한 숏의 연쇄를 마치 의도하지 않은 유언처럼 나에게 알려준 것이 되었으므로, ‘아오야마 신지, 고맙다’라고 심야에 고독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는 이 후기 고령자에게는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선물이었다. 아오야마 신지는 릿쿄대학 시절의 나의 제자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히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형뻘인 구로사와 기요시나 만다 구니토시 등의 세대처럼 그들이 만든 8㎜ 필름 작품을 수업 중에 상영하거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영화 얘기를 하고, 그 후에도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격의 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때 나 자신이 릿쿄대학의 교사직을 이미 그만두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비상근강사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는 제도적인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아오야마 신지라는 이름은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을 인식한 것은 훨씬 뒤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아테네 프랑세에서 열린 다니엘 슈미트 작품 상영회 때, 그의 조감독이었던 아오야마 신지로부터 조용히 인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이 풍성한 장발을 어깨에 휘날리고 있던 그의 얼굴을 인식한 첫 번째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름을 특별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문학부 1학년이었을 때 쓴 학기말 리포트가 무척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영화에 대한 소론이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영화의 “눈”은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이었다’라고 쓰기 시작해, ‘그 따뜻함이 두렵고, 그 다정함이 공포를 증폭시키는 것이다’라고 끝맺었듯이, 그 ‘따뜻함’과 ‘두려움’, 그리고 ‘다정함’과 ‘공포’와의 변증법적 기술(記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대학 1학년 후기의 리포트이기 때문에 갓 스무 살이 된 젊은이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는 것에, 교사로서의 여유를 넘어선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대부분의 리포트는 거의 처분해 버렸는데, 〈a〉보다도 훨씬 뛰어난 〈A〉라는 평가가 기록되어 있는 그 짧은 글이 아직도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은, 이 ‘아오야마 신지’라고 하는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뛰어난 글쟁이이기도 했다. 그것은 걸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유레카>(2000)의 소설판을 통해, 누군가가 쓴 『백작부인』 같은 것보다도 15년 정도 전에 이미 미시마유키오상을 수상한 것에서 엿볼 수 있음에 틀림없다. 또 그것과는 별개로, 예를 들면 근저인 『다카라가이케의 가라앉지 않는 거북--한 영화 작가의 일기 2016-2020』(boid, 2022)의 어디라도 좋은 단 한 페이지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아오야마의 글재주는 누가 봐도 확실한 것이다. 또한 그는 뛰어난 비평가였으며 그 비평적 눈의 선명함과 강렬함은 이 책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영화작가 아오야마 신지의 죽음, 그리고 소설가로서의 아오야마 신지의 죽음은 현대 일본의 가장 뛰어난 영화평론가의 죽음 그 자체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비평가로서의 측면은 구로사와 기요시와 나와의 공저 『영화장화』(리틀모어, 2011)에서의 긴 시간에 걸친 토론을 통해서 매번 느끼고 있던 것에 다름이 아니며, 그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은 이미 『아오야마 신지와 아베 가즈시게와 나카하라 마사야의 시네콘!』(리틀모어, 2004) 등을 통해서도 충분할 정도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영화를 잘 찍는 감독에 그치지 않고, 뛰어난 언어로 영화를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극히 드문 비평가였던 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의 마치야마 히로미와의 대담에서, 마치야마 히로미가 언급한 칼 드레이어의 <게르투르드>(1964)를 놓고 “현대영화의 기선을 잡은 <게르투르드>는 누구에게나 넘어야 할 ‘영봉’임에는 틀림없다”면서도 보다 현대성이 강한 <아네트> 같은 영화는 “<게르투르드>의 엄격한 가치 기준으로 따지면, 오히려 그 경지에서의 머뭇거림을 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상기하면서, 이 같은 정확하기 짝이 없는 가치판단을 내세울 수 있는 비평가가 지금 몇 명 있는지, 적이 염려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오야마 신지와는 2월 하순까지 이메일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신경 써서 보내준, 걸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 구름 위에 살다 >(2020)를 아내와 나란히 보면서 소파에 몸을 맡기는 다베 미카코의 몸놀림이 터무니없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던 아내의 반응을 전하자 아오야마 신지는 순순히 기뻐해줬다.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 추모글을 쓰게 되면서 아오야마 신지가 찍은 몇 편의 작품을 DVD로 다시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극히 일부를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때문에, 전부 도중에 보는 것을 그만뒀다. 예를 들면, < 헬프리스 >(1996)에 몇 번인가 삽입된 기타큐슈의 어떤 공장의 무인 숏.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또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 숏의 적확한 삽입이 눈물을 자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 피사체를 향해야 할 몇 개의 앵글 중에서,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적확하기 짝이 없는 카메라의 위치를 아오야마 신지가 선택하고 있다고 하는 그 절대적인 올바름이,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한 점으로부터, 내가 아오야마 신지의 ‘눈’을 깊게 신뢰하게 된 계기인 < 셀레브레이트 시네마 101 >(1996)을 다시 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VHS 테이프로밖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두려워하는 그 예스러운 장치에 낡은 테이프를 삽입했더니 갑자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기묘한 소리가 기계로부터 흘러나오며 어느 버튼을 눌러도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테이프를 꺼내려 해도 금속제 뚜껑이 닫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때까지는 간신히 기능하고 있었던—사실 『존 포드론』의 집필 때문에 그의 TV 작품을 보기 위해서 몇 번이나 사용하고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 기재는, 아오야마 신지 때문에 기능 부전에 빠져 버렸으니, 부디 책임을 져달라고 말하고 싶은 바다. 다행히도 지금은 VHS로 봐야 할 작품이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오야마 신지 이 사람아’라고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자네는 우리 집의 낡은 VHS 재생장치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네. 얼마나 밉살스러운 남자인가. 하기야 『다카라가이케의 가라앉지 않는 거북』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아오야마 신지의 비평적 선명함과 강렬함이 다소 무뎌지는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시로 그렇게 지명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나 자신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순간이다. 2018년 월드컵 때 그와 메일을 교환하다가 모드리치를 남군 장교에 비유한 것은 틀림없이 바로 나였다. 실제로 아오야마 신지는 그 비유를 보고 이렇게 썼다. ‘잠이 부족한 나날에 대해 보답받았다고 할까, 내가 보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가르쳐 주셔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렇다. 나는 모드리치 덕분에 무의식적으로 남북전쟁을 그리는 포드와 페킨파의 서부극을 월드컵에 겹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납득이 가는 해설’(p.189)이라고 반응하고 있다. 맹세코 말하지만, 그렇게 쓴 나의 의도를 이해해 주는 것은 이 좁지 않은 세계에서도 아오야마 신지 한 명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에 대한 은밀한 연애편지 같은 것이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그 일을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그를 울려 버린 적도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낮에 도착한 《문학계》에 실린 「존 포드론 제1장-II. 수목」을 단숨에 읽었다. 첫 페이지부터 눈물샘이 느슨해지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 말 없는 사나이 >를 거쳐 <일곱 여인> 부분에 접어들었을 때, 사정을 모른 채 옆에 있던 여배우가 “웬 오열?”이라며 놀라워했다. 이것은 나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시게오미 군과 관련된 일이 깊게 관계하고 있는 것 같다. 외아들을 잃은 분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p.422)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오열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써주는 사람은 아오야마 신지밖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확신하고, 나 또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미우라 하루마를 <말 없는 사나이>의 모린 오하라처럼 나무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터무니없이 감동적인 < 도쿄공원 >(2011)을 찍고 난 직후였다고 생각되는데, 시게오미가 스즈키 다쿠지 감독의 <나는 고양이 스토커>(2009)나 스가누마 에이지 감독의 <속삭임>(2009)의 음악 작업을 끝낸 이후 몸이 약간 좋지 않아 처음으로 입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문병을 가서 그 병실에 가까이 다가갔더니 안에서 쾌활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들어가기를 망설이다가 되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아오야마 신지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당분간 젊은이들끼리 대화를 즐기도록 놔두자고 생각하고 대기실로 돌아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신진 작곡가인 시게오미와, 그의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를 아내로 둔 영화작가 사이에는, 도요타 마호를 둘러싼 무수한 화제가 있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5분이 지나도, 반 시간이 지나도, 결국은 1시간이 지나도, 아득한 병실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결국 1시간 반 정도 후에야 야구 모자를 쓴 아오야마 신지가 복도를 지나며 ‘아아, 와 계셨습니까’라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대답하자, ‘아아, 시게오미 군, 아주 건강해 보였습니다’라고 수줍게 말하고 그곳을 떠났다. 병실에서 나를 맞아준 시게오미는 시게오미대로, 몸이 나아지면 함께 영화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진심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아오야마 신지로부터 차기작의 음악 작업을 의뢰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오지 않았고, 아오야마 신지의 수줍은 표정도, 그 통통 튀는 웃음소리도, 그와의 긴 대화를 진심으로 즐기던 시게오미의 자랑스러운 미소도, 이제는 영원히 상실되고 말았다. 그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머지않아 86세가 되어 가는 이 후기 고령자는, 이를 위한 어떠한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오야마 신지를 함부로 추모하지 않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신초」2022년 6월호) 필자 - 하스미 시게히코: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영화평론가. 영화 분야 저서로는 『영상의 시학』(1979), 『감독 오즈 야스지로』(1992), 『영화의 신화학』(1996), 『고다르 혁명』(2005), 『보기 레슨: 영화사 특별 강의』(2020), 『쇼트란 무엇인가』(2022), 『존포드론』(2022) 등이 있다. 번역 -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박진희 ※ 이 글의 무료 게재를 허락해주신 「신초」 편집부와 하스미 시게히코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この文の無料掲載をお許しいただいた「新潮」の編集部と蓮實重彦様にお礼を申し上げます。) ※ 이 글의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note.com/monthly_shincho/n/n442dd74c80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