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블랙박스-택시 실내 백미러에 5만원권 붙인 사연
- 제작년도
- 2010
1.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그 독특한 조증과 울증의 세계로 기억될 것이다. 이를테면 1974년 경이적인 흥행성공을 기록한 < 별들의 고향 >이 마련해낸 70년대의 여주인공 경아는 까르륵거리는 웃음과 흘러내리는 눈물로 기억된다. 혹은 < 바보들의 행진 >의 저 과도한 명랑과 내러티브 공간의 바깥으로 번져나오는 우울을 생각해보라. 프로파간다적 명랑성이라 할만한 대책없는 웃음과 영화 안에서는 거의 해명되지 않는 우울의 왕복. 이 감정의 기복은 너무 극심하고 빈번해서 한 편의 영화 내에서, 그러니까 컷과 컷의 연쇄 안에서 그 적소를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인다.(물론, 검열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몇몇 참혹한 사례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1970년대 한국영화를 보는 데 있어 끊임없이 영화 바깥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조울증의 영화들은 영화를 국가 시책의 방도로 삼고자 했던 정책자들의 과도한 개입과 이제 막 등장한 대중의 상상태와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한 장사치들의 욕망이 얼기설기 엮여진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놓여있던 액션영화는 어떠한가? 그러니까 도시 하위계급 남성들의 값싼 오락거리이자, 국가의 직접적인 치안의 대상이며(이런 영화들이 상영되던 장소는 가장 빈번한 경찰력의 검속 대상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때때로 통국가적 장르의 위용을 과시하며 장사꾼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었던 바로 그 장르 말이다. 2. 임권택의 1972년 영화 < 삼국대협 >은 액션 히어로의 트랜스내셔널한 교류의 역사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복합적인 동시에 가장 고립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제목 그대로 이 영화에는 일본의 맹협(盲俠) 자토이치와 홍콩의 외팔이 독비도(獨臂刀), 한국의 의적 일지매가 모두 등장한다. 당시의 광고. “중국의 외팔이, 일본의 맹협, 한국의 일지매가 한꺼번에 나온다!” 이 광고 문구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간결하게 전달한다. 동어반복이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건데 자토이치와 독비도와 일지매를 한 자리에 모으는 것. <삼국대협>이 만들어지기 일년 전, <신자토이치 부셔라! 중국검>(일본 제목)=<독비도 대전 맹협>(홍콩 제목)이 < 외팔이와 맹협 >이라는 심플한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해 인기를 끌었다. <자토이치> 시리즈의 22번째 작품이자 <독비도> 시리즈 중 하나로 카운트되는 이 일본-홍콩 합작영화는 아마도 1970년대 초 이 지역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가장 대담한 기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자토이치와 독비도는 아시아를 석권하고 있던 당대의 액션 히어로들이었다. 1962년 제1작을 내놓은 이래 <자토이치> 시리즈는 1960년대 내내 일본 내에서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였다. 이 시리즈의 주요 수입처였던 홍콩의 쇼브라더스는 이 시리즈의 직접적인 영향하에서 자신들이 새롭게 전개해나갈 신파 무협영화의 기본틀을 완성하였다.(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당시의 쇼브라더스 라이브러리에서 <자토이치> 시리즈를 컷 바이 컷으로 ‘사숙’한 신필름의 임원식과 최경옥은 자토이치-카츠 신타로의 맹인 검법을 응용, 여성 맹인 검사 이야기 < 맹수 >와 < 비연맹녀 >를 만들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쇼브라더스는 <독비도>(한국 제목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를 통해 신파 무협영화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으며, 이로써 외팔이-왕우라는 자토이치-카츠 신타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액션 히어로가 탄생하였다. 자토이치와 외팔이가 대결하는 <신자토이치 부셔라! 중국검>=<독비도 대전 맹협>은 <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 같은 기획이다. 물론 훨씬 더 성공적인. 문제는 이 절대 강자들의 대결을 어떤 결말로 이끄는가이다. 즉, 누가 이기는가의 문제. <신자토이치 부셔라! 중국검>=<독비도 대전 맹협>은 이 문제를 각각의 자국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일본 버전에서는 자토이치가 이기고, 홍콩 버전에서는 독비도가 이긴다. 다시, 1971년 <외팔이와 맹협>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했던 당시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는 위장 일본영화가 아닌가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일본-홍콩 합작 서류 사본을 제출함으로써 개봉될 수 있었다. 인기 절정의 ‘외팔이 독비도’와 더불어 전광석화 같다는 소문만 무성했던 맹인 자토이치의 오리지날 검법을 드디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흥행은 예상대로 성공적이었으며, 서울에서만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참고로 말하자면 이 순간에 확인된 ‘자토이치’의 흥행가능성은 한국에서 개봉될 수 없었던 이 일본영화의 판권을 사들이도록 만들었고, 곧 <자토이치>의 한국 버전 < 죽장검 >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돈방석에 앉을’ 거라고 예측됐던 이 영화는 그러나 흥행에 실패했으며, <자토이치>처럼 시리즈로 만들고자 했던 당초의 기획은 좌초되었다.) <외팔이와 맹협>에서 이루어진 자토이치와 독비도의 기념비적인 만남을 염두에 둔다면, 이로부터 촉발되어 여기에 한국산 히어로 일지매까지 가세한 <삼국대협>은 이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들 앞에 공동의 적을 설정해둠으로써, 불필요한 우열 가르기를 지양하고 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적을 무찌른다는(이 적은 물론 악독한 일본인이다) 산뜻한 쾌감까지를 선사하고자 한다. 이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 때는 임진왜란 직후인 조선중기. 조선의 검객 일지매는 일본이 빼앗아간 왕의 보검을 찾아서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에서 외팔이와 맹협을 만난 일지매는 이들과 힘의 우열을 가리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셋이 모두 힘을 합쳐 공통의 적이자 사원(私怨)의 대상인 악당 구로다와 대결한다. <삼국대협>이 진정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영화가 자신의 줄거리에도, 그리고 이 줄거리가 전달하는 그 어떤 도상에도 전적으로 무관심하다는 데에 있다. 첫 번째, 이 영화는 일단 설정상 세 나라가 모두 개입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임진왜란을 불러오고 있지만, 이 설정은 다만 삼국의 캐릭터를 불러모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인다. 즉, 이 시대배경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줄 디테일도, 역사적 관점도 전혀, 부재한다. 두 번째, 명백히 당대의 인기있는 히어로들을 빌려오고 있지만 여기에는 자토이치-카츠 신타로도, 독비도-왕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카츠 신타로를 그럴듯하게 흉내내기 위해 흰 눈자위를 희번뜩거리는 김희라와, 왕우를 흉내내서 머리를 하나로 틀어올리고 한쪽 팔을 옷소매에 숨긴 채 외팔이가 된 김기주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원본을 모방하는 데에 있어 그 어떤 심혈도 기울이지 않는다. 의상, 제스처, 무기 등 대부분의 디테일은 원본으로부터 어긋나 있다. 맹협은 장발이며(자토이치는 짧은 머리이다. 이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맹인 안마사인 자토이치가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유력한 징표였다), 외팔이는 장검을 사용하는 데다가 검은 옷도 입고 있지 않다(검은 옷이 홍콩 무협영화에서 차지했던 의미와 부러진 칼이 <독비도>에서 가지고 있던 내러티브적-신체적 의미를 생각해보라!). 다시 말하자면 이 맹협은 자토이치를 흉내내고 있으나 자토이치는 아닌 말 그대로 (한국어 번역인) 맹협이며, 외팔이는 독비도를 흉내내고 있으나 독비도는 아닌 (마찬가지로 한국어 번역인) 외팔이일 뿐이다. 세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유일한 관심은 맹협과 외팔이와 일지매라는 세 인물의 등장에 있다. 정말로 그것이 유일한 관심인데, 왜냐하면 이들은 등장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종종 슬랩스틱 코미디와 같은 움직임을 연출하거나, 옷 바꿔입기와 같은 작은 소극들을 만들어낸다. 아무도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믿지 않으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또한 믿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난감한 순간이 마지막에 온다. 세 히어로는 드디어 힘을 합쳐 구로다의 집에 쳐들어간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강력한 구로다의 일격에 세 명의 칼이 모두 잘려나가고,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움켜쥔 채 도망다니는 이 우스꽝스러운, 거의 비루해 보이는 히어로들의 형상은 과연 무엇일까? 3. 정성일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여기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일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슬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의 무의미.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달리 말하기 힘든 우울증이다.” 1) <삼국대협>에 관한 가장 길고, 가장 정교한 분석일 이 글에서 정성일은 이 ‘우스꽝스러운 슬픔’을 임권택이라는 작가(무)의식 안에서(혹은 임권택을 통해 한국영화사의 부단한 계보를 형성시키고 하는 그의 의도 속에서) 발견해내고 있지만 아마도 이것은 임권택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지지부진한 조울증이야말로 1970년대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가를 실감케 하는 것인지 모른다. 베트남전 특수를 거치며 한국은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대중사회로 진입해가고 있었으나 민족중흥을 외치는 독재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폐쇄적인 언설공간으로 이를 마름질하고자 하였다. 세계를 향한 열림은 마치 베트남전과 이 나라가 관계맺던 방식만큼 왜곡되어 있었다. <삼국대협>이라는 저 ‘빈곤한 이미지’야말로 이 순간 한국영화가 가닿은 가장 국제적이고, 가장 지엽적인 한 형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 1) https://www.kmdb.or.kr/story/5/1338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이용민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는 불모지에 가까웠던 공포영화 장르를 개척한 선각자이다. 공포의 양식화라는 측면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지알로 호러를 대표하는 마리오 바바나 일본 괴담영화의 거두인 나카가와 노부오와 유사한 부류로 범주화할 수 있다. 공포와 스릴러, 판타지를 혼융한 < 악마와 미녀 >(1969)는 공포영화 감독으로서 이용민의 개성과 스타일에 대한 유용한 개요를 제공한다. 이용민 감독은 여기서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 모티프를 병합한 설정을 중심축으로 삼아 한국적인 원귀 서사, 사무라이 활극, 폐쇄적인 실내극 양식, 표현주의 스타일을 다층적으로 쌓아올린다. 특히 프랑켄슈타인 서사는 이용민의 후기작 < 공포의 이중인간 >(1975) 등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귀기서린 괴 저택을 무대로 한 괴담이라는 일부 설정은 나카가와 노부오의 <망령의 괴묘저택>(1958)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몇 개의 촬영 세트에서 진행되는 조잡한 프로덕션 디자인에서는 저예산 속성 제작의 흔적이 여실하지만 이런 흠결은 장르의 특장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도리어 기이한 스토리를 증폭하는데 도움이 된다. 영화의 무대는 으슥한 숲속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서양식 병원이다.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병원의 수장인 곤도( 이예춘 )는 유리관에 누워있는 아내( 도금봉 )를 위해 매일 생피를 주입한다. 곤도의 계획은 뇌수이식에 성공하여 빈사 상태의 아내를 구제하고 인간의 영생을 이루는 것. 신선한 피를 얻기 위해 곤도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느 날 미스터리한 가족사를 품은 간호사 옥경( 오은이 )이 조수로 들어오면서 곤도의 계획은 조금씩 틀어진다. 옥경의 수상한 활동을 기점으로 거악(巨惡)의 씨앗이 발아하게 된 경위가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면서 미친 과학자의 스토리는 번개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이야기의 절반이 곤도의 음모와 옥경의 복수에 전념하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사를 기술하고, 곤도의 한국인 조수 원석( 김석훈 )과 옥경의 로맨스도 양념으로 첨가된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등장한 옥경이 점차 동정적인 캐릭터로 변모함에 따라 초자연적 복수 미스터리의 균형이 조정되면서 곤도와 옥경의 대립관계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악마와 미녀>의 각본은 허흥 이라는 작가가 썼다. 허흥은 유일하게 이 영화의 각본가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감독 자신의 가명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악마와 미녀>의 스토리는 갈짓 자를 그린다. 허무맹랑한 신념에 강박된 의학박사의 맹목을 따라가다가 그의 악마성이 폭로되는 과거 장면들 이후에는 복수의 스토리로, 옥경과 원석의 대립과 공모로 국면이 전환되자 멜로드라마의 정동이 느닷없이 폭발한다. 현실과 단절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순수한 허구이지만 스토리 안에 있는 우매한 믿음과 광기, 냉담한 복수와 같은 요소는 우리들의 실제 생활에도 있다. 음모나 배신의 트라우마로 복수를 다짐하는 원한에 찬 여성의 스토리는 한국 고전 공포영화의 공식이다. <악마와 미녀>도 이 공식을 따르지만 원녀(怨女)의 존재가 인간과 유령의 경계에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반면에 인류의 삶을 뒤바꿀 의학기술의 신기원에 도달하겠다는 망집에 빠진 의학박사는 서양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형이다. 영화의 주요한 소재로 채택된 수혈과 흡혈은 역시 드라큘라 전설에서 파생된 설정이다. 생명 연장을 위해 타인의 생피를 주입한다는 설정은 생명의 기원으로서 피의 의미를 강조한다. 피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곤도의 야심은 옥경으로 전이되는데,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온 옥경이 우연히 피맛을 알게 되어 흡혈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피에 굶주린 살인광 박사를 전형적인 공포와 구별하는 독특함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서사에 새겨진 무국적성일 것이다. 이처럼 <악마와 미녀>에는 상이한 뿌리를 갖는 이야기의 요소들과 사물들, 영화 기술, 정서들을 두서없이 교배한 흔적들이 넘친다. 고립된 서양식 병원과 일본식 장검을 휘두르는 곤도의 표상, 액션 활극에나 어울릴법한 옥경의 초인적인 퍼포먼스, 곤도의 어수룩한 일본인 조수의 생뚱맞은 사랑 고백 등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이 태연자약하게 이루어진다. 두 대의 카메라를 사용한 전통적 방식의 3D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둥둥 떠다니는 원귀들의 얼굴, 무덤을 뚫고 나오는 손, 카메라를 향해 날아드는 몽둥이와 램프 등 입체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적인 연출도 눈에 띈다. 영화의 색조는 시종일관 어둡고 여러 면에서 특이하게 보일 뿐 아니라 과장된 연극적 연기로 일관하는 배우들의 뻣뻣한 말투는 비현실적이어서 더욱 이목을 끈다. 촬영감독으로 영화 이력을 시작한 감독답게 이용민의 장면 연출은 카메라의 활용을 중심에 둔다. 옥경이 수행하는 역동적인 액션 신을 제외하면 대다수 장면을 실내 세트에서 촬영하여 속성 제작의 효율성도 성취한다. 곤도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원귀들의 환영은 조잡한 특수효과로 제시되어 B급 공포영화의 무드를 조성하고, 시각적으로 로우 키 조명으로 방과 복도 세트를 채우면서 공포영화의 표현 스타일을 확실히 구현한다. >> 악마와 미녀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사진] 영화 <물망초>에서 주증녀 남편 유지 이은 <조국의 어머니> 주증녀는 1950년대를 눈앞에 둔 1949년 3월 윤대룡 감독의 <조국의 어머니>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본 헌병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죽자 아내가 그 유지를 이어 싸우다가 광복을 맞게 되는, 이른바 이 시기의 특징인 항일 영화이다. 잇따라 황정순, 주선태, 황해, 최남현, 이민 등 신인이 몇 달 사이에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이름을 알린 주증녀는 16밀리로 찍은 최초의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이어 <여인애사>(신경균, 1950), <흥부와 놀부><이경선, 1950) 두 편에 출연한다. [사진] <여성일기> 현장 사진(앞열 왼쪽이 주증녀, 오른쪽이 황정순) 하지만 6.25 전란 후 주증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연인이 재회하는 김성민 감독의 <애원(哀怨)의 향토>(1954)부터였다. 잇따라 <자유전선>(김홍, 1955),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애인>(홍성기, 1956), <처와 애인>(김성민, 1957),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 <청실홍실>(정일택, 1957), <인생화보>(이창근, 1957),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1958), <실낙원의 별 후편)(홍성기, 1958), <모녀>(최훈, 1958),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1958), <마도의 향불>(신경균, 1958) 등 11편에 기용된다. 대부분이 당시 작고한 김내성의 「애인」, 「실낙원의 별」 류의 인기 통속소설과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 <실낙원의 별> 스틸 사진(중앙이 노경희, 우측이 김동원) ‘국산 갱스터 ’(「영화주평」. 『한국일보』, 1956.09.16) 를 지향한 <인생역마차>는 신문기자와 암흑가의 두목(이향, 1인2역)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비운의 여성을 보여 주는가 하면, <처와 애인>에서는 월남한 남편의 외면 속에 참고 견뎌야 하는 실향민의 비애를, <실낙원의 별>과 <실낙원의 별 후편>에서는 애독자(노경희)와 사랑에 빠진 인기 작가 아내(옥영)의 좌절과 반전의 삶을, <청실홍실>과 <별만이 아는 비밀>에서는 전쟁미망인과 딸의 행복을 위해 참고 견디는 애틋한 모성애를 각기 표출해 낸다. 주증녀는 특히 <실낙원의 별>의 호연으로 보다 더 좋은 의미의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유동준, 「영화로 보는 실낙원의 별」, 『경향신문』, 1957.09.28.). [사진] <청실홍실>의 한 장면, 좌측은 영화배우 엄앵란(사진제공 김종원) 그 이후 <낭만열차>(박상호, 1959),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송국, 1959), <아내>(김묵, 1959) 등 주로 여성 멜로물에 출연했으나 자신이 제작한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기획 허영)의 흥행 실패와 잇따른 언론계 종사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고려장>(1963)에 이어 김수용 감독의 <만선>(1967)과 <산불>(1967) 등 1960년대의 출연작에 이르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상투적인 내용과 도식적인 인물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품 선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재봉틀 일로 가계를 도우며 두 자녀와 가정부의 유혹에 빠진 남편(김진규)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하녀>의 아내, 잘못된 효행의 악습에 따라 산채로 버려져야할 운명에 처한 <고려장>의 할머니, 바다에 나간 두 아들을 잃고, 실성해버린 <만선>의 어머니(곰치 아내), 마을에 숨어들어온 인민군 탈영자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과부와 성적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산불>의 과부 점례 등 다양한 캐릭터가 그런 예이다. 이 같은 질적 성취는 결국 제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과 제11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 그리고 제6회 대종상 여우조연상(만선) 등 세 개의 큰 상을 받게 되는 경사로 나타난다. [사진] <하녀>의 한 장면 [사진] <고려장>의 한 장면 여덟 살 연극소녀에서 은막의 유망주로 강렬한 눈매와 우수의 그늘을 드리운 독특한 마스크로 팬들에게 사랑받은 주증녀는 1925년 2월10일 함경남도 영흥군 엄기면 덕하리에서 태어났다. 부농의 무남독녀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남여고를 졸업하자 동경하던 극단 고협(高協)에 들어갔다. 1943년 열여덟 살 때였다. 그녀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무영탑>(연출 유치진)의 단역인 시녀 구슬아기 역이었다. 이후 <청춘의 윤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졌다. 이 무렵 그녀는 극단 예원좌(藝苑座)에서 고협(高協)으로 옮겨온 배우 허영(許影)과 눈이 맞아 혼인하고, 대건사(大建社)의 직속극단 청탑(1946년 11월23일~)의 첫 연극 <보검>(3막4장)에 김승호, 허영 등과 함께 출연했다. (『자유신문』, 1946.11,09)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얼마 못가 새 얼굴을 찾는 윤대룡 감독에 의해 발견된다. 허영 외에 손전과 권일천이 공연한 <조국의 어머니>였다. [사진] <만선>의 한 장면(사진제공 김종원) 이렇게 은막에 진출한 주증녀는 1950년대까지 ‘잘 나가는 배우’로, 60년대 이후에는 ‘연기파 배우’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 사이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허영과 헤어지고 가십에 오르내리던 언론계 종사자 윤호중과 재혼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상적인 연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1974년 검객영화 <철면객>(이형표, 장청천)에 출연할 무렵이었다. 종합 진단 결과 뇌종양이었다. 수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육체를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 약물 치료만 계속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열일곱 살 큰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추석이 며칠 안 남았구나. 추석빔을 마련해야 할 텐데…” 유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주증녀는 1980년 9월18일 동트는 새벽 6시30분 남편과 1남 1녀, 정들여 가꾼 정원의 나무와 마지막 작품 <청색시대>(1976, 정인엽) 등 3백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25년에 이르는 연기생활을 마쳤다. 당시 56세였다. “예술인마을에 정착한지 벌써 5년이 돼간다. 시골도 아닌 서울의 주택가에 무슨 마을이냐고 하겠지만 기실 이 마을이란 어휘에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감과 향수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 예술인마을- 이름처럼 황토색 짙은 옛날의 마을은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유일한 ‘마을’이라는 희소가치가 있다.” 이는 주증녀가 뇌종양을 앓을 무렵 영화진흥공사 발행 월간 《영화》(1974년 5월호)에 발표한 수필 「예술인마을 우거기(寓居記)」의 한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