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집의 사람
- 감독
- 후쿠사쿠 킨지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오가타 켄, 이시다 아유미, 하라다 미에코, 마츠자카 게이코
① 평양가부키좌(平壤歌舞伎座), 금천대좌(金千代座) 평양가부키좌는 1910년대 초반 평양 수정(壽町)에 설립된 극장이다. 가부키 공연용 극장으로 규모가 웅장한 건물이었다. 1914년 6월 이곳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다는 기사가 발견된다. (<演藝界>, 《每日申報》, 1914.6.9) 1923년 가부키좌는 시설이 낙후하다는 이유로 사용중지 명령을 받고 철거되었다. 1924년 평양의 양조회사인 제등주장(齊藤酒場)의 사이토(齊藤久太郞)가 주도하여 가부키좌가 철거된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하고 그 이름을 제등주장의 명주인 “금천대”라는 이름을 가져와 금천대좌라 정한다. (<平壤に大劇場新築>, 《朝鮮新聞》, 1924.09.23.) 2년에 가까운 공사 끝에 1926년 6월 완공되었다 .(<近く竣工する平壤の金千代座>, 《朝鮮新聞》, 1926.06.28) 해방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평양을 대표하는 연극극장이었다. ② 평안극장(平安劇場 ) 침동(砧洞)이라 불리던 평양 남문통 2정목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4년 12월 30일 개관했다. (<광고>, 《매일신보》, 1914.12.27) 1915년 7월 위생강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衛生講話場所>, 《每日申報》, 1915.07.23) 같은 해 10월 30일부터는 조선인 전용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평양 상설활동>, 《매일신보》, 1915.11.02) 1919년 2월에는 종래의 5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던 것을 3일 간격으로 교체하기로 한 내용이 보도 되었다. 1922년 8월 무렵까지 운영이 확인된다. (<반도 고학생 착발>, 《동아일보》, 1922.08.27) 그 무렵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③ 해락관(偕樂館) 1921년 5월 1일 평양부 수정에 설립된 활동사진관이다. 설립자는 평안남도 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직을 맡고 있던 구보(久保順吉)이다. (<평양 해락관 개관식>, 《동아일보》, 1921.05.10) 평양의 대표적인 활동사진으로 인정받던 해락관은 1937년 12월 총 공사비 30만원의 비용을 들여 신시가인 앵정 8번지로 이전 신축되었다. (<평양 해락관 신축코 낙성>, 《동아일보》, 1937.12.2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보(久保兵二郞), 지배인은 오카(岡妻男)이다. 좌석수 90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제일관(第一館),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 제일관은 평양부 수옥리에 자리한 영화관으로 1923년 3월 4일에 건립되었다. 설립자는 평양상업회의소 부회두인 박경석(朴經錫)이었다. 이 극장은 평안극장이 사라진 이후 설립된 평양의 대표적인 조선인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1941년 무렵에는 박경석의 일가로 보이는 박순옥(朴淳玉)이 관주를 맡았다. 이후 제일관은 이름을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순옥(창씨명 木山淳)이었으며, 지배인은 박종식(창씨명 木山宗植)이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⑤ 평양키네마(平壤キネマ), 사쿠라극장(さくら劇場) 평양키네마는 1924년 평양부 앵정 53번지에 설립된 영화관이다. 설립주체는 주식회사 평양키네마로 평양상업회의소 상무위원을 역임한 오쿠타(奧田延之助)를 대표로 한 자본금 10만원 불입금 2만 5천원의 주식회사였다. 개관 당시 평양키네마에서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유명 변사 이코마 텐라이(生駒天雷)를 고빙해 오는 등의 활약으로 일약 해락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화관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1928년 3월 5일 극장 내에서 발화한 화재로 극장 일부가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나 한동안 극장운영을 쉬기도 했다. 1943년 4월 1일을 기해 ‘미영색채 일소’를 위해 평양키네마라는 명칭을 사쿠라(櫻, さくら)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森鍬市)이며 지배인은 시게마츠(重松安紀)이다. 좌석수는 367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⑥ 욱좌(旭座) 1924년 10월 15일 평양부 욱정 13번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약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설립 당시 조합장은 부협의원인 松尾六郞이었다. 개관 직후부터 경영난에 봉착하였는데 1926년 3월 1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대중극장(大衆劇場), 평양동보극장(平壤東寶劇場) 대중극장은 1937년 평양부 앵정 7번지에 설립되었다. 마루야마(丸山花)라는 일본인이 세웠다. 해락관과 이웃하고 있었다. 도호(東寶)영화의 개봉관으로 활용되면서 이름을 평양동보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ハナ), 지배인은 아사이(淺井正夫)였다. 좌석수는 904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다시 대중극장으로 바꾸었다. ⑧ 평양영화극장(平壤映畫劇場) 평양부 수정 82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평양매일신문, 지배인은 사사키(佐々木惣次郞)이며 669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⑨ 화산좌(花山座) 평안남도 진남포부에 세워졌다. 1916년 5월 매일신보사의 순회 활동사진 상영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즉위례대성의(卽位禮大盛儀)의 활동사진>, 《매일신보》, 1916.05.25) 이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⑩ 항좌(港座), 항극장(港劇場) 항좌는 1919년 10월 평안남도 진남포부 용정정에 설립되었다 .(<남포 항좌 삼년 기념>, 《매일신보》, 1922.10.14) 1937년 중락관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진남포의 유일한 상설관이었다. 1938년 9월 무렵까지 항좌라는 이름으로 존속이 확인 된다. 1930년대 말기에 항극장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부치(田淵哲次郞)이며 지배인은 시미즈(淸水健)이었다. 좌석수는 776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중락관(衆樂觀) 진남포부 후포정 27번지에 있었다. 1937년 진남포의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이 세웠다.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된 지상 3층, 지하 1층의 현대식 건물로 총 900여평에 달하는 거대한 영화관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이근(창씨명 大利根進), 지배인은 핫포(八方勝)이다. 총 886석의 좌석을 갖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순천극장(順川劇場 ) 평안남도 순천읍에 있던 극장이다. 1935년 3월 빈민구제를 위한 자선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린바 있다. (<순천 동정음악 오십여원이 수입>, 《동아일보》, 1935.03.02.) 이를 통해 볼 때 1935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장현택(張賢澤)이며 3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다음, 평안북도의 극장은 아래와 같다. ⑬ 신극장(新劇場), 신영극장(新映劇場) 신의주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히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5월 경성일보 애독자 위안 활동사진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며 (<광고>, 《경성일보》, 1922.05.16) 1923년 7월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 교포학생들의 환영행사,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 활동사진 상영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관객 대상의 대표적인 극장이던 신극장은 1940년대 신영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39년 신의주 지역 국방헌금 납부 내역에 신극장의 이름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9년까지는 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던 것 같다. (<신의주 국방 헌금>, 《매일신보》, 1939.07.14) 1943년 현재 신영극장의 흥행주는 임경범(林京範), 지배인은 마츠바라(松原寬)이었다. 좌석수는 52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상반좌(常磐座) 신의주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한 존속기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7월 경성일보 애독자위안 활동사진회 (<광고>, 《京城日報》, 1922.07.10) 와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6월 정주음악대교육활동사진반의 활동사진상영회와 (<정주악대 내신(來新)>, 《시대일보》, 1925.06.18) 같은 해 8월 열린 수해 관련 활동사진상영회의 기록이 남아 있다. (<七일 신의주에 수해영사 공개>, 《시대일보》, 1925.08.07) ⑮ 신선좌(新鮮座) 1927년 10월 1일 신의주 매지정(梅枝町)에, 일본인 히라바야시(平林正)와 조선인 이태영(李泰永), 고성건(高成建) 등이 1만원을 출자하여 설립했다. 연극과 영화를 두루 공연하던 곳이다. 1933년 12월에는 극단 신무대 공연 중 무대 막에 불이 붙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동아일보 주최 독자위안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와타나베(渡邊治太郞), 지배인은 다무라(田村直太郞)였다. 좌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세계관(世界館) 신의주부 상반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3년 12월 도청 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1927년에는 일본인 변사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관주는 이시하라(石原)였다.(<변사 태업, 대우 개선 요구>, 《동아일보》, 1927.02.23) 1930년대 중반 관주 노다(野田白水)가 사망하면서 부인 기미코가 운영했는데, 그녀는 매월 26일 하루치 수입을 빈민구제에 기부하는 등 선행을 통해 큰 칭송을 받았다. (<세계관주 미거(美擧)>, 《동아일보》, 1935.05.0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노(中野キミ子), 지배인은 이케하타(池畑晉造)였다.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선천극장(宣川劇場) 1932년 12월 평북 선천읍 본정에 사사키운송점을 경영하던 사사키(佐々木光藏) 등 수 명이 세운 극장이다 .(<선천극장 신축 낙성식 거행>, 《매일신보》, 1932.12.1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케시마(武島壽吉), 지배인은 카나자와(金澤二鳳)였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정상극장(定商劇場) 1923년 무렵 평북 정주읍에 설립된 극장으로 정주수해구제연예와 국민협회순회강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진 기록이 있다. 1935년 정주유학생회의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렸다는 기록 (<정주음악연주>, 《동아일보》, 1935.08.10) 을 마지막으로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⑲ 정주극장(定州劇場) 평북 정주군 정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5년 1월 31일 구기회 주최 소인극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주 구기(救饑) 연극>, 《동아일보》, 1925.02.0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케다(池田寅雄)이며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⑳ 북진극장(北鎭劇場) 평북 운산군 북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우미하라(海原正植)였다. 박노홍은 그를 창씨한 조선인이라 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㉑ 의주극장(義州劇場) 평북 의주읍 동부동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네다(金田孝兵)였다. 좌석수는 350석이었다. ㉒ 강계극장(江界劇場) 평북 강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0년 7월 31일 배우 왕평이 이 극장에서 공연 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최후의 무대˝-왕평군 공연 중 급사>, 《매일신보》, 1940.08.02)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시쿠라(西倉高盛)이며 8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㉓ 만포극장(滿浦劇場) 평북 강계군 만포읍에 있던 극장이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수헌(창씨명 金津守憲)이며 지배인은 마츠다이라(松平哲夫)이다. 좌석수는 620석이었다. * [사진](상단) 근천대좌 낙성 당시 기사 사진(조선신문 1926.07.18) [자료] 《朝鮮新聞》, 1926.07.13. 壯麗を極むる 金千代座落成 勘彌一行を招聘して 十八日より舞臺開き 平壤壽町の中央に一昨年九月より建築工事を進め來つた劇場金千代座は此程愈愈落成を告げ來る十八日に盛大なる落成を擧ぐる事となつた同座は淸酒金千代釀造元の齊藤氏が平壤に娛樂機關としての劇場なきを憂ひ十萬圓の巨費を投じ財界不況の折柄にも拘らず犧牲を見込んで建設に着手したもので建坪二百七坪の煉瓦建ての高壯華麗なる場內の設備整頓せる慥に滿鮮一を以て誇るに足る大劇場である舞臺開きに招聘せられた守田勘彌一行は十七日に乘込み十八,十九の兩日間花花しく開演する事となり久方振に名優を迎ふる事とて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から二千餘名を收容し得る大劇場も大入滿員の盛況を見るであらうと豫想されてゐる(平壤) 寫眞は=新裝なつた平壤の劇場金千代座 [자료] 《朝鮮新聞》, 1926.07.18. 平壤金千代座 落成式に續いて 舞臺開き興行 內外の設備完成し平壤市街に一偉觀を添へた劇場金千代座は愈愈十八日午後二時より落成式を擧ぐる事となり座主齊藤久太郞氏は官民多數に案內狀を發したが招聘された帝劇俳優の守田勘彌一行の柿葺落興行は落成式擧行後引續き開演の筈で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平壤) [자료] 《朝鮮新聞》, 1924.10.18. 旭座柿葺落し 平壤旭町に建設中の劇場旭座は內外の設備全く完成したので十五日正午平壤官民有志を招待して柿葺落しの式を擧げた神官の修○終りて松尾創立委員長の挨拶長富委員の工事報告に次で宮館府尹來賓を代表して一場の挨拶を述べ夫れより開宴京阪女歌舞伎一座の餘興劇あり盛況を極めた(平壤) [자료] 《동아일보》, 1921.05.10. 평양 해락관(偕樂舘) 개관식 조선에 제이 도회라 칭하는 대도회로서 상당한 오락장소가 무(無)함은 유감(遺憾)이라 하야 평안남도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의 공직을 가진 당지 유력자 구보순길(久保順吉)씨의 경영으로 평양 구시가의 중심 되는 수정(壽町)에 일대 활동사진 상설관을 건설하고 차(此)를 해락관(偕樂館)이라 하엿는데 차는 작년 八월부터 기공하여 대판(大阪)에서 전문기사를 초빙하야 관내외를 최신식으로 건축한바 세멘트와 연와제로 하고 정원 一천명을 수용할 대건물인대 금번 준공되엿슴으로 거 七일 오후 二시부터 시내 각 관공직자와 신문기자 급(及) 유력자를 초대하야 개관피로를 하여 활동사진 시영(試映)을 하엿더라. 그런데 당일 관주 구보(久保)씨의 례사(禮辭)가 잇슨 후 楠野 평양부윤의 축사와 松井 평양상의회두와 長谷川 평남매일사장의 축사가 유(有)하얏다더라. (평양) [자료] 《동아일보》, 1937.07.02. 남포의 영화 전당 중락관(衆樂舘) 낙성, 총공비 二十만원 【진남포】 전조선을 통트러 비겨보아도 제일 첫손가락으로 꼽힐만한 대중영화극장(大衆映畵劇場) 중락관(衆樂館)이 진남포 한복판인 후포리(後浦里)에 그 위관을 나타내고저 지금 공사가 착착 진행되고 잇다. 이 극장인즉 진남포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씨의 장남 서기선(徐基善)씨가 문화사업(文化事業)을 하랴면 어떤 것이 조을 것인가 하고 다년 연구한 결과 육만 인구를 갖고 잇는 대도시 진남포에 정원 겨우 사백명밖에 못되는 극장 단 하나로서는 부 체면 상으로나 부민의 위안 처소인 오락기관으로 보아 도저히 그저 볼 수 없다고 해서 작년 五월에 인가를 얻어 각 방면으로 조사를 거듭하야 외관이며 내용이 다 가치 정묘하게 설게하여 금년 三월에 비로소 공사에 착수한 이래 그 공사를 착착 진행하는 중이다. 이제 이 중락관의 대개를 소개하면 구조는 철골 콩쿠리-트로 지하실을 합하야 四층 총평수 九百여평 정원 一千五百명의 대건물로 총공사비 二十만원을 요하며 영사기(映寫機)는 R·C·A발성기(發聲機) 중에도 최고급형(最高級型)으로 조선에는 처음 장치되는 것이라 한다. 오는 가을까지 기어코 완성케 하도록 주야 겸행으로 공사를 진행시키고 잇는 중인데 이 극장이 준공되는 날에는 진남포 시가에 일대 위관이 될 것은 물론이오, 영화전당으로 민중을 위하야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일반은 크게 기대하고 잇다.
단성사는, 연예계를 발전시키고 그 수익으로 교육을 장려하는 동시에 자선 사업을 할 목적으로 지명근(池明根), 박태일(朴太一), 주수영(朱壽榮) 등의 한성 상인들이 발기하여 1907년 파조교(罷朝橋) 인근에 세운 극장이다. 개관 초기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신파극을 연행하는 데 적절치 못할 정도로 무대가 좁아서 임시로 내부를 수리하기 위해 영업을 정지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다른 극장들처럼, 경영 미숙과 전황(錢荒)으로 인한 곤란으로 단성사의 경영자와 소유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단성사는 경영 상태 정상화를 위해 파노라마식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는데 승전무(勝戰舞), 승무(僧舞), 전기호접무(電氣胡蝶舞), 환등, 활동사진 등이 공연되었다. 1913년 안재묵(安在黙)이 단성사의 운영권을 획득하며 대대적인 신축을 단행한다. 1914년 1월에 신축 낙성된 단성사는 총 건축비 1만 1천 원의 2층 건물로, 외관은 서양식으로 장식했고 내부는 일본식 극장 구조를 따랐다. 정원 1,000명 규모의 객석은 1, 2등석(2층 객석 및 박스석)에 다다미를 깔아 신을 벗고 입장하도록 했고, 1층의 하등석에는 장의자를 깔아 앉아서 볼 수 있도록 했다. 호화롭게 신축한 단성사는 1915년 2월 18일 화재를 당해 벽만 남은 채 소실되었다. 상등석 옆방에서 차를 팔던 안성범(安聖範)이 연극이 파한 후 화롯불을 끄지 않고 퇴근했는데, 이것이 다다미에 옮겨 붙어 극장 전체를 태운 것이었다. 화재의 원인을 제공한 안성범은 안재묵의 아버지로, 결국 실화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진 2. 화재 직후 단성사(《매일신보》 1915년 2월 19일자, 3면) 김연영(金然永)에게 돈을 빌려 극장을 신축했던 안재묵은 이 화재로 파산, 단성사의 소유권은 채권자 김연영에게 넘어갔다. 김연영은 내부를 수리하여 1915년 5월 단성사를 재개장했으나, 그 시설은 화재 전보다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1917년 2월 김연영은 황금유원의 소유주인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에게 단성사를 매각한다. 다무라는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광무대를 운영하던 박승필(朴承弼)에게 그 운영을 맡겼다. 단성사의 관객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는 데는 조선인 경영자가 적합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단성사의 활동사진관 전용 허가를 신청한 지 수개월 만인 1918년 6월, 드디어 경기도 경무부로부터 허가 지령이 떨어진다. 이에 종로경찰서는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부적절하다며 신축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 허가를 내주었다. 박승필은 1918년 8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 창립 9주년 기념 공연을 마지막으로 기존의 건물을 헐고 1만 원의 예산을 들여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단성사를 개축한다. 사진 3.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다시 지어진 단성사(《매일신보》 1918년 12월 21일자, 3면)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단성사는 수만 원의 보증금을 내고 일본의 영화회사 텐카츠(天活, 天然色活動写真株式会社)와 특약을 맺어 필름을 확보했으며, 조선인 변사 중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서상호(徐相昊)를 변사주임으로 한 5~6인의 변사진을 구성했다. 또한 활동사진관 운영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경성고등연예관과 우미관에서 실무를 맡아 왔던 영사기사 박정현(朴晶鉉)과 손을 잡았다. 박정현은 1918년 단성사로 건너와 지배인(감독)으로서 실무를 책임졌으며, 박승필 사후에는 직접 단성사를 이끌었다. 박승필은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이용하는 동시에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경영이 곤란하던 양대 신파 극단, 즉 임성구의 혁신단과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를 후원하는 데도 활용했다. 이 두 극단은 단성사 전속 극단 역할을 수행하며, 서울 공연과 지방 순회를 번갈아 공연했다. 이와 관련한 박승필의 회고를 인용해 보자. “ 신극운동을 발뎐식키려 틈틈이 배우 량성에 주력하엿스니 한 비극 ( 悲劇 ) 과 검극 ( 劍劇 ) 으로 장안에 일흠을 치든 림성구 ( 林聖九 ) 며 말 잘하고 모험극 ( 冒險劇 ) 잘하기로 유명하든 김도산 ( 金陶山 ) 가튼 명배우도 모다 박씨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다 . 세상에는 림성구라면 모르는 안악네가 업고 김도산이라면 모르는 청년이 업지만은 그들의 배후에 박승필 씨가 잇슴을 아는 사람은 적엇슬 것이다 . 이와 가티 박씨는 구극과는 새이가 멀어지고 신극에만 주력하게 되엿다 . 라서 신극흥행 ( 新劇興行 ) 을 서울에서만 치지 안코 전 조선적으로 진출하려 림성구 군을 중심으로 혁신단 ( 革新團 ) 을 조직케 하고 김도산 군을 중심으로 신극좌 ( 新劇座 ) 를 조직케 하야 혁신단과 신극좌가 서로 교체하여 지방을 순회하게 하엿다 .” 1 활동사진관으로 개관한 직후 단성사는 텐카츠로부터 키네오라마 [필자 주: 특수 기구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환영을 보여주는 무대 장치] 기술을 도입하여 장치하고, 1919년 5월부터 변사들을 출연시켜 제주도에서 일어난 살옥(殺獄) 사건을 소재로 <탐라의 사몽(詐夢)>이라는 변사극을 공연했다. 그러나 곧 변사극보다는 전문 신파 극단에 의한 전기응용신파극 [필자 주: 전기(電氣) 장치를 동원하여 효과를 내는 무대극 ] 이 나으리라 판단, 신극좌와 혁신단로 하여금 전기응용극을 만들기로 하여 우선 신극좌의 좌장 김도산을 일본에 보내 키네오라마 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다. 그리고 흩어진 혁신단도 재조직하여 키네오라마를 이용한 전기응용극을 시작하도록 한다. 단성사 전속 극단으로 서울과 지방을 번갈아 가며 공연하던 신극좌와 혁신단은 전기응용극에서 더 나아가 차례로 연쇄극을 제작한다. 첫 작품은 신극좌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 이어 <형사의 고심(刑事苦心)>과 <시우정(是友情)>이 만들어진다. 사진 4. 연쇄극 <의리적 구토> 광고(《매일신보》 1919년 10월 26일자, 3면) 1919년 10월 27일부터 상연된 <의리적 구토>는 원래 5일만 상연하기로 했으나 큰 인기에 힘입어 11월 18일까지 무려 25일이나 계속 상연되었다. 수지를 맞추기 위해 파격적으로 비싼 가격에 상연됐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이 연쇄극은 최초의 한국영화로 인정받고 있다. 연쇄극의 황금기를 지나 무성영화 시대가 시작되자 단성사에서는 촬영기사 이필우를 초빙하여 <장화홍련전>(1924)을 직접 제작한다. 나아가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를 통해 금강키네마, 원방각사 등이 조직되었으며 나운규와 같은 걸출한 영화인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었다. 1930년대 토키영화의 상영이 본격화되자 단성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처한다. 1930년 설날을 맞아 조선 최초로 토키영화를 상영했고, 나아가 토키영화관으로의 전환을 꾀했다. 더불어 신무대라는 전속 극단을 두어 연극 공연에 대한 여전한 관심을 이어갔다. 1931년 1월 단성사를 이끌던 박승필이 사망한다. 전술한 대로, 이후에는 박정현이 운영자가 되어 단성사를 이끌게 된다. 박정현은 토키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할 수 있도록 단성사 신축을 결정한다. 1934년 신축된 단성사는 650석 규모로 이전보다 객석이 대폭 줄었으나, 토키 상영용 영사기를 비롯하여 냉난방 시설과 각종 설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신축 후 단성사는 지속적으로 경영난에 봉착한다. 단성사 보다 조금 늦게 신축된 약초극장, 명치좌, 황금좌 등은 단성사보다 객석도 많았고 시설도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영화 의무상영제도가 실시되자,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단성사와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 사이의 프로그램 차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서양영화의 대여 비용까지 증가하면서 단성사의 경영난은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연극 극장으로 전환 등 자구책이 강구되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외화 가격이 폭등하면서 경영난도 가속되었다. 부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박정현 등의 단성사 운영진은 결국 파산했으며, 1939년 그 운영권이 명치좌를 운영하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간다. 이시바시는 단성사를 명치좌의 2번관으로 두었으며 이름도 대륙극장이라 바꾸었다. 해방 후 이름을 되찾은 단성사는 줄곧 한국영화사를 상징하는 장소로 존재하다가 2001년 철거, 2005년 멀티플렉스로 재건축된다. 그러나 이 역시 경영난으로 부도 처리되었고, 2015년 영안모자가 인수하여 현재 단성골드쥬얼리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1) 「각 방면의 성공 고심담 (8) / (2) 흥행계의 노장 박승필 씨」《중외일보》1929년 11월 2일자, 조간 3면 참고문헌 이순진,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 사진 1(글 상단). 토키영화관으로 신축된 단성사 [자료] "신축 낙성한 단성사", 《매일신보》, 1914.01.17. 경셩 즁부 동구안에 잇 , 연극쟝 단셩샤를 헐고 , 로 짓 다 은 , 이젼에 여러 번 , 긔 한바 , 작년 七 월에 , 역 를 시작 야 , 임의 집 건츅은 다 맛치고 , 구력 안에 부 슈졍 지 , 젼혀 맛칠 터이라 간 수가 , 일 륙십팔 간에 , 무 가 삼십이 간이오 , 관람쟈의 뎡원이 , 일쳔 명이오 , 뎐긔 등이 , 합 일 오십 오 , 안은 일본 졔도 , 밧갓 졍면은 , 셔양 졔도인 일이등셕은 젼부 다다미를 랏고 , 하등셕도 쟝교의에 , 안져 보게 되얏스며 기타 여러 가지 구죠와 쟝식이 , 조션의 연극쟝으로 젼도에 뎨일이 되겟스며 , 구력 졍월 초하로날브터 , 기 의 연쥬회로 , 첫 번 무 를 연다더라 , 총 건츅비 일만 일천 원 [자료] "단성사가 팔려", 《매일신보》, 1917.02.18. 경셩에 다만 한아 잇 조션인 측의 연극쟝이라 동구안 단셩샤 그 소유주인 김연영 ( 金然永 ) 으로브터 황금뎡 거 황금관 쥬인 뎐촌 모의게 팔쳔오 원의 가 으로 도되야 십륙일에 금젼 여슈 지 맛추엇 댱 에 연극댱은 활동사진 젼문으로 곳쳐서 조선인 관람자를 흡슈 기로 위주 야 죵 이것을 경영 우미관과 경 을 리라더라 . [자료] "단성사의 개축, 활동사진을 한다", 《매일신보》, 1918.06.21. 됴션의 연극장 즁 한아 되 동구 안 단셩샤 작년 봄에 황금관 쥬인 뎐촌이란 사 이 팔쳔오 원에 가지고 활동사진을 영 기 위 야 광무 박승필 씨에게 경영쟈의 권리를 위임 야 그 일홈으로 당국에 쳥원 고 허가되기를 긔다리던바 다소 년 월을 지 여 지나간 십삼일부로 경긔도 경무부로부터 소관 경찰셔에 허가 지령이 왓슴으로 죵로경찰셔에서 십 일 활동 진의 흥 주 되 박승필 씨를 불너다가 신긔 셔댱으로부터 장 쥬의 건에 야 세히 일너준 후 그 지령을 주엇다 지금의 단셩사 집으로 영사 적소가 못됨으로 확댱 기 위 야 일만 원의 예산으로 그 안을 모다 헐고 다시 지은 후 오 구월부터 시작되리라 목하 설계가 맛치 로 곳 역 에 착수 다 이 뒤부터 신구파 연 극장은 아죠 업셔진 모양이라더라 . [자료] "본관 신축 낙성 후 대갈망 중의 모범적 활동사진은 금일부터 대대적 영사", 《매일신보》, 1918.12.21. 동구안 단셩사를 여러 천원의 거 으로 사드린 후 본 목뎍 바와 갓치 세샹에 모범뎍 활동사진을 영 야써 일반 관람에 졔공 기로 작뎡 얏던 결과 그 뒤 모든 범 ○ 과 계획이 쥰비되야 슈만의 거 과 슈삭의 공졍으로 오날 단샹사 신츅 얏도다 이 젼혀 영리를 위 야 금거히 쥰비 것이 안이오 다만 활동사진의 영 다 쇼문이 퍼지 이를 라 경향의 활가 졔씨의 갈망이 졀졍에 다을 외라 겸 야 녯것을 양 고 것을 요구 것이 현 됴 ( 現代思潮 ) 임으로 본 관주가 미리 이를 닷고 급셩 공 로 이에 쥰공을 맛치엿슴니다 본관은 본 쥬지가 타관에 비 야 현져히 다른 뎜이 잇 바 즉 만흔 돈으로써 참신긔발 됴흔 사진을 가져다가 아모죠록 일반의 호평 즁에셔 영업도 발뎐코져 주지임으로 디 유명 활동사진쥬식회사 몃 곳과 임의 특약을 고 수만원의 보증금을 붓치엿스니 이를 보더라도 가히 본관의 로심초 을 아실 일이라 그 안이라 활동사진에 야 본 관주 항샹 유감히 각 바 갑 만코 용 죠흔 진을 영 때에 변 의 셜명이 불충분 야 일반 관람 시는 니의 불만족과 불평의 셩이 남을 라 역시 진의 가치도 업셔지 일이 잇셔셔 본 관주의 삼슉고 『 熟考 』 로 활동게의 호평잇고 갈 밧 ... 안이 구변으로 뎨일류되 셔상호 『 徐相昊 』 군을 특이 초빙 야 변 쥬임으로 뎡 고 텬연 표졍과 그럴듯 익살 잘부리 변 와 희로 락을 긔묘 게 아 변 합 오륙인이 잇셔 일 밤 무 우에셔 일거일동에 셜명은 참으로 본 관주의 랑 안이오 장 보아가시 로 평판이 잇 오리다 겨울밤은 졈졈 길고 눈이 나와셔 에 가득이 싸인 실상 젹막 기 이 없슬 별별 겨울에 감상이 만단으로 일어날 본관에 오시고 보면 란로 몸을 듯하게 야 주고 셜 갓흔 하얀 포장에 참 쳐음보 긔긔괴괴 진이 다 빗치일 적마다 여긔가 졍말 락쳔디인가보다 감샹이 유연히 발 실 터이요 야반에 소견거리 이 우에 더 업슬 줄로 각 니다 敬具 本館 映寫 中 은 年中 晴雨 를 不計 고 開演 기로 酌定 이온바 特 히 日曜日 及 祭日 에 晝夜 映寫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