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
- 감독
- Joe D'Amato
- 제작년도
- 1990
[사진] 영화 <불멸의 밀사>(1947, 서정규)에 출연한 한림(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韓霖)은 <자유만세>의 김승호에 이어 해방 후 두 번째 배출된 영화배우이다. 1947년 4월 21일 우미관에서 상영된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가 그 발판이 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의 이야기이다. 바로 이 16밀리 무성영화에 한림이 주연을 맡은 것이다. <자유만세>와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자극하는 내용의 특성상 전국적인 학생 단체 관람이 가능했다. 그런데 한림은 이에 앞서 김소동 감독의 <목단등기(牧丹燈記)>(1947)로 먼저 나올 뻔했다. 다음의 기사가 이를 말해 준다. “해방 후 첫 걸음을 내는 전혀 새로운 신인이다. 작품에는 내월 공개 예정인 <목단등기>, 또 제작 중에 있는 <불멸의 밀사> 등 함남 원산에서 출생하여 일본에 가서 일대 상경과를 마친 인텔리, 신장 5척7촌 어깨가 긁고 남성미의 넘버원! 지금 세상이 요구하는 남성에 딱 들어맞는다.(중략) 33세라면 늦은 감도 있지만 성격배우로서 등장하려는 씨의 배우생활은 아직도 장구하다. <목단등기> <불멸의 밀사> 양 작품의 주연인 씨는 조선의 획기적인 16밀리 탄생과 아울러 씨 역시 새로운 연기인으로서 탄생한 것은 16밀리 발전과 더불어 씨도 발전이 약속된 것 같다. 주로 연출자 김소동씨와 일을 하여 왔고 금후도 역시 김씨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고 한다. 김씨와 관계는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어 예술 방면에 전적으로 지도를 받아왔고 일상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 홍병삼, 「신성(新星)을 차저서(3)」 , ≪예술통신≫, 1947.12.7. - 1946년 ‘영화과학연구소’를 설립한 김소동이 벼른 끝에 첫 작품으로 선택한 <목단등기>는 한을 남기고 죽은 처녀 귀신(이정순)이 성불하기 위해 한 남자(한림)와 동침한다는 내용의 괴기물로, 중국소설 전등야화(前燈夜話)에서 소재를 빌려 왔다 .(김소동, 「나의 이력서(47) 영화편력 절정기」, ≪한국일보≫, 1982.5.20) 김소동이 녹음기사와 함께 직접 만든 녹음기로 도전한 이 데뷔작에 아직 검증되지 않은 세 살 아래의 신인을 기용한 배경에는 전공학과는 달라도 동경의 일본대학 후배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시골청년(현인)이 청운의 꿈을 펼쳐나가는 음악영화 <푸른 언덕>(1948, 유동일)의 보조 역할을 했으나 8년 가까이 영화와 멀어졌다. <백치 아다다>로 존재감 드러내다 활동을 재개한 것은 사극영화 <단종애사>(1956, 전창근)의 사육신 중 한 명인 하위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출연한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가 집중적으로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며 그에 대한 관심도 자연히 높아졌다. 그 첫 반응이 시사회장으로부터 나왔다. 미국공보원 영화과장 데일. E 하스 ( 「한국 최고작 ‘백치 아다다’」, ≪동아일보≫, 1956.11.22.) 는 “한국 농촌생활은 물론이려니와 극적 씬, 희비극의 교차 및 인간생활을 파고 들어간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가득 찬 영화로서 확실히 한국영화 최우수 작품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고 했고, 작가 이봉구( 「신영화, 이상심리의 표현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3)도 “오랜만에 보는 향토적인 서정과 날카로운 화면 정리와 이동에서 오는 정감이 영화를 성공케 한 바탕이 되어 주었다”며 “이 가운데서도 한림, 장민호의 연기는 페이소스하면서 박력이 있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영화평론가 이청기 (「신경지의 발견, 영화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6) 역시 “대담한 터치로 아다다의 생태를 해부하고 내면세계에 파고들어 내면의식의 흐름을 극히 감각적인 수법으로 추구한 작품”이라며 한림의 연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수룡 역의 한림은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으나 생리적 조건 탓인지 머슴 성격으로는 지나치게 유약한 인텔리전스가 풍겼다”고 아쉬움도 곁들였다. [사진]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에 출연한 한림, 왼쪽은 나애심(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은 그 뒤에도 <마인>(1957, 한형모)을 비롯한 <아리랑>(1957), <돈>(김소동), <형제>(김성민), <길 잃은 사람들>(이상 1958, 김한일), <외로운 사람들>(박충현), <언제까지나 그대만을>(이상 1959, 권영순). <지상에서 맺지 못할 사랑>(김성민)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을>(이상 1960, 이봉래) 등 13편에 출연했으나 <백치 아다다> 경우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로운 사람들> 등 한 두 편을 빼고는 거의가 조연급이었다. 그 가운데는 <돈>의 김순경과 같은 단역급도 있었다. 역할에 대한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사진] 한형모 감독의 <마인>(1957)에 출연한 한림, 앞의 여배우는 이빈화 한림은 1914년 12월 26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한정국(韓正國)이다. 일본대학 산업경영과를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비애, 실연이 담긴 감상적 인정극을 하고 싶어 했으나 그 희망이 얼마나 관철됐는지는 회의적이다. 간헐적으로 채운 12년의 배우생활 동안 대한영화배우협회 창립(1955년 4월16일)에 참여한 일 외에는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프랭크 보재이즈 감독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1937)를 본 후 그 주인공인 샤를르 보외이에를 좋아하게 됐다는 한림은 젊은 시절엔 주량이 거의 무한대, 담배는 ‘전매국 굴뚝처럼 코에서 연기가 나올 정도’의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영화계와 절연 상태에서 1994년 7월 28일 팔순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 영화 <돈>(1958, 김소동)에서 단역인 순경으로 출연한 한림 1. <불멸의 밀사>의 감독에 대해 『한국영화총서』를 비롯한 국내의 모든 저작물이 김명순 감독으로 기재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1947년 1월 14일자 ≪예술통신≫ 2면 「영화 ‘불멸의 밀사’ 남한 로케 견문기」에는 분명히 서정규(徐廷奎) 감독으로 명기돼 있다. 필자가 유족으로부터 받은 당시의 앨범 사진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이 영화를 제주극장에서 단체 관람으로 봤다.
19세기 후반 외국인의 출입과 거주가 허용되면서 서울에 근대식 건축물과 일본식 가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로가 닦이고, 전기가 들어오고, 전차가 다녔다. 날이 갈수록 눈에 띠게 달라지는 서울에는 구경꾼들도 모여들어, 각지에서 온 ‘경성관광단’ 소식이 신문지상에 심심치 않게 보도되곤 했다. 구경꾼 무리 중에는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 관광단도 있었다. 대륙으로 뻗어가는 제국의 위세를 확인하기 위해 만주-조선 시찰 중 식민 수도 경성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와 조선의 부산 사이를 운행하는 관부연락선을 이용했는데, 부산항에 내려서 경부선 기차로 갈아타고 경성으로 오는 식이었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 산기슭에 자리 잡은 조용한 마을과 단조로운 농촌 풍경뿐이라 지겨워 졸고 있노라면 시끄러운 소음에 눈을 뜨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가스등과 전기등이 빛을 밝히는 경성역이었다. 전차가 달리고, 자동차가 달리고, 인력거가 달리는 경성은 일본의 도시들을 부지런하게 모방하며 변해 가는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경성에 도착한 그들은 번화한 일본인 거류지에 숙소를 잡고 고궁과 사찰, 유적지, 그리고 종로의 조선인 거리를 탐방한 뒤 다시 일본인 거류지로 돌아오는 식으로 관광을 했다. 자신들과 외모는 비슷하지만 말이 다르고 의식주가 다른 조선 사람들의 생활 풍속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한편으로,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의 식민 통치가 조선의 경관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 ‘흐뭇하게’ 눈에 담는, 제국주의적 욕망이 투사되는 관광이었다. 일본인 관광단에게 경성의 극장은 한번쯤 가 볼 만한 곳으로 여겨진 듯하다. 이들이 마치 조선에 대한 안내서인 양 읽었던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의 소설 『조선(朝鮮)』(東京日日新聞, 1911년 6월 19일~11월 25일 연재)에서도, 주인공이 종로의 조선인 거리와 기생집을 구경한 다음 극장을 찾는 대목이 있다. 일본인의 시선으로 조선의 극장과 공연 문화를 관찰한 이 대목은 당시의 극장 문화를 상상해 보는 데에도 유익한 자료가 된다. (아마도 1908년에 세워진 원각사를 떠올리게 하는) 극장 ‘원융사(圓融社)’에 방문한 주인공은 조선인 관객들과 함께 음악 연주, 기생의 춤, 그리고 중국인 마술과 곰 곡예를 구경하면서, 그러한 극장 연예가 일본과 어떻게 다르며 조선의 관객들이 무엇에 흥겨워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 여행자에게 타지의 극장은 본국으로부터 떠나왔다는 고립감을 환기하는 동시에 이색적인 경험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림2. 곰 곡예 출처: 다카하마 교시, 『조선』 중에서 경성의 도시 경관은 계속 바뀌어 갔고, 극장은 그에 따른 풍속의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할 수 있는 장소였다. 다카하마의 『조선』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나, ‘대경성(大京城)’으로 확장된 경성을 소개하는 『신판 대경성 안내』(『新版大京城案內』, 矢野干城·森川淸人, 京城都市文化硏究所出版部, 1936)가 발간되었다. 이 안내책자는 “영화관 외에는 이렇다 할 놀 곳이 없는 경성인에게 영화 보기는 경성인의 최대 오락”이라며 경성의 여러 극장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희락관, 낭화관, 중앙관, 약초영화극장, 송죽좌, 경룡관, 단성사, 조선극장, 제일극장, 우미관, 동양극장이 영화를 상영하는 시설이었으며, 조일좌와 경성극장이 연극을 상연하는 시설이었다. 『조선』의 일본인 여행자가 조선인 극장에서 조선인이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신기해 하며 관찰하는 태도를 취했다면, 『대경성 안내』는 일본인 관광객이 도시의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여러 소비 공간—카페, 바, 끽다점, 백화점—과 함께 극장을 소개하면서 소비자의 입장에서 유익할 정보들을 제공하는 모양새이다. 각 극장의 주요 프로그램이나 입장 요금, 영사 시설, 냉난방 설비 등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 극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버스나 전차의 노선과 정류장으로 극장의 위치를 안내하는 것도 흥미롭다. 1936년 현재, 아직 명치좌(明治座)는 개관하지 않았지만 경성의 극장가가 한창 들떠 있는 듯하다. 이를 두고 『대경성 안내』는 경성의 영화 흥행계가 설비를 개선하고 신관을 건축하는 등 일본의 일류 도시에 버금갈 정도로 극장을 단장 중이라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경성 영화가의 풍속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1935년 말 신설된 약초영화극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극장에 ‘극장 여급(お茶子)’이 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극장 여급은 입장한 관객을 좌석으로 안내하면서 방석과 화로 등을 거의 강매하다시피 판매했다.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은 ‘50전’의 입장료를 지불하고도 방석과 화로를 따로 구매해야 해서 실제로는 ‘65전’ 이상을 부담해야 했다. 필름 영사 중에도 담배를 필 수 있게 해서 극장 환경이 위험하고, 위생상 불결하다는 점도 관광객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일본의 모든 극장이 고급한 설비를 갖춘 것도, 모든 일본인 관광객의 문화 취향이 고상했던 것도 아닐 테지만, 『대경성 안내』는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추고 관객의 편안한 관람을 방해하는 관행이 없어져야 ‘문화의 전당’이라는 수식어에 걸맞다고 전제하며 일본의 문화 수준에 미달하는 경성의 극장 정보를 이른바 ‘알아두면 쓸데 있는’ 관광 정보로 제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낙후되었다고 본 경성의 극장들에 대한 기록이 오늘날 경성의 극장 문화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셈이다. 상단그림1. 원각사를 모델로 한 '원융사' 출처: 다카하마 교시, 『조선』 중에서 <자료> 1. 다카하마 교시, 『조선』, 김영식 옮김, 소명출판, 2015, 74~79쪽, 부분 발췌. 극장 앞은 아직 번잡하게 보였다. 나는 한정 없이 환락을 쫓아 돌아다녔던 학생 시절의 기분을 환기시키면서―열한 시가 되건 열두 시가 되건 잠도 피로도 잊고 등불 있는 곳을 쫓아 돌아다녔던 그 당시의 기분을 불러일으키면서―표를 사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형의 건물은 서양풍을 가미한 것으로,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좌석에는 많은 조선인이 조용히 구경하고 있었다. 무대에는 두 사람의 총각과 세 명의 요보 1 가 마주하고 있어, 잠시 들어보니 봉오도리(盆踊) 노래 같은 것을 합창하면서 각각 손에 들거나 목에 건 악기를 요란하게 치고 있었다. 홍 상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여기는 극장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대중연예장처럼 되어 있어 음악도 하고 기생 춤도 하며 중국인 마술 같은 것도 한다고 했다. 우리는 가장 뒤의 높은 곳에 빈 의자를 발견하고 앉았다. 그곳도 조선인이 앉아 있었으나 우리를 보고 자리를 양보했다. 둘러본 바, 일본인은 나와 고조뿐으로 장내의 조선인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또, 남녀의 좌석은 엄밀히 구분되어 있어 여자 쪽 자리에도 의외로 많은 부인이 얼굴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홍 상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양반 등의 첩으로 정식 부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무대의 요란한 전주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홍 상은, “이건 참 따분하군요. 무언가 재미있는 것으로 빨리 바꾸면 좋을 텐데”라고 조바심을 냈다. 그렇지만 나는 무대보다도 관람석 쪽에 더 많은 흥미를 찾아내며 그들 조선인 남녀가 어떠한 기분으로 이들의 연예를 보러 왔는지 알고 싶었다. 그들은 정숙하게 멍하니 단지 그 음악을 듣고 있었다. 우리가 내려다보는 바로 밑쪽에는 아이를 업은 총각이 의자 위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업힌 아이도 그대로 자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 앉아 있는 조선인은 손에 쥔 긴 담뱃대의 대통을 무릎 위에 얹고 때때로 입으로 연기를 내뿜으면서 계속 조용히 무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 좌석 쪽도 모두 딴 곳으로 보지도 않고 각종 색깔의 옷자락을 양손으로 여미고 일제히 무대 쪽을 보고 있었다. 그때, 지금 막 들어와서 뒤쪽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멀리 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소담이 틀림없었다. (...) 과연 중국인의 마술은 재미있었다. 한 사람의 중국인은 이상한 큰 소리를 내며 뭐라고 하자 조선인은 모두 웃었으나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저건 조선말입니까?”라고 홍 상에게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홍 상은 대답했다. 이윽고 중국인은 하나의 큰 상자 같은 것을 꺼내 정면의 상 위에 놓고 그 상자 안을 관객에게 보이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곧 그 안에서 이런저런 것을 끄집어내어 객석의 갈채를 받았다. 빈 상자 안에서 물건을 꺼낸다는 것은 일본의 마술과 다를 바 없었으나 단지 그 상자가 매우 큰 상자로, 그 안에서 끄집어내는 것도 커다란 화분이나 크고 더러운 항아리 등인 것이 일본 마술의 섬세함과 비교하여 대국적(大國的)으로 보였다. 특히 중국인은 더럽게 때가 낀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마지막에는 상의를 벗어 맨몸을 보이고 변발을 뱀처럼 목에 감고 그 끝을 입에 물거나 하며 분발하는 것이 특이하게 보였다. 반주는 징이나 북이 들어간 극히 살벌하고 요란한 것이었다. 단조롭고 유장한 조선인의 음악과 춤의 다음에 나와서인지 자극이 강한 이 반주나 연희는 매우 사람의 마음을 북돋았다. 그 다음은 다시 중국인의 곰 곡예였다. 잘 훈련된 한 마리의 곰이 중국인의 명령에 따라 양 발로 일어나거나 고개를 넘거나 봉을 들거나 하는 여러 곡예를 하면 그때마다 국자 한 잔씩 먹이를 얻어먹고 요상한 소리로 짖었다. 그 소리가 참으로 맹수적으로 왠지 기분 나쁘게 들렸다. 평생 사육을 당하며 약간의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여러 가지 곡예를 부리고 슬프게 울부짖는 맹수의 소리와, 그 맹수를 질타하는 중국인의 소리와, 그것을 기쁘게 환호하는 조선인의 소리가 뒤섞여서 이채로운 느낌을 주었다. 홍 상은 매우 흥에 겨운 듯 지금까지 별로 본 적이 없는 열띤 표정을 하고 열심히 무대를 바라보았다. 곰 곡예가 끝난 후, 다시 조선인 네다섯 명이 악기를 들고 무대에 나타나 단조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조를 깨워서 밖으로 나왔다. 달은 기울며 점점 환해지고 밤의 서늘한 기운은 피부에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2. 야노 간조․모리카와 기요히토, 『신판 대경성 안내』, 경성도시문화연구소 출판부, 1936, 184~187쪽, 필자 옮김. 영화관 외에는 이렇다 할 놀 곳이 없는 경성인에게 영화보기는 경성인의 최대 오락이다. 상설영화관만 해도 11개에 달하고, 1년의 입장 연인원은 쇼와 9년에 2,314,914명, 그 입장료 판매 수익은 13만 3천원에 이른다. 상설관을 열거해 보면, 희락관(喜樂館) 본정 1정목. 닛카쓰(日活) 영화 직영관, 웨스턴 재생기로 수은정류기(水銀整流器)를 설비, 영사 시설로는 부내(府内) 제일을 자랑한다. 봉절은 내지보다 1개월 정도 늦다. 입장 요금은 계상 70전, 계하 50전이 봉절 흥행의 표준. 때로 오래된 사진을 재상영, 대중석 20전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장소는 본정 한복판으로 부내 제일. 다만, 스팀은 있으나 엄동설한에는 조금 춥다. 낭화관(浪花館) 명치정. (전차는 명치정 입구 하차) 쇼치쿠(松竹) 영화 봉절. 이곳은 원래 양화 전문관이었던 것을 빌려서 신관이 생길 때까지 (쇼와 11년 7월 준공 예정) 가주거 정원 350명인 베이비관. 그런 이유로 1일 3회 흥행을 하고 있다. 단 제3회째는 교체한다. 재생기는 닙톤 직류이기 때문에 화면은 선명. 입장 요금은 계상 60전, 계하 40전이 표준. 스팀 설비가 있고, 관이 작아서 겨울에는 비교적 따뜻하다. 봉절은 대체로 내지보다 1개월 정도 늦다. 중앙관(中央館) 영락정. (전차는 황금정 2정목 하차) 신코(新興), 간(寬)프로, 2 반쓰마(阪妻) 3 영화 봉절, 때로 외국물도 봉절한다. 재생기는 RCA 포토폰. 개봉은 내지보다 2개월 정도 늦다. 입장 요금은 계상 60전, 계하 40전이 표준. 스팀 설비가 있고, 엄동설한에도 비교적 따뜻한 편. 1일 3회 흥행. 약초영화극장(若草映畵劇場) 약초정. (전차는 약초정, 버스는 본정 3정목) 철근 콘크리트 3층의 모던 건축, 내지와 비교해서도 정상급 신관이다. 재생기는 로얄. 방화는 PCL 봉절, 외국영화는 파라마운트 봉절을 중심으로 각 사 봉절 재상영도 하고 있다. 입장 요금은 계상 50전 균일, 학생 30전 균일. 온풍냉풍 설비는 있지만, 엄동설한에는 조금 춥다. 1일 3회 상영. 송죽좌(松竹座) 황금정 3정목. (전차는 황금정 3정목 하차) 이름은 송죽좌지만 이전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것으로, 현재는 마키노(マキノ), 교쿠도(極東), 다이토(大都), 워너를 봉절한다. 옛날에 황금관, 동아구락부 등으로 사용했던 오래되고 큰 관이지만, 현재 신관을 건축 중이다. 입장 요금은 계상 30전, 계하 20전이 표준. 1일 2회 흥행. 봉절은 비교적 빠르다. 경룡관(京龍館) 용산 연병정. (전차는 연병정 하차) 2류관, 쇼치쿠와 PCL의 재상영, 입장 요금은 20전이 표준. 1일 야간 1회 흥행으로 일요일과 휴일만 주야 2회 흥행. 단성사(團成社) 종로 3정목. (전차는 종로 3정목 하차) 모던한 신관으로 재생기는 RCA. 외국영화 전문관으로서 각 사의 우수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내선(內鮮) 쌍방의 고급 관객을 끌어 모은다. 입장 요금은 계상 60전, 계하 40전이 표준. 내지인들에게는 조선어 설명이 귀에 거슬리지만, 봉절도 상당히 빠르고 양화팬이 즐길 수 있는 관이다. 조선극장(朝鮮劇場) 인사동. (전차는 종로 2정목 하차) 외국물 봉절과 일본영화 재상영, 그리고 때로 조선연극을 상연한다. 재생기는 RCA. 한때는 단성사와 나란히 양화 봉절관으로서 내지인 관객도 있어 전성시대를 누렸으나, 단성사의 신축 이후 2류관이 되었다. 입장 요금도 저렴하다. 제일극장(第一劇場) 종로 4정목. 2류관으로서 일본영화를 재상영하여 조선인 대중을 부른다. 우미관(優美館) 종로 2정목. (전차는 종로 2정목 하차) 일본영화 재상영, 외국 대중 작품 봉절을 하여 역시 조선인 대중 팬을 노리고 있다. 동양극장(東洋劇場) 죽첨정. (전차는 서대문 하차) 조선인 측에서는 가장 새로운 모던 관으로, 외국물을 개봉하거나 조선연극, 레뷰를 상연한다. 이상이 경성의 영화관 개요이다. 그 밖에 현재 쇼치쿠영화의 봉절관으로 송죽좌 신관이 건축을 서두르고 있다. 이렇게 경성의 영화흥행계도 설비 개선, 신관 건축 등으로 면목을 일신하여 내지 일류 도시의 수준에 달하고 있다. 내외의 영화배급사도 지사나 출장소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 다만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내지에서 온 사람들을 깜짝 놀랄 만큼 불쾌하게 하는 것은 ‘극장 여급(お茶子)’의 존재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유유히 들어가면, 에이프런을 걸친 무뚝뚝한 극장 여급이 안내하면서 방석과 화로를 강매한다. 방석은 5전, 화로는 10전, 따라서 가령 50전의 흥행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65전이 든다. 물론 반드시 빌려야 할 의무는 없지만, 방석이 없으면 의자가 딱딱하고, 게다가 극장 여급이 퉁명스럽게 굴어서 더욱 불쾌해진다. 극장 여급 제도에 대해서는 각 방면에서 비난과 폐지의 소리가 있으나, 약초극장만 폐지했다. 그 외에도 흥행 취체가 불완전해서 영사 중에 제멋대로 담배를 피거나 하는 그러한 불쾌한 점들이 있는데 당국에서 드디어 취체를 강화하기로 했다. 극장 경성은 연극으로는 완전히 척박한 곳이다. 필름 1편으로도 족한 영화와 달리 규모 있는 극단을 부르게 되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부른다고 해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입장 요금을 내야만 한다. 그래서 결국 순회 구파•신파 극단이나 만자이(萬歲, 漫才) 4 등으로 만족해야 한다. 다만 쇼와 10년에는 경성에 전례 없는 방문이 있었다. 만주황군 위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치무라 우자에몬 일좌(市村羽左衛門一座)와 닌교조루리 분라쿠자(人形瑠璃文樂座)가 공연한 것이다. 이것은 경성의 연극애호가들이 대단히 기쁘게 했다. 경성극 흥행계의 고민은 그뿐만이 아니다. 훌륭한 대극장이 없는 것도 큰 결함이다. 현재는 조일좌 (朝日座, 본정 5정목), 경성극장 (京城劇場, 본정 2정목) 2곳이 있는데, 둘 다 내지의 3, 4류 도시의 소극장 정도이다. 경성부민들이 대망하던 부민관 대홀 (정원 1,800명)이 등장하여 이를 흥행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어서 대극장 문제는 일단 해소되었으나, 공공건물이라서 부민들 간에는 순흥행적인 새로운 극장을 요망하는 소리가 높다. 조선연극 은 내지의 가부키나 신파에 비해서 수준이 매우 낮다. 현재 직업 극단으로서 신무대(新舞臺), 태양극장(太陽劇場), 신성좌(新星座) 등이 있고, 주로 조선극장, 동양극장 등에서 공연한다. 음악 방면으로는 내지의 일류 악인이나 외국의 내조자(來朝者) 지방 순회가 신문사 주체 등으로 이루어져 그 대부분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행이다. 이들의 공연장으로는 부민관 대홀, 경성공회당 (장곡천정, 상공회의소의 누상(樓上))이 사용되고 있다. 1) 조선인을 가리키는 말. ‘여보세요’의 ‘여보’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 『조선』에서는 ‘大人’, 즉 ‘어른’이라고 쓰고 ‘요보(ヨボ)’라고 병기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에는 조선인 성인 남성을 가리키던 ‘요보’는 점차 조선인을 멸시하거나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2) 아라시 간주로 프로덕션(嵐寛寿郎プロダクション)의 약칭. 3) 반도 쓰마사부로 프로덕션(阪東妻三郎プロダクション)의 약칭. 4) 원문 표기는 ‘만세(萬歲).’ 만자이(漫才)는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으며 진행하는 해학적인 화예(話藝)로 만담과 유사하다. 13, 14세기에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 새해에 악귀를 쫓고 번영을 기원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쌀과 돈을 청한 사람들을 ‘만자이(萬歲)’라고 했는데, 이것이 만자이의 기원이라고 한다.
< 반도의 봄 >(1941)의 마지막 시퀀스는 도쿄 영화계를 견문하러 떠나는 한 쌍의 젊은 조선영화인과 그들을 배웅하는 동료들로 채워진 경성역 플랫폼 장면이다. 이제 막 건강을 회복한 남자는 일본의 선진적인 영화 시스템을 견학하러 떠나고, 영화 <춘향전>의 성공으로 조선영화계의 신성(新星)이 된 여자 ‘정희’( 김소영 분) 역시 견문을 넓히기 위해 동행한다. 사실상 당시 영화기업화론의 산물이라고 할 만한 <반도의 봄>은 온갖 역경 속에서도 영화를 만들어온 ‘영일’( 김일해 분)이나 ‘훈’( 서월영 분)과 같은 식민지 남성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배우 ‘정희’가 새로운 영화 시스템과 함께 스타로 부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제국의 수도 도쿄로 향하는 정희를 ‘경숙’(복혜숙 분)이 배웅하는 플랫폼 장면은 각자의 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을 한 장소에 위치시킴으로써 토키 이후 조선영화의 세대교체뿐 아니라 제국으로 향하는 조선영화의 ‘신체제’를 은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반도의 봄 >의 ‘정희’, 김소영 (金素英, 1914~ ? )은 식민지 말기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다. 1931년 우연한 계기에 < 방아타령 > 제작진의 눈에 띠어 영화계에 데뷔했던 무렵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이규환 감독의 < 무지개 >(1936)로 스크린에 복귀하고 그 이듬해 < 심청 >(1937)의 타이틀 롤을 맡으며 이제 막 토키 시대로 진입한 조선영화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심청>에서 “가히 다른 여배우로서는 따를 수 없는 신기한 연기”( 박기채, 「조선 남녀배우 인물평」, 삼천리, 1941. 6.)를 보여주었던 김소영은 이어서 출연한 최인규 감독의 < 국경 >(1939)에서 원숙한 매력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스타로 부상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 붐’과 맞물려 <국경>이 일본에서 상영되었을 때에는 일본의 유력한 평론가들로부터 ‘조선에서 가장 유망한 배우’(「朝鮮映画の現状を語る-座談会報告」, 日本映畵, 1939年 8月号)라고 인정받기도 했다. 문예봉 , 김신재 와 함께 발성영화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김소영 은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연기가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는 평가를 곧잘 받았다. 그 이유가 중외극장, 극단 신건설(新建設), 태양극장, 동양극장 청춘좌, 중앙무대, 극단 고협 등 여러 극단을 거치며 병행해온 무대 경험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연극을 통해 다져온 발성과 화술은 때로는 장점으로 때로는 단점으로 지목되었던 듯하다. 한편, 김소영은 청초하면서도 요염하고, ‘모던’하면서도 ‘고전미’가 있는 이율배반적인 매력으로 이미지의 스펙트럼이 넓은 만큼 배우로서 풍부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배역이 주로 미혼여성으로 국한되어 연기의 폭이 넓지 못했다. ‘젊은 어머니’ 같은 역을 연기해 보고 싶다고 피력하기도 했지만(김소영, 「今年 나의 生活풀랜」, 삼천리 1941. 6.), 세상 사람들은 남편 추적양 이 신건설 사건으로 수감된 후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을 시집에 두고 나왔으며, 첫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인규 , 조택원 과 추문에 휩싸인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떠들기 좋아했다. 때마침 ‘영화 신체제’를 맞이한 영화계는 ‘인격수양’을 강조하며 스타급 여배우들을 ‘현모양처’로 표상되는 ‘총후’의 여성으로 배치했는데, 김소영에게 구축된 공적 퍼스낼리티는 그러한 표상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김소영 의 매력이 가장 돋보이는 영화 < 반도의 봄 >에서 그녀는 명민한 배우지망생 ‘정희’에서 조선여인의 표상 ‘춘향’으로 또 조선영화계의 떠오르는 신예 ‘정희’로, 말하자면 조선적인 미(美)와 동시대적 감수성, 그리고 근대적인 가치들의 교차점 위에 지정되었지만, 그녀의 ‘춘향’이 영화 속 영화의 단편에 그칠 수밖에 없듯이 (또 그것이 ‘안나’라는 여성과 공유하는 것이었듯이) 김소영은 ‘현모양처’의 표상을 점유하지 못했다. 조선군보도부가 조선과 일본에서 대대적인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해 제작한 < 그대와 나 >(1941)를 비롯해 여러 편의 선전영화에 출연했지만, 김소영의 역할은 ‘병사의 가족’ 안으로 수렴되지 않았다. 법인 조영(朝映)의 여배우들이 총출동한 < 조선해협 >(1943)에서 그녀는 마지막 장면에 ‘간호부’ 역으로 잠깐 등장한다. 부상당한 병사( 남승민 분)와 함께 해변을 걷고 있던 그녀는 병사의 아내( 문예봉 분)와 누이( 김신재 분)가 있는 조선해협 너머를 바라보며, “압도적이네요.”라고 말하는데, 그 ‘압도적인 바다’란 그들 간의 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김소영 의 마지막 출연작은 안종화가 연출한 < 수우 (愁雨)>(1948)다. 해방기의 혼란 속에서 어떤 배우들은 인생을 걸고 북한을 택하고, 어떤 배우들은 어쩔 수 없이 남한을 떠났으며, 어떤 배우들은 영화를 포기했다. 김소영은 재혼한 남편 조택원과 도미(渡美)해 무용단원으로 미주 공연에 동행했다. 그러나 이혼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국이나 출판사에서 일하고,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해 뉴욕에서 미용실을 개업했다는 소식은 국내에 전해졌지만, 스크린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현모양처’의 표상이 되지 못하고 불혹(不惑)에 가까워진 여배우의 또 다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 글: 이화진 (한국영화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