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 홍보 영상] 여자친구는 알바중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예린, 소원, 은하, 유주, 신비, 엄지
※ 이 글은 2022년 10월 11일(화)부터 19일(수)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되는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미완의 사가: 아오야마 신지(1964-2022) 추모전’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기획전에 대한 정보는 아래 링크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42 ) 언제나 많은 이해자들에게 둘러싸여 일찍이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 신지는 불우한 작가였다. 신작이 발표될 때마다 적지 않은 리뷰가 나오기는 했지만 정리된 작가론이라면 지금도 결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동서고금의 영화, 음악, 문학에 정통했던 예민한 비평가였기 때문에 아오야마 신지를 논하는 것은 비평가에게는 그 대상에 필적할 만큼의 지성과 감성을 요구하는 골치 아픈 도전이었던 것이다. 아오야마는 소설가나 연극 연출가로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음악가로서의 활동도 단순한 취미로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다재다능함이 아오야마가 하는 일의 전모를 한층 보이기 어렵게 한 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아오야마와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 끝내 아오야마론을 쓰지 않은 태만한 영화비평가 중 한 명이었으며, 너무나도 이른 그의 죽음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씻어낼 수가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 만다 구니토시, 시오타 아키히코와 같은 현대 일본영화의 이름난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릿쿄대학 출신이었지만 세대적으로 가장 아래 세대였던 아오야마는 일찍부터 학생영화계에서 명성을 얻었던 ‘릿쿄 누벨바그’ 선배들과는 조금 다른 경로를 거쳐 영화계에 진입하게 된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1990년대의 일본영화 산업은 크게 침체되었고, 신인 감독이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일자리를 얻는 길은 이미 완전히 막혀 있었다. 기타노 다케시 같은 반전통적인 작가가 영화계 밖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혼란을 틈탄 것이었다. 이처럼 혼미한 시대에 새롭게 등장해 성행한 것이 OV(오리지널 비디오)라고 불리는, 처음부터 렌탈 비디오용으로 양산된 저예산 영화였으며, 또 시장 확대를 위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필요로 하기 시작한 BS(위성방송)였다. 그리고 아오야마는 실로 OV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감독을 경험한 후,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유료 BS 방송국 WOWOW에서 < 헬프리스 >(1996)를 찍으며 본격적인 데뷔를 장식했다. 이런 형태로 시작된 아오야마의 행보는 영화의 정의가 점점 모호해져가는 와중에 영화란 무엇인가를 매번 되묻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헬프리스>는 현장에 결집한 인재들의 면모에서도,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이후의 아오야마의 작품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다. 일단 당시 WOWOW 소속이었던 프로듀서 센토 다케노리가 있다. <헬프리스>는 센토가 시작한 프로젝트 'J·MOVIE·WARS'의 하나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매년 비교적 저예산인 영화 4, 5편을 한데 모아 제작, WOWOW에서 프리미어 방영 후 극장 개봉하는 프로젝트로 해를 거듭할수록 신인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데뷔의 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여러 편의 묶음 제작은 손익의 상쇄에도 용이했기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없는 시대에 이를 대체하는 시스템의 구축을 의식했다는 점에 센토의 비범함이 있었다. 또 하나 센토가 일본영화 프로듀서로서 선구적이었던 것은 일찌감치 해외 진출을 시야에 넣고 있었던 점이었다. 가와세 나오미의 < 수자쿠 >(1997)가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그 가장 두드러진 성과였다. 아오야마가 센토가 프로듀싱한 < 유레카 >(2000)로 칸 국제비평가연맹상과 에큐메닉상을 수상하는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이 센토의 전략에 힘입은 바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아오야마에게 있어서 센토와 함께 결정적이었던 것은 촬영감독 다무라 마사키와의 만남이다. 다무라는 <산리즈카> 시리즈로 알려진 급진적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집단 오가와 프로덕션 출신으로, 극영화에 진출하고 난 후에도 파격적인 롱테이크로 세간에 놀라움을 안겨준 소마이 신지의 < 숀벤 라이더 >(1983) 등에서 특이한 개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특징으로는 카메라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비정상적일 정도의 높은 감응력과, 살아있는 공간을 포착하는 카메라 시선의 철저한 비인칭성을 들 수 있다. <헬프리스>의 시작 부분에서 기타큐슈의 거리 풍경을 위에서 포착하고 이윽고 위태로운 진자운동을 시작하는 공중 촬영이라고 하는, 그 어떤 자의 시점으로도 결코 환원될 수 없는 마이클 스노우의 구조영화마저 연상시키는 카메라워크를 보면 그것은 명백해진다. 아오야마와 다무라는 이후에도 < 새드 배케이션 >(2007)까지 오랫동안 콤비를 이루게 되지만, 그 관계가 일관성 있게 서로 익숙한 채로 의존하는 종류의 것과는 거리가 먼, 더없이 긴장 가득한 것이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유레카>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웅대한 환경 속에 인물을 던져놓은 다음 시간을 두고 그 생태를 쫓는다는 방향성을 정한 뒤, <달의 사막>(2001)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스탠다드 사이즈를 통해 의도적으로 공간을 한정하고, <호숫가 살인사건>(2005)에서는 멀티카메라 시스템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다무라를 굳이 세컨드로 돌린 것이다. 다무라와의 결별 후에 찍은 < 도쿄공원 >(2011)과 마지막 감독작 < 구름 위에 살다 >(2020)에서 나타나는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로의 현저한 관심의 이동은, 결코 스타일적인 후퇴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단한 자기 혁신 끝에 처음으로 획득한 것, 더할 수 없는 복잡함을 경험해봤던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단순함의 경지였다. 아오야마는 다니엘 슈미트가 일본에서 찍은 걸작 <쓰여진 얼굴>(1995)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이때 가까이서 관찰한 슈미트와 촬영감독 르나토 베르타와의 관계성으로부터 다무라와의 공동작업으로 연결되는 무언가를 배웠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서, <유레카> 이후 거의 모든 아오야마 작품에서 녹음을 담당하고 있는 기쿠치 노부유키 또한 다무라와 마찬가지로 오가와 프로 출신이다. 사람들에게 만연해 있는 자살 충동 바이러스를 음악으로 치유하는 SF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005)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아오야마 작품에서의 음향은 종종 시각적인 영상과 길항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건 소리의 공간성을 중시하는 기쿠치의 공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헬프리스>는 내용 측면에서도 아오야마에게 있어 결정적이었다. 이 작품은 나중에 만든 <유레카>, <새드 배케이션>과 함께 ‘기타큐슈 사가’를 구성하게 된다. 개개의 작품 테두리를 넘어 공통적인 캐릭터가 오고 가면서 전체로서 큰 강과 같은 거대한 서사의 너울을 형성하는 사가라는 형식은 근대소설사에 있어서는 포크너의 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오야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포크너의 영향을 받은 나카가미 겐지이다(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하는 주인공의 이름인 겐지는 그에게서 유래한다). 고대로 이어지는 신화적인 땅 기슈에서 살아온 나카가미는 스스로가 피차별 부락 출신이라는 사실에 마주하여, 그 장소를 ‘골목(路地, Roji)’이라고 이름 붙이고 활황일 때부터 소멸 후까지를 사가로 그렸다. 아오야마에게 있어서 나카가미의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는 <로지예: 나카가미 겐지가 남긴 필름>(2000)을 보면 분명히 나타나지만, 아오야마는 나카가미의 기슈를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기타큐슈로 단순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 로지예 >에서 역시 기슈 태생의 영화작가 이즈치 기슈가 나카가미의 텍스트를 낭독할 때 과장된 기슈 사투리가 특징적이었던 것처럼, 기타큐슈 사투리의 거의 음악적일 정도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일이 아오야마에게는 중요했다.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규슈 이외의 사람이라면 전부를 알아듣는 것이 쉽지 않은, 조야함과 순정을 겸비한 듯한 기타큐슈 사투리의 독특한 가락은 들으면 들을수록 ‘일본어’라는 통합된 개념을 불확실한 것으로 바꾸어 간다. 그리하여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에도 인접한 기타큐슈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말이 폴리포닉하게 교차하는 다의성을 가진 공간으로서 재정의되게 되었다.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에서 가장 깊이 탐구된 이 성격이야말로, 나카가미가 ‘골목’이라는 허구에 진정으로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오야마는 또한 나카가미로부터 물려받은 짙은 정치성, 특히 천황제나 국가라고 하는 대문자 정치에 대한 강한 관심에 있어서는 동시대 작가들보다 오시마 나기사 같은 작가와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 이미 늙어버린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하여 >(2001)에는 그러한 아오야마의 정치성이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표출돼 있다. 애초에 <헬프리스>에서도 남자들을 괴롭히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상황이 쇼와 천황의 죽음과 겹쳐져 있었다. 죽여야 할 아버지가 이미 없어졌다는 사실이 남자들을 기댈 곳 없는(helpless) 고아로 변모시킨 것이다. 이처럼 아오야마의 정치적 측면에서의 독창성은 천황제나 국가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의 육체를 흐르는 피의 문제로 여긴 점에 있었다(전전의 국가이데올로기에서 일본 국민은 천황의 적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후 아오야마의 관심이 아버지 죽이기에서 여성적인 것의 탐구, 모성이라는 헤어날 수 없는 굴레의 속박으로 옮겨갔다는 점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아무리 아이가 발버둥질해도 모든 것을 미소와 함께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사랑임에 틀림 없다. 온갖 저항이 모성으로 인해 무력화되는 개미지옥 같은 나라, 일본――절망적으로 여겨지는 한편, 그 끝없는 포용력에 희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서게 되는 그 지점에서 ‘기타큐슈 사가’는 닫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오야마의 미국문화에 대한 경도도 그 자신을 흐르는 피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성여성>(1966)의 고다르는 당시 파리 젊은이들을 ‘마르크스와 코카콜라의 아이들’이라고 불렀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아오야마는 자신에게 흐르는 피의 절반이 코카콜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평생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국영화와 음악, 문학 속에서 자라나면서 현실 국가로서의 미국에게는 환멸할 수밖에 없었던 빔 벤더스를 ‘그를 논하는 것은 나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동지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1) 아오야마가 보기에 전후 일본에게 있어서 미국은 아무리 그곳으로부터 독립하려고 발버둥질해도 본질적인 종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전술한 천황제와 같은 형식의 문제였다. 그런고로, 패전 직후 도쿄를 무대로 젊은 자매가 자신들이 사는 집을 미군 상대의 위안소로 하여 살아가는 <퇴폐자매>의 영화화가 실현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애석하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원작을 아라이 하루히코 등이 각색한 그 각본에는 “일본은 미국에 점령당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미국인의 몸을 점령해 주겠어”라는 대사가 포함돼 있었다. 2) 지금 와서 새삼 생각하는 것은, ‘기타큐슈 사가’뿐만 아니라 아오야마가 남긴 모든 일들이 열린 채로 있는 거대한 사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뒤에 남은 우리는 끝내 완결되지 않고 중단되어 버린 그것들을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다뤄지고 있는 것들이 얼마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피에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 사가의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필자 - 후지이 진시: 일본의 영화평론가이며, 현재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입문: 현대 할리우드 영화 강의』(2008), 『되살아나는 소마이 신지』(2011), 『모리사키 아즈마 당 선언!』(2013) 등에 편저자로 관여했으며 『이와나미영화의 1억개의 프레임』(2012), 『에드워드 양 재고/재견』(2017),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2017),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2022)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번역 -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박진희 *** 1) 아오야마 신지, 『나의 영화를 발견했다』(われ映画を発見せり), 세이도샤, 2001, 142쪽. 2) <퇴폐자매>의 시나리오는 《영화예술》 480호(2022년)에 실려있다(96-121쪽). (원문) 青山真治、未完のサーガ 藤井仁子 常に多くの理解者に囲まれ、早くから国内外で高い評価を獲得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青山真治は不遇の作家だった。新作が発表されるたびに少なくないレビューが書かれはしたが、まとまった作家論となると決定的なものは今も存在しない。彼自身が古今東西の映画、音楽、文学に精通した鋭敏な批評家であったために、青山真治を論じることは、批評家にとっては対象と匹敵するだけの知性と感性を求められる厄介な挑戦だったのである。青山はまた小説家、舞台の演出家としても成功をおさめ、音楽家としての活動もたんなる趣味として片づけられるようなものではなかった。そうした多才さが、青山の仕事の全貌をいっそう見えづらくした面もあろう。かくいう私も、青山といつでも連絡がとれる距離にいながらとうとう青山論を書かなかった怠惰な映画批評家の一人であり、あまりにも早すぎる彼の死を前に、忸怩たる思いを拭い去ることができない。 青山は黒沢清、万田邦敏、塩田明彦といった現代日本映画の名だたる作家たちと同じ立教大学の出身だったが、世代的にいちばん下だった青山は、早くから学生映画の世界で評判をとっていた「立教ヌーヴェル・ヴァーグ」の先輩たちとはいささか異なる経路をたどって映画界に参入することになる。バブル経済の崩壊後にあたる1990年代の日本映画は産業としては大いに低迷し、新人監督がメジャー・スタジオで仕事を得る道はもはや完全に閉ざされていた。北野武のような反伝統的な作家が映画界の外から突然出現することができたのは、そうした混乱に乗じてのことにすぎない。この混迷の時代に新しく登場して盛んになったのが、OV(オリジナル・ビデオ)と呼ばれる初めからレンタル・ビデオ用に量産された低予算映画であり、また、市場拡大のためにオリジナル・コンテンツを必要としはじめていたBS(衛星放送)であった。そして青山は、まさにOVの世界で初めて監督を経験した後、開局間もない有料BS放送局WOWOWで『Helpless』(1996)を撮り、本格的なデビューを飾っ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かたちで開始された青山の歩みは、映画の定義がますますあいまいになっていくなかで、映画とは何かをそのつど問いなおすものにならざるをえなかった。 『Helpless』は、現場に結集した人材の点でも内容の点でも、その後の青山作品を規定する決定的な第一歩であった。まず、当時はWOWOWに所属していたプロデューサーの仙頭武則。『Helpless』は仙頭が立ちあげたプロジェクト、「J・MOVIE・WARS」の一本として製作されたが、これは毎年、比較的低予算の映画を4、5本まとめて製作し、WOWOWでのプレミア放映後に劇場公開するというもので、年を追うごとに新人監督に積極的にデビューの場を提供す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数本を束ねての製作は損益の相殺を容易にするもので、スタジオ・システムなき時代にそれに代わるシステムを構築しようと意識していた点に仙頭の非凡さがあった。もう一つ、仙頭が日本映画のプロデューサーとして先駆的だったのは、早くから海外進出を視野に入れていたことだ。河瀬直美の『萌の朱雀』(1997)がカンヌ国際映画祭で受賞したのはそのもっとも目立った成果だった。青山が仙頭のプロデュースした『EUREKA』(2000)でカンヌの国際批評家連盟賞とエキュメニック賞を受賞するなど、フランスを中心に世界的な名声を得ていくことになるのは、この仙頭の戦略によるところが大きかったといえる。 青山にとって仙頭と並んで決定的だったのは、撮影の田村正毅(のちに改名してたむらまさき)との出逢いである。田村は『三里塚』シリーズで知られる先鋭的な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製作集団、小川プロダクションの出身で、劇映画に進出してからも、型破りな長回しで世間の度肝を抜いた相米慎二の『ションベン・ライダー』(1983)などで特異な個性を発揮していた。その特徴としては、キャメラの前で生起しつつある出来事に対する異常なまでの感応力の高さと、生きた空間を捉えるキャメラの視線の徹底的な非人称性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Helpless』の冒頭で北九州の街並みを真上から捉え、やがて危うい振り子運動を始める空撮の、何者の視点にも決して還元することのできないマイケル・スノウの構造映画さえ思わせるキャメラワークを見れば、そのことはあきらかだろう。青山と田村はその後も『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2007)まで長くコンビを組むことになるが、その関係が一貫して馴れあいからはほど遠い、きわめて緊張に富むものだった点に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シネマスコープの『EUREKA』で人間を圧倒する雄大な環境のなかに人物を放ち、その生態を時間をかけて追うという方向性を極めた後、『月の砂漠』(2001)ではすでに滅びかけていたスタンダード・サイズに空間を意図的に限定し、『レイクサイド マーダーケース』(2005)ではマルチキャメラを採用したばかりか、たむらをあえてセカンドに回したのである。たむらとの訣別後に撮られた『東京公園』(2011)と最後の監督作『空に住む』(2020)に顕著な俳優たちの演技アンサンブルへの関心の移動は、断じてスタイル的な後退などではなく、こうした絶えざる自己革新の末に初めて獲得されたもの、複雑さを極めた者だけが到達することのできる単純さの境地であった。青山はダニエル・シュミットが日本で撮った傑作『書かれた顔』(The Written Face、1995)で助監督をつとめた経験を持つが、このとき間近で観察したシュミットと撮影監督レナート・ベルタとの関係性から、たむらとの共同作業に通ずる何かを学びとったように思えてならない。ちなみに、『EUREKA』以降のほぼすべての青山作品で録音を担当している菊池信之は、たむらと同様、小川プロの出身である。人を自殺させるウイルスの蔓延を音楽によって癒すSF『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2005)にあきらかなように、青山作品にとって音響はしばしば視覚的な映像と拮抗するほど重要なものだったが、それも音の空間性を重視する菊池の貢献あってのことだっただろう。 先述したように、『Helpless』は内容の点でも青山にとっては決定的だった。この作品は、のちに撮られる『EUREKA』、『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とともに「北九州サーガ」を構成することになる。個々の作品の枠を超えて共通するキャラクターが行きかい、全体として大河のような巨大な物語のうねりをかたちづくるサーガの形式は、近代小説史にあってはフォークナーによるものが広く知られているが、青山への直接の影響源となったのは、そのフォークナーの影響を受けた中上健次である(浅野忠信演じる主人公の役名、健次は彼に由来する)。古代につながる神話的な土地、紀州に生を享けた中上は、自らが被差別部落の出身である事実と向きあい、その場所を「路地」と名づけて活況から消滅後までをサーガとして描きつづけた。青山にとって中上の影響がいかに絶大であったかは『路地へ 中上健次が残したフィルム』(2000)を見ればあきらかだろうが、青山は中上にとっての紀州をただたんに自分の生まれ故郷である北九州に置き換えたわけではない。『路地へ』でやはり紀州生まれの映画作家、井土紀州が中上のテクストを朗読する際の誇張された紀州訛りが特徴的であったように、北九州弁のほとんど音楽的な魅力を再発見することにつながった点が青山にとっては重要だった。九州以外の者には日本人観客でもそのすべてを聴きとることは容易ではないものの、北九州弁の粗野と純情を兼ね備えたような独特な調子は、聴くほどに「日本語」という統合された概念を不確かなものへと変えていく。こうして、海を挟んで朝鮮半島にも面する北九州の土地は、多様な人と言葉がポリフォニックに交差する、多義性の空間として再定義されることとなった。そして、『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でもっとも深く探究されたこの性格こそは、中上が「路地」という虚構に真に期待していたものでもあったのである。 青山はまた中上譲りの深い政治性、ことに天皇制や国家といった大文字の政治への強い関心において、同時代の作家よりも大島渚のような作家とはるかに近い場所にいた。『すでに老いた彼女のすべてについては語らぬために』(2001)には、そうした青山の政治性がもっとも直接的なかたちで表出されている。そもそも『Helpless』では、男たちをさいなむ父の不在という状況が昭和天皇の死と重ねられていた。殺すべき父はもはやいなく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事実が、男たちを寄る辺のない(helpless)孤児へと変貌させたのである。このように、青山の政治面での独創性は、天皇制や国家権力というものを、自らの肉体を否定しようもなく流れる血の問題として考えた点にあった(戦前の国家イデオロギーにおいて日本国民は天皇の赤子と位置づけられていた)。その後の青山の関心が、父殺しから女性的なものの探究、母性による骨がらみの呪縛へと移っていったことは、この文脈において捉える必要がある。『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で真に恐ろしいのは、どれほど子があがいてもいっさいを微笑みとともに受けとめてしまう母の「愛」にほかならない。あらゆる抵抗が母性によってすべて骨抜きにされてしまう蟻地獄のような国、日本――絶望的に思える一方で、その底なしの包容力に希望を探りあてるしかないという認識に立ったところで「北九州サーガ」は閉じられるのだ。 このように考えることで、青山によるアメリカ文化への傾倒ぶりも、彼自身を流れる血の問題であったとわかるだろう。『男性・女性』(Masculin, féminin、1966)のゴダールは、当時のパリの若者たちを「マルクスとコカ・コーラの子供たち」と呼んだが、その伝に倣えば、青山は自分に流れる血の半分がコカ・コーラでできているという事実から生涯眼をそむけることがなかった。だからこそ、自分と同じようにアメリカの映画と音楽と文学で育ちながら、現実の国としてのアメリカには幻滅するしかなかったヴィム・ヴェンダースのことを、「その人を論じることが自分について語ることに等しい」ほど重要な同志と感じていたのである 。青山の見るところ、戦後日本にとってのアメリカは、どれほどそこから独立しようともがいても本質的な従属関係からは脱け出せないという意味で、先述した天皇制と同型の問題であった。それゆえに、敗戦直後の東京を舞台に若い姉妹が自宅を米兵相手の慰安所にして生きぬく『退廃姉妹』の映画化が実現しなかったことが惜しまれてならないのだ。島田雅彦の原作を荒井晴彦らが脚色したその脚本には、「日本はアメリカに占領されたけど、これからはあたしたちがアメリカ人の体を占領してやるのよ」という台詞が含まれていた 。 今、あらためて思うのは、「北九州サーガ」のみならず、青山の遺したすべての仕事が開かれた巨大なサーガをな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それがついに完結することなく中断されてしまったことを、後に残されたわれわれは糧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そこで扱われている事柄がいくらかでも自分自身の血に流れていると感じる者なら誰一人、このサーガの登場人物である事実から逃れることはできないのだ。
<애마부인>, 에로영화 시대의 개막 <애마부인>(정인엽, 1982)은 한국영화사에서 이른바 ‘에로영화’ 2) 붐을 일으킨 영화다. 이에 대해 1980년대 3S 정책과 검열의 완화가 그 배경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신군부의 전반적인 문화정책이 에로영화 제작 붐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군부가 검열을 완화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의 검열 시스템을 답습하였고 검열 원칙에서 변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애마부인>이 상징하는 변화는 1980년대의 사회 전반의 변화― 민주화의 요구와 자본주의의 발달에 수반된 통금해제와 유흥문화의 확산, 컬러TV와 홈비디오의 보급 등―를 계기로 1960년대 말 이후 억압되었던 욕망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봄이 보다 적절하다. 다시 말해 신군부의 정책에 의해 에로영화 붐이 일어났다기보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자유화의 물결을 신군부가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었고, 그 흐름 중 하나가 에로영화였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국영화계에서의 에로영화 붐은 세계적인 성 자유화의 조류와 함께 1960년대 말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1970년대 내내 강고한 검열에 의해 억압되었다. 그러면서도 성을 표현하려는 노력은 계속 경주되었고 외설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서구 섹스영화에 관한 정보가 해외토픽으로 소개되며 이러한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것임을 에둘러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그러한 정보부터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예컨대 1980년에는 <칼리귤라 Caligula>(1979)가 영국에서 말썽이 되고 있다는 기사 3) 가, 1981년에는 그리스가 영화 검열을 폐지했다는 기사 4) 가 보도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부응하며 한국에서도 억압되었던 욕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애마부인>이 개봉하기 전 해인 1981년에는 ‘에로티시즘 영화’라는 문구를 전면에 걸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정진우, 1980)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정진우, 1981)가 개봉하여 크게 흥행했다. 그 뒤를 이어 1982년 2월에 <애마부인>이 개봉하여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같은 해에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 The Postman Always Ring Twice>(1981)와 <보디히트 Body Heat>(1981)가 수입되어 관객동원 1위와 3위를 기록함으로써 5) 그야말로 1982년은 에로영화의 해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볼 때 신군부의 3S 정책 중 적어도 영화[Screen] 부문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의도된 전략이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더 이상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민주화·자유화의 국면에서 집권한 신군부는 사회비판보다는 성적인 표현에 관대한 것이 낫다는 선택적 판단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애마부인> 이후 에로영화가 양산되자 검열이 1970년대 후반 기준으로 다시 강화되었던 것은 검열의 본질, 나아가 정권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었다. [그림 1] <애마부인>(정인엽, 1982)의 포스터. 한글로 쓴 제목 위에 ‘愛麻夫人’이라는 한자표기가 보인다. 이는 검열 과정에서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변경이 강제된 제목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위에 나신으로 말을 타고 있는 애마(愛馬)의 모습이 보이고 있어서 아이러니하다. [그림 2] 염해리[김부선]가 주연을 맡은 <애마부인3>(정인엽, 1985)의 포스터. 역대 ‘애마’를 누가 맡느냐는 큰 관심사였다. 원조 애마인 안소영을 비롯해 오수비, 김부선 등이 ‘애마’ 역으로 데뷔했다. [그림 3] <애마부인>은 13탄까지 제작되며 한국영화사에서 에로영화를 대표하는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애마부인13>(김성수, 1966)은 비디오영화로 제작되어 정식 시리즈에 넣지 않기도 한다. <파리애마>(정인엽, 1988)와 <짚시애마>(이석기, 1990), 그리고 최근에 나온 <애마부인2016>(김미연, 2016)까지 포함하면 <애마부인> 시리즈는 16편에 이른다. 보수와 외설, 그리고 검열의 친연성 1970년대에는 강력한 검열로 인해 ‘외설’에 해당하는 신체부위의 노출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통제와 불황의 늪에서 성적인 표현은 영화계가 그나마 해볼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기도 했다. 이에 영화계는 예술을 내세우며 외설을 추구하였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명분을 지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성적인 표현이 스크린에서 이루어지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그것을 모면해 보려는 영화계의 안간힘 속에서 성적인 표현은 도착적 환영의 영역이 되어갔다. 그 왜곡된 이미지가 스크린에 재현되는 것이 1980년대였고, 그 대표작이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애마부인>은 표면적으로는 강력한 가부장제의 윤리를 역설하면서 이면에서는 욕정을 참지 못하는 여주인공을 통해 외설을 보여주는 모순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남편의 배신과 귀환, 그리고 그에 따른 애마의 일탈과 귀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애마는 남편의 배신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탈하지만, 결국 남편에게 돌아옴으로써 아내로서의 자리를 지킨다. 이 영화에서 애마는 매우 도덕적이고 정숙한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마에 대해 적대적인 시어머니나 시누이와 달리 시아버지(김진규)는 애마를 이해하고 아낀다. 그럼으로써 그는 애마로 하여금 가부장제의 이념에 충실하게 만드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결국 애마는 시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보수적 주제 아래에서 애마가 보여주는 성적 행동은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애마의 성충동을 묘사할 때 주로 쓰이는 것은 클로즈업이다. 이 영화에서는 과도할 정도로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사용되고 있으며, 대부분 그것은 혀가 살짝 드러날 만큼 반쯤 벌어진 입술과 몽롱한 눈을 중심으로 애마의 얼굴에 집중된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이 애마의 몸을 더듬는 듯한 패닝, 그리고 말을 탈 때 말의 둔부와 맞닿는 애마의 둔부와 다리 등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 등이다. 프레임으로 절단된 여성의 육체를 성적 도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1970년대 검열이 보여준 페티시즘적 시선과 유비된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관점, 즉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이 영화에서 애마의 모든 행동에서 성충동을 연상시키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애마는 혼자 자면서도 몸의 선이 드러나는 슬립이나 슬리브리스 네글리제를 걸친다. 심지어 시골 친정에 내려가 밭 매고 똥지게를 지면서도 밤에는 흰색 네글리제를 입는다. 그녀는 침을 맞으면서도 붉은 카펫 위에 엎드려 알몸으로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성충동에 사로잡히고, 아침에 개울에서 세수를 할 때에도 다리를 벌린 채 둔부의 곡선이 한껏 드러나는 포즈로 얼굴과 목선을 쓰다듬는다. 남편을 면회하는 창 앞에서는 손가락을 잔뜩 벌려 침대를 움켜잡듯 하고는 입김을 불어넣으며 “헤어지자는 얘기는 진심이 아니 었져? 당신도 날 사랑하고 있져? ”라고 입술이 닫히지 않는 형태로 서술어미를 발음한다. 그리고 이러한 애마를 보여주는 방식은 엿보기이다. 카메라는 애마의 성욕에 사로잡힌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제시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을 관음하게 만든다. 또한 그녀의 밀실에 잠입하여 사생활을 엿보는 긴장과 쾌감을 준다. 이는 에로티시즘 영화에서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에서는 유난히 애마의 일정한 신체 부위와 성욕이 강조되며 애마는 관객의 성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엿보는 대상으로 최적화 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녀의 옷차림도 그 아래에 언뜻언뜻 비치는 알몸에의 엿보기를 충동한다. 마지막에 그녀가 동엽을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는 그것이 폭발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애마는 성충동에 못 이겨 흰색 네글리제 바람으로 동엽에게 달려가는데, 마침 폭우가 쏟아지고 그녀의 네글리제는 비에 젖고 나뭇가지에 찢어지며 몸을 부분적으로 노출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치마 속을 들여다보는 각도로 그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클로즈업하여 번갈아 보여준다. <애마부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시에 음성적으로 유통되었던 <엠마누엘 Emmanuelle>(쥐스트 재캥, 1974)을 연상시킨다. 유한마담의 설정, 말을 타는 여자, 친구와의 동성애 관계, 여주인공의 상상을 통한 외설적 장면 제시, 몽환적인 영상 처리, 그리고 주인공이 화장대 앞에 앉은 모습으로 끝나는 장면의 유사성 등이 모두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러한 장면을 재현하는 방식은 <엠마누엘>에 비해 훨씬 타자화되어 있으며, 매우 분열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가부장적 윤리에 충실한 현모양처를 표방하면서 이면에서는 타자의 성욕에 의해 대상화되는 것이다. 그 결과 <애마부인>은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창녀의 표상을 지니는 ‘성욕이 강한 도시 주부’를 관객의 성충동을 자극하는 ‘정숙한 창녀’ 6) 캐릭터로 조형한 소프트 포르노그래피가 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맥락이 결여된 도착성과 일견 그것에 어울리지 않는 보수적 주제가 1970년대 검열의 시선과 명분에 유비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애마부인>은 1970년대 검열에서 금지함으로써 오히려 부추겼던 외설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1970년대를 거치며 정향된 음화의 결정판이었다. <애마부인> 검열의 경과 앞서 말했듯이 1970년대 검열의 원칙은 198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했다. 그러니 <애마부인>의 검열과정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우선 1980년대에도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다시 말해 영화사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신고를 해야 했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검열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애마부인>의 검열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시나리오였다. 검열 당국은 대본검토 단계에서 ‘전면 재검토’하라고 제작사에 시정통보를 내린다.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화 제목이 내용과 무관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전개에 있어서 외설, 퇴폐성이 짙어 성도덕이나 가정윤리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로 36개의 장면이 성적 표현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그림 4] 「극영화 <애마부인> 제작신고에 대한 회신」(발신: 문화공보부 장관, 수신: 연방영화(주) 최춘지), 문화공보부, 1981.10.15. 그러자 제작사는 통보받은 지 엿새 만에 다음과 같은 신구대조표를 첨부하여 문제가 된 장면들을 모두 수정하겠다는 각서와 함께 제작신고서를 다시 제출한다. [그림 5] 「극영화 <애마부인> 제작신고」(발신: 연방영화(주) 최춘지, 수신: 문과공보부장관), 연방 제79호, 1981.10.21. [신구대비표] 제작사가 예술성을 내세우며 수정을 거부하지 않고 검열당국의 지적에 따라 순순히 시정하겠다고 한 태도가 좋게 보여서인지, 제작사와 검열 당국 간의 물밑 교섭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검열문서로 확인할 수 없다. 아무튼 제작사의 자진 개작 이후 <애마부인>은 비교적 부드러운 ‘유의사항’을 통보받는 선에서 제작신고가 수리되었다. 유의사항의 내용은 “제명을 변경하고 신체 과도 노출 및 정사 장면을 순화 또는 삭제하는 한편, 외설스러운 작품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예술적으로 승화된 작품을 제작”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제명은 반드시 한자로 표기토록” 하라는 제한사항이 덧붙여져 있다. 이는 ‘애마(愛馬)’가 외설스럽다고 하여 한자 표기를 ‘愛麻’로 수정했으니, 그것을 반드시 표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림 6] 「극영화 <애마부인> 제작신고에 대한 유의사항 통보」(발신: 문화공보부장관, 수신: 연방영화(주) 최춘지), 문화공보부 예일 1724-19796, 1981.11.7. 이에 제작사에서는 ‘제명 변경 신청’을 하여 승인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제목과 내용이 부합해야 한다는 검열 당국에 명령에 맞추어 주인공의 이름은 ‘오수비’에서 ‘이애마’로 바뀌었다. [그림 7] 「극영화 제명 변경 승인」, 문화공보부 1724-20627, 1981.11.27. <애마부인>이 시나리오 검열 과정을 통과하여 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글래머 안소영 전라(全裸) 출연 영화”로 화제가 되었고, 필름 검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 영화의 전례 없는 과감한 노출은 신군부 정권의 검열 수위를 가늠해보는 층샛돌이 된 셈이었다. 우리나라 여배우중 가장 가슴이 크고 육감적이라는 안소영이 주연이며 탤런트 임동진이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고 하명중, 하재영도 공연하고 있어 캐스트로도 중량급이다. 네거티브 몽타주 수법 등 특수촬영기법(이석기)을 도입, ‘상당히 끈적끈적한 화면’으로 평가된 이 영화는 아직 검열 전이어서 엄격한 이 과정에서 얼마만한 관용(?)을 얻을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7) 그런데 <애마부인>은 필름 검열 단계를 큰 제재 없이 통과한다. 예고편은 말 위의 다리 노출 장면과 말 위의 애마 모습이 나오는 화면 2개 처만 삭제하는 조건으로, 본편은 “신체 과도 노출 및 정사장면 3개 처”만 단축하는 조건으로, ‘연소자관람불가’ 등급을 받으며 검열에 합격한 것이다. 이에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안소영을 알몸으로 말에 태워 달리게 한 장면”이나 “환상적인 남자와의 관계를 마라톤 달리기 식으로 처리한 대담한 장면” 8) 은 완전히 삭제되지는 않은 채 연(軟)초점화나 단축된 형태로 공개될 수 있었다. [그림 8] 「<애마부인> 영화예고편 검열 합격증」, 문화공보부 제6053C1-123호, 1982.1.16. [그림 9] 「영화검열 합격증」, 문화공보부 6060C1-6호, 1982.1.28. <애마부인>은 개봉하자마자 “TV, 영화에서의 여성해방 기류” 9) 를 상징하고, “탈선한 유부녀를 긍정적 시각으로 묘사한” 10) 파격적인 영화로 소개되며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11) 게다가 통금이 해제되고 심야극장이 운영되면서 심야영화관의 ‘미드나잇스페셜’ 첫 프로로 선정되었다. 12) <애마부인>으로 촉발된 “관능영상(官能映像)의 세찬 바람!!” 13) 은 ‘성인용 에로물 제작붐’으로 이어진다. 14) <애마부인>을 통해 증명된 검열의 완화가 불황에 허덕이던 한국영화 시장에 불을 지핀 셈이었다. 같은 해에 개봉한 <반노>는 제작신고서에 아예 ‘완전성인영화’로 분류되어 검열을 통과하기도 했다. 마침 비디오영화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이후 이러한 흐름은 ‘-부인 시리즈’로 이어지며 홈비디오 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게 된다. 1980년대 검열의 원칙은 1970년대에서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이제 검열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매체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고, 행정적 검열보다 강력한 자본의 검열이 그 힘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1. 이 글은 박유희, 「검열이라는 포르노그래피」,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역사 속 검열제도』, 한국영상자료원, 2016.12, 190-201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에로(티시즘) 영화’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되는 것도 1969년경부터 주로 섹스영화의 미학을 논급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1981년으로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 대해 “원시적인 자연세계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욕정을 그린 농도 짙은 에로티시즘 영화”(「<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동아일보』, 1981.3.16.12면.)라고 부르면서부터이다. 그리고 1982년에 <애마부인>이 나오면서 급격하게 사용 빈도수가 높아졌다. <애마부인> 이후 ‘에로영화’는 한동안 19금 섹스영화를 가리키는 장르 명칭으로 받아들여진다. 3. “로마時代 섹스 映畫 英 검열통과로 말썽”, 《동아일보》, 1980.09.27.3면. 4. “希 映畫 검열 폐지”, 《경향신문》, 1981.10.31.4면. 5. 《동아일보》, 1982.06.22.12면; 《동아일보》, 1982.12.15.12면. 6. 캐스린 노버그는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을 크게 정숙한 창녀, 희생자적 창녀, 자유사상의 창녀로 분류한다. 캐스린 노버그, 「자유사상의 창녀: 마르고에서 쥘리에트까지 프랑스 포르노그라피 속의 매춘」, 린 헌트 편, 조한욱 옮김,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외설성과 현대성의 기원 1500~1800』, 상지사, 1996, 275-308쪽 참조. 7. “글래머 안소영 全裸 출연 영화 <애마부인> 檢閱과정”, 《경향신문》, 1982.01.16.12면. 8. “글래머 안소영 全裸 출연 영화 <애마부인> 檢閱과정”, 《경향신문》, 1982.01.16.12면; “안소영 육감적 演技 자랑/ 첫 主演 ‘愛馬부인’이 ‘愛麻부인’으로/ 풍만한 가슴에 정사신 대담/ 半裸로 안장 없는 말 타기도”, 《동아일보》, 1982.02.04.12면; “지금 애마부인이 몸 전체로 숨가쁘게 달려온다”, 《동아일보》, 1982.02.01.7면. 9. 《동아일보》, 1982.01.16.11면. 10. 《동아일보》, 1982.01.16.11면. 11. “1회부터 전회매진열풍”, 《매일경제》, 1982.02.24.14면. 12. “심야에도 영화 상영한다”, 《매일경제》, 1982.03.19.9면; “영화가 심야극장 첫선 <애마부인> 자정관객 만원”, 《동아일보》, 1982.03.29.12면. 13. 《동아일보》, 1982.02.04.6면. 14. “성인용 에로물 제작붐”, 《동아일보》, 1982.02.04.12면; “벗기는 映畫가 主流/ 下半期 邦畫 製作 30篇”, 《동아일보》, 1982.09.06.10면.
올해 4월 12일, 한때 오시마 나기사의 진정한 라이벌 가운데 하나였고 일본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기도 한 마츠모토 토시오(松本俊夫)가 세상을 떠났다. <장미의 행렬 薔薇の葬列>(1969)과 <수라 修羅>(1971)와 같은 마츠모토의 장편극영화는 국내의 시네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영화와 혁명 특별전’(2005.7.27~8.15), 한중일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신시각(新視角)의 서울 전시행사로 2009년에 열린 ‘LINK!! 미디어아트전’(2009.9.4~9.13), 그리고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플랫폼 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2010.11.3~11.19) 등을 통해 그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업이 꾸준히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오시마의 『전후영화: 파괴와 창조』와 같은 해(1963년)에 출간되어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던 1960년대 일본의 젊은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알려진 마츠모토의 평론집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도 2004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경력 초기의 그가 영화와 관련해 쓴 주요한 글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는 『영상의 발견』이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츠모토 토시오의 영상작업(특히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이 그가 개진한 이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경우, 사카모토 히로후미가 편집 책임을 맡은 총 네 권짜리 마츠모토 토시오 저작집 출간이 2016년 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까지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마츠모토가 쓴 글들을 모은 제1권만이 나와 있다.) 이론적 맥락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없이 마츠모토의 영상작업을 보는 일이 무의미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서만 새로운 영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영상작가 - 마츠모토는 자신을 ‘에이조사카’(映像作家)라 칭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다. - 로 규정하게 된 것은 왜인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거리 혹은 ‘괴리’가 있다. 그런데 그의 영상작업과 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리 혹은 ‘괴리’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리 혹은 ‘괴리’는 작가로서의 그가 개인적 능력의 부족이나 한계로 인해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영상의 근본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린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 표지 간략하게나마 『영상의 발견』에서 개진되고 있는 마츠모토의 영화론을 살펴보자. 그에게 있어서 영상의 근본문제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는 모든 것의 총합으로서 하나의 사물”(「네오다큐멘터리즘이란 무엇인가」)이 된 영상, 바꿔 말하면 ‘사물로서의 영상’을 출현시키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물’ 혹은 ‘모노’(もの)란 과연 무엇인가? 영어로는 통상 ‘thing’으로 번역되곤 하는 이 개념은 『영상의 발견』에 수록된 마츠모토의 글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물이란 본디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활동을 통해 그리고 오직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실재(reality)라고 할 수 있다. 마츠모토 자신은 이처럼 집요한 응시를 눈을 감는다고 해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사물과 맞닥뜨리게 하는 ‘잔혹을 응시하는 눈’(残酷を見つめる眼)에 빗대고 있다(「잔혹을 응시하는 눈: 예술적 부정(否定)에 있어서 주체의 위치에 관하여」). 일견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다 보면 대상들이 낯설게 보이고 사물이 출현하는 순간이 ‘우연히’ 발생하기도 하는데, 카메라가 이러한 순간과 대면할 때 생성되는 것이 영상이고 다큐멘터리의 이념은 이러한 영상을 부단히 발견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마츠모토의 영상 개념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mechanically produced image’, ‘projected image’ 혹은 ‘video’ 같은 영어식 표현으로는 그 뜻이 대단히 불충분하게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견해는 마츠모토만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2차 대전 이후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하나다 기요테루의 저서 『아방가르드 예술』(1954), 러시아 형식주의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개념,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고, 그리고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운동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다큐멘터리 방법론과 결합된 것임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 마츠모토 스스로도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의 다음과 같은 글을 위에서 약술한 마츠모토의 사물론과 비교해 보라. “나는 어떤 장소들, 어떤 광경들이 내게 행사하는 커다란 힘을 느꼈는데 이 매혹의 원리는 알지 못한 채로 그러했다. 내게 있어 일상의 몇몇 대상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수수께끼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고, 나를 그러한 수수께끼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어떻게 그리되는지(méthode)는 모르지만 어떻게 하는지(pratique)는 알고 있었던 이 도취상태를 사랑했다. [……] 내가 그것을 보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대상은 변형되었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 외양을 띠는 것도 아니었고 상징적 특성을 띠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을 표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관념 자체였다.”(루이 아라공, 『파리의 농부』) 아라공이 자신만의 보기의 방식을 통해 대면한 ‘관념 자체’라는 것이 마츠모토의 사물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상 언어의 용법에서 사물과 관념이 종종 대립되는 의미를 띤다는 점에 집착하지 않고, 이러한 용어가 아라공과 마츠모토 각각의 글의 문맥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마츠모토가 루이스 부뉴엘의 < 안달루시아의 개 >(1929)나 제르맹 뒬락의 <조개와 성직자>(1928) 같은 영화들은 물론이고 초현실주의 운동 자체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종종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긴장보다는 내부세계 자체에 비합리적으로 몰두(혹은 도취)한다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바꿔 말하자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천에 내재한 응시의 방법론은 충분하다 여겨질 정도로까지는 잔혹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부세계란 인간의 무의식에서부터 비가시적인 사회구조까지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라고 이해해도 좋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가시적 내부세계에 대한 마츠모토의 관심은 1960년대에는 전자로부터 후자로 이행해 가는 경향을 보였고, 멀티프로젝션 방식을 실험한 확장영화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つぶれかかった右眼のために >(1968)와 그의 장편 데뷔작 <장미의 행렬>은 후자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에 제작된 작품이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프레임들 마츠모토는 ‘사물과의 대결’(ものとの対決)이란 “응시하는 사람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비합리를 그 외부의 비합리와 깊이 관련짓는 것”(「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이라고 보았지만, 내부와 외부를 관련짓는 노력 자체는 그 둘의 긴장에 항상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합리적 주체의 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관련시키려고 하는 엄격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전위기록영화론」)이었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것이나 이러한 구분에 바탕을 두고 다큐멘터리의 의의를 찾으려 하는 것은 하나다 기요테루의 논변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적되곤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기 전인 1957년, 마츠모토는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하니 스스무 등 (조만간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기운을 몰고 올) 젊은 영화인들이 멤버로 있던 스터디 그룹 ‘영화와 비평 모임’(映画と批評の会)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그룹에서 발간한 잡지 『영화비평』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이 모임은 하나다가 만든 ‘밤의 모임’(夜の会)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고 한다. 하나다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마츠모토의 그것과 비교하며 음미해 보자. “새삼스레 밝힐 필요도 없이, 내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은 외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외부세계의 사물 자체와 대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내부세계의 무의식적인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하나다 기요테루, 「기계와 장미」) “감춰진 세계라는 것을 단순히 마음 내부의 문제에 한정된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일면적이며 차라리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부의 감춰진 왜곡이란 최종적으로는 모두 외부의 감춰진 왜곡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을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론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라는 것은 외부의 연장이며 그 둘 사이를 절대적으로 구별 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마츠모토 토시오, 「감춰진 세계의 기록: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상상력의 문제」) 겨냥하는 것은 부조리한 ‘감춰진 세계’(隠された世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시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통해 의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큐멘터리란 이러한 가시성에 천착하는 ‘장르’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마츠모토의 눈에 종래의 다큐멘터리는 내부세계와의 관련을 상실한 채 소박하게 외부세계에 밀착하는 ‘자연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처럼 비쳤다. 그리하여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지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다큐멘터리를 지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이 알랭 레네의 단편 <게르니카>(1950)이다. 표면적으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피카소의 그림 전체를 한눈에 보여주는 일 없이 그림 자체를 파편화하고 낯설게 보이게 함으로써 오히려 레네가 본 어떤 ‘비전’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에 마츠모토는 깊이 매혹되었다. 피카소가 회화적 평면의 합리성을 의식적으로 해체해 버리는 작업을 통해 전쟁이라는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회화를 출현시켰다면, 레네는 어떤 정합적인 영화적 공간도 구성하지 못하는 몽타주를 용의주도하게 구사함으로써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환기되는 세계의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영화를 출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레네의 영화에서 마츠모토는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를 이중적으로 지양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즉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쓰인 글이 1958년 5월 『기록영화』지에 발표된 「전위기록영화의 방법에 대하여」이다. 오시마 나기사가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토로한 바도 있는 이 글은 ‘전위기록영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영상의 발견』에 수록되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 히로시마 내 사랑 >(1959)이 나오기도 전에 이 영화의 방법론을 예견하는 듯한 어조로 알랭 레네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있는 ‘비평가’ 마츠모토의 혜안에 놀라게 된다.) 잔혹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에 대한 강조는 이미 이 글에서 분명히 표명되고 있는데, 가령 레네는 “사드의 눈으로 상황을 응시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든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애매한 인간성 따위를 한번 철저히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러하다.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방법론을 레네의 선례를 따라 충실히 적용해 본 사례 가운데 하나는 TBS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만든 단편 <돌의 노래 石の詩>(1963)이다. 이 영화는 어니스트 사토가 찍은 사진들을 부분적으로 재촬영한 이미지들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을 가장 래디컬하게 밀고 나간 것은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에서다. 이것은 1968년 4월, 소게츠아트센터(草月ア―トセンタ―)에서 ‘무언가 말해줘, 지금, 찾고 있어’(なにかいってくれ、いま、さがす)라는 표어 아래 5일간 열린 ‘EXPOSE 1968’ 행사에서 첫 공개된, 3대의 16mm 영사기를 사용한 멀티프로젝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공개되기 불과 두 달 전 벌어진 김희로 사건 - 재일한국인 김희로가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자신을 모욕한 야쿠자들을 살해하고 이후 스마타쿄의 후지미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삼은 뒤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며 경찰과 대치한 사건으로 김영빈 감독이 < 김의 전쟁 >(1992)으로 영화화한 바 있다 - 에 관한 텔레비전 뉴스화면과 보도사진을 비롯해 신주쿠역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예술가들과 구경꾼들의 모습, 당대의 게이 문화를 담은 사이키델릭한 영상, 거리에서의 데모 광경, 오토바이 및 자동차 경주를 촬영한 기록영상, 각종 광고영상과 사진과 포스터, ‘준비!’(用意)나 ‘스타트!’(スタ―ト) 같은 문자들과 화살표나 물음표 같은 기호들이 언뜻 보기엔 두서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를 보면 멀티프로젝션에 사용된 3벌의 프린트 각각이 대단히 꼼꼼한 계획에 따라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그래프콘티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는 후루하타 유리코 같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듯 1960년대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던 당대의 ‘액추얼리티’(アクチュアリティ―)를 포착하는 데는 분명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당대 일본 사회를 감싸고 있던 저널리즘적 기호들이 한꺼번에 끓어 넘치는 용광로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떠오르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액추얼리티란 것이 과연 영상의 사물성과 곧바로 등치 될 수 있는 것일까?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힘이란 어쩌면 마츠모토가 그토록 강조했던 응시의 잔혹함과 집요함을 보기의 현장감과 기민함으로 대체함으로써 얻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일상성과 응시」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 대해 숙고하면서 이 영화들에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가 목격하는 시선에 의해 결합”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전화의 저편 > 같은 영화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목격하는 시선 [……] 응시하는 것 자체가 영상화”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영상 그 자체에 의해 대상이 주체화되고 또한 주체가 객체화되는 과정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사물을 통해 결합시킨다는 「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의 논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츠모토에게 있어서 영상, 응시, 사물이라는 개념이 종종 상호교환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을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와 관련해 생각해보자. 대상들(당대 일본과 관련된 시청각적 기호들)이 주체화되는 것은 영상 그 자체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시선 없이 객체화된 주체의 의식, 즉 구성(그래프콘티)을 통해서이고, 게다가 대상들은 주체화되기 무섭게 영상의 액추얼리티가 선사하는 사이키델릭한 산만함 속에서 다시 객체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마츠모토는 사회의 비가시적 구조를 사물-영상으로서 드러내기를 겨냥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구조로부터 파생된 다종다양한 가시적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끌어들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구조는 더욱 수수께끼 같은 것이 되고, 몇몇 현저한 현상들에만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가 신랄하게 비판한 종래의 다큐멘터리의 소재주의나 자연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대중사회 상황에 있어서 일상성(이라는 사물) 자체와 대결하는 일은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응시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낸다고 하는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함도 깨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성 그 자체는 여전히 두루뭉술한 채로 일견 포착할 곳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아다치 마사오의 <약칭: 연쇄살인마 略称: 連続射殺魔>(1969) - 1968년에 서로 다른 도시에서 네 명을 살해한 18세의 연쇄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가 여행 과정에서 보았음직 한 일련의 풍경들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1975년에 이르러서야 개봉되었다 - 에 ‘풍경론’이라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이들을 사로잡은 고민도 마츠모토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 터다. 마츠모토가 새로운 리얼리즘의 과제로 제시한 다음과 같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눈에 보이는 것밖에 비추지 못하는 카메라로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일상성과 응시」) ※ 마츠모토 토시오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품들은 우부웹(www.ubu.com/film/matsumoto.html)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마츠모토는 <장미의 행렬>과 <수라> 이후에 <16세의 전쟁 十六歳の戦争>(1973)과 <도구라 마구라 ドグラ マグラ>(1988) 두 편의 장편극영화를 더 연출하기도 했다. 마츠모토의 영상론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싶다면 영문으로 된 문헌들 가운데서는 후루하타 유리코의 『Cinema of Actuality: Japanese Avant-Garde Filmmaking in the Season of Image Politics』(2013)의 1장과 2장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마츠모토의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유양근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2004)와 더불어, 이 글을 쓰면서 주로 참고했던 것도 이 책이다. 후루하타의 박사논문 「Refiguring Actuality: Japan’s Film Theory and Avant-Garde Documentary Movement」(2009), 그리고 2002년 여름호 『Positions』지에 게재된 아베 마크 논스(Abé Mark Nornes)의 「The Postwar Documentary Trace: Groping in the Dark」도 유용하다. 본문에서 인용한 하나다 기요테루의 「기계와 장미」는 사카모토 히로후미의 박사논문 「전위기록영화론의 전후적 의미: 1970년까지의 마츠모토 토시오의 여러 활동을 바탕으로 前衛記 録映 画論の戦後的意味: 1970年までの松本俊夫諸活動をもとに」(2017)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이 논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사이트(dl.ndl.go.jp/info:ndljp/pid/10357205)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이 논문에는 부록으로 마츠모토의 <안보조약 安保条約>(1959), <니시진 西陣>(1961), <돌의 노래>의 구성표와 내레이션이 수록되어 있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 제작을 위해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의 사진 또한 이 논문에 부록으로 실린 것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