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비밀
- 감독
- 백호빈
- 제작년도
- 1963
- 출연
- 남궁원, 김승호, 최은희, 한미나, 이수련, 허장강, 한은진, 배옥전, 정득순, 장훈, 최걸, 송일근, 이기홍, 장성희
① 황금관 1913년 1월 1일 개관한 황금관은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가 세웠다. 위치는 지금의 을지로 4가인 황금정 4정목에 있었는데 루나파크(Luna Park)인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활동사진관으로 시작되었다. 설립 초기 황금관은 필름 수급의 어려움과 운영상의 미숙으로 고전하였으나 대정관 매점을 운영하던 하야카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가 운영을 맡게 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하야카와는 대정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영화를 상영했음에도 조선 내 일본인 관객들에게 가장 큰 인기가 있던 변사 유모토 교하(湯本狂波)와 여자 변사 아시자와 하쓰에(蘆澤初江) 등을 고용하여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황금관은 하야카와의 이름을 딴 하야카와연예부(早川演藝部)를 통해 운영되었다. 1914년 하야카와연예부는 텐카츠(天活, 천연색활동사진회사의 약칭)의 선만대리점으로 텐카츠에서 수입, 제작한 2색 칼라영화인 키네마칼라를 본격적으로 상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의 우미관을 비롯해 인천의 표관, 평양의 평안극장 등 지방의 영화관에 필름을 공급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필름 값이 폭등하게 되자 일반 영화보다 필름을 두 배 더 사용하는 키네마칼라 필름을 대신하여 활동사진의 일부를 변사들의 실연으로 보여주는 연쇄활동사진을 도입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야카와연예부의 영향력은 당시 조선의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대정관의 닛다연예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황금관은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위해 만들어진 연예관(演藝館)을 사들여 기존 건물 옆에 옮겨지은 후 1916년 6월 10일 새로운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황금관은 1917년 황금관 소유자인 다무라와 하야카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유락관으로 그 본거지를 옮긴 하야카와연예부를 대신하여 낭화관의 운영자 니시다 가조(西田嘉三)를 급하게 운영자로 섭외한다. 하지만 니시다는 영화관 운영 경험이 없었기에 영화관이 운영될 수 있게 틀만 잡아 두고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에게 운영권을 넘기게 된다. 아라키가 운영하던 시기 황금관의 가장 큰 성과는 극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1919년 2월 21일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가부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가 바로 황금관에서 제작한 극영화이다. 이 영화는 경성일보사 기자의 지도하에 제작되었으며, 각본은 황금관 운영자인 아라키가 썼다. 이 영화는 조선거주 일본인들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로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재조선 일본인들의 삶을 소재로 삼았기에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황금관이 인수한 조선물산공진회 연예관 1919년 텐카츠가 해산되어 국제활영주식회사(國際活映株式會社, 곳카쓰[國活])로 바뀌면서 황금관에서는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했으나 고전하게 된다. 1921년 말, 황금관은 유니버설 영화만을 상영하는 서양영화 전용관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전환하는데 앞장선 이가 새롭게 황금관을 운영하게 된 황금관 전무인 변사 난고 기미토시(南鄕公利)였다. 그는 서양영화의 설명에 능한 인물로 한때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운영되던 유락관에서 근무하다가 황금관으로 옮겨온 바 있다. 황금관은 1922년 9월 다이카츠 쇼치쿠와 계약을 맺고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되다가 1924년 1월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조선 봉절장으로 있었다. 1925년 9월부터 다시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1926년 2월에 하야카와 마쓰타로가 조선에서의 활동을 접으면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도아키네마, 제국키네마 등이 직영하게 된다. ②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8년 4월에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외화 수입업자로 활동하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德永熊一郞)가 황금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직속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는데 도아키네마 영화뿐 아니라 다른 중소회사의 영화들도 상영했다. 동아구락부의 운영자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규슈 출신으로 1920년대 초반 대구로 건너와 흥행업에 뛰어 든 이후 1920년대 중반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외국영화 수입회사인 덕영상회(德永商會)를 설립하고 고베의 동서영화주식회사(東西映畵株式會社)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워너브러더스와 FBO영화사의 영화를 수입 배급했다. 덕영상회에서는 외화 수입 외에 도아키네마를 비롯해 중소 규모 영화회사의 필름을 상영했고 덕영프로덕션을 통해 영화제작도 했다. 덕영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영화로는 토성회와 함께 제작한 이규설 연출, 복혜숙 주연의 <홍련비련>과 <순정은 신과 같다>와 같은 관청 납품용 교육(문화)영화들이 있다. 동아구락부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인기 있는 작품들이 아니어서 저렴한 입장료를 매기는 대신 자주 프로그램을 바꾸면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동아구락부는 일본인 상설관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던 극장이었다. 1930년부터 조선에서 토키영화가 본격 상영되기 시작하자 닙튼 영사기를 구비하여 토키영화를 상영하였다. [사진] 1936년 신축되어 1999년 사라진 국도극장(1961년 경, 출처: 국가기록원) ③ 쇼치쿠좌(松竹座) 1934년 3월 말로 계약이 끝나는 쇼치쿠 영화에 대한 대정관의 독점권을 두고 서울의 극장들이 쇼치쿠 개봉관이 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주도권을 쥔 것이 동아구락부였다. 동아구락부에서는 쇼치쿠 개봉관의 지위를 얻게 되자 이를 기회로 극장 이름도 동아구락부에서 쇼치쿠좌(松竹座)로 바꾸었다. 1934년 7월 13일이었다. 쇼치쿠좌는 정원이 1,033명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극장으로 보통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시설이 낙후하여 1935년 6월 토키영화관으로 신축이 결정된다. ④ 황금좌(黃金座) 쇼치쿠좌와 그 뒤 과거 광무대가 있었던 곳을 합하여 총 600평의 부지에 건설비 30만원에 무대장치 완비하여 건설되었다. 개관 당시 쇼치쿠의 흥행권이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마키노영화를 상영하게 되자 극장 이름을 쇼치쿠좌에서 황금좌로 바꾸었다. 개관일은 1936년 11월 15일이었고 정원은 1,136석이었다. 도쿠나가가 운영하던 황금좌는 1937년 12월 도와(東和)상사 조선지사의 고인문(高仁文)으로 운영자가 바뀌게 된다. 파라마운트를 비롯해 각종 외화를 수입하는 도와상사가 황금좌를 운영하게 되면서 황금좌는 서양영화를 비롯해 조선영화의 상영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최남주의 조선영화사는 공식적으로 황금좌를 자사의 봉절관으로 정하게 된다. 당시 외국영화와 일본영화를 함께 상영하도록 했기에 도와상사가 운영하던 황금좌에서는 닛카쓰 영화를 상영하며 닛카쓰 개봉관이 된다. 전통적으로 닛카쓰영화를 개봉하던 희락관은 2번관으로 바뀌게 된다. ⑤ 경성보총극장(京城寶塚劇場)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수입제재가 장기화되면서 도와상사의 고인문은 황금좌 운영에서 손을 뗀다. 황금좌 소유자 다무라 미네(다무라 기지로의 미망인)는 황금좌의 운영권을 회수하여 요시모토 흥업과 보총극장이 제휴한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에 넘긴다. 황금좌는 1940년 5월 1일부터 이름을 경성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은 극장 운영을 위해 자본금 85만원의 주식회사를 성립하게 된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의 진용은 사장 하타 도요키치(秦豊吉, 동보), 전무 하야시 히로타카(林弘高, 요시모토), 취체역 나와 미쓰마사(那波光正, 동보), 하야사 쇼노스케(林正之助, 요시모토), 감사역 온다 다케이치(恩田武一, 요시모토), 마나베 야치요(眞鍋八千代, 동보측)이었으며 실무는 지배인 우메미야 사부로(梅宮三郞)가 맡았다. 1940년대 경성보총극장은 성보극장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이 영화관은 조선영화의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는데 <집 없는 천사>(1941), <복지만리>(1941), <창공>(돌쇠의 개제)(1941), <그대와 나>(1941), <신개지>(1941) 등이 경성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연예를 통한 선전활동이 강화되면서 1942년 9월 20일 경성보총극장 직속의 성보연예부가 신설된다. 연예보국의 영역을 확장키 위해 만들어진 성보연예부에서는 동보연예배급사 요시모토흥예배급부(吉本興藝配給部)의 지원과 만주연예협회와의 연락을 통해 내지 연극연예단을 조선에 소개하고 조선의 연극연예의 배급과 흥행을 맡았으며 그 산하에 성보이동연예봉사대를 조직하여 각종 위문연예를 제공했다. 경성보총극장은 1943년 7월 30일 조선흥행연합회에서 1급에서 11급까지 등급을 나누었을 때 서울의 영화관 중 명치좌와 약초극장과 더불어 1급관으로 80전의 입장료를 받을 수 있었던 대표적인 영화관이었다. 해방 직전 화재로 인해 문을 닫은 성보영화극장은 해방 이후 내부를 수리하며 재개관하게 되는데 이때 이름을 국도극장(國都劇場)으로 바꾸었다. 국도극장은 1999년까지 운영되었다가 폐관하였다. 현재 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황금유원 설립자 다무라 기지로(『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경성일보≫,1919.02.21. 淚の家 全五卷 當館封切 黃金館 京城日報記者指導 黃金館主 荒木大助 脚色 釜山出征軍人 中淵仙太郞氏の家族 ▲夫の出征後妻は貧0の身に又一兒を産み産後の患ひより遂に歸らぬ旅0 の人となる、頑是なき七人の子は飢に泣き水よ飯よと取0る0他の見ろ 目 0實に哀れ悲慘の淚なり ●六人の子は飢に泣き妻は臨月の腹を抱つて病床に臥す出征軍人の大 悲慘なる家族、 噫々薄命なる勇士 ●0の難を見て惻隱の情を勤かすは仁の端と云ふ大方の士御觀覽の上一 掬御同情あらん事を43)(0은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경성일보≫, 1919.02.23. 初日 二日 滿員 黃金館 荒木大助 脚色 事實悲劇 淚の家 ▣ 當館特別撮影 大阪樂天地に京都京座に名古屋新守座に於て連日大盛況の本0は劇以上 に出色せしめたる實に現在釜山にある大悲慘事 此哀れなる寫眞を見られて誰れか泣かれぬ方ありや 本日 晝夜 開演 黃金館45)(0는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연기관의 대소요, 연극 즁에 큰 소동, 일반 연극의 주의" 《매일신보》, 1913.2.22. 십구일 오후 십시에, 남부 산림동(山林洞) 황금유원 안 연기관에셔, 한 소요 일이 잇셧 , 연기관에 , 혁신단 림셩구(林聖九) 일 이, 신파연극을 흥 즁, 그 시각에, 그곳에셔 고용 , 광도현인 포 신조(廣島縣人 蒲生信造) 삼십륙셰된 쟈가, 왼편 손에 연극에 쓰 , 폭발약을 만히 쥐고 셧다가, 그릇 불이 이러나, 굉쟝 형셰로, 젼부가, 폭발되얏슴으로 그 근쳐에 잇던, 흔 고용인, 즁셔, 쇼숑, 쇼뎐(中西, 小松, 小田) 등, 삼인도 즁샹을 입어, 젼귀 명을, 즉시 그 부근 지샹의원(池上醫院)으로, 메여다가 치료 즁인 , 그 즁 포 은, 왼편 손이, 젼부가 파괴되얏슴으로, 지샹씨의 집도로, 대슈슐을 시작 야, 팔을 버혓 , 지금 형샹으로 , 명에 , 관계가 없슬 듯 나, 눈망울과 기타 크게, 화샹 곳이 만아, 보기에 우 참혹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8.07.05. 日本天然色活動寫眞株式會社 技術部 新案 米國式 스데-지 기네오라마 應用 事實劇 船長의 妻 黃金館은 新築二週年 記念 特別 大大興行으로 右 天活會社 技術部員 拾數名을 招 야 七月五日부터 公開 다 歐洲戰亂以來 敵 潜航艇으로 因 야 商船의 遭難이 不... 바 昨年 我 日本最初의 武裝船 ○○會社 ○○丸도 其 慘禍에 罹 얏더라 今回 黃金館은 其 巨大 舞臺 一面에 前記 天活會社 獨得의 「스데-지 기네오라마」를 應用 고 電氣仕掛로써 當時의 實況을 看客 諸君에 示코져 今 基 光景을 略述 지면 英國 包台 不飽히 探照燈을 照 야 獨히 潜航艇 並 飛行機의 襲來를 監視 月은 皎皎 야 海 照 고 金波 銀波 靜動中에 我 ○○丸은 警戒 中 航行 天候 俄然히 變 야 數千의 星은 急히 其 光을 沒 야 一天은 忽然 暗黑 敵艇 及 飛行機 其 機를 乘 야 「 버」海峽에 馳來 야 我 ○○丸을 發見 고 .....水雷를 發射 고 又 爆彈을 投下 ○○丸 其 ....의 活躍인 實로 慘劇 其 物을 目擊 에 不異 고 誰何든지 科學의 進步 光學 應用의 巧妙 에 驚치 안이치 못 이라 「스데-지, 기네오라마」에 就 야 內地에 旣히 定評이 有 고 今 玆에 ....言을 不要 고 黃金館은 鮮人 各位의 觀覽에 供 기 爲 야 特히 此 一團을 招聘 얏더라 米國 단호자會社 作 連續 二十三編 四十六卷 連續 大活劇 百萬弗의 秘密 第一 第二篇 上場 臨時觀覽料 特等 七十錢 一等 五十錢 二等 三十錢 軍人學生各等半額 黃金館.
대정관은 1912년 11월 7일 앵정정(櫻井町)에 설립되어 1935년 12월 16일까지 존속한 대표적인 일본인 전용 영화관이었다. 대정관의 설립자는, 고급 여관 천진루(天眞樓)의 주인 닛다 마타베(新田又兵衛)의 셋째 아들인 닛다 고이치(新田耕市)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에 있던 천진루를 남산에 옮겨 지었을 정도로 이토와 막역한 관계였던 닛다 마타베는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으로 이주하여 활동했다. 장남 닛다 신기치(新田新吉)는 천진루를 이어받았고, 차남 닛다 슈키치(新田秀吉)는 닛다 고이치와 함께 대정관을 운영했으며, 막내 닛다 마타헤이(新田又平)는 인천에서 표관(瓢館)이라는 영화관을 운영했다. [자료] 닛다 고이치의 가족 사진(《조선공론(朝鮮公論)》, 제4권 3호, 1916년 3월) 1882년 태어난 닛다 고이치는 1899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미쓰이(三井)물산에 입사하여 사업 수완을 배운 후,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던 1910년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건너 왔다. 조선에 와서는 가족과 지인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개발 예정지였던 앵정정 일대 5천평 정도의 땅을 매집했다. 자금은 동경건물회사(東京建物會社)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아 변통했는데, 그 땅을 관통하여 지금의 을지로가 뚫리게 되면서 짧은 기간에 큰 시세 차익을 얻었다.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고도 2만원의 현금을 손에 쥔 닛다는 1만 2천원의 예산으로 활동사진관 건립을 추진한다. 영화관 건축이 완성될 무렵, 메이지(明治)시대가 끝나고 다이쇼(大正)시대가 시작되자 닛다는 애초 생각해둔 유락관(遊樂館)이라는 이름 대신 대정관이라는 이름으로 1912년 11월 7일 극장 문을 연다. 대정관은 경성의 영화 흥행을 주도하던 경성고등연예관과 차별화한다는 의미에서 극장 광고에 “아사쿠사식(淺草式)”이란 용어를 적극 활용했다. 태국에서 온 일본인들이 세운 경성고등연예관의 흥행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여, 월 2회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던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자주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또한 입장료를 특등 50전, 1등 30전, 2등 20전, 3등 10으로 책정하여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관객들을 유치했다. 나아가 위생 설비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의 설치, 난로와 선풍기의 구비, 양장(洋裝)의 여성 안내원 배치 등을 통해 편리함과 청결함을 강조함으로써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대정관과 경성고등연예관은 관객 구성 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경성고등연예관은 대정관이 개관하기 전인 1912년까지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를 함께 두어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들을 함께 받았다. 반면 대정관은 일본인 변사만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일본인 관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 되었다.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관을 운영하다 보니 대정관의 프로그램은 일본의 구파, 신파 영화가 중심이었다. 일본영화 필름을 공급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대정관은 닛카쓰(日活)와 대리점 계약을 맺는데, 일본의 4대 메이저 영화회사인 요시자와상점(吉澤商店), 요코다상회(橫田商會), M파테, 후쿠호도(福寶堂)가 통합하여 1912년 설립된 닛카쓰는 당시 일본 영화 산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사진] 대정관 개관 사진(오카 료스케(岡良助),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 도쿄: 하쿠분샤(博文社), 1915년.) 닛다 고이치는 극장 운영과 흥행업을 체계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닛다연예부(新田演藝部)를 세워 운영했다. 1914년 1월 닛다연예부의 영업주임은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 지방부장은 스즈키 도라타로(鈴木虎太郞)였다. 닛다연예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대정관을 중심으로 전국의 영화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필름 유통망을 조직하는 것이었는데, 닛다연예부는 우선 계약을 통해 지방 영화관과 관계를 맺었다. 1913년에는 경쟁 영화관이던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입하여 제2대정관으로 삼았으며, 닛카쓰와의 계약 이래 ‘닛카쓰 만선지방부(滿鮮地方部)’로 운영되던 1916년에는 인천의 표관을 직영했다. 나아가 경성의 우미관(優美館), 평양의 앵좌(櫻座), 원산의 수관(壽館), 부산의 보래관(寶來館), 대구의 금좌(錦座)를 특약관으로 두고 영화배급망을 구축했다. ‘닛카쓰 조선총대리점’으로 운영되던 1917년 1월 당시 닛다연예부가 관리하던 극장으로는 경성의 대정관(감독원: 노무라 신(野村新)), 인천 표관(감독원: 스즈키 도라타로), 부산 상생관(相生館, 감독원: 미요시 마타로(三好又郞)), 용산 용광관(龍光館, 감독원: 다카하시 류타로(高橋立太郞)), 대구 칠성관(七星館, 감독원: 기리야 도쿠노스케(桐谷德之助)), 평양 가무기좌(歌舞伎座, 감독원: 요시즈미 신고(吉住新吾)), 원산 가무기좌(감독원: 히가시우라 도쿠마루(東浦得圓))이 있었다. 1920년 1월에는 경성의 대정관, 인천의 표관, 부산의 상생관, 대구의 칠성관, 원산의 수관, 평양의 가부키좌를 회원관으로 두고 있었다. 1918년 닛다 고이치는 주식중매회사인 오사카의 다케하라 유자부로(竹原友三郞)상점과 조선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뒤 본격적으로 주식중매업에 뛰어든다. 이후 1920년 5월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설립되자 영화흥행업 관련 사항들은 형제들에게 넘기고 주로 주식중매인으로 활동했다. 닛카쓰 영화를 배급하며 조선의 흥행업을 주도하던 닛다연예부는 조선 내 다른 일본 영화회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큰 타격을 입는다. 특히 1921년 닛카쓰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橫田永之助)가 희락관(喜樂館)의 대주주가 되면서 대정관의 닛카쓰 독점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에 대정관은 1921년 12월 15일부터 쇼치쿠(松竹)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하는데, 쇼치쿠 역시 경성의 황금관(黃金館)을 직영하면서 독점이 어려워지자 또 다른 영화회사인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하기로 한다. 그러나 중소영화회사인 곳카쓰 영화보다는 쇼치쿠 영화가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다 1925년 1월 닛다 형제들은 결국 대정관을 매각한다. 대정관의 운영은 앵정정에서 오복점을 경영하던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가 넘겨받았다.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없던 후쿠자키는 요코야마 도미오(橫山富美雄)와 나카미즈 도모노스케(中水友之助) 등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많은 인물들을 중용하여 경영의 안정을 기하는 한편,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郎)나 하야지 조지로(林長二郞) 등 유명 스타가 출연하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며 관객들의 인기를 끌어 올린다. 하지만 시설이 열악했던 대정관은 토키영화 시대가 도래하자 다시금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33년 쇼치쿠의 최고 화제작이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토키영화 <충신장(忠臣藏)>이 상영되는 도중, 소리가 중간 중간 끊어져 관객의 원성을 들었던 것이다. 이전부터 대정관의 열악한 시설에 불만을 가졌던 쇼치쿠는, 1934년 대정관과 경성 봉절관으로서의 관계를 끊고 황금관의 후신인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경성의 새로운 봉절관을 삼기로 결정한다. 이에 쇼치쿠 영화의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1934년 11월 15일 후발 영화사인 PCL과 계약을 체결하고 PCL 봉절관이 된다. 하지만 PCL 봉절관 시절도 오래가지 못한 채 1935년 12월 16일을 기해 폐관하기에 이른다. 대정관의 흥행권은 약초정 큰 길가에 신축 중이던 약초영화극장으로 넘어갔고,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참고문헌 한상언, 「대정관의 설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영화연구』 제70호(2016년), 163~188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25~140쪽. * [사진](상단). 대정관 개관 기념 광고(≪매일신보≫, 1912.11.08) [자료] 제2대정관 전단지 來 八月 十七日 부터 第二大正館 新消息 特 히 撰拔 ᄒᆞᆫ 三大寫眞 을 ------------------------------------ ◎ 泰西奇談 三百年 全三卷 六千呎 三百年 以前 의 秘密 寶箱 은 如何 히 發見 지 一見 戰慄 만 大寫眞 ------------------------------------ 時節柄 見逃 치 못 逸品 ◎ 軍事大活劇 千軍萬馬 全二卷 四千尺 他館 의 寫眞 과 同視 치 勿 ------------------------------------- 特 히 當館 에 移入 封切 大寫眞 ◎ 破天荒 冒險劇 秘密使命 全三卷 八千尺 王妃 의 秘密 ! 飛行家 의 使者 ! 戰慄 大臣 의 奸謀 ! 疑問 의 首飾 ! 空中 飛行機 의 燃燒 ! 惡漢 의 追跡 ! 飛行機 , 自動車 , 滊車 의 競爭 何 가 勝利 ? --------------------------------------------- 順序 滑稽 담우 君 決鬪 喜劇 好一對 奇談 三百年 大活劇 千軍萬馬 冒險劇 秘密使命 ---------------------- 登場辯士 辯士長 金德經 說明主任 李丙祚 次席 崔炳龍 辯士 韓圭成 女辯士 康鏡玉 辯士 姜信五 少年 李丙浩 ------------------------------------ 注意 !! 寫眞 長尺 인 故 로 午後 七時 三十分 開演 黃金町 第二大正館 電話 一四三四 [자료] 《매일신보》, 1915.04.24. 朝鮮人 觀客 을 獨占 優美館 과 衆口 / 셰상 맛난 우미관 / 샤진에 물론 죵로 경셩에 잇 활동샤진관 ( 活動寫眞館 ) 으로 죠션 사 을 쥬장되 손님 삼아 흥 곳은 황금뎡 이뎡목에 데이대졍관과 죵로통 이뎡목에 우미관 ( 優美館 ) 의 두 곳이 잇셔 뎨이대졍관은 그 큰집 되 뎨일대졍관에셔 샤진을 공통 야 쓰 것이 만앗고 우미관에셔 대졍관의 뎍되 황금관 ( 黃金館 ) 과 샤진을 공통 야 두 곳식 두 곳식 엄연히 한 뎍국의 도로 셔로 야 경 을 고로 그 경 의 결과 연 셔로 됴흔 샤진도 빗최여 셔로 손님을 만이 랴 를 쓰더니 기간 ▲ 우미관의 흥 쥬 와 대졍관의 흥 쥬와 계약이 되야 죠션인을 주장되 손님으로 영업 던 뎨이대졍관은 디인 젼문으로 곳칠 죠건으로 뎨이대졍관에 가 손님을 밧을 우미관 흥 쥬 그 보슈로 대졍관 흥 쥬의게 삭 이 원식 주고 뎨이대졍관에셔 빗쵸이 활동샤진을 우미관과 공통 야 쓰고 우미관에셔 그 셰금으로 삭 오 원식 이기로 작뎡되야 뎨이대졍관은 지난 십오일브터 셰계관 ( 世界館 ) 이라 일흠을 곳치고 디인 손님 젼문으로 영업 졔도 곳쳐 죠션인 변 젼부 이 폐지 얏고 우미관은 황금관과 관계를 코 세계관의 샤진을 공통 야 쓰 이외에 모양좃케 경셩에 죠션인 전문 활동사진관으로 ▲ 독졈 디위 엇엇 원릐 대졍관에서 뎨이대졍관을 일본인 젼문으로 곳치기 황금관의 샤진이 평판이 됴흔 고로 그와 경 기 위 야 진고 셔편의 손님은 셰계관에셔 밧고 동편의 손님은 황금관 가 목쟝이 되 대졍관에셔 밧아 아못조록 손을 만히 고져 이오 우미관은 경셩에 독졈으로 조선인 젼문의 영업을 야 죠션인 손님은 혼 맛흘 마암으로 계약 인 한 달에 샤진셰 오 원이라 은 일본 디에셔 활동샤진 회샤와 샤진관 흥 쥬 간의 달 셰음으로 소위 갑죵 ( 甲種 ) 이라 야 그즁 낫다 지만은 이 젹은 디방 활동샤진관에셔 이러케 회샤와 계약 고 샤진을 갓다가 쓰 것이오 ▲ 경셩 치 큰 도회 에셔 더구나 독졈으로 이십만에 갓가운 죠션인 젼부 손님으로 흥 큰 활동샤진관에셔 치 안이 일이라 륙칠만의 디인을 손님으로 흥 대졍관 , 황금관에셔도 한 달에 샤진셰 수쳔원식 허비 을 보면 우미관에셔 디인 활동샤진관과 입장료를 치 밧 것이 빗 다고 안이 수 업스며 우미관에셔 세계관과 대졍관의 샤진을 갓다가 쓴다 되 일본 람 젼문의 활동샤진관에셔 여러 시간 빗초이고 미잇 일본 연극의 활동샤진을 주장 삼 고로 우미관에셔 그 일본샤진은 죠션인 미에 맛지 못 닛가 이고 남아지 셔양 것만 갓다가 흥 하닛가 우미관에셔 쥬장 삼 샤진이라도 대졍관에셔나 셰계관에셔 주장 샤진이 안인즉 연 샤진이 갑 젹은 것 될 것은 분명 며 갑 젹으면 샤진도 그러케 ▲ 좃타고 슈 업슨적 자연 구경가 사 의 입에셔 여러 가지 비평이 나와 사진이 쟈미 업나니 몃 가지 안되 사진을 가지고 시간을 우노라 길게 느리나니 말마다 젼거로 활동샤진을 몃 차례식 가져오 데 시간이 걸리나니 이젼에 보던 것을 다시 빗초이 것이 잇나니 구경갓던 사 이 리약이가 ᄌᆞᄌᆞᄒᆞᆫ 오락긔관이 업ᄂᆞ 경셩에서 일본말를 모르ᄂᆞᆫ 샤ᄅᆞᆷ이 활동샤진 구경을 랴면 엇지 얏던지 긔밧게 업스닛가 구경을 가기 가겟지만은 경 뎍이 업다고 죠흔 샤진을 구경식이지 안이 진 아모리 독졈이라도 손님의 그림 가 로 령셩 모양이라고 엇던 활동변 말 더라 .
“캐릭터 디자인 시안 17-05번입니다.” “음.. 확실히 제일 처음 게 좋네, 01-02번 디자인으로 가시죠” “네... (침묵) 일단 파일명에는 파이널을 붙이지 않겠습니다” “아! 당연!” 작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TV용 애니메이션 만들기 두 번째. 프리프로덕션 과정이다. 운 좋게 기획단계에서 투자가 시작되거나, 지원사업에 선정되거나, 아니면 대출에 성공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작품의 디자인 수정과 시나리오 개발과정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당 프로젝트의 예산이 투입되며, 전문인력들의 가시적인 작업 성과가 등장하기 시작된다. 디자인은 작품의 내용과 캐릭터성, 그리고 메인 타깃 분석에 의해 수정되고, 기존의 기획 개발 단계에서의 컨셉아트가 배경 디자인으로 수정되기 시작하며, 작품의 기획 과정에서 갈팡질팡하던 이야기 구조들이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등으로 확정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보통 이때 참여하는 인력은 아트디렉터, 프로듀서, 캐릭터 디자이너, 배경 디자이너, 시나리오 작가 등이라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이러한 예는 돈이 많은 또는 이전 작품에서 수익이 많았던 애니메이션 회사에만 한정된다. 보통 여기서 언급할 ‘우리 같은’ 우리들은 사정이 다르다. 일단 제작비 전체에 대한 투자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장님으로 대표되는 작은 스튜디오의 감독 또는 프로듀서들은 프리과정에서도 여전히 투자사 미팅과 방송국 미팅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당연히 그 도중에 디자인과 설정에 대한 의견도 등장하기 때문에 매번 디자인 수정과 이야기 구조도 변경된다. 이때부터 다시 지옥문이 열린다. 디자이너들은 수많은 시안들을 내놓는데, 보통 4~5번 정도 수정을 미친 듯이 진행한다. 어떤 경우는 싸그리 새롭게 엎어 버리기도 한다. 사실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는 아트디렉터나 디자이너의 꿈은 오토모 가츠히로나 브레드 버드, 아니면 와타나베 신이치로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성인 취향의 근사한 이미지를 디자인하고 싶어 한다. 우리도 < 아키라 >의 배경 설정과 < 인크레더블 >의 유니크함, < 카우보이 비밥 >의 하드 보일드한 캐릭터 디자인 등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적은 예산과 빡빡한 일정의, 어린이 또는 유아를 메인 타깃으로 잡고 있는 TV 시리즈용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야 하는 운명, 이를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취향과 일은 정말로 공유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프리단계의 또 다른 꽃. 시나리오다. 당연히 시나리오는 작가가 작업을 하는데, 보통 작은 스튜디오에서는 풀타임을 근무하는 작가를 두기가 어려워 단기간 또는 프로젝트 단위로 작가를 고용한다. 물론 사장님이 직접 작업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어린이/유아용 애니메이션의 작가들은 전업 애니메이션 작가를 포함해, 동화작가, 방송작가, 코미디 프로그램 작가, 쇼프로그램 작가 등이 있다. 물론 급할 때는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 아트디렉터, 프로듀서, 심지어 인턴들이 쓰는 경우도 있다. 보통 현역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경우 나이가 35세에서 45세 정도의 나이 또래로 세상의 고된 풍파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세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프리랜서라는 미묘한 고용불안 상황까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 익숙한 그리고 그러한 글에 더욱 자신감을 가진 천성의 글쟁이들이다. 지금 이 세대들이 < 은하철도 999 >를 보았고, < 바다소년 트리톤 >을 보았고, < 에반게리온 >을 철학적으로 분석을 들이밀며 봐온 세대들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준 오타쿠들과 함께 “5세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다. 정말 이런 게 프로정신 아닌가! 그러다 보니 시나리오 회의에서 가끔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도 한다. 시나리오상으로는 착하고 착해빠진 캐릭터들을 이야기하면서도 속으로는 “마지막 화에서 우리의 5세 주인공 ○○이 지구인의 반 이상을 대량 살상하고, 우주도 괴멸시키는 이야기”를 상상한다. 국내 유아용/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7분 포맷, 15분 포맷, 25분 포맷 등이 주로 포진되어 있으며, 7분의 경우 시즌당 39편, 15분, 25분 분량은 시즌당 26부작 정도로 구성되어있다. 보통 작가들은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6명 정도가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이들을 잘 관리하면 TV 시리즈 전체를 일정한 톤으로 유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각 에피소드들의 이야기들이 널뛰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가끔 널뛰기 한 에피소드들이 괴작이자 명작들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시나리오는 프리과정에서 다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회사의 사정에 따라 20~40% 정도의 시나리오를 제작해 두고 본편 제작을 먼저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일정을 관리하는 제작 담당들과 시나리오 작가와 마감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배경 세팅과 콘티제작, 애니메틱이 순서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TV 시리즈 제작에서는 시나리오 원고 마감이 곧 일정의 관리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감독, 프로듀서, 대표 작가 1인과 함께 하는 시나리오 회의의 한순간. 커피 4잔과 하품이 이 회의의 진지함을 알려주고 있다. 결국 이 회의는 작가들에게 충격을 줬던 꿈의 시나리오 작품 <비밀결사 매발톱단>(원제:秘密結社 鷹の爪)에 대한 이야기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프리프로덕션 단계는 말하자면 작품제작의 근간을 이루는 과정으로 많은 노력과 의지, 열정이 필요하다. 탄탄한 과정이 이후 프로덕션 과정을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애니메이션 회사는 이 과정을 통해 스튜디오의 제작 시스템을 정비, 개발하기도 한다. 예의 경우에서는 디자인과 시나리오 등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만 언급하였지만, 여전히 사장님과 대표님들은 작품 제작에 필요한 제작비를 만드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프로듀서들과 매니저 들은 일정을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다. 콘티팀은 시나리오가 더 이상 황당하지만 않으면 하는 눈치며, 애니메틱을 만들어야 하는 담당자와 감독은 분량 체크와 연출 노트 작성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한 6개월에서 9개월 정도가 흘러간다. 그 사이에 투자사와 이야기도 잘 되었고, 공동 제작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파일럿 제작도 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프리단계가 끝나간다면 이제 제대로 된 팀을 꾸려서 작품 제작에 들어가야 한다. ③프로덕션 단계인 것이다. 더 많은 일감들과 마감일정, 그리고 체력전이 시작된다. + 위 사진 설명: 프리프로덕션이 시작되면서 디자이너는 수많은 디자인 시안을 개발하며 머릿속을 ‘하얗게 불태우곤’ 한다. 본 이미지는 실제 진행 중인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의 디자인 시안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작 하나도 선택받지 못했다. 레트로한 일본 애니메이션 풍의 디자인을 외쳤던 디자이너는 드디어 유아용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디자인을 하기 시작하는데... 결국 기획실은 처음 컨셉을 모두 뒤집기로 한다. 그사이 캐릭터 디자이너는 한 10년은 늙었다. ⓒCentral Animation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