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적 일지매
- 감독
- 장일호
- 제작년도
- 1961
- 출연
- 최은희, 도금봉, 김석훈, 신영균, 이예춘, 김희갑, 양훈, 허장강, 구봉서, 이기홍, 변기종, 백송, 이영, 이창식, 조항, 이일선, 최걸, 석운아, 최찬식, 경윤수, 임예심, 염혜숙, 염석주, 임해림, 송일근, 박옥초, 정연자, 추봉, 이업동, 주일몽, 박성근, 박병기, 박광진, 김호연, 김원권, 박순봉, 최준, 김홍대, 박철, 신성호, 길유성, 임동훈
※ 이 글은 2022년 10월 11일(화)부터 19일(수)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되는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미완의 사가: 아오야마 신지(1964-2022) 추모전’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기획전에 대한 정보는 아래 링크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42 ) 언제나 많은 이해자들에게 둘러싸여 일찍이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 신지는 불우한 작가였다. 신작이 발표될 때마다 적지 않은 리뷰가 나오기는 했지만 정리된 작가론이라면 지금도 결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동서고금의 영화, 음악, 문학에 정통했던 예민한 비평가였기 때문에 아오야마 신지를 논하는 것은 비평가에게는 그 대상에 필적할 만큼의 지성과 감성을 요구하는 골치 아픈 도전이었던 것이다. 아오야마는 소설가나 연극 연출가로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음악가로서의 활동도 단순한 취미로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다재다능함이 아오야마가 하는 일의 전모를 한층 보이기 어렵게 한 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아오야마와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 끝내 아오야마론을 쓰지 않은 태만한 영화비평가 중 한 명이었으며, 너무나도 이른 그의 죽음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씻어낼 수가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 만다 구니토시, 시오타 아키히코와 같은 현대 일본영화의 이름난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릿쿄대학 출신이었지만 세대적으로 가장 아래 세대였던 아오야마는 일찍부터 학생영화계에서 명성을 얻었던 ‘릿쿄 누벨바그’ 선배들과는 조금 다른 경로를 거쳐 영화계에 진입하게 된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1990년대의 일본영화 산업은 크게 침체되었고, 신인 감독이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일자리를 얻는 길은 이미 완전히 막혀 있었다. 기타노 다케시 같은 반전통적인 작가가 영화계 밖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혼란을 틈탄 것이었다. 이처럼 혼미한 시대에 새롭게 등장해 성행한 것이 OV(오리지널 비디오)라고 불리는, 처음부터 렌탈 비디오용으로 양산된 저예산 영화였으며, 또 시장 확대를 위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필요로 하기 시작한 BS(위성방송)였다. 그리고 아오야마는 실로 OV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감독을 경험한 후,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유료 BS 방송국 WOWOW에서 < 헬프리스 >(1996)를 찍으며 본격적인 데뷔를 장식했다. 이런 형태로 시작된 아오야마의 행보는 영화의 정의가 점점 모호해져가는 와중에 영화란 무엇인가를 매번 되묻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헬프리스>는 현장에 결집한 인재들의 면모에서도,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이후의 아오야마의 작품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다. 일단 당시 WOWOW 소속이었던 프로듀서 센토 다케노리가 있다. <헬프리스>는 센토가 시작한 프로젝트 'J·MOVIE·WARS'의 하나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매년 비교적 저예산인 영화 4, 5편을 한데 모아 제작, WOWOW에서 프리미어 방영 후 극장 개봉하는 프로젝트로 해를 거듭할수록 신인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데뷔의 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여러 편의 묶음 제작은 손익의 상쇄에도 용이했기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없는 시대에 이를 대체하는 시스템의 구축을 의식했다는 점에 센토의 비범함이 있었다. 또 하나 센토가 일본영화 프로듀서로서 선구적이었던 것은 일찌감치 해외 진출을 시야에 넣고 있었던 점이었다. 가와세 나오미의 < 수자쿠 >(1997)가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그 가장 두드러진 성과였다. 아오야마가 센토가 프로듀싱한 < 유레카 >(2000)로 칸 국제비평가연맹상과 에큐메닉상을 수상하는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이 센토의 전략에 힘입은 바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아오야마에게 있어서 센토와 함께 결정적이었던 것은 촬영감독 다무라 마사키와의 만남이다. 다무라는 <산리즈카> 시리즈로 알려진 급진적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집단 오가와 프로덕션 출신으로, 극영화에 진출하고 난 후에도 파격적인 롱테이크로 세간에 놀라움을 안겨준 소마이 신지의 < 숀벤 라이더 >(1983) 등에서 특이한 개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특징으로는 카메라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비정상적일 정도의 높은 감응력과, 살아있는 공간을 포착하는 카메라 시선의 철저한 비인칭성을 들 수 있다. <헬프리스>의 시작 부분에서 기타큐슈의 거리 풍경을 위에서 포착하고 이윽고 위태로운 진자운동을 시작하는 공중 촬영이라고 하는, 그 어떤 자의 시점으로도 결코 환원될 수 없는 마이클 스노우의 구조영화마저 연상시키는 카메라워크를 보면 그것은 명백해진다. 아오야마와 다무라는 이후에도 < 새드 배케이션 >(2007)까지 오랫동안 콤비를 이루게 되지만, 그 관계가 일관성 있게 서로 익숙한 채로 의존하는 종류의 것과는 거리가 먼, 더없이 긴장 가득한 것이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유레카>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웅대한 환경 속에 인물을 던져놓은 다음 시간을 두고 그 생태를 쫓는다는 방향성을 정한 뒤, <달의 사막>(2001)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스탠다드 사이즈를 통해 의도적으로 공간을 한정하고, <호숫가 살인사건>(2005)에서는 멀티카메라 시스템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다무라를 굳이 세컨드로 돌린 것이다. 다무라와의 결별 후에 찍은 < 도쿄공원 >(2011)과 마지막 감독작 < 구름 위에 살다 >(2020)에서 나타나는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로의 현저한 관심의 이동은, 결코 스타일적인 후퇴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단한 자기 혁신 끝에 처음으로 획득한 것, 더할 수 없는 복잡함을 경험해봤던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단순함의 경지였다. 아오야마는 다니엘 슈미트가 일본에서 찍은 걸작 <쓰여진 얼굴>(1995)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이때 가까이서 관찰한 슈미트와 촬영감독 르나토 베르타와의 관계성으로부터 다무라와의 공동작업으로 연결되는 무언가를 배웠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서, <유레카> 이후 거의 모든 아오야마 작품에서 녹음을 담당하고 있는 기쿠치 노부유키 또한 다무라와 마찬가지로 오가와 프로 출신이다. 사람들에게 만연해 있는 자살 충동 바이러스를 음악으로 치유하는 SF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005)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아오야마 작품에서의 음향은 종종 시각적인 영상과 길항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건 소리의 공간성을 중시하는 기쿠치의 공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헬프리스>는 내용 측면에서도 아오야마에게 있어 결정적이었다. 이 작품은 나중에 만든 <유레카>, <새드 배케이션>과 함께 ‘기타큐슈 사가’를 구성하게 된다. 개개의 작품 테두리를 넘어 공통적인 캐릭터가 오고 가면서 전체로서 큰 강과 같은 거대한 서사의 너울을 형성하는 사가라는 형식은 근대소설사에 있어서는 포크너의 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오야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포크너의 영향을 받은 나카가미 겐지이다(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하는 주인공의 이름인 겐지는 그에게서 유래한다). 고대로 이어지는 신화적인 땅 기슈에서 살아온 나카가미는 스스로가 피차별 부락 출신이라는 사실에 마주하여, 그 장소를 ‘골목(路地, Roji)’이라고 이름 붙이고 활황일 때부터 소멸 후까지를 사가로 그렸다. 아오야마에게 있어서 나카가미의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는 <로지예: 나카가미 겐지가 남긴 필름>(2000)을 보면 분명히 나타나지만, 아오야마는 나카가미의 기슈를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기타큐슈로 단순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 로지예 >에서 역시 기슈 태생의 영화작가 이즈치 기슈가 나카가미의 텍스트를 낭독할 때 과장된 기슈 사투리가 특징적이었던 것처럼, 기타큐슈 사투리의 거의 음악적일 정도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일이 아오야마에게는 중요했다.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규슈 이외의 사람이라면 전부를 알아듣는 것이 쉽지 않은, 조야함과 순정을 겸비한 듯한 기타큐슈 사투리의 독특한 가락은 들으면 들을수록 ‘일본어’라는 통합된 개념을 불확실한 것으로 바꾸어 간다. 그리하여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에도 인접한 기타큐슈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말이 폴리포닉하게 교차하는 다의성을 가진 공간으로서 재정의되게 되었다.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에서 가장 깊이 탐구된 이 성격이야말로, 나카가미가 ‘골목’이라는 허구에 진정으로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오야마는 또한 나카가미로부터 물려받은 짙은 정치성, 특히 천황제나 국가라고 하는 대문자 정치에 대한 강한 관심에 있어서는 동시대 작가들보다 오시마 나기사 같은 작가와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 이미 늙어버린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하여 >(2001)에는 그러한 아오야마의 정치성이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표출돼 있다. 애초에 <헬프리스>에서도 남자들을 괴롭히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상황이 쇼와 천황의 죽음과 겹쳐져 있었다. 죽여야 할 아버지가 이미 없어졌다는 사실이 남자들을 기댈 곳 없는(helpless) 고아로 변모시킨 것이다. 이처럼 아오야마의 정치적 측면에서의 독창성은 천황제나 국가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의 육체를 흐르는 피의 문제로 여긴 점에 있었다(전전의 국가이데올로기에서 일본 국민은 천황의 적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후 아오야마의 관심이 아버지 죽이기에서 여성적인 것의 탐구, 모성이라는 헤어날 수 없는 굴레의 속박으로 옮겨갔다는 점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아무리 아이가 발버둥질해도 모든 것을 미소와 함께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사랑임에 틀림 없다. 온갖 저항이 모성으로 인해 무력화되는 개미지옥 같은 나라, 일본――절망적으로 여겨지는 한편, 그 끝없는 포용력에 희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서게 되는 그 지점에서 ‘기타큐슈 사가’는 닫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오야마의 미국문화에 대한 경도도 그 자신을 흐르는 피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성여성>(1966)의 고다르는 당시 파리 젊은이들을 ‘마르크스와 코카콜라의 아이들’이라고 불렀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아오야마는 자신에게 흐르는 피의 절반이 코카콜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평생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국영화와 음악, 문학 속에서 자라나면서 현실 국가로서의 미국에게는 환멸할 수밖에 없었던 빔 벤더스를 ‘그를 논하는 것은 나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동지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1) 아오야마가 보기에 전후 일본에게 있어서 미국은 아무리 그곳으로부터 독립하려고 발버둥질해도 본질적인 종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전술한 천황제와 같은 형식의 문제였다. 그런고로, 패전 직후 도쿄를 무대로 젊은 자매가 자신들이 사는 집을 미군 상대의 위안소로 하여 살아가는 <퇴폐자매>의 영화화가 실현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애석하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원작을 아라이 하루히코 등이 각색한 그 각본에는 “일본은 미국에 점령당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미국인의 몸을 점령해 주겠어”라는 대사가 포함돼 있었다. 2) 지금 와서 새삼 생각하는 것은, ‘기타큐슈 사가’뿐만 아니라 아오야마가 남긴 모든 일들이 열린 채로 있는 거대한 사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뒤에 남은 우리는 끝내 완결되지 않고 중단되어 버린 그것들을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다뤄지고 있는 것들이 얼마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피에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 사가의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필자 - 후지이 진시: 일본의 영화평론가이며, 현재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입문: 현대 할리우드 영화 강의』(2008), 『되살아나는 소마이 신지』(2011), 『모리사키 아즈마 당 선언!』(2013) 등에 편저자로 관여했으며 『이와나미영화의 1억개의 프레임』(2012), 『에드워드 양 재고/재견』(2017),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2017),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2022)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번역 -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박진희 *** 1) 아오야마 신지, 『나의 영화를 발견했다』(われ映画を発見せり), 세이도샤, 2001, 142쪽. 2) <퇴폐자매>의 시나리오는 《영화예술》 480호(2022년)에 실려있다(96-121쪽). (원문) 青山真治、未完のサーガ 藤井仁子 常に多くの理解者に囲まれ、早くから国内外で高い評価を獲得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青山真治は不遇の作家だった。新作が発表されるたびに少なくないレビューが書かれはしたが、まとまった作家論となると決定的なものは今も存在しない。彼自身が古今東西の映画、音楽、文学に精通した鋭敏な批評家であったために、青山真治を論じることは、批評家にとっては対象と匹敵するだけの知性と感性を求められる厄介な挑戦だったのである。青山はまた小説家、舞台の演出家としても成功をおさめ、音楽家としての活動もたんなる趣味として片づけられるようなものではなかった。そうした多才さが、青山の仕事の全貌をいっそう見えづらくした面もあろう。かくいう私も、青山といつでも連絡がとれる距離にいながらとうとう青山論を書かなかった怠惰な映画批評家の一人であり、あまりにも早すぎる彼の死を前に、忸怩たる思いを拭い去ることができない。 青山は黒沢清、万田邦敏、塩田明彦といった現代日本映画の名だたる作家たちと同じ立教大学の出身だったが、世代的にいちばん下だった青山は、早くから学生映画の世界で評判をとっていた「立教ヌーヴェル・ヴァーグ」の先輩たちとはいささか異なる経路をたどって映画界に参入することになる。バブル経済の崩壊後にあたる1990年代の日本映画は産業としては大いに低迷し、新人監督がメジャー・スタジオで仕事を得る道はもはや完全に閉ざされていた。北野武のような反伝統的な作家が映画界の外から突然出現することができたのは、そうした混乱に乗じてのことにすぎない。この混迷の時代に新しく登場して盛んになったのが、OV(オリジナル・ビデオ)と呼ばれる初めからレンタル・ビデオ用に量産された低予算映画であり、また、市場拡大のためにオリジナル・コンテンツを必要としはじめていたBS(衛星放送)であった。そして青山は、まさにOVの世界で初めて監督を経験した後、開局間もない有料BS放送局WOWOWで『Helpless』(1996)を撮り、本格的なデビューを飾っ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かたちで開始された青山の歩みは、映画の定義がますますあいまいになっていくなかで、映画とは何かをそのつど問いなおすものにならざるをえなかった。 『Helpless』は、現場に結集した人材の点でも内容の点でも、その後の青山作品を規定する決定的な第一歩であった。まず、当時はWOWOWに所属していたプロデューサーの仙頭武則。『Helpless』は仙頭が立ちあげたプロジェクト、「J・MOVIE・WARS」の一本として製作されたが、これは毎年、比較的低予算の映画を4、5本まとめて製作し、WOWOWでのプレミア放映後に劇場公開するというもので、年を追うごとに新人監督に積極的にデビューの場を提供す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数本を束ねての製作は損益の相殺を容易にするもので、スタジオ・システムなき時代にそれに代わるシステムを構築しようと意識していた点に仙頭の非凡さがあった。もう一つ、仙頭が日本映画のプロデューサーとして先駆的だったのは、早くから海外進出を視野に入れていたことだ。河瀬直美の『萌の朱雀』(1997)がカンヌ国際映画祭で受賞したのはそのもっとも目立った成果だった。青山が仙頭のプロデュースした『EUREKA』(2000)でカンヌの国際批評家連盟賞とエキュメニック賞を受賞するなど、フランスを中心に世界的な名声を得ていくことになるのは、この仙頭の戦略によるところが大きかったといえる。 青山にとって仙頭と並んで決定的だったのは、撮影の田村正毅(のちに改名してたむらまさき)との出逢いである。田村は『三里塚』シリーズで知られる先鋭的な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製作集団、小川プロダクションの出身で、劇映画に進出してからも、型破りな長回しで世間の度肝を抜いた相米慎二の『ションベン・ライダー』(1983)などで特異な個性を発揮していた。その特徴としては、キャメラの前で生起しつつある出来事に対する異常なまでの感応力の高さと、生きた空間を捉えるキャメラの視線の徹底的な非人称性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Helpless』の冒頭で北九州の街並みを真上から捉え、やがて危うい振り子運動を始める空撮の、何者の視点にも決して還元することのできないマイケル・スノウの構造映画さえ思わせるキャメラワークを見れば、そのことはあきらかだろう。青山と田村はその後も『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2007)まで長くコンビを組むことになるが、その関係が一貫して馴れあいからはほど遠い、きわめて緊張に富むものだった点に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シネマスコープの『EUREKA』で人間を圧倒する雄大な環境のなかに人物を放ち、その生態を時間をかけて追うという方向性を極めた後、『月の砂漠』(2001)ではすでに滅びかけていたスタンダード・サイズに空間を意図的に限定し、『レイクサイド マーダーケース』(2005)ではマルチキャメラを採用したばかりか、たむらをあえてセカンドに回したのである。たむらとの訣別後に撮られた『東京公園』(2011)と最後の監督作『空に住む』(2020)に顕著な俳優たちの演技アンサンブルへの関心の移動は、断じてスタイル的な後退などではなく、こうした絶えざる自己革新の末に初めて獲得されたもの、複雑さを極めた者だけが到達することのできる単純さの境地であった。青山はダニエル・シュミットが日本で撮った傑作『書かれた顔』(The Written Face、1995)で助監督をつとめた経験を持つが、このとき間近で観察したシュミットと撮影監督レナート・ベルタとの関係性から、たむらとの共同作業に通ずる何かを学びとったように思えてならない。ちなみに、『EUREKA』以降のほぼすべての青山作品で録音を担当している菊池信之は、たむらと同様、小川プロの出身である。人を自殺させるウイルスの蔓延を音楽によって癒すSF『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2005)にあきらかなように、青山作品にとって音響はしばしば視覚的な映像と拮抗するほど重要なものだったが、それも音の空間性を重視する菊池の貢献あってのことだっただろう。 先述したように、『Helpless』は内容の点でも青山にとっては決定的だった。この作品は、のちに撮られる『EUREKA』、『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とともに「北九州サーガ」を構成することになる。個々の作品の枠を超えて共通するキャラクターが行きかい、全体として大河のような巨大な物語のうねりをかたちづくるサーガの形式は、近代小説史にあってはフォークナーによるものが広く知られているが、青山への直接の影響源となったのは、そのフォークナーの影響を受けた中上健次である(浅野忠信演じる主人公の役名、健次は彼に由来する)。古代につながる神話的な土地、紀州に生を享けた中上は、自らが被差別部落の出身である事実と向きあい、その場所を「路地」と名づけて活況から消滅後までをサーガとして描きつづけた。青山にとって中上の影響がいかに絶大であったかは『路地へ 中上健次が残したフィルム』(2000)を見ればあきらかだろうが、青山は中上にとっての紀州をただたんに自分の生まれ故郷である北九州に置き換えたわけではない。『路地へ』でやはり紀州生まれの映画作家、井土紀州が中上のテクストを朗読する際の誇張された紀州訛りが特徴的であったように、北九州弁のほとんど音楽的な魅力を再発見することにつながった点が青山にとっては重要だった。九州以外の者には日本人観客でもそのすべてを聴きとることは容易ではないものの、北九州弁の粗野と純情を兼ね備えたような独特な調子は、聴くほどに「日本語」という統合された概念を不確かなものへと変えていく。こうして、海を挟んで朝鮮半島にも面する北九州の土地は、多様な人と言葉がポリフォニックに交差する、多義性の空間として再定義されることとなった。そして、『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でもっとも深く探究されたこの性格こそは、中上が「路地」という虚構に真に期待していたものでもあったのである。 青山はまた中上譲りの深い政治性、ことに天皇制や国家といった大文字の政治への強い関心において、同時代の作家よりも大島渚のような作家とはるかに近い場所にいた。『すでに老いた彼女のすべてについては語らぬために』(2001)には、そうした青山の政治性がもっとも直接的なかたちで表出されている。そもそも『Helpless』では、男たちをさいなむ父の不在という状況が昭和天皇の死と重ねられていた。殺すべき父はもはやいなく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事実が、男たちを寄る辺のない(helpless)孤児へと変貌させたのである。このように、青山の政治面での独創性は、天皇制や国家権力というものを、自らの肉体を否定しようもなく流れる血の問題として考えた点にあった(戦前の国家イデオロギーにおいて日本国民は天皇の赤子と位置づけられていた)。その後の青山の関心が、父殺しから女性的なものの探究、母性による骨がらみの呪縛へと移っていったことは、この文脈において捉える必要がある。『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で真に恐ろしいのは、どれほど子があがいてもいっさいを微笑みとともに受けとめてしまう母の「愛」にほかならない。あらゆる抵抗が母性によってすべて骨抜きにされてしまう蟻地獄のような国、日本――絶望的に思える一方で、その底なしの包容力に希望を探りあてるしかないという認識に立ったところで「北九州サーガ」は閉じられるのだ。 このように考えることで、青山によるアメリカ文化への傾倒ぶりも、彼自身を流れる血の問題であったとわかるだろう。『男性・女性』(Masculin, féminin、1966)のゴダールは、当時のパリの若者たちを「マルクスとコカ・コーラの子供たち」と呼んだが、その伝に倣えば、青山は自分に流れる血の半分がコカ・コーラでできているという事実から生涯眼をそむけることがなかった。だからこそ、自分と同じようにアメリカの映画と音楽と文学で育ちながら、現実の国としてのアメリカには幻滅するしかなかったヴィム・ヴェンダースのことを、「その人を論じることが自分について語ることに等しい」ほど重要な同志と感じていたのである 。青山の見るところ、戦後日本にとってのアメリカは、どれほどそこから独立しようともがいても本質的な従属関係からは脱け出せないという意味で、先述した天皇制と同型の問題であった。それゆえに、敗戦直後の東京を舞台に若い姉妹が自宅を米兵相手の慰安所にして生きぬく『退廃姉妹』の映画化が実現しなかったことが惜しまれてならないのだ。島田雅彦の原作を荒井晴彦らが脚色したその脚本には、「日本はアメリカに占領されたけど、これからはあたしたちがアメリカ人の体を占領してやるのよ」という台詞が含まれていた 。 今、あらためて思うのは、「北九州サーガ」のみならず、青山の遺したすべての仕事が開かれた巨大なサーガをな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それがついに完結することなく中断されてしまったことを、後に残されたわれわれは糧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そこで扱われている事柄がいくらかでも自分自身の血に流れていると感じる者なら誰一人、このサーガの登場人物である事実から逃れることはできないのだ。
1987년에 도착한 < 영웅본색 >은 그 매혹의 강도에서 보자면, 적어도 어떤 세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 동시대의 그 어떤 한국영화도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저 고색창연한 대사는 소년들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그렇다. 의리는 땅에 떨어졌으나,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가치인 바로 그 의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의 ‘따거(大兄)’ 주윤발은 홀홀단신 적진을 향해 나아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소년들은 일시에 검은색 선글라스와 롱코트에 사로잡혔으며, 너도나도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어대고 싶어했다. 실상 <영웅본색>의 시작은 그렇게 창대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서울의 화양, 명화, 대지극장에서 1987년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개봉되었으며, 9만 4천 60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관에서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둔 이 영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뒷골목과 변두리의 ‘동시상영’ 프로가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급기야는 주인공의 웃차림과 제스추어를 모방하고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되풀이해 보는 1) 열광적인 팬덤을 낳았다. 팬덤은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새로운 매체를 기반으로 장르에 대한 탐닉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8년을 기점으로 VCR 대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영화는 비디오 가게 선반이 나눠놓은 분류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로 카테고리화되었다. 이 ‘장르’는 이제 가장 충실하고 열정적인 관객을 갖게 될 터이다. 비디오라는 새롭게 추가된 매체의 영향은 있었으나, 여기에는 분명 1970년대 이래로 동시상영관을 채워왔던 이런 영화들(이른바 1970년대의 홍콩 권격영화)의 관객의 세대적, 젠더적 상속이 있었다. 이들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것은 10대에서 20대의 젊은 남성관객들이었다. 장사치들은 발빠르게 이에 조응하였다. <영웅본색> 이후 단 1년 만에 홍콩영화의 한국 판권은 2배에서 3배까지 치솟았으며, 1988년의 시점에 홍콩영화의 주요 수출국 중 3위로 랭크된 한국은 1990년에 이르면 대만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오우삼과 서극과 임영동의 이름은 이제 막 등장한 ‘시네필’들의 경전에 올랐고, 주윤발, 장국영, 왕조현, 유덕화, 적룡, 이수현, 여명 등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통용되는 이름들은 그 발음만큼 ‘친숙한’ 스타가 되었다. 이 열광을 가능케 한 조건과 근원은 무엇인가? 왜 이곳에서 <영웅본색>은, 나아가 이로부터 촉발된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소위 ‘홍콩 느와르’ 2) 로 불려진 일련의 홍콩영화들은 그토록 강렬한 매혹을 불러일으켰는가? 왜 그때 한국의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은 이 세계에 그토록 ‘진지하게’ 심취할 수 있었는가? <영웅본색>은 1987년과 88년 사이라는 한국 사회의 기점적 시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된 홍콩 느와르에 대한 열기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분명 <영웅본색>이 불러일으킨 열광의 강도는 놀라운 것이지만, 누가 어떻게 향유, 소비했는가의 방식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 이후 이 지역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했던 (그러나 그 하위문화적 성격상 거의 담론의 영역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던) 홍콩산 액션영화(이거나 종종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 일대의 영세 영화자본들이 합종연횡하면서 만들어낸 출처 불분명의 ‘무국적’ 액션영화)가 소비되었던 방식을 답습하는 한편, 당연한 말이지만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사회적·미디어적 조건과 결부되어 향유되었다. 즉, 여기에는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했던 독특한 위상이라는 종적 맥락과 <영웅본색>이 도착한 1987년부터 이 장르에 대한 열광이 사그라드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이라는 횡적 맥락이 서로 연동되어 개입되어 있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의 영화관객이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계층별, 세대별, 젠더별 분화를 시작하던 무렵 이른바 무협영화의 형태로 처음 한국 영화시장에 도착한 이래 홍콩영화는 재개봉관, 도시 변두리 소극장과 같은 지극히 남성 동성사회적(homosocial)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소비되며 젊은 남성들의 주요한 하위문화적 자원으로서 기능하였다. 특정 공간과 특정 세대, 젠더가 결합되어 있는 이 향유의 방식이야말로 홍콩영화에 관한 한국 담론 특유의 세대적 노스탤지어의 감각이 생겨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홍콩영화에 관한 서술이 종종 개인적 기억과 그것이 놓여진 시간과 장소로 이끌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3) 10대, 20대의 남성 하위문화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던 홍콩영화에 관한 이해는 내셔널 시네마 히스토리에 기반한 영화사적 계보 이전에 개인적 기억과 결합되어 수용되어왔다. 강력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용되는 홍콩영화가 전시하는 친밀한 인종의 얼굴, 스타의 몸이야말로 바로 이 개인적 열망들의 투사체로 작용하였다. 이것은 홍콩영화의 향유 방식에 내재된 독특한 세대론적 감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세대적 응집성은 강렬한 체험의 강도를 동반한다. 홍콩영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들이 한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기묘한 위치이다. 홍콩영화는 일본영화가 전면 금지된 이곳에서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제외하고 같은 동양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유일한 영화였으며, 또한 한국영화와 가장 빈번하게 결합된 영화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내내 도시 변두리 극장에서 가장 긴 흥행 사이클을 보여주었던 액션영화의 절대 다수는 소위 한국-홍콩 혹은 한국-대만의 ‘위장합작’ 영화들이었다. 1986년의 외국영화 수입 자유화 이후에야 완전히 사라진 이 오래된 관행 속에서 종종 한국어 더빙 버전의, ‘한국영화’로 알려지기도 한 홍콩영화는 익숙한 풍경과 언어를 지닌 것으로 감각되었으며, 그 속에서 홍콩영화의 외래성은 습관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지워졌다.(홍콩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한국식 한자 독음 표기로 호명되었던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홍콩영화에 대한 이곳에서의 감각은 외화와 방화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이 친밀성이야말로 홍콩영화에 대한 한국에서의 ‘번역가능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4) 바로 이와 같은 친밀한 방식 속에서 이 영화들에 열광한 절대적인 관객층이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들이 이 시기 이들의 열망과 분노, 상상적 극복과 같은 것, 즉 어떤 정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절반쯤 토착화된 영 컬처로서 <영웅본색>은 이 영화가 도착한 바로 그 시간인 1987과 1990년대 초까지 들끓었던 혁명적 열망과 정념과 관련되어 있다. 1987년의 6월 항쟁이 이끈 직선제 개헌 관철의 결과 그해 1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6월 항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함을 보여주었다.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전대협 결성, 이듬해의 노동법 개정투쟁,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 1989년의 전교조 결성,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의 방북, 1990년의 전노협 결성 등 대규모의 노동자 투쟁과 통일 투쟁이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모순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 분출하고 있던 이 시기는 정확히 오우삼 영화에 대한 열광의 시간과 겹쳐져 있다. 한국영화를 포함해서 그 어떤 영화도 이 순간 그의 영화만큼 젊은 남성들의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1987년의 정치와 정동과의 예기치 않은 충돌 혹은 밀착을 이루어내고 있는가를 역설해주는 것일 게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 느와르는 이 영화들의 과도한 폭력성이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로 점철되었다. 그것은 심지어 구체적인 숫자까지 동반하였다. 당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폭력영화와 청소년 문화환경’이라는 심포지움의 발표에 따르면, 1988년 관객 28만명을 동원한 <영웅본색 2> 전체의 21.9퍼센트가 폭력장면이고 89년 25만명을 동원한 <첩혈쌍웅> 24.3퍼센트가 폭력장면이다. 5) 라는 ‘구체적인’ 퍼센티지까지 제시되고 있다. 이 영화들에 대한 히스테릭한 우려는 더 이상 저질이라는 모호한 어휘를 맴도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폭력’에 대한 과도한 염려였으며, 이 영화들에 대한 매혹 또한 액션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87년 6월 항쟁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죽음이라는 기폭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대중이 애도의 공동체로서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자, 또한 국가폭력이 저지른 이 무구한 죽음의 형상은 그 자체로 대항폭력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은 ‘87년을 전후로‘ ‘정당한 약자의 무기로 자리잡았’다(김원). 그것은 가두에서 백골단과 구사대가 휘두르는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는 화염병과 쇠파이프의 저항이었으며,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한 가장 치열한 무기’(최장집)로서의 분신이었다. 즉, 이 격렬한 대중투쟁의 시간은 도저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대항폭력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의 정당성이야말로 공안정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 정권으로서는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자 하루빨리 탈취해야 할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폭력의 카테고리 안에 묶인 <영웅본색>의 힘은 그야말로 거리의 힘의 상상적 투사물일 수 있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가 각계 주요인사들을 사찰한 ‘청명계획’이 내부고발자에 의해 폭로된 직후 국면전환용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노태우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범죄와 폭력이 ‘와’로 병렬되고 있는 이 연설은 대항폭력을 범죄화함으로써 이 폭력의 정당성을 삭제하고자 하는 언설 전략의 전형적인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폭력) 대 대항폭력. 한국에서의 홍콩 느와르 전성기와 함께 하는 이 두 폭력의 구도는 왜 이 영화들의 폭력이 어떤 이들에게 그토록 과잉 의식되는지 왜 이 영화들의 향유자들에게는 그토록 매혹적인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저 영화적 폭력이 죽음과 애도와 긴밀히 연결된 대항폭력의 영화적 형상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분명 폭력 형상이 있으며, 나아가 그것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쾌감이 있다. 게다가 그 폭력은 오로지, ‘형제’를 위해서만 발현되는 것이다. <영웅본색>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정념의 활극은 오로지 형제애에 기초해 있다. 한때 조직에 발 담갔으나 갱생의 의지를 다지는 남자, 그러나 그의 이전의 삶이 그의 발목을 잡아끄는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웅본색>이 느슨하게 관련된 1967년의 동명 영화로부터 비롯되었다. 감독 용강(龍剛)의 광동어 사회파 드라마인 이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오우삼은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크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였다. 오우삼은 이 인물을 구축하는 여타의 서사를 지우고, 이 캐릭터를 송자걸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마크는 오로지 이 관계의 도덕, 의리라는 하나의 정념으로 움직인다. 젊은 남성들을 열광케 했던 소위 이 영화의 ‘명장면’들이 마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위조화폐에 담뱃불을 붙이는 주윤발, 화분에 심어놓은 총을 꺼내어 춤추듯 유려한 동작으로 총을 쏘는 주윤발. 왜냐하면 이 캐릭터는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을 통해 제스추어와 표정으로 특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크에게 가족이 있는가, 그는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송자걸이 서사의 캐릭터라면, 마크는 제스처의 캐릭터이다.(197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배경으로 마크의 전사를 그리고 있는 < 영웅본색 3 >는 영화의 성취와는 별개로 이 시리즈의 팬들을 얼마나 실망시켰던가. 3편에서 마크는 땅으로 내려왔고, 심지어 여자와 ‘연애’를 한다.) 오우삼은 마크를 통해서 신화적 공간을 창출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 공간은 ‘협(俠)’의 세계이고, 이 ‘협’이라는 세계의 기본원리를 그 자체로 현현해내고 있는 마크-주윤발이야말로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형성시켜내고 있는 자이다. <영웅본색>을 비롯한 홍콩 느와르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는 이 세계가 ‘아버지’ 없는 세계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적 존재’는 행위의 동기 혹은 주체로서 기입되어 있지 않다. 이 세계에서 행위의 동기이자 주체가 되는 것은 동년배의 남성들이며 연대란 오로지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형제를 위해!).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구성해내는 원리라고 할만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 사이의 ‘의리’와 세계에 대한 ‘인의’이며, 형제를 배신하는 행위야말로 이 세계의 악이다. 오우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영화가 폭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의(仁義)와 형제애에 관한 영화임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영화가 과도하게 폭력적이라는 비난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 첩혈속집 >에 출연했던 쿠니무라 준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우삼은 진심으로 자신의 영화 모티브가 인의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소위 인의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 혹은 상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관계성의 극단과 같은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할까. 그것이 내가 영화를 찍을 때의 기본 모티브다.” 6) 오우삼이 인의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그의 영화 스승인 장철(張徹)이 ‘피의 형제애 blood brothership’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시킨다. 오우삼 스스로 경외를 바쳐 마지않는 영화사의 선배들 이름을 즐겨 거론하지만(이를테면 장철부터 샘 페킨파, 장 피에르 멜빌까지) 적어도 <영웅본색>에 한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장철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우삼이 장철의 영화적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다량의 피, 파열하는 신체, 죽음의 순간을 지속시킬 수 있는 영화적 장치로서의 슬로우모션 등을 반복할 때 그것은 단지 스타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장철 영화의 미학인 ‘비장’을 발현하는 데에 핵심요소들인 이 인장들의 반복이야말로 <영웅본색>을 그토록 비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철은 홍콩의 주류 장르를 젊은 남성들의 영화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홍콩 내의 산업적, 인구적 변화와 맞물려 등장한 젊은 남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영화는 젊은 남성이 말 그대로 ‘죽도록’ 싸우는 영화에 심취해 있었으며, 장철의 관심은 시종 이 싸우는 신체가 어떻게 파열되고 부서지는가에 있었다(<영웅본색>의 적룡은 장철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그 부서지는 젊은 신체 중 하나였다). 이 이야기는 단지 그의 영화가 얼마나 익스트림한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의 영화를 즐겨 ‘양강(陽剛)’ 영화라고 칭했던 장철에게 강력한 남성성(陽剛)은 비장미를 자아내는 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비장미는 세계와의 대결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미학이다. 이 대결은 패배를 예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장을 쏟아가며 선 채로, 끝까지 버티면서 죽음에 이를 때 비장미가 발현된다. 홍콩 영화 최초로 등장한 이 젊은 남성들의 영시네마가 홍콩의 가장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인 1967년과 1968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우삼이 장철을 다시금 불러오고 있을 때, 이 영화들은 마찬가지로 불의와 폭력의 세계에 대한 정치적 주체의 정동을 반영한다. <영웅본색>이 홍콩영화 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그해 홍콩은 다가오는 1997년을 어둡게 만드는 사건으로 들끓고 있었다. 1986년 홍콩 센트럴에서 약 50미터 거리인 다야만에 설립될 중국의 핵발전소 건립계획은 홍콩 내의 격렬한 반대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사건은 이 반대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 노동자, 시민단체 등이 결집한 ‘다야만 핵발전소 건설보류 연석회의’가 중국정부에 제출한 반대서명에는 참여한 숫자는 당시 홍콩인구의 1/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오우삼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 첩혈쌍웅 >은 1989년 천안문 사태와 ‘본토’의 폭력을 목격한 홍콩 시민들의 광범위한 불안을 반영하였다. 1987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홍콩 느와르에 대한 한국의 젊은 남성들의 열광은, 홍콩의 정치적 맥락과 전혀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정동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인의와 그 인의를 보장하는 투쟁중인 집단의 형제애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왜, 한국의 젊은 남성들에게 주윤발은 ‘따거(大兄)’가 되었는가? <영웅본색>이라는 저 정념의 활극의 핵심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감내하는 헌신적인 형제애이다. 주윤발의 몸이 말 그대로 무수한 총알구멍들로 뚫려질 때, 그는 온몸을 부서뜨리며 이를 수행한다. <영웅본색> 2편에서 죽은 마크-주윤발의 총알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코트가 등장할 때 그것은 형제를 위한 이 죽음의 순간을 거의 물신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죽음을 무릅쓰는 이 형제애의 감정경제는 1987의 저 광범위한 연대, 세계의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남성) 동지들의 연대와 그 속에 작동하고 있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젠더적 편향성까지를 모조리 담아낸다. 다시 말해 이 의리란 세계의 부정과 대치하고 있는 (남성) 형제들 간의 의리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웅본색>의 ‘번역가능성’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1987의 <영웅본색>은 한국과 홍콩영화 사이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일종의 외주제작된 정념의 ‘번안물’로서 이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형제애의 로망, 1987의 정동—<영웅본색>과 홍콩-한국 커넥션」을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1) ”구회영,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한울, 1991, 205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홍준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로드쇼에 연재한 글을 묶어 출간한 이 책은 새롭게 등장한 시네필들의 관람 실천의 안내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최초의 ‘컬트적’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이 관점에서 보자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 관객들이 처음으로 시네필이라는 ‘세계’관객의 시민성을 향유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영웅본색> 이후의 홍콩 갱스터 영화를 일괄했던 이 표현은 일본과 한국의 저널리즘에서 즐겨 유통되었다. ‘필름 느와르’라는 매우 특화된 역사성과 내러티브-이미지를 지닌 영화 장르명을 원용해오고 있는 이 용어에 대해 우다가와 코우요는 <영웅본색>의 일본에서의 공개 당시, 일본 배급회사 선전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전한다.(野崎歓・宇田川幸洋対談「香港犯罪映画の魅力」, 夏目深雪、石坂健治、野崎歓編, 『アジア映画で<世界>を見る』, 作品社、2013, p.110) 대개의 저널리즘적 표현이 그러하듯 엄밀한 의미를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직관적인 포착이 가능한 이 용어는 거의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즐겨 사용되었다. 한편, 홍콩에서는 <영웅본색> 이후 등장한 일련의 갱스터 영화들에 대해 ‘영웅편(英雄片)’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3) 홍콩영화 향유의 초기부터 있었던 개인적 기억과 결부된 ‘체험’으로서의 홍콩영화에 대한 매혹적인 서술의 사례들로는 다음을 참조. 오승욱, 「어느 장철교 신자의 신앙고백- 나는 왜 그렇게 장철 영화를 좋아하나?」, 『KINO』 2003.7/ 정성일, 「장철의 무협영화에 바치는 피끓는 십대 소년의 막무가내 고백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4) 1971년 쇼브라더스에서 장철의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오우삼 자신이 1970년대의 홍콩-한국 커넥션을 직접 경험한 자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의 공식적인 감독 데뷔작 <여자태권군영회 女子跆拳群英會>는 한국 관객들의 홍콩영화에 대한 저 친밀함이 1970년대의 어떤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저변화되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불어닥친 이소룡 영화의 붐 이후 국가적 전략으로까지 제시된 ‘태권도 영화’와 호응하여 만들어진 이 합작영화는 한국에서 올로케 촬영되었다. 김창숙과 남산식물원과 경복궁을 주된 시각적 재료로 삼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 1974년 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 감독 오우삼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동아수출공사가 제작하고 김명용이 감독한 ‘한국영화’ <위험한 영웅>으로 개봉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 오우삼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여자태권군영회>라는 원제목을 달고 한국에서 VHS로(세경) 출시된 바 있다. 5) 『동아일보』 1990.9.20 6) 「国村準インタビュー」, 宇田川幸洋編集, 『キネ旬ムック フィルムマーカーズ⑫ ジョン・ウー』, キネマ旬報社, 2000, p.74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전세계의 노동자여, ‘감각’으로 단결하라 간결한 묘비명, Bruce Lee 1940-1973. 번쩍 번개가 화면을 가로지른다. 죽은 브루스 리=이소룡이 무덤에서 뛰어오른다. 그 위로 프레임을 가득 채우며 뜨는 사각의 타이틀.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Bruce Lee Fights Back from the Grave). 묘비 앞의 브루스 리가 죽음의 천사를 향해 그 특유의 포즈로 주먹을 불끈 들어보이고 있다(왜인지 모르겠지만 죽음의 천사 발치에는 반라의 여성이 놓여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말도록 하자). 어쨌건 이쯤에서 우리의 기대치는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된다. 무덤에서 돌아온 브루스 리가 죽음의 천사와 맞서 싸울 것이다! 빠르고 강력한 비트 사운드가 계속되는 가운데 거대한 비행기가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며 날아간다. LA 공항,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가 공항을 나선다. 그는 누구인가? 브루스 K. L. 레아(Bruce K. L. Lea). 그야말로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브루스인가? 비록 브루스 리가 아닌 브루스 레아지만…. 아마도 당신이 이런 영화들에 익숙하다면 수다한 ‘브루스’들에 대해 잠시 숙고해볼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Bruce Li(何宗道), Bruce Le(呂小龍), Bruce Leung(梁小龍), Bruce Lei(혹은 Dragon Lee, 巨龍), Bruce Lai(張一道), Bruce Thai(張正義) 등. 브루스 K. L. 레아, 당신은 누구인가? 그런데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저 강렬한(!) 오프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의 본편이라 할만한 것을 채우는 것은 이두용의 < 아메리카 방문객 >이다. 1976년 ‘최초의 태권 미국 올로케 감행작품’으로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그러나 영어 더빙을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되어 있다. 형의 복수를 위해 라스베이가스에 온 한국인 ‘한욱’(정준)의 이야기(그러니까 저 브루스 K. L. 레아는 정준이다)는 친구이자 스승인 위대한 무도인의 죽음을 파헤치는 홍콩인 웡핸의 이야기로 바뀐다. 물론 인종적 구도는, 당연한 말이지만,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아시안 남성은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젊은 백인 여성의 흠모를 받는다. 젊은 백인 여성은 아시안 남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아시안 남성은 백인, 흑인, 멕시칸으로 구성된 악당들을 처치한다. 그럼에도...나는 지금 ‘본편이라 할만한 것’이라고 애써 모호하게 말하고 있는 중이다.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가 실은 <아메리카 방문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씬을 추가하고 전혀 새로운 사운드를 입히고 더빙을 한 자들의 노고는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 것일까? 참고로 홍콩의 양츠 프로덕션(Yangzte Production)이 제작사로 명기되어 있는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의 예고편을 참조컨대 이 영화는 197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브루스 리의 죽음 이후 5년, 그가 무덤에서 돌아온다!” 이소룡은 알다시피 1973년에 죽었다). 또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의 몇몇 언어 버전은 감독 Umberto Lenzi로 명기되어 있기도 한데, 움베르토 렌치가 한때 유럽 B급 영화시장을 석권했던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의 대표적 이름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바꿔치기는 이런 영화들이 전세계의 어떤 시장에 소구하는 것이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아메리카 방문객>-<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와 같은 사례, 편집 버전에 따라 이름이 교체되거나 씬의 추가와 더빙을 거쳐 지역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변환되는 사례는 소위 브루스플로이테이션이라고 이름붙여진 영화들의 세계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 영화들은 도작과 도용, 자르기와 이어붙이기 1) 로 악명 높다. 사실 이소룡의 유작이라고 선전된 < 사망유희 > 조차 그가 살아 생전 찍었던 단 10퍼센트의 필름 푸티지와 그의 대역들(이미 소개했다시피 그중 한명은 당룡이라는 예명으로 알려진 한국 출신의 김태정이다)을 써서 찍은 필름들, 그리고 여타 영화 필름의 짜깁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도작과 도용이라는 관점으로 원본과 아류의 위계를 정한다는 것은 이미 무리가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 세계는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이윤을 얻고 싶어하는 장사치들의 세계다. 몇 가지의 예들. Joseph Velasco라는 이름이 디렉터로 명기된 <My Name Called Bruce>는 한국영화 <왕도>로 확인되며, 감독은 이혁수이다. Joseph Velasco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이름은 아마도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가장 빈번히 마주치는 이름 중 하나일 터인데, Joseph Velaco 또는 Joseph Cong이라고도 불리는 이 다작의 ‘작가’는 1년에 평균 3편에서 4편을 만들고, 자신의 영화 거의 대부분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틈틈이 프로듀서로도 활동하였다. 또 유행에도 대단히 민감하여 ‘Bruce’가 들어가는 제목의 영화들을 1970년대 내내 찍다가 70년대 후반 소림사(Shaolin) 영화들이 붐을 일으키자 브루스와 소림사를 섞고(<Bruce Shaolin Bronzemen>), 성룡의 <취권 Drunken Master>(1978)이 흥행에서 성공한 이후에는 곧바로 <Drunken of Fire>라는 제목으로 거룡(브루스 레이)의 술 취한 권법을 선보인 바 있다. 홍콩영화 데이타베이스(HKMDB)와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에 따르면 Joseph Velasco는 대만 출신의 강홍(江洪)이다. 그렇다면 Joseph Velasco의 영화들은 이 이름의 ‘본명’인 강홍의 작품인가? 이미 눈치챘겠지만, Joseph Velasco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은 도작이거나 도용이거나 짜깁기이다. 마찬가지로 Joseph Velasco의 또 한편의 영화 <Ninjas VS Bruce Le aka Condor Of Bruce Lee>의 첫 화면은 Ocean Shores라는 회사가 카피라이트를 가지고 있음을 명시한다. 그런데 1986년을 제작년도로 명기하고 있는 이 영화는 <My Name Called Bruce>(1978)와 <Return of Bruce aka Dragon Returns>(1977), <Enter the Game of Death aka Bruce the King of Kung Fu>(1978) 등 최소한 세 편 이상의 영화를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한국에 마약수사를 하러 온 홍콩 수사관은 영화의 1/3 지점에서 뜬금없이 인신매매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데, 일련의 대결씬을 끝내고 ‘홀연히’ 한국으로 돌아온다. <Enter The Game Of Death>의 영어 버전에서 감독은 James Nam으로 명기되어 있다. James Nam은 1960년대 후반부터 쇼브라더스에서 활동했으며, 1970년대 이런 영화들의 감독이자 배우로 나왔던 남석훈(또는 Nam Gung-Fan)에게 자주 쓰이던 예명이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전혀 다른 편집 버전의 한국영화 < 십자수권 >으로 개봉되었다. <십자수권>의 크레딧에 명기된 감독 이름은 최원형이다. 남석훈의 또 다른 영화 < 속정무문 >은 <Bruce And Shaolin Kung Fu>라는 제목의 다른 편집 버전으로 옮겨졌을 때, Joseph Velasco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또 <Bruce and Shaolin Kung Fu 2>와 관련있다. 한국에서는 < 신정무문 >이라는 제목의 한국영화로 개봉했고, 남기남이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는 <Bruce and Shaolin Kung Fu 2>는 버전에 따라 James Nam과 Alberto Golango라는 서로 다른 이름이 감독으로 명기되어 있다. 너무 번다하다고? 그럴지도. 이런 영화들의 세계 안에 들어서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서 무엇이 오리지날이고 무엇이 도작과 도용인지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망해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지구적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의 경로에 올라선 순간(이를테면 <아메리카 방문객>의 경우) 이 영화들에는 감독, 배우, 제작자 등의 특정 이름들이, 한 편의 영화를 규정짓는 최저치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닫힌 체계로서의 작품(work)이라는 개념이 차례로 사라진다. 요컨대 이 영화들은 국적뿐만 아니라 제작 주체마저 불분명해진 채 시장을 떠도는데, 어떤 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복수의 영화들의 재편집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각각의 지역의 유통업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더 정확히는 자신의 관객들이) 선호하는 언어로 더빙해서 판매했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들을 한국영화사라는 맥락으로 복원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니,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여기서는 내셔날 시네마가, 내셔날 시네마를 이루어내는 감독, 배우, 제작자 등의 특정 이름들이, 한 편의 영화를 규정짓는 최저치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닫힌 체계로서의 작품(work)이라는 개념이 차례로 사라진다. 만약 근대예술이 소유권(나아가 지적재산권)과 개인의 확립, 이를 뒷받침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영화-상품들로 저 세 가지 개념들이 사라질 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상품들은 1970년대 이소룡의 사후 아시아 각 지역에서 양산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비디오 시장에서 가장 싼 염가의 상품으로 전지구적으로 공급, 유통되었다. 그 속에서 한국, 홍콩, 대만, 필리핀 기타등등 여타의 장소들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아시안’이라는 기표로 수렴되었으며, ‘아시안 마샬아츠 필름’으로 명명되었다. 이 영화들이 국적과 만든 자들, 완결된 체계로서의 작품이라는 개념에 그토록 무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영화들을 보는 자들이 여기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계급적으로, 젠더적으로, 세대적으로 명확하게 분할된 장소들, 도시 변두리의 재개봉관, 소극장, 그라인드 하우스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소구되었다. 이 장소들을 채운 것은 한국, 홍콩, 대만, 필리핀 등지에서 값싸게 만들어진 영화들이었다. 1970년대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염가의 상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싼값에 도시 하위계층 젊은 남성들에게 소구되었다.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같은 영화들이 더없이 흥미로워지는 순간일 것이다. 저 영화들은 이 지역의 영화가 거의 최초로 ‘글로벌’하게 소비된 사례이다.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고급 생산품들의 반대편에 놓인 가장 싼 상품으로서. 싼 값에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잘라지고 이어붙여지는 것을 대가로. 전세계의 하위계층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 플랫한 소비 속에서 이 영화들은 상품의 형태를 얻은 순간 비로소 세계성의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전세계 노동자들의 (무의식적인) ‘감각적’ 단결과 전세계 자본의 순환이 함께 거기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한국 상품은, 다른 아시아의 상품들처럼 저임금 노동의 값싼 상품이라는 점에서 ‘경쟁력’을 지녔다. *** 1) 아시안 마샬 아츠 필름의 팬사이트인 Kung Fu Fandom의 한 팬은 이런 류의 영화들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자르고 이어붙인(cut and paste)’ 영화들을 정말로 사랑해요” http://www.shaolinchamber36.com/kungfufandom/index.php?/topic/2543-my-man-godfrey-ho-the-ifd-appreciation-thread/&tab=comments#comment-21806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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