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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① 동명극장(東明劇場), 대보극장(大寶劇場) 1923년 조선인상공업자로 구성된 함흥상업회 산하 흥행단체 흥화조합(興化組合)에서 건립한 영화관이다. 연극 공연은 물론 함흥의 대표적인 집회장소로 활용되었다. 함흥의 3개 영화관이 경쟁하던 1932년 당시 동명극장의 입장원은 대인 33,667명, 소인 19,646, 금액 7,563원으로 함흥극장보다는 미치지 못하지만 진사관과 비슷한 수준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었다. (<咸興三映畵館七年度成績>, 《朝鮮新聞》, 1933.01.20) 1936년 함흥상업회는 흥화조합을 주식회사 동명극장으로 바꾸었다. 당시 극장운영을 맡았던 김영선연예부(金永善演藝部)는 극장 임대료로 한 주당 12원 50전씩 지불했다. ( <분규 거듭하든 동극(東劇) 문제 단락(段落)>, 《동아일보》, 1936.05.19) 1940년 들어서서 동명극장은 대보극장(大寶劇場)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성주(李成周), 지배인은 김하룡(金河龍)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진사좌(眞砂座), 진사관(眞砂館),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 함흥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극장으로 함흥부 본정에 있었다. 진사좌를 운영하던 시마네(敷根角市)는 함흥의 실업인으로 재목점, 운송점과 더불어 진사좌연예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1925년 5월 운영자 시마네(敷根角市)가 기존의 낡은 건물을 수리하여 확장하였다. 1927년 1월 진사좌는 문화연예사 직영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된다. 이때 이름을 진사관으로 바꾸었다. 문화영화사는 경성 희락관 악장으로 이름이 높던 시라이(白石蘇山)와 마츠무라(松村英)가 진사관을 경영하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眞砂舘の老人優待>, 《朝鮮新聞》, 1927.05.14) 1930년 무렵 진사관의 흥행권을 인수한 쿠니이 (國井勝英)는(<咸興眞砂舘開業一周年>, 《朝鮮新聞》, 1931.05.31) 1931년 5월 개업 1주년을 맞아 낡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한다. 1931년 8월 신축 허가를 득하고 공사에 들어가 1931년 11월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6만원이었다. 이즈음 진사관은 쇼치쿠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廣告>, 《朝鮮新聞》, 1933.07.03) 진사관은 1940년대 들어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茂信)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함흥극장(咸興劇場) 1923년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 함흥극장이 조직되어 이 자금으로 함흥부 대화정에 건립한 극장이다. 공사비 1만 6천여원이 들었다. 초기 운영자는 타마키(玉置省三)였으며, 1928년 4월부터는 츠지(辻平三)가 1년에 3천원 씩의 임대료를 내기로 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大咸興の展望>, 《朝鮮新聞》, 1933.07.03) 1933년 당시에는 닛카츠와 신코키네마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츠지(辻ヤス子)였으며 고바야시(小林豊三)이 지배인이었다. 총 75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명보극장(明寶劇場) 1940년 함흥부 소화정에 이기진(李基進, 창씨명 芝山基進)이 건립했다. 3층 콘크리트 건물로 함흥역 가까이 위치했으며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박노홍은 경성의 명치좌에 지지 않는 극장이라고 평한 바 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이기진, 지배인은 다케모토(武本光洋)였다. ⑤ 함흥문화극장(咸興文化劇場) 함흥부 소화정에 있었던 문화영화 상영관으로 객석은 200석이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오쿠야마(奧山歲一)였으며 지배인은 하야시(林英一)였다. ⑥ 원산극장(元山劇場), 유락관(遊樂館) 원산극장은 1921년 9월 원산부 천정(泉町)에 설립되었다. 개관 당시 일본 코우카츠(國活)와 제휴하였다. 이후 연극, 영화의 상영은 물론 각종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나 1925년 11월 15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피해액은 6만 5천원이었다 .(<원산극장 전소(全燒)>, 《동아일보》, 1925.11.17) 원산극장이 있던 자리는 한동안 빈터로 있었다. 후쿠이(福井伊三郞)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유락관이 설립되어 이곳에 극장건립이 추진된다. 1926년 11월 30일 건물이 완공되어 영업을 시작했고, 1930년 활동사진관 수좌가 등장하여 경쟁체제를 갖추게 되자 닛카츠와 쇼치쿠 등과 계약을 맺고 혁신을 꾀하기도 했다. (<大改革の元山遊樂館披露>, 《朝鮮新聞》, 1930.12.03) 1933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수좌와 합병을 꾀하지만 무산된다. (<元山の兩常設館合併問題具體化>, 《朝鮮新聞》, 1933.10.26) 일제말기까지 원산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있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후지사와(藤澤正人)이며 지배인은 고이즈미(小泉昇三)였다. 객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후 신영관(新映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⑦ 수좌(壽座), 대승관(大勝館) 원산부 경정(京町) 36번지에 있던 극장이다. 원산의 토목건축청부업자인 우메다(梅田市治郞)의 주도로 조직된 주식회사 수좌에서 1930년 설립했다. 도아(東亞), 데이키네(帝キネ)의 영화를 상영하며 유락관과 더불어 원산의 양대 일본인 영화관으로 등극했다. 1931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주식회사 유락관과의 합병 문제로 잠시 휴관을 했다. (<元山の毒座>, 《朝鮮新聞》, 1931.06.14) 1933년 주식회사 유락관과 합병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되었고 1935년 6월 21일 새벽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5년 주식회사 수좌는 소실된 수좌의 재건을 추진한다. 새롭게 건축된 극장의 이름은 대승관(大勝館)이었다. 극장 신축을 위해 주식회사 수좌는 자본금을 12,100원에서 20,000원으로 늘려 주식회사 대승관으로 전환한다. 1943년 당시 대승관의 흥행주는 고이즈미(小泉昇三), 지배인은 요시오카(吉岡玉男)이었다.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⑧ 원산관(元山館) 원산부 북촌정에 건립한 활동사진관으로 1928년 1월 23일 구정을 맞아 개장했다. 1927년 1월, 원산시영회(元山市榮會)의 알선으로 공회당 겸 극장을 짓기로 하고 노기만(盧紀萬) 등 원산 거주 조선인 실업가들이 발기하여 조직한 주식회사 원산관이 설립을 맡았다 .(<『원산관』 발기>, 《중외일보》, 1927.01.20) 원산관의 흥행주는 보통 주주총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설립 이후 김창준(金昌俊) 등이 맡아 운영했다. (<원산관 쇄신>, 《중외일보》, 1930.03.30) 흥행주인 김창준은 1930년 원산관 산하에 원산관연예부를 조직하여 연극 공연 등을 펼쳤는데 호응이 좋아 인근 함흥의 동명극장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원산관연예부에 초차관(初次舘) 외 출연>, 《중외일보》, 1930.10.04) 1933년 3월 원산관에서는 원산 최초로 토키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자는 김낙진(松平洛鎭)이며 660개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방 후 원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⑨ 희락관(喜樂館) 흥남읍 구룡리에 위치한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8년 12월 흥남의 교통사고 기사에서 사상자들이 희락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조선질소비료회사 사택으로 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 관객의 대부분이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사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남 뻐스열차 충돌사건 상보(詳報)>, 《동아일보》, 1938.12.06)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에다(前田長太郞)였으며 지배인은 삼촌건삼이었다. 5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⑩ 흥남관(興南館) 흥남읍 천기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경성 중앙관의 흥행주인 오이시(大石貞七)이며 지배인은 가메야마(龜山嘉介)였다. 총 5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흥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⑪ 소화관(昭和館) 흥남읍 송상리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11월 극단 고협이 이곳에서 공연 중 극장 2층이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와타(砥綿啓太), 지배인은 타치바나(立花三郞)였다. 총 87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⑫ 흥남문화영화극장(興南文化映畵劇場) 흥남읍 호남리에 있던 문화영화 전용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도타니(門谷淸), 지배인은 마츠오(松尾辰次郞)였다.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⑬ 용흥극장(龍興劇場) 흥남읍 용흥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野虎雄)였다. 9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단천좌(端川座) 단천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오모토(大元貞珪), 지배인은 시라키(白木義信)이었다. 742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⑮ 단천극장(端川劇場) 단천읍 내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설립자는 함흥출신의 최두진(崔斗鎭)으로 흥행계통에서 일하던 인물이다. (<흥행계에 권위 단천극장주 최두진(崔斗鎭)씨>, 《동아일보》, 1939.10.03) 1943년 단천군총력연맹에서 막간 강연을 추진할 장소로 단천좌와 함께 지목된 곳이다. 하지만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영화관이 아닌 연극장으로 구분되었거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⑯ 혜산극장(惠山劇場) 혜산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安田隆一)이며 객석수는 455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신포극장(新浦劇場) 신포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야마(中山賢一)이며 객석수는 400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고사관(高砂館) 북청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康弘)이며 좌석수는 489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홍원좌(洪原座) 홍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홍춘선(洪春善, 창씨명洪村春善)이며 4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⑳ 흥락관(興樂館), 고원극장(高原劇場) 흥락관은 고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1936년 12월 23일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 등이 합자하여 7천여원의 경비를 들여 만들었다. 고원을 대표하는 장소로 뒷날 고원극장(高原劇場) 으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교우코쿠(岐谷亮吉)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1. 삼우회관(三友會館) 천내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노(水野長一郞)이며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2. 영흥극장(永興劇塲) 1935년 10월 12일 영흥군에 건립된 극장으로 개관 당시, 함흥의 동명극장을 경영하던 김영선연예부가 운영을 맡았다 .(<영흥극장 수(遂) 개관>, 《동아일보》, 1935.10.13)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연극장으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매일신보≫, 1936.12.29. 고원(高原)에 극장, 입삼일(廿三日) 개관 【고원】 약진도상에 잇는 고원은 발전 여지가 풍만하여 점차 도시의 기풍을 정(呈)하고 잇다. 그러나 아직 오락기관이 업서 간혹 순업흥행단이 차저주면 일대(一大) 울회(鬱懷)를 느끼든 시민의 위안이나 되엿지만 겨우 가설극장에서 풍우설한(風雨雪寒)이면 불편무비(不便無比)하든 바 시내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씨 등 유지 제씨가 합자하야 약 七천여원의 경비로 흥락관(興樂館)이란 극장을 건축하엿는데 거(去) 二十三일에 낙성식을 거행하고 동일(同日)부터 三일간 개관기념을 하게 되여 매야 입장객에게 추첨권까지 배부하여 좌기와 여(如)한 경품을 수여하엿다. 一등 一인 백미 一叺 二등 一인 궤종시계 一座 三등 一인 경대 一座 (사진은 건축된 흥락관) [자료] ≪朝鮮新聞≫, 1931.06.14. 元山の壽座 開館に决定 (元山)元山壽座は活動常設遊樂館に對抗し優秀な活動や芝居等を上映興業してフアンを喜ばせるたが突如休館遊樂館に合倂問題が起り一時は一般から成行を注視されてるたが重役會議で開館續行に決定し今後三村敏郞氏が經營の任に當り從來の東亞,帝キネの外新に日活とも特約嶄新なる映畵を上映してフアンの待望にそひ開館隆盛を期することゝなつた [자료] ≪중외일보≫, 1927.01.26. 본보(本報) 독자위안(讀者慰安) 대흥행, 함흥 진사좌(眞砂座)의 개관 기념 함흥에 잇는 극장의 효시로 일반사회에도 공헌이 만튼 진사좌는 근래에 미미(微微) 부진 중에 잇든 바 래(來) 二十五일부터 문화연예사의 직영으로 상설관이 되얏는데 기(其) 벽두로 래(來) 二十五일 야(夜)에는 봉황의 면류관을 봉절할 터이라 하며 래(來) 二十七일 오후 七시반부터는 본보 독자를 위하야 三일간 무료로 흥행하리라는데 단(但) 하족료(下足料)만 받으리라더라(함흥) (우대권은 欄外에) [자료] ≪시대일보≫, 1925.11.20. 원산극장 전소(全燒) 손해(損害) 六만원 【원산】 원산 오락기관의 하나로 또 원산의 유수한 건물인 원산극장은 十五일 오전 三시 四十분에 발화되어 소방대의 전력을 빌엇으나 겨우 五시 三十분에 소화되어 극장은 전소되고 인가(隣家) 二三동까지 소화되엇는데 손해는 약 六만원이라고 [자료] ≪매일신보≫, 1918.10.29. 함흥 활동상설 개관(活動常設 開館) 금춘(今春) 이래 신축 중이던 만세관(萬歲館)은 유유(愈愈) 기(其) 내부의 설치 등이 완성되야 十월 二十五일 야(夜)부터 개관한바 비상한 호평을 박(博)하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5.03.12. 동명관(東明舘) 기념 【함흥】 함흥부 내에서 오직 하나만인 군선인 경영 영화상설관인 동명극장(東明劇場)은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야 이제 개관 八개년 기념으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지난 九일 함흥 일반 유지를 춘경원(春慶園)에 초대하야 간담회를 개최하고 고급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저렴한 요금으로 공개하엿다는 바 지금은 함흥부내에서 다른 영화관에 손색이 없을만큼 모든 설비를 하엿다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0.04.28. 흥남에 각 극장 수입, 四개월간 六만여원 【흥남】 지난 四월부터 七월까지 四개월간 흥남읍내 각 연극장에서 흥행한 활동사진과 연극들의 관람료금을 조사한 통게 수자는 六만四천五백六원 五十전으로 이에 대한 인원수는 一六六,七三二명이라 한다. 작년 동기에 비하면 약 二활 증가라 한다.
이번 글에서는 강원도와 충청 지역의 극장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강원도의 극장이다. ① 춘천극장(春川劇場), 읍애관(邑愛館), 춘천영화극장(春川映畵劇場) 1930년 10월 25일 춘천에 설립된 극장이다. 설립자는 미네마츠(峯松勝利)라는 인물로 공회당에서 흥행이 이루어지던 춘천에 일본의 도아(東亞)영화를 가져와 상영하던 인물이었다. (<춘천에 극장>, 《매일신보》, 1930.9.26. ; <춘천극장 낙성>, 《동아일보》, 1930.11.01.) 1934년 2월부터는 경성의 대정관에서 직영하였다. (<春川劇塲は大正舘直營>, 《朝鮮新聞》, 1934.02.17) 이는 쇼치쿠에서 직접 극장운영에 참여한 것이었는데 이 무렵 쇼치쿠 경성봉절관이 대정관에서 동아구락부로 바뀌게 되면서 대정관을 대신하여 동아구락부를 경영하던 덕영상회에서 춘천극장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면서 춘천극장이라는 이름을 읍애관(邑愛館)으로 바꾸었다. 읍애관은 1937년부터 나카지마(中島太郞)가 운영을 맡았다. 1940년에는 공회당을 임차한 분도흥행부와 필름 배급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1941년 협소하고 낡은 시설을 새롭게 개축하면서 이름을 읍애관에서 춘천영화극장(春川映畵劇場)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지마(中島太郞)이며 총 객석 수는 700석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24일 전소되었다 .(<춘천극장 전소(全燒)>, 《대동신문》, 1945.12.29) ② 장전극장(長箭劇場)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38년 이곳에서 금강기자구락부 주최의 영화대회와 가수선발 콩쿠르가 치러진 바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이토(內藤吾郞)이며 좌석수는 478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강릉극장(江陵劇場) 강원도 강릉읍 본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1938년 5월 최돈승(崔燉昇)이 세웠다. (<강릉극장 신설>, 《매일신보》, 1938.04.29)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오야마(大山弘)였으며 좌석수는 59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철원좌(鐵原座) 철원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극장은 철원좌(鐵原座)이다. 1913년 11월 초에 마술공연이 펼쳐졌는데 대정제불락천일행(大正齊不落天一行)의 마술 공연이 펼쳐져 매야 성황을 이루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후 철원좌의 행방은 알 수 없다. ⑤ 철원극장(鐵原劇場) 강원도 철원군 관전리에 있던 극장이다. 1931년 11월 3일 철원지역 유지들이 조합을 조직해 설립했다. 1934년 1월 조합을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기로 하고 나카시타(中下岩太郞)를 대표로, 자본금 8천원의 주식회사 철원극장이 조직된다. 1939년 경성극장을 운영하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흥행권을 인수한 후 경영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와케지마(分島周次郞)이며 지배인은 나가마츠(永松次一)이다. 400석의 객석을 지니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⑥ 삼척극장(三陟劇場) 강원도 삼척읍 남양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9년 8월 26일 개관했다. 야마모토(山本權右衛門) 외 19명으로 구성된 자본금 2만원의 삼척극장조합이 건립했다. 1941년 삼척극장조합은 유한회사 삼척극장으로 조직을 변경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삼척극장, 지배인은 다나카(田中政春)이다. 객석수는 408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⑦ 북평극장(北坪劇場) 삼척군 북평읍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9년 11월 16일 개관했다. (<삼척 북평극장 개관식>, 《매일신보》, 1939.11.2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유한회사 북평극장조합, 지배인은 마츠무라(松村彦祐)다. 700석의 객석을 지니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⑧ 고저좌(庫低座) 강원도 통천군 고저읍 하고저리에 건립된 극장이다.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40년 ‘황기 2,600년 봉축식’ 기념으로 입장권을 할인한다는 내용이 보도된 적이 있다. (<고저좌 할인>, 《매일신보》, 1940.11.12)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하쿠린(伯麟宇一)이며 64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⑨ 묵호극장(墨湖劇場) 강원도 명주군 묵호읍에 건립된 가설극장이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타(丸田祐三)이었다. 해방 후 기록에는 일본인 흥행주의 이름을 따서 환전극장(丸田劇場)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충청북도의 극장이다. ⑩ 앵좌(櫻座), 청주극장(淸州劇場) 앵좌는 충청북도 청주읍 본정 1정목에 있던 극장이다. 1916년 12월 15일 개관했다. 극장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청주경찰서의 사이토(齊藤) 경찰서장으로 극장의 임대수익은 청주소방조의 경비로 이용하였다. 청주의 대표적인 흥행장이자 집회장소로 이용되던 이곳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소의 협착과 설비의 낙후 등이 문제로 떠올랐고 이를 이유로 극장 신축을 꾀하게 된다. 극장 신축 이전을 위한 실행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건물이 설계된다. (<청주 극장 앵좌 이전신축 준비>, 《매일신보》, 1935.11.24) 1937년 새로운 극장이 완성되어 이전하면서 앵좌는 청주극장(淸州劇場)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노우에(井上好雄)이며 객석은 623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대화극장(大和劇場) 충주읍 대화정(大和)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32년~1935년 무렵 충주에 있었던 중앙극장(中央劇場)이 이름을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우에다(上田章輔)가 흥행주이며 객석수는 340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마지막으로 충청남도의 극장이다. ⑫ 대전좌(大田座), 대전극장(大田劇場) 대전부 춘일정(春日町) 1정목에 있던 극장으로 건립연도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13년 무렵 각종 공연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910년대 초부터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1925년에는 공동합자회사에서 매수하여 직접 경영하였다. 대전좌를 운영했던 인물로는 1922년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나카무라(中村克登)와 1925년 공동합자회사가 매수하였을 무렵 극장을 운영했던 고마츠(小松省三) 등의 이름이 확인된다. (<대전좌 극장 대수선료(大修繕了)>, 《부산일보》, 1925.05.07) 1937년 신축을 계기로 이름을 대전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흥행주는 도쓰카(戶塚壯三), 지배인은 마츠하라(松原)이며 객석수는 7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경심관(驚心館) 대전부 대흥정(大興町)에 위치한 영화관으로 1931년 12월 20일 낙성했다. 설립자는 충남부호 김갑순(金甲淳)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타야마(片山德一)란 창씨개명한 조선인이며, 객석수 7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천만좌(天滿座) 1912년 개관하여 1910년대 중반까지 존속했던 극장이다. 1915년 대전좌에서 공연할 예정이던 상반단(常盤團)이 천만좌로 옮겨 공연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⑮ 금강관(錦江館), 공주극장(公州劇場) 1913년 11월 16일 공주군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공주읍 본정(本町)에 건설되었다.(<공주군의 새 연극장>, 《每日申報》, 1913.11.16) 공주군의 유일한 흥행장이던 금강관은 1931년 2월 20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공주에 대화(大火)>, 《매일신보》, 1931.02.22.) 금강관이 사라진 후 공주갑부 김갑순이 6천원을 들여 공주읍 욱정(旭町)에 새로운 극장을 짓고 이름을 공주극장(公州劇場)이라 정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도(木戶轍)이며 4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⑯ 예산극장(禮山劇場)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6년 광업으로 성공한 박필래(朴弼來)가 공회당 겸 극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8천원을 들여 만들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카야마(高山豊)이며 999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연좌(燕座) 충청남도 연기군(燕岐郡) 조치원읍 길야정(吉野町)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9년 조치원소방조(鳥致院消防組)가 주체가 되어 건설되었다. 1920년대 조치원극장(鳥致院劇場)이라는 극장명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상설극장이 지어지기 이전 조치원에 가설형태의 극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좌”(燕座)라는 극장명은 현상공모를 통해 선정된 것이다 .(<“燕座”と決定>, 《釜山日報》, 1939.03.08)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노(中野大五郞), 지배인은 호시야마(星山昭一)이며 35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⑱ 논산극장(論山劇場)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읍 욱정(旭町)에 있었다. 1927년 가설 형태로 설립되었으나 1936년 2월 15일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된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바무라(芝村春吉), 지배인은 이와무라(岩村憲治)이다. 38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대정좌(大正座), 강경극장(江景劇場) 대정좌는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에 있던 극장으로 1913년 9월 강경읍에 설립되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정좌가 사라진 이후 1928년 주식회사 강경극장이 조직되었다. (<江景劇塲 創立總會>, 《朝鮮新聞》, 1928.05.02) 1928년 11월 강경읍 서정에 극장을 신축하고 이름을 강경극장이라 지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최동설(崔東說)이며, 58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⑳ 천안좌(天安座), 천안극장(天安劇場)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읍 본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0년대 만들어진 천안좌(天安座)는 1929년 6월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천안지역 유지인 무라카미(村上市郞)와 시미즈(淸水茂太郞) 두 사람이 1930년 10월 17일 극장을 재건하여 운영했다. (<天安劇塲上棟式>, 《朝鮮新聞》, 1930.09.10)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무라카미(村上市郞)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1. 유락좌(有樂座), 장항극장(長項劇場) 충청남도 장항읍 본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8년 10월 1일 장항읍 승격 축하회가 유락좌(有樂座)에서 열렸다. (<장하읍 승격 축하회>, 《동아일보》, 1938.10.03)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카키(高喜次郞)였다. 해방 직후 이름을 장항극장으로 바꾸었다. * [사진](상단) 춘천공회당 사진 [자료] 《매일신보》, 1939.11.26. 삼척 북평극장 개관식 【삼척】 군민의 만흔 기대를 가지고 있던 삼척 군북삼면 북평극장(北坪劇場)은 금년 五월에 착공 이래 금번 훌륭히 준공되야 지난 十八일 오후 二시부터 同 극장에서 군내 각 관공서장 각 회사직원 지방유지 무려 四백여명이 참집한 가운데 개관식을 성대히 거행하엿다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16.12.19. 청주에셔 앵좌(櫻座)극장 낙성식 동도(仝都)에셔 ᄂᆞᆫ 사주(四州), 청추(淸州), 옥산(玉山), 오창(梧倉) 이상 사면(四面)의 위생, 소방 양(兩) 조합적립금을 기(其) 진(儘)의 이식(利息)으로 지방비를 충용하나 니보담 시내의 전무(全無) 유감(遺憾)되는 극장을 건축하여 대옥(貸屋)으로 일편(一便) 발전을 장려하며 일편(一便) 지방비를 흥산(興産)케 함이 최(最)히 상책(上策)된다는 제등(齊藤)경찰서장의 연구한 방책으로 착수한 결과 본월(本月) 十五일 오후 一시에 낙성식을 거행하얏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0.10.31. 천안극장 낙성(落成) 【천안】 기보(旣報) 천안극장 신축공사는 예정대로 진척되여 十월 二十七일에 준공되엿슴으로 당일 낙성식을 거행하얏다. [자료] 《중앙일보》, 1931.12.21. 대전 신극장 경심관(警心舘) 낙성(落成) 【대전】 대전 대흥정(大田 大興町)에 신축중이든 충남 부호 김갑순(金甲淳) 경영의 극장 경심관(警心館)은 요지음 준공되얏슴으로 오는 二十일 오후 두시부터 동극장 내에서 락성식(落成式)을 거행하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6.07.14. 예산극장 기공 【예산】 충남 예산 지방은 충남 서부의 가장 큰 도시로 각종 시설과 문화가 나날이 발전 되여 가는 중이나 민중의 집합장소와 오락기관이 없어서 막대한 불편을 느끼든바 최근 광업으로 성공한 당지 박필래(朴弼來)씨가 사회사업적 견지에 공회당 겸 극장으로 사용할만한 예산극장을 총공비 八천원으로 건축하리라는데 이미 당국에 허가 수속을 마치고 지난 二일부터 공사에 착수하엿다는데 건평 백삼십여평으로 오는 十월에는 준공되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2.01.22. 공주극장 준공, 六천원공비로 【공주】 충남공주 주민의 유일한 오락긔관인 금강관(錦江館)이 금춘에 화재로 전소되었든 바 공주읍 부호 김갑순(金甲淳)씨가 六천원의 거액으로 작년 구월 중순에 긔공하야 공사를 진행중 만 사개월만인 금월 중순에 그 공사를 마치고 불원간 낙성식을 거행하리라는데 명칭은 공주극장(公州劇場)이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1.04.01. 대전에 극장, 불원에 준공 【대전】 대전 대발전을 딸하 공주 김갑순(金甲淳)씨가 대전 조선인 본위의 대극장을 건설한다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도청 이전이 민정당의 반대로 희망이 없어지게 됨에 딸하서 극장도 중지상태에 잇든바 도청 이전 문제가 재생함에 반하여 극장도 예정대로 건축하리라는데 지난 二十八일부터 공사에 착수하얏슴으로 머지아니하야 한산하든 조선인촌에도 일대 위관을 정하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0.11.01. 춘천극장 낙성 춘천에는 오락긔관이라고는 하나도 없든바 봉송승리(峯松勝利)란 사람이 지난달부터 춘천극장의 공사를 시작하야 지난 二十五일에 그 공사가 전부 끝낫슴으로 그날 오후 七시부터 관민 수백명과 춘천 주재 각 신문긔자를 초대하야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얏다한다.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