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혼: 죽은 넋
- 감독
- 왕 빙
- 제작년도
- 2018
1920년대 후반 일군의 조선인 영화인들이 상하이에서 그들의 영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영화사에서 상해파 영화인이라고 명명될 정기탁 , 김일송(상하이 활동 당시 이름은 정일송), 이경손 , 전창근 등이 그들인데, 특히 그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정기탁은 필모그래피만 보더라도 놀랍도록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28년 상하이의 주요 영화사 중 하나였던 대중화백합(大中華百合影片公司)에서 연출한 <애국혼 愛國魂>을 통해 성공적으로 상하이 영화계에 데뷔했으며(이 영화에는 김일송이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고 있으고 전창근 또한 출연 및 각본에 참여하고 있다), 같은 해에만 < 삼웅탈미 三雄奪美>, < 화굴강도 火窟鋼刀>까지 세 편의 영화에 감독이자 출연자로 이름을 올렸다. 1929년에는 대중화백합에서 만든 9편의 영화에 감독 겸 배우로 관여하였고, 대중화백합을 포함한 영화사들의 트러스트로 이루어진 연화영화사(聯華影業公司)가 제작한 영화 <출로 出路>(1933)를 감독했으며, 1934년에 마찬가지로 연화에서 완성한 완령옥 주연의 < 상해여 잘 있거라 ! 再會吧, 上海!>를 끝으로 상하이 영화계를 떠났다.(이 시기 만들어진 영화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상해여 잘 있거라!>는 영상자료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기탁은 1934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1937년에 죽었다.) 그런데 이 이름을 한국영화사 안에서 호명해오는 데에는 적잖은 난감함이 따라붙는 게 사실이다. 정기탁은 상하이 영화계의 주류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의 <애국혼>부터 1934년의 <상해여 잘 있거라!>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영화들은 이 영화들이 제작된 대중화백합이나 연화가 중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주류적 위치만큼이나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상해영화사의 전형적인 조류와 일치하고 있다. 즉, 1928-1929년의 그의 영화들은 1920년대 후반 상하이라는 도시에서 형성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르영화의 모색과 함께 하고 있으며, 이후 연화에서 완성한 두 편의 영화 <출로>와 <상해여 잘 있거라>는 1930년대 좌익 멜로드라마들을 통해 ‘중국영화의 첫 번째 황금기’를 이끌었던 이 영화사의 전형적인 영화 패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실천들은 중국영화사의 한 장 속에 자리매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내셔널 시네마적 귀속이란, 그 네이션의 성립의 전후까지를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얼마나 사후적인 것인가? 월경자들의 실천이 ‘경계’의 이쪽과 저쪽에서 형성되는 사후적 담론 내로 수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후적 귀속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실천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시간대 안에서 사유해본다면 어떨까?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출연작까지 포함하여 무려 12편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1928-29년, 상하이라는 시공간은 특별히 흥미롭다. 1919년 9월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된 장소, 3.1운동과 5.4운동 이후 반제의 기치 아래 한중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미만했었던 시간. 나아가 열강들의 조계지이자 1차대전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활발한 산업과 무역의 거점지로서 1925년의 5.30 운동에서 시작된 반제 계급투쟁으로서의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장소, 1927년 국민당의 우경화와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이 ‘혁명’이 폭력적으로 좌절된 시간. 또한 1928년은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대중문화적 자원으로 기능할 어떤 장르영화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 <불타는 홍련사 火燒紅蓮寺>(명성영화사)의 성공으로 불붙은 무협영화 붐은 거의 이상 현상이라고 할만한 사태를 불러일으켰으며, 관객들은 홀린듯 이 새로운 장르영화가 보여주는 운동과 시각적 쾌감에 사로잡혔다. 붐이 피크에 달한 1929년 한해에만 85편이 제작된 무협영화는 1928년에서 1931년 사이 무려 250여 편이 만들어졌다. 이 조류의 한복판을 통과해갔던 동시대인의 증언처럼 말 그대로 ‘미친 물결(狂濤)’가 같았던 이 흐름에서 자유로운 곳은 거의 없었으나 정기탁이 몸담고 있던 대중화백합역시 여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호응하던 영화사였다. 1928년에서 29년까지 약 1년 반 동안 이 영화사에서 만들어진 30편의 영화 중 거의 절반이 무협영화였으며, 같은 기간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감독 혹은 배우로서 관여했던 11편의 영화 중 다수가 이 장르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영화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해왔던 자들은 상하이와 남양 일대의 공장과 농장의 노동자들, ‘농공(農工) 군중’이라고 불려졌던 자들이었다. 말하자면 무협영화는 이제 막 형성된 대규모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지역 최초의 액션영화였다. 1920년대 후반의 상하이, ‘농공 군중’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끌어모은 최초의 액션영화 장르로서의 무협영화, 이 장르와 연계되어 있는 조선인 망명자의 영화적 실천. 다시 한번 언급컨대, 이 점들을 잇는 첫 장면에 들어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애국혼>이다. 상하이 영화계에서의 정기탁의 성공적인 안착을 가능하게 한 이 영화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거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협영화 장르가 이 지역 일대에서, 나아가 화교 문화권과 상관없는 장소(이를테면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과 같은 지역을 상기해보자)에 끼친 광범위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순간은 어떤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원형이 당도한 기원의 시간이라고 할만하다. 그 첫머리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행위에 집중한 안중근 서사가 동시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통적인 문의 강조로부터 무로의 이동이 20세기 초 이 지역에서 사유되었던 근대적 국가 성립에의 열정과 이를 떠받치는 근대적 신체의 문제와 관련있다면(근대국가라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상무(尙武)’) ‘법을 범하는 무’로서의 협은 반식민지 상태의 중국과 식민지 조선에서 상상되었던 아나키한 힘에의 열정과 관련있다. 동시에 수중의 폭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자, 협객은 <애국혼>에서 국가 간 교전이라는 주권적 행위를 수행하는 자와 겹쳐진다. 먼저 안중근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에서 안중근은 1909년의 그의 거사 직후부터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찍이 량치차오가 이 거사 직후 쓰여진 「추풍단등곡 秋風斷藤曲」(1909)에서 그를 형가와 예양에 비견한 이래, 그에 관한 시문과 평전이 꾸준히 등장했으며 1919년 5.4운동 시기에 안중근 의거를 소재로 다룬 극은 반제반봉건 투쟁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중국 각지의 학생연합회에서 빈번히 상연되었던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안중근의 서사는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항일 선전대에서도 중요한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 이 이름이 지닌 반제 항일의 아이콘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의 그의 첫 번째 영화 프로젝트로 안중근 스토리를 선택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정기탁의 이 상하이에서의 첫 영화는 가히 성공적이라고 할만했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으며, 의기 충만한 격앙감”이 있는 “고상한 스토리”로 소개된 <애국혼>은 근래 ‘국산영화’ 중 사상적으로 가장 충만한 영화(《申报》 1928.11.11.)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공개 당시 쓰여진 동명의 영희(影戲)소설 碧梧, 《爱國魂》(《電影月報》1928年 第7期). 이 자료는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다. 을 통해 면모를 확인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위국(魏國)의 정치가 등박문(縢溥文)은 여국(黎國)의 간신 여용(黎庸)을 매수하여 이 나라를 침탈하고자 한다. 어느날 이들의 음모를 알게 된 샤딩춘(夏鼎醇)이 안영진(晏永鎭)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영진은 등박문을 암살하기 위해 그에게 폭탄을 던지나 실패하고 등박문의 수하에 의해 횃불로 불태워져 죽임을 당한다. 한편 영진의 아들 안중권(晏仲權)은 누이동생을 괴롭히는 위국 병사를 때려죽이고 도망치던 중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다. 몰래 상하이로 건너간 중권은 그곳에서 ‘중국인 혁명가’ 주한룽(朱漢龍)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한룽의 누이동생 아이란(愛蘭)과 사랑에 빠진다. 중권과 한룽은 서울로 잠입하여 거사를 치루려고 하나, 호텔에서 등박문을 향해 겨눈 중권의 총구는 빗나가고 만다. 중권과 한룽, 샤딩춘과 박재명은 다시 등박문의 암살계획을 세우지만, 여관 하인의 밀고로 들이닥친 위국 병사들에 의해 중권은 체포되고 샤딩춘은 죽음을 맞는다. 하인의 회개로 힘을 합쳐 중권을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한룽과 박재명. 그 와중에 하인은 죽지만 중권은 무사히 탈출한다. 중권, 한룽, 박재명은 두만강을 건너 장일성(張一成)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여기에 중권의 동생 옥실 또한 합류한다. 뒤따라온 위국 군대와의 전투에서 장일성이 죽고 자신의 어린 아들을 중권에게 부탁한다. 남은 자들은 홍콩으로 떠나 류동샤(劉冬夏)의 집에서 후일을 도모하고, 와중에 옥실과 한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한편 중권을 그리워하던 아이란은 그리움으로 병들어 죽는다. 두만강 근처의 의용군에 합류한 중권, 한룽, 재명, 옥실. 어느날 적의 상황을 정탐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룽과 재명이 위군 병사에게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재명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으로 목숨을 잃고, 고문으로 양쪽 눈을 잃은 한룽은 중권에 의해 구출된다. 류동샤로부터 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중권은 한룽에게 옥실을 부탁하고, 홀몸으로 하얼빈으로 떠난다. 드디어 등박문의 저격은 성공하고, 체포된 중권은 늠름한 모습으로 사형당한다. 등박문(縢溥文), 여용(黎庸), 안중권(晏仲權) 등 한자음의 종족성을 통해 희자(戲字)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고유명사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이야기는 1920년대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가능했던, 피식민지인과 반(半)식민지인이 항일과 구국이라는 공통의 가치로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에 관한 가장 강렬한 상상태를 보여준다. 한국 혁명가와 중국 혁명가는 거듭되는 전투와 체포, 탈출, 다시 전투를 통해 피를 나누고, 급기야 한국 혁명가가 중국 혁명가에게 자신의 동생을 부탁할 때 실제로 ‘형제’가 된다. <애국혼>은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일단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와 그다지 상관없어 보인다. 정기탁은 안중근 스토리를 제재로 삼았지만 그의 전기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이야기를 오직 암살 시도, 실패, 탈출, 추적, 전투로 이루어진 활극영화로서 다루었다. 이 이야기가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시작되는 저 순간이 어떤 전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혼>은 명백히 한국영화의 기원적 장면이라고 할만한 것을 반복하고 있다. 이 순간 정기탁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분명 1927년 조선영화 최대의 히트작 < 아리랑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을 염두에 놓고 보자면, <애국혼>은 마치 <아리랑> 이후, 혹은 <아리랑>의 저 출구 없는 결말 너머를 상상하는 소망처럼 보인다. <아리랑>의 영진처럼 <애국혼>의 중권 역시 여동생을 폭행하려는 자를 때려죽인다. 그러나 영진이 일본 순사에게 묶여 고개를 넘어가며 그저 아리랑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면 일본 ‘군인’을 때려죽인 중권은 국경을 넘어 상하이로 건너간다. <애국혼>이 반복하고 있는 <아리랑>의 이 장면은 왜 그토록 강렬한 것인가? 이 장면이 보여주는 바는 세 가지이다. 먼저 ‘그’는 자신의 수중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만큼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낫을 들어 죽인다) 둘째, 그러나 그 폭력이 발현되는 순간 그는 법에 포박당한다.(순사에게 잡혀간다) 셋째, 이 법은 당연한 말이지만 식민지 권력이 이곳에 강제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내부가 아닌 상하이라는 외부의 장소로 탈주한 <애국혼>은 바로 이 장면을 반복하면서 사적 폭력을 공적 폭력으로 옮겨온다. 즉 결투는 이제 전투로 옮겨갈 것이다. 식민과 수난의 땅으로서의 조선과 주권과 주권의 교전이 일어나는 장소로의 중국 혹은 상하이. 동시에 <애국혼>의 시작 지점이 구축해놓은 등박문을 죽이려다가 죽임을 당한 아버지 안영진의 죽음이라는 사건(이것은 안중근의 전기적 사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은 등박문 암살이라는 중권의 행위를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인 원념과 나라를 구한다는 공적인 가치를 일체화시키는(게다가 이 아버지 스스로가 ‘구국’을 위해 일어섰다가 죽임을 당한 자임을 상기해보라) 한편 이 영화를 동시기의 유행장르, 무협영화의 장르적 특성으로 밀어넣는다. 무협 장르의 내러티브적 핵심은 젊은 남자(혹은 여자)가 행하는 복수에 있다. 그 혹은 그녀는 스승, 아버지,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복수는 행위의 근본적 추동 요인이다. 그런데 복수는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종종 이들은 충과 효라는 이 세계의 ‘보편적’ 윤리를 끌어들이지만) 개인의 개인에 대한 응징, 사적 폭력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애국혼>은 항일과 구국이라는 대의를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 원념과 일치시킴으로써 한편으로 흥행 장르의 규약을 공유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로부터 영감 정도를 받아 자유로운 각색이 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중권이 의용군에 합류한 이후 등박문의 암살에 성공한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설정을 고수하고 있는 지점은 새삼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설정은 중권의 행위가 도당적 행위가 아닌 군사적 행위임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다는 이 영화의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이 순간 군사영화, 다시 말해 전쟁영화이다. <애국혼>은 아버지의 복수를 행하는 아들이라는 무협영화와 구국의 항전이라는 전쟁영화를 겹쳐놓음으로써 식민지/반식민지의 경험 위에서 형성된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하나의 원형적 틀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이제 막 시작된 무협영화의 컨벤션과 전쟁영화를 뒤섞고 있는 <애국혼>을 좀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애국혼>은 안중근이라는 실제 인물의 표상, 반제와 항일이라는 반(半)식민지 중국과 식민지 한국의 공통적 이념 하에 협과 의리에 기반한 복수 서사를 전개해나간다. 그럼으로 이 반제 ‘액션영화’에는 무림 혹은 강호라는 판타지 공간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근대 국제 정치의 교전/전쟁의 문제와 혁명 혹은 반란의 상상인 ‘협’의 문제가 교직된 <애국혼>은 소위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대표 장르로서의 ‘무협영화’를 통해 3.1운동과 5.4 운동 후의 한중연대의 정치적 움직임과 계급투쟁으로서의 5.30 운동과 동아시아적 액션이라는 문화적 과제가 어떻게 교직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투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국혼>이 절반쯤 기대고 있던 무협영화는 1931년 이후 적어도 상하이의 주류 영화 산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국민당 정부는 상하이를 비롯해 전국적 규모로 이 장르의 제작을 전면 금지하였다. 이후 중국 본토에서 거의 상영될 수 없었던 무협영화의 제2차 붐이라고 할만한 것은 1960년대 중반 홍콩에서, 정확히 첫번째의 붐을 이끌고 목격했던 자들에 의해 가능해졌다. 1920년대 말 무협영화붐의 중요 에이전시였던 천일(天一)영화사의 후신인 쇼브라더스는 1965년 <강호기협 江湖奇俠>(서증굉)을 시작으로 ‘무협신세기’를 선언하며 이 장르를 ‘모던’하게 환골탈태시키고자 하였다. 쇼브라더스의 기획은 호금전의 <대취협 大醉俠>(1966)과 홍콩 영화 최초의 백만달러(홍콩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인 장철의 <독비도 獨臂刀>(1967)로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영화들은 이제 남한으로 구획된 대한민국의 영화시장에 적극적으로 어필한 최초의 무협영화가 되었으며, 이후 이곳의 남성 하위문화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대중문화의 자원으로 기입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바로 이 기입의 순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협(俠)과 액션,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역사적 기원 - 정기탁의 〈애국혼〉과 상하이 무협영화」(홍지영 공저)를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약초극장은 대정관의 운영자 오카모토 세이지로(岡本淸次郞)가 대정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1935년 12월 경성부 약초정 41번지에 설립한 영화관이다. 약초극장의 설립은 대정관과 관련이 있다. 1934년 7월 쇼치쿠가 오랜 파트너인 대정관을 대신하여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쇼치쿠의 경성 개봉관으로 바꾸자, 쇼치쿠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1934년 10월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에 이어 대정관을 운영하게 된 오카모도 세이지로는 대정관이 쇼치쿠 2번관으로 남느니 후발주자인 PCL의 경성 봉절관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동년 11월 15일 PCL과 경성 봉절관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대정관은 서울의 가장 오랜 영화관이자 낙후한 극장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기에 PCL의 경성 봉절관의 지위도 동아구락부로 넘어가게 된다. 대정관에서는 다이토(大都)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향후 쇼치쿠영화의 경성봉절관이 되기 위해 약초정 큰길가에 약초영화극장을 신축하기로 한다. 1935년 7월 건축허가를 얻은 오카모도는 9월 말 상량식을 거행하고 극장 설립 공사를 시작한다. 극장의 설계는 조선공업협회 부회장 가와자와 미치마사(川澤道正)가 담당했으며, 건축은 이쿠타구미(生田組)에서 맡았다. 총 공사비 218,000원을 들인 이 극장은 대지 면적 약 300평, 건축연면적은 658평에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지상 4층 건물이었으며 총 좌석수 1,172석(1943년 현재 1,000석)의 대형극장으로 2개층의 관람석을 가진 순수 영화관으로 계획되었다. 1935년 12월 16일 대정관이 문을 닫았고 경성 최초의 신양식 대영화극장(“京城 最初의 新樣式 大映畵劇場)”으로 광고된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개관 기념 작품으로 유니버설 초특작 괴기영화 <화석인간>(Night Life of the Gods, 1935)과 다이토(大都)영화사의 <검운용호당>(劍雲龍虎黨)과 <말괄량이와 소년>(ジャジャ馬と坊や)이 상영되었다. 쇼치쿠의 경성 봉절관이 되려는 시도는 쇼치쿠가 명치좌(明治座)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와 손을 잡으면서 실패했다. 약초극장은 1930년대 들어선 1,000석 이상의 거대한 토키극장의 효시였다. 황금좌, 명치좌, 경성극장과 더불어 4대 상설관으로 조선의 극장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보니 당국에서는 이들 1류급 극장들을 각종 선전활동에 이용했는데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12월 본정경찰서에서는 약초극장과 더불어 명치좌, 황금좌, 낭화관에 아래와 같은 방첩표어를 게시하도록 했다. 1. 우리들 총후국민은 힘을 다하여 스파이의 암약을 방지하자. 2. 우리들 총후국민은 군기를 잘 지킴으로써 군기보호를 다하자. 3. 우리들 총후국민은 정치경제 각반의 국정의 비밀을 잘 지킴으로써 국방력을 한층 더 굳세게 하자 4. 우리들 총후국민은 황도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항상 눈과 귀를 잘 활용함으로써 스파이를 없이하자. 오카모토흥행부가 맡아 운영하던 약초극장은 개관 초기 서양영화를 위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가 점차 일본영화를 늘려나갔다. 서양영화의 경우 계통과 상관없이 자율 배급이던 상황에서 1935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의 상영이 금지된 이후에는 독일 영화를 주로 상영하였다. 일본영화의 경우 개관 초기 다이토영화가 토키영화관에 걸맞지 않은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자 1936년 4월 이후에는 PCL 영화로 계통을 바꿔 상영하였다. 경성의 PCL 봉절관으로 인식되던 약초극장은 1940년에 일어난 9개월에 걸친 흥행권 분규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1940년 2월 약초영화극장이 PCL의 후신인 도호(東寶) 영화의 경성개봉관 지위를 포기하고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와 계약을 체결하여 신코의 개봉관이 되자 도호가 위약금 5만원을 청구하였다. 도호의 소송에 약초극장이 신코키네마와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도호영화를 상영하기로 결정하자 이번에는 신코키네마에서 약초극장에 대해 7만원의 소송을 시작했다. 도호와 신코를 대상으로 한 흥행권 계약 문제는 결국 약초극장 운영자 오카모도 세이지로가 신코에 위약금 1만 5천원을 지불하고 도호영화를 계속 상영하기로 확정하면서 9개월에 걸친 분규는 일단락된다. [자료] 1941년 6월 설립된 약초악극단(《매일신보》, 1941.06.08)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어 필름 부족현상이 일어나자 약초극장에서는 어트랙션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악극을 영화와 함께 상연하기로 하고 전속의 악극단을 두기로 하고, 1941년 6월 조선연예기업사 사장 안익조가 주재하는 신흥악극단을 전속으로 삼았다. 신흥악극단이 이름을 바꾼 약초악극단 내에는 정대택, 김영택, 백란, 김연실 등 연극,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인물들과 밴드까지 60여명의 단원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개막 공연작은 박운학 연출의 <그리운 멜로디>, <반도의 선율> 등이었다. 약초극장의 어트랙션의 큰 인기를 끌면서 1941년 7월 말부터는 <바다의 카니발>(전13곡)로 프로그램을 바꿔가며 연장공연을 계속했다. 전속의 악극단을 둔 약초극장은 1941년 8월 8일부터 9월 2일까지 무대공연에 걸맞게 개축하게 된다. 1943년에는 무대 공연활동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극장 전속의 가극단을 조직했다. 이번에는 기성의 극단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약초극장 주인 오카모토 세이지로가 대표가 되어 가극단을 조직한 것이다. 총무는 약초극장의 지배인 우라노 하지메(浦野元), 연출은 김승구, 작곡은 이면상, 단원으로는 김옥춘, 현정남 등이 포진되었다. 1943년 7월 27일 당국에 정식 인가를 받은 약초가극단은 8월 8일 약초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자료] 연극전용관으로 전환한 약초극장 전속 약초가극단의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4.11.23) [자료] 약초흥행주식회사 직속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5.05.15) 영화관으로 운영되던 약초극장은 1944년 11월 23일 연극전문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약초극장에서는 예원좌(<별의 합창>, <봄바람>, <어머니와 아들>, <눈 나리는 밤>), 고협(<흰독수리>, <삼남매>, <만리장성>, <상아탑에서>, <양자강>), 현대극장(<백야>, <청춘의 윤리>, <대추나무>, <에밀레종>, <애정무한>), 극단 태양(<야화>)의 연극공연과 후생악단, 경성교향악단의 음악회, 후지하라 요시에의 독창회, 약초가극단(탐정활극 <여간첩>), 경성악극단, 조택원무용단의 공연이 이어졌다. 1945년 5월에는 약초가극단 이외에 유치진이 주재하던 현대극장을 약초흥행주식회사의 직속극단으로 두었으며 약초극장에 뿌리를 둔 약초흥행주식회사는 해방 전까지 약초가극단과 현대극장을 거느린 흥행전문회사로 진화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약초흥행주식회사의 간부로 있던 홍찬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으며 약초극장을 인수하였으며 이름도 수도극장으로 바꾸었다. 해방 직후 수도극장의 프로그램은 연극과 악극이 주였으나 할리우드 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영되기 시작하자 서울의 대표적인 할리우드 영화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다. 수도극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우던 홍찬은 무리하게 안양촬영소를 건설하면서 생긴 자금난으로 1959년 부도가 났고 수도극장은 매각되었다. 1962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된 수도극장은 이름을 스카라극장으로 바꾸었다. 2005년까지 존속하던 이 극장은 정부에서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호하려 하자 소유주가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있다는 이유로 헐어버리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약초영화극장의 기공을 알리는 신문기사(《조선신문》, 1935.07.17.) [자료] 《 조선중앙일보 》 , 1936.03.29. 조택원 ( 趙澤元 ) 무용회 , 4 月 6 日 , 10 日 까지 , 약초극장 에서 무용가 조택원 ( 舞踊家 趙澤元 ) 씨는 오는 사월 육일부터 십일까지 약초극장 ( 若草劇場 ) 에서 무용회를 연다는 바 무용 종목은 『 일허진 혼 ( 魂 ) 』 외 아홉까지나 된다는 바 조택원 씨 외 연구소원 일동이 총출연하는데 이번에는 주야 공연이라고. [자료] 《 매일신보 》 , 1937.07.15. 북촌 유일의 영화극장 단성사 , 연극으로 전향 , 중앙무대와 계약 성립 북촌 유일의 양화전문 영화극장으로서 남북촌의 영화 『 팬 』 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잇든 단성사는 강력한 경쟁 상대의 진출에 의하야 순 ( 純 ) 영화극장으로서 경영해 나가기 곤란을 느끼게 되어 벌서부터 연극상설관으로 전향한다는 풍문이 돌드니 드듸어 칠월 삼십일일부터 연극을 상연하기로 극단 중앙무대와 간에 계약이 성립되였다고 한다 . 수년전ᄭᅡ지는 경성 유일의 양화봉절관으로 독보 ( 獨步 ) 해오든 단성사도 경성의 흥행시장을 노리는 외래의 대자본의 진출에 의해서 명치좌 약초극장 갓흔 대 ( 大 ) 영화극장들이 생기게 되자 이 영화 『 팬 』 유치에 비책을 다하게 되엿스나 단성사는 극장의 협착 ( 狹窄 ) 이라는 『 핸듸 - 캡 』 이 잇슬 뿐 아니라 경쟁이 초래한 양화가격의 등귀 ( 騰貴 ) 로 인하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잇드니 최근에는 해마다 잇는 일이나 하절이 되자 관람객이 붓적 줄어버리고 말았음으로 그 타개책을 연극으로 전향하는데서 구해보게 된 것이다 . 금후로는 흥행기업에 이해를 가진 대자본의 적극적 진출에 의하야 냉방 , 온방 , 장치 등 새로운 설비를 구비한 대극장을 신축하기 전에는 일류 양화극장으로서의 존속은 허락지 않는 정세에 잇슴으로 만일 단성사가 영영 연극극장으로 전향하야 버린다면 이로써 조선인 경영의 영화극장은 그 자최를 감춰버리게 되는 세음인데 중앙무대와 단성사 간의 계약 성립에 관하야 양측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위선 ( 爲先 ) 삼주간의 계약 , 중앙무대 홍찬 ( 洪燦 ) 씨 담 ( 談 ) 중앙무대는 제 2 회 공연ᄭᅡ지를 부민관에서 햇고 삼회 공연 역시 이십일일부터 부민관에서 할 예정이나 부민관은 연극을 상연하기에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만흘 ᄲᅮᆫ 아니라 집대 ( 貸 ) 가 워낙 비싸기 ᄯᅢ문에 경비가 만히 들고 해서 단성사와 위선 칠월 삼십일일부터 삼주간의 계약을 매젓습니다 . 앞으로 장기계약을 맺을지 어ᄯᅥᆯ지는 두고 보아야 알겟습니다 . 시험적으로 연극을 해볼터 , 단성사 박응면 ( 朴應冕 ) 씨 담 아시는 바와 가티 최근의 양화가격이 무척 비싸진 데다가 협착한 단성사로서는 수용인원이 수배되는 상대와 경쟁하기에는 힘이 들고 기외에 말못할 불리한 사정이 잇는데다가 금년에는 웬일인지 소위 『 하고 ( 夏枯 ) 』 가 우심 ( 尤甚 ) 함으로 이 타개책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ᄭᅳᆺ해 연극을 해보기로 햇습니다 . 중앙무대와 결정적으로 계약이 확정된 것은 아니나 금명간 확정을 볼 것입니다 . 여름 『 씨 - 슨 』 이 지나고 가을에도 역시 연극을 계속 할지 ᄯᅩ는 다시 영화를 상영할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 좌우간 연극을 공연시켜보아 그 성적 여하에 따라 결정할 작정입니다 . 최근 더욱이 악해진 흥행계에서 적은 자본으로 다수한 경쟁자를 상대로 싸워 나가기에는 남이 모르는 여러 가지 고심이 숨어잇습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5.05.16. 현대극장과 약초의 제휴 국민극 수립을 표방하고 성립된 현대극장은 그동안 고정한 극장이 없어 상연할 적마다 장소가 갈니여서 그 활동이 얼마간 ○○ 되어 왓는데 이번에 새로 생긴 약초흥행주식회사와 특수계약 ( 特殊契約 ) 이 결성되여 매월 정기 공연을 하게 되엇다 . 압흐로 동 극단은 약초극장을 중심으로 하야 연극활동을 하게 될 것으로서 이와 갓흔 극단과 극장의 합리적 제휴는 크게 그 장래가 주목된다 .
ㅁ 1. 유락관 유락관은 오쿠라구미(大倉組)의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자본금 7만5천원의 연예주식회사가, 세계관이 가진 활동사진흥행권을 5,000원에 매수하여 1915년 설립한 영화관이다. 개관식은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한창이던 1915년 9월 12일에 열렸다. 9월 19일에는 개관과 영업을 축하하는 신축낙성축하회(新築落成祝賀會)가 개최되었고 영업은 9월 20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극장의 운영은 출자자 중 한명인 경성호텔(京城ホテル)의 나카하라 테츠오미(中原鐵臣)가 맡았다. 유락관은 혼마치 중심지에 건립되었는데, 인접해 있던 다카키상점(高木商店), 미쓰코시오복점(三越吳服店), 백삼십은행(百三十銀行), 쓰카타니잡화점(塚谷雜貨店) 등이 화재의 위험을 이유로 설립에 항의하면서 당국으로부터 월 2주의 활동사진흥행 허가만을 얻었다. 또한 대정관과 수좌가 상영하고 있는 닛카츠 필름을 똑같이 상영하면서 일본인 상설관 3곳이 닛카츠 필름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유락관은 개관 초기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1915년 말에 이르면 5,000원에 가까운 적자를 보았고 극장운영을 책임진 마쓰이(松井) 지배인이 야반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외관(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개관 이후 장기간의 휴관과 개관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유락관은 결국 매물로 나왔고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 마쓰타로가 이를 매수, 황금관을 대신하여 근거지로 삼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가 운영하는 유락관은 1917년 3월 22일 개관했다. 이후, 1917년 7월 27일부로 연중무휴의 활동사진 흥행 허가를 받은 유락관은 고바야시상회에서 필름을 배급받게 되면서 황금관과의 필름 중복문제도 해결하여 큰 폭의 약진을 하게 된다. 유락관은 닛카츠나 텐카츠에 비해 소규모 영화회사이던 고바야시상회의 필름을 공급받았기에 연극부 변사들을 이용한 연쇄극과 실연을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고바야시상회가 도산하여 유니버설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자 유락관에서는 유니버설로부터 필름을 공급받아 유니버설의 연속영화와 블루버드, 레드페더 영화를 상영하는 양화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으로 이전하기 직전, 울산 배경의 연쇄극 <문명의 복수(文明の復讐)>를 제작하여 황금관에서 상연한바 있었다. 이후 유락관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황금관과 경쟁하기 위해 영화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9년 황금관에서 제작하여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카후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에 자극을 받아 유락관에서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했다. 하야가와연예부에서 직접 각색하고 도쿄의 고바야시상회에 의뢰하여 제작한 <아, 스즈키교장(嗚呼鈴木校長)>이 바로 그 영화이다. 1918년 12월 5일에 용산 원정심상고등소학교(元町尋常高等小學校)에서 발생한 화재로 교사가 소실되자 그 책임에 불속에 몸을 던져 자결한 스즈키(鈴木志律衛) 교장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1919년 4월 28일 개봉되어 5월 6일까지 연장 상영되었다.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을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에 매각하였다. 만카츠가 인수한 유락관은 1919년 5월 8일 만카츠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희락관(喜樂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닛카츠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된다. 2. 희락관 1919년 5월 8일 만카츠 직영으로 개관한 희락관은 서양영화 전문관으로 쇠퇴하고 있던 유락관과 달리 일본영화와 서양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이중 일본영화로는 대정관이 독점하고 있던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였다. 1920년 닛카츠가 경성출장소를 설치하고 고지마 사다시치(小島定七)를 주임으로 임명했다. 닛카츠의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横田永之助)가 희락관의 주주이었던 관계로 희락관은 만카츠 직영에서 닛카츠 직영으로 바뀌었다. 만카츠가 직영하던 시기부터 희락관에서 활약하던 요코야마 후미오(橫山富美雄)가 계속하여 운영을 맡았는데 요코야마가 운영하던 희락관은 설명을 잘하는 변사가 많기로 유명했다. 닛카츠 직영인 희락관이 닛카츠의 주요 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닛카츠 조선대리점인 대정관과 갈등을 빚게 된다. 희락관은 대정관과 협의하여 대정관에서는 마키노 쇼조(牧野省三)가 연출하고 이치카와 아네조(市川姉藏)가 출연하는 니카츠 대장군촬영소(大將軍撮影所) 제2부의 영화(현대물)를 주로 상영하고, 희락관은 일본 최초의 대스타이자 1,0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오노에 마쓰노쓰케(尾上松之助)가 출연하는 닛카츠 대장군촬영소 제1부의 영화(시대물)를 상영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대정관과 희락관의 협정은 1921년 닛다연예부가 더 이상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지 않기로 하면서 깨졌고 이로써 희락관은 경성의 유일한 닛카츠영화 개봉관이 된다. 1922년, 희락관의 운영자가 요코야마 후미오에서 유바 시게미츠(湯場重光)로 바뀌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 해락관(偕樂館)에 있던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가 운영을 맡게 된다. 마쓰다가 운영하던 시기 희락관은 영화선전에 가장 능한 영화관으로 정평을 얻었고 경성의 일본인 상권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에 대표적인 경성의 일본인 영화관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 수준 낮은 오락영화라고 평가받던 연속영화나 오노에 마쓰노스케가 주인공을 맡은 인술(忍術)영화를 주로 상영하여 언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위치상 이점으로 인해 희락관은 다른 영화관들에 비해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1924년 대정관을 경영하던 닛다연예부의 닛다 슈키치(新田秀吉)가 마쓰다 마사오를 지배인으로 두고 희락관을 잠시 경영한 적도 있었다. 닛다 슈키치는 1925년부터 대정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희락관을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희락관의 대주주가 닛카츠의 요코다 에이노스케였기에 이에 실패한다. 닛다 슈키치에 이어 마쓰다 마사오가 다시 희락관의 운영자가 되면서 희락관은 경성의 흥행계를 주름잡게 된다. 1927년 무렵 닛카츠 직영관 중 굴지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경성 제일의 인기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1928년 무렵 경성과 용산 사이에 위치한 경룡관이 닛카츠 계통이 되고 과거 경성부청 자리인 혼마치 입구에 제국키네마 영화를 상영하는 낙천지(樂天地)가 생기면서 희락관은 관객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희락관의 주요 관객들은 영화관 뒤편의 게이샤 거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희락관은 닛카츠 시대극이 인기를 끈다는 평을 얻었다. [자료] 마지마 우메기치의 모습 (조선신문 1937.02.09) 1930년대 들어 희락관의 운영주는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에서 마지마 우메기치(間島梅吉)로 바뀌게 된다. 희락관의 새로운 경영자가 된 마지마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명치정에 마지마상회(間島商會)를 열어 크게 성공한 실업인이었다. 희락관을 운영하게 된 마지마는 1931년 10월 거액을 들여 희락관을 증축하기로 계획하고 스팀설비를 갖추는 것을 비롯해 발성영사기 설치, 관람석의 개조, 해설 음악 선전부를 충실히 하는 등 대대적인 개조를 하게 된다. 여기에 1933년 4월 1일부터 닛카츠가 가지고 있던 희락관에 관한 권리를 포함하여 일체를 인수하게 되면서 희락관은 닛카츠 직영에서 마지마흥행부로 그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희락관을 인수한 마지마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닛카츠와 특약을 맺고 우수한 토키영화를 상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개장기념 광고 (조선신문, 1931.10.10) 희락관은 1936년 9월 다시 한 번 크게 개축된다. 희락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가장 크고 호화로운 영화관인 명치좌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희락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1939년 토키영화관으로 신축한 황금좌가 오랫동안 희락관이 가지고 있던 닛카츠 개봉관이라는 지위를 빼앗아 가면서 낡은 영화관이라는 인식이 있던 희락관은 닛카츠 2번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희락관의 위상과는 상관없이 희락관 운영주 마지마의 영향력은 점차 커졌는데 1935년 마지마는 경성부위원에 당선되었고 1942년 조선흥행연합회 이사장의 지위로 일제가 전시체제 하의 영화배급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조선영화배급사의 이사로 있었다. 희락관은 해방 직전까지 운영되다가 일제의 패전 직전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해방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소실되기 전 희락관은 총 1,050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자료] “巡回活動 「愛の極み」 劇 撮影終了す”, 《京城日報》, 1922.03.21. 來月十五日から釜山から 全鮮を巡回上場す 來る四月十五日から本紙愛讀者慰安の爲め全鮮を巡廻する本社活動 寫眞は本社員八島柳當氏脚色 愛の極み を上演する事となり二月初旬 より撮影にかゝり仁川月尾島,京城市街,朝鮮の代表的靈山金剛山等を 背景に幾多の苦心を費し去る十七日漸く撮影を終り直に現像し旣報の通 り來月十五日から釜山を振り出しに鮮內各地を巡回上演の筈である。 劇の梗槪 本社主催仁川海水浴場大會が催された日は晴れ亘った、一際の凶變に は應はしからぬ日であったが、暑い陽光の降り注ぐ下を群を離れて獨り貝 拾ひをしながら磯を傳って行く小鳥の樣な乙女があった、彼女が岩を亘り 步くうちに可憐な凶變が釀されて居たのである。此の麗しの乙女こそは、今 京城に時めく銀行家朴炳熙氏の令孃貞玉で今日の催しに京城から伴れ來 のであった。又此の時, 名も無い一人の京城に在住する畵家が仁川の海邊 で熱心に、陽の下に憂鬱を海のスケッチに懸って居った、時の經ると共に潮 は膨れ上がって來て地續きで有った磯邊には急に島となる樣な處が多 かった。此の翼を持たぬ小鳥貞玉も亦何時かその離れ小島の孤獨な守人 となって了った、然し未だ未だ潮は膨れ上がって來る。島は沈んで行く。彼 の女の悲鳴が平靜な溱の中に凶々しい悲調を投げた。一方スケッチに心を 取られて居った畵家はこの慘々しい悲鳴に依って呼び覺まされ小舟を求めて、 浪間の岩より貞玉を救ひ出した。事も無げに畵家に再び畵架に向った。 名を貞玉のために語ることをも仕なかったが、貞玉は繪道具の隅から勝 木と云ふ姓を認めた、又その執筆中の繪には今の危い岩も有った。勝木と は勿論畵家の姓で名は忠雄と云った。彼は父を戰場に失つて眼の惡い病 弱の母と妹の露子と三人のために、京城日報の配達に從事して居った。子 の苦鬪を見兼ねた病母は遂に自殺して失った。彼等兄妹の數日の後まで 續いた。そのうち勝木か或る鮮人邸に配達した時門前で思ひ懸け無く貞玉 に會った。 貞玉は恩人の忠雄を逃して失った貞玉は其の頃同じ銀行家の令息趙永 植から結婚の申込を受けて居ったが彼の女の魂の中では忠雄位光って居 るものはなかった。 其頃の京城では稀らしく盛大な新進畵家の展覽會が京城日報社の來靑 閣で行はれた、勝木忠雄も或海岸を出品した、その作品を見出して買び 上げたのは婦人であったが、婦人の求め樣とする價額の高價は淸廉な忠雄 を驚かした。婦人は忠雄の高潔な言葉を取次がれて益々憧れの心を燃し た。間も無く勝木は朝鮮美展出品製作のために金剛山に出た。兄を金剛山 に送るために妹の露子は工場に通って居ったが、自然の惡戱は益々烈しく なって來た工場の歸途一臺の自動車は彼の女を轢き倒した。車の中から驚 き飛び出して來たのは貞玉であった。露子は貞玉の家に引き取られた。姉妹 の樣に成つた貞玉と露子はふとした話から勝木との因緣を知り二人其金 剛山の忠雄を慕ふたので遂に二人は金剛山に向った。 是を見て驚いたのは貞玉に思ひを寄せる趙永植である、彼は直に彼女等 の自動車を追った。次は山中の光景であるが、誤つて趙永植が谷間に墜落 したので、露子が救け樣として是は遂に一命を落すに至る負傷をした。人の 性は善と云ふ例え、永植は立派に貞玉と走せつけた忠雄の爲めに彼等の握 手を助けた。遂に貞玉と忠雄の夢が現實と成る日か來たのである。 妹を失って戀人を得た忠雄は男の心を亂して悲喜交々として露子を歸らぬ旅 へ送り、貞玉をその傷める胸に抱き締めて泣した。此處に始めて勝木は人 生の明るみに出て來た樣な幸福を感したのである。 此の劇の中に植付けられた人情は總て可憐な美、正しきもの、淸楚なも のである是を以て本社が讀者の慰安會材料と爲すに決した事は家庭的見 物として實に應はしいからである。幸ひに讀者諸士よ、此の貧しい節書きを 離れてそのフヰルムの中に如何なる情景、如何なる美景が取入れてあるか な待たれよ。 愛の極み 撮影を了りて 八島柳堂 愛の極み の作者として又脚色から撮影監督迄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 た私は可也の苦心を味はされた第一筋が高尙であらねばならぬと云ふ事 と內鮮人向きたるは勿論學生に觀せそも差支のないものと云ふ難しい條 件附きなので何うしたら此條件を全ふし面白く觀せる事が出來るかに就 て隨分頭を疲れさせた。 或時は出張先の宿屋で思索に耽る事黎明四時に及びやっと書き上げて 脚色の段となって此處も工合が惡い彼方も拙いで又一苦勞させられた 愈々撮影に取掛って見ると折角選定して置いた室が意外にも暗くて撮影 技師から苦情を申込まれたりして眞實に苦しい思ひをさせられた、而し役 者は藝術の爲めにはドンナ事でもすると云ふ約束もあったので私の云ふ 事をよく聞いて働いて吳れた貞玉と云ふ婦人を貧乏畵家が救助の場面等 は此寒空に海ベラの夏衣裳で荒浪の海中へ飛び込まして活躍をさせたの で四肢の感覺を失ひ 殺す氣ですか と悲鳴をあげられたり又或場面では 妹に粉した女優に自動車に轢かれよ運轉手は彼を轢けと命じ今から思ふ とゾッとする程危險を犯させた又金剛山中の墜落の場面では高い斷崖か ら實際に墜落せよと命じ 恐いわよ恐いわよ と女優に泣かれ實際同情せ ずにはゐられなかった是は替玉を使へば何んでもない事であるが眞實に劇 を生かして見せる上から云ふと此位の危險は犯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 危險を敢て犯かさせた而し大した怪我もなくって胸を撫でなから天祐を 嬉んだ役者諸君は撮影監督としての私を隨分恨んだ事であろう而し之も 立派な寫眞が作り度い一念から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