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선생의 시골 진료소
- 감독
- 총 펑
- 제작년도
- 2008
춘사 나운규 의 28주기 추모작품 신상옥 감독의 < 벙어리 삼룡 (1964)>은 “춘사 나운규의 28주기 추모작품”이라고 홍보되었다. < 오몽녀 >를 유작으로 남기고 1937년에 영면한 나운규는 1929년에 < 벙어리 삼룡 >을 감독하고 또 그 자신 삼룡 역을 맡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리뷰에서는 한결같이 마지막의 화재 장면에 1,000여명의 비(非)전문배우(엑스트라)가 동원되어 공들여 촬영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출세작 < 아리랑 (나운규, 1926)>에서부터 광인, 부랑아, 떠돌이 등 방외인 연기로 자신의 페르소나를 구축한 배우 나운규에게는 계급적 원한에 사로잡힌 벙어리 캐릭터가 꼭 맞는 옷처럼 어울렸을 것이고, 역시 <아리랑>에서부터 수백, 수천명 농민이 등장하는 몹씬 촬영을 시도했던 감독 나운규에게는 원작에 나오는 화재 장면이 탐나는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 프린트가 유실되어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이 얼마나 그에 대한 오마쥬를 표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일단 위의 화재 장면에서 신상옥이 공을 들인 것은 수많은 엑스트라 촬영이 아니라 순덕아씨에 대한 삼룡의 ‘헌신’이었던 걸로 보인다. 나도향의 원작소설(1925)에는 불타는 집에 뛰어든 삼룡이 제일 먼저 오생원을 구해내고 다음으로는 자기 몸이 불에 상하는 것도 잊은 채 순덕아씨를 구하면서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씨를 구해냈다는 사실에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우면서 죽어가는 삼룡의 사랑과 헌신이 클라이막스가 되는 셈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이 원작의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의 손에 구출된 순덕아씨가 삼룡에게 ‘서방님(광식)’도 구해달라고 청하자 삼룡이 마지못해 다시 불속에 뛰어들어 광식을 구해내다가 둘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그 마지막 순간 과연 삼룡이 “평화롭고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피터팬 콤플렉스 왜 원작이나 나운규의 버전과 달리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이 광식과 같이 불속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설정되었을까. 영화에서 내내 순덕아씨와 삼룡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처럼 그려지기 때문에, 마지막에 삼룡에게 남편도 구해달라며 간청하던 순덕아씨는 결국 화마(火魔)에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은 셈이 된다. 원작에서 삼룡은 살려달라는 광식을 불구덩이에 남겨두고 순덕아씨만을 구한 후 숨을 거두기 때문에 삼룡과 광식 둘 다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신상옥 버전에서는 순덕아씨의 청 ‘때문에’ 삼룡이 광식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순덕아씨는 아들을 남편이 있는 사지로 몰아넣은 여자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루나무 강가를 거닐며 삼룡이 어리광부리던 모습을 회고하는 순덕아씨의 모습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던 남성 가족들을 다 ‘처리’하고 홀가분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던 봉건주의자 남편과 성장을 멈춘(삼룡의 장애는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피터팬 콤플렉스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들 없이 이제 홀로 서게 된 몰락양반 가문의 딸. 당시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정병욱은 이 영화에서 삼룡과 순덕아씨를 학대하는 광식의 행태가 “지나치게 지루하고 참혹”하다며 이를 “악의 과장된 표현”이라 비판한 바 있다. 박노식 이 연기한 광식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삼룡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은 물론, 양반의 예법을 운운하는 순덕아씨를 고까와하며 결혼 첫날부터 폭행한다. 정병욱은 “삼룡을 뭇매질을 하고 쇠스랑으로 마구 찍어대고 새댁을 걷어차고 할 적마다 곁 좌석에서 혀를 차고 비명을 올리고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며 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전통에 어긋나는 표현이나 수법”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1) 삼룡의 지고지순함과 대비시키기 위해 광식의 악함을 부각시키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장인인 신상옥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광식의 폭력성은 삼룡처럼 피터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성장을 거부하는 아들이 지니는 철없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작에는 없던 식모 범실( 도금봉 분)의 “품에서 사내가 됐”던 광식이 그녀와 맺는 육체적 관계는 삼룡이 순덕아씨와 맺는 지순한 관계와는 얼핏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커플의 투샷이 모두 모자(母子)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향토색짙은 문예작품 2) 물론 이런 현재적 해석과 무관하게, 당시 언론과 평단의 관심은 <벙어리 삼룡>이 1964년의 “최우수 영화,” “예술성을 살린 작품”으로서 아시아영화제, 샌프란시스코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등에서 본선에 진출하거나 수상을 했다는 점, 국적불명의 “청춘영화”가 판치는 국내 극장계에서 관객 21만명을 모아 흥행에도 성공했다는 점에 쏠려 있었다. 비록 “테마와 감각에서는 낡았”지만 “스타일면에서는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3) , 무엇보다 벙어리 삼룡 역을 평소 반듯한 지식인 캐릭터에 어울리던 김진규 가 맡았다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과 더불어 남우주연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1) 정병욱, “영화수상: 학대 속에 피어난 인간미,” <동아일보> 1964.12.17. 2) 진(振)의 <벙어리 삼룡> 리뷰(경향신문 1964.11.16.) 제목. 3) R, “베니스 영화제에서 장려상을 탄 <벙어리 삼룡>,” <영화예술> 1966.4. >> 벙어리 삼룡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올해 4월 12일, 한때 오시마 나기사의 진정한 라이벌 가운데 하나였고 일본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기도 한 마츠모토 토시오(松本俊夫)가 세상을 떠났다. <장미의 행렬 薔薇の葬列>(1969)과 <수라 修羅>(1971)와 같은 마츠모토의 장편극영화는 국내의 시네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영화와 혁명 특별전’(2005.7.27~8.15), 한중일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신시각(新視角)의 서울 전시행사로 2009년에 열린 ‘LINK!! 미디어아트전’(2009.9.4~9.13), 그리고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플랫폼 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2010.11.3~11.19) 등을 통해 그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업이 꾸준히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오시마의 『전후영화: 파괴와 창조』와 같은 해(1963년)에 출간되어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던 1960년대 일본의 젊은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알려진 마츠모토의 평론집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도 2004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경력 초기의 그가 영화와 관련해 쓴 주요한 글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는 『영상의 발견』이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츠모토 토시오의 영상작업(특히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이 그가 개진한 이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경우, 사카모토 히로후미가 편집 책임을 맡은 총 네 권짜리 마츠모토 토시오 저작집 출간이 2016년 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까지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마츠모토가 쓴 글들을 모은 제1권만이 나와 있다.) 이론적 맥락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없이 마츠모토의 영상작업을 보는 일이 무의미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서만 새로운 영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영상작가 - 마츠모토는 자신을 ‘에이조사카’(映像作家)라 칭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다. - 로 규정하게 된 것은 왜인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거리 혹은 ‘괴리’가 있다. 그런데 그의 영상작업과 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리 혹은 ‘괴리’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리 혹은 ‘괴리’는 작가로서의 그가 개인적 능력의 부족이나 한계로 인해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영상의 근본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린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 표지 간략하게나마 『영상의 발견』에서 개진되고 있는 마츠모토의 영화론을 살펴보자. 그에게 있어서 영상의 근본문제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는 모든 것의 총합으로서 하나의 사물”(「네오다큐멘터리즘이란 무엇인가」)이 된 영상, 바꿔 말하면 ‘사물로서의 영상’을 출현시키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물’ 혹은 ‘모노’(もの)란 과연 무엇인가? 영어로는 통상 ‘thing’으로 번역되곤 하는 이 개념은 『영상의 발견』에 수록된 마츠모토의 글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물이란 본디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활동을 통해 그리고 오직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실재(reality)라고 할 수 있다. 마츠모토 자신은 이처럼 집요한 응시를 눈을 감는다고 해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사물과 맞닥뜨리게 하는 ‘잔혹을 응시하는 눈’(残酷を見つめる眼)에 빗대고 있다(「잔혹을 응시하는 눈: 예술적 부정(否定)에 있어서 주체의 위치에 관하여」). 일견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다 보면 대상들이 낯설게 보이고 사물이 출현하는 순간이 ‘우연히’ 발생하기도 하는데, 카메라가 이러한 순간과 대면할 때 생성되는 것이 영상이고 다큐멘터리의 이념은 이러한 영상을 부단히 발견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마츠모토의 영상 개념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mechanically produced image’, ‘projected image’ 혹은 ‘video’ 같은 영어식 표현으로는 그 뜻이 대단히 불충분하게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견해는 마츠모토만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2차 대전 이후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하나다 기요테루의 저서 『아방가르드 예술』(1954), 러시아 형식주의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개념,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고, 그리고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운동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다큐멘터리 방법론과 결합된 것임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 마츠모토 스스로도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의 다음과 같은 글을 위에서 약술한 마츠모토의 사물론과 비교해 보라. “나는 어떤 장소들, 어떤 광경들이 내게 행사하는 커다란 힘을 느꼈는데 이 매혹의 원리는 알지 못한 채로 그러했다. 내게 있어 일상의 몇몇 대상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수수께끼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고, 나를 그러한 수수께끼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어떻게 그리되는지(méthode)는 모르지만 어떻게 하는지(pratique)는 알고 있었던 이 도취상태를 사랑했다. [……] 내가 그것을 보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대상은 변형되었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 외양을 띠는 것도 아니었고 상징적 특성을 띠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을 표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관념 자체였다.”(루이 아라공, 『파리의 농부』) 아라공이 자신만의 보기의 방식을 통해 대면한 ‘관념 자체’라는 것이 마츠모토의 사물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상 언어의 용법에서 사물과 관념이 종종 대립되는 의미를 띤다는 점에 집착하지 않고, 이러한 용어가 아라공과 마츠모토 각각의 글의 문맥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마츠모토가 루이스 부뉴엘의 < 안달루시아의 개 >(1929)나 제르맹 뒬락의 <조개와 성직자>(1928) 같은 영화들은 물론이고 초현실주의 운동 자체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종종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긴장보다는 내부세계 자체에 비합리적으로 몰두(혹은 도취)한다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바꿔 말하자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천에 내재한 응시의 방법론은 충분하다 여겨질 정도로까지는 잔혹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부세계란 인간의 무의식에서부터 비가시적인 사회구조까지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라고 이해해도 좋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가시적 내부세계에 대한 마츠모토의 관심은 1960년대에는 전자로부터 후자로 이행해 가는 경향을 보였고, 멀티프로젝션 방식을 실험한 확장영화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つぶれかかった右眼のために >(1968)와 그의 장편 데뷔작 <장미의 행렬>은 후자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에 제작된 작품이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프레임들 마츠모토는 ‘사물과의 대결’(ものとの対決)이란 “응시하는 사람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비합리를 그 외부의 비합리와 깊이 관련짓는 것”(「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이라고 보았지만, 내부와 외부를 관련짓는 노력 자체는 그 둘의 긴장에 항상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합리적 주체의 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관련시키려고 하는 엄격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전위기록영화론」)이었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것이나 이러한 구분에 바탕을 두고 다큐멘터리의 의의를 찾으려 하는 것은 하나다 기요테루의 논변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적되곤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기 전인 1957년, 마츠모토는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하니 스스무 등 (조만간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기운을 몰고 올) 젊은 영화인들이 멤버로 있던 스터디 그룹 ‘영화와 비평 모임’(映画と批評の会)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그룹에서 발간한 잡지 『영화비평』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이 모임은 하나다가 만든 ‘밤의 모임’(夜の会)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고 한다. 하나다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마츠모토의 그것과 비교하며 음미해 보자. “새삼스레 밝힐 필요도 없이, 내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은 외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외부세계의 사물 자체와 대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내부세계의 무의식적인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하나다 기요테루, 「기계와 장미」) “감춰진 세계라는 것을 단순히 마음 내부의 문제에 한정된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일면적이며 차라리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부의 감춰진 왜곡이란 최종적으로는 모두 외부의 감춰진 왜곡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을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론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라는 것은 외부의 연장이며 그 둘 사이를 절대적으로 구별 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마츠모토 토시오, 「감춰진 세계의 기록: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상상력의 문제」) 겨냥하는 것은 부조리한 ‘감춰진 세계’(隠された世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시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통해 의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큐멘터리란 이러한 가시성에 천착하는 ‘장르’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마츠모토의 눈에 종래의 다큐멘터리는 내부세계와의 관련을 상실한 채 소박하게 외부세계에 밀착하는 ‘자연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처럼 비쳤다. 그리하여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지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다큐멘터리를 지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이 알랭 레네의 단편 <게르니카>(1950)이다. 표면적으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피카소의 그림 전체를 한눈에 보여주는 일 없이 그림 자체를 파편화하고 낯설게 보이게 함으로써 오히려 레네가 본 어떤 ‘비전’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에 마츠모토는 깊이 매혹되었다. 피카소가 회화적 평면의 합리성을 의식적으로 해체해 버리는 작업을 통해 전쟁이라는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회화를 출현시켰다면, 레네는 어떤 정합적인 영화적 공간도 구성하지 못하는 몽타주를 용의주도하게 구사함으로써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환기되는 세계의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영화를 출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레네의 영화에서 마츠모토는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를 이중적으로 지양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즉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쓰인 글이 1958년 5월 『기록영화』지에 발표된 「전위기록영화의 방법에 대하여」이다. 오시마 나기사가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토로한 바도 있는 이 글은 ‘전위기록영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영상의 발견』에 수록되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 히로시마 내 사랑 >(1959)이 나오기도 전에 이 영화의 방법론을 예견하는 듯한 어조로 알랭 레네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있는 ‘비평가’ 마츠모토의 혜안에 놀라게 된다.) 잔혹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에 대한 강조는 이미 이 글에서 분명히 표명되고 있는데, 가령 레네는 “사드의 눈으로 상황을 응시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든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애매한 인간성 따위를 한번 철저히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러하다.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방법론을 레네의 선례를 따라 충실히 적용해 본 사례 가운데 하나는 TBS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만든 단편 <돌의 노래 石の詩>(1963)이다. 이 영화는 어니스트 사토가 찍은 사진들을 부분적으로 재촬영한 이미지들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을 가장 래디컬하게 밀고 나간 것은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에서다. 이것은 1968년 4월, 소게츠아트센터(草月ア―トセンタ―)에서 ‘무언가 말해줘, 지금, 찾고 있어’(なにかいってくれ、いま、さがす)라는 표어 아래 5일간 열린 ‘EXPOSE 1968’ 행사에서 첫 공개된, 3대의 16mm 영사기를 사용한 멀티프로젝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공개되기 불과 두 달 전 벌어진 김희로 사건 - 재일한국인 김희로가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자신을 모욕한 야쿠자들을 살해하고 이후 스마타쿄의 후지미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삼은 뒤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며 경찰과 대치한 사건으로 김영빈 감독이 < 김의 전쟁 >(1992)으로 영화화한 바 있다 - 에 관한 텔레비전 뉴스화면과 보도사진을 비롯해 신주쿠역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예술가들과 구경꾼들의 모습, 당대의 게이 문화를 담은 사이키델릭한 영상, 거리에서의 데모 광경, 오토바이 및 자동차 경주를 촬영한 기록영상, 각종 광고영상과 사진과 포스터, ‘준비!’(用意)나 ‘스타트!’(スタ―ト) 같은 문자들과 화살표나 물음표 같은 기호들이 언뜻 보기엔 두서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를 보면 멀티프로젝션에 사용된 3벌의 프린트 각각이 대단히 꼼꼼한 계획에 따라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그래프콘티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는 후루하타 유리코 같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듯 1960년대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던 당대의 ‘액추얼리티’(アクチュアリティ―)를 포착하는 데는 분명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당대 일본 사회를 감싸고 있던 저널리즘적 기호들이 한꺼번에 끓어 넘치는 용광로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떠오르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액추얼리티란 것이 과연 영상의 사물성과 곧바로 등치 될 수 있는 것일까?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힘이란 어쩌면 마츠모토가 그토록 강조했던 응시의 잔혹함과 집요함을 보기의 현장감과 기민함으로 대체함으로써 얻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일상성과 응시」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 대해 숙고하면서 이 영화들에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가 목격하는 시선에 의해 결합”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전화의 저편 > 같은 영화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목격하는 시선 [……] 응시하는 것 자체가 영상화”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영상 그 자체에 의해 대상이 주체화되고 또한 주체가 객체화되는 과정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사물을 통해 결합시킨다는 「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의 논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츠모토에게 있어서 영상, 응시, 사물이라는 개념이 종종 상호교환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을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와 관련해 생각해보자. 대상들(당대 일본과 관련된 시청각적 기호들)이 주체화되는 것은 영상 그 자체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시선 없이 객체화된 주체의 의식, 즉 구성(그래프콘티)을 통해서이고, 게다가 대상들은 주체화되기 무섭게 영상의 액추얼리티가 선사하는 사이키델릭한 산만함 속에서 다시 객체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마츠모토는 사회의 비가시적 구조를 사물-영상으로서 드러내기를 겨냥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구조로부터 파생된 다종다양한 가시적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끌어들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구조는 더욱 수수께끼 같은 것이 되고, 몇몇 현저한 현상들에만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가 신랄하게 비판한 종래의 다큐멘터리의 소재주의나 자연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대중사회 상황에 있어서 일상성(이라는 사물) 자체와 대결하는 일은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응시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낸다고 하는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함도 깨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성 그 자체는 여전히 두루뭉술한 채로 일견 포착할 곳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아다치 마사오의 <약칭: 연쇄살인마 略称: 連続射殺魔>(1969) - 1968년에 서로 다른 도시에서 네 명을 살해한 18세의 연쇄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가 여행 과정에서 보았음직 한 일련의 풍경들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1975년에 이르러서야 개봉되었다 - 에 ‘풍경론’이라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이들을 사로잡은 고민도 마츠모토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 터다. 마츠모토가 새로운 리얼리즘의 과제로 제시한 다음과 같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눈에 보이는 것밖에 비추지 못하는 카메라로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일상성과 응시」) ※ 마츠모토 토시오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품들은 우부웹(www.ubu.com/film/matsumoto.html)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마츠모토는 <장미의 행렬>과 <수라> 이후에 <16세의 전쟁 十六歳の戦争>(1973)과 <도구라 마구라 ドグラ マグラ>(1988) 두 편의 장편극영화를 더 연출하기도 했다. 마츠모토의 영상론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싶다면 영문으로 된 문헌들 가운데서는 후루하타 유리코의 『Cinema of Actuality: Japanese Avant-Garde Filmmaking in the Season of Image Politics』(2013)의 1장과 2장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마츠모토의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유양근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2004)와 더불어, 이 글을 쓰면서 주로 참고했던 것도 이 책이다. 후루하타의 박사논문 「Refiguring Actuality: Japan’s Film Theory and Avant-Garde Documentary Movement」(2009), 그리고 2002년 여름호 『Positions』지에 게재된 아베 마크 논스(Abé Mark Nornes)의 「The Postwar Documentary Trace: Groping in the Dark」도 유용하다. 본문에서 인용한 하나다 기요테루의 「기계와 장미」는 사카모토 히로후미의 박사논문 「전위기록영화론의 전후적 의미: 1970년까지의 마츠모토 토시오의 여러 활동을 바탕으로 前衛記 録映 画論の戦後的意味: 1970年までの松本俊夫諸活動をもとに」(2017)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이 논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사이트(dl.ndl.go.jp/info:ndljp/pid/10357205)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이 논문에는 부록으로 마츠모토의 <안보조약 安保条約>(1959), <니시진 西陣>(1961), <돌의 노래>의 구성표와 내레이션이 수록되어 있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 제작을 위해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의 사진 또한 이 논문에 부록으로 실린 것을 사용했다.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쟁투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개성이 뚜렷한 영화작가,”1) “화면이 수술대와 다름없는, 외과의사가 집도하는 것과 같은 연출,”2) “한국영화의 반역정신,”3)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함,”4) 이는 모두 김기영 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한 논평들이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특이하고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김기영 감독은 대부분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1970년대 영화 불황기에 들어서며 그는 < 파계 > < 이어도 > < 흙 > 등 소설 원작의 문예영화를 몇 편 만든다. 그는 문학을 원작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스타일로 완전히 각색했다. 따라서 그의 문예영화에서 원작에의 충실성 문제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의 영화는 문학을 저본으로 삼았을 뿐 당시 문예영화의 관습으로 포획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이야말로 관습을 깨뜨리는 새로운 시도로서 근본적인 예술성 개념에 부합하며 예술영화로서의 문예영화의 외연을 확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파격과 확장이 불가(佛家)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파계>는 < 마음의 고향 >( 윤용규 , 1949) 이후 불교 문예영화의 맥을 잇는 영화이자 본격적인 불교 예술영화로 평가받는 < 만다라 >( 임권택 , 1981) 앞에 놓이는 작품이기도 하다.5) < 파계 >는 1973년 「사상계」에 연재된 고은의 동명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선승 법연당과 그의 제자 침해의 관계, 그리고 침해와 묘혼의 사랑을 플롯의 중심에 둔다. 여기에 서산암의 비구와 소원암의 비구니들을 통해 선승(禪僧)과 율사(律師)의 차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불제자들의 수련방식 등 불가를 둘러싼 다양한 사건들이 직조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원작의 내용을 철저하게 김기영 식 주제와 화법으로 끌어들여, 법통을 둘러싼 승(僧)들 간의 정치적 쟁투와 인간의 원초적 본능 문제를 부각시킨다. 이 영화는 선승을 가장하고 선사에 들어간 대학생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는 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 영화의 중심 서사는 열반을 눈앞에 둔 고승 조실스님( 최불암 )이 법통을 물려줄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조실스님의 시자로 자란 침해 수좌( 김병학 )이고, 그의 경쟁자로는 “절이란 권위와 인격과 위대한 것이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경원 수좌( 조재성 )가 있다. 이 두 인물의 대립에는 어릴 때 절에 들어와 동승으로 자란 ‘올깨끼’와 나중에 철이 나서 스스로 불도를 선택한 ‘늦깨끼’, 그리고 선승과 법승 간의 갈등이 들어있다. 조실스님은 인자하고 푸근한 인상과는 달리 냉혹하고 교활하게 후보자들을 시험하고 경쟁시킨다. 그는 화두를 던지는 것은 물론 돌연한 선문답과 죽비 세례로 후보자들을 곤경에 빠뜨린다. 또한 식욕, 색욕의 시험에 들게 하여 목숨을 건 싸움을 부추긴다. 침해가 묘혼( 임예진 )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조실스님이 기획한 시험 중의 하나다. “내 법통이야. 그냥은 못 줘. 괴롭히고 또 괴롭히고 나중에는 시험으로 피투성이가 되는 걸 봐야 준다.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는 걸 봐야 줘.”라는 그의 외침은 김기영 표 고승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조실스님이 주도하는 시험들은 한국전쟁의 기억이 플래시백 되며 현실과 접목된다. 스님( 신구 )은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전쟁고아들을 구해 목숨을 걸고 피난시켰고, 절에 온 고아들은 배가 고파 가마솥에서 밥을 훔쳐 먹곤 했다. 이와 같이 속세의 극단적 참화인 전쟁과 그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인간의 밑바닥이 정신적이고 고차원적인 불가의 정진 과정과 연계된다. 이 과정에서 진정으로 배고파 보지 않거나 치열하게 색욕의 번뇌에 부딪혀 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겠느냐는 주제가 표출된다. 그러면서 ‘법통’은 생존의 문제가 되고 그것을 쟁취하는 과정 또한 정치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맨 나중에 법통을 이을 유력한 후보자로 떠오르는 것은 ‘도심행자’(정한원)라는 의외의 인물이다. 이 부분은 원작과 완전히 다른 것이기도 하다. 도심은 침해의 친구로 침해와 함께 전쟁고아가 되어 절에 들어온 올깨끼이다. 그는 유난히 식욕이 강해서 진작 공부를 포기하고 침해가 법통을 잇게 하려고 뒷바라지를 한다. “먹지 않으면 승이 된다? 관두겠어? 먹지 않는 건 질색이야.”라는 대사는 본능에 충실한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는 “빈 그릇을 깨라”는 화두를 “내 배고픈 것을 지독히 알아라! 그러면 남의 배고픈 것도 몸 저리게 알리라!”라는 깨달음으로 풀어낸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처절한 배고픔을 경험해봤기 때문이며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이 겪을 때 진심으로 공감하고 돌아볼 줄 아는 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절의 양식을 훔쳐다가 병든 중생을 구한 사건은 그의 언행일치를 증명한다. 한편 법통에 매달렸던 침해는 조실스님의 공격적 시험에 맞대응하며 시험을 넘었음에도 법통을 받지 못한다. 조실스님은 침해가 사랑하는 묘혼을 데려다 침해 앞에서 옷을 벗긴다. 원작에서는 그러고 나서 큰스님은 곧바로 죽음에 이른다.6) 영화에서는 묘혼이 옷을 벗자 그녀가 황금 부처로 보이는 숏이 인서트 된다. 그리고 침해는 “여자를 이상하게, 여자를 타락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건 낡은 편견이다. 우리 젊은 사람은 여자를 그냥 건강하게 살려는 한 인간 그대로를 느낀다. 남자와 여잔 같은 거다. 옷을 벗으면 알 수 있을 겁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때 법통을 따기 위해서는 큰스님을 놀라게 하거나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묘혼의 만류를 물리치고 침해는 묘혼과 나란히 알몸이 된다. 이 과감한 행동 앞에서 조실스님은 “넌 젊다. 그리고 천재다.”라고 침해를 인정한다. “그러나 법통은 네 것이 아니야.”라고 결론짓고 쓰러진다. 죽어가는 조실스님을 붙들고 침해와 묘혼이 법통을 내놓으라고 울부짖는 것은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 장면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욕망의 표출로 인해 이 영화는 새로운 문예영화이자 파격적인 불교 영화로서의 힘을 얻는다. 동승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 마음의 고향 > 이후에 나온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중에서 예술영화로 대접받은 예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파계 > 이전의 대표적인 영화로는 이광수 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내세운 < 꿈 >( 신상옥 , 1955/1967)이 있다. 그러나 <꿈>은 개봉 당시에 문예영화로 수용되지 않았다. 우선 원작이 이광수 소설이라고는 하나 그 토대가 된 조신몽 설화가 워낙 잘 알려진 옛이야기였기 때문에 ‘문예’로 인식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불교 관련 영화의 경우 기독교를 다룬 영화보다 예술영화로 인정받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종교의 금기가 일반의 도덕률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는 ‘개화’와 ‘서구 문명’을 상기시키며 자연스레 ‘근대문예’와도 겹쳐진다. 게다가 한국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반공주의와 결합해왔기 때문에 1960~70년대 국가가 장려했던 ‘반공’과 ‘문예’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유용한 제재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전근대적인 이미지를 지니는 데다 승려에게 요구되는 계율이 엄격하고 금기가 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서사는―갈등을 만들어야 하는 이야기의 본질상― 금기의 위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화는 시각적 매혹을 생명으로 삼는 매체이다. 상상에서만 가능했던 금기의 파괴가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시각적 매혹일 것이다. 그러니 불가를 배경으로 영화는 자연히 ‘파계’를 향하게 된다. < 마음의 고향 >부터 < 꿈 >과 < 파계 >는 물론, < 만다라 >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아제아제 바라아제 >( 임권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율의 위반을 보여주는 것은 이를 말해준다. 그러한 특질 때문에 불가 배경 영화에 대해서는 1970년대까지 외설적인 영화라는 기대 내지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었다. <파계>의 경우에도 지방 흥행업자들이 제목만 보고 “중들이 나오는 외설적인 영화”라 생각하여 제작비를 투자했다는 증언이 있기도 하다.7) 또한 그러한 측면에 대해서는 행정적 검열 이외에도 사회적 검열이 작동하게 된다. 실제로 1967년 <꿈>이 개봉될 때 조계종 총무원장까지 나서서 상영을 반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검열은 비구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는 한층 더하여 외설 논란이 불거지고 불교계의 반발도 거세지곤 했다. 이미 <만다라>가 나온 지 3년 후인 1984년에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고 김지미 가 주연을 맡았던 < 비구니 >가 불교계의 반발에 부딪혀 제작이 포기된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불교 영화를 둘러싼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 파계 >에 대한 불교계의 인정 및 정부의 보상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우선 ‘마성(魔性)’의 작가주의로 성 문제를 다루어 흥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작품성을 성취해온 김기영 감독에 대한 영화계의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김기영 감독이 동아수출공사로부터 국내 최고의 개런티를 받고 <파계>를 연출했다는 것8)은 그것을 입증한다. 한편 불교계에서는 이 영화의 제작을 마뜩해하지 않았으나 ‘파계’라는 제목과 달리 ‘성불(成佛)’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는 당시 한국영화를 둘러싼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한국영화의 불황 속에서 1974년 4월에 개봉한 < 별들의 고향 >이 크게 성공하자 “참신한 방화 만들면 관객들은 몰려든다”9)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편 1960년대 말 이후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아젠다 아래 정책적으로 전근대 전통문화가 소환되었다. 이때 무속이나 민속 등 근대 이후 비판받고 폄훼되어왔던 전근대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이 와중에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파계>가 외설 논란을 잠재우며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고 여러 해외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한 것은 이와 같이 복합적인 상황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불가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성장담 내지 회고담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작을 김기영 식의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본능과 정치’라는 현실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으로 비화시킨 영화 자체에 있었다.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불가와 승려의 생활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과감한 장면 구성, 그리고 전두엽을 자극하는 기발한 대사와 지금 봐도 충격적인 서사 전개는 이 영화의 파격을 구성하며 ‘외설’이니 ‘종교 모독’이니 하던 당시의 법적·사회적 논란을 넘어서는 에너지가 된다. 이로써 < 파계 >는 금기의 위반을 과감하게 재현하는 것은 물론 현실 문제와 종교적 질문을 접목시키면서도 예술영화로 인정받은 최초의 불교 영화가 된다. 이는 < 만다라 >에 앞서는 것으로, 1970년대에 이루어진 전위적인 영화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1)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도서출판 소도, 2004, 402~403쪽. 2) 김종원, 정중헌, 「우리 영화 100년」, 현암사, 2000, 290~291쪽. 3) 김수남, 「한국영화감독론 2」, 지식산업사, 2003, 182쪽. 4) 이효인 편, 「한국의 영화감독 13인」, 열린책들, 1994, 360쪽 5) 나중에 <만다라>의 촬영을 담당하는 정일성 감독이 이 영화의 촬영을 맡았으며, 그는 이 영화로 영평상 기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6) 소설에서는 큰스님이 죽기 전에 묘혼을 벗겨 보신 것을 두고 노승의 평생소원을 푼 것( “……하긴, 여섯 살부터 입산해서 주욱 중노릇만 했으니, 평생 소원이셨던가 보지요.”)이라는 추측과 아랫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교육의 일환(“이 놈아! 너는 몰라! 침해란 놈 가르치기 위해서야! 일체 중생 가르친 게야!”)이라는 주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 결에 묘혼이 달아났는지 침해는 몰랐다. 침해는 여자보다 노승의 열반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 탄운 곡간의 가느다란 연기 끝이 더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침해는 어디 갔는지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결말이다(고은 전집 제31권 「밤주막」(1977) 중 「파계」, 527~528쪽 참조). 7) <김기영 전작전: <파계> 이화시 GV VOD>, 2008.06.23. http://flash.koreafilm.or.kr/kofa2/play_trailer.html?file=trailer/MK004966_P03.mp4 8) 「<破戒>, 촬영 끝내 곧 開封」, 『매일경제』, 1974.6.28., 8면. 9) 「참신한 邦? 만들면 觀客들은 몰려든다」, 『동아일보』, 1974.6.7., 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