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마
- 감독
- 박정훈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남효인, 임종민, 김주영, 박찬옥, 서희원, 김혜린
날아다니는 수트를 입고, 시공간을 이동하고, 온 우주를 누비는 히어로들이 벌써 한 트럭이다. 너무 많아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히어로 패들이 도시를 무차별하게 깨부수는 우주 악당들로부터 우리 행성을 지켜내는 사이 대한민국엔 가르마조차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하찮은’ 취준생이 재난을 마주한다. 동네 놀이터라는 작은 무대에서 현란한 철봉기술과 뽀얀 근육을 뽐내며 등장하는 주인공 용남(조정석)은 구경꾼 할머니의 엄지척에도 입꼬리가 비식 올라갈 만큼 인정에 목말라 있다. 부모님과 누나, 어린 조카에게까지 용남은 창피하고 손 많이 가는 가족일 뿐이다. 반듯하게 옷 차려입고 번듯한 직장에 나가 일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 용남은 어디 하나 쓸 구석 없어 보이는 산악 용품만 주렁주렁 옷장 안 깊숙하게 가지런히 걸어두었다. 가족들이 아무리 무시해도 용남은 가족을 사랑한다. 돈이라곤 벌어본 지 오래지만, 조카의 초딩 친구 무리에게 음료 수라도 꼭 사주고 싶고, 괜히 시키지도 않은 짓 하지 말라고 타박받아도 꼬박꼬박 설거지를 한다. 취준생 용남은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엔 없다. 어머니의 칠순 잔칫날이 되고, 용남 일가족은 2시간이나 떨어진 신도시의 예식장으로 간다. 분명 기분 좋은 잔칫날인데, 용남에게는 수많은 실패를 안겨다 줬던 면접장과 다를 바가 없다. 사돈의 8촌까지 다 온 것 같은 칠순 잔치는 용남에게 너무 가혹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이 불순한 호기심으로 질문해오면 나를 대변하는 건조하고 슬픈 사실들만 내내 줄줄 늘어놓아야 한다. “먹고 자고 싸고.” 그것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많으면서 자조적으로 그렇게 지낸다고 대답할 뿐이다. 와중에 용남은 예식장 부점장이자 산악동아리 후배였던 의주(윤아)를 마주치게 된다. 의주와 멋지게 재회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일부러 멀리 있는 구름정원 예식장에 왔건만. ‘최종면접에 불합격하셨습니다.’라는 가혹한 문자 하나에 계획이 틀어진 용남은 의주에게 초라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벤처회사 과장이라고 거짓말을 해버린다. 실패의 마일리지만 차곡차곡 적립하고 있는 용남에게는 사실 의주도 아픈 실패의 기억이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을 수백 번은 족히 들었는데. 인생은 바라지도 않았던 보너스 마일리지를 주듯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큰 재난을 선사한다. 가스 테러로 온통 자욱해진 도시에서 용남은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으로, 의주는 눈부신 책임감과 직업의식으로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 사람들을 탈출시키려 한다.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그렇게 욕먹었던 동아리 활동이 모두의 앞에서 빛나는 순간이다. 쓸쓸하고 고요하게 그러나 매일 갈고 닦아 꿋꿋이 지켜온 클라이밍 기술은 세상에 쓸모없는 배움은 없다는 걸 증명해준다. 대학 시절엔 자주 실수했던 돌출 형태의 구조물이 하필 용남 앞에 놓여있다. JUST DO IT! 화면에 클로즈업된 나이키 운동화는 어서 뛰어오르라고 부추긴다. “다른 거 안 바랄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누가 되었든 들어주길 바라며 용남은 절박하고 짧은 기도를 내뱉는다. 사자 굴에 던져지고도 살아남았다던 성서 속 다니엘처럼 용남은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사자머리를 보란 듯이 넘어 오른다. 누가 용남이를 루저라고 했던가. 사자도 밟고 올라서는 용남이의 코털을 대체 누가 건드렸냔 말이다. 제목과 다르게 출구 없는 매력을 가진 <엑시트>는 재난과 코미디, 액션이라는 장르를 세련되게 넘나들며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불필요한 설명과 설정은 아예 접어두고 매일같이 보는 익숙한 현실을 여태껏 없었던 방식으로 신선하고 재치있게 빚어내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비장한 각오 없이 선택해도 될 법한 가벼운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비범한 이 영화는 이상근 감독의 사려 깊은 연출과 현실을 꼬집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우리에겐 재난을 맞닥뜨린 학생들을 보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국민적 트라우마가 있다. 학생들이 학원에 갇힌 장면에서 카메라는 과장된 앵글로 억지 긴장을 이끌어내지 않고 시점숏으로 멀리서 그들을 구조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관객의 트라우마를 감정을 고조시키는 도구로 쉽게 소비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엿보인다. 또한 테러의 주체에게 불필요한 마이크를 주지 않거나 재난 영화임에도 시체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 등 영리한 판단 덕에 관객은 주인공의 탈출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 선을 넘지 않는 유머로 무장한 이 무해한 재난 코미디는 우리가 실제로 쓸 수 있는 생존 방법이나 S.O.S 신호까지 알려주어 심지어 유익하기까지 하다. 공사장 안전망이나 미관을 해친다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시각장애인용 보도블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짚어주기도 한다.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재난 영화에서 여성은 흔히 연약하게 그려져 절체절명의 순간에 민폐를 끼치거나 짐이 되곤 한다. 반면 의주는 클라이밍 동아리 에이스 출신으로 내내 힘차게 건물 위를 뛰어다니고, 특유의 빠른 상황 판단 능력과 센스를 발휘해 구조를 앞당기는 유능하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표현된다. 장점 가득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의 찝찝함이 남아있다면 그건 아마도 영화 탓보단 결코 웃어넘기기 힘든 청년들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엑시트>는 쓰레기로 살아가야 하는 서글픈 청년의 자아를 여러 차례에 걸쳐 노골적으로 강조한다. 용남과 의주는 방호복 대신 쓰레기 봉투로 몸을 감싸고 후반부에선 아예 쓰레기장을 달리기도 한다. 우리가 자신을 쓰레기로 여기지 않고 줄 세움 당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언제가 될까. 용남은 인원 초과로 구조헬기에 타지 못하고 남아서 울먹이며 이야기한다. “내가 나가면 저렇게 높은 건물로 된 회사에만 원서 낼 거야. 무조건 층수만 보고.” 생사의 문제 앞에서도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용남은 면접에서 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높은 빌딩 대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밀려 늦게 구조된다. 영화 초반 용남은 친구와 시원한 생맥주 한 잔에 미적지근한 현실을 지우려 호프에 간다. 호프(Hof)에 앉아 자기 자신을 ‘개쓰레기’라고 주저 없이 칭하는 용남의 뒤로 H.O.P.E.(희망)가 쓰여진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다. 먼 행복보다 지금 한 잔의 생맥주가 더 큰 위로로 나를 씻어주길 바라며 용남은 맥주를 들이킨다. 혼수 가구 전문점을 배경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발판삼아 뛰어내리는 장면에서는 결혼조차 포기한 N포세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매트리스를 넘어 도착한 육교 위에 적힌 ‘수고했어, 잘버텨줘서 고마워’라는 메시지는 수많은 포기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작은 피로 회복제가 되어준다. 실패와 포기 속을 질주하는 청년들에게 영화는 이렇듯 곳곳에서 나름의 응원을 보낸다. 청춘들은 제각각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외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외침은 외면당하거나 조롱당하기 일쑤여서 청춘은 때론 차라리 입을 닫기도 한다. 하지만 <엑시트>의 주인공들은 계속 소리내기를 선택한다. 구원은 셀프니 노력하라며 옥상으로 내몰렸지만, 지지 않고 끝까지 그리고 끊임없이 외친다. “내 말 좀 들어줘요, 제발!” 재난 문자가 용남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해주기 전까지는 용남이 아무리 옥상으로 가자고 외쳐도 믿어주지 않는다.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구름정원 벽을 오르려는 용남에게 아버지는 되려 호통을 친다. “너 하지 마! 뭐가 됐든 간에 하지 마!” 그럼에도 용남은 가족을 위해 목숨 걸고 벽을 탄다. 어릴 땐 청춘이 불꽃처럼 화려하기만 할 것 같았는데, 둘은 완등 지점인 크레인에 다다라서도 눈에 확 띄는 조명탄이 아닌 작은 막대기 불꽃에 기대어야 한다. 용남과 의주는 소리치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 또 한 번 목이 찢어져라 외친다. “우리를 봐라!” 그리고 누구보다 구조되고 싶어 하는 청춘들이 출구를 간절히 바라며 외치는 S.O.S 신호에 942만 명이라는 놀라운 숫자의 관객이 응답했다. 영화 초반 클라이밍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완등 지점까지 올라갈 때 필요한 길 찾기인 ’루트 파인딩’에 대해 나온다. 목적지를 설정했어도 가는 길이나 방법을 모르면 도착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강요당한 목적지를 지도 없이 헤매느라 길 찾기가 어려웠던 용남. 용남에게 실재했던 재난은 안개에 싸인 듯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미래였다. 취업이라는 목적지로 가는 길은 절망으로 가득했지만, 차오르는 유독가스 속에서 자신이 정한 완등 지점으로 갈 때는 주저함 없이 완등해낸다. 영화는 이력서만으로는 멋대로 가늠할 수 없는 실패한 취준생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엔딩크레딧에 흐르는 곡, 이승환의 ‘슈퍼히어로’ 속 가사처럼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기회가 있고 깊숙이 잠재된 무한한 능력들이 있다. 장래 희망은 못 이뤘어도 매일같이 스스로를 단련하는 용남, 자신을 알바와 다를 바 없는 부점장이라고 소개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의연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의주. <엑시트>는 세상이 미처 알아봐 주지 못한 용과 여의주의 승천 이야기이다. 동시대 청년이라면 과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 짠내·땀내·소금기 가득한 탈출기는 재난 같은 대한민국 2030의 매일에 바치는 숭고한 헌정사이다.
제 이름은 ‘허평론’입니다. 평론보다는 리뷰 작업이나 피처 기사 쓰기가 더 많은 것 같은데 이 시장에서는 저를 평론가라고 부릅니다. 평론가라고 부를 때 저에 대한 시장 가치가 발생하는 까닭이죠. 그에 대한 불만요? 없습니다. 그 때문에 돈도 벌고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모든 것은 팔 수 있을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라는 말이 있죠. 누가 했느냐고요? < 성공시대 >(1988)의 김판촉( 안성기 ) 씨가 한 얘기입니다. <성공시대>는 장선우 감독의 ‘실질적인’ 장편 데뷔작입니다. 장선우 감독은 <성공시대>에 2년 앞서 < 서울예수 >(1986)를 선우완 감독과 공동으로 연출했죠. 하지만 기독교계의 반발로 제목이 < 서울황제 >로 강제적으로 바뀌고 검열로 극장 상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등 비운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인 폭압이 ‘아무렇게’ 자행됐던 ‘암울했던’ 시대였죠. 암울했던 시대를 아무렇게 다룬 태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선우 감독이 다시 한번 사회 풍자를 시도한 작품이 <성공시대>입니다. 이 작품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건 김판촉 씨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절대권력은 ‘돈’입니다. 돈이 독재자로 군림하는 시대, 김판촉 씨는 만 원 지폐의 세종대왕 자리에 자신의 얼굴을 대신 ‘뽀샵’ 처리하고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손을 들어 돈을 향한 절대 충성을 맹세합니다. 콧수염만 기르지 않았지 1:9 가르마를 고수하고 슈트를 제복처럼 두른 김판촉 씨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히틀러입니다. 대중을 현혹하는 언사도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취업 면접날 아무거나 팔아보라는 면접위원들의 요구에 주먹을 쥐어 술이 있다고 속이고 돈을 받은 후 빈손을 펴며 ‘당신은 제게 ‘상술’을 사셨습니다’ 아재 개그 눙치는 솜씨가 과연 돈의 히틀러다운 면모입니다. 여전히 돈의 장기 독재 시대, 빅 브러더 개념이 돈으로 발현한 현재에도 <성공시대>의 예리한 풍자는 유효합니다. 그럴진대 정확히 30년 전인 당시 장선우의 ‘꼴통’ 기질 다분한 비판 정신에 매료된 시인 김지하는 김판촉 씨의 상징성에 주목해 ‘판촉’으로 이 영화의 제목을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황석영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소비 욕구를 극단적으로 부추기는 극 중 극단적인 물질사회의 병폐를 비판하면서 ‘판촉’을 앞세운 제목이 이 영화를 알리는 극단적인 마케팅 용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장선우 감독을 대신해 이 영화의 제목을 ‘성공시대’로 지었습니다. 확실히 영화 제목으로 ‘판촉’보다는 ‘성공시대’가 더 냉소적이면서 좀 더 반어적이라 더욱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극 중 ‘성공시대’는 성소비( 이혜영 ) 씨가 운영하는 술집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성공시대는 김판촉 씨가 근무하는 회사의 라이벌 기업 중역들이 자주 드나드는 바(bar)입니다. 김판촉 씨는 성소비 씨에게 접근, 애인으로 삼고 라이벌 기업의 내부 정보를 캐내 자사 신상품 개발에 이용합니다. “사랑도 팔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거야” 자본주의적 사랑론을 설파하는 김판촉 씨에게는 그래서 성소비 씨의 존재가 일회적입니다. 결국, 김판촉 씨의 회사가 라이벌 기업을 누르는 순간, 성소비 씨의 이용 가치는 사라지는 거죠. 김판촉 씨가 돈의 DNA로 움직이는 돈의 황제라면, 성소비 씨는 성호르몬을 풍겨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성의 여왕벌입니다. 버림받은 성소비 씨는 김판촉 씨와 대척점에 있는 기업의 젊은 중역에게 접근, 김판촉 씨가 몰락하는 데 미끄럼틀 역할을 하죠. 물질적 가치가 우선인 자본주의 시대에서 ‘상술’의 가치를 잃은 김판촉 씨는 서울 본사에서 저 먼 강원도의 보잘것없는 보급소 영업소장으로 미끄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공시대>는 물질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를 간파하여 초스피드로 성공한 김판촉 씨가 부메랑처럼 돌아온 소비사회의 욕망 파편을 맞아 몰락을 예고하는 작품인 셈이죠. 1980년대 중후반 당시의 살풍경한 한국 사회를 풍자로 꿰뚫어 단면 조감하는 <성공시대>는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와 더불어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를 선도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성공시대>의 메시지가 지금에도 가치를 유지하는 건 돈을 절대권력으로 삼은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신자유주의로 변태하여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발광하는 까닭입니다. 장선우 감독 본인 또한, 100억 원에 가까운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2)의 흥행 실패 이후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는 연출 활동을 접고 제주도에서 두문불출하는 중입니다. 그런 배경일랑 상관없이 저 ‘허평론’은 지금 이 지면에서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를 주제로 한 글을 써 원고료를 벌며 “모든 것은 팔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다”는 김판촉 씨의 철학을 맞춤한 자본주의적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일회성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사용 가치가 그리 오래 남지 않은 또 한 명의 김판촉 씨일 터. 오랜만에 <성공시대>를 보며 제 처지를 뒤 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반성, 돈에만 함몰하여 영혼을 팔아서 어찌할 거냐는 자각.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 <성공시대>는 2018년인 지금에도 전달하는 메시지가 뚜렷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성공시대>는 장선우 감독의 또 하나의 문제작이자 걸작입니다. <성공시대>(장선우, 1988) 영화보러가기 →
지난 4월,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의 타계 소식을 접했을 때, 문득 아드만 스튜디오의 1989년작 단편 < 동물원 인터뷰 Creature Comforts > 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동물원에 (갇혀) 사는 동물들이 삶의 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대처가 총리직을 그만두기 1년전에 제작, 발표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개인적으로 당시 집권 보수당의 정책과 영국인들의 삶을 결부시키려는 집착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평론가의 가장 나태하고도 안일한 태도는 특정 작품을 제작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민족성/국민성과 같은 상상적 본질로 환원시키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마도 현실 삶과 작품의 연관 고리를 거두기 어려운 까닭은 인터뷰 형식이 깔고 있는 ‘목소리’ 때문일 테다. 남녀노소, 토박이, 이방인을 아우르는 등장 목소리들은 방금 전에 거리에서 인터뷰를 따온 듯한 생생함을 전달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로 분류되기도 한다. 눈을 감고 그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분명 ‘자신의 삶’에 대해 면전에서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여전히 든다. 이전에도 아드만은 ‘대화’ 시리즈 (Animated Conversations 시리즈와 Conversation Pieces 시리즈)를 만들면서 목소리의 현장성을 살린 선녹음 방식을 취했는데, 닉 파크의 합류 후 립싱크는 아드만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한층 강화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 월레스 앤 그로밋 >의 그로밋은 말을 하지 않는다.) 현실과 연결된 또 하나의 장치는 카메라/스크린의 사각 틀이 만들어내는 프레이밍(framing)이다. 카메라는 이미 동물원 우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 속의 동물과 바깥의 관람객을 구분하는 쇠창살이나 유리창은 사라진다. 그리고 마이크를 쥔 ‘사람’의 손이 프레임에 걸쳐있다. 인터뷰 중간에 프레임 바깥에서 프레임 안으로 공이 날아 들어오기도 하고, 물벼락이 들이치기도 한다. 이처럼 카메라가 잘라낸 프레임의 위, 아래, 양옆, 앞, 뒤로 끊임없이 개입하고 확장하면서 동물원 속 동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거리를 좁혀간다. 이들 동물원 속 동물이 말하는 안락함은 영국이라는 국가체에서 흥미로운 쌍곡선을 그린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대변되는 복지는 영국 근대 자본주의의 고안물이었고, 그러한 복지는 인류를 뛰어넘어 근대적 동물원의 효시격인 런던 동물원에서 보듯 동물의 안식처(라는 여전히 논쟁이 잦아들지 않는 주장)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이 만들어진 때는 신자유주의의 논리 속에서 공공 복지 부문이 처참히 파괴된 시기였다. 그래서 제도가 보장하는 삶의 안락함은 이미 인간의 세상에서는 사라졌고 (시장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 세계로 내던져졌다), 동물원 울타리 속 동물들에게나 그럭저럭 허용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5분남짓의 짤막한 이 작품을 보다보면, 동물원이라는 전시 공간 속 전시물이었던 동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 관객의 처지가 어느 순간 역전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전적으로 철의 여인에게 헌정할 필요는 없다. ‘당신의 삶은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은 그때나 지금이나, 영국이나 한국이나, 동물원이나 그 바깥이나 늘 그렇듯이 여전히 유효한 민생 관련 현안이지 않은가? 다만 어떠한 삶이 만족할 만한 삶인가에 대한 대답은 적어도 애니메이션 속 동물들의 목소리를 빌자면 단지 ‘밥 먹여주는’ 수준에 머물지는 않는다. 그리고 분문보다 더 긴 사족들 # 1. 브라질에서 건너온 사자는 아마존을 꿈꾼다. 실제 브라질 이주 남성의 목소리를 따온 이 동물을 사자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갈기 없는 수사자이거나, 고양이과의 다른 맹수이거나 하는 식으로 모호함을 남긴다. 2005년, 7/7 테러 직후 영국 경찰은 테러 용의자로 한 청년을 추적, 현장 사살하였다. 아랍계로 오인된 이 청년은 브라질에서 왔다. 인종적, 문화적으로도 이슬람권과는 연관이 없었다. 모호함과 선입견이 낳은 비극이었다. # 2. 이 작품을 지금 리메이크한다면 폴란드 억양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폴란드 이주 노동자의 대거 유입과 그들이 처한 현실을 다룬 한 시사 프로그램은 애니메이션 시리즈 를 패러디하여 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 3. 막내 북극곰의 이름은 ‘앤드류’인데 (그렇다면 첫째 북극곰 이름은 찰스, 아빠 북극곰은 필립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요즘 리메이크한다면 두 어린 북극곰의 이름도 윌리엄과 해리(헨리)라고 부를 법하다. 아드만은 장편 < 치킨 런 > 속에서 탈출을 꿈꾸는 암탉 진저를 질주의 속도감 속에서 다루었는데, 나는 다이애너 전 왕세자비와의 오버랩을 지우기 힘들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윌리엄이 득남을 하였는데, 아이를 돌보면서 자신도 흥얼대며 ‘곰 세 마리’ 노래를 불러주지 않을까. (익히 잘 알고 있듯이 동물의 세계를 Animal Kingdom, 영국을 United Kingdom이라고 한다.) # 4. 대처의 타계 소식을 전하는 영국의 언론 매체들은 이미 입을 맞춘듯 하나의 헤드라인을 손쉽게 뽑아냈다. “영국을 둘로 쪼갠 인물.” 이 분할비율이 5:5 가르마를 뜻하지는 않는다. 대처의 발자취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한국의 TV에서 방송했다는 사실을 영국인들이 안다면 자못 뜨아해 할 것이다. 혹자는 대처의 오랜 재임 기간이 영국인의 지지를 반영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테지만, 대서양 건너 그녀의 소울 메이트인 레이건의 연임과 결부시키면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한결 손쉬울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에서 이들이 침체에 빠져있던 당시의 경제 상황을 단숨에 끌어올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경제 지표의 상승 뒤에는 공통적으로 전쟁이 놓여있고 (내전이 아닌, 자국 영토 밖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한 데이터가 필요할 테다. 다만 ‘20세기의 전쟁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한다’는 에릭 홉스봄의 혜안에 기대보고자 한다), 이 전시 상황은 유권자의 표심을 끌어모으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편이었으니까. 대처 시대의 트라우마는 그녀의 집권 기간 이상으로 오래갔다. 일례로, 2005년 선거에서 세번째 연임을 노리는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은 자신들이 등장하지 않는 선거 영상을 하나 만들었다. 주인공은 대처 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던 마이클 하워드 보수당 당수였고, 영상은 대처와 메이저 전 총리로 이어지는 보수당 정권 시절에 이루어진 대량 해고와 공장 폐쇄, 노동자들의 항의와 이를 진압하는 경찰력, 단호한 정책 실행의지를 피력하는 보수당 정치인의 모습 등의 보도 사진들을 엮은 것이었다. 그 이미지들에 “Memories~”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를 얹는 것으로 게임 끝이었다. 이 선거 영상물의 제목은 ‘기억하는가?Remember?’였다. 당시 보수당은 조금 더 자극적인 선거 캠페인을 벌였다. ‘도대체 병원은 왜 이다지도 불결한 건가?’, ‘어째서 경찰들은 안 보이는가?’와 같은 도발적 문구를 낙서체로 휘갈긴 대형 포스터를 곳곳에 붙였는데, 유권자들은 친절히 그 포스터들 위에 보수당의 질문에 답을 달아주었다. ‘그러니까 병원 청소부를 자른 건 누군데?’, ‘경찰인력을 축소한 게 누구였을까?’라는 문구를 진짜 낙서 글씨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