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의 가을여행
- 제작년도
- 2010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나는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어떤 게임에는 마음이 많이 붙들린다. 십여 년 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할 때도 그랬다. 피시방에서 나는 고민과 불만이 많은 청년 예술가이기를 잠시 멈추고 무쇠 갑옷을 입은 늑대인간으로 변신했다. 로그인을 하고 가상의 세상으로 진입하면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그 안에도 현실 세상과 비슷한 생존의 법칙이 존재했다. 미션을 수행하고, 전략을 짜고, 경쟁이나 싸움에서 이겨야만 능력치가 올라가고 돈도 많아졌다. 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게임 속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그래픽 풍경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핀 등에 올라타고 날아다니는 게 가장 좋았다. 던모로에서 엘윈 숲까지, 엘윈 숲에서 모단 호수까지, 쓸데없이 이동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니면 스크롤을 상하좌우로 돌리면서 호젓한 호숫가를 마냥 거닐었다.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게임에 몰입한다는데, 나는 화면 속에서 게임으로부터도 도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위안을 얻었다. 레벨업도 제대로 못(안) 하고 그만둔 게임이지만, 나에게도 한 시절의 추억이 남은 터였다. 와우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벤자민 리, 2024)을 홍보하며 넷플릭스는 여러 개의 공식 포스터를 띄웠는데, 그중 한 포스터가 영화의 핵심을 절묘하게 함축하는 듯해 눈길을 끌었다. 포스터를 가득 채운 것은 영화의 주인공인 노르웨이 청년 마츠의 얼굴인데, 절반은 현실의 얼굴이고, 나머지 절반은 픽셀이 깨어지듯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된 게임 속 캐릭터의 얼굴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뒤셴 근이영양증이라는 퇴행성 질환으로, 근육이 서서히 줄면서 신체 기능을 잃어가는 병이었다. 또래보다 발달 속도가 느리고 자주 넘어지는 아이였던 마츠는 하나씩 보조 장치가 늘어가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던 어린 시절, 마츠의 부모님은 게임을 마음껏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게임이 바로 와우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워진 스물다섯 살의 어느 날, 마츠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마츠의 가족은 그가 운영하던 블로그에 짧은 부고를 올린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많은 친구로부터 애도의 메시지가 쏟아진다. 그들은 마츠를 ‘이벨린’이라는 캐릭터 이름으로 불렀다. 스크린 너머에는 마츠의 가족이 전혀 모르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와우와 같은 롤플레잉 게임은 길드라고 불리는 커뮤니티에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게임을 하는데, 마츠는 자신의 길드에서 늘 사람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해결사라 불렸고, 로맨티스트라고도 불렸다. 마츠 스테인, 아니 이벨린 레드무어의 활약담을 들으며, 마츠의 부모는 놀라워한다. 육체의 한계 속에 고립된 아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늘 안타깝게 여겨왔는데, 스크린 너머에서는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달리고, 우정을 쌓고, 연애하고, 다투기도 하며 살았던 것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영화는 게임을 해로운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세상의 편견에 정면으로 응답한다. 중증 장애인은 물론이고 사회와의 대면에서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게임은 분명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출입문이 될 수 있다. 경쟁이나 현실 도피가 아닌 주체적 개입과 나눔으로서의 게임, 몸의 확장으로 기능하는 가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의 사회적 가치나 치유의 능력을 그저 입증하는 것, 그보다는 훨씬 복잡다단한 질문들 속에 마츠(혹은 이벨린)의 세계는 놓여있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스크린이 등장한다. 먼저, 마츠의 죽음 이후 촬영된 가족과 지인의 인터뷰 영상이 있다. 현재 시점의 이 영상들은 창가의 액자 속 사진으로 남은 마츠의 얼굴, 정지된 마츠의 삶을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회고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마츠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1989년 어느 날로부터 시작하는, 과거 영상의 인용이 있다.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 마츠의 모습, 조랑말 인형을 선물 받는 모습, 종종걸음으로 걷다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 조금 느려진 걸음으로 등교하던 모습, 수영장에서 아버지의 등에 업힌 모습, 가족여행이 있던 날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 이 화면들은 대부분 가족이 촬영한 홈비디오로, 마츠의 짧은 인생을 찬찬히 훑는다. 애정과 근심이 묻어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거칠게 요약되는 것은 점차 움직임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지는 퇴행성 근육 질환 장애인의 생애이다. 한편, 이 다큐멘터리는 남겨진 ‘데이터’를 통해 카메라가 찍을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마츠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마츠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온라인에서 보낸 시간은 약 2만 시간에 달한다. 그는 블로그에 많은 일기를 남겼고, 그가 속한 길드 ‘스타라이트’는 4만 2천여 쪽에 달하는 게임 내 채팅과 유저 로그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영화는 주인공 사후에 제작되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의 새로운 국면을 실험한다. 온라인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게임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고스란히 ‘재연(再演)’될 때, 그 가상의 ‘재현(再現)’이 가져오는 구체성과 생동감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렇게, 마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이 쓸 수 있었다. 더불어 그 다시-쓰기는 영화가 제시하는 다른 화면들을 다시-읽게끔 만든다. 마츠가 남긴 일기로 재구성된 내레이션은 홈비디오 화면 속 말 없는 마츠의 속마음을 훑는다(그는 얼마나 위트 넘치는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마츠가 얼마나 다정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는가를 들려주는 온라인 친구들의 이메일 내용만큼이나, 그 컴퓨터 스크린에 비친 마츠 부모님의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스크린들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로 틈입하며, 서로 간섭을 일으킨다. 겹겹의 진실이 우리 삶의 무대를 구성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영화는 ‘진짜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근육이 퇴화하는 와중에도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장비 덕분에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낙관적인 사람이라면 이 다큐가 기술에 대한 경외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의 제공과 기술에의 의지가 누구나의 삶에서 양립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며, 접근 가능한 기술 위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획득한 것은 마츠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고작 0과 1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데이터의 더미 속에서 누군가는 범죄를 도모하지만,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삶이라는 것을 구성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 자신의 생애가 어떤 기록으로 쓰일 것인가를 마츠가 미리 고민한 결과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시점에, 마츠는 블로그 비밀번호를 남기고, 비밀리에 방안에다 카메라를 설치하도록 요청했던 것 같다. 덕분에 죽음에 가까워지는 몸으로 마츠가 살아낸 컴퓨터 앞에서의 마지막 생애 또한 기록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스크린 너머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에 부치는 경배이면서, 동시에 ‘마츠의 비범한 인생’에 관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비범함과 평범함이라는 관념의 줄다리기 속에서 주인공을 영웅화하지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럼에도, 마츠가 게임에 접속한 다음 늘 30분가량 정해진 코스를 달렸다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먹먹해진다. 그건 그냥 산책길이 아니다. 꽃사슴과 회색늑대와 익룡이 함께 노니는, 영원히 닳지 않는 길이다. 마츠는 영원히 늙지 않는 몸으로, 지치지 않는 다리로 그 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 길에 진입하기 위해 화면을 켜고, 정성 들여 만든 이벨린의 삶으로 로그인하는 매일의 루틴을, 어떻게 가상이라는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단순한 스크린”이 아니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영혼이 향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와우 개발팀은 마츠를 기리기 위해 ‘레벤 꾸러미’라는 아이템에서 생기는 수익 전액을 근이영양증 환자 지원 단체인 큐어뒤셴에 기부하고 있으며, 게임 안에 이벨린의 묘비를 설치했다. 이벨린은 그가 자주 가던 엘윈 숲에 위치한 수정 호수에 묻혀 있다. 와우 유저라면 누구나 참배할 수 있다. 좌표는 49, 65, 7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속 아이템 레벤과 마츠(이벨린) 추모비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A Life Rich with Community and Connection through World of Warcraft ”, Cure Duchenne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허구와 사실의 관계,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에 집중하며, 주로 이야기를 새롭게 직조하면서 역사적ㆍ사적 자료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모나미 153 연대기』(2019)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 빈집 >에서 방랑자 주인공 태석(재희)이 비어 있는 집들을 떠돌아다니는 스산한 세계부터 투명인간이 출몰하는 미스터리한 세계까지 서사의 순열은 이야기의 초점을 누구에게 귀속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현실로, 무엇을 상상의 세계로 규정할 것인지를 두고 서사가 길을 잃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과는 플롯의 끝에서 장자의 다음과 같은 문구로 강조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그 귀착지는 교도관에게 거듭 구타를 당하고도 상처를 입지 않고 죽어가는 태석의 꿈으로, 또는 남편과 공존할 수 있게 된 선화(이승연)의 꿈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에 세 번째 해석을 더해야 한다.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태석은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학습하였다. 세 가지 해석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영화 안에 새겨져 있다. 표제어로 쓰이는 ‘빈집’은 장소, 공백, 고립이라는 관념을 전달하면서 존재하는 것보다 부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첫 번째 쇼트는 그물망 뒤 조각상을 보여주고 다음 쇼트는 보이지 않는 골프공이 그물망에 부딪히는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골프채 타격음과 함께 들린다. 이때 초점이 맞지 않는 조각상과 그물의 롱 쇼트는 시공간의 좌표에 대한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첫 쇼트에 등장한 조각상과 그물이 태석이 선화를 만나는 집에 놓인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이는 사물이 전달하는 가치를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전환하는 전형적인 김기덕식 수사학을 전제한다. 몰래 들어간 첫 번째 집에서 어린 아들이 태석이 수리한 장난감 총을 발사하여 엄마를 상해하는 장면에서도 이미지의 전환이 발생한다. 고생스러운 가족여행으로 불만이 가득한 엄마를 향해 소년이 플라스틱 총알을 발사하자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리지만 이어지는 쇼트는 창문 밖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태석을 보여주는 식이다. 가족 간 불화와 폭력은 두 번째 방문지인 선화의 집으로 전이된다. 아내를 학대하는 남편을 향해 태석은 골프공을 발사한다. 소년의 플라스틱 총알은 태석의 골프공이 되고, 그것은 소년-태석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학대를 저지하는 사물로 기능한다. 커플을 이룬 태석과 선화가 자신의 집에 침입하여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 권투선수가 태석을 폭행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태석을 때리는 권투선수 대신 권투선수의 사진을 클로즈업한다. 남편이 선화를 학대할 때 분노한 태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과 같은 패턴이다. 이처럼 우리는 두 주인공의 침묵을 채우는 것과 유사하게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이미지와 대면한다. 이처럼 <빈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침묵이다. 태석은 대사가 없지만 선화는 영화의 마지막 몇 분 동안 “사랑해요”와 “식사하세요”라는 두 마디 대사를 말한다. 대사는 없지만 다른 수단을 통해 의미가 전달된다. 예를 들어 웃음과 울음은 대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가혹한 폭행 뒤에 욕조에서 우는 선화, 골프 연습을 하다 무고한 여자를 피투성이로 만든 뒤 우는 태석의 모습 따위를 볼 수 있다. 누군가 감정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이에 반응하기 때문에 이 모든 장면은 대화의 기능을 한다. 때론 클로즈업이 이와 같은 기능을 대신한다. 클로즈업은 시공간의 좌표로부터 얼굴을 추상화하여 정서를 표현하는 기교이다. 태석과 선화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숙고해 보자. 대화는 없고,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침묵하는 얼굴이 역전된 쇼트들을 통해 제시된다. 태석과 선화가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표정이 없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놀라움, 혐오감, 피곤함, 그리고 용서를 읽는다. 해석적 표면으로서의 얼굴의 위상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태석의 얼굴은 벽에 걸린 선화의 사진과 나란히 배치된다. 태석은 경찰의 심문을 받을 때 침묵을 유지한다. 심문이 끝난 후 경찰은 죽은 노인이 정원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는 선화가 심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태석 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이다. 따라서 침묵은 일종의 내러티브 장치로 관객들이 텍스트의 폭정에서 벗어나 이미 말해진 레퍼토리들을 기초로 하여 스스로 빈칸을 채우도록 돕는다. 더 나아가 예측을 통해 관객은 사건의 과정을 설정하고 세계의 구조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태석과 선화가 빈집에 거주할 때 그들의 은밀한 동거가 들통날 것인지 아닐지를 추측하는 것도 이러한 매커니즘을 통해서이다. 텍스트는 관객의 예측을 확인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작동한다. 따라서 두 방랑자가 권투 선수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그 집에 다가오는 자동차의 쇼트는 마침내 저들의 존재가 드러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렇게 되면 텍스트는 관객의 예측을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침묵의 매커니즘은 영화의 초반부까지만 작동한다. 태석이 감옥에 갇히고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면서 관객은 개연성의 세계에서 초현실적인 세계로 서사가 순환하는 것을 목격한다. 교도소라는 상징적인 헤테로토피아에서 태석이 투명 골프공과 투명 골프채로 연습하는 장면에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건, 특이점, 전환점이 있다. 1부에서 부재가 단순히 하나의 가치였다면, 서사의 세계가 순치된 2부에는 부재로 인해서 표시되는 것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골프공과 클럽의 부재가 골프공을 타격하는 소리로 표시될 때 부재는 현전(現前)과 양면을 이루게 된다. 태석의 변신과 대칭을 이루는 선화의 변신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선화는 태석을 대동하고 자신의 사진을 찍어온 사진작가의 집을 점거한다. 사진 속 선화의 몸은 폭행으로 상한 그녀의 몸과 대조를 이룬다. 태석은 빈집에 침입하여 자신의 몸에서 빠져 나오지만 선화는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선화가 사진을 벽에서 떼어내어 재구성하는 모습에서 상한 육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과 좌절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태석의 보이지 않는 골프 게임과 유사한 사건이자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선화의 의지를 드러낸다. 다음 날 선화는 태석이 하는 것처럼 손빨래를 하고 있다. 태석이 감옥에 가는 동안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선화는 남자와의 관계를 거부하고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외출을 하는 등 이전과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선화가 살아남은 것은 반항을 통해서가 아니며 새로운 질서, 새로운 존재의 상태를 확립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새로운 존재의 모습은 폭력과 권력이 아닌 환대와 공존의 양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선화는 남편의 권력과 폭력을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남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잠시 침묵을 깨고 남편(실질적으로 그의 뒤에 있는 태석)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남편은 선화의 생경한 고백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태석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선화를 끌어안는다. 선화가 부정했던 상징의 도구로서 “사랑해요”라는 말은 이제 기만의 장치로 전락하였다. 선화가 터득한 생존 전략은 타인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의미의 표면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태석이라는 투명인간을 모른 채 남편이 그 빈칸을 채우게 함으로써 세 사람의 공존이 가능해진 것이다. 태석의 손바닥에 그려진 눈의 형상은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작품 ‘잘못된 거울’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시각이 가진 한계와 속임수, 그리고 주관성을 초래할 수 있는 지각의 오류를 표현한 거울상은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나온다. 선화의 집에서 태석은 빈번하게 유리에 반사된 이미지로 재현된다. 태석은 투명인간이 됨으로써 바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법을 배운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석은 교도관의 시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카메라 자체의 시선, 그리고 관객의 시선에서도 벗어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인정해야 보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도관은 투명인간이 된 태석을 감지할 수 있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선화는 180도로 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 그의 존재를 볼 수 있게 된다. 적대감을 화해하는 영화적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지각의 차원이 우리들에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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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은 2016년 여자아이들의 우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 우리들 >로 큰 주목을 받으며 장편 데뷔를 했다. 이미 단편 < 사루비아의 맛 >(2009), < 손님 >(2011), < 콩나물 >(2013)에서 여자아이들의 감정과 모험을 다룬 윤가은 감독은 최근작 < 우리집 >(2019)에서도 각자 집에 해결할 문제를 안고 있는 하나와 유미·유진 자매를 통해 집과 우리의 의미를 묻는다. 이렇게 여자아이들의 다양한 관계와 삶을 다룬 연작으로 윤가은 감독은 ‘우리 유니버스’라고 칭해지는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유니버스’는 10대 여자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영화적이고 스펙터클한지, 그리고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지를 증명한다. <우리들>의 오프닝 장면을 보자. 블랙 스크린이 지속되는 첫 쇼트는 여러 아이들이 각자 자기 팀이 될 멤버를 뽑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는 소리를 들려준다. 서로 자기를 먼저 뽑아달라는 대사와 뽑히지 못해 아쉬워하는 한숨소리가 뒤섞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쇼트에서 관객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한 선의 얼굴을 만난다. 더티 싱글의 롱테이크로 연출된 이 클로즈업 쇼트는 선의 얼굴 주변 배경으로 프레임 인 & 아웃과 포커스 인 & 아웃이 반복되며 시끄럽게 장난치는 다른 아이들의 무신경함과 말없이 눈치만 보는 선을 대비시킨다. 아이들은 선을 대놓고 따돌리진 않지만 굳이 한 팀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선은 속상하지만 티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화면 밖에서 마지막 가위바위보가 이뤄지고 선은 끝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선을 데려가게 된 아이는 선을 다른 아이와 바꿔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이 장면은 자존심 상하고 주눅 들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10대 여자아이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정확하고 강렬하게 그려낸다. 단 두 개의 쇼트로 구성된 이 오프닝 장면은 10대 여자아이가 은근하게 따돌림 당하는 환경과 감정, 배경과 인물, 외면과 내면을 모두 가시화하며 한 여자아이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단숨에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집>도 이와 유사하게 오프닝을 연다. 블랙 스크린으로 시작한 오프닝 장면은 불안하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 한숨소리, 밥 먹는 소리, 매미소리가 레이어를 만들며 점점 사운드가 쌓여가는 가운데 그 꼭지점에서 엄마아빠가 싸우는 소리와 함께 주인공 하나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등장한다. 이 장면은 온전히 어찌할 바 모르는 하나의 불안한 감정과 수심에 가득 찬 얼굴에 집중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얼마나 주변의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들>이 두 여자아이의 우정에 대한 영화라면 <우리집>은 여자아이들에게 돌봄과 ‘우리’라는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10대 여자아이를 통해 돌봄이 고단한 노동일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는 관찰의 제스처이며, 친밀감, 공동체 구성을 통한 안정감, 문제해결의 성취감, 선행의 인정욕구, 서로를 간섭하는 데서 오는 짜증, 자기 욕망과 강제된 성별역할 사이의 혼란 등 다양한 상태와 감정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들>에서도 사용되었던 사운드로 화면 안과 밖을 끊임없이 연결하고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고 영향 받는 영화적 연출형식은 돌봄의 제스처와 정동을 체화한다. <우리집>의 주인공 하나는 나이는 어리지만 학교에서 선행상을 받을 뿐 아니라 방학숙제로 요리책을 만들고 실제로 타인을 위해 요리해주는 것을 즐긴다는 면에서 돌봄 능력이 뛰어나다. 하나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의 가족을 다시 ‘하나’로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성숙한 하나라도 어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란 쉽지 않다. 하나가 할 수 있는 건 밥을 차려 같이 먹자고 반복적으로 요청하거나 좋았던 시절의 추억을 살려 가족여행을 가자고 조르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조차 매번 실패한다. 그래서 하나는 유미와 유진 자매를 발견한다. 대형마트에서 하나는 꼼꼼한 관찰력으로 유미와 유진 자매에게 어른들의 일상적인 돌봄이 부족함을 알아챈다. 길을 잃어버린 유진을 찾아주며 친분을 맺은 하나는 화목해 보이는 유미와 유진의 집에도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아파트에 사는 하나와 달리 옥탑방에 사는 유미와 유진이네 집은 잦은 이사를 다녀야 하는 처지이다. 이혼직전의 부모가 문제인 하나와 안정적인 거주조건이 부족한 유미는 서로의 집을 부러워한다. 셋은 <열차의 이방인>(1951)의 인물들처럼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한다. 하나는 자신의 문제 해결이 힘들어질수록 유미와 유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집착한다. 하나가 자매를 돌봐주는 데서 오는 기쁨과 만족감은 단순하지 않다. 부차적이긴 하지만 하나는 자매를 돌보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서 영향력과 능력의 성취감을 느끼며 자신의 가족 내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어느 정도 상쇄한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의 부모는 가족여행을 가기로 약속하지만, 하나는 곧 그것이 부모의 이혼여행임을 알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부모는 이혼 합의에 이르러서야 지난한 싸움을 멈춘다. 그러나 이혼이 가족의 해체로 이해되는 하나는 이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는 가족여행 직전에 가출해 유미와 유진 자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엄마 아빠를 만날 기쁨에 셋이 함께 모은 상자로 만든 된 집을 등에 진 어린 유진과 무력함과 상실감에 빠진 하나, 그리고 그 둘 모두를 걱정하며 돌보는 유미는 자매의 부모가 일하는 보리해변으로 떠난다. 길을 잃고 어딘지 알 수 없는 해변에 도착한 셋은 갈등이 폭발하고 유진이 갖고 온 상자집을 발로 짓이겨 부숴버린다. 오랜 시간 공들여 함께 만든 집을 부수고야 셋은 서로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서로를 돌아보게 된다. 파괴가 오히려 새로운 우리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자매의 집의 부동산 계약이 성사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방문객들에게 아이들이 집에 대한 악평을 하고 방을 어지르는 해체적 방식을 썼던 것처럼 그들은 정형화된 집을 부수고 나서야 자기들만의 집을 찾는다. 하나는 마침내 새로운 집을 만들기 위해선 때로 해체와 파괴도 필요하다는 것, 집은 하나의 모양과 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돌봄에 대해서도 하나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유미와 유진을 돌봐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유미 역시 계속 하나의 기분을 살피고 하나가 언니(리더)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돌봐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돌봄에는 여러 결과 각도가 있다. 하나의 엄마는 직장과 가사 일을 모두 잘하는 수퍼맘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가부장제적 압박에 지쳐 하나의 돌봄 행위가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성별역할을 벗어난 다른 결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가 성별고정관념 때문에 돌봄을 순순히 여자아이의 역할로 받아들이거나 문제해결을 돌봄을 통해서만 하려는 건 아닌지를 고민하고 걱정하는 하나 엄마의 감정 또한 여자아이와 관련된 돌봄의 정동이다. 집을 지키고 서로를 돌보고자 하는 세 여자아이의 모험은 집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동과 모험의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고전 주류 서사는 끊임없이 여성을 집(돌봄)과 일치시키면서 공간화화하고 정주시키며 모험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반면 남성은 모험을 떠난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리더십을 시험하고 개인 영웅으로서의 성장서사를 만든다. <우리집>은 집과 길, 정주와 모험, 유지와 성장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집>은 집과 돌봄의 주제, 그와 관련된 감정과 관계를 버리지 않으면서 여자아이들의 모험의 서사를 만든다. 그를 위해 집을 트랜스포머처럼 이동시키고 해체하고 모험의 공간으로 만들며 때로 추상화한다. 유진의 상자집처럼 말이다. 셋이 해변가에서 우연히 만난 캠핑장의 텐트처럼 집은 얼마든지 모험적인 소재와 주제가 될 수 있다. ‘길 위의 집’의 모험을 통해 하나는 ‘우리’를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게 되는 성장을 한다. 하나는 엄마아빠가 이혼해도 다른 모양의 가족을 구성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가족 외에 우정으로 이어진 ‘우리’를 소중히 여기며, 물리적 공간이나 제도적 구속력이 ‘우리’를 떠받치는 유일한 조건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나는 마지막까지 가족들에게 밥을 차려주며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갈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 모험의 여정에서 하나는 돌봄의 가치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리더십을 시험하고 ‘우리’를 다양하게 구성하며 성장서사를 이끌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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