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입장
- 감독
- 강정인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김해나, 심은우, 박성준, 권오성
초점이 맞지 않은 침침한 화면으로 치도곤을 당하는 한 소년이 보인다. 폭행을 가하는 패거리들 가운데에서 피해자를 무자비하게 두들기는 가해자의 얼굴도 희미하게 드러난다. 폭행에 가담하진 않고 있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해자로 보이는 두 소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피아 구분이 불분명한 혼란 상(像)은 앞으로 우리들에게 제시될 사건의 성격을 말해준다. 내레이션(Narration)이라는 관점에서 < 파수꾼 >(2011)은 복합적 서사 라인의 겹침과 교차, 미궁에 빠지는 인과율, 내레이션의 시간 조작이라는 현대적인 스토리텔링 장치들에 의해 운항된다. 다성적인 기원을 갖는 인간 행위의 본질에 가까이 가기 위해 이 영화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캐릭터들이 각자의 스토리를 갖도록 자율성을 부여한다. 앞과 뒤의 서술 내용이 서로를 배반하는 플롯은 서술 주체들의 입장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삽화들을 교차하면서, 부딪히고, 순환하는 관계를 묘사한다. 간단하게 정의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이 인물들의 삶에 비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연출자 윤성현은 단일하게 정의할 수 없는 인간 행위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무질서하게 배치된 것처럼 보이는 쇼트와 신, 시퀀스들의 관계를 유기적인 사슬로 엮는다. 한국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십대 드라마는 외부인이나 교사의 관점을 포함하여 청소년의 행태를 극화함으로써 국가 시스템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관찰은 정형화된 스토리 패턴에 종속되는 스테레오타입화된 십대 캐릭터를 앞세우는데 모든 사건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다. 주인공은 대개 결손 가정 출신이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쉼터이자 사춘기 이후 악몽의 온상인 학교와 가정의 중층적인 모순을 드러내려 한다. <파수꾼>은 십대 드라마의 클리셰를 부분적으로 차용하면서 이와 본질적으로 갈라선다. 장르의 전형을 뛰어넘는 성취는 명백한 인과관계에 의해 성립되는 십대 드라마의 서사 관습에 도전하는 것이다. <파수꾼>은 한 명의 프로타고니스트에 의해 주관(主管)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複數)의 인물들이 교대로 플롯을 끌고 가며, 시간은 선형성을 도외시한 채 과거와 현재를 어지럽게 오가고, 연대기적 인과관계의 전복을 통해 전통적 스토리텔링의 유습으로부터 탈피하고 있다. 요컨대 플롯이 추구하는 목표 내지는 관객들이 던지는 질문은 국면에 따라 종류를 달리 하고 그때마다 화자가 교체되면서 목표와 질문의 깊이도 달라진다. 서술 주체가 변경될 때마다 내레이션은 미스터리를 해소하고 이야기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기차 선로 마냥 미스터리의 해결은 단일한 결과로 귀결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야심찬 <파수꾼>의 서사는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주인공 기태(이제훈)의 죽음을 추적하는 일종의 탐정 스토리에서 최초로 탐정 역할을 맡은 인물은 희생자의 아버지(조성하)이다. 도입부에 관객들은 미스터리 장르의 관습과 규범에 따라 기태의 아버지가 죽음의 비밀을 밝혀 갈 탐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희준(박정민)을 만난 이후부터 그의 소임은 끝난다. 현재의 탐사자이자 질문자인 아버지는 기태의 죽음과 관련한 피상적인 사실만을 제공할 뿐이다. 누가 죽었는가라는 질문에 답이 내려진 이후 그는 서사의 동력을 상실한다. 그때까지 가해자로 보였던 기태가 죽었다는 사실로부터 가해자는 왜 죽음에 이르렀고, 피해자는 그로부터 도피하였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행한다. 덩달아 죽음의 미스터리에 대해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희준, 동윤(서준영)에게 초점이 이동한다. 플롯의 효과가 랜덤의 배열이 아니라 치밀한 내레이션의 작용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 질서와 논리에 주목해야만 한다. 기태를 가학적인 악마와 속 깊은 친구로 번갈아 보여주는 도입부의 플래시백은 이 장면이 누구의 관점에서 전달되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간 혼란스럽다. 하지만 기태의 죽음을 둘러싸고 희준과 동윤이 용의자로 좁혀지는 순간, 진실이 밝혀지는 것 같다. 죽은 친구의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소년들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때문에 비난을 피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두 소년은 기태와 친했던 적이 없다고 부인하거나 다른 친구들이 기태를 더 잘 안다고 질문을 회피한다. 영화의 서사 전개, 갈등과 대단원은 도입부에 제기된 쟁점에 종속된다. 즉, 도입부에서 결과(기태의 죽음)를 먼저 제시함으로써 이것이 내러티브의 모든 국면을 관장하도록 설정하였다. 기태가 희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먼저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기태에게 마음을 주기 어렵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전환되면서 보다 진실에 가까운 기태의 입장(폭력의 원인과 그 내면)이 드러나는 식인데 이 대목에 이르러 관객은 그를 동정하고 깊이 이입하게 된다. 이 순간부터 화자의 교체와 더불어 오인의 매설, 수정은 이 구조의 핵심 의제로 떠오른다. 고전적 내레이션의 경우 단선적인 갈등의 유도와 해결이 일반화된 반면, <파수꾼>은 핵심 사건과 갈등이 다중적인 흐름으로 유도되고 있으며, 이러한 내레이션 전략은 사소한 오해와 차이가 누적되어 붕괴하는 관계라는 주제를 견인한다. 질문의 이행과정에서 정보, 심리의 전개 방향을 분명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고전적 내러티브 구조와 달리 이 영화는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지점을 그윽하게 감춘다. 기태의 죽음과 연관된 인물들이 서로 공유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정보는 관객에게 공유됨으로써 누적된다. 그러나 관객들 역시 죽음의 원인을 완벽하게 알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이는 기태와 희준, 동윤의 스토리를 거의 균등하게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관계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설득력 있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희준과 동윤은 기태의 아버지를 매개로 하여 기태와의 과거를 회상하지만 이는 아버지에게 이야기한 것을 토대로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내용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경험이 자신의 입장에서 나열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서사의 끝에는 말끔한 미스터리의 해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희준이 기태와 함께 보낸 시간을 회상할 때 카메라는 소년들이 공유하는 유쾌함과 웃음을 가까이에서 포착하지만 그들 사이에 심연이 형성됨에 따라 점차 정적인 제스처로 변한다. 친구의 얼굴 사이에서 카메라의 이동은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서로 마주보고 위치할 때 멈춘다. 멈춤과 경직은 지속되고 곧 메울 수 없게 된다.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희준과 재호(배제기)가 기태의 콤플렉스인 모성의 부재를 입에 올렸기 때문인지, 짝사랑하는 보경이 기태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 희준이 질투하는 것인지, 세정(이초희)에 대한 풍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든 것이 묘연하다. 기태는 회피하는 희준에게 짜증을 내고 절친을 때리는 것으로 좌절감을 표출한다. 또는 희준은 기태가 자신을 위협하는 방식을 싫어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친구인 척한다. 희준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동안에도 기태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소년들은 어른, 작중 인물, 관객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세계 안에서 말하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파수꾼>은 미묘하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소년들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정신분석적, 사회학적, 전지적 관점을 지양한다. 여러 갈래의 관점이 교차하는 이 영화의 구조는 만족할만한 결말, 명쾌한 진실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해석하는 것이 기껏해야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은 퍼즐 조각의 조각난 그림들일 때 더욱 그렇다. 윤성현은 십대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영화적 언어로 효과적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감독이다. 욕설 외에 1분 동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잘 되지만 다음 장면에서는 완전히 남이 된다. 흔해빠진 십대 성장드라마에 독창성을 부여한 것은 이야기의 형식이 이야기의 성격을 결정하도록 한 스토리텔링의 효과이다. 탐색의 주체가 봉착한 딜레마를 강조하는 조각난 비선형 구조는 악마의 모습으로 등장한 소년이 수줍고 연약한 아이로 귀환하여 위력적으로 마음을 휩쓸고 가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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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사사로운 리스트 5년째 이 일을 하다 보니, 연말이 되면 사사로운 영화리스트를 작성하고, 리스트에 있는 영화 중 한 편을 골라 글을 쓰는 일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최고의 영화를 꼽는 것도 아닌 그저 사사롭게 좋았던 영화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이 해가 갈수록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유가 뭘까에 대해 매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나의 문제인지, 영화의 문제인지는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막상 리스트를 완성하고 나면 뭔가 일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리스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편을 선정한 건 각각의 이유가 있긴 하다. 그러나 이 10편의 영화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기보다 2019년 한 해 동안 이러 저런 영화들을 보면서 느낀 몇 가지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작년까지만 해도 명확하게 느낄 수 없었지만, 201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고 영화는, 지금, 분명히, 새로운 물결이 한 시대를 밀어내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 있다. 이 흐름은 영화를 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어놓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멀쩡해 보이는 영화에서, 아니 애초부터 멀쩡하지 않았지만 그런 줄 몰랐던 영화 속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 이걸 봐 버린 이상 우리는 이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저항이 있지만,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가서는 안 될 강을 이미 건너버렸다. 따라서 설사 되돌아갈 방법이 있다 해도, 그런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2019년 주요 영화들을 관통하고 있는 난민, 페미니즘, 불평등의 주제는 모두 사회적 약자와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 약자가 강력한 주제의식을 가진 영화의 전면에 나서면, 영화는 순수한 영화적 즐거움과 사회를 바꾸려는 캠페인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경계에 서게 된다. 그 경계에서 어떤 쪽으로 얼마나 발을 내딛느냐에 따라 영화의 운명은 달라진다. 2019년 최고의 수작과 큰 영화제의 수상작들은 대부분 이 경계에서 양쪽에 모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영화이거나, 주제를 꽉 쥔 채 영화적 쾌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걸 끝까지 밀어붙인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흥미로운 건 이런 시도들이 거대 자본을 투입하여, 정교하고 세련된 세계를 창조, 확장하고 있는 할리우드와 자본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최고의 창작자들에게 자본으로 영화적 자유를 선물하고 있는 넷플릭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항상 반복되어 이야기되는 독립, 예술영화들의 위기가 이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개의 전혀 다른 거대 자본의 틈새에서 시작되고 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넷플릭스는 알폰소 쿠아론, 코엔 형제, 마틴 스콜세즈, 노아 바움백 등 영화의 만신전에 들어갈 위대한 감독들과 손잡고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을 만들고 있다. 넷플릭스와 손잡은 감독들은 간섭하지 않는 자본이 선사해준 창작의 자유를 간증하며 자신의 영화 세계를 담아낸 야심 찬 수작들을 연달아 내놓고 있다. 이와 함께 넷플릭스는 명성이 있는 영화제들을 통해 나오는 주요 예술영화들의 전 세계 배급권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넷플릭스는 이제 자본의 사이즈로는 경쟁이 되지 않는, 중소 규모의 수입 배급사들의 경쟁자이자, 전통적인 예술영화 시장을 위협하는 포식자가 되었다. 디즈니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반대편에는 우리가 알던 독립, 예술영화가 아니라, 주요 독립, 예술영화들의 배급권을 모조리 사들이고 싶어하는 넷플릭스가 서 있는 형국이 되었다. 독립영화도, 예술영화도 자본이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앞으로 독립, 예술영화는 소수의 예술영화 전용관과 영화제 서킷 그리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해서, 그게 아니면 넷플릭스를 통해서만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최근 ‘시네마’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된 건 이런 상황이 지속 또는 확장될 것임을 예측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2019년 리스트에 있는 영화 10편은 그 수많은 영화들 중 ‘시네마 Cinema’ 또는 ‘시네마틱 Cinematic’에 대해 영감을 주었던 영화, 그래서 응원하고 싶은 영화들을 중심으로 ‘사사롭게’ 선택했다. 여기 있는 영화들은 대부분 국내 개봉을 했거나, 국내 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영화들이다. 안 본 영화들이 있다면 기억해두었다가 챙겨보길 권하고 싶다. 지금부턴 리스트에 있는 10편의 영화 중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 소녀 안티고네 >(소피 데라스페, 2019)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Antigone>다. 맞다. 고대 그리스의 3대 극작가 중 한 명이었던 소포클레스의 희곡이다, 그가 저술한 4대 비극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그 『안티고네』다, 그래서 한글 제목인 <소녀 안티고네>에서 ‘소녀’라는 단어를 처음 보고 갸우뚱했다. 사람들이 안티고네가 어린 여성인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안티고네가 어린 여성, ‘소녀’라는 사실이 중요했던 걸까? 의도했든 안 했든 ‘소녀’라는 단어가 강인한 인물인 안티고네와 함께 쓰이면서 제목이 주는 아이러니가 한층 강해진 것 같긴 하다. 대부분의 영화는 원작이 어떤 작품인지 제목과 간략한 내용만 알아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르다. 원작과 제목만 같은 게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의 이름이 기원전 441년에 만들어진 원작 속 인물의 이름과 똑같다. 거기에 주요 인물들이 벌이는 논쟁의 지점도 유사하다. 원작의 틀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제목이 보여주듯 원작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원작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원작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함께 소포클레스의 “테베 3부작” 중 한 편이다. 서사적으론 『오이디푸스 왕』이 다음의 이야기지만, 시기적으론 가장 먼저 쓰였다. 혈육의 도리를 다하려다 국법을 위반한 여주인공 안티고네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헤겔은 “걸작 중의 걸작이며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이와 비견될 작품이 없다”고 했다. 안티고네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자신의 손으로 눈을 찔러 맹인이 된 후 왕국을 떠난 오이디푸스를 따라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오이디푸스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뒤 그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왕위를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다가 모두 죽었다. 그런데 이때 테베의 새로운 왕이 된 숙부 크레온은 외국의 군대와 함께 테베를 공격했던 폴리네이케스를 조국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매장을 금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칙령을 어기고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크레온은 안티고네에게 생매장의 벌을 내리지만 그녀는 벌이 실행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편 안티고네를 사랑했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 하에몬은 아버지로부터 그의 사면을 얻어내지 못하자 그를 따라 자결한다. 『안티고네』가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은, 군주의 폭정과 귀족과 성직자들의 수탈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프랑스인들과 혁명의 동조자들에게 안티고네는 자유, 평등, 박애로 대변되는 혁명 정신에 대한 완벽한 알레고리였기 때문이다. 안티고네가 죽은 오빠에게 보낸 절대적인 사랑은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초월한 보편적 인류애로 읽혔고, 국가권력에 맞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다가, 자살을 선택한 그의 모습은 천부인권설에 담긴 개인의 자유를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와 함께 여성으로서 모든 권력을 가졌던 남성과 당당하게 맞섰던 그는, 성평등은 물론이고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의 평등과 정치적 참정권의 옹호자로 상징되었다. 그리하여 폭군에 대한 안티고네의 저항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혁명 정신과 겹쳐졌고, 저항의 대가로 받게 된 생매장의 형벌은 바스티유의 지하 감옥을 환기시켰다. 또한 그의 자결은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강력한 자유 의지와 혁명을 위한 숭고한 순교로 받아들여졌다. 논쟁적 사유, 불굴의 의지, 과감한 결단과 실행력으로 무장한 영웅적 주인공의 이상적 모델로서의 안티고네의 상징성과 이미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 특히 『안티고네』가 주목받았던 건 왕의 칙령을 어기고 오빠를 매장한 안티고네와 국가 반역자의 매장을 금지한 크레온의 대립과 둘 사이의 논쟁 때문이었다. 신성한 윤리이자, 감정에 호소하는 가족 윤리(자연법)와 공동체의 안녕과 존속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법의 정면 충돌, 각자의 입장에서 정당성을 주장하는 두 개의 거대한 윤리 또는 법 사이의 충돌과 논쟁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안티고네』 서사의 핵심이다. 또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논쟁은 결국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완벽한 가부장적 사회에선 혁명의 서사가 아니고선 결국 막강한 국가권력과 법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이 운명과도 같은 비극의 서사를 활용하여 당대의 사회적 논쟁에 대한 정치적 성찰을 이끌어내고 도덕적 힘들의 충돌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제시했다. 『안티고네』가 세상에 나온 지 2천 4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새로운 모습을 한 안티고네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살고 있다. 그는 이제 왕족이 아니라 알제리에서 온 난민이다. 3살이 되던 해,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언니 이스메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조국을 떠나 캐나다와 도착했고, 몬트리올에 정착했다. 현재 그의 가족은 아직 시민권을 갖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알제리임을 잊지 않은 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두 오빠는 자기 밥벌이 정도는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역의 갱단에서 활동하고 있고, 성인이 된 이스메네는 미용실에서 보조로 일을 하고 있으며, 안티고네는 장학금을 받아가며 열심히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제 안티고네 가족은 풍족하진 않아도 미래를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던 에테오클레스가 경찰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있던 폴리네이케스는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경찰폭행죄로 알제리로 추방될 위기에 처한다. 부모의 죽음을 겪으며 먼 타국에서 간신히 삶의 터전을 잡은 듯했던 한 가족은 이제 합법적 국가권력에 의해 해체될 위기에 놓인다. 이제 안티고네의 시간이 도래했다. 연약하게만 보이던 막내 안티고네는 가족을 위해 수감된 오빠를 감옥에서 빼내기로 마음먹는다. 폴리네이케스는 남은 가족 중 유일한 남자이고, 그의 존재는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생각은 단순했다. 미성년자인 자신은 어떤 잘못을 하든 쉽게 풀려날 거라 믿었다.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남자 옷을 입고, 오빠와 비슷하게 변장하고 면회에 가서 옷을 바꿔입고 오빠를 탈옥시킨다. 원작의 매장은 탈옥으로, 크레온은 국가의 사법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안티고네의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모든 용기를 짜내어 법을 지키는 대신 가족의 윤리를 택했다. 완전히 상반되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정당한 두 가치를 어떻게 충돌시키냐와 안티고네에게 얼마나 감정이입할 수 있느냐가 이 영화의 관건이다. 가족을 위해 범법자가 되어 법정에 선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당당하게 유죄를 인정한다. 그리고 “전 언제든 다시 법을 어길 거예요. 오빠를 도우라고 제 심장이 제게 말하고 있어요”라고 외친다. 재판 초기 범죄 조직에 가담한 불법 난민의 아이콘이 되어 인터넷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던 안티고네는, 남자친구 하에몬의 노력으로 인해, 가족를 위해 범법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용맹한 소녀로 회자된다. 대중의 지지가 강해지면서 난민 소녀 안티고네는 가족의 가치를 수호한 영웅이 된다. 그러자 합법의 탈을 쓴 국가폭력의 이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대 그리스에서 목숨을 놓고 벌인 2천여 년 전의 비극적 논쟁은 이렇게 동시대적 감각으로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며 부활한다. 이 흥미로운 각색의 중심에는 소피 데라스페 감독이 있다. 그는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안티고네의 서사에 현재 전 세계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인 난민 문제를 성공적으로 이식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건 주연을 맡은 신인 배우 나에마 리치다. 그는 데뷔작임에도 강렬한 연기력으로 서사를 장악하고 주도한다. 안티고네가 머리를 깎고 언니에게 가족을 위해 일할 것을 강하게 요구할 때, 애써서 탈옥시켰지만 다시 잡혀 와 법정에 선 오빠를 향해 피를 토하듯 절규할 때, 그리고 그 어떤 유혹의 순간에도 망설임 없이 가족의 윤리를 선택할 때 등 서사의 인과관계의 중요한 고비마다 튀니지 출신의 이민자인 그의 연기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며 관객을 설득해낸다. 이렇듯 <소녀 안티고네>는 한 발 더 나간 결말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원작에 담겨 있던 사회적 논쟁에 대한 정치적 성찰과 함께 양립하는 두 가치의 충돌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고스란히 영화에 담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1)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저, 강태경 역, 홍문각
영화 초반부 가족 구성원들은 도시적 삶 속에서 누릴법한 로맨틱한 순간을 선보인다. 막내딸은 버스에서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여배우와 연애를 하는 큰아들은 멜로 영화를 찍고 있으며, 첫째 딸은 동물원 데이트를 즐긴다. 이러한 낭만의 중심에는 가장 ‘로맨스 빠빠’가 있다. 궁핍한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양, 그가 매일 출근길에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꽃다발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세상에 없을 듯한 이상적 가족이다. 홈드라마 < 로맨스 빠빠 >( 신상옥 , 1960)는 일반적으로 1960년대 한국사회가 요청한 서민 가족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돼왔다. 로맨틱한 가장과 개성 강한 자식 세대의 조화, 실직으로 인한 위기를 쾌활히 극복해나가는 어질고 고운 이야기는 폭넓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작품은 오프닝에서부터 가족 구성원의 간명한 캐리커쳐를 제시한다. 탈세속적 로맨티스트 아버지( 김승호 ), 현실주의자 주부 어머니( 주증녀 ) 그리고 2남 3녀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울 거주 가족이 모델이다. 매사에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막내( 신성일 ), 서울깍쟁이 여고생 넷째( 엄앵란 ), 외모에 관심이 많은 여대생 셋째( 도금봉 ), 대학 자퇴 후 영화계에 투신한 자유주의자 둘째( 남궁원 ), 결혼적령기의 현모양처형 첫째( 최은희 )는 당대 청년층의 보편적 범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막내는 4.19를 선도한 신세대를 대변하고 있다. 여기에 과학자 맏사위로 김진규 가 측은한 도둑으로 주선태 가 등장하니 작품 자체가 1960년대를 이끌 배우들의 온상으로 보일 정도다. 당시 신필름 소속 신예 신성일은 이 작품을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다. 등장인물을 통해 이성·지성·감성의 분배, 문화적 육체적 건전성의 조화, 공동체와 가족 윤리까지 고려된 인상이며 좀도둑까지 의리와 인정을 따지는 형국이니 참으로 다사롭고 호혜로운 소우주다. 김희창의 동명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하였으니 자연스레 영화의 전개는 에피소드식이다. 드라마틱한 갈등과 불화보다 소소한 상황 속 유머와 페이소스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감독 신상옥이 다양한 영화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영화 중반에 가족 모두가 안방에 모여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 신파 멜로, 사극 등 다양한 형식이 가족의 상상력에 동원되며 이는 실상 신상옥이 이전과 이후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전개해간 작품들의 다양성을 이룬다. 신상옥은 이 작품을 전후로 해서 < 동심초 >(1959)나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와 같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로맨스 빠빠>는 각 캐릭터가 지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심성의 성좌를 선보이는데, 그 우아한 조화로움의 경지가 신상옥 영화의 형식적·감성적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를 유려하게 연결 짓는 것은 김승호가 맡은 로맨스 빠빠 캐릭터 탓이 크다. 김승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적 표상이었다. 그가 담당한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 돈 >(1958), < 박서방 >(1960), < 마부 >(1961)에서처럼 봉건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하층민 가부장의 역할이 하나라면, 속물적 근대화의 조류를 반영한 < 인생차압 >(1958), < 삼등과장 >(1961), < 로맨스 그레이 >(1963) 등에서 최종적으로는 영악한 시대에 패배하고 마는 서글픈 샐러리맨의 모습이 다른 하나다. 보험회사 만년 계장으로 겨우 가족을 부양하는 <로맨스 빠빠>는 아마도 두 번째 경향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선뜻 영화 <로맨스 빠빠>에 ‘한국적’(근대화의 균열과 가부장주의를 동반한다는 뉘앙스에서)이라든가 ‘현실적’(4.19전후의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뉘앙스에서)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데 주저하게 되는 건 왜일까. 오히려 <로맨스 빠빠>는 세계시민적 교양과 이상적 추동으로 가득해 보이지 않는가. 그 일차적인 이유는 김승호가 열연한 ‘로맨스 빠빠’ 캐릭터가 한국의 전형적 가부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꽃다발 든 샐러리맨이자 책을 즐겨 읽으며 자식들과의 일상적 대화에도 무심치 않은 다정한 중년이다. 영화 속 빛나는 장면들은 로맨스 빠빠의 낭만적 몰입과 상상을 통해 등장하곤 하는데, 가령 이러한 장면이 있다. 동네에 기생집이 들어섰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로맨스 빠빠는 아내가 말로 일러주는 약도를 따라 골목골목을 상상으로 누빈다. 이는 기생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으로 발동된 상상적 모험이기보다, 이 마을 어느 골목엔가 있다는 어여쁜 기생아기씨라는 아름다움에 일반에 대한 상상적 지향인 셈이다. 또 이러한 장면도 있다. 아내와 사랑싸움 끝에 자식들이 부르는 합창곡을 받아 눈을 지그시 감고 부르는 세레나데 ‘기쁜 우리 젊은 날’이나 실직된 날 술집에서 부르는 ‘켄터키 옛집’과 같은 노래의 장면들 말이다. 서민 가족을 서술하는데 관습적으로 동반되는, ‘먹고살기 힘들었지만 인정만은 넘쳐나던 그때 그 시절’이라는 정서는 늘 공동체의 과거 기억과 맞닿아있다. <로맨스 빠빠>가 전달하는 가족은 서민적이고 온정 가득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 도래하지 않은 이상적 가족이자 미래의 상이다. 1960년 당시 자동차와 피아노가 집집마다 다 있다는 둘째 딸의 투정도 투정이거니와, 장성한 자식 전부가 남녀차별 없이 대학교육 이상의 문화적 수혜를 누리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일반적이지 않다. 다시금 온 가족인 둘러앉은 시나리오 상상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각자의 입장에 따라 소환된 상상적 이야기들은 사실상 이러한 교양에 기반을 두고 있다. 둘째의 시나리오 버전은 <춘희>나 <안나 카레니나> 등에서 보암직했던 치정 서사를 전제로 정서적 모더니즘을 선보인다. 둘째의 이야기가 삼강오륜에서 벗어날 것이라며 경쟁에 나선 아버지는 초로의 남자와 젊은 여성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절대적 진리와 아름다움의 추구를 바탕에 두고 있다. 어머니 버전은 어떠한가. 그녀는 값싼 연애물을 비판하며 <춘향전>과 같은 한국 고전에 나타난 정서와 윤리를 강조한다. 한편 실직당한 날 밤 바에서 술을 마시던 로맨스 빠빠는 맥주병 뚜껑을 머리에 뒤집어 얹고 왕관을 쓴 양 “오늘부터 난 자유의 왕자야”라며 외치는데 대사의 어조가 사뭇 셰익스피어답다. <로맨스 빠빠>는 1960년대 초 요청되었던 문화와 교양의 심상적 분배를 서민가족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위트 있고 관용적이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휩싼다.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장르를 경유하는 한편 정서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고전을 바탕에 둔 문화적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다. 그런 점에서 <로맨스 빠빠>는 비슷한 시기 제작된 서민적 홈드라마인 <삼등과장>이나 < 서울의 지붕 밑 >보다 한국적 현실에 덜 긴박되어 있으며 세태풍자적 요소도 적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영화 속에는 당대적 터치가 가미되었는데 투쟁과 반항을 고유한 개성으로 삼던 막내가 아버지 실직 후 기성세대와의 투쟁을 포기하고 협력을 택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저돌적 아들을 포함한 전 가족의 자력갱생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을 가부장의 복권과 명랑한 근대화의 지향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좌에서 물러나 권력을 잃은 아버지가 비로소 진정한 가족의 중심이 된다는 아이러니야말로 <로맨스 빠빠>가 영민하게 시대에 응답하는 한편 능청스레 시대를 넘어서는 지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 로맨스빠빠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