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 감독
- 김정민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김동준, 김재경, 윤유선, 진예솔, 허정민, 신지훈, 민준현, 손소망, 류재필, 최설, 문채영, 김은경, 김영희, 최예찬, 이아라, 김대흥, 김용호, 한윤희, 정예서, 박하은, 박은별, 고수연, 김희재, 이정근, 이지원, 이준원, 조운성, 화영진, 김소연, 신경림, 이가은, 김민성, 이소원, 김상동, 정혜선, 윤혜나, 윤효진, 송진영, 구여림, 송규일, 박형준, 에일리
한국영화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 월하의 맹세 >(1923)의 이월화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출생지는 물론 부모가 누군지, 성조차 모른 채 젖어머니 손에서 자라나 배우가 됐으나 기생 노릇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생활을 하던 끝에 심장마비로 죽은 그 일생 자체가 꾸며낸 한 편의 비극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금성 (石金星)도 이에 못지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출생 신분이 분명하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성인이 된 후 겪은 세상살이는 참으로 모진 것이었다. 일찍이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피붙이와 헤어지고, 가까이 있는 자식과도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은 이월화보다 더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되기 40일 전의 얘기 내가 석금성 여사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작고하기 40일 전이었다. MBC가 제작하는 TV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그가 묵던 남영동 한 여관 부근에 있는 다방에서였다. 많은 얘기 끝에 여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해방 후 생활이 어려워 옷가지 등을 동두천에 나가 쌀과 바꿔다 끼니를 잇곤 했지. 하루는 황철 (黃徹, 월북배우)에게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킬 자신이 없으니 남편이 있는 북으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4남매 모두 월북하게 된 거야.” 그런데 1991년부터 북으로 간 자녀와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소식이었다. 18세 때 ‘샘물터에서’라는 노랫말로 재능을 인정받은 막내딸 최로사(崔露砂, 당시 65세가 량)는 손꼽히는 시인으로 성장했고, 막내아들 호섭(57세 가량)은 고모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안무가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말 못할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들고 있던 북한 화보잡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막내딸의 근황을 알리는 글과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한 국가안전기획부의 묵인 아래 일본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숨을 길게 내쉬던 그녀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죽기 전에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순간 여사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얼른 손에 든 담배 연기가 매워서 그렇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였다. 1991년 북으로 간 자녀로부터 연락이 닿기 전까지만 해도 여사에게는 아들 이택균 (李澤均)과 며느리 강숙희 (姜淑姬)가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부터 활약한 부부배우였다. 이택균은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1949년 안진상 감독의 <육탄 십이용사>의 단역인 성사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에 나왔다. 이후 < 낙동강 >(1952), < 최후의 유혹 >(1953), < 미망인 >(1955), < 교차로 >(1956) 등 주로 멜로드라마에서 주연 및 조연을 했고, < 처와 애인 >(1957) 때는 아내와 주연을 나눠 맡았다. 여사는 그들에 대해 묻자 뜻밖에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지 소식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며느리에 대해서는 남 얘기하듯이 “1950년대 중반에 할리우드에서 왔다는 배우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 윤인자 를 만났더니 그애는 택시를 타도 건방지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하더군. 하루는 나일구다방(명동)에서 약속하고 이병일 감독하고 기다리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어요. 하도 고까와서 ‘선배 앞에서 웬 검은 안경이냐’고 야단을 쳤지. 그때는 택균이와 연애하는 줄도 몰랐거든.” 이렇게 들려주었다. 그의 직선적인 성품이 잘 드러난 자리였다. 두 번의 혼인과 남북으로 갈린 혈육 1907년 12월 3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석금성 의 본명은 정의(丁義)였다. 일찍이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극단 토월회와 인연이 닿으면서 1925년 연극계에 투신했다. 이 무렵 충청도 갑부 이충직과 결혼, 1926년 장남 이택균 (李澤畇)을 얻게 된다. 그러나 3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1929년 김영환 감독의 < 약혼 >으로 영화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잇따라 김상진 감독의 < 종소리 >(1929)에 출연했으나 기대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뒤 프로문학운동에 가담한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과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2남2녀를 둔다. 그녀는 연극 무대에 서다가 잊을 만하면 영화에 얼굴을 내미는 식으로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심청>(안석영, 1937)의 단역 장승상 부인과 내선일체를 강조한 친일 어용영화 < 너와 나 >( 허영 , 1941)에 주인공 나카다 겐지로(永田絃次郞, 한국명 김영길)의 어머니역을 맡는다. 이때 처음 창씨 개명한 이름 가야마 사다코(桂山貞子)를 사용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를 보낸 마감한 석금성 은 광복 후 < 마음의 고향 >(1949)을 비롯해 < 춘향전 >(1955), < 장화홍련전 >(1956), < 그 여자의 일생 >(1957), < 마도의 향불 > < 자유결혼 >(1958), < 청춘극장 >(1959), < 장희빈 >(1961), < 성난 코스모스 >(1963), < 치마바위 >(1964) 등 150여 편을 통해 퇴기나 악독한 계모, 독부, 작부, 주모 등 주로 성격이 강한 캐릭터를 소화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욱이 < 화촉신방 >(1966) 이후 스크린과 멀어진 상태에서 거의 16년 만인 76세의 나이에 정진우 감독의 <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2)로 컴백, 흑산도의 악덕 주모역할을 맡아 제3회 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을 받는 관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분례기>(1992, SBS),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 SBS) 등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신극의 모태인 토월회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말년에도 늘 짙은 마스카라, 매니큐어와 루즈가 선명한 화장을 즐겼던 석금성 여사는 화려했던 한때의 각광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아흔 살을 눈앞에 둔 1995년 9월 3일 오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 홀로’ 남영동 여관과 광명시에서 홀로 어렵게 살다가 눈이 펑펑 내리는 산골 간이역 대합실에서 교도소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자신의 출연 TV드라마 <사평역(沙平驛)>(1981)의 노모처럼 북에 있는 혈육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올해 초 이성부 시인이 세상을 떴다. (완독하지 못한) 고인의 시집 <우리들의 양식>을 꺼내 들었다. ‘광주’라는 시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보다 다음 장에 실린 ‘10년’이라는 시에 더 마음이 갔다. ‘10년’을 거칠게 풀어 쓰면 대략 이렇다. “피로 맹세하고 피의 말로 사랑하는 길을 가르쳤”던 새벽손님이 있어, “우리는 눈 부릅떠 손에 손을 맞잡고 거리를 밀어뜨렸”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고, “아버지가 되었으며”, “몇 번이고 굴러떨어지는 언덕의 삶”에 굴종하고 있던 어느 날, “잊어버린 새벽손님은 또 나를 찾아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새벽손님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나는 “타락한 자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10년’은 이성부 시인이 197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런데 왜 ‘10년’을 읽자 이창동 감독의 < 박하사탕 > (1999)이 떠오르는 것일까. < 박하사탕 >이 거슬러 오르는 1980년 5월의 광주와 아무런 공통분모도 없는데 말이다. 아마도 시의 마지막 대목이 일깨우는 어떤 인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또 그 손님을 잊어버렸다./그리고 그 새벽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고 전해졌다./겁보, 어둠, 안간힘, 짜증나는 말,/이런 것들로 뭉쳐진 나는 그 죽음을 멀리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겁하게도/멀리서만 그 죽음의 불씨를 보고 있었다.// 시의 화자는 왜 새벽님의 죽음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그는 악몽처럼 찾아들던 새벽손님과의 10년을 곱씹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10년’의 새벽손님은 <박하사탕>의 기차와 유사하다. <박하사탕>의 기차는 쉬지 않고 악몽을 실어 나른다. 악몽은 죽음보다 무섭다. 영호( 설경구 )는 높다란 철로 위에 올라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나 돌아갈래!”라고 으르렁거린다. 영호는 지금 신과 마지막 거래를 하는 중이다. 악몽 이전의 그날로 나를 되돌려달라,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살아도 죽은 목숨이니. 그의 절규는 영혼과 육신을 송두리째 반납할 테니, 단 한순간이라도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이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죽음이 영호를 덮치는 순간 시간은 멈춰 서고, 악몽의 기차는 갑자기 거꾸로 달린다. 핏발 선 영호의 눈에 야만의 시대, 환멸의 간이역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 박하사탕 >은 1999년의 봄부터 1979년 가을까지 김영호의 20년을 역으로 추적한다. 악몽의 기차는 야유회-사진기-삶은 아름답다-고백-기도-면회-소풍이라는 이름의 정거장을 지나는데, 시간의 결절점들이 불러낸 사건들은 역사(驛舍) 명이 환기하는 이미지를 배반한다. 옛 동료와의 ‘야유회’는 난장판이 되며, 첫사랑의 징표인 ‘사진기’는 팔아도 몇 푼 안 되는 고물에 불과하다. ‘삶은 아름답다’는 영호의 찬탄은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비아냥의 어조로 울려 퍼지고, 영호는 다른 여자를 품고서야 첫사랑을 입 밖으로 ‘고백’한다. 똥과 피로 더럽혀진 영호의 두 손은 ‘기도’로 씻기지 않으며, 영호를 찾아온 첫 번째 ‘면회’ 객은 싸늘한 주검이 된 여고생이다. 이창동 감독은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박하사탕의 색깔과 맛 같은 첫사랑의 순수한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시간의 역순 구조를 택했다고 말한 적 있다. 순수의 종착역에 가닿기 위한 여정의 고통은 지나온 것보다 곱절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영호가 망각의 천으로 덮어두었던 상처의 환부에는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과오와 책임이 종양처럼 자라나 있고, 그래서 그는 매번 기적 소리에 절뚝거린다. 영호의 발작은 1980년 5월의 광주라는 지옥문을 통과한 뒤 출발점이었던 ‘소풍’이라는 간이역에 섰을 때 가까스로 멈춰 선다. 이때의 영호는 순진한 더벅머리 청년이고, 첫사랑 순임( 문소리 )은 거짓말처럼 영호에게 말을 건다. 그렇다면 이제 영호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고, 그의 아픔은 말끔히 사라졌는가. < 박하사탕 >을 우리 시대의 <죄와 벌>이라고, 일단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순서대로 장면을 되돌려보자. 영호는 죄를 지었고, 그는 벌을 받았다. 혼자 죽기 억울해서 내 인생 망가뜨린 딱 한 놈만 쏴죽이고 싶었다지만, 어느 놈을 쏴 죽여야 할지 몰랐다고 오열할 때 영호는 이미 알고 있다. 생을 놓아야 할 이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서 이창동 감독은 굳이 시간의 역순으로 이를 재현한 것일까. 가해자인 영호 역시 역사의 피해자였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식의 동정과 연민을 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 박하사탕 >의 마지막 장면. 영호는 천변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잠시 후 그의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스무 살의 영호는 이때 누구를 바라보고 눈물짓는가. 마지막 장면을 첫 장면에 이어 붙여보자. 초췌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철로에 올라간 영호는 여전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있는가. 혹시 그의 극단적 선택은 윤리적 결단이 아닐까. 젊은 영호는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는 회복되지 않음을, 영호는 그 순간 깨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건 비단 영호의 자각만은 아니다. 젊은 영호의 눈동자에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시>의 미자(윤정희)도 어른거린다. 미자가 투신하기 전, 황급히 맞았던 이의 이름은 아마도 ‘새벽손님’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