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 감독
- 최두호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안은숙, 이윤정, 이소영
정작 해방이 됐으나 영화계는 휴면상태였다. 옛 조선영화사 자리에 영화건설본부라는 문패를 달고 만든 25분 분량의 <해방뉴스>(촬영 김학성, 편집 박기채)가 공개된 게 고작이었다( 중앙신문, 「일요특집, 찬란한 예원(藝苑) 풍경」, 1945.11.11.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우리의 영화가 생산된 것( 최용달 「해방뉴스 평」, 예술통신, 1945.10.25. )이 기꺼울 정도였다.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로이드의 구두방>(해롤드 로이드 주연) 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나 <소년의 거리>(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와 같은 외국영화가 볼거리였다. 이런 시대에 1946년 최초의 항일 광복영화가 나왔다.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가 그것이다. 이해 3월부터 10월 사이에 거의 두 달 간격으로 나온 기록영화 <안중근 사기(史記)>(이구영), <제주도 풍토기>(이용민)와 아동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에 이은 네 번째 한국영화계의 결실이다. 미군정 치하였다. 불과 1년 전 일본제국 의 특공대 지원을 촉구하는 <사랑과 맹서>(1945)와 같은 어용영화를 만든 최 감독이 광복영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진 1] 해방 후 최초의 극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의 한 장면 묻힐 뻔했던 ‘자유만세’의 단역 <자유만세>에는 한동안 한국영화사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물이 등장한다. 폭약을 운반한 죄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끌려가다가 감옥에서 탈출한 지하 조직책 최한승(전창근)에 의해 구출되는 중절모의 사나이, 바로 박동지 역의 김승호가 그 사람이다. 1 보잘 것 없는 이 단역배우가 뒷날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주역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2] <자유만세>에 출연한 김승호. 영화로는 데뷔작이다 아무튼 김승호는 이듬해 <자유만세>의 주인공 전창근에 의해 16밀리 농촌계몽영화 <해방된 내 고향>(1947)과 밀수의 근절을 촉구하는 경찰청 지원의 <밤의 태양>(1948, 박기채)에 각기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 뒤 10여 년 동안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사이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8월 김승호는 서울에 남아 있는 영화, 연극인들과 함께 명동성당에 갇혔다. 해방 후 월북했던 배우 심영이 인민군 중좌의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때 북으로 끌려갈 뻔했다. 하지만 의정부 근교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1.4후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정부가 환도할 무렵 그는 대전에 머물며 자신이 창단한 극단 ‘배협’의 공연을 계속했다. <망향>(1952, 대전시공관), <허무한 사랑>, <그들의 가는 길>(1953, 시공관), <유관순>(1954, 대전극장) 등이 이때의 레퍼토리이다( 도완석, 「대전·충청 연예인실록, 전쟁참화 속에서 ‘배협’ 무대 이어져」 중도일보, 2016.4.30. ). <허무한 사랑>에서는 연출을 담당했다. 그가 다시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55년 김기영의 감독 데뷔작 <양산도>(김기영, 1955)부터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웃을래야 웃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영화’( 허백년, 「양산도가 제기한 문제점」, 조선일보, 1955.11.6. )라는 등의 혹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데 1년 뒤 출연한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1956)이 작품성과 함께 그가 주연한 맹진사의 연기가 호평을 받으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풍토색이 강한 민속극으로서도 일류의 가치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유머요 풍자가 이만큼 자연스럽게 표현된 국산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신영화, 풍토색 강한 민속극」, 한국일보, 1957.2.14.) 는 작품평에 이어 “더욱이 맹진사(김승호)의 숙달된 연기는 영화를 결정적으로 살려주었다”( 「신영화, 한국적 아이로니, 시집가는 날」 조선일보, 1957.2.15. )는 과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봉래 역시 “연기 면에 있어서는 김승호의 역연이 압권이었다. 자기 역에 대한 해석이 정확하였고 등장인물과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그 호흡이 잘 어울렸다” (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67.2.19 )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3] <시집가는 날>에서 맹진사 역으로 출연한 김승호 조선조 때 맹진사댁과 김판서 댁의 혼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양반사회의 위선과 구습, 결혼제도의 모순을 희극적 아이러니로 빚어낸 <시집가는 날>(오영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의 개명)은 결국 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희극상을 받음으로써 국내 작품이 해외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로 기록된다. 김승호는 이런 후광에 힘입어 1957년 한 해 동안 <오해마세요>(권영순)를 비롯한 <봉이 김선달>(한홍열), <아리랑>(김소동), <풍운의 궁전>(정창화) 등 15편, 58년엔 <돈>(김소동), <초설>(김기영),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생명>(이강천), <인생차압>(유현목), <마도의 향불>(신경균) 등 20편에 출연하고, 59년엔 <곰>(조긍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육체의 길>(조긍하) <불멸의 성좌>(유진식) 등으로 비로소 30편선(34편)을 돌파하여 ‘김승호 시대’를 예고한다. 1960년에는 <피 묻은 대결>(김묵), <로맨스 빠빠>(신상옥), <흙>(권영순), <박서방>(강대진), <저 언덕을 넘어서>(박성복) 등 25편으로 전년도에 비해 10여 편이 줄긴 했으나 61년부터 <주마등>(이만희), <마부>(강대진). <삼등과장>(이봉래). <노다지>(정창화), <어부들>(강대진),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등 32편에 이어 62년 <월급쟁이>(이봉래), <전쟁과 노인>(임권택), <감나무골의 공서방>(김응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권영순) 등 다시 34편을 소화하는 저력을 과시한다. [사진 4] <돈>(김소동, 1958)에 출연한 김승호.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일확천금을 꿈꾸다 사기 당하는 순박한 농민 역을 맡았다 63년에는 <굴비>(김수용), <로맨스그레이>(신상옥), <아버지 결혼하세요>(김용덕), <혈맥>(김수용) 등 23편(총 제작 편수 148편)에 출연했는데, 이 결과는 <가정교사>와 <청춘교실>로 청춘영화 붐을 일으키며 인기 스타로 떠오른 신인 신성일이 이 해에 출연한 21편보다 많은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46세에 이른 중년이었다. 64년에는 <월급봉투>(김수용), <비련의 왕비 달기>(최인현, 약풍), <명동에 밤이 오면>(이형표) 등 33편, 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 나봉한), <마포 사는 황부자>(이봉래), <배비장>(신상옥) 등 35편, 66년 <하루살이 인생>(권혁진), <아빠의 청춘>(정승문), <대폭군>(1966, 임원식) 등 26편, 67년 <만선>(김수용), <역마>(김강윤), <돌무지>(정창화) 등 17편, 68년 <장군의 수염>(이성구), <풍운>(권영순), <영원한 모정>(김기덕) 등 9편, 69년 <허공에 진 청춘>(정원), <사화산>(고영남), <마법선>(이창근) 등 2편, 1971년 <족보>(고영남) 1편 등 이렇게 김승호는 23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통해 모두 3백14편을 남겼다. 김승호표 서민영화의 형성과 넉살 후시 녹음시대였지만 그는 거의 성우에 의존하지 않았다. 표피적인 몸의 표현만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음성연기까지 갖춘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사극에서는 서민연기와는 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전창근), <요화 배정자>(1966, 이규웅)의 고종황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1962, 권영순)의 진시황제는 물론 <대폭군>(1966)의 묘장왕,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 임원식)의 대원군, 그 밖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 김소동), <평양기생 계월향>(1962, 이태환)의 배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5] <대폭군>에 출연한 김승호 김승호 연기의 또 다른 면모는 넉살과 딴청으로 비벼낸 해학과 풍자이다. 무남독녀를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려다 오히려 제가 만든 덫에 걸리고 마는 <시집가는 날>(1956)의 맹 진사, 돈 에 눈이 멀어 횡령, 공문서 위조 따위의 불법 행위를 벌이다가 법망에 걸리자 위장 자살극을 벌이는 <인생차압>(1958)의 모리배 이중생, 새 부임지에 와서도 엽색행각을 버리지 못하는 <배비장>(1958)의 제주 목사 등이 이런 유형이다. 특히 <인생차압>은 금전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타산적인 탐욕의 허상을 시니컬하게 표출하여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그의 연기 본령은 서민의 애환과 삶을 꿰뚫어 보고 엮어내는 데에 있다. 사채 꾼의 꼬임에 빠져 노름판에 끼어들었다가 재산을 날리는 <돈>(1958)의 농사꾼, 술에 찌들어 살아가는 <곰>(1959)의 무식한 목수, 우직하고 성실하나 가족에게 유독 권위적인 <박서방>(1960)의 연탄아궁이 수리공, 두 남매를 키워 아들을 고등고시에 합격시킨 <마부>(1961)의 홀아비, 밀수배의 농간에 놀아나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감나무골의 공서방>(1962)의 고리대금업자, 복덕방 간판을 내걸었으나 찾는 사람이 없는 <혈맥>(1963)의 복덕방 영감, 리어카를 장만하는 것이 소망인 한강 다리 밑의 <지게꾼>(1963), 아내와 함께 서울에 사는 자식들을 보러 왔다가 수모를 겪고 돌아가는 <굴비>(1963)의 시골 노인, 고된 일을 하며 아들을 성공시킨 <하루살이 인생>(1966)의 하역부, 두 명의 자식을 바다에 잃고도 어부 일을 버리지 못한 <만선>(1967)의 곰치, 옛정을 찾아 시골장터를 찾는 <역마(驛馬)>(1967)의 체 장수 노인 등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비록 <로맨스 빠빠>(보험회사의 직원)나 <삼등과장>(운수회사 출장소장)의 경우처럼 그럴 듯하게 보인 도시의 샐러리맨도 불황으로 실직하거나 상관의 눈치나 보는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관상 한복과 양복의 차이가 있을 분 이런 배역들이 김승호표 서민영화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했다. [사진 6]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성실한 가장의 역할로 출연한 <로맨스 빠빠>의 김승호 [사진 7] 시대에 뒤떨어진 마부의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맏아들 역할의 신영균 그의 출연작 중에는 영화사에서 언급되는 대다수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단 한 번의 외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시골 은행 간부의 인생유전기 <육체의 길>(1959)을 비롯한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박서방>, <로맨스 빠빠>, <마부>, <삼등과장>, <굴비>, <로맨스그레이>, <혈맥> 등 흑백영화와 노련한 형사 역을 맡아 사진작가(신성일)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쳐 나간 유일한 색채영화 <장군의 수염>(1968, 이성구)이 그 예이다. 이상의 작품은 바로 김승호 연기의 베스트10에 해당된다. [사진 8] <장군의 수염>에서 노련한 형사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김성옥 듬직한 체구와 선이 굵은 얼굴, 특유의 발성과 연기력으로 서민적 애환을 만들어낸 연기파 김승호는 오손 웰스다운 중후함과 찰리 채플린적 풍자의 양면성을 보여 주었다 (김종원, 「서민적 체취와 정서 녹여낸 늦둥이 국민배우: 김승호의 생애와 연기」 문화관광부 선정 문화인물 ‘김승호 회고전’ 책자) . 그의 영화 활동은 광복의 격동기에 시작되어 1950년대의 도약기를 거쳐 60년대에 피크를 이루며 대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어떤 시련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서민의 삶과 정서로 녹여내려 했다. 당면한 현실을 이해타산으로 넘기려 하기 보다는 운명으로 수용하고 굽힌 자세로 헤쳐 나가려 했다. 때로는 <육체의 길>의 경우처럼 과장된 연기로 리얼리티를 떨어트리기도 했지만 <인생차압>의 이중생이나 <로맨스그레이>의 저명교수처럼 임기응변과 넉살로 극복하려 했다. 그래서 김승호 연기에는 해학적인 요소와 함께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 1.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삼애사, 1969, 157쪽)에는 전창근 감독의 <해방된 내 고향>(1947)이, 또 다른 그의 저서 『평전 한국영화인 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265쪽) 김승호 편에는 <밤의 태양>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술하였다. 그 밖의 연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응천 (金應天)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영원한 청춘 감독의 이미지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전혀 늙은 티를 내지 않고 젊음을 유지한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응천은 32년생이다. 그러니까 올해 70 고희인 셈이다. 그 유명한 경기(京畿)출신이다. 요즘은 경기중고등학교가 한 지역의 평준화된 일개 학교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수재들만 모이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교였다. 그러니까 경기를 엄격이 따지자면 평준화 전(前)의 경기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그는 다방면에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고 아는 척 떠벌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김응천은 그러고 보니 작품수에 있어서도 84개 작품을 감독했는데 우리나라에서 1위가 김수용 감독, 2위가 고영남 감독, 3위가 임권택 4위가 김응천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작품 경향을 보면 중고생들을 그리는 하이틴 영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명랑하고 유쾌한 얘기들을 다루고 있다. 음악을 곁들인 빠르고 진취적인 주제가 그가 즐겨 다루는 세계이다. 아마 40대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이 김 감독이 영화 팬들이 되겠다.김 감독은 감독 데뷔를 28세에 했다. ' 영광의 침실 '이 데뷔작 타이틀이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빠른 출세였다. 김 감독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우울한 영화도 미래지향적이고 밝은 세계로 둔갑한다. 그것은 김 감독의 천성이 그렇기에 그런 영화들이 생산되지 않았나 싶다. 김 감독이 함께 일한 배우들을 얼른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떠올리자면 우선 이덕화 가 으뜸으로 떠오른다. 전영록 , 임예진 , 이상아 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청춘영화들을 간단히 훑어보면 ' 푸른 교실 ', ' 모모는 철부지 ', ' 꽃밭에 나비 ', ' 이 다음에 우리는 ', ' 고교 우량아 ', ' 여고 졸업반 ', ' 시집가는 날 ', ' 우리들의 고교시대 ', ' 청춘대학 ', ' 달려라 풍선 ', ' 내 이름은 마야 ', ' 대학얄개 ', '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 ' 스물하나의 비망록 ', ' 춤추는 청춘대학 ', ' 말괄량이 대행진 ', ' 87맨발의 청춘 ', ' 얄숙이의 전성시대 '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다고 김 감독이 청춘영화만 죽어라하고 만든 감독은 아니다. 성인영화도 수두룩하다. ' 지미는 슬프지 않다 ', ' 여인의 종착역 ', ' 진아의 편지 ', ' 목마위의 여자 ', ' 모르는 여인의 종착역 ', '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 ' 애처일기 ' 등등이 있다. 김 감독의 특징은 이른바 제작자를 배려하는 빨리찍기, 필름 아껴쓰기, 초스피드의 촬영 진행은 그로 하여금 제작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면서 흥행감독으로의 위치를 언제나 지키고 있었다. 그의 감독 친구는 본인 조문진 , 문여송 , 석래명 , 황학봉 , 김기 등이 아니었을까. 그중에서도 본인과는 무슨 얘기든 흉금을 떨어놓고 상의를 하곤 했다. 그는 외로운 사나이였다. 조실부모를 하고 형제도 없이 충무로 영화판에서는 비교적 외토리로 지냈다. 안동 김씨인 김 감독은 어릴 적에 부유한 집안에서 넉넉하게 자라온 걸로 안다. 그가 집안의 내력을 얘기할 때 보면 양반 집안에서 꽤나 잘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집안이 망하고 떠돌이처럼 지낸 건 그의 성격 자체를 변경시켰다. 그가 가족이 없으므로 해서 하숙집을 전전했는데 오랜 총각시절을 하숙집을 전전한 기억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새롭다. 김응천 이코르 하숙집 식으로 . 그러다가 마흔 가까운 나이에 부인 김정수 여사와 결혼, 총각의 딱지를 뗄 수 있었다. 그 당시 김 감독의 결혼은 명동 YMCA에서 올렸는데 이 착하고 점잖은 늦깍기 신랑의 결혼식에는 모든 영화인들이 참석 대성황을 이루었다. 부인 김 여사께서 김 감독의 영화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것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만큼 김 여사는 남편의 사업을 돕고 이해했다. 김응천 이 부인의 지원금을 행여 까먹을까봐 전전긍긍했던 걸 나는 기억한다. 좀 손해를 끼친 경우는 응천이 나와 밤새도록 술마시면서 속상해 했다. 그만큼 애처가였던 그였다. 무슨 고민이 있다 하면 나를 불러내 둘이는 맥주를 마셨는데 과묵한 그도 술로만 호소하기엔 역부족이었던지 하로는 날 부르더니 문진아, 이게 마지막 술일세 하고 선언하지 않는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한때 그만큼 폭주를 했던 그였다. 그날 그와 진탕 마셨다. 그후로 그는 단호하게 술을 끊었다. 술을 끊으니 자연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겼다. 그후로 그는 쭉 금주생활을 지켰는데 타계할 때까지 그 신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응천 그 신사 같은 사람도 한번 되게 화내는 걸 볼 수 있었다. 하길종 감독이라고 나하고도 친한 후배 감독 사이의 일이었다. 김 감독이 만든 ' 고교 우량아 '영화를 '뿌리깊은 나무' 잡지에 하길종이 비평을 했는데 그 비평 내용은 '고교 우량아' 영화가 웃긴다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애들 돈을 빨아 먹기 위해 알캉달캉 얍삽하게 만들었는데 어쩌구.......' 이 글을 김 감독이 어떻게 읽은 모양이었다. 인내심 많고 화를 안내는 김 감독이 분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길종 이 묵고 있는 충무로 경화장 여관을 쳐들어 갔다. 편집용 가위를 들고서였다. 방심하고 여관방에 있던 하길종은 불시에 문 열구 쳐들어 오는 김 감독을 피해 신발도 신지 못하고 여관을 뛰쳐 달아났다. 김 감독이 설마 찌르랴 했겠지만 김 감독의 분노를 나는 이해한다. 통상 영화감독끼리는 동업자임으로 해서 여간해서는 비평 안하는 게 예의이다. 그런데 하길종 그 녀석이(하길종이와 내가 친하니까 그 녀석이라고 표현한다)정신이 나갔지 남의 자존심을 그렇게 건드릴 수가 있는가. 하길종이 원래 비평적 독설가인건 사실이지만 영화계의 선배요, 더구나 고교 청춘물 같은 건 본격 비평에서 제외하는 게 상식인데 알캉달캉이라느니 얍삽하다느니 인격적인 모독을 주는 건 하길종이 백번 잘못한 것이었다. 김응천 감독이 무슨 비평을 예상하고 예술 작품입네 하고 거드럭거렸다면 비평의 잣대를 들여댈 수 있었겠지만 그냥 단순한 명랑물이잖은가. 그때 하길종은 그렇잖아도 충무로 영화계에서 마구 휘두르는 비평으로 인해 미운 털이 배긴 마당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하길종과 친했던 나까지 왜 그런 녀석과 사귀느냐고 압력이 심하게 들어오곤 했다. 하길종 은 이후 그를 혼내준다는 감독들이 벼르고 있어 충무로를 걸어다닐 때 조심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 감독이 아프기 시작한 건 10여 년 쯤 전이다. 수서에 살던 그는 우리들과 드문드문 만나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턱에 3개의 빨간 종기가 나서 무심코 낫겠지 했는데 그게 임파선 암, 그런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부인 김 여사으 극진한 간호가 시작되었다. 김 감독의 취미를 살려주기 위해서 김 여사는 컴퓨터 신종 기재에서부터 사진 스캐너니 뭐 아무튼 벼라별 기재를 아낌없이 뒷바라지했다. 남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김 감독이 운명하기 전 우리 친구들이 그의 집에 문병가려 전화하면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노쇄한 몰골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만큼 그는 깨끗한, 어느 면에선 결벽증이랄까. 그러나 난 이해한다. 그의 성격이 그토록 갈끔한데 어쩌랴. 지저분하게 인생에 미련을 남기는 것보다 얼마나 깨끗한가. 2001년 6월 1일 오후 그는 타계했다. 부인 김 여사의 지극한 간호는 부인으로 하여금 이번 감독협회총회에서 아름다운 감독 부인상을 드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응천 감독. 귀하는 깨끗이 인생을 살다간 우리들의 친구였오. 고맙소. 명복을 비오. 조문진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5. 3. 2 1959 < 영광의 침실 > 데뷔 작품명 1959 영광의 침실 1960 감나무골의 임서방 1962 사장딸은 올드 미스 1963 지미는 슬프지 않다 1964 밤에 걸려온 전화 / 눈물의 영도다리 1965 청춘을 변상하라 1966 귀신잡는 해병 / 청춘대학 1969 모르는 여인의 편지 1970 여인의 종착역 1971 3인의 검은 표범 1972 부부교대 1973 천사의 메아리 1974 진아의 편지 1975 애처일기 / 여고졸업반 1976 청춘을 이야기합시다 / 푸른 교실 1977 이 다음에 우리는 / 첫눈이 내리 때 / 고교우량아 / 시집가는 날 / 불타는 소녀 / 미스양의 모험 1978 우리들의 고교시대 / 개선문 / 고교명랑교실 / 제갈 맹순이 1979 목마위의 여자 / 너는 여자 나는 남자 / 꽃받에 나비 / 모모는 철부지 1980 낯선 곳에서 하룻밤 / 달려라 풍선 1981 내 이름은 마야 1982 갈채 / 깨소금과 옥떨매/ 대학얄개 1983 대학신입생 오달자의 봄 /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 스물하나의 비망록 / 대학들개 1984 불타는 신록 / 대학괴짜들 / 밤마다 천국 1985 춤추는 청춘대학 1986 말괄량이 대행진 / 87맨발의 청춘 1987 얄숙이들의 개성시대 1988 그녀와의 마지막 춤을 1993 밀월여행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