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저널 - 강대선
- 제작년도
- 2004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2022년 노만 선생님의 생애사 구술 인터뷰 를 진행하며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하여튼 그때 내 임화수 씨를 처음 알게 됐고, 임화수 씨는 또 젊은 나를 굉장히 좋아했어. (웃음) 그래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하고는 전연 달러. 주먹이지만 굉장히 뭐라고 그럴까, 겸손해요. - 노만(영화평론가, 2022, 90쪽) 아마도 위 발언에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 ’란 SBS 드라마 < 야인시대 >(2002~2003) 속 캐릭터로서의 임화수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51.8%, 평균 시청률 30%를 찍었던 이 드라마에서 임화수라는 캐릭터는 픽션적 상상력이 더해지긴 했지만 그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각종 ‘썰’들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고, 또 해당 역을 맡은 배우의 살벌한 연기 덕에, 시청자들에게 아주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에 비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위 구술에서 이어지는 “겸손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겸손’의 뜻이 바뀐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국제영화》 1959년 7월호 속 임화수 하지만 임화수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1950년대 활동했던 영화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양반이 스태프들한테는 잘했어요. 거기서 말썽 일으킨 거는 저, 돌아가신 김희갑 씨 때려가지고선 갈비가 부러졌다, 그때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스태프들한테는 난 잘했다고 생각을 해요. … 또 영화에 투자도 많이 하고요. 이런 얘기하면 뭐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도 영화산업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난 생각을 해요. - 이도원 (편집, 2004) 내가 생각하기에 임화수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본질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성격이 나뻐,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원래 깡패 출신 아니에요? … 나는 임화수의 덕을 많이 본 사람이에요. - 박진수 (조명, 2007, 53~54쪽) 아주 연예계에선 임화수라고 하면 알아줘야돼, 그때. 뭐 배우고 뭐고, 연예계에 하여튼 가수고 뭐 할 거 없이 임화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그렇게 돼 있었다고, 그 당시에. 근데 임화수 씨하고 나하고는 아무런 마찰이 한 번도 없었고. … 그리고 임화수는 배운 게 없지마는 머리는 잘 돌아가고 약았어. 그때 그래가지고 무슨 문화부장관인가, 응? 박마리아 여사한테 가 붙어가지고 그때 문화부장관인가 뭐 발령이 났다가, 사건이 터져가지고 고만뒀든가, 아마 그렇게 됐어. 그 얼마나, 그 사람 위대해. 위대한 사람이야. 학교 못 다녀도 그런 정도로 했다면, 응. - 이지룡 (배급, 2012, 171쪽) 그러나 위 구술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 임화수가 괜찮은 사람이었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어떻게 1950년대 활동한 영화인들에게 임화수가 깡패이면서도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었는가이다. 사실 구술자들이 임화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중 일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덕을 봤거나, 그와 특별히 마찰을 겪지 않아 그의 나쁜 점을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구술자들이 이야기하는 그에 대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기억을 조금 우회하면서 한국영화사에서 그의 ‘공적(功績)’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이 어떻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195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 산업을 이해하는 것과도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앞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한국영화의 역사가 ‘임화수’라는 한 인간을 통과하며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통일된 방향이 아니라 마치 빛이 프리즘을 지나 여러 갈래로 굴절해 뻗어나가는 것처럼 다양한 결과들로 귀결될 것이다. 깡패는 왜 ‘극장’을 좋아했을까? 그럼 먼저, 임화수와 영화산업에 접근하기 이전에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내가 영화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꼬꼬마 시절에 < 장군의 아들 > 시리즈(임권택, 1990~1992)를 볼 때도, <야인시대>를 보면서도 항상 궁금했던 것은, ‘왜 저 사람들은 자꾸 극장 앞에서 싸우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싸움에 적당한 장소로서 극장 앞에 공터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김두한’ 하면 ‘우미관’이라는 극장을 떠올리는 것처럼 당시 깡패들은 이상하게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군의 아들>(임권택, 1990)의 한 장면. 오른쪽에는 김두한의 주 활동무대인 ‘우미관’이 보인다. 물론 이때 제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돈이 되니까’일 것이다. 실제로 당시 극장은 아주 수지가 좋은 현금 장사였다. 임화수처럼 직접 극장을 운영함으로써 *주1 수익을 얻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흥행업은 주먹 패거리들에게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나는 경리만 보고 돈만 계산하고. 표 받고 뭐하고 하는 거는 주먹이 댕겨요. 극장에 가면 극장마다 그 동네 깡패들이 있어. 그러면 이놈들은 날마다 극장은 상시출입이야. 지 맘대로 돈은 안 내고. 얘네들이 내려가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주먹이니까 딱 오면 “아, 형님 오셨습니까.” 절대로 그냥은 못 들어와. 그리고 또 유명한 게 그 당시만 해도 지방 가면, 입장료가 500원이다 그러면 400원 가지고 와서 그냥 들어가려고 그런다고, 현찰로. 그러면 지금은 표를 찍고 그러지만, 여기 딱 궤짝이 있고 구멍이 뚫려있는데, 표를 받으면 여기다 넣는 거야. 그런데 이제 이 궤짝을 주먹쟁이가 깔고 앉아. 극장 직원이 표를 받아서, 돈도 받으면 그걸 그 궤짝에 넣는 거야. 이 궤짝이 그날 전체 수입이야. … 이걸 가지고 극장 사무실에서 쏟아 가지고 표는 표대로 돈은 돈대로 해서 다 계산을 해요. 그리고 ‘오늘 얼마가 들어왔다’고 극장에다가 먼저 들이민다구. 그러면 극장에서 마지막날 전체 수입이 얼마다 계산해서, 당시 극장이랑 3:7이야. 극장이 3이고 단체(공연/연극단을 말한다)가 7할 가져가는 거거든. 그렇게 계산해가지고 거기서 세금 떼고 돈 딱 주면 그걸 봉지에 다 넣고 계산서 딱 붙이고, 봉투를 딱 여매서 신주 모시듯, 잊어버리면 큰일나니깐. 그런 식으로 지방을 돌고 올라와요. - 김인기 (제작/기획, 2004) 구술자 김인기는 임화수와 어린 시절 같은 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인연으로, 후에 성인이 되어 임화수가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을 때 그의 회사 경리로 일하며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인기에 따르면, 극장마다 일명 기도(木戸, ‘문지기’를 뜻하는 일본어)라고 불리는 힘 꽤나 쓰는 ‘주먹’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역할은 입장권을 사지 않고 몰래 극장에 들어가려 하거나 과감하게 ‘자체 할인’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막고, 표나 돈이 다른 곳으로 새지 못하도록 돈통 지키는 일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공연단과 함께 극장을 돌며 간혹 배우들에게 시비 거는 사람들을 때려주는 일도 했던 것 같다. 그때는 깡패들이 한몫을 한 게 있어, 흥행계에서는. 그런 일 많지. 배우가 유명하면 또 명동서 술먹고 놀다가도 얻어맞기 일쑤고, 댄스홀에서도 곤조부리고 그런 거지. 그런 거 많어. - 황남 (배우⋅제작/기획, 2004) 이처럼 극장의 기도 또는 수표주임은 극장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력이었는데, 이들을 지정해주는 것 역시 그 지역을 관리하는 주먹 패거리들이었다. 1950년대 명보극장 부사장을 지냈던 구술자 이지룡은, 명보극장 의 수표주임으로 명동파 이화룡 이 보내준 사람을 썼다고 말했다. 명보극장의 전경과 내부 이화룡이라고 있어. 무섭긴 이화룡이 더 무섭지. 이화룡이는 명동파야. 임화수는 종로파고. 근데 극장 하나 시작을 한다 하면은, 그 기도주임이라는거, 수표주임이야, 응? (이화룡은) 바로 극장이 자기 극장인 거처럼 생각하고, “이 사장, 수표주임은 내가 보낼 테니까 그 사람 쓰시오.” 이렇게 된 거야. (질문) 수표주임은 임화수랑 이화룡이 보내주는 사람을 무조건, 모든 극장이 다 쓰는 거예요? 응, 대부분 아마 그랬을 거야. 내 알 건댄 그래.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착취해 먹는 게 아니고, 다 자기들 따르는 그 나름대로의 제자들이거든? 그러니까 밥벌이 하라고 취직을 시켜주는 거지. - 이지룡(제작, 2012, 170~172쪽) 그런데 이 정도뿐이라면 깡패들치고 매우 성실하고 건전하게 극장과 공존하며 수익을 나눠 갖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당시 깡패들이 극장으로부터 수익을 얻는 가장 주된 방법이기는 했지만, 좀 더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삼류관인께 한 푸로 4일간, 그러면 네(4) 푸로를 해야 돼. 회장이 한 푸로, 써금써금헌 놈 영화사 아무거나 그냥 공이로 갖다가 붙여먹고 많든 적든 수입 가져가. 그때 유지광 이가 그다음 꼬붕이여. 유지광이가 대. 그러믄 인자 극장 앞 부근에 이런 놈 있어. “사장님, 우리도 먹고 살어야 된다”고 … 그럼 9일을 뺏겨 갖고 21일 갖고 장사를 허니 미치제. - 전경섭 (배급, 2007, 80쪽) 전경섭은 해방 이후 제국관 (동방극장으로 명칭 변경)을 불하받은 형 전기섭의 밑에서 극장 운영을 배웠고, 호남 지역의 영화 배급일도 맡았었다. 이후 전기섭은 서울 동대문 천일극장을 운영하게 되는데, 천일극장은 광장시장 앞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화극장 과 매우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술자 전경섭은 천일극장이 평화극장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가 자신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천일극장이 이정재의 권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위 구술은 당시 이정재가 천일극장으로부터 어떻게 수익을 챙겨갔는지 설명하고 있다. 천일극장은 재개봉관으로 영화 한 편을 상영하면 평균 4일 정도 상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정재와 유지광, 그리고 그 밑에 깡패들이 영화사로부터 낡은 영화 한 편씩을 공짜로 가져와서는 극장에 상영하게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수익은 자신들이 가져갔다. 그러면 극장 측은 한 달 중 열흘 *주2 정도는 영업을 하고도 한 푼 벌어들이지 못하니,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극장 주변의 깡패들은 대체로 영화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대중오락으로서 인기가 있었던 영화 흥행을 이용해 쉽고 빠르게 현금을 챙기고자 했다. 그러나 임화수는 단순히 극장 경영을 돈벌이로만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단체를 조직하고, 더 나아가 영화 제작에 돈을 투자했으며, 영화 정책에도 관여하고자 시도했었다. 그의 이러한 영화산업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기억 그때 그 면세조치운동이요, 지금 그거를 어떻게들 평가할런지 모르지만, 사실은 임화수가 나쁜 짓도 했지만 좋은 짓도 했어요. 임화수가 그 국산영화면세조치를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 강대선 (감독⋅제작/기획, 2004) 1950년대 영화 기자로 활동한 바 있고, 이후 영화 연출, 영화제작⋅기획을 했던 구술자 강대선은 임화수와 관련하여 그의 가장 큰 공(功)으로 ‘국산영화면세조치’를 꼽았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비오는 날이었어요. 내가 기억하기론 여름인데, 돌아가신 김승호 란 배우가 있었는데,아주 유명한, 동남아시아를 석권했던 명배웁니다. 이 양반이 하얀 모시저고리를 입고 단성사 극장 흙탕물에 털썩 주저앉아서 땅을 쳤던 일이 있어요. 각 신문 사진기자들이 (담기에) 좀 좋아. 당대 최고의 스타가 말이지 비오는 날 말야 물구덩이에 앉아서 땅을 치면서, 또 연기는 좀 잘했겠어? (웃음) 연기자인데. 이거를 전부 그냥 사진을 찍어가지고 곽영주 경무관이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을 가리킨다)한테 드린 거라. 이 박사가 그냥 특명을 내려가지고 이기붕 씨가 손수 나서서, 말하자면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를 해줬지. - 강대선(감독⋅제작/기획, 2004) 구술자가 이야기하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영화배우 김승호는 당시 임화수가 경영했던 한국연예주식회사 소속 배우였다. 즉 임화수는 자기 회사의 소속 연예인을 이용하여 극적인 그림을 만들어냈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곽영주를 통해 이 그림과 함께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청을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달했다는 것이다. 영화 < 해떨어지기 전에 >(강대진, 1960)에서의 배우 김승호.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과 대략 비슷할 것 같은 사진을 골라보았다. 구술자의 증언이 너무 극적이고, 눈앞에 그려질 듯 생생해서 하마터면 덜컥 믿어버릴 뻔했다. 그렇다고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 자체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약간 기억의 왜곡이 작용한 듯 보인다. *주3 사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국산영화뿐만 아니라 흥행물에 대해서도 입장세 인하 요구는 꾸준히 예술인들에 의해 주장되어왔다. 그 결과 국산영화제작 진흥의 일환으로 1954년 3월 31일 공포⋅시행된 입장세법에는 ‘국산영화에 대해 입장세를 면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다시 말해 임화수가 극장 및 연예단체 운영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는 이루어져있었으며, 그는 오히려 이러한 특혜조치에 따른 이득을 누리기 위해 영화계로 영역을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김승호가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동남아시아 영화시장에 이름을 알린 것도 1957년 < 시집가는 날 >(이병일, 1956)이 동남아에 수출되고, 제4회 아시아영화제 에서 최우수희극상을 받은 뒤부터였다(물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연극계에서 더욱 이름이 높았다). 따라서 강대선이 기억하는 저 화려한 퍼포먼스는 적어도 1958년 이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4 비록 몇 가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위 구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임화수라는 인물이 ‘김승호’라는 명배우를 동원할 수 있는 힘과, 동시에 국가 최고 권력에 닿을 수 있는 ‘끈’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영화계에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해외 진출 시도와 실패 임화수는 영화계에 첫발을 딛는 동시에 과감하게도 해외로 진출했다. 많은 당대의 영화인들이 꼽는 그의 두 번째 ‘공적’이 바로 이 해외와의 합작 시도이다. 그는 1957년 한국연예주식회사에 소속된 배우와 스태프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해준 것은 동남아 지역에 대규모 극장 체인과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유명 영화사 쇼브라더스였다. 처음에 홍콩에 도착을 했더니, 트랩에서 내리는데 정말 배우생활 60년 동안에 그런 카메라 세례를 받아본 건 처음이야. TV기자라든가 잡지사, 신문사 기자들 한 50명이 트랩 밑에서 후레쉬를 터뜨리는데, 정말 야! 정신이 없더라구요. … 그날 저녁, 우리가 파티 저녁을 먹는데 그쪽 뉴스에 “한국배우들 도착” 그리고 합작영화 소개가 뉴스 시간에 나오더라구. 그러니깐 그때부터 우리 일행들은 좀 흥분이 되고, (웃음) 새롭게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왜냐하면 아시다시피 50년대 우리 영화계는 아주 빈약했고, 또 촬영현장 가도 카메라래든가 조명이래든가 여러 가지 기재가 아주 구닥다리였고. … 근데 가서 촬영현장을 보니까 쇼브라더스의 스튜디오라든가, 조명기구, 카메라 그리고 기술적인 그 흐름이 아, 역시 우리가 처음 보는 그런 환경에서 연기한다는 게 참 신기스러울 정도로, 변화를 느끼게 됐죠. - 윤일봉 (배우, 2015, 11~12쪽) 영화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의 스틸컷. 왼쪽이 구술자 윤일봉이다. 쇼브라더스 측에서는 일찍이 1956년부터 한국 정부에 자신들이 보유한 영화와 한국영화를 교환하는 방식의 무역 거래를 요청해왔다. 이 시기 쇼브라더스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한국과 일본으로 시장의 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한국도 1955년 제2회 동남아시아영화제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했던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한국영화의 수출과 합작을 통한 기술 교류)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필요가 맞닿은 찰나에 적극적으로 그 기회를 잡은 것이 임화수였다. 그리고 그가 다른 영화사들에 비해 더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 역시 임화수에게 닿아있던 정부 권력 덕분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합작영화 제작이 어려웠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당시에는 여권을 받아 해외로 출국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 때였다. 그때는 국제적이라는 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합작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나 홍콩을 자주 왕래할 수도 없었고. … 아주 여기서 허가 내는 데 어려왔어요. 절대로 못 나가는 거예요, 그때는. (22~23쪽) … 나라에서는 여권이라든가 그 편의는 문화공보부, 그땐 공보부에서 ‘많이 편의를 봐줘라. 이거 대한민국을 위해서 외화수입만 의존하지 않고 이제 우리도 합작을 해서 우리 걸 제대로 국제적으로 이 무대에서 나가는 거니까 도와줘라’ 그래서 스무스하게 왔다갔다 하는 거는 참 잘했어요, 우리가. - 문금순 (제작, 2014, 22쪽) 하지만 무엇보다 합작 진행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것은 외화(外貨)를 국외로 반출하는 일이었다. 쇼브라더스와 한국연예주식회사는 합작 당시 제작비를 5:5로 분담하기로 했다. 영화제작이라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거액이 필요한 사업이었고 그 절반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1950년대는 국내 보유 외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화의 사용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고, 매년 상공부의 무역 계획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규모가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계획에도 없는 거액의 외화를 갑자기 필요에 의해 갖고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은 임화수가 ‘썼다는’ 칼럼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해외시장 확보에 목적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투자를 자유스럽게 해야 하겠는데 우리 영화제작계에는 외화(外貨)가 없고, 또한 있다 해도 자유롭게 해외에 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속히 정부는 선진국의 예를 따라서도 해외시장진출을 목적한 영화제작에 제작비를 보장 내지 보상해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투자의 자유스러운 길을 열어주어야만 우리 영화도 우방국가의 영화와 대열을 같이 하여 해외시장을 어느 만큼이라도 점유할 수 있고 따라서 발전과 향상을 기하리라 생각된다. - 임화수, "합작영화의 가능성", 《조선일보》, 1958. 2. 20. 4면 기사 중 어쨌든 이런 장애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때그때 외화를 조달해가며 합작을 진행했다. 합작영화라면 외화 유출을, 인제 보내줘야 되잖아요? 근데 대체로, 송금하고 이게 아니라 이 양반이 싸 가지고 갔다고. 왜냐면 세관이라든가 이게 외화유출로, 법적으로 걸릴 수도 있는데 이이는 용감했어요. 그리고 또 세관 사람들 다 알고. 임화수 하면은 뭐 다 그때는 통할 때니까. “아, 오늘 누구 엄마 연락해서 몇 만 불 좀 사라.” 뭐 이래서 현금 주고. 자금줄이라는 게, 그이가 그렇게 돈이 많고 이러지는 않더라고요. 그때 평화극장 하면서 뭐 갈쿠리로 긁을 정도로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이니까 현금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거 갖고는 제작비 감당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에요, 잔돈푼은 될지언정. 대개 재택이 엄마가 계모임을 조직해서, 그거 어… 동대문시장 상인연합회에 7형제라고 있어요. 그 부인들하고 계조직을 하면은 계모임에서 그 돈을 가져오고. 또 두 번째 부인을 통해서. 자기 본부인하고 둘째 부인하고 경쟁을 시킨 거예요. “얼마가 오늘 필요한데, 며칠날 홍콩 가는데 돈이 있어야 되니까 해오라”고. 양쪽에서 해오는데 어떤 때는 안 되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되면, “크, 그냥 너는 아주 최고다.” 막 이러고. 그날 인제 좋은 분위기로 그 집을 가는 거고. 안 되면 “야, 넌 그것도 못 해오냐”고, “기분 나쁘다”고 막 싸우는 수도 있고. (18쪽) … 각 극장에서도 좀 도와준 것 같아요. 극장주들이 많이 도와줬고, 또 나름대로 주위의 고리대금하는 사람들도 슬슬 흘려서 빌려줬어요. 이자를 다른 데보다 싸게. … 하여튼 저는 열심히 그냥 명동에 달라 아줌마한테 가서 받아다 드리고. (30~32쪽) 그냥 야미(뒷거래)지. 그러니까 주머니에 넣고 가서 쓰고. 또 홍콩 자체에서 필요해서 교포들하고 거래로 해서 우리나라 돈 주고서 하는 수도 있고. 무슨 수든지 하여튼 우리 걸 분담은 다 깨끗이 했기 때문에 그 영화가 나온 거겠죠. (35쪽) - 문금순(제작, 2014) 한국연예주식회사와 쇼브라더스가 합작한 영화 < 천지유정 >(김화랑, 1957) 양국 참여 스태프 단체사진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동원된 막대한 자금은 제작비로도 사용되었지만, 대체로 경비로 나갔다고 한다. 보은의 뜻으로 자기한테 충성했던 사람들을 홍콩 구경시켜 준다고 많이 갔어요. … 외국에를 나갔으면 좋겠는데 영화를 핑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트였다고 굉장히 선호도가 좋았어요. 배우들이고 뭐, 엑스트라라도 좋으니까 홍콩 좀 한번 갔다 왔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조금 이쁘게 보이면 그냥 “이번에 너 데려간다” 이렇게 해서. 그런 경비가 좀 많이 나갔어요. - 문금순(제작, 2014, 40~44쪽) 제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한중 합작영화 제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상을 수상한 임화수(왼쪽에서 세 번째) 이런 식으로 3편의 합작영화를 제작했지만, 흥행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자 그는 합작에서 손을 뗐다. 비록 임화수는 합작에 손을 뗐지만, 이후에도 합작에 대한 국내 영화사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특히 1962년 제정된 영화법에서 합작영화를 법제화하여 그 기준을 정하고 정식 공보부의 허가 절차를 통해 자금 출자도 가능하게 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물론 이와 같은 규정이 만들어진 바탕에는 어쨌든 앞서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화법이 제정된 후 가장 활발하게 합작에 나선 것은 신상옥 감독이 이끌던 신필름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초까지 신필름(신프로덕션)을 거쳐간 많은 영화인들은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을 통해 새로운 영화기술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196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홍콩 무협영화의 인기가 높아지자 다수의 한국 영화제작사들이 합작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이 1970년대에는 위장합작 문제를 야기시켰고 이로 인해 합작영화에 대한 여러 제한 규정들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이는 그만큼 당시 합작영화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영화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시기를 기억하는 영화인들에게는 처음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공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임화수는 자신이 세운 공든 탑을 버리고 다른 선택을 했다. 이맘때부터 그는 반공예술단을 결성해 소속 연예인들을 관제행사에 동원하는가 하면, <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신상옥, 1959)과 같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만송 이기붕>이라는 제목의 문화영화와 함께 1960년 3월 15일 이루어질 정부통령선거를 위한 선전영화로 전국 극장과 군(軍)에서 상영되었다. 여전히 연예계에서 활동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었지만, 정치깡패로서 정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선택이 그에게 가져온 결말은 모두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깡패냐, 예술인이냐 3.15부정선거의 결과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임화수는 이후 3.15부정선거 개입과 고대생 시위대 피습사건 등 정치폭력 혐의로 체포되어 여러 차례의 재판 끝에 1961년 12월 21일 사형에 처해졌다. 재판 최후진술에서 임화수는 자신이 ‘예술인’임을 강조하며 “국가에 공로는 있을지언정 죄를 지은 일은 없다” *주5 고 주장했다. 5.16 이후 진행된 혁명재판의 최후진술에서도 그는 다시 “자유당을 위해 <청년 이승만>의 영화를 만드는 등 이용만 당하다가 억울하게 고대생 습격범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니 잘 살펴달라” *주6 며 자신이 ‘문화사업가’임을 강조했다. 물론 그의 이러한 발언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구차한 발버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인’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든 크게 문제될 바는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가 이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에 있다. 임화수는 무궁화악극단과 코리아악극단이라는 당시 굵직한 두 개의 악극단을 연합하여 한국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하고는 소속 연예인들을 빈번하게 자신의 명예와 문화적⋅정치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영화산업에 뛰어든 후에는 자신이 가진 뒷배를 동원하여 합작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속시켜 제도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작비를 긁어모아 지인들과 선심성 여행을 다니기에 바빴다. 이렇다 보니, 이른바 그가 한국영화사에 남긴 공로라는 것도 단지 ‘예술인’ 또는 ‘문화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한 깡패의 허세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임화수는 비슷한 길을 걸었던 화성영화사의 이화룡과 비교가 된다. 이화룡은 앞서 구술에서도 나온 것처럼 명동파 어깨두목으로 1958년 일명 ‘명동깡패사건’으로 기소되어 1959년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사건이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몰라도 그는 1960년 화성영화사를 설립하며 영화제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4.19 이후에는 임화수와 마찬가지로 ‘단체적 폭력행위’로 혁명재판에 기소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주7 1963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도 영화인으로서의 생을 살며, 한국영화계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 신세계 >(박훈정, 2012)에서 정청이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이자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제 고만 선택해라. 그래야 니가 살아”)처럼 임화수는 어느 순간엔가 자신이 영화인으로서 살 것인지, 정치깡패로 살면서 언젠가는 몰락할 정권과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인지, 둘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 따라서 분명한 선 긋기에 실패한 이 예술하는 정치깡패는 한국 연예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고 여러 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죽는 순간까지 대중에게 ‘예술인’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 주1. 임화수는 해방 후 적산(敵産)이 된 제일극장(일제시기 미나도좌)을 불하받은 뒤, 평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주2. 영화 한 편에 4일 상영이니까, 이정재, 유지광, 그 아래 깡패가 한 편씩만 들고 와도 총 12일간은 극장 수익이 없는 셈이다. 구술자는 9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구술자의 단순한 계산 오류일 수도 있겠으나, 이 날짜가 그만큼 유동적이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3.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회계 담당 직원으로 일했던 문금순도 구술에서 “한국영화 세금 안 내게 한 사람이 임화수 씨”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문금순은 면세조치가 이루어진 과정이 강대선과는 또 다르다. “‘우리 한국영화를 위해서 말이야 면세조치를 받아야 되는데 재무부장관 집에 새벽에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래 갖고 김승호 씨, 김희갑 씨, 복혜숙 씨, 고선애 씨, 이향자 씨 이런 사람들 … 막 끌어내고. 그래서 새벽 일곱 시에 재무부장관 집을 가는 거예요. … 재무부장관이 허락해야만 되니까. 그래 갖고 그걸 뚫고 면세조치가 돼서 한국영화 세금 없이 상영관에 상영을 했어요.” (공영민, 『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문금순 박행철 안정무 편 』, 한국영상자료원, 2014, 23~24쪽 참조.)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된 기억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아마도 임화수는 자신의 의견을 중앙에 전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4. 국산영화면세조치 덕분인지는 몰라도, 1955년 이후 한국영화는 제작편수 면에서나 흥행 면에서나 눈에 띄는 상승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타 무대연예예술이나 외국영화와 비교해봤을 때, 국산영화만 특별히 입장세를 면해주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58년 즈음이다. 그리고 1959년 자유당에서 제안한 입장세법 개정안(국산영화와 외화 모두 극장의 등급에 따라 세율을 차등 부과)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이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시위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국회 앞에서 배우들 진정", 《조선일보》, 1959. 12. 27. 3면 기사 참조) 구술자 강대선이 봤다는 시위는 1958~1959년 즈음에 있었던 이 배우들의 시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가 입장세법 개정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60년 개정⋅시행된 입장세법에 따라 국산영화에 대해서도 2~4%의 입장세가 부과되었는데, 대신 1958년 문화공보부 고시를 통해 우수 국산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 외화수입배급 쿼터를 1편씩 추가로 배정하는 ‘국산영화제작장려 및 영화오락순화를 위한 보상특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임화수는 외화 배급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보상정책이 수립되는 데에 그의 입김이 얼만큼 닿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주5. "법정스냎-말끝마다 예술인/임화수, 국가공로 있다고", 《동아일보》, 1960. 9. 6. 3면 기사. 주6. "임화수⋅유지광 최후진술", 《경향신문》, 1961. 8. 22. 조간 2면 기사. 주7. 이때 그의 범죄혐의는 ①국도극장 임검순경 폭행 ②명보극장 사장을 협박하여 권리행사 방해 ③투자액 반환을 요구하는 공연 투자자 폭행으로 인한 상해 등 세 가지였는데, 모두 영화사 설립 이후 극장 흥행과 관련한 폭력 행위로 이전에 명동파로 활동하던 때의 범죄로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받았다.
※ 섬뜩한 이미지들이 많으니 심약한 분들은 주의를 요합니다 한국 공포영화의 주기는 파란만장하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장르는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상상력은 다양했다. < 악의 꽃 >(1961, 이용민)처럼 흡혈 식물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었고, < 불가사리 >(1962, 김명제)와 < 대괴수 용가리 >(1967, 김기덕)같은 괴수 영화도 있었다.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던 이용민 감독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 살인마 >(1965)나 < 목 없는 미녀 >(1966) 같은 걸작을 내놓았다. < 월하의 공동묘지 >(1967, 권철휘)는 한국 공포영화의 정전이 되었고, 유현목 감독의 <한>(1967)은 큰 흥행을 기록하며 ‘옴니버스 호러’의 전통을 세웠고 속편으로 이어졌다. 당대 최고의 영화사였던 신필름도 이 장르에 결코 무관하지 않았는데 < 천년호 >(1969, 신상옥), < 사녀 >(1969, 신상옥)는 당대의 흥행작이었다. 박윤교 감독의 <마계의 딸>(1983) 1960년대에 ‘준 메이저’ 장르로 시작한 한국 호러는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용민, 박윤교, 이유섭, 김인수 등의 감독들이 꾸준히 작품을 이어갔고 사극의 서브 장르로서 1960년대의 유산을 양적으로 확장시켰다. < 설야의 여곡성 >(1972, 임원직), < 며느리의 한 >(1972, 박윤교) 등이 이때 등장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크리처 쪽으로 트렌드 변화가 왔다. < 반수반인 >(1975, 김기)의 늑대 인간, < 정형미인 >(1975, 장일호)의 고양이 인간, < 원무 >(1976, 박윤교)의 미이라 등 더 이상 소복을 입지 않는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대만, 홍콩, 필리핀, 태국 등과도 합작이 활발히 이뤄졌다. 남자의 등을 어루만지는 귀신의 손길. <삼국여한>(1982. 김인수)의 한 장면. <깊은 밤 갑자기>(1981. 고영남)의 이기선은 세련되면서도 당돌하지만 한편으론 백치미를 지닌, 복합적 이미지의 배우였다. 1980년대 마지막 호러인 <하녀의 방>(1987. 김인수). 이 시기에 이르면 호러와 에로의 경계를 거의 무너진다. 1980년대 호러의 가장 큰 특징은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exploitation film)의 경향이다. 즉 ‘노골적인 상업영화’라는 강력한 상업적 의지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진행된 한국영화의 산업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1970년대에는 크리처와 합작이 그 타개책이었다면, 1980년대엔 에로티시즘과 하드고어였다. 1980년대 호러에 새로운 것은 없다. 대신 표현 수위의 강도를 상승시키며 생존하려 했다. ‘여인의 한과 피맺힌 복수’라는 전통적 가치는 오롯이 살아 있지만, 그 정서와 방법론과 비주얼은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에로틱 호러’의 창궐은 시대정신에 발맞춘 것이었다. < 애마부인 >(1982, 정인엽)을 기점으로 충무로에 불기 시작한 ‘살색 열풍’은 모든 장르를 잠식했다. 단지 ‘야한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크게 보면 ‘선정주의’의 확장이었다. 성적 표현뿐만 아니었다. 액션 스펙터클이든 폭력 묘사든 감정 표출이든 ‘80년대식 표현’은 이전에 비해 한두 눈금 더 올라가 있었고, 호러 장르는 그 표현에 최적의 토양이었다. 당대의 에로티시즘 영화와 일맥상통했던 ‘1980년대산 호러’는 비주얼의 관능성과 폭력성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김인수 감독은 상징적 인물이었다. 1990년대엔 비디오 시장으로 건너가 <젖 소부인 바람났네 >(1995)를 연출하며 거대한 족적을 남긴 그는, 1980년대에 마치 그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끈적끈적한 공포영화를 선보였다. 그가 1982년에 연출한 < 삼국여한 >의 예고편 문구인 “치정과 욕정이 얽힌 성인용 공포 드라마”는 당대 공포영화 감독들의 좌우명이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옴니버스 호러였던 <삼국여한>은 단순한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도착적 성을 다룬 ‘섹스 과잉 공포’로서 여기에 하드고어를 결합했다. 그의 < 미녀 공동묘지 >(1985)에는 시체와의 섹스까지 등장하니, 1980년대 한국 호러의 성적 상상력은 에로티시즘에서 사도마조히즘을 거쳐 네크로맨틱에 이르는 여정이었던 셈이다. ‘호러 장인’ 박윤교 감독의 < 춘색호곡 >(1981)의 오프닝도 ‘섹슈얼 호러’라 불러도 될 만큼, 그의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톤이었고 < 천년백랑 >(1983)에서는 근친적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춘색호곡>과 <한녀>(1981, 이유섭)의 ‘귀신 액션’. 스타일과 비주얼도 더욱 자극적이며 적나라한 양상을 띠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는 호러와 무협 액션의 결합이었다. 이 시기 귀신들에게 텀블링은 기본이었으며 피아노 줄을 달고 경공술을 선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춘색호곡>은 대표적이며, 한중일 콘셉트의 옴니버스 영화인 만큼 <삼국여한>은 중국식 무협과 사무라이 액션 등을 선보였다. 남기남 감독의 < 흑삼귀 >(1985)는 강시 영화를 좀 더 하드고어 버전으로 만든 듯한데, 1970년대 액션 전문 배우였던 권영문이 등장하며, 도사 캐릭터의 활약이 펼쳐진다. <천년백랑>의 후반부는 호러보다는 무협 액션에 가깝다. <깊은 밤 갑자기>는 다양한 광학 효과로 그로테스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효과는 1980년대 호러의 클리셰였다. <천년백랑>에서 사람이 여우로 변하는 장면. 디졸브를 이용해 꽤 그럴듯하게 변신을 표현한다. <공포의 축제>와 <월하의 사미인곡>. 특수분장의 기술적 발전을 토대로 호러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삼원녀>의 잘린 팔과 <제4의 공포>의 잘린 머리. 다양한 효과들이 호러 장르의 시각적 쾌감을 위해 사용되었다. 1980년대 호러는, 지금 보면 약간 조잡하게도 느껴지지만 다양한 광학 효과를 통해 기괴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화면을 흐리는 블러 효과를 비롯, 렌즈를 통해 왜상을 만들고 프리즘 효과를 냈으며, 이중노출이나 디졸브 등을 통해 변신이나 빙의를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엔 대부분 자극적인 사운드가 결합되어 그로테스크한 기운을 더했다. 특수효과와 특수분장도 빼놓을 수 없다. 소복 소매에서 흰 연기가 나오는 <원한의 공동묘지> 스타일의 초보적 수준도 있었지만, 때론 실감나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 분야의 기술적 발전 역사에서 1980년대는 초기에 해당하는데, 자본의 취약성에 때문에 그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당시 공포영화가 원하던 ‘쎈’ 표현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켰다. 신체를 절단하고 괴물 같은 얼굴을 필요로 했던 하드고어 콘셉트가 대거 등장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다. 특히 김철석(특수효과)과 장인한(분장)이 만난 < 월녀의 한 >(1980, 김인수), < 마계의 딸 >(1983, 박윤교), < 제4의 공포 >(1984, 노진섭), < 월하의 사미인곡 >(1985, 박윤교) 등은 이 분야의 초석이 된 작품들이다. 기술적 발전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영화도 있다. 김인수 감독의 <제4의 공포>와 < 공포의 축제 >(1986)는 기형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영화다. < 한녀 >(1981, 이유섭)은 경성 시대를 배경으로 성형 수술을 소재로 한다. < 삼원녀 >(1981, 김시현)와 <삼국여한>엔 팔이나 머리가 잘리는 신체 절단 요소가 있으며, <월하의 사미인곡>이나 <여곡성> 등 1980년대 중반 사극 호러에 오면 더욱 괴물 같은 메이크업을 선보인다. <관 속의 드라큘라>와 <흡혈귀 야녀>. 서양의 뱀파이어 캐릭터는 1980년대에 직접 도입되거나 귀신으로 변형된다.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인 <괴시>, 좀비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육체의 문>. <제4의 공포>와 <여곡성>. 메이크업을 통한 섬뜩한 ‘괴물적 캐릭터’의 탄생. ‘스네이크플로이테이션 무비’(snakeploitation)라고 불러도 무방할 <인사대전>. 이 영화에서 뱀은 무차별한 학살의 대상이며, 건물 한 채를 혼란에 빠뜨리는 재난의 원인이며, 인간과 액션 대결을 하는 가공할 만한 크리처다. 1960~70년대의 전통적 공포영화에서 벗어나 더욱 자극적인 요소로 호소하려는 1980년대 호러의 노력 중 하나는 이국적 요소의 도입이었다. 중국인 며느리의 한을 담은 <삼원녀>나 중국과 일본의 요소를 끌어들인 <삼국여한>, 혹은 국적 불명의 <흑삼귀> 등은 대표적이다. 여기에 한동안 한국영화에선 선보이지 않았거나 최초로 등장하는 호러 크리처들이 등장했다. 흡혈귀들이 대표적인데, 사극 공포영화에서 여자 귀신들은 종종 흡혈을 하며 <삼국여한>에는 관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는 귀신마저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영화는 < 관 속의 드라큘라 >(1982, 이형표)다. 영미권의 호러 캐릭터인 드라큘라를 도입해 한국적 맥락에서 퇴마를 가한다. < 흡혈귀 야녀 >(1981, 김인수)는 기존의 사극 귀신에 흡혈의 모티브를 두드러지게 결합시킨다. 좀비 영화도 등장한다. < 괴시 >(1981, 강범구)는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로 평가되는데, 해충 박멸을 위한 초음파 실험이 시체들을 깨어나게 한다는 설정이다(방사능이 원인이 되었던 조지 로메로의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1968)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기환 감독의 <육체의 문>(1981)엔 좀비 연쇄살인마가 등장해 여자들을 연달아 살해한다. <제4의 공포>엔 화상으로 흉측한 얼굴을 지니게 된 남자가 마치 미이라처럼 얼굴을 붕대로 휘감고 등장하며, <여곡성>엔 괴물처럼 변해버린 마님이 등장한다. 독사에 물린 여자가 뱀파이어가 되는 < 몽녀한 >(1984, 강범구)과 기형 인간이 등장하는 <공포의 축제>도 언급할 만한 영화다. 동물들도 한몫 했다. 고양이, 뱀, 까마귀 등의 동물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한의 매개체’가 되는 전통적 소재였는데 1980년대에 와서는 더욱 끔찍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바로 ‘학살’의 대상이 된 것. 홍콩과의 합작 영화인 < 인사대전 >(1983, 김선경)은 < 홀로코스트 >(1980, 루게로 데오타도)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많은 뱀들을 무차별로 죽인다. <원한의 공동묘지>에선 수많은 고양이들이 죽임을 당하는데, 이런 살풍경은 이전 호러에선 좀처럼 접하기 힘든 잔인한 스펙터클이었다. <여곡성>엔 전설의 ‘지렁이 국수’ 장면이 있다. <망령의 웨딩 드레스>의 계단 신. 김기영 감독의 미장센을 연상시킨다. <깊은 밤 갑자기>에서 무당의 딸인 하녀는 주술적 위력과 함께 섹슈얼한 힘으로 집을 장악한다. 1980년대 공포영화의 트렌드 중 하나는 별장이나 외딴 곳의 저택을 배경으로 하는, 굳이 이름 붙인다면 이른바 ‘맨션 호러’의 등장이다. 할리우드의 ‘하우스 호러’가 집에 깃든 악령이나 저주로부터 섬뜩한 기운을 가져온다면, ‘맨션 호러’는 집 자체에 영혼을 부여하진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젊은 여자와 중년 남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여기서 억울한 죽음과 복수극이 벌어진다. 그런 면에서 < 하녀 >(1960, 김기영)나 < 마의 계단 >(1964, 이만희) 같은 1960년대 한국 스릴러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 듯하다. 1980년대 ‘맨션 호러’는 공포 장르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의도 속에서 과거의 유산을 되살리는 시도였다. 그 전형은 < 망령의 웨딩드레스 >(1981, 박윤교)다. 회사를 운영하는 남자는 우연히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여자를 자신의 별장 하녀로 고용한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마치 <하녀>의 하녀처럼 남자를 차지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남자는 여자를 죽이고 우물에 던져버리지만, 마치 <마의 계단>처럼 그녀는 다시 출몰한다. 귀신인지 산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구도는 < 귀화산장 >(1981, 이두용)에서 병원장과 간호사의 관계로 변주되며, <깊은 밤 갑자기>에선 주술적 요소가 가해진다. 특히 <깊은 밤 갑자기>는 전원 저택의 안주인(김영애)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망상 속에서 미쳐가는 여성을 보여준다. <살인마>를 리메이크 한 < 목없는 여 살인마 >(1985, 김영한). 외딴 폐가와 병원을 오가는 <제4의 공포> 등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작품들. 한편 < 악녀의 밀실 >(1984, 김선경)이나 < 요색유희 >(1985, 강대선)는 집에 깃든 악령의 존재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1980년대, 작게나마 호러 전문 배우진이 형성된다. 정세혁과 박암은 대표적. 사진은 <망령의 웨딩 드레스>와 <삼국여한>이다. <미녀 공동묘지>의 진봉진과 곽은경. 그들도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들이다. 1980년대 호러엔 이국적 이미지의 배우들이 종종 등장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괴시>의 유광옥, <여곡성>의 홍명진, <월녀의 한>의 박병순, <제4의 공포>의 정현숙. 서양의 호러가 가톨릭 사제를 주로 퇴마사로 내세운다면, 한국의 공포영화엔 대사나 법사의 존재가 있었고 십자가 대신 불교의 상징인 ‘卍’(만)이 있었다. <여곡성>과 <월녀의 한>에 등장하는 ‘卍’.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는 흥행을 위해 좀 더 강렬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전반적인 침체와 낙후한 자본 구조 속에서 장르적 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클리셰를 반복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충무로에서 더 이상 호러는 생산되지 않는 멸종 상황에 이르며, 이 암흑기는 < 여고괴담 >(1998, 박기형)이 등장할 때까지 이어진다. 10년 넘게 제작되지 않은 셈인데, <여고괴담> 이후 2000년대 초중반에 왕성하게 부활한 호러는 2010년 이후엔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다. 한국영화의 수많은 장르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흥망의 사이클을 보여주는 장르, 호러. 지금은 잠시 침체되었지만 언제 또 새로운 모습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며 등장할지 모른다. <원한의 공동묘지>의 마지막 신을 장식하는 자막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 “원한은 죽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맴돌고 있다.”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