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에 꽃이 피네
- 감독
- 강조원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남정임, 오영일, 남석훈, 한유정, 안인숙, 김웅, 김신재, 주증녀, 이낙훈, 한은진, 박순봉, 트위스트 김, 진성권, 송해, 박시명, 김희갑, 박기택, 박기수, 문미봉, 지방열, 차신철, 최희준, 이시스터즈, 김용만, 패티 김, 현미, 정훈희, 김세레나, 꼬마합창단, 남진, 이현성, 안태섭, 김정희, 임운학, 김영인
앞선 여성코미디언 약사 1에서는 박옥초와 백금녀의 영화에서의 활약을 살펴보았다. 악극단의 스타였던 박옥초가 영화로 무대를 옮기고 난 뒤 70여 편의 영화에서 개성 있는 조연과 단역을 맡아 신 스틸러가 되었다면, 백금녀는 확실한 자신만의 코미디 콘텐츠를 가지고 주연과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았던 경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여성 코미디언들은 영화보다는 라디오, TV 등 여타의 매체에서 더 돋보이는 활약을 하였거나, TV에서의 스타성을 가지고 영화로 영역을 넓힌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코미디영화 전성기에 남성 코미디언들이 주인공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동안, 백금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 코미디언들은 조연이나 단역 이상의 역할을 맡지 못했다. 이들은 악극단의 전성기와 라디오 시대를 거치며 눈부신 활약을 했으나 흥행 시장이 영화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주변화 되었거나 영화를 건너뛴 채 쇼 무대에서 TV로 이동하여 스타덤을 이어갔다. 물론, 코미디의 영역 자체에서 여성들은 대체로 남성들에 비해 좁은 입지를 가져왔던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가부장제 하의 젠더 규범에서 여성성은 “겸손함과 어여쁨”으로 규정되어 왔기 때문에 “광대짓 하기나 바보짓 하기”는 여성들의 행동으로 부적절하게 여겨져 왔다. 즉, 여성이 코미디 발화의 주체가 되는 것은 “문화적으로 결정된, 이상적인 여성 행위에 대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1) 우리나라뿐 아니라 영미권이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코미디 산업의 모든 영역에서 오랫동안 남성들이 지배적인 것이 일반적 2) 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코미디 산업에서 남성의 우세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본다 하더라도, 한국 코미디영화와 여성코미디언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적인 측면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 해에 평균 10편 이상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이 기간 동안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언코미디가 50여 편 가까이 제작되었던 상황에서, 여성 코미디언이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영화는 매우 드물었다. 단편적인 무대 코미디나 만담, 쇼 등에서는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여성 코미디언들은 거의 대부분의 코미디영화에서 조연이나 단역에 머물렀다. 두 번째, 코미디영화 속 여성 재현의 문제이다. 프로이트는 두 남성 사이의 농담에서 여성의 역할이 “적대적이고 성적인 공격의 대상” 3) 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1950-1970년대 한국의 코미디영화 속 여성들 역시 대체로 프로이트적 규정 안에서 유형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남자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미용사> 등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들이 매우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여성 캐릭터들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른바 ‘남자 시리즈’ 속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교화’되어야 할 대상이자 남성 주인공의 사회적 성취와 더불어 주어지는 ‘성적 보상’으로 객체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영화의 여성 주인공은 대부분 미모가 두드러지는 젊은 여성 배우들이었고, 여성 코미디언들은 외모로 웃음을 담당하는 조연이나 단역으로 역할이 한정되었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영화의 존재는 매우 이채로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의 코미디영화 안에서의 여성 코미디언들의 문제적 위치와 재현 양상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코미디 배우들의 존재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고 제한된 영역 안에서나마 다양한 웃음의 코드들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기억되어야 한다. 이들은 박옥초와 백금녀 만큼의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 스타였다고 할 수는 없어도, 무대에서 혹은 TV에서 매우 강렬한 웃음을 만들어 내었던, 우리 시대의 코미디언들이었다. 가장 먼저 언급할 사람은 고춘자(1922-1995)이다. 고춘자는 장소팔과 함께 콤비를 이루어 1950-60년대 만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고춘자와 장소팔의 활약은 e-영상역사관에 남아 있는 몇 편의 문화영화, <내고향 좋을시고>와 <민요잔치> 등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고춘자는 활동 초기에는 장소팔, 후기에는 김영운과 짝을 이루어 대화만담과 민요만담 등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영화 출연은 콤비였던 장소팔에 비해서도 훨씬 뒤늦은 편이었다. 장소팔은 <여성 코미디언 약사> 1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처가>(김수용, 1958)에서 백금녀와 함께 주연을 맡아 출연한 기록이 있는데, 고춘자의 경우에는 196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단 한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김화랑 감독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1965)가 그것인데, 여기서 고춘자는 장소팔과 함께 실명 그대로의 만담가로 단역 출연했다. (그림1)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김화랑, 1965)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 컬러사진으로 실린 인물은 안경쓴 서영춘과 김희갑, 그 밑이 구봉서. '쥐’라는 글자 바로 왼쪽이 황정순, 황정순 왼쪽으로 두 번째가 고춘자이다. 다음으로는 백금녀를 벤치마킹하여 등장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이 있다. 가장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것은 오천평(1943- )이었는데, 오천평의 본명은 장정숙으로 오천평이라는 예명 자체가 그의 캐릭터를 대변해주었다. 박영한 작가의 『머나먼 쏭바강』의 한 대목을 보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사들을 위문하러 갔던 위문 공연단의 공연을 보면서 한 병사가 저 기막히게 잘 하는 여자가 누구냐고 질문하자, 바로 오천평이라고 대답하면서 ‘자네는 TV도 안 보나’라고 반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천평은 1970년대 TV에서 ‘기막히게 잘하는’,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유명 연예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오천평은 그 존재감이 TV에서만큼은 크지 않았다. 오천평이 출연했던 첫 영화는 이규웅 감독의 코미디 <치마바람>(1967)이었는데, 여기서 오천평은 주인공 김지미와 계원들이 놀러간 바닷가에서 마주친 여성으로, 서영춘과 함께 ‘역할전도’ 코미디를 선보였다. “밴드! Love Portion Number 9!”이라고 소리치며 무리 안으로 뛰어든 오천평은 서영춘과 말싸움을 하다가 서영춘을 어깨에 둘러메고 바닷물에 내팽개친다. 바닷물에서 정신을 잃은 서영춘을 다시 어깨에 메고 모래사장으로 돌아온 오천평은 서영춘의 배를 누르고, 서영춘의 배에서는 물과 함께 물고기들이 튀어나온다. 만화적 상상력을 보여주며 폭소를 유발하는 이 장면은 백금녀-서영춘 콤비 코미디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천평은 이 영화에서 백금녀의 역할을 이어 받아 서영춘과 대구를 이루는 코미디를 보여주었다. (그림2) <치마바람>(이규웅, 1967)의 한장면. 가운데 하얀 가운 차림의 김지미, 그 오른편 뒤쪽으로 오천평과 서영춘, 그 앞쪽으로 김지미에게 오른팔을 두른 사람이 도금봉이다. 오천평의 영화 속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스틸 사진은 임권택 감독의 1969년 코미디영화 <신세 좀 지자구요>에서인데, 이 스틸사진에 찍힌 오천평의 모습은 실제 영화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림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의 오천평 정면 스틸 사진.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천평 등장하는 장면을 실제 존재하지 않으며, 아마도 편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오천평이 등장했던 영화로는 <공주님의 짝사랑>(최은희, 1967), <가요반세기>(김광수, 1968), <남정임 여군에 가다>(김화랑, 1968), <타잔 한국에 오다>(김화랑, 1971), <삼일천하>(신상옥, 1973), <청춘25시>(이기영, 1973),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 <관광대행진>(이명식) 등이 있는데, <공주님의 짝사랑>에서는 철없는 공주 남정임 때문에 골탕을 먹는 정상궁 역을, <남정임 여군에 가다>에서는 남정임과 함께 입대하여 훈련을 받는 계모임의 일원 역을, <타잔 한국에 오다>에서는 배삼룡을 사랑하는 뚱순이 역을 맡아 웃음을 유발했다. 오천평의 출연작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은 <삼일천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오천평은 궁녀 혁명가 ‘고대수’로 열연하여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한 고대수(오천평)는 괴력을 가진 여성으로 등장하여, 굶주린 평민 남성들을 상대로 거친 액션신을 벌이고 이어 등장한 변수(박노식)에 의해 각성한 뒤 개화당을 도와 혁명을 이끄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이어지는 고문과 탈주, 그 뒤 거리에서 백성들의 돌에 맞아 비장한 최후를 맞게 되는 고대수 역은 오천평의 뛰어난 연기력과 색다른 연기의 지평을 보여줄 수 있는 주요작이다. (그림4)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장면. 굶주린 평민 남성들이 궁중에서 나온 음식들을 버리려는 궁녀 고대수(오천평)에게 덤벼들자 이들을 제압하는 장면. 이후 고대수는 각성하고 혁명에 동참한다. 오천평의 뒤를 잇는 ‘뚱순이’ 캐릭터로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써 나갔던 배우 중 한 사람은 최용순(1946-2000)이었다. 최용순 역시 영화보다 TV에서 더 존재감을 드러냈던 배우였다. 1969년 KBS 탤런트 공채로 시작하여 각종 TV 코미디에서 인기를 모은 최용순은, 이후 브라운관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에 진출한 경우였다.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용순은 탄탄한 연기력과 귀염성 있는 외모로, 결혼과 연애 서사 코미디에서 주, 조연을 맡곤 했다. (그림5)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결혼 후 본가에 온 최용순과 그의 부모. 오천평은 이 영화에서 최용순은 엄마로 등장했다. 사진 중간이 오천평, 오른쪽 최용순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최용순은 <산에 가야 범을 잡지>(이형표, 1969)를 시작으로, <팔도 며느리>(심우섭,1970),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 <너는 여자 나는 남자>(김응천, 1979), <서울은 여자를 좋아해>(남기남, 1987)까지 총 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림6) <팔도며느리>(심우섭, 1970)의 한 장면. 최용순은 김지미, 사미자, 여운계 등과 함께 김희갑의 팔도며느리 중 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맨 왼쪽부터 최용순, 사미자, 김지미 (그림7) <잘했군 좋았군>(고승호) 포스터. 가운데 부분 왼쪽 원안에 파란색 치마 한복을 입은 여성이 최용순이다. 그 중 <나의 인생고백 제2탄>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배삼룡을 주인공으로, 최용순이 상대역을 맡았다. 배삼룡과 최용순을 투 톱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35세의 노총각 배삼룡이 최용순과 결혼한 뒤 벌어지는 여러 가지 소동을 그렸다. 순진한 노총각 배삼룡은 최용순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의 부모와 섣부른 약속을 한 터라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다. 신혼 첫 날 밤부터 왕성한 식욕과 성욕을 과다 노출하는 최용순의 캐릭터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며, 또한 이를 통해 자신의 코미디를 연출한다. 예컨대, 끝없이 음식을 먹는 장면이나 배삼룡에게 억지로 섹스를 강요하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한다. 최용순이 출산으로 인해 집을 비웠던 사이에 배삼룡은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데, 모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순간에 아기를 안고 등장한 최용순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다짐을 늘어놓는다. (그림8) <나의 인생고백 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신혼여행 첫 날 밤의 배삼룡과 최용순. <나의 인생고백>에 등장하는 최용순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과다한 식욕과 성욕의 소유자로 단순화되고 대상화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영화 자체가 남성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신체적 우위를 내세운 최용순의 욕망은 항상 즉각적으로 충족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일방향적이고 일시적인 충족에 불과하다. 배삼룡이 끊임없이 새로운 여성을 욕망하고 최용순을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배삼룡이 진심으로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과 동시에 최용순은 ‘좋은 아내’가 되기를 약속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그들 사이의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아이까지 업은 배삼룡과 군것질을 하면서 지나가는 최용순의 대조적인 모습이 엔딩씬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림9) <나의 인생고백 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신혼 첫날밤부터 식욕과 성욕을 과다노출하는 최용순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이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나의 인생 고백 2탄>은 최용순이라는 인기 TV 코미디언과 당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배삼룡을 스크린으로 불러 왔지만, 최용순의 연기력이나 매력을 전혀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가하면, 배삼룡은 항상적 우울증을 가진 사람처럼 무기력하고 고독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다소 엉뚱하고 바보스러운 ‘비실이’ 캐릭터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이 영화의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영화는 건장한 신체를 가진 여성 코미디언을 활용하는 가장 손쉽운 방식을 택하여,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시켰다. 한국 영화 산업 자체의 위기를 겪게 되는 1970년대를 거치며 코미디영화들은 1960년대 코미디들이 주었던 동일시의 위안이나 전복의 쾌감을 줄 수 없는, 기묘한 웃음의 코드들만 남긴 채 사라져갔다. 그밖에 김희자(1934~ )는 1950년대 후반 HLKZ-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일한 여성 고정출연자였는데, 서영춘과 함께 무대에 올라 빠르게 주고받는 코미디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입담을 자랑했다. 그 역시 1950년대 악극단에서 데뷔하였고 TV코미디로 큰 인기를 누렸다. 김희자는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기록이 있다. <선화공주>(최성관, 1957),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 <관광대행진>(이명식, 제작년도 미상)인데, 세 편 모두에서 주요 배역을 담당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중 김희갑과 함께 출연했던 <선화공주>, <관광대행진>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서는 김희자가 어떤 역을 맡았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며, <우리강산 차차차>의 경우에는 단역으로 출연한 김희자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10)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 맨 오른쪽 김희갑 옆에서 춤추는 이가 김희자, 김희자 옆에는 백금녀가 보인다 . 이순주(1942~ )는 쇼 무대와 라디오의 전문 여성 MC로 활약했으며 주로 TV 코미디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순주는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 <생활의 명랑화>, <팔도노랭이>, <당나귀 무법자>, <타잔 한국에 오다> 등 5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팔도노랭이>는 <팔도강산>의 아류작 중 하나로, 김희갑과 박옥초가 부부로 등장하여 결혼한 일곱 딸들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전반적인 구성이다. 이순주는 코미디 콤비인 송해와 함께 넷째 딸 부부로 등장하여 비교적 비중 있는 역할을 소화했다. <당나귀 무법자>에서는 서영춘과 사랑을 나누는 술집 여성인 단역을 맡았다. (그림11) <팔도노랭이> 포스터. 가운데 김희갑을 중심으로 왼편 위에서부터 세 번째, 구봉서, 서영춘 다음이 이순주, 그 밑이 안인숙. 오른쪽 맨 밑이 백금녀이다. 김희자와 이순주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상대역 여성들이 박옥초와 고춘자에서 김희자와 이순주로, 거의 20살 차이가 나는 젊은 세대로 바뀌는 동안에도 여전히 남성 코미디언들은 취직과 결혼이 지상과제인 ‘청춘’ 주인공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에 주로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은 주로 단역을 맡으며 영화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 초를 마지막으로, 한국영화사에서 코미디영화 제작은 더 이상 호황이 아니었다. 매우 드물게, 이전 작품들의 리메이크가 만들어졌고 심우섭, 이형표 등의 감독들만이 1년에 한 작품 정도로 코미디영화 제작의 맥을 이어가는 형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여성 코미디 배우들의 입지는 또 다시 변화한다. 배연정과 권귀옥이 등장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에 대한 코미디 의존도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를 영화 속에 각인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배연정(1952- )은 1969년 가수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가 1971년 MBC 공채 코미디언 1기로 정식 데뷔하였다. 당시 MBC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던 <웃으면 복이와요>에 김희자의 대타로 출연하였다가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으며, 1973년 TBC로 옮기면서 배일집과 함께 ‘고전유머극장’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 이들은 ‘코미디계의 신성일, 엄앵란’으로 불리며 1970-80년대 TV 코미디의 전성기를 누렸다. 4) 배연정 역시 TV에서의 인기를 업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1970년대 말부터 약 10년간 총 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는 주지하다시피 한국영화의 침체기였고, 특히 코미디영화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 배연정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1960년대 코미디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이었던 심우섭, 이형표가 자신들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들에서 배연정은 코미디영화의 주연배우 혹은 비중 있는 조연배우로 등장했다. 출연작은 <마음 약해서>(심우섭, 1979),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형님먼저 아우먼저>(심우섭, 1980), <청춘을 뜨겁게>(심우섭, 1981),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 <전설철인 키매랑>(은희복, 1989) 등의 7편이다. 이 중에서 배연정을 주연으로 한 <난 모르겠네>는 태권도 유단자인 말괄량이 배연정의 연애와 결혼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였다.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했던 TV 스타 배연정은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청춘 코미디’, 즉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을 맡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배연정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일인 쇼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동양재벌 사장 딸이지만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인 동자(배연정)는 아버지가 정해준 신랑감 후보들을 모두 물리치고 쥐포장수로 변장하고 있었던 병태(장고웅)와 사랑하게 된다. 설정부터 결말까지,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한국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림12)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포스터. 위편 왼쪽에서 태권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바지 입은 여성이 배연정. 이후의 출연작에서 배연정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여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다음 작품이었던 <마음 약해서> 역시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임희춘 등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TV 코미디의 남성 스타들과 배연정, 권귀옥 등의 여성 코미디 스타들을 총 출동시켜 얽히고 설킨 연애담을 보여주는 청춘 코미디였다. 배연정은 까다로운 ‘올드 미스’로, 권귀옥은 결혼상담소 소장 서영춘의 딸이자 ‘조사부장’으로 등장했다. (그림13) <마음약해서>(심우섭, 1973) 포스터 가운데 안경 쓴 구봉서의 얼굴 왼쪽이 임희춘이고, 그 옆에 임희춘과 결혼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배연정이다. 구봉서와 임희춘 바로 밑이 이기동과 권귀옥이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더 좋아>는 김기풍 감독의 동명의 영화(1965년)의 리메이크로, 원작은 여장남자 코미디의 열풍을 불러왔던 서영춘의 출세작이었다. 이 전설적인 영화의 리메이크작이었던 1983년 <여자가 더 좋아>에서 배연정은 여장남자 식모인 장고웅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주인집 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그림 14) 1965년의 전설적인 코미디영화 <여자가 더 좋아>의 리메이크 작인 1983년 <여자가 더 좋아>에서 배연정은 여장남자 식모 장고웅의 잔소리, 장고웅에게 반한 남편 주병진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며느리 역을 맡았다. 권귀옥(1950~ )은 MBC 탤런트 공채2기로 1970년 데뷔한 이후 코미디언으로 전향하여, 1973년부터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기동과 함께 ‘땅딸이와 늘씬 미녀’로 활약했던 권귀옥 역시 TV 코미디로 전국적 인지도를 올리고 난 뒤 영화로 진출한 경우였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는 총 4편으로 <나에게 조건은 없다>(강대선, 1971), <시집갈래요>(이상언, 1974), <마음약해서>(심우섭, 1979), <아리송해>(심우섭, 1979) 등이었다. 이 중 코미디언으로 전향하기 전에 출연했던 <나에게 조건은 없다> 한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편은 코미디영화들인데, 권귀옥은 <아리송해>의 주연을 맡아 이기동과의 콤비 연기를 영화로 옮겨 보여주었다. (그림15) <아리송해>(심우섭, 1979)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 권귀옥. 권귀옥의 트레이드 마크인 표정 연기와 ‘늘씬 미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몸매를 부각시킨 포스터이다. 이 영화는 <초우>(정진우, 1964)의 설정을 빌어와 가정부 정옥(권귀옥)과 운전사 두만(이기동)의 가짜 연애, 그리고 가수로 성공하는 정옥의 성장담을 담았는데 무엇보다 권귀옥의 매력에 기댄 영화였다. 주인집 가족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당당한 ‘식모’ 역할은 당시 영화 속에서 하층계급 여성을 그리는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으며, 권귀옥 코미디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이 영화를 끝으로, 권귀옥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1980년 결혼과 함께 배우 생활을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약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영화에서의 활약상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고춘자, 박옥초와 같은 조연급 출연자들부터 백금녀, 오천평, 최용순과 같이 건장한 신체를 가진 코미디언들이 맡았던 역할들, 이순주, 배연정, 권귀옥 등 미모를 앞세운 코미디언들이 보여줄 수 있었던 코미디의 스타일은 매우 다른 것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코미디의 원천으로 삼아 확실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했고, 그 결과 다양한 스펙트럼의 코미디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한국영화 코미디사에서 이들이 구축했던 캐릭터와 웃음의 방식들은 시대적 한계와 함께 다시 한 번 더 논의되고, 좀 더 기억되어야 한다. 1) Kott hoff, Helga,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Elsevier B.V, 2006, p.12. 2) Inger-Lise Kalviknes Bore, “(Un)funny Women: TV Comedy Audiences and the Gendering of Humour”,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no.13(2), Sage Publications, 2010. 3)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 6.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임인주 옮김, 열린책들, 2007(4쇄), 129쪽. 4) “[문화] 오랜만입니다. 배연정씨가 걸어온 길”, 『문화일보』, 2012. 5. 11.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 특히 민간의 문화영화제작현장에서 40여년을 활동한 감독이다. 드물게 극장 흥행을 한 문화영화를 감독, 제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생소한 용어인 ‘문화영화’ 1)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영화가 제작, 유통되던 시기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영화법을 제정하여 영화를 산업화하고자 하였다. 당시 제정된 영화법을 살펴보면 문화영화를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2) 또한 영화법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문화영화를 상영할 것을 고지하고 있다. 3) 1961년 발족한 국립영화제작소는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영화들을 제작하였으며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부터는 새마을 운동을 홍보하기 위한 영화들을 제작, 유통하였다. 박희준 감독이 문화영화제작 분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를 졸업하고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하면서 부터이다. 박희준 감독은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군에 입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군악대에 배치, 군악병 생활을 하였던 박희준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는 달에 제대를 하였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에 성공, 육군사관생도들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할 당시 앞에 있던 군악대에 있었으며 이 행진을 마지막으로 구술자는 군을 제대하였다. 제대 후에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 김기영 프로덕션에 연구생으로 잠시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당시 공보원에서 실시한 ‘공보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연기자의 꿈을 접고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를 결심하였다. 당시 문공부에서는 대대적인 모집을 하였는데 이는 병역기피자들을 단속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퇴사, 공석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100여명이 응시한 가운데 5명이 선발되었는데 입사 당시 직급은 ‘연예사’였다. 입사 동기로는 다보문화사 대표인 황왕수 씨와 김학수 감독, 박정근 감독 등이 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5명이 최종 합격하였고 이중에서 4명이 감독의 보직을 받았다.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당시 시라큐스에서 파견한 교육인원들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은 이들로부터 연출 등의 강의를 들었다. 국립영화제작소 근무 당시 양종해 감독, 배석인 감독 등 선배 감독들의 조감독 생활을 3년 정도 한 뒤에 1967년 <삼천만의 불침번>부터 직접 감독을 하게 되었다. 박희준이 국립영화제작소 시절 감독한 작품인 <가요잔치>는 당시 유명 가수인 이미자, 김부자 등이 출연한 영화로 농촌 계몽영화의 순회상영 당시 활용되었는데 새마을 영화 등 문화영화 가 너무 경직되었다는 의견이 있어 오락성 있는 영화도 보여주자는 의도에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림 1) 국립영화제작소 출신들의 모임인 문영회 회원들과 2007년 기념 촬영한 사진. 오른쪽부터 임학송, 양종해, 이은덕, 신병운, 최봉암, 이성철, 박희준, 봉상균, 박익, 윤기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행과 함께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기업들은 기업 홍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기업홍보영화의 제작은 주로 문화영화 감독들에게 맡겨졌고 이러한 수요를 바탕으로 민간 문화영화 제작사들이 등장하였다. 대부분이 국립영화제작소 출신의 감독들이 설립하였다. 사진2) 탄광촌에서 촬영한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정암골에 새봄이>(1984)의 촬영현장 사진. 영화는 공장 새마을의 성공사례를 담고 있다. 사진 오른편에 연출 지도를 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박희준 감독 역시 1964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여 민간문화영화제작자,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방송사인 동양방송 CM제작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면서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많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이 방송국으로 이직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박희준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동양방송을 그만두게 되는데 여기에는 광고영화를 낮게 평가하는 당시의 풍토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였다. 동양방송 퇴사 후 민간에서 문화영화 감독으로 활동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장편문화영화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 <극동의 왕자 김일>(1966), <허리케인의 대혈투>(1967), <황금의 이마>(1967)을 제작, 감독하였다. 텔레비전의 보급이 시작되던 시기에 스포츠 중계는 텔레비전 콘텐츠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레슬링의 인기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역도산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대중들에게 김일 선수의 활약상을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 보여주면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4)5) 박희준 감독은 보다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위해 실제 경기를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인기 아나운서의 해설을 덧붙였다. 김일은 프로레슬러 1세대 선수로 1960년대 일명 ‘박치기 왕’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였다. 박희준 감독은 김일 선수의 경기를 시리즈로 제작하여 극장에서 상영하였는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이다. 박희준은 직접 실제 경기를 촬영하고 여기에 보태어 김일 후원회에서 촬영한 영상과 스포츠 전문 사진작가인 장점동 씨의 자료를 첨가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박희준은 판권을 미리 팔지 못해 사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고, 완성된 영화를 지방 흥행업자들에게 보여주고 판권을 팔아 대구의 국제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하였다. 영화의 호응이 좋아 서울의 아세아 극장에서도 상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1편의 흥행으로 이후의 시리즈는 지방흥행업자들에게 판권을 팔아 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3)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그림 4)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대본 표지. 하단에 대명제작사인 신영문화영화사의 이름이 보인다. 김일 시리즈의 2편에 해당하는 <극동의 왕자 김일>은 1편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이 개봉한 해에 제작, 상영되었다. <극동의 왕자 김일>의 포스터를 보면 ‘일본현지촬영’, ‘시네마스코프’ 등의 문구가 보인다. 영화는 일본에서 치러진 김일 선수의 경기 모습을 담고 있지만 열악한 제작 여건 상 박희준이 직접 현지에서 촬영을 하지는 못한 채 김일 선수 측에서 촬영한 분량을 사용하였다. 좀 더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였고 마치 실제 경기를 중계하는 듯한 실감나는 내레이션을 입혀 상영을 하였다고 한다. 그림 5) 김일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극동의 왕자>(1966)의 포스터 ‘시네마스코프’, ‘해설 이광재’, ‘일본현지촬영감행’, ‘2탄’ 등의 문구가 보인다. 김일 시리지의 마지막 편인 <황금의 이마>(1967)는 김일 선수의 세계헤비급 챔피언 쟁탈전을 담고 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경기의 현장감을 최대한 담기 위해 4대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촬영을 하였고 현장음도 마치 동시녹음을 하듯 녹음을 해 후반 작업에 사용하였다.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으며 흥행을 하였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박희준 감독은 <황금의 이마>를 끝으로 김일 선수 영화 제작에 관련된 권리를 다른 문화영화제작업자에게 양도하고 이후 다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복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 복직한 그는 <가요잔치>를 감독하였다. 조금 딱딱한 계몽 영화를 틀어주기에 앞서 관객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위해 오락적인 요소가 가미 된 영화의 제작이 요구되어 만들어진 영화인 <가요잔치>에는 이미자 등 당대의 유명가수 등이 출연하였다.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구비하고 있던 동시녹음 카메라인 미첼 카메라를 사용하였다. 계몽적인 성격이 강한 문화영화만 보아오던 관객들의 호응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경험을 되살려 박희준은 관광과 콩트를 접목한 형식의 영화를 구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문화재 관련 영화 촬영차 전국을 누볐던 그는 관광과 노래, 그리고 콩트가 결합된 문화영화를 만들면 흥미로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박희준은 국세청에서 의뢰한 국세청 홍보영화 <신영균 씨의 하루>를 마지막으로 본격적으로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1971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였다. 퇴사 후 박희준 감독은 1972년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를 시작으로 1973년에는 <노래 실은 금수강산>과 <노래 실은 관광여행>을 1975년에는 <가요대행진>을 제작, 감독하였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는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동기인 김학수 감독이 운영하던 문화영화제작사 삼진영화제작소에서 대명제작을 한 작품이다.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는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1970년대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가요프로그램도 인기가 높았다. 당대 최고의 가수는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들 인기가수들을 조그만 텔레비전 화면이 아닌 커다란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관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기에 보태어 좀 더 다양한 오락거리를 보여주기 위해 콩트를 삽입하였다. 백남봉과 남보원 콤비를 등장시켜 이들이 유명 관광지에서 콩트를 하고 가수가 등장해 노래를 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소양강 처녀>, <금산 아가씨> 등 노래에 등장하는 공간들이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하였고 장소와 장소를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두 명의 코미디언이 등장하여 콩트를 하였다. 그림 6) 김일 시리즈의 3편인 <황금의 이마>(1967)의 검열대본 대본의 크레디트에는 ‘신영영화사 작품’, ‘시네마스코프’, ‘기획 김윤모’, ‘녹음 이재웅’, ‘음악 정윤주’, ‘구성․ 편집 손익동’ 등이 적혀 있다. 그림 7) 국제극장에서 상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만원사례 봉투이다. 그림 8)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던 김일 선수의 챔피언 쟁탈전을 촬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을지극장에 개봉한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았다. 문화영화로는 드물게 극장에서 흥행을 하였지만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남진이 등장하는 장면에 장발이 문제가 되어 검열에서 잘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극장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반인들에게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던 워커힐 쇼 장면 역시 노출이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삭제되는 일도 겪어야 했다. 그림 9)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검열대본 대본을 보면 ‘삼진영화제작소 작품’, ‘칼라 시네마스코프’, ‘후원 한국연예협회, 한국경제일보사’ 등의 문구가 실려 있다. 그림 10)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초대권 을지극장에서 상영을 하였는데 ‘파라마운트 SHOW'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영화 상영 전 쇼를 하였던 당시의 관행을 알 수 있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흥행으로 박희준 감독에게 극영화 연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유림흥업주식회사에서 대명제작한 극영화 <그녀>에는 남진, 하춘화, 신성일 등 당대의 스타들이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아쉽게도 완성되지 못했다. 대명제작에 대해 엄격해지는 영화계 분위기와 문화영화와는 다른 극영화의 제작과정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에 촬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편 극영화 <그녀>는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 시리즈 2편에 대한 제작과 함께 제작비를 투자 받은 것이었고 때문에 장편극영화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그 남은 제작비로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후속편인 2편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림 11) <노래실은 금수강산>(1973)의 촬영현장.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 중인데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73년 제작, 감독한 <노래 실은 관광여행>과 <노래 실은 금수강산>은 아쉽게도 전편의 흥행에 미치지 못하였다. 1편 격인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에 출였던 백남봉, 남보원 콤비의 섭외에 실패하여 서영춘, 남성남 콤비를 등장시켰지만 전편의 인기를 넘어서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영춘, 남성남 콤비의 인기에 힘입어 지방에서 꽤 흥행을 할 수 있었다. 이들 영화에는 한려수도, 부산, 경주, 제주도 등 전국의 유명 관광지가 등장한다. 박희준 감독은 당시 관광 책자에서 장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림 12)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장면. 은방울 자매가 ‘삼천포 아가씨’를 노래하는 장면이다. 카메라 옆에서 연출을 지도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1975년 박희준 감독은 당대의 청년문화의 스타들을 대거 등장시켜 <가요대행진>(1975)을 만들었다. 영화에는 조영남, 김세환, 송창식 등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콩트가 빠진데다가 지방에서 통기타 가수들의 인기는 트로트 가수보다는 덜 대중적인 탓에 영화의 흥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림 13)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 현장. ‘안동 놋다리 밝기’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쇼와 같은 오락, 흥행적 요소를 가진 문화영화를 제작한 문화영화의 흥행감독이다. 문화영화는 주로 계몽, 교육에 목적을 두고 있는데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가요, 콩트, 공연 등 당시의 관객들이 흔히 볼 수 없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문화영화를 제작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스스로 이들 영화들의 흥행이유에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 시리즈는 워커힐 쇼, 당대의 인기 가수, 전국 팔도의 경관 등의 볼거리가 재미의 요소였다고 설명을 하였다. 6) 극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줄 수 없는 시각적인 스펙터클, 가요와 스포츠라는 대중문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새로운 레져로 떠오른 관광 등 이러한 시대적 요소들이 박희준 감독의 작품들이 흥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975년 <가요대행진>을 끝으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의 제작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스포츠와 가요를 극장에서 즐기기 보다는 가정에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후 기업 홍보 영화와 전통문화를 담은 문화 영화의 연출에 주력하였다. 영화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어 본인의 회사를 설립하기 전 까지 박희준은 12년 간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그림 14) 박희준 감독이 한일홍보에 근무하던 시절 사진. 감독 뒤로 마네킹들이 보이는데 한일홍보의 투자사가 마네킹 제조업체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만들었던 영화들로는 부산시청 민원 창구 계몽영화인 <민원서류는 이렇게 처리됩니다>(1975),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어떤 휴일>(1976), 전라북도 산업 및 관광홍보영화 <밝아오는 내 고장>(1977), 농촌새마을 홍보영화 <꿈이 열리는 땅>(1981), 리비아 수출 홍보 영화 <동아콘크리트>(1982), 대구시 홍보 영화 <대구의 향기>(1982) 등이 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영화로는 <돌의 문화>(1984), <한국의 목조 건축>(1985)등이 있다. <한국의 목조 건축>은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에서 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그림 15)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이다. 그림 16)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 그림 17) 1988년 <돌과 한민족>으로 제5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을 수상할 당시의 사진 그림 18) 1985년 <한국의 목조 건축>으로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 한 뒤 영화진흥공사 직원과 환담을 나누는 모습 영화업이 등록제로 바뀌면서 박희준은 희보영상을 설립하여 2008년까지 운영하였다. 제6회 금관상영화제 홍보영화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독립기념관>(1989)을 비롯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함께 열린 세계청소년캠프의 기록영화도 제작하였다. 그림 19) 1988년 열린 서울올림픽 국제청소년 캠프의 기록영상을 촬영할 당시 박희준 그림 20) 1986년 아시안게임 주관 방송사인 KBS와 계약을 하고 아시안게임 기록영상을 제작할 당시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가운데가 박희준. 1970년대 활발하였던 문화영화제작사들은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사라졌다. 박희준 감독은 텔레비전이라는 거대한 미디어의 등장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필름이 사라지면서 필름을 기반으로 하였던 문화영화사들도 사라지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영화가 국가 및 기업의 주요 흥보 미디어로서 기능하던 시기에 민간의 문화영화는 성장하였다. 자연히 문화영화는 국가와 기업의 요구에 맞춰 만들어졌고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박희준 감독은 이러한 환경에서 드물게 극장상영용 문화영화를 만들어 흥행을 하였다. 스포츠, 관광, 쇼 등의 요소를 활용한 볼거리들은 당시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후 텔레비전이라는 강력한 미디어의 등장이 이러한 볼거리에 대한 관객들의 욕망을 담아가기 전까지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시도였다.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의 조금 경직된 경계를 허물고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1) ‘문화영화’란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흥행을 목적으로 공개하는 극영화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논픽션 필름(nonfiction film), 다큐멘터리 필름(documentary film), 기록영화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 이하나, 「정부수립기~1950년대 문화영화와국가정체성」, 역사와 현실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 12, 521쪽. 2) 1962년도에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2조에서는 문화영화와 극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④본법에서 극영화라 함은 배우를 출연시켜 연극화한 영화로서 문화영화 및 뉴우스 영화이외의 영화를 말한다. ⑤본법에서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이와 같은 법령상의 정의는 문화영화를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인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의 정의와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를 국어사전에는 ‘극영화가 아닌 영화를 통틀어 이르는 말. 학술영화, 교육영화, 기록영화 따위가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영일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편영화로 픽션을 곁들인 극영화와 대립되는 의미를 지닌다. 독일어 Kultur film을 직역한 말에서 왔으며 대체로 다큐멘터리영화의 총칭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극영화・뉴스영화를 제외한 모든 비극영화(非劇映畫)의 총칭으로 쓰여 왔다. 그러나 교육영화・계몽영화 등 그 제작 목적에 따라 명칭이 세분화되기 시작한 뒤부터는 점차 문화영화라는 말이 소멸된 감이 있고, 기록영화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역사적으로 문화영화의 효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만든 위생영화(衛生映畫)이며, 독일은 그 뒤 UFA사가 Kultur Film이라는 이름으로 단편의 과학영화를 잇따라 제작하여 문화영화의 전통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기록영화는 1919년 당시의 서울 시가지 풍경을 수록한 <경성 전시(全市)의 경(景)>이다. 문화영화와 기록영화라는 용어는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어 왔는데, 문화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공용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973년 전면개정된 영화법에 보면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경제・문화 등 제 분야에 있어서 교육적・문화적인 효과 또는 사회풍습을 묘사, 설명하기 위하여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따라서 문화영화의 범주에 광고와 만화영화가 포함된 배경에는 이러한 극영화와 비극영화의 구분과 정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3) 1962년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11조 (문화영화동시상영)에는 “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고 고지되어있다. 4) 1965년 3월 9일《경향신문》4면의「연예메모」에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일본 수입 영화인 <역도산>에 대한 안내 기사가 실려 있다. 5) 박희준 감독이 제작 ,감독한 김일에 관련된 영화는 다음과 같다.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박희준, 1966, 신영문화영화제작사), <극동의 왕자, 김일>(박희준, 1966, 민양프로덕션 제작), <허리케인의 대혈투>(박희준, 1967), <황금의 이마>(박희준, 1967, 신영문화영화제작사). 6) 이정아,「박희준·김청기·한호기」,『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한국영상자료원, 2012, 114~152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