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 감독
- 변해운, 강석현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강석현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과거에 가장 의존적이었던 장르는 하이틴 무비와 청춘 영화일 것이다. 모든 건 1970년대에 결정되었고, 1980년대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틴에이저와 청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의 답습 혹은 각색이었다. 여기서 ‘1975년’은 기억할 만하다. 이 해에 얄개 영화가 시작되었고,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이 나왔다. 이후 1980년대는 물론 21세기까지도, ‘스물 즈음’을 다룬 한국영화는 1975년이라는 시간에 정박되어 있었다. 먼저 하이틴 무비를 보자. 조흔파의 소설을 각색하고 안성기 가 주연을 맡은 1965년의 < 얄개전 >( 정승문 )이 있었지만, 얄개(얄미운 개구쟁이)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는 10년 후인 1975년의 < 여고 졸업반 >( 김응천 )이었다. 19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시리즈가 이어졌고, 1977년 석래명 감독의 < 고교 얄개 >(1977)가 나오면서 ‘얄개의 전성시대’가 열렸으며, 1978년에 김응천-문여송-석래명 3인방은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에서 만난다. 1, 2. < 고교 얄개 >와 < 대학 얄개 >( 김응천 , 1982). 얄개 영화의 전통은 1980년대도 지배했다. 3, 4. < 바보들의 행진 >과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 ‘병태’의 청춘 스토리는 지속된다. ‘얄개 영화’는 유신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최고 권력자를 정점으로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시기를, 입시의 중압감과 칙칙한 교복과 ‘교련’으로 상징되는 군대식 학교를, 게다가 남녀 공학마저 없었던 시대를, 한참 꿈 많고 호기심 충만한 틴에이저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얄개 영화는 작은 해방구이자, 참고 견디며 현실에 순응하자는 국책성 메시지였다. 각자의 개성과 고민이 있지만 결국엔 흐뭇한 웃음으로 무마되고, “그렇게 우린 성장한다”는 식의 찡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던 영화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 바보들의 행진 >은 아직까지도 ‘한국 최고의 청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실제 대학생들을 캐스팅 한 이 영화는 당시 캠퍼스 청춘 문화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청춘의 고뇌를 담아내고, 동시에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해 절규한다. 그리고 한 친구는 죽음을, 한 친구는 군 입대를 선택한다. 장발 단속과 통금과 휴교령의 시대에 “한 마리 예쁜 고래를 잡는 것”이 꿈이었던 젊음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이후 청춘 영화의 정전이 된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처럼 청춘들의 모습을 사회적 메시지와 결합시킨 작품도 있었지만, 여전히 ‘털보’ 김응천 감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가 이룬 자가발전은 곧 10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와 20대 초반을 다룬 청춘 영화를 아우르며, 이 장르들 자체의 역사가 된다.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교복 자유화가 이뤄진 1980년대에 얄개 영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이때 김응천 감독은 대학 문화를 얄개 영화 방식으로 접근한다. < 꽃밭에 나비 >(1979)부터 조짐이 보였고, < 모모는 철부지 >(1980) < 달려라 풍선 >(1980) < 내 이름은 마야 >(1981) < 갈채 >(1982) 등을 거쳐 그는 드디어 < 대학 얄개 >(1982)와 < 대학 들개 >(1983) < 대학 괴짜들 >(1984)에 도달한다. 이 영화들의 테마는 꽤 익숙했다.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진실한 우정에 대한 깨달음, 부모의 강요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학교생활의 낭만과 로맨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 김응천 감독의 ‘대학 청춘 영화’들은 여전히 얄개 영화의 세계관 안에 있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캠퍼스로, 교복은 사복으로, 치열한 입시는 머리 싸매는 고시로, 제과점은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 김응천 감독은 1970년대 틴에이저 무비를 개척해 1980년대 청춘 영화로 변형시켰다. 그는 1980년대에 20편의 하이틴 청춘 영화를 만들었다. 2. 이규형 감독은 1980년대 청춘 영화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3. 이장호 감독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1980년대의 포문을 연 이 영화는 < 바보들의 행진 >과는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현실을 다룬다. 4. 전상국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 우상의 눈물 >(1982). 얄개 출신인 진유영 은 이 영화에서 사뭇 다른 톤의 십대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들도 여전했다. 단짝이었던 김정훈 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승현 은 여전히 ‘사고뭉치’ 캐릭터로 이 장르를 이끌었다. 그는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고등학생으로 시작해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과 ‘앙토완 드와넬’ 시리즈의 장 피에르 레오처럼) 한 감독의 영화 안에서 배우가 성장하는 ‘감독-페르소나’ 관계였던 셈이다. “흥, 절교야!”라며 홱 토라질 때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깍쟁이 강주희 , 완력을 앞세우던 ‘마초 고교생’ 진유영 , 어눌하면서도 인간적이며 낙관적인 의리파 손창호 ,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김보연 ,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활동파 전영록 , 동안의 감성파였던 전호진 과 박재호 (이후 < 내일로 흐르는 강 >(1996)으로 감독 데뷔), 얄밉게 고자질하던 강남길 …. 그들은 여전히 얄개 시절의 캐릭터를 지닌 채 대학생이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덕화 는 < 대학 얄개 >에 ‘얄개 1기 선배님’으로 불리며 등장하기도 했다(단 20대에 접어든 임예진 은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이 대열에서 이탈한다). 인력 충원도 있었다. 송승환 김주승 강문영 이미영 조용원 등이 ‘포스트 얄개’ 시대의 청춘스타가 되었고, 이미숙 이나 원미경 도 이 장르에 적잖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할 사랑은 가수들의 진출이었다. 전영록 의 사례가 있긴 했지만, 1980년대엔 가요계와 영화계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두드러졌고, 청춘 영화 장르는 그 격전지였다. 일단 당대 최고 인기 밴드였던 송골매가 있다. 처음엔 카메오처럼 등장하더니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와 < 대학 괴짜들 >에 이르면 배철수 와 구창모 는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숨은 강자는 김형용 이었다. ‘김형용과 톱니바퀴’의 리더로 ‘해변가요제’ 출신인 그는 당대는 희귀한 미소년 스타일로 어필했다.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의 김수철 , < 졸업 여행 >( 오성환 , 1985)의 김범용 도 가세했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의 전환점(사실 하강점)이 되는 영화는 이상아 와 하희라 주연의 < 말괄량이 대행진 >(1986)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고교 시절로 돌아가며, 다음 해 < 얄숙이들의 개성 시대 >(1987)를 이어간다. 이런 회춘이 가능했던 건, 새로운 스타덤의 등장 덕분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하희라 이상아 김혜수 김희애 이응경 최수지 이미연 , 그리고 강석현 이재학 민규 최재성 최민수 허준호 박중훈 김민종 김보성 김세준 등은 좀 더 화려한 아이돌 스타덤을 이루었다(1980년대에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은 기존의 청춘스타를 조연으로 기용하고, 신진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나름의 ‘절충’을 이룬다. 1. 김응천 감독의 < 대학 들개 >(1983). 전영록 과 이승현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얄개로 활동했다. 2. < 스물한 살의 비망록 >( 김응천 , 1983)의 송승환 과 강문영 . 1980년대 초에 새롭게 등장한 청춘 배우. 3.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의 김형용 . 가수이자 배우로 1980년대 초 청춘 영화를 잠시 이끌었다. 4. < 대학 괴짜들 >의 배철수 . 그가 속했던 밴드 ‘송골매’는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청춘스타 중 하나였다. 스타 지형도만 변한 게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틴에이저 무비는 1970년대의 영향권을 벗어나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 김응천 의 세계관’을 벗어나기 시작한 십 대의 이야기는 훨씬 더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당시로선 충무로에서 정말 드물었던 ‘20대 여성 감독’ 이미례 의 데뷔작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1984)이었다. 호즈미 다카노부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10대들이 더 이상 얄개 영화의 해피 엔드에 갇혀 있을 순 없다고 말한다. 폭력적 사회와 무관심한 가정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지닌 16세 소녀 유리( 김진아 )는 갈 길을 잃고 저항한다. 1985년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 차현재 , 1986)은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나쁜 영화 >( 장선우 , 1997)의 선배격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비디오 다방, 술집, 대학로, 만화가게, 성인 오락실, 나이트클럽, 여관 등을 휘저으며 단속에 걸린 10대들을 경찰 보호실로 내몬다.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소외당한 아이들의 외침을 들려준다. 이런 시도들은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1989)를 통해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다. 1990년대 초 기획영화의 포문을 여는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이 영화의 기획을 맡았는데, 그는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취재를 바탕으로 김성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배치함으로써 얄개 영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는 당시 아이들이 실제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이후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김성홍 , 1990)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 이미례 , 1990)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조금환 , 1990) <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강우석, 1991) < 인생이 뭐 객관식 시험인가요 >( 강구연 , 1992) 등 ‘긴 제목 영화’들이 쏟아진다. 다소 나이브한 태도는 있지만, 이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던 영화들이었다. 리얼리즘에 좀 더 기운 영화들도 있었다.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 황규덕 , 1990)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와는 다른 방식으로 입시 지옥을 보여주는데, 담임 교사( 문성근 ) 캐릭터를 통해 ‘참교육’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변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움직임과 맞물리는 부분으로, 1989년에 ‘전교조’를 계기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그 문제의식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 닫힌 교문을 열며 >( 이재구 최호 김숙 김건 강경환 황길재 , 1990)는 바로 전교조 문제를 담아낸 첫 영화였다. 1. < 방황하는 별들 >의 이상아 . 이상아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새로운 아이돌 스타덤의 기수였다. 2. < 캠퍼스 연애특강 >( 조금환 , 1988)의 강석현 하희라 민규 . 3.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의 김진아 . 4.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은 다큐멘터리, 극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실험적 작품이었다. 틴에이저 무비 계열에서 ‘현실’이라는 화두가 떠오르며 얄개 영화와의 결별이 서서히 이뤄졌다면, 청춘 영화 계열에서도 작은 변화는 있었다. 이 시기 조금씩 시도되던 청춘 로드 무비가 그렇다. < 바보들의 행진 >의 병태( 윤문섭 )가 꿈을 찾아 떠나듯, < 고래사냥 > < 열아홉 살의 가을 >( 김응천 , 1984) < 가슴을 펴라 >( 최원영 , 1987) < 굿모닝! 대통령 >( 이규형 , 1989) 등의 그들도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 내일은 뭐 할 거니 >( 이봉원 , 1984) 같은 실험적 영화도 등장했다. 1960년 4.19 때 도주 중이던 대학생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B( 강석현 )은 대학생이 된 1980년대에 마치 사회 부적응자처럼 방황한다. 아마도 < 바보 선언 >( 이장호 , 1984)과 함께 가장 파격적인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1980년대 영화로 기억될 <내일은 뭐 할 거니>는 당시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메타포였다. 새로운 흐름을 만든 사람은 이규형 감독이었다.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1987)가 흥행작이지만, 먼저 그가 20대 때 만든 데뷔작 < 청 블루 스케치 >(1986)를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는 당시로선 드물게 ‘청춘 비가’ 스타일의 영화였으며, 이야기보다는 모던한 공간 감각과 비주얼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곽재용 , 1990)나 < 비트 >( 김성수 , 1997)의 장르적 근원을 더듬다 보면 <청 블루 스케치>를 만날 수 있는데, 로맨스와 범죄 세계의 폭력과 비극적 서사 장치를 결합한 청춘 영화는 1980년대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밋밋한 흥행(서울 관객 약 4만 명) 이후 이규형 감독은 ‘얄개의 세계’에 더 접근했고,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로 서울 관객 약 26만 명을 동원한다. 대학 초년생인 영문과 미미( 강수연 )와 신방과 철수( 박중훈 )의 연애담인 이 영화는, 미래지향적 분위기와 젊은 날의 고뇌를 동시에 담았고, 이규형 감독은 청춘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이 영화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또 한 명은 배우 박중훈이었다. 그는 < 이장호 의 외인구단 >(1986)으로 상한가를 치던 최재성과 투 톱을 이뤄 <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1988)와 < 내 사랑 동키호테 >(1989)를 이끈다. 메가폰의 주인은 얄개 영화의 장인이었던 석래명 감독. 그런데 두 영화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두 편 모두 젊음과 사랑과 도전과 우정을 다루지만, <내 사랑 동키호테>는 당시 입시 현실을 다루던 하이틴 영화와 접점을 지닌다. 두 주인공이 개발한 ‘쿨쿨 머신’은 수면 중에도 뇌파 조작을 위해 학습을 할 수 있는 기계. 이것은 당시 밤낮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입시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십 대의 현실에 대한 풍자였다. 이처럼 1980년대 말에 오면, 이 장르 안의 그 어떤 영화도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 1.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는 하이틴 영화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영화다. 2.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는 ‘참교육’을 이야기한다. 3. < 내일은 뭐 할 거니 >는 실험적 스타일 속에서 억압적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4.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는 1980년대에 가장 흥행한 청춘 영화이다. 1970년대 얄개 영화와 청춘 영화는 1980년대 시기 변형을 겪은 후 1990년대에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았다. < 숲속의 방 >( 오병철 , 1992)이나 < 세 친구 >( 임순례 , 1996) 등이 ‘현실’이라는 프리즘으로 방금 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의 삶을 바라본다면, < 정글 스토리 >( 김홍준 , 1996)처럼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가는 청춘의 이야기가 있었다. < 비트 > < 태양은 없다 >( 김성수 , 1999) < 질주 >( 이상인, 1999) 등은 ‘도시 청춘’을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결합시켰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말에 나타난 장르화 현상이었는데, 남녀의 성이 바뀌는 판타지 < 체인지 >( 이진석 , 1997), 아이돌 문화나 밴드 콘셉트와 결합했던 음악 영화들인 < 세븐틴 >( 정병각 , 1998)과 < 짱 >( 양윤호 , 1998) 그리고 호러 장르를 부활시킨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등이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1980년대 하이틴 청춘 영화는,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전통은 수정되었고, 관습은 변주되었으며, 배우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젊음의 테마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른 2000년 이후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다면 얄개 영화의 전통은? 거의 희석되었고, <학교> 시리즈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졌다.
한국영화는 탄생하는 순간부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미 군정기를 거쳐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검열의 역사는 한국영화의 역사와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검열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시작되는 사전검열과, 완성된 영화가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자르며 필름을 훼손했던, 가위손이 횡행한 70년대의 유신과 80년대 전두환 정권시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검열사건은 김수용 감독의 1986년 작품 < 허튼소리 > 사태다. 감독 스스로 은퇴를 선언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하지만 정권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사회성을 표방한 많은 영화들이 가위손의 희생양이 되어 언론을 오르내렸다. 이봉원 감독의 1987년 개봉작 < 내일은 뭐 할거니 > 역시 이즈음 검열로 인해 곤욕을 치른 대표적인 영화 중의 한편이다. 사회를 풍자하는 대사가 몇 군데 잘려나간 이 영화는 몇 달 후에 재심을 통해 원본으로 상영이 가능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미 흥행에 크게 실패한 이후였던 터라 더 이상의 화제를 모으지는 못했다. 더불어 기술적으로도 매끈함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럼에도 <내일은 뭐 할거니>는 당시의 일반적인 영화와 비교해 새로운 면이 눈에 띄는 영화다. 충무로라 불리던 제도권의 많은 영화들이 여전히 순결과 전근대적인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성의 육체를 선정적으로 다루는 것이 흥행의 제1조건이라 착각하며 진부한 드라마를 반복하고 있을 때, 지하철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만나게 된 남녀 대학생의 한나절만으로 영화를 완성한다. 이봉원 감독은 과장된 기승전결로 관객의 감정을 억지로 증폭시키는 대신, 단순한 공간의 활용과 남녀 대학생의 일상적인 대사 그리고 회상만으로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나름대로 문제 제기를 하면서, 미니멀리즘적인 시도를 통해 스타일 적으로도 차별화를 꾀하고자 했던 것 같다. < 내일은 뭐 할거니 >는 낡은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거리를 이리저리 걷고 있는 다리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청바지와 운동화가 청춘의 상징이라면 이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방황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단지 남자애( 강석현 ), 여자애( 정다희 )로만 등장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일반적인 대학생들을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 내일은 뭐 할거니 >는 남자애의 방황 원인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가를 찾아가는 영화다. 아버지가 부재한 남자애는 청소년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궁금해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와 아들의 나이가 비슷해졌을 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 시절 어머니는 창녀였고, 4.19에 참여하고 쫓기고 있던 아버지와 하룻밤을 보낸 후 자신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머니는 “더러운 반쪽은 잊고 고결한 반쪽을 찾으라”고 한다. 그 반쪽은 바로 아버지로 상징되는 4.19에 참여했던 세대. 그러므로 남자애의 방황은 80년대 당시 복권되지 못하고 있던 4.19라는 잃어버린 역사를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이 호감을 사랑의 관계로 연결하지 못한 채 엇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신과 전두환 정권에 의해 4.19 민주화 운동이 여전히 훼손당한 채 폭동으로 매도되고 있는 이 땅은 젊은이의 사랑이 꽃피기에는 너무 척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자애는 여자애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만 둘은 엇갈리고 만다. 여자애는 그 남자애가 타고 떠나는 전철을 바라보며 “바보”, “멍청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내일은 뭐 할 거니?”라고 외치며 영화는 끝난다. 그 외침을 남자애는 듣지 못할 것이다. 남자애가 내일도 여전히 거리를 방황할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꿈꿀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매모호한 결말의 괴로움. < 내일은 뭐 할거니 >는 굵직한 주제의 진중함이 느껴지지만, 관객에게 강한 임팩트를 주는 것에는 실패한 영화다. 어쩌면 이봉원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 많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극 중 영화촬영 시퀀스는 감독의 초조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장면이 극의 흐름이나 주제와 어울리지 않게 삽입되어 있는 것은 바로 즉 영화 속 영화의 여배우가 하는 말, “영화를 보시는 분들에게 그 뜻이 잘 전달될 수 있을까”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영화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영화 곳곳에 흔적이 남는다. 남자애에게 할당된 무거운 주제가 관객을 지루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여자애는 지나치게 단순하게 활용함으로써 인형 이상이 되지 못했다. 여자애가 남자애의 방황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많이 아쉽다. 만약 여자애가 남자애의 방황을 이해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 과정에 동참하게 되었을 것이고, 감독의 의도는 좀 더 쉽게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더불어 이 영화에 직접적으로 4.19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지독한 검열로 감독들의 창의성을 억압하던 그 시절. 감독들은 문제가 될 만한 장면은 스스로 피해간다는 자조적인 소리를 내뱉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상징적으로 처리한 4.19장면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영화는 그저 할 일 없는 청춘의 하루를 그리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봉원 감독은 너무 생각을 많이 했거나 계산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 내일은 뭐 할거니 >는 가장 대중적인 장르의 하나였던 청춘영화를 경유해 사회의 모순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시도가 좋은 영화다. 또한 그 시절의 그렇고 그런 지난한 영화들 속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고민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모호함 속에서도 내일은 멋진 일을 하겠다는 남자애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강석현 정다희 감독 이봉원 각본 이현화 촬영 서웅 1987년 90분 칼라 판매원 (주)동양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0213
오랜 친교를 해온 내가 본 조 감독은 깔끔한 신사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늘 자상하고 이타행의 모범을 보여주며, 지금까지의 영화작업을 천직으로 살아온 멋쟁이이다. 자신의 작품을 과대포장이나 과시하지도 않는 영화라는 화려함 속의 고고한 청자와 같은 분이다. 음력 1935년 11월 5일생으로 제물포고, 건국대학교 정외과에서 수학한 조 감독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 침향 』의 김수용 ,『 애 』의 이두용 감독과 더불어 분단의 아픔을 그린 신작 『 만날 때까지 』로 원로감독으로 융숭한 대접(?)과 칭송을 받았다. 급변하는 영화환경 속에서도 투철한 작가정신과 창작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그는 『만날 때 까지』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임권택 감독이 타인의 시나리오로 작품의 완성도를 가늠하고 있을 때 조문진은 시나리오 창작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70여 편의 시나리오, 다수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그의 작품들은 약 45편에 이른다. 이중 일부는 보관되어 있고 이미 필름의 존재조차 모르는 작품들도 있다. 제1회 도쿄 국제영화제는 12편의 초청작 중 하나로 그의 『 언제나 타인 』을 선정했다. 이작품은 비경쟁부문에서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로 선정되었다. 이미 제6회 대종상에서 각본상을, 김지미 · 김희라 가 신인상을 탄 동년, 『 언제나 타인 』으로 제6회 백상예술상 감독상에 빛나는 그는 충무로 도제 시스템의 전형적인 본보기로 기록된다. 『 장군의 수염 』으로 유명한 이성구 감독 밑에서 2년, 김수용 감독 밑에서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조연출 생활을 한, 조 감독은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들 1969년 딸의 留學病을 모티프로 한 『 포옹 』으로 데뷔, 69년에만 『 젊은 여인들 』,『 새색시 』,『 명동나그네 』,『 죽어도 그대 품에 』,『 여자의 모든 것 』,『 언제나 타인 』,『 남편 』을 내놓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후 70년에 『 분노 』,『 여자이기 때문에 』,『 약속은 없었지만 』, 71년에 『 말썽 난 총각 』,『 내 아들아 』,『 속 두아들 』,『 내 아내여 』,『 두 딸의 어머니 』,『 처복 』,『 지금은 남이지만 』의 소프트 멜로, 가족과 가정의 이면을 묘사하는 전형을 고수하고 있었다. 김수용 감독 밑에서 20여 편의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임해온 그는 주로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영화연출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화창작 관습은 영화 스승인 김수용 감독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그가 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회귀』가 당선된 것도 김수용 감독의 영화감독으로서 문학성 강조의 탓도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은 신분상승을 꿈꾸며 여성을 유린하는 멜로 드라마 『 언제나 타인 』(20회 에딘버러영화제에 출품), 판이한 생활공간을 가진 두 형제의 이해공간을 그린『 두 아들 』,1920년대 충남 양반 가문의 비극을 그린 시대물 『古家』를 들 수 있다. 그는 곽지균 같은 감독을 대표적 조감독으로 두면서 그의 감정선을 전수하고 있었다. 이외에 심재석 , 한덕규 , 김수형 , 양병간은 그와 작업을 같이한 조감독들이다. 그가 꿈 꾸어온 영화들은 데뷔작 『 포옹 』에서 보여주는 명쾌함이나, 빌리 와일더의 『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 챨리 채프린의 일련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태풍자와 인간 가치를 따스한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현역감독 중 40편이 넘게 자신의 창작 시나리오로 연출한 감독은 한국영화사에 거의 없다. 그만큼 문학성을 앞세우는 그가 작가다운 작가로 부상한 영화는 『 만날 때 까지 』이다. 당시의 영화제작 현실이 어떠했건 조감독이 비난 받을 부분도 여러 면에 걸쳐있다. 그의 멜로, 반공, 문예, 시대, 청소년물등은 1)한국적 멜로드라마나 코미디 등의 장르 발전에 역동적·예술적 접근으로 기여하지 못한 점 2)작가주의영화를 표방했지만 실험성이나 부문별 심층연구에 심혈을 기울이지 못한 점 3)도제 시스템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점 4)가족이나 가정의 진보적 풍경이나 비전을 과감하게 보여주지 못한 점등은 지적 받을 부분이다. 로버트 알트만 이나 조지 쿠커의 실험성이나 오손 웰스의 탐구정신, 데이비드 린의 클래시칼한 분위기를 제쳐두고 한국 영화의 생산에 몰두한 결과는 대부분의 충무로 감독들의 경우처럼 결국 후회스러운 부분으로 나타났다. 당시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작업 보다는 호구지책으로 영화를 방편으로 삼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작, 단기제작, 여러 장르 섭렵은 영화창작의 밀도를 떨어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전성기가 불경기로 크로스 오버되는 70년대의 감독은 작가정신의 고매함이나 영화의 예술성을 고려할 시·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검열의 공포는 단순한 소재를 요구하게되었고 결국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고리를 갖고 있었다 . 이런 가운데 생산된『 무릎꿇고 빌련다 ,72』『 엄마결혼식 ,73』『 신설 ,74』『 호기심 ,74』『 올챙이 구애작전 ,74』『 황홀 ,74, 김승옥 의 『무진 기행』을 영화화한 작품』『 어린 시절 ,74』『 빗속의 여인들 ,76』『 고가 ,77』『 슬픔은 파도를 넘을 때 ,7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78』『 과부 ,78』『 학을 그리는 여인 ,79』『 황토기 ,79』『 두 아들 ,81』『 내일 있는 청춘 ,82』『 설마가 사람잡네 ,85』『 젊은 밤 후회 없다 』는 암울한 시대의 음영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90년대 들어 탄생한 『 아들과 연인 ,92』과 『 만날 때까지 ,99』는 비교적 안정되고 여유가 있는 가운데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환경 탓에 영화감독협회장과 공륜심의위원을 거친 그가 부르짖는 말은 영원한 현역이다. 『아들과 연인』은 사돈이 될 부모님들이 애인인 경우를 설정한 것이고,『만날 때 까지』는 북에서 휴전선을 넘어 온 기억 상실 청년을 자식으로 생각하는 아버지 후보와의 재회를 그린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서 활약했던 배우들을 작품 제작 순으로 살펴보면 신성일 , 윤정희 , 김창숙 , 고은아 , 신영균 , 전양자 , 남정임 , 김희갑 , 남궁 원 , 김동원 , 한은진 , 박암 , 이낙훈 , 김순철 , 박노식 , 문 희 , 최남현 , 김진규 , 강부자 , 송 해 , 전계현 , 노주현 , 황정순 , 최무룡 , 문정숙 . 하명중 , 태현실 , 장동휘 , 김희라 , 신일룡 , 방희 , 홍성우 , 신 구 , 김추련 , 한인수 , 윤미라 , 황 해 , 도금봉 , 김상순 , 윤일봉 , 이대근 , 정혜선 , 민지환 , 선우용녀 , 조미령 , 현 석 , 이덕화 , 안소영 , 선우 일란 , 하재영 , 윤양하 , 나영희 , 강석현 , 이상아 , 김혜선 , 이재룡 , 박근형 , 조용원 , 양택조 , 김인문 등 화려한 스타 군과 만날 수 있다. 영원한 현역 감독,조감독이 있는 한 우리는 영화계의 또 다른 중심 축을 갖고 있는 셈이다. 가족과 인간, 고향이 살아 숨쉬는 인간미 넘치는 차기 작품을 기다려 본다. 장석용 (영화평론가, 중앙대강사) / 2002년 <프로필> 1935년 11월 5일 인천 출생 1967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회귀'로 당선 1970 < 포옹 > 각본, 감독으로 감독 데뷔 1971 < 언제나 타인 > 동경 제1회 국제영화제 입선 공개 상영 1988 영화감독협회 회장 1989 미국영화직배 반대 투쟁위원장 1991 공연윤리위원회 영화심의위원 1994 청주대학교 강사 1996 영상작가교육원 강사] 1998 영상등급물 위원회 영화심의위원 작품명 1970 포옹 / 남편 / 분노 / 여자이기 때문에 / 약속은 없었지만 1971 말썽난 총각 / 두아들(속) / 내 아내여 / 처복 / 지금은 남이지만 1972 무릎꿇고 빌련다 1973 엄마결혼식 1974 신설 / 호기심 / 올챙이구애작전 / 황홀 / 어린시절 1976 빗속의 여인들 1977 고가 1978 슬픔은 파도를 넘을 때 /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 과부 1979 학을 그리는 여인 1981 두 아들 1982 내일있는 청춘 1985 설마가 사람잡네 1986 젊은밤 후회없다 1992 아들과 연인 1999 만날 때까지 등 47편 시나리오 100여 편, 소설집 '조문진 단편소설집', '재벌의 문' '조문진 시나리오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