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제왕풀이
- 감독
- 강소연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문창준, 최고은, 최원
한국영화의 전설로만 내려오는 1955년의 <춘향전>(이규환)에서 이몽룡 역을 맡아 불시에 ‘영화계의 귀공자’로 떠오르며 장안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이민은 1950년대 또 다른 흥행작 <자유부인>(한형모)과 홍성기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미국화’된 한국 청년의 표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미국문화의 홍수 속에서 한국영화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며 이는 영화의 스타일이나 배우들의 이미지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민은 특히 미국식 스타일과 미국문화를 전달하는 ‘스타’로 상징되었다. 그렇다면 할리우드 영화가 범람하던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 속에서 이민이 어떠한 과정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문화’를 보여주는 스타 이미지를 획득하게 되었는지 구술 1) 과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림1) <춘향전>(이규환, 1955)의 홍보용 스틸, 이몽룡 역의 이민과 성춘향 역의 조미령 영화 스타 이민의 탄생 192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이민(본명 이시중)은 영화 속 이미지를 통해 얻은 ‘귀공자’라는 호칭이 무색하리만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삯바느질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 앞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며 울며 보채던 어린 소년은 중학교에 입학한 후 대학진학을 위해 장기간의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상급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하여 “꼬박 3년 동안 광고 철판을 모아 팔아” 어렵게 여비를 마련한 그는 1940년 스무 살의 나이에 “무릎 기운 옷을 입은 거지꼴”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명문’ 우라와(浦和)고등학교의 입학시험에 강원도 산골 청년이 합격한 ‘사건’은 급기야는 신문 기사화되어 조선의 유지들로부터 집 한 채 값에 버금가는 장학금을 지원 받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숙환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교 예과를 거쳐 당시 졸업 후 가장 전망이 좋다는 광산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어느 날 길거리에서 강춘 감독의 눈에 띠면서 평탄할 줄만 알았던 미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강춘 감독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16밀리 영화인 <불멸의 밀사>(김영순, 1947)와 <연화>(강춘, 1949)에 출연하며 영화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한두 번의 외유로 그칠 줄 알았던 영화 일은 전쟁 때문에 지속되었다. 엘리트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영화계의 그 누구보다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던 그는 한국전쟁 시기 피난지의 영화인들에게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며 필연적으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어나갔다. 영화 현장에서 도움이 되었던 서울대 출신이라는 타이틀과 배경은 활동하는 내내 그가 맡은 배역과 스타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2) <불멸의 밀사>(김영순, 1947) 신문광고 (그림 3) <연화>(강춘, 1949) 신문광고 한국전쟁 시기 그는 전장에서는 군영화 <화랑도>(강춘, 1951)의 주연을 맡았으며, 영화인들의 새로운 아지트가 되었던 피난지 대구에서는 환도 후 같이 작업을 하게 되는 전택이, 노경희 부부와 홍성기, 한형모 감독뿐만 아니라 평생 잊지 못할 가르침을 준 스승 이규환 감독을 만났다. <춘향전>(이규환, 1955)의 이몽룡 역을 맡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이때의 인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구술에서 그는 전쟁시기의 경험으로 <화랑도>의 촬영을 맡은 이학순에게는 미군부대 PX를 통해 현상 재료를 조달한 것을, <춘향전>의 감독 이규환에게는 대구 은성다방에서 차 대접을 한 것을 에피소드로 풀어놓기도 했다. (그림4) <화랑도>(강춘, 1951)의 신문광고 전쟁 후 제작된 <춘향전>의 대구 촬영현장에서도 본의 아니게 인맥을 총동원해 현장에 도움을 주었다. 산 속에서 진행된 촬영현장에 조명기를 설치하기 위해 이민은 광산학과의 인맥을 동원해 인근의 달성광산에서 전신주 17개를 설치해 전기를 조달했다. 그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촬영을 못했을 수도 있었던 이 일화에 대해 “망신은 당했지만 무사히 촬영을 마쳐 흥행으로까지 이어져 다행”인 일로 회고했다. 얼결에 발 디딘 당시의 한국영화계는 이렇듯 그가 배우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림5) <춘향전>(이규환, 1955)의 경복궁 촬영 스틸, 방자 역의 전택이와 이도령 역의 이민 (그림6) 연출 중인 이규환 감독(가운데)과 전택이(좌), 유현목 조감독(우) 한편 춘향 역의 조미령을 비롯해 변사또 역의 이금룡, 방자 역의 전택이, 향단 역의 노경희 등 <춘향전>에 함께 출연한 대부분의 배우들은 식민지시기부터 영화와 무대에서 숙련된 연기를 보여준 노련한 연기자들이었다. 때문에 무대 경험도, 35밀리 영화 출연의 경험도 없던 그는 모든 역할의 대사를 철저하게 암기하고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촬영에 임했다. <춘향전>의 경험은 이후 카메라가 ‘타르르륵’ 돌아가면 극중의 인물이 될 수 있는 연기습관을 몸에 배게 하고, 영화와 연기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은 기존의 관중을 끌어들이던 무대극들을 쓰러뜨리고, “귀신이 붙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영화의 붐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민 개인에게도 영화배우라는 정체성을 깨우치게 한 중요한 작품이 된 것이다. (그림 7) <춘향전>의 대구 촬영 현장 스틸, 이민(맨 뒷줄 왼쪽), 조미령, 석금성, 이금룡, 이규환 감독(위에서부터 셋째 줄 가운데)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춘향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그는 또 한편의 성공작인 <자유부인>(한형모)에 출연했다. <춘향전>에 이은 <자유부인>의 흥행 성공, 무대예술의 쇠퇴 등에 힘입어 한국영화산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손>(1954)부터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운 한형모 감독은 당대 한국사회의 세태를 풍자한 이야기에 할리우드 스타일을 매치해 ‘양화’와 경쟁할 수 있는 ‘방화’를 탄생시켰다. 당시 파격적인 신인의 기용(김정림)과 더불어 화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전 해 폭발적인 흥행으로 한국영화의 재건을 알렸던 <춘향전>에서 이몽룡으로 분했던 배우 이민을 주인공 김정림에 춤바람을 불어넣는 대학생 춘호 역으로 캐스팅 한 것이었다. (그림 8)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주인공 오선영(김정림)에게 춘호(이민)가 춤을 가르치는 장면 유려한 춤 솜씨를 자랑하는 “이민이 아니면 안 될 영화”였다는 이야기는 “학생 시절 책으로 배운 춤과 전쟁 시기 대구의 미군부대와 공군 댄스홀에서 춤을 춰봤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춘향전>의 이몽룡으로 쌓아올린 이미지에 손상이 날 법 한데도 화려한 춤 실력을 뽐내며 유부녀를 유혹하는 건들건들한 바람둥이 청년의 역할을 맡은 것은 아마도 주연 배우보다 높게 책정된 출연료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역할에 대한 도전의식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문화가 대중의 일상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던 전쟁 후 한국사회의 모습을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풍자한 <자유부인>에서 대학생 춘호는 특히나 미국문화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젊은이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춘호 역에 이몽룡을 맡았던 이민이 캐스팅된 것에 세간의 비판과 비난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기 변신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자유부인>의 춘호는 이민의 프로필에서 <춘향전>의 이몽룡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역할로 남게 되었다. 또한 이 역할 이후 이민은 미국화된 한국 청년의 전형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미국과 미국문화를 상징하고 동경하게끔 하는 스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림 9) <자유부인>의 댄스홀 장면의 현장 스틸, 뒷줄 가운데 이민, 아랫줄 왼쪽부터 김동원, 김정림, 한형모 감독, 한 사람 건너 노경희, 안나영. 이민은 구술을 통해 사진에서 보이는 크레인을 댄스홀 장면을 위해 제작했다고 증언했다. 미국영화의 공세와 영화 스타 시대의 도래 1950년대 할리우드영화를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의 공세는 한국영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전쟁 전에 비해 한국 내 개봉 시차가 줄어들고 시네마스코프 영화가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영화의 인기는 더욱 더 높아져갔다. 여기에 미국에서 들어온 소비재 또한 미국영화의 인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선망의 대상이자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꿈으로 남아있는 미국적 생활양식과 소비는 미국영화에 등장하는 스타의 모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모방은 원용진의 표현처럼 “영어로 말하기, 다방에서 커피 마시기, 할리우드 영화 보기 등은 단순히 언어, 물질,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이름표 역할을 했” 2) 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방을 가능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잡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문화 열풍”으로 영화잡지뿐만 아니라 여성지에도 영화소개와 더불어 미국 여배우의 이미지, 사생활, 섹슈얼리티 등이 전시되고 상품화 되었다. 3) 이러한 모방 혹은 “이름표 역할”은 할리우드영화와 경쟁해야만 하는 한국영화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다. 1950년대 제작 편수가 많지 않은 한국영화에서 배우를 스타로서 ‘추대’해주는 방식이 할리우드 스타의 모방이었고 이는 주로 잡지의 화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영화잡지에서 배우를 지칭하는 방식은 “한국의 ◯◯◯”였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김지미”, “한국의 잉그릿드 버그만=최은희”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모방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한국배우의 이미지를 상승시키는 데 있어서 유용했을 것이다. (그림10) 『스크린』 1957년 2월호의 표지모델을 장식한 최은희 (그림11) 『현대영화』 1958년 1월호의 표지모델을 장식한 조미령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영화와 차별화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행계의 재편으로 무대 출신의 스타 배우들이 급격히 영화로 이동한 것은 한국영화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기력과 스타성이 담보되는 배우들의 합류는 지방흥행업자들의 투자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영화 제작 상황에서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국산영화 면세 조치’가 영화를 흥행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매체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에 수반되는 배우들의 유입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급속한 성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춘향전>과 <자유부인>으로 한국영화가 흥행 경쟁력을 인정받은 1950년대 중후반은 바야흐로 배우가 흥행 시장에서 중요한 카드로 기능하는 ‘영화 스타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무대 출신의 배우들은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과 숙련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영화에서 각자의 이미지에 맞는 연기 스타일을 빠른 속도로 구축해나갔다. 스타 이미지는 1950~1960년대 내내 겹치기 출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한국영화산업 내 인적 규모에 대비해 대량의 영화가 제작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대 출신이 아닌 영화로 데뷔한 배우들 역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연기 경험과 수련의 부족으로 이들은 시대물보다는 주로 현대물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전적인 이미지보다는 외형적인 세련됨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야 했다. 대표적으로 김지미, 최지희, 김의향 등의 여성배우들은 아프레걸 이미지로, 남궁원, 윤일봉, 김석훈 등의 남성배우들은 수트 차림의 엘리트 이미지로 멜로드라마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아직 다양한 장르 영화가 등장하기 전이었던 1950년대 중‧후반 흥행작을 내놓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이 그려지는 한국영화의 이면에는 이렇듯 배우들의 스타 이미지 찾기의 과정 또한 존재했다. (그림12) 잡지 『영화세계』 1956년 1월호에 실린 이민 화보. 왼쪽 페이지의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실린 모습이 흥미롭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이민은 미국을 경험한 지식인 엘리트 혹은 미국문화의 수혜를 받은 젊은이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자유부인> 이후 이민이 출연한 다양한 영화들에서 그는 ‘트렌치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든 ‘가장 최신식 스타일’을 한 도시적인 청년의 이미지를 전달했다.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을 비롯한 1950년대 전성기 홍성기의 멜로드라마뿐만 아니라 <촌색씨>(박영환, 1958), <모정>(양주남, 1958), <남성 대 여성>(한형모, 1959),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1959),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관되게 미국화된 엘리트 남성 이미지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전성기로 기록할 수 있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작품목록을 살펴보면 외려 <춘향전>의 이몽룡이라는 역할이 생경해보일 정도로 그는 현대물에 최적화된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민이 전달한 미국의 이미지 그 중에서도 <자유부인>의 춘호는 미국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당시 젊은 세대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이정표가 되었다. 블루종과 비니를 착용하고 사진기를 손에 든 춘호는 ‘굿모닝’과 ‘굿나잇’ 같은 인사말을 비롯해 ‘마담’, ‘익스큐즈 미’, ‘아이 러브 유’ 등 영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하고 서양음악에 맞춰 댄스를 추며 위스키를 즐긴다. 키스하는 모습을 들켜도 “그저 프렌드인 여성과 뭐 키스 좀 했다고 해서 뭐가 상관” 있느냐고 반문하고 상대가 유부녀일지라도 “사랑하는 건 제 자유”라고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춘호는 전쟁 후 가치관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감정에 솔직하고 전통적인 규범에 반항하는 청년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입체적으로 완성된 <자유부인>의 춘호는 이후 여러 영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그림13) <자유부인>에서 춘호가 오선영의 사진을 찍어주는 장면 (그림14) <남성 대 여성>(한형모, 1959)의 한 장면. 이민은 극중에서 잡지사 편집장 역할을 맡았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를 착용하고 카메라를 손에 든 이민의 이미지는 미국영화 스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춘호라는 캐릭터로 극단화된 ‘미국적인 연애 방식’은 이민의 스타 이미지에도 꾸준히 적용되어 ‘아프레 역할’을 대표하는 남성배우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이미지 캐스팅을 바탕으로 이민은 약혼자(<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나 아내(<돌아온 사나이>)의 굴곡진 과거를 고뇌의 과정 없이 ‘쿨’하게 인정하거나 하룻밤 연을 맺은 여성에게 명함을 건네며 웃으며 헤어지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이질적인 모습(<모정>)으로 그려졌다. 여성 캐릭터들이 규범에 얽혀 감정과 상황에서 극단의 상황에 왕왕 처하는 것에 비해 이민의 캐릭터들은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구애(<촌색씨>, <비오는 날의 오후 세 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림15)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1959)에서 명철(이민)과 영숙(최은희)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민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다. 또한 ‘미국행’을 앞두고 있는 춘호의 상황설정은 앞서 설명한 그의 이질적인 행동들을 설득하는 배경이 된다. ‘미국행’이라는 배경으로 인해 춘호라는 캐릭터는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비현실적인 상황의 드라마적 첨가나 갈등 국면의 요소로 활용된다. <자유부인> 이후 그가 맡은 역할들의 다양한 ‘미국행’은 배우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행’ 혹은 ‘미국에서의 귀환’은 <자유부인>뿐만 아니라 <촌색씨>나 <비오는 날의 오후3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극의 갈등 상황을 유발하거나 해결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사건의 내부에서 얽히고설키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관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외부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문화를 동경하고 선망하지만 우리의 내부로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 ‘양가적인 감정’ 4) 이 이민이 맡은 역할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비 오는 날의 오후 세 시>에서 그가 맡은 미국 교포 출신의 종군기자 헨리 장은 <자유부인>의 춘호와 더불어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이민이 보여주는 스타 이미지가 집대성되어 있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16)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에서 이민은 미국 교포 출신의 종군기자 헨리 장 역할을 맡았다. 그는 극중에서 군복 차림에 사진기를 소지하고 지프차를 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림17) 헨리 장은 사진을 찍으려 방문한 탑골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수미(김지미)를 숙소 아래층에 있는 클럽에 데려와 밴드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스타 이민에게는 아이로니컬하게도 1950년대 말부터 한국영화산업의 규모가 성장하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오히려 한정되기 시작했다. 1959년까지만 해도 그가 가진 스타성으로 출연료와 작품 편수에 있어 톱스타로 분류되긴 했지만 다양한 배우들의 등장으로 경쟁력에서 뒤처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착된 이미지는 오히려 그에게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가 영화 제작에 직접 나선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제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흐르는 별>(김묵, 1958),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1959) 등을 연달아 제작한 그는 흥행과 운영의 실패로 2년 여 간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재기를 위해 다작을 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 나가는가 했지만 <춘향전>과 <자유부인>처럼 대중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사업에 매진하며 영화에서 멀어졌고, 대중에게도 이민은 과거의 스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시대를 투영하는 이미지로 여전히 존재한다. 1) 공영민, 「이민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사 구술총서 02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1』, 이채, 2005 ; 이순진, 「이민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2011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 대구 경북 지역 영화사』, 한국영상자료원, 2011. 2) 원용진, 「한국 대중문화, 미국과 함께 혹은 따로」, 김덕호‧원용진, 『아메리카나이제이션: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미국화』, 푸른역사, 2008, 173쪽. 3) 강소연, 「1950년대 여성잡지에 표상된 미국문화와 여성담론」, 상허학회, 『1950년대 미디어와 미국표상』, 깊은샘, 2006, 116~117쪽 참조. 4) <비오는 날의 오후3시>가 갖는 미국에 대한 양가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조영정, 「미국영화에 대한 양가적 태도 :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를 중심으로」, 『매혹과 혼돈의 시대』, 도서출판소도, 2003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