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구][강원도 희망 메세지] 휘닉스파크 박광준 부장
- 제작년도
- 2011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때로는 기록영상의 맥락을 탐구하는 과정이 어떤 종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할 때가 있다. 주인공은 작은 물건이나 단서 하나에 호기심을 느껴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탐문을 시작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고 2시간 가량이 흐를 때까지는 건조하고 반복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지금까지의 모든 사소한 정보들 뒤에 있던 거대한 맥락이 폭발하듯이 드러난다.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관객의 머릿속은 분주하다. 지금까지의 플롯들이 복기되고 재정의된 이후에야 비로소 영화는 결말을 맞이한다. 순차적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작은 부분정보들이 서로를 설명하고 보완하여 전체의 윤곽을 이루는 구조의 이야기는 기록영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비슷한 주제를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개의 미군 기록영상에서 시작한다. #1. 불친절한 세 개의 영상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서 ‘제이드 민사처병원’ 필터를 체크하고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영상이 뜬다. (편의상 앞으로 각 영상을 알파벳 부호로 지칭하겠다) ● <A> , DEDICATION OF X CORPS CIVILIAN HOSPITAL, KOREA; [ETC.] ● <B> , BUILDING OF NEW KOREAN HOSPITAL, HYUN-NI, KOREA; [ETC.] ● <C> , ARMED FORCES ASSISTANCE KOREA, IP SONG NI, SOUTH KOREA 여기에는 건설이라고 하기 민망한, 작은 1층 벽돌 건물의 건설에 관한 미군의 원조 관련 장면이 포함돼 있다. 병원(Hospital)이라기보다는 의원이나 진료소(dispensary)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하다. 영상의 제목, 그리고 해당 장면의 슬레이트 정보와 화면 속 표지판 등 문자 정보를 간추리면 1차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A> , 세 곳의 서로 다른 원조 현장이 촬영됐는데, 그 마지막 순서가 제이드 민사처병원(Jade Civilian Hospital)의 민간 이양식 광경이다. “미 제10군단과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협조로 제4통신대대가 건립했다”라는 내용의 1953년 6월 3일자 준공표지판이 찍혔다. <B> , 1954년 3월 18일에(제목에 따르면) ‘현리에서 새 병원을 건설’하는 현장에서 제4통신대대장 모리스 중령이 한국인 병원장 ‘Dr. Kim’을 인터뷰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영상만으로는 어느 병원인지 알 수 없다. <C> , ‘입송리’의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 후원 현장 세 곳 [1] 을 담았다. 그중 세 번째 시퀀스가 시멘트를 발라 벽돌을 쌓고 있는 제이드 병원 건설 현장의 모습이다.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는 곳을 찍은 두 번째 시퀀스에는 <영상 B> 에서 제이드 병원 시퀀스에 등장했던 모리스 중령이 나온다. 세 영상의 화면과 파편 정보는 서로 같은 듯 달라서 뭔가 개운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촬영 소대는 카메라의 시선을 좁혀 ‘원조라는 행위와 원조의 유형’만을 담았고, 자신들이 공유하고 있는 맥락 속에서 당연한 정보들은 슬레이트에 기록하지 않았다. 이로써 누락된 전체적인 맥락은 이제 단서 수집과 추리의 몫이다. 일단, 순수하게 영상들의 쇼트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이 세 영상이 같은 장소의 같은 병원 건물에 관한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A>와 <C>에서 보이는 ‘준공표지판’과 ‘병원팻말’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A>와 <B>에 나오는 건물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이 모두가 담긴 <C>를 통해 <A>가 병원의 앞을, <B>가 병원의 뒤뜰을 촬영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안내팻말 (왼쪽: <A>, 오른쪽: <C>) 준공표지판 (왼쪽: <A>, 오른쪽: <C>) 천막의 위치에 의해 공사 장소가 병원의 뒤쪽임을 알 수 있음 (모두 <C>) 그러니까 1953년 6월 3일, 미 제10군단 민사처는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과 협조하여 예하 제4통신대대를 통해 이 병원, ‘Jade Civilian Hospital’ 건물을 짓고 민간에 이양했다(<A>). 이듬해 3월, AFAK 프로젝트의 형태로 병원 뒤뜰에 공사 원조가 있었고(<C>), 그 공사 현장을 배경으로 제4통신대대장이 직접 병원장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촬영했다(<B>). 마지막으로, 10군단 민사처가 관리 주체임을 명확히 밝힌 안내표지판(<A>, <C>)에 의해, 이 병원은 ‘민사처병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2. 정리됐다는 착각 이제 이 병원이 어디에 있었는지 추리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C>는 제목에서 ‘IPSONG-NI(입석리)’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입석리국민학교 건설 현장에 대한 첫 시퀀스에만 해당하는 무성의한 작명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B>의 제목은 ‘HYUN-NI(현리)의 병원’이라고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라면 전쟁 중후반기 미 제10군단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인 만큼 신빙성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건도 발견했다. OEC(유엔군사령부 경제조정관실)의 강원도 의료 시설 현황 보고서(이하 「OEC 보고서」라 칭하겠다)에는 ‘인제-제이드 병원(장로교 선교회)’이라는 항목 아래 제이드 병원이 ‘Sang Nam, Maechon, Naepyong and Kirin’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써 기린면에 있었다 는 증거를 잡았다. 이 이름이 붙은 병원이 여러 군데 있었던 이유는 ‘제이드’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제이드 병원을 이양받은 민간 조직이 장로교 선교회였다는 정보도 덤으로 확인된다. 하나 더, <B>의 인터뷰 장면에 등장했던 ‘Dr. Kim’이 누구인지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 육군 통신대 아카이브의 푸티지를 활용하여 제작됐던 미국 TV 시리즈 The Big Picture 의 한 에피소드,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에 이 푸티지가 실린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2] 여기서 장면에 덧씌워진 내레이션에 그의 본명이 나오는데, 미국인의 발음으로 ‘김방모’, ‘김봉모’와 유사하게 들릴 뿐 특정할 수 없다. 그러나 「OEC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Dr. Kim Bong Mu, director, grad. from Nippon University, Japan(일본대를 졸업한 병원장 김봉무 박사)’라고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이제 확인해야 할 부분은 얼추 정리된 것 같다. (이렇게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3. 기록문서의 발견, 그리고 힘겨운 재구성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이런 컬렉션에서 최대한 정확한 맥락을 캐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National Archives의 원조사업 관련 문건에서 영상 속의 원조사업 관련 정보를 찾는 것이다. 특히 AFAK 프로젝트는 열람이 가능한 문서만 해도 3개 문서군에 흩어져 있는 수백 건 이상의, 어림잡아 50만 쪽이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 OCR이 되어 있지 않은 문서 파일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이었고,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지도 않았으므로 최대한 찾을 수밖에 없었다. [3] 그래도 AFAK 프로젝트 보고서는 UNCACK 관련 문서에 비해 정보가 구체적이다. 그리고 식별된 장소나 건물명으로 찾는 것보다 그나마 조금 나은 경우는 영상에 AFAK 프로젝트 안내지, 그중에서도 프로젝트 번호가 찍힌 경우다. 다행히 <C>에는 프로젝트 번호 ‘9219’가 영상에 찍혔고, 이로부터 시작하여 제이드 민사처병원과 관련한 3건의 AFAK 프로젝트 보고 문건을 찾았다. 그리고 대혼란에 빠졌다. 모두 동일하게 장소가 ‘Chaun-ni’라고 적힌 것이다. AFAK 안내지(<C>)에 프로젝트 번호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 AFAK #921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6. AFAK #9221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3. AFAK #923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18. (*이상, 각 보고문서의 첫 쪽 일부 모습임) 아무리 전에 그럴 듯한 결론이 나 있더라도, 이 증거는 반박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슬레이트 어디에도 장소 명이 구체적으로 적힌 곳은 없다. 오히려 National Archives의 관리용 제목이나 「OEC 보고서」에 ‘Inje-Jade’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다른 추정을 해야 할 상황이다. AFAK 문서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민간 이양식 때 병실 사진을 찍었으나 보고 시점(8월 13일, 14일)에 사용할 수 없어 추후 제출하겠다”라는 문구가 있어 <A>의 내용을 지칭하고 있다. <B>, <C>의 병원 뒷편에서 하던 공사는 증축 또는 구획변경을 통해 수술실과 의료용품 공간을 추가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료용품 공간에는 침구 보관 및 회의실 공간도 마련할 예정이었다. 이 병원에는 같은 시기에 다른 소규모 AFAK 프로젝트 두 건이 동시 진행 중이었다. 대략 1954년 2월 중순에 프로젝트 기획안을 제출, 승인받았으며 3월에 착공하여 7월에 완공됐다. 미 제45공병단이 일부 자재를 공급한 시기는 4월. <B>, <C>는 아직 자재도 오지 않은 공사 초기의 장면이다. 보고서의 제출자가 ‘제57통신지원중대’인 이유는4월 29일자로 제4통신대대로부터 이 후원 프로젝트를 이관받았기 때문이고, 이때 재고대장 등이 빠진 불완전한 상태로 서류가 넘어왔다는 메모도 있다. 이제 다시 따져봐야 한다. ‘Chaun-ni’는 어디일까? 강원도 지역에서 미군, 미국인이 이렇게 표기할 만한 곳은 두 군데로 추려졌다. ● 홍천군 내면 자운리 ●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홍천 일대의 기록에 언급되는 군 조직은 보통 미 제9군단이므로 10군단이 설립한 병원의 장소라고 생각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인제군’과의 접점은 없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 명분을 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면은 원래 인제군에 속해 있다가 1954년 10월에 제정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4] 의 부칙에 따라 홍천군으로 편입됐다. 본래 인제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행정구역이었으므로 미군의 입장에서 그 인근은 대략 ‘인제’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고, 영상과 문서가 생산된 시점은 개편 전이었으므로 실제로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았다. 내면 자운리가 10군단 관련 지역, 그리고 「OEC 보고서」에서 언급한 제이드 병원들의 분포 지역과 다소 떨어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원래 인제군이 아니었던 두촌면 자은리보다는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4. 마지막 반전, 드와이트 멀스배리 선교사의 흔적에 닿다 그런데 ‘제이드’는 무슨 의미로 쓰인 이름이었을까? 혹시 병원을 이양받아 운영했던 장로교 선교회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서 관련 정보를 찾다가 드디어 ‘드와이트 멀스배리(Dwight R. Malsbary)’, 한국 활동명 ‘마두원’인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가 관심 범위에 들어왔다. 그는 1929년 숭실전문학교에 초청된 것을 계기로 한국 최초의 음악선교사로서 한국에 서양 음악을 보급하고 저명한 제자를 배출하는 등의 족적을 남겼고, 1940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교회, 신학교, 병원 등의 설립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 정도의 삶을 살았지만 다른 내한 선교사들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은 매우 드물다. 같은 교단 내 교파 갈등으로 인해 주류 학계에서 소외된 것이 원인이라고들 한다. 이것이 그가 강원도 사역에 전념했던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의 선교활동 자체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논문은 거의 없고, 그의 삶을 다룬 서적은 있으나 고증에 충실한 연구서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의미에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참고할 수 있는 정보는 2025년 3월에 그를 주제로 열렸던 세미나 [5] 중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종전 교수(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두 분이 앞의 책과 다른 여러 문헌을 종합하고 견해를 더해 발표한 것을 촬영한 영상, 그리고 홍천 출신의 강정식 시인이 《홍천신문》에 기고한 여러 글이 사실상 전부이다. 이 소스들은 앞에 언급한 서적 등 참고 문헌에 오류가 있을 수 있거나, 기억에 의존한 구술에 의한 것이므로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다만, 멀스배리 선교사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을 중심으로 사역활동을 했으며, ‘미군의 요청으로 제이드 병원 을 운영했다 [6]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관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로 내용과 견해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종합하면 이렇다. 6.25 전쟁 이후 멀스배리 선교사는 홍천군 두촌면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무려 26개에 달하는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들은 44번 국도를 따라 속초까지 [7] 주변의 산골짜기에 분포돼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이 지역의 인구 대부분이 군사적 요충지를 따라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44번 국도와 미 제10군단 및 멀스배리 선교사의 상관관계 (* 내면 자운리는 우하단에 떨어져 있음) 이런 맥락에서 ‘미 제10군단의 요청으로 군단이 운영하던 제이드 병원을 맡아 관리하게 됐다’라는 주장 [8] 도 개연성이 있다. 그와 관련됐던 병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홍천군 홍천읍(지금의 홍천군청 서쪽 ‘명동보육원’ 터),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속초의 세 군데가 언급되고 있으며, 두촌면 자은리의 제이드 병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의사 부족 등의 문제로 먼저 문을 닫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9] 실제로 미 제10군단 본부였던 인제군 관대리, 멀스배리가 관여했다고 알려진 병원들의 위치, 「OEC 보고서」가 언급하는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등을 보면 실제로 44번 국도에 인접하거나 부근에 있는 반면에, 인제군 내면 자운리는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다. 이 정도라면 ‘Chaun-ni’는 ‘두촌면의 자은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 ‘위치 논란’이 드디어 마무리됐다. 더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면 좋겠지만, 현재까지의 자료전쟁의 승자는 처음에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두촌면 자은리다. #5. 가장 나중에 밝혀진 ‘Jade’의 의미 그래도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던 ‘Jade’라는 명칭의 의미. 혹시라도 이에 따라 또 무슨 반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이것이 미군의 호출부호를 딴 것이라는 말이 있어서다. [10] 최소한 지금까지 경험한 전문(telegram)에서 그런 종류의 부호를 본 적은 없다. 부대라는 것은 이미 부대명 약어로 충분히 구분되고, 대외비를 송수신한다고 해도 어차피 전문에 적힌 APO(Army Post Office)만으로 각 시기의 부대 정보가 대략 노출된다. 그보다 1950년대라면 필요한 경우에 어떤 기계나 알고리듬 [11] 에 의해 전문 전체를 암호화하여 송신하던 시대 아니었나? 이를테면 그 유명한 독일의 에니그마(Enigma)라든지, 태평양전쟁기에 미군이 일본의 암호체계(또는 기계)에 붙인 코드네임인 퍼플, 레드, 제이드 같은 것들 말이다. (이때의 ‘제이드’는 지금의 맥락과 무관하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애초에 호출부호라는 것은 항공 관제탑이나 선박 구분에 쓰이는 것 아닌가. 영상 <A>, <B>, <C>를 처음 본 순간부터 기약 없이 밤낮으로 찾아 헤매던 이 물음은 어느 순간에 허무하게 풀렸다. 답은 제이드 병원 원조 건설사업을 진행했던 제4통신대대의 부대사(史)문서 중에서 발견됐다. 이 컬렉션의 거의 모든 영상이 통신대 소속의 사진 및 영화 촬영 소대에 의해 촬영됐다고 해도, 통신대의 본 임무는 통신선로를 설치하여 통신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제4통신대대는 미 제10군단 본부가 전선을 따라 이동할 때마다 해당 지역, 이를테면 함흥-원산, 인천-김포 등의 영역 내에서 본부와 각 부대를 이어 구축했던 통신망의 다이어그램을 문서에 남겨 놓았다. 통신망 다이어그램은 각 노드, 즉 망이 모이고 분산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 또는 그곳의 통신장비에 대해 코드네임을 붙여 놓고 노드 사이를 선으로 연결해 놓은 그림이다. 본부가 어디로 옮겨 가든 제4통신대대의 통신망에서 늘 통신선이 집중되는 주 노드에는 ‘JADE’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래서 추정컨대, ‘JADE’는 미 제10군단 본부에 설치되는 통신시설 또는 그 위치를 나타내는 식별부호일 것이다. 즉, ‘JADE’는 다른 노드에서 본부에 연락을 취할 때 호출명으로 사용됐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신 호출명 ‘제이드’는 그 자체로 군단을 대표하여 지칭하는 이름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제이드 병원’의 정체는 10군단 민사처가 설립, 운영하던 모든 병원이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통신 노드와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로 영상 속의 AFAK 안내지를 다시 떠올려보면, 프로젝트 번호 아래 후원 부대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R&M OPN Co. 4th SIG BN CORPS” - 즉, 군단직속 제4통신대대 무선 및 교신(Radio & Message) 작전 중대. 에필로그. 짧은 기록영상 세 개에 이렇게 골몰할 일인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그 결과로 마치 필름 현상 과정을 거쳐 잠상(latent image)이 드러나듯이 보다 다층적이고 구체적인 정황을 읽을 수 있게 됐다. 1950년대 강원도에서는 두 가지 플롯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한 줄기는 이름도 몰랐던 먼 나라에 와서 사상 처음 경험하는 형태의 전쟁 한복판에 있던 미군, 그리고 그들이 전시 후방 안정화 및 전후 주둔지 스킨십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로 골몰했던 민사 활동들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한쪽에는 스스로를 ‘평양 마씨’라고 일컬을 정도로 사랑한 나라 한국에서 1929년부터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선교를 계속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사연이 있다. 미군과 선교사는 44번 국도를 따라 홍천에서 인제를 거쳐 속초까지 전쟁이든 선교든 각자의 일을 했다. 미 10군단은 서서히 본토로 귀환했고, 선교사는 외로운 사역을 계속하다가 1977년에 두촌면에서 홍천읍으로 가던 중 추돌사고로 사망했다. [12] 2025년, 한국의 한 아키비스트는 제이드 병원 영상을 보고 1950년대의 44번 국도 여기저기를 헤매며 오랫동안 가려졌던 사연에 접근한다. 흔한 영화 줄거리처럼 느껴지지 않은가? 이를 영화화한다면 제목은 <44번 국도에서 만나요> 정도가 좋을 것 같다. 흥행은 어렵겠지만. * <A>, <B>, <C>의 VOD와 각 장면에 대한 설명은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 있습니다. <참고문헌> 1. 이승구, 「말스베리 선교사와 김홍전 박사」,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 Youtube 영상 2. 이종전, 「마두원의 해방 이후 사역에 관한 고찰」, 같은 세미나 / Youtube 영상 3. 강정식 시인, ⟪홍천신문⟫의 여러 기고글 4. “20. Kangwon-Do”, Unclassified Subject Files, ca. 1955 - 11/03/1961, RG 469, Entry P 321, Box 34, National Archives. p. 70.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AUS014_81_00C0311) 5. “AFAK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Project Completion Reports, FY 55: July 1954”, Project Files, 1954 - 1963,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National Archives. p. 118, 123, 126.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04_103) 6.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Nov.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13.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9) 7.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Aug. -Sep.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27.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7) *** [1] 두 번째 장소는 최소한의 정보도 식별되지 않는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중 어느 곳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2] 정영신(2021), 「미군의 대한원조 영상 속에서 재건되는 전후 주체: The Big Picture 시리즈의 ‘미군대한원조’와 ‘한국과 당신’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41, pp. 117-159. [3] 타이핑된 문서가 고품질의 OCR을 거치지 않은 상태라면 AI도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동 OCR 프로세싱의 결과를 토대로 AI가 신뢰할 만한 결과를 내놓기는 어렵다. 또한 PDF는 의외로 구조적인 포맷이 아니므로 현재 AX(AI 전환) 분야의 큰 화두 중 하나는 AI를 위한 기존 문서의 전처리 및 구조화 기술 수준을 높이는 문제이다. [4] 6.25 전쟁의 결과 경기도와 강원도의 38선 이북 일부 지역이 우리의 영토가 됐는데, 이를 ‘수복지구’라고 한다.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는 전후 수복지구를 감안한 행정구역의 조정 사항이 포함됐다. [5]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6] 선교회가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계속된 미국 내한 선교사들의 ‘트라이앵글 선교’, 즉 선교지역에 기지를 세운 후 이를 거점으로 교회-학교-병원을 함께 키워 연계하는 선교 방법론에 따른 것이다. 멀스배리 선교사도 해방 후에 부산, 강원 등지에서 끊임없이 교회, 학교, 병원을 건립하는 등 철저히 한국 내 전통적인 선교전략에 입각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7] 이종전, 앞의 세미나; (글쓴이 추가) 발표 자료에 해당 교회들의 분포가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44번 국도는 6.25 전쟁 후반기 미군의 거점들을 포함하고 있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보급로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이를 따라 군집한 촌락이 주 선교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맞다. [8] 멀스배리 선교사는 이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던 이력도 있고, 그의 강원도 선교 범위가 홍천과 인제 일대의 미 제10군단 작전 지역을 따라 형성됐으므로 지역 거주민들을 대변하여 미군의 각종 원조사업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 이종전 교수(앞의 세미나)의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함. [9] 면허 의료진의 부족 및 민간 이양 후의 재정문제로 병원이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폐쇄됐다는 등의 상황은 「OEC 보고서」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됐다. 다만, 여기서 언급된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중에는 위 세미나 및 회고글에서 말하는 병원 중 홍천면 병원이 없고 대신 내평, 상남 등 다른 곳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두촌면 자은리 병원, 범위를 넓히면 속초 병원까지만 제이드 병원이고 다른 곳은 제이드 병원과 무관한 선교사 병원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10] 이승구, 앞의 세미나; 발표에 참고했던 서적 중 김광섭, 전민수 공저, 『마두원 선교사: 한국음악의 아버지, 강원도 선교의 아버지』(영창서원, 2019)가 출처인 듯하다. [11] 이 의미로 흔히 쓰이는 알고리즘(algorism)은 수학의 계산법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문제 해결의 흐름 및 절차를 뜻하는 경우에는 비록 알고리즘이 통용된다고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알고리듬(algorithm)이 맞는 표현이다. [12] 이승구, 앞의 세미나에서 앞의 책 인용.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정승훈 교수 는 영화의 매체적 특징과 더불어 작품에 영향을 미친 사회 구조나 철학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왔다. 최근에는 세계화 시대에 발생하는 영화적 경향을 생명정치와 윤리, 철학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글로벌 시네마’ 이론을 구체화하고 있다. 저서로는 Cinematic Interfaces: Film Theory after New Media(2013),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a(2023)가 있고, The Global Auteur: The Politics of Authorship in 21st Century Cinema(2016), The Mind-Game Film: Distributed Agency, Time Travel, and Productive Pathology(2021)를 공동 편집했으며, 《Studies in the Humanities》 특집호 내 “Global East Asian Cinema: Abjection and Agency(2019)”를 객원 편집했다.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와 컬럼비아대학교 영화학과에서 강의한 후, 현재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 영화과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화가 문화가 된 시기, 평론가로서의 시작 1980~90년대 국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 그리고 주한미군방송(AFKN)과 같은 TV 매체에서 방영된 해외 극영화를 통해 영화에 친근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 블레이드 러너 >(리들리 스콧, 1982)의 등장인물 레이첼(숀 영)이 황혼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이미지’로만 관객을 매료시키는 영화의 힘을 처음 실감했으며, 장 뤽 고다르의 < 네 멋대로 해라 >(1959)에 대한 할리우드식 리메이크작 < 브레드레스 >(짐 맥브라이드, 1983)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제시(리차드 기어)가 경찰에게 포위당한 채 춤을 추는 장면 역시, 서사의 개입 없이 인물의 움직임만으로 작품에 집중하는 체험을 하게 해줬다. 이렇게 영화 속 이미지의 고유한 특성을 지각하면서, 스스로 주목한 작품 목록을 짧게나마 작성해보며 영화에 가까워졌다. 1990년대에 진입하면, 새롭고 다양한 영화를 발견하려는 의지에서 발원한 국내 시네필 문화가 본격화된다. 월간지 《로드쇼》의 ‘도시에’란에 김홍준 감독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실었던 글을 엮은 책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1991)이 고등학교 시절 발표되었다. 영화사에 대한 개괄부터 할리우드·홍콩·유럽 등지의 영화에 대한 지식을 살펴보면서 세계 영화의 면면을 흥미롭게 학습했다. 동시에 이 책에 포함되어있던 ‘영화사상 걸작선(1895년부터 1991년 사이 발표된 고전영화 91선),’ ‘우리세대의 걸작(1980년대 세계영화 100선)’과 같은 목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영화 감상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특히 ‘우리세대의 걸작’ 100선에 한국영화 몇 편이 포함된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이자 한국 영화학도 또는 영화인로서의 필자(김홍준 감독)가 아직은 국제무대에서 발견되지 못한 한국영화의 가치를 대중 독자에게 소개한 대목을 읽으며, 세계에서 한국영화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좌2) <블레이드 러너>, <브레드레스> 중 (사진: "Sean Young", IMDb / "Breathless", IMDb ) (우1)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때마침 한국영화가 산업적 측면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씨네21》과 《키노》 등의 영화 전문지들이 창간되었고, 1년여가 지난 후에 두 매체 모두 영화평론상 공모로 ‘평론가’를 배출하기 시작한다. 앞에 이야기한 계기들을 거치며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비평’ 분야 전반에도 흥미를 느꼈던 나에게 영화평론가라는 진로는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었지만,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며 배운 문학 이론을 영화비평에 적용하기를 즐기며 영화를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을 확립하고 있던 터라, 이를 널리 공유하는 기회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2003년에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공모 당시 이론비평을 통해 내가 다루고자 했던 내용이자, 한국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해준 주제를 소개하고 싶다. 바로 ‘작가’로서의 감독이 등장했음을 알리며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주도한 대표적 인물, 이창동 과 홍상수 작품 간 비교이다. 이들이 활동하기 직전인 1980년~90년대 중반, 사회비판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견지한 젊은 영화로서 박광수 와 장선우 등이 선보인 ‘코리안 뉴웨이브’가 주목받는다. 하지만 1995~96년 즈음에 관심의 초점은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감독들의 데뷔로 옮겨간다. 이전 세대의 연장선을 밟는 한편 그보다 한층 더 높은 미학적 차원을 달성한 그들의 데뷔작은 한국영화의 질적 전환을 주도하며 많은 평론가들의 비평 욕구를 자극했다. 그 전환의 과정을 들여다보자면, 이 시기의 감독들은 과거사 중심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동시대 공간을 탐구하려는 의지 를 작품에 투영했다. 특히 이창동과 홍상수는 당시 서울 변두리의 리얼리티를 작품 속 ‘공간’에 내재된 의미(혹은 무의미)나 각자의 재현의 체계(혹은 비체계)에 따라 제시했다. 나는 그들의 작품을 ‘ 집’ 과 ‘길’ 이라는 공간 개념을 중심으로 의미론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한편, 리얼리티 재현 과정에서 각자가 추구한 미학과 스타일의 차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창동이 유기적으로 지은 ‘집’, 홍상수가 소요하는 ‘길’ 이창동의 작품에서는 현대인이 돌아가야 할 원형적 공간으로 이해되는 ‘집’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모두가 떠나온 이곳은 그들이 다시 회귀하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이자 ‘ 탈시간적 유토피아 ’가 되지만,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상실된 공간이다. < 초록 물고기 >(1997)의 주인공 막동( 한석규 )의 가족은 현대화와 도시화의 물결에 떠밀려 뿔뿔이 흩어진다. 막동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원형적 욕망을 지니게 되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같은 맥락으로 < 박하사탕 >(1999)의 유명한 대사 “나 다시 돌아갈래!”에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대상이 되는 특정 시간은, 순정에 대한 주인공 영호( 설경구 )의 기억을 담은 채 이제는 잃어버린 집과 같은 시공간적 향수를 자아낸다. < 오아시스 >(2002)에서는 종두(설경구)와 공주( 문소리 )가 꽉 막힌 청계고가도로에서 갑자기 공주의 집으로 이동하는 판타지적 순간이 연출되는데, 제목과 같이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이자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음이 여기서 나타난다. 이렇게 이창동은 갑자기 찾아온 현대사회가 개인을 폭력과 속도전에 연루시켰고, 이전에 간직했던 꿈과 순수, 사랑은 파괴해버렸음을 부각한다. 거스를 수 없는 변화와 상실 속에서, 잃어버린 ‘집’을 되찾고 싶다는 무력한 개인의 욕망이 자라날 뿐이다. (좌) <초록 물고기>, <오아시스>, <박하사탕>의 '집'에 관한 설명 (우) <오아시스> 중 공주의 집에서 일어난 판타지적 순간 반면, 위와 같은 특징을 홍상수의 작품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다. 홍상수가 만든 인물들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곳을 찾으려는 욕망이 없고, 그들이 잠시 머물거나 지나치는 모든 공간은 정착의 터전이 될 수 없는 ‘길’의 변주이다. ‘장소(place)’가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서 누군가의 정체성이 담지 되게끔 하는 근거지를 의미한다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텔, 술집, 식당, 정류장, 길거리 등은 이러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비장소 (non-place)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은 이중 어느 한 곳에 머물더라도 곧 다시 떠나 소요하면서 또 다른 비장소로의 여행을 계속한다. 일생의 한 순간을 떼어다 놓은 듯해 시작과 끝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 자체이다. 인물이 향하거나 머무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획득하지 않는 그의 공간은 한 마디로 ‘ 탈근대적 아토피아 (atopia)’와 같다. (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중 여관 (우) <강원도의 힘> 중 기차역 이어서 두 감독의 작품 전반에서 리얼리티가 재현되는 방식을 미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이창동은 통합·정주의 아폴론적 편집증에 기반한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리얼리즘 을, 홍상수는 생성·유동의 디오니소스적 분열증에서 비롯된 총체성 해체의 리얼리즘 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1 이창동은 인물, 대사, 행동, 배경 등 작품 속 기호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호들을 활용한 미장센을 롱테이크 마스터숏으로 노출시키며 관객이 이를 역사적 또는 의미론적 차원으로 독해하도록 유도한다. 이때 발견된 의미는 화면에서 그와 유사한 특성을 지닌 기호와 결합하고, 이러한 은유가 반복되면서 기호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의미의 집’을 건축하게 된다. 이렇게 작품 곳곳에 녹아든 세부적 의미가 결합해 상위 의미 체계로 통합되는 리얼리즘을 추구한 이창동의 재현 방식은 아폴론적 편집증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달리 홍상수의 롱숏에서는 특정한 의미가 독해되지 않고, 내면이 표백된 일상적 표층 현실만이 채집되곤 한다. 인물에게서 나타나는 행위와 몸짓, 습관, 말들이 그의 여행 여정에 흩뿌려져 장면 곳곳에서 출몰하는 광경을, 관객은 그저 관찰할 수밖에 없다. 기호들이 ‘의미의 집’을 이탈해 일상의 순간들을 따라 ‘길 가기’만을 지속하며 총체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정보를 주지 않는 화면에서 관객은 가시적·비가시적 세계, 그리고 전지적·관찰자적 시점 간 구분이 무용해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홍상수의 리얼리티는 이창동과 달리 생성·유동의 디오니소스적 분열증과 닮아 있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기호들이 의미와의 결합 없이 인물의 여정을 따라 자유롭게 유희하도록 놓아두기 때문이다. 두 감독의 미학이 이러한 이론과 완벽히 일치한다기보다, 극단적 위치에 있는 두 개념을 빌려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좌) <초록 물고기> 중. 막동의 집, 도로, 아파트는 차례로 전근대, 근대화 및 그 산물을 의미한다. (우) <오!수정> 중. 마스터숏 없이 반복되는 술자리 장면과 일상적으로 오가는 말들. 논의를 전개하다보니, 다른 한국영화 감독들의 작품 세계 역시 위 관점에서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시점에서 그간 한국영화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대부분의 감독은 이창동의 방식을 택했다. 그들 각자가 한국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에 기초한 염원과 욕망을 작품에 투영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 와중에 홍상수는 당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을 영화 안에서 실험하며 별개의 노선을 택한, 상당히 독특한 작가이다. 오늘날까지도 홍상수의 실험은 그의 필모그래피에 한해서만 실행되지만, 대다수의 주류 한국영화는 이창동식 의미의 집짓기에 익숙한 모습을 보이며 이 경향을 확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연구한 세계 속의 영화 위 주제로 이론비평을 작성하고 등단한 이후, 1년간 열띤 평론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시의적 게재가 중요한 현장 비평의 특성상, 개봉작을 특정 기한까지 감상하고 글을 써야 할 의무가 매번 주어지면서 비평에 대한 압박감이 갈수록 커졌다. 더군다나 당시 평론 활동과 불문학 박사 과정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부담이 더욱 가중되었다. 기민한 현장 비평계가 주는 자극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업이 반복된다면 투입을 초과하는 산출로 인해 내적 에너지가 소진되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평론가로서의 한계에 도달했을 뿐 영화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고 마음도 영화로 향해 있었기에, 당시 내가 내린 결심은 영화를 ‘공부’ 하는 것이었다. 이때 한국영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한국사회의 ‘거울’로서의 기능에만 치우쳐 있었던 듯하다. 한국영화가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수단으로만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가 지속되다보니 존재론, 매체론, 현상학적 의미 등 영화의 본질에 관해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학술 개념이 국내에 적용되는 시점이 늦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불문학 도서를 번역하며 현대 문학 및 사상의 흐름을 인지함과 동시에 해외 학자들의 현대 영화 이론이 국내로 유입되는 과정을 목격한 나로서는, 유학을 떠나 한국영화에 보편적 영화 이론을 적용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외 유학 중 작성한 박사 논문 Cinematic Interfaces 를 통해 영화 속 모호하고 잠재적인 세계로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페이스’가 서사와 이론 측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지도교수 중 한 명이었던 영화학자 토마스 앨세서(Thomas Elsaesser, 1943~2019)가 2019년에 갑작스럽게 작고한 후, 그가 집필 중이던 저서 The Mind-Game Film 에서 미처 완성되지 못한 부분을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보충해 공동 편집하기도 했다. 본 도서는 당시 화제가 된 “퍼즐 영화” *주2 가 사회적 패러다임과 맞물려 있는 측면을 정치, 경제, 사회, 정신분석, 철학 등에서의 이론을 활용해 조명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로 오기 전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에서 강의했을 때는, 활발한 세계화의 중심지로서 그 명암을 모두 반영하고 있는 아부다비라는 공간을 체험했다. 또한 앞의 편서의 주제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시 영화 연구에 대한 관심사도 미학 이론 너머로 확장되고 있었기에, 이들을 계기로 ‘글로벌 시네마’라는 주제를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게 되었다. 글로벌 시네마라는 용어가 차츰 언급되기 시작했지만 용어의 정의는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던 때이다. 먼저 공동편서 The Global Auteur (2016)에서는 당시 막연히 떠올린 글로벌 프레임에 맞게 세계 각지 영화의 작가들이 내세운 영화의 정치성 *주3 을 매핑했다. 이를 발판 삼아, 2019년에는 잡지 《Studies in the Humanities》 특집호의 객원 편집자로서 ‘동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글로벌 시네마를 설명하는 글들을 모아 “ Global East Asian Cinema: Abjection and Agency ”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이러한 편집 작업에 반영되었던 관점을 발전시킨 연구가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 a 에 담겨있다. (좌1) 번역서 『문학의 행위』 (자크 데리다, 2013), 저서 Cinematic Interfaces , 공동편서 The Mind-Game Film . (우2) 공동편서 The Global Auteur , 저서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a 위 저서에 설명된 글로벌 시네마의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한국영화의 세계적 위상이 강화된 계기 에 대해 생각한 바를 먼저 공유하려고 한다.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 등의 작가가 등장하고 작품의 장르 자체가 다양화되며, 작품의 ‘만듦새’ 역시 개선되어 산업이 진화 했다는 것이 하나의 계기이다. 한류의 인기 에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OTT 등을 통해 전 세계의 접근성이 향상되었다는 점도 있다. 그리고 한국영화 관련 학술 행사와 출판물이 기획되는 경우가 많아짐을 고려할 때 한국영화에 대한 학계의 관심 도 크게 증가했다고 본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한국영상자료원처럼, 앞으로는 영화를 다루는 국내 연구 조직이나 문화 거점을 해외와 연결하는 매개자가 더욱 늘어나리라고 기대해도 좋을 만큼,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 다양한 갈래의 연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글로벌 시네마로서의 한국영화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은 ‘ 탈오리엔탈리즘 ’이다. 세계 진출을 위해 전통문화의 효과적 재현을 중시한 1990년대와 달리, 최근의 한국콘텐츠는 우리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하되 서구적 모티프나 장르의 보편성을 녹여냄으로써 해외에 비춰진 ‘한국적’ 이미지에 더는 구애받지 않고 있다. 국지적 문화에서 비롯되었지만 글로벌리티를 동반하는, 말하자면 탈오리엔탈리즘적 글로컬리티를 지닌 것인데, 이는 뒤에서 이야기할 ‘글로벌’ 프레임으로 본 세계화 시대의 한국영화가 갖는 고유성이 되기도 한다. ‘글로벌’ 체제의 생명 정치, 그리고 이중 윤리 먼저 오늘날의 글로벌 시네마 개념에 도착하기까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영화가 거론된 방식을 돌이켜보자. ‘세계영화’라는 용어의 의미는 실제로는 존재할지 몰라도 담론적으로는 오로지 그 용어를 바라보는 ‘관점,’ 즉 프레임만이 존재한다. 이 프레임은 보통 세 가지로 나뉘는데, 내셔널, 트랜스내셔널, 그리고 내가 연구하고 있는 글로벌 프레임이 있다. 먼저 내셔널 프레임에서는 민족국가(nation-state)의 역사와 사회현실, 문화 등을 반영하는 영화들을 배치하며 ‘세계영화’의 지도를 그린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트랜스내셔널 프레임을 통해 이는 상당 부분 해체되었다. ‘ 영토화 ’에 기반한 내셔널 프레임이 민족국가 기반의 영화에게 동질성, 환원성, 폭력성을 요구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트랜스내셔널 프레임은, ‘ 탈영토화 ’ 개념에 근거해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혼종적인 영화로서 세계영화를 정의한다. 이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인력의 공동 제작과 더불어, 특정 작품이 다른 국가나 문화권에서 어떻게 수용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늘어났다. 또 다른 프레임으로서 내가 설명하고 싶은 관점은 ' 글로벌 ' 프레임이다. 이는 세계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 재영토화 ’된 시점에서부터 정치, 사회, 윤리의 패러다임이 변화한 데서 기인한다.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양분되어있던 두 이데올로기적 세계가 1990년대 들어 자본주의에 따른 새 시장질서 속의 민주주의적 세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포괄되어 일컬어지는 ‘포괄적 체제’가 긍정되며 세계화가 시작됐고, 여기에는 관용과 환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내세운 ‘ 연성 윤리 (soft ethics)’가 시대정신으로서 동반된다. 서로 다른 체제나 이념을 타도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 및 대립의 중요성이 사라졌으며, ‘타자’ 역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주체로 받아들여진다. 정치적으로 추구되었던 자유와 평등이 이제는 타자와의 공존 속에서 대두된 ‘윤리’로 자리 잡은 것인데, 이를 가리켜 탈정치적인 윤리적 전환이 발생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탈정치적 세계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윤리적 경향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존중과 관용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연성 윤리는 어떤 경우에도 ‘관용될 수 없는’ 행위 역시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관용될 수 없는 행위’가 연성 윤리의 지지를 받는 포괄적 체제를 해칠 때, 그를 사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배제’의 메커니즘이 어쩔 수 없이 작동한다. 배제의 징후가 차별, 혐오, 추방과 같이 폭력적인 양상을 띠더라도 이를 정당화하는 ‘ 경성 윤리 (hard ethics)’가 연성 윤리의 이면으로 노출된다. 배제된 타자들은 이 체제로 다시 통합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재차 폭력으로 맞서면서 두 세력 간의 ‘새로운 적대’ 관계가 형성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통합되었던 세계에 또 다른 장벽을 세운 9.11 테러와 이후에도 줄곧 이어져 온 대테러 전쟁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좌) 베를린 장벽 붕괴 (사진: "The Fall of the Berlin Wall", German-American Heritage Museum ) (우) 세계영화를 바라보는 세 가지 프레임, 그중 '글로벌' 프레임의 '새로운 적대' 관계 에 관한 설명. 글로벌 프레임으로 본 세계화 시대는 정치로부터 벗어났다고 하지만, 윤리적 체제를 둘러싼 이 적대 관계는 오히려 ‘ 생명정치 (biopolitics)’의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인간 생명의 탈취 또는 구제 여부를 결정하는 힘으로서 가장 근원적인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생체권력(biopower)이 정치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가 주권과 안보 수호를 명목으로 자신의 체제를 무한 정의의 편에 세우고 타자를 향해 생명정치를 초법적으로 자행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존재들이 발생한다. 체제에 속하지 못하거나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생명정치에 의해 주체(subject)로 살아갈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비체 (abject)들이다. 글로벌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이 폭력적 메커니즘을 생명정치적 비체화(abjection)라고도 부른다. 글로벌 시네마: 비체의 이중 죽음과 대안 윤리 정치·윤리적 패러다임 변화가 비체화를 일으킨다는 글로벌 프레임을 영화에 적용하여, 오늘날 글로벌 시네마의 주제를 두 가지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정치적 변화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 재난 또는 재앙 영화 ’이다. 개인적으로는 ‘재난이나 재앙’이 우리 시대 주류 상업영화에 가장 굳건히 자리 잡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극중 위기 극복에 기여할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 해결책도 던지지 않는 대신, 그 빈자리를 디스토피아적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키는 파괴적 즐거움으로 채운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양상이 부정적이라고는 절대 단정할 수는 없으며,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 자체의 반영이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내러티브의 경향은 대체로 ‘ 이중 죽음 ’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된다. 작품 초반에 발생하는 특정 사건이나 트라우마로 인해 주인공은 온전한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비체화’되며, 사회적으로 소생하지 못하는 상징적 죽음의 상태에 이른다. 다만 비체화된 주인공은 희생자로만 남아있지 않고,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 에이전시 (agency; 미션 수행을 위해 행동하게 만드는 동인을 의미하는 철학 용어)’를 발휘한다. 그들의 에이전시 발현을 촉진하는 목적으로는 재주체화(잃어버린 세계 또는 자신을 버린 공동체로 돌아가 다시 통합됨), 복수(자신을 비체화한 어떤 존재에 대한 복수), 테러(자신이 비체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을 테러), 자살(어떠한 목적도 선택할 수 없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음) 등이 있다. 에이전시가 발현된 결과 이 목적들이 달성되는지를 결말에 확인할 수 있고, 달성에 실패할 시 주인공의 물리적 죽음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비체들의 에이전시가 꼭 위와 같은 목적에 의해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 잠재적 대안 윤리 ,’ 즉 연성 윤리와 경성 윤리가 충돌하는 글로벌 체제로 환원되지 않고, 오직 비체들 사이에서 서로를 위한 긍정적 잠재성을 실험하며 형성되는 윤리를 제시하는 작품도 있다. 에이전시를 발휘하고 있는 비체들이 공존하다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실존적 선물이 되어줄 때, 그리고 이렇게 선물이 되어주며 서로 간 네트워킹이 실현될 때, 대안 윤리는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여기서 말한 비체들 간 네트워킹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아토피아적 네트워킹’이다. 그들이 만나고 흩어지면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선물되기 경험은 영원할 수 없고 어느 하나의 이상적 방식으로 고정되어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 경험의 소중한 잠재성만은 여전한 채로 과정으로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작품에서의 주체를 ‘비체적 에이전시’로, 공동체를 ‘선물적 아토피아’로 재해석하여 글로벌 시네마 분석을 이어가고 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2000년대 이후 활동한 글로벌 시네마 작가의 작업을 관련 사례로 연구해왔다. 2000년대 글로벌 시네마 작가들 에 대한 간략한 매핑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와 그 변주 그렇다면 이러한 글로벌 시네마의 특징이 한국영화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내가 비평 활동을 시작했던 2003년, 공교롭게도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되며 역작들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작품들 대부분은 ‘포스트-뉴 웨이브’라고 불리는 386 세대가 연출했다. 이 세대 감독들은 시기를 고려할 때 문화적으로는 세계화를 경험했지만 각자 한국 근현대 역사를 목도하며 모종의 정치성을 탑재 했다(대체로 1980년대 불법적 국가 폭력이 남긴 상흔이 모티프가 된다).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속 사적 감옥에서의 감금과 폭행, 공상과학 영화의 외양을 한 <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2003)에서 비체화가 이뤄진 배경,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이 비춘 당시 사회 및 경찰 수사의 폭력적 측면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감독 각자가 격동의 한국 사회 속에서 확립한 정치적 감각이 비체화 내러티브와 에이전시의 방향성에 징후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관련 작품들이 거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유사한 구도, 즉 아버지-어머니-아들로 구성된 가족 삼각형의 구도를 지니고 있다. 부정적인 법이나 권력, 제도 등을 상징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비체화하고, ‘아들’은 ‘아버지’에 저항하며 복수를 꿈꾸지만 영화에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삼각 구도는 작품이 암시하는 권력과 욕망에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관객의 욕구를 자극한다. <올드보이> , <살인의 추억> 중 이후 대중적 인기를 몰며 한국영화계에 등장한 ‘천만 영화’들은 앞에서 세계화 시대 한국영화의 특징이라고 잠시 언급했던 글로컬리티를 짙게 반영한다. 생명정치로 비체화된 작품 속 인물들이 에이전시를 발휘하는 동기에 힌트가 있다. ‘나쁜 아버지(가족, 국가 등)’로서의 전근대적 주권자는 초법적인 생체권력을 동원해 주인공인 ‘아들(백성, 시민 등)’을 비체화한다. 비체들은 역시 에이전시를 발휘하지만 그 결과로 달성하려는 목적이 사적 복수가 아니라 공적 정의 실현 에 가깝다는 점이 한국 천만 영화의 특징이다. 자신들을 비체화한 ‘나쁜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로 대체하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염원이 담긴 내러티브에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고 호응해왔다. 생명정치로 발생한 비체들이 대안 윤리를 모색하는 글로벌 프레임에 한국사회의 정치적 실패라는 역사적 국지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천만 영화는 이렇게 ‘나쁜 아버지’로 표상되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을 계속해서 소환하고 그것을 환상적 또는 역사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데, 이를 ‘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 ’라고 표현하고 싶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비체화한 무능하고 폭력적인 국가가 유토피아적 공동체로서의 민족국가 또는 법치국가가 되기를 욕망하며 연대해 역사 또는 재앙 판타지를 조성한다. 더불어, 이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비체들은 함께 연대하는 와중에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선물의 윤리’를 체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안 가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딸을 잃은 주인공이 재앙 도중 구한 아이와 밥을 먹는 < 괴물 >(봉준호, 2006)의 한 장면에서처럼, 가족에 가까운 관계로의 발전을 돕는 과정으로 한국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음식 공유’를 통해 ‘식구’가 되는 것이 대표적 방식이다. (예시)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 로서의 천만 영화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에서 비체화를 초래하는 근원이 정치권력에서 점차 경제권력 으로 전환됨을 관찰할 수 있다. 자본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이나 경제인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비체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양극화 사회의 단면이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 기생충 >(봉준호, 2019)은 그 변화의 결정판이다. 글로벌 IT 자본가와 불안정한 노동 무산계급(precariat) 가족이라는 양극화된 인물 설정, 그리고 경제적 계약 관계에 내재된 이중 윤리도 인상적이다. 극중 동익( 이선균 )과 연교( 조여정 )는 기택( 송강호 ) 가족을 상냥한 태도로 존중하는 동시에 피고용인으로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암묵적으로, 하지만 명확히 전제한다. 계약에 근거해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용인으로서 선의를 베풀지만, 피고용인이 그 이상을 요구하거나 불필요하게 간섭하는 등 그들이 전제한 ‘선’을 넘는다면 이들을 ‘혐오(비체화)’한다. 자신들이 혐오 받고 있음을 지각한 피고용인들의 분노는 결국 테러를 유발한다. 역시나 정치의 개입 없이 부자와 빈자 간 격돌만 존재하는 탈정치적 생명정치 프레임이 적용된다. 다만 비체 간 매개나 연대 없이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을’들 간의 권력 투쟁만 이어진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사회 속 비체의 특성을 반영하는 듯 내러티브가 한층 더 비관적으로 변주되었다는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 오징어게임 >(황동혁, 2021)은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설정을 통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정당화되는 체제를 상정해서 자본주의가 자연화된 세계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경제권력이 낳는 비체화가 최근 주류 한국영화 및 한국 콘텐츠에서 자주 나타나면서 기존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전형에 변형을 가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길항: 수행적 자기 모순 <기생충> 중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수행적 자기 모순 이다. 작품들 자체는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비체 간 대안 윤리를 모색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비판한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를 살찌우는 방식으로 소비 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거둔 기록적인 성과는 영화에 상품성을 불어넣어 글로벌 체제로 빠르게 흡수되도록 만들었다.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비관적인 사회상을 그리게 되기까지 동시대에는 어떠한 문제가 고질적으로 누적되어왔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노력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중은 화제의 작품을 찬양하고 소모하면서 그 안에 담겨있던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수신하지 않는다. 다양한 해석과 전유의 가능성을 지닌 작품일수록 이를 즐기는 관객을 통해 수입이 증대되지만, 이렇게 화제성을 얻어 글로벌 미디어 현상으로 번진 작품은 시뮬라크라(simulacra)로서의 바이럴 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적 네트워크가 ‘바깥’을 지시하는 어떠한 시도도 허용하지 않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자본주의는 체제의 바깥을 상정하는 비판적 텍스트마저도 무섭도록 강력한 포섭력으로 다시 흡수함으로써 태연하게도 비대화된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기조에서 발생한 콘텍스트와 여기에 저항하는 텍스트 간의 이 길항적 공생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내게 숙제로 남아있을 것 같다. 오늘 특강에 찾아와준 여러분들도 함께 고민해주시면 좋겠다. * 질문과 답변 * (질문 1)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유사-할리우드’를 흥행 전략으로 삼았다. < 쉬리 >(강제규, 1999)와 같이 할리우드 스타일이 주를 이루되 한국적 요소를 가미해 대중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올드보이>가 200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후부터 ‘한국영화’가 전 세계에 하나의 장르와 같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영화가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장르로 거듭나며 국제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이유 는 무엇일까?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오늘 강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2000년대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한국적 특성을 지닌 작품들이 글로벌 시장에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해 질문 해주신 듯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요인을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영화인들의 열정과 애정 에서 찾고 싶다. 1980년대 서울대 얄라셩영화연구회 회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서울영화집단’의 선집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2000)에 장선우 감독이 기고한 「새로운 삶. 새로운 영화」나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와 같은 글들을 보면, 당시 시네필 문화를 견인한 인물들이 서구 영화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와중에도 어떻게 자신들만의 주체성을 담지할 것인지 에 대해 끊임없이 각성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해외 영화의 수준에 근접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저에는 어떻게든 우리만의 영화를 스스로 만들어보려는 열망도 있었고, 이 기세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일군의 감독들에게도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 같다. 과거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폭력의 가해자로서의 정부나 제도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한국사회 자체에 대한 애정은 충만한 것이다. 이는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판적 측면을 영화화하고자 하는 집단적 지성이자 욕망 과 같다고 본다. (좌)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우) <괴물> 중. 재난 상황을 해결하려는 인물은 거의 ' 일반 시민 '이다. 한국영화에서의 ‘장르’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저서에서 다룬 ‘재난 영화’는 한국에서 2000년대 들어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할리우드 스타일을 복사해 적용했다. 화재, 건물 붕괴, 비행기 추락 등 할리우드 재난 영화가 사용한 도상을 추출해 한국적 맥락에서 토착화하려는 시도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작품 자체의 질적 완성도를 높임과 동시에 한국적 특성을 더 정교하게 반영함으로써 걸출한 한국형 재난 영화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는데, <괴물>(2006) 정도가 그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서는 사건을 해결하는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영웅적 인물이 등장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괴물>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형 재난 영화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인물들은 거의 일반 시민이며, 이들은 비체가 되어 고난을 겪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스스로 사건을 해결한다. ‘유사-할리우드’ 전략으로부터의 탈피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가 빠르면서도 완성도 높게 이뤄질 수 있었던 데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독창적 한국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각별한 애정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질문 2) 강연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국영화는 유독 한 작품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도록 하려는 욕구를 강하게 내비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은 인위적인 연출의 느낌을 주거나 메시지의 일관성을 해친다는 점에서 국내 관객에게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언젠가부터 해외에서 먼저 이 장르적 혼종성 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국영화에서 엿보이는 장르 혼종적 특징이 결국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향후에도 이 특징이 작품에 지속적으로 반영될 수 있을지 가 의문이다. (답변) 장르 혼종에 대한 한국영화의 집착이 계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며,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워낙 여러 감독에 의해 반복되다 보니 이후 세대 감독들 역시 의식적으로 유사한 경향을 도입하되 자신만의 방식으로 혼종을 시도해 작품에 개성을 더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장르적 혼종의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그와중에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수요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강연에서 이야기한 마인드게임(mind-game) 영화와 같이 병리학적 증상을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이 맞닥뜨린 게임 상황을 관객과 함께 헤쳐 나가는 스타일은 할리우드의 여러 작품에서 ‘장르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중이다. 이처럼 유사한 영화적 스타일이 전 세계에 걸쳐 긍정되는 현상 은, 어떻게 보면 동시대 문화와 미디어 전반에 형성된 광범위한 네트워크의 영향력 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그 ‘바깥’을 떠올리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안의 세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영화와 같은 ‘텍스트’에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더라도 이를 둘러싼 삶의 현장으로서의 ‘콘텍스트’ 측면에서는 ‘핵인싸’가 되고 싶어한다. 조금 다른 주제이기는 하지만, 견고한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영화적 경향이나 스타일이 동시다발적으로 긍정되는 현상도 이와 같은 측면에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질문 3) 한국 상업영화만의 특징 이라고 일컬어지는 전형적 인물상이나 신파성 등이 해외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답변) 한국영화 전체를 일반화해 답변드리기가 어려워, 하나의 사례를 바탕으로 말씀드리고 싶다. < 부산행 >(연상호, 2016)의 경우 개봉 당시 국내에서는 신파적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해외에서는 신선한 좀비 영화로 긍정적으로 조명된 바 있다. 서구적 좀비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이 나타나서 그럴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해외 좀비 영화에서는 인간과 좀비의 구분이 명확해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좀비가 되면 즉시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부산행>과 같은 한국의 좀비 영화는 좀비로 변했더라도 그 인물에 대한 다른 인물의 감정적 반응이 지속된다. 한국문화에서 엿보이는 ‘정’이나 ‘유대’의 개념이 투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을 해외 관객들은 색다르다고 느낀 것 같다. (질문 4) 설명해주신 ‘글로벌 시네마’는 역사와 정치, 사회의 흐름을 반영해 주제의식과 내러티브를 설정한다. 반면 이렇게 거대한 프레임으로 동시대 사회를 조망하는 영화적 구도에 피로감을 느낀 창작자들은 개인의 삶이나 감정을 미시적으로 다룬 작품들 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향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시는지 알고 싶다. (답변) 사실 현재 연구 중인 주제로서 오늘 강연한 ‘글로벌 패러다임’은 동시대를 따라 이미 흘러가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내가 제시한 글로벌 프레임을 넘어서 다가올 사회를, 그리고 그 속의 개인을 살펴보는 작품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2010년대 이후에는 탈정치적 모순에 따른 이중 윤리 외에도 사회 안에서 여러 복합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반영하는 작품들이 계속 발표되고 연구되리라고 예상하며, 나 역시 새로운 흐름을 지켜보고 싶다. (질문 5) 강연 초반 이창동과 홍상수의 작품에 대한 공간적 키워드로의 분석을 보면서, 두 감독 등장 이전 세대라고 언급하셨던 감독들의 작품 에서는 동일한 의미의 ‘집’과 ‘길’ 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까? 특히 장선우 감독의 경우 홍상수 감독의 ‘길’과 같은 방식으로 공간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이를 다소 모호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경마장 가는 길> , <너에게 나를 보낸다> 중 (답변) 두 감독 이후의 한국영화 감독들이 거의 이창동 감독의 방식 을 따랐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이전 세대 역시 유사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이창동 감독의 이력을 고려할 때 그의 작품 세계의 바탕에 문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한국문학계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이어지는 와중, 보다 주류에 가깝다고 논의된 사조는 리얼리즘이었다. 또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 감독들의 공간이 지닌 리얼리티 역시 이창동 감독의 방식에 가깝게 구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선우 감독의 < 경마장 가는 길 >(1991)과 < 너에게 나를 보낸다 >(1994)가 원작으로 하고 있는 소설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을 보인다. 다만 장선우 감독의 이력을 참고할 때, 이러한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이 그의 작품 세계가 지녔던 맥락과 조금 어긋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 이야기한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와 같은 글에서 나타난 장선우 감독의 의지는, 포스트 모던을 대표하기보다 한국적 공연 및 서사 문화의 감각을 유기적인 체계로 조직하는 데 가까웠기 때문이다. 1995년 정도부터 영화계의 ‘코리안 뉴웨이브’에 대한 주목이 차츰 줄어든 배경에는 이러한 어긋남이 자리했던 것 같기도 하다. *** 주1. 니체가 『비극의 탄생』(1872)에서 비극(예술)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속 빛의 신 아폴론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특성을 이용한 방식을 참고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 태양과 같은 밝음과 그 밝음 아래서 사물이 드러내는 균형 및 질서 등을 의미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무질서한 혼돈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생명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주2. 복잡한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을 게임으로 초대하는 200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한 경향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 메멘토 >(2000)와 < 인셉션 >(2010) 등이 해당한다. 주3. 영화 작가주의 개념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할 때 정치적 운동의 일환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세상을 향한 21세기 영화 작가들의 태도에서 정치성은 훨씬 더 징후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고, 이를 다각도로 분석한 필자들의 글을 동료와 함께 취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