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의 병태만세
- 감독
- 김수형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김병태, 정한용, 이미영, 김만, 홍승일, 서대동, 김효천, 박세준, 조서희, 박주연, 국정숙, 조정수, 엄호미, 박근형, 김길호, 이일웅, 조재성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K-컬쳐와 함께 성장한 회사 덱스터스튜디오는 2012년 영화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의 메인 캐릭터인 대형 고릴라 제작을 위해 김용화 감독이 국내 시각특수효과(VFX) 1세대 슈퍼바이저들과 의기투합해 설립한 회사다. 덱스터스튜디오의 이름은 김용화 감독이 지은 것으로, 라틴어 ‘재주가 좋은,’ ‘기술이 좋은’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름처럼 한국에서 최고의 솜씨를 가진 회사로 만들자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주인공인 고릴라의 수준 높은 디지털 털(fur)을 구현하기 위해 제작프로그램 질로스(Zelos)를 자체 개발했다. <미스터 고>는 제34회 청룡영화제 기술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술상, 제19회 춘사영화상 기술상, 제8회 AFA (Asian Film Awards) 최우수 시각효과상을 수상했다. <미스터 고> 제작 시 할리우드 예산보다 대폭 절감된 120억 원대로 고릴라 제작에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실력을 인정받아 한국 특수효과 기업 최초로 할리우드 최고 VFX 학술 컨퍼런스 ‘DIGIPRO 2013’ 메인스트림을 장식하게 된다. 당시 픽사, 디즈니, 드림웍스, 리듬앤휴즈(< 나니아 연대기 >, < 라이프 오브 파이 > 등), 이미지 엔진(< 디스트릭트 9 >, < 왕좌의 게임 > 등), 웨타 스튜디오(< 반지의 제왕 > 등)에서 제출한 논문들을 제치고 컨퍼런스 대표 작품으로 주목받아 화제를 모았다. 덱스터스튜디오는 2024년 현재 80여 개의 자체 소프트웨어를 개발·운영하고 있다. 덱스터 스튜디오 로비의 <미스터 고> 고릴라 모형 덱스터스튜디오의 사업 영역은 처음에는 VFX 하나로 시작해서 점점 세분화되며 다양해졌고 제작과 음향까지도 발을 넓혀왔다. 2015년 코스닥에 상장하였는데, 이는 여러 부서 및 연관 사업들로 조직이 확장해 나가는 발판이 되었다. 덱스터가 공동제작사로 참여한 영화 < 신과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은 회사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만든 작품인데, 자체 VFX 기술 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함과 동시에 덱스터스튜디오가 제작도 하고 VFX 등 포스트 프로덕션도 맡는 회사라는 점을 확실하게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덱스터스튜디오는 2024년 기준 본사와 자회사 6개가 연결된 그룹사이다. 현재 덱스터스튜디오의 VFX 본부에는 제작관리본부와 함께 200여 명의 아티스트가 있고 VFX 본부 이외에 VP본부, DI본부, 사업개발본부, 실감콘텐츠본부 등 6개의 본부와 1개의 R&D 연구소가 있다. 자회사는 총 5개로 광고회사인 ‘덱스터크레마’와 음향 회사인 ‘라이브톤,’ 제작사인 ‘덱스터픽쳐스,’ 광고 쪽 후반 작업을 담당하는 ‘테이커웨이,’ 경주의 미디어아트 사업을 맡아서 진행할 ‘플래시백그라운드 경주’ 등이다. 본사인 상암동에 320명 정도의 임직원이 있으며 있으며 광고회사까지 다 합하면 450명 정도의 인원이 일하고 있다. 덱스터스튜디오 로비와 데이터 스토리지 말하자면 VFX(특수영상, 시각효과)에 기반한 콘텐츠 기업으로 시작하여 현재 영화, VR, 뉴미디어를 망라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종합 스튜디오 기업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실감콘텐츠, AR·VR·XR, 메타버스 등 신기술 분야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는 중이다. 기획부터 XR까지: 영상 콘텐츠의 모든 것 상장 이후 너무 여러 개의 회사로 쪼개져 있다는 일부 의견이 있으나, 분사한 회사는 덱스터픽쳐스 한 곳이고 나머지는 인수를 통해 자회사로 편입된 형태이다. 덱스터스튜디오가 <신과함께>와 같은 대형 작품의 제작을 함께 하며 제작 조직 규모가 커지면서 효율적인 방향을 찾기 위해 분사한 경우이다. 자기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보다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제작사를 분사한 반면, 직접 콘텐츠 제작 이외 전 과정을 커버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을 가진 회사들을 인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옥은 2012년에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가 파주 출판단지에서 4년, 이후 마포구 상암동으로 이전한 뒤(마포구 상암동 매봉산로 75) 주 본부는 현재까지 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자회사 중 라이브톤은 상암과 일산에 지금 2개소가 운영되고 있고, 색보정을 하는 DI본부는 상암과 일산에 배치되어 있다. 버추얼프로덕션 D1스튜디오는 파주에 있고, 덱스터크레마 광고 회사는 선릉에 있다. 덱스터스튜디오 상암 본부의 메인 공간은 18층과 19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18층은 재무실, HR실, 전략기획실, 덱스터픽쳐스, R&D실 외 기타 회의실들로 구성되어 있다. 19층의 경우, 영화 <미스터 고>의 주인공 고릴라 인형이 있는 로비 공간이 있고, 남쪽과 북쪽으로 작업 및 사무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남쪽은 파이프라인에 맞게 각 파트별로 공간이 배치돼 있다. 북쪽은 슈퍼바이저실, 제작 관리본부, 키친, 강의실, 휴게실, 대표 집무실이 있고 시사실이 가운데 크게 배치되어 있다. 18층과 1층에는 R&D 관련 장비와 포토 스캔 장비, 애니메이션 작업을 위한 모션캡처를 받는 장비가 구비되어 있기도 하다. 덱스터스튜디오 19층 워크 플로어 현재 공동대표는 김욱 , 강종익 두 사람으로, 이들은 덱스터에 대해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회사’라고 소개한 바 있다. 콘텐츠 제작에서 덱스터만이 가진 가장 큰 기술적인 장점은 모든 시스템이 회사 내부에 존재하고, 전체 작업을 관통하는 확실한 파이프라인이 있다는 점이다. 즉 하드웨어적인 인프라, 프로젝트를 관리·운영하는 소프트웨어, 구성원 간 효율적인 소통을 위한 규약까지 포괄하는 시스템이 회사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기술적인 도전이 유독 많았던 영화 < 더 문 >(김용화, 2023)을 제작할 때 도움이 되었고 이후 기술적으로 진일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후반작업업체가 기획과 제작에까지 관여하다 보니 장점이 있다. 슈퍼바이저들이 후반작업뿐 아니라 기획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감독의 상상력을 높이는 역할을 하면, 그게 다시 후반으로 이어지면서 퀄리티가 올라가게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단순히 크리처 하나를 더 리얼하게 만든다기보다는, 거기에 감정을 넣는 연출을 이해하고 나서 작업을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점 덕분에 덱스터가 영화나 영상 작업 시 기획부터 참여하게 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덱스터 스튜디오 시스템 매니지먼트 벽면 드로잉 이런 덱스터의 강점은 관객들로 하여금 덱스터가 한국 장르영화나 영상에 있어서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가 보장되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곳이라는 인식을 주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특히 최근 VFX가 강조되는 콘텐츠의 경우에는 제작에도 참여하는 경우가 많고, 그 결과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사명이 나오다 보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회사의 이름이 각인될 수밖에 없다. 2010년대 이후 복잡하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영상 콘텐츠 산업 환경 가운데에서 덱스터는 성공적으로 적응했고, 충실히 미래를 대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AI 기술의 발전은 영상산업, 특히 후반작업 분야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후반작업 기업(나아가 종합 콘텐츠 기업) 덱스터가 이러한 도전에 어떻게 성공적으로 대응할 것인지가 향후 한국 영상콘텐츠 산업 전반의 미래를 가늠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 같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 매봉산로 75 2) 설립일 : 2012년 3) 대표자 : 공동대표 김욱, 강종익 4) 규모 : 면적 19층 3,211.56㎡, 18층 3,242.51㎡ 5) 공간 구성 : DDMC 빌딩 19층, 18층, 1층으로 구성 - 19층: 슈퍼바이저실, 제작관리본부, 키친, 시사실, 강의실, 휴게실 - 18층: 덱스터피처스, 재무실, HR실, 회의실, 사업개발본부, IT인프라지원실, 전략기획실, 경영관리본부 - 1층: R&D 6) 조직도 및 조직 구성 - (주)덱스터스튜디오: 전략기획, 재무관리, HR지원, IT인프라 지원, VFX본부, 제작관리 본부, VP본부, 실감콘텐츠 본부, 사업관리 본부, 콘텐츠 본부, DI본부 - 연결종속회사: 라이브톤, 덱스터 픽처스, 덱스터크레마, 테이크이웨이, 네스트이엔티, 플래시백그라운드경주 7) 구성원 : 사원수 332명(VFX,DI,VP 265명, 실감콘텐츠·사업개발·콘텐츠 35명, 관리 32명) 8) 주요 장비 (영사 장비, 음향): 18층과 1층에 RND 관련 장비, 포토 스캔 작업용으로 카메라가 원형으로 둘러쌓인 장비, 1층에 애니메이션 작업용 모션캡처 장비 취재 일자: 2024년 8월 20일 글/인터뷰 진행: 김문경 사진: 허 성
K정연과 알고 지낸지 거의 10년이 됐지만 함께 영화를 본 건 손에 꼽는다. 그와 많은 것을 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도쿄에 가서 목욕탕에 가고 한 침대에서 자고 파리에서 햄버거를 먹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전시를 보고 런던의 클럽에서 아마추어 밴드의 저주에 가까운 음악을 듣고… 그러나 영화를 같이 봤냐고 물으면 기억나는 건 단 한번 뿐이다. 임재철 평론가의 클래스에서 본 장 피에르 고랭의 <루틴 플레져 Routine Pleasures>(1986). 지난 글에서 말한 바 있는 이 영화를 서너명의 사람들과 어느 출판사 건물에 딸려 있는 강의실에서 봤다. 밤이었고 출판사에는 사람이 없었고 왜인지 우리가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도 상영하지 않고 보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도시를 떠돌며 빈 건물을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씨네-프레카리아트. <The Cinema of the Precariat>의 서두에 톰 자니엘로는 이렇게 쓴다. “프레카리아트는 미미한 존재감 때문에 언제든 끝장날 수 있음에도 계속 (영화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에.” 1) <루틴 플레져>는 장 피에르 고랭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두 남자가 작은 역의 벤치에 앉아 기차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한쪽이 자기 인생사를 들려준다. 난 언제나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로저가 이야기를 끝내면 내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장면: 살찌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와 그를 바라보는 장 피에르 고랭 미디엄 투샷) <루틴 플레져>의 오프닝 씬을 나와 K정연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쪽이 이야기를 끝내면 다른 쪽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쪽이 살찐 아저씨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건 결국 둘 다 말하고 둘 다 듣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일반적인 대화와는 약간 다르다. 영화와 관객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까? 영향을 주고받지만 실시간적으로 일어나는 교류나 상호작용은 아니다. 한쪽이 끝날 때까지 다른 한쪽은 기다려야 한다. 영화는 인터랙티브 아트가 아니다. 영화가 마주해야하는 건 즉각적인 응답, 반응, 참여가 아니라 어둠과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불안정한 기다림이고 불현듯 잉태되고 사라지는 잠재성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내용 없는 인간>에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행위를 시간의 지속성이 단절되고 차단된 느낌, 정신의 바깥, 근원적인 차원에 체류하는 사태로 묘사한다. 이러한 유보를 그리스어로 에포케epoche라고 한다. “즉 리듬의 에포케라는 바깥으로 떨어져 나오는 행위를 통해 예술가와 관람자는 그들의 본질적인 동맹 관계와 공동의 지반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2)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우정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영화는 우정의 한 형식이다. 정성일과 유운성 평론가의 평론집 첫 챕터 제목은 각각 다음과 같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영화 친구를 사귀는 방법에 관한 작은 가이드”. 3 ) “우정의 이미지들”. 4) 유운성은 세르주 다네를 인용한다. “유대 그리고 우정이라는 말은 아주 아름다운 말이다. 나는 한번도 우정이라는 관계 이외에 사람들과 다른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영화만큼 우정을 사랑하고 의미화하는 예술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돈씨와 제가 10년 동안 같이 본 영화가 한편이라는 사실이 우리 관계를 증명해주는 같네요. K정연이 말했다. 뭘 증명하는데요?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 영화와 우정에 대한 K정연의 철학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친구였다면 더 많은 영화를 함께 봤을 거란다. 그 태도가 너무 단호해 나는 섭섭함과 함께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뭔가 반전이 있겠거니 했다. 예를 들면 우정은 친구 이상의 것, 자신 안에서 타자를 발견하는 탈주체화의 지각이자 게니우스genius적인 것과 스페키에스species적인 것과의 관계 맺음이며 극장과 카메라가 사라지거나 감춰진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의 변화한 상호주관적인 행위다, 등등. 그러나 K정연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2살 많잖아요. 헉. 앞으로 형이라고 하세요. K정연…!!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을 보니 오후 여섯시였고 나는 원고를 쓰다 지쳐 컴퓨터 앞에서 깜빡 낮잠이 든 거였다. 메일이 와 있었다. 영자원 담당자에게 온 메일로 마감 시한을 고지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K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꿈 얘기는 하지 않았고 우리가 써야할 원고에 대해서, 우리가 만들 에세이 필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정연씨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쓸 테니 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21세기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고견을 들려주세요! K정연이 말했다. < 고양이를 부탁해 >(2001)는 계급과 주거,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영화다, K시네마를 주거와 부동산의 역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주택자의 영화, 다주택자의 영화, 전세사기꾼의 영화, 메타버스 가상부동산 업자의 영화… 홍상수와 김기덕은 홈리스 영화의 대표적인 두 형상이다, 한쪽은 돈이 많아서 집 없이 전국을 떠도는 모텔-호텔 생활자, 다른 한쪽은 돈이 없어서 강바닥과 절을 떠도는 (검열)… 등등. K정연은 이사를 한뒤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했다. 나는 동료 소설가인 오한기도 부쩍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왜 사람들은 집에 관심이 많은 거예요? 지돈씨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알 거예요. K정연……. 네? 아니에요. 모든 한국의 연극영화과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이상한 문화가 있었다. 선배를 무조건 형이나 누나, 언니 또는 오빠라고 불러야 했다. 선배를 선배라고 하면 하극상으로 끌려가서 얼차려를 받았다(대체 왜?). 자신보다 어린 선배를 선배라고 하면 기강이 해이해진다는 이유였다. 형, 누나야말로 윗사람을 대하는 진정한 호칭이란다(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정상…). 이것 말고도 학교에는 이상한 문화가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 다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선배들을 피해다녔다. 형, 누나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아서였다. 외동으로 자란 탓일까? 사람들은 왜 형이나 누나, 오빠, 언니라는 호칭을 좋아할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영화를 찍지 않는다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유사 가족 문화권에서는 진정한 시네마가 태어날 수 없다고. 가족은 우정이 아니라 혈연이고 K시네마의 혈연은 가부장제와 연결되며 가부장제는 남성연대와 여성혐오로 이어지고 결국 신자유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면화한 청년 남성으로 과대표화된 담론과 정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고양이를 부탁해를 다시 보자고 한 거예요. K정연이 말했다. 영화야말로 젠더를 생산하고 그 성격을 결정짓는 “젠더 테크놀로지”입니다. 5)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지 않았다. 영화 개봉 당시 생물학적 여성인 친구들이 너무 좋다고 말하며 등장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흉내내고 논평했던 게 기억나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그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컴퓨터 스크린으로 혼자 영화를 보는 것만을 유일한 낙으로 생각한 웹친화형 K-시네필이었기 때문일까. <고양이를 부탁해>를 검색했다가 잊고 있었던 단어를 발견했다. “와라나고”. 와라나고는 수작이지만 블록버스터에 밀려 극장에서 제대로 상영 못한 영화를 네티즌이 발굴해낸 영화 다시 보기 캠페인이었다. < 와이키키 브라더스 >(2001), < 라이방 >(2001), < 나비 >(2003), <고양이를 부탁해>. 문득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영화들이 생각났지만, 다시 한번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와라나고 캠페인에 속한 어떤 영화도 보지 않았다. 이런 내가 21세기 한국영화에 대한 에세이필름을 만들 자격이 있을까. 이렇게 영화를 안 보는데? 학교 선배들이 왕가위와 이와이 슌지, 미야자키 하야오를 보지 않는다고 훈계를 했던 해묵은 일도 기억났다. 어떻게 <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를 안 볼 수가 있어? < 화양연화 >도 안 봤다고? 제정신이니? 넌 영화과라고 할 수가 없구나. 과거가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단지 원고를 쓰고 에세이필름을 만드는 일의 어려움과 지속불가능성, 때때로 급습하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와 공포 때문일까. 나는 K정연에게 다음 문장으로 끝나는 긴 메일을 보냈다. “…… 건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그건 무리겠죠? 격일로라도 밝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음날, K정연에게 전화가 왔다. 지돈씨.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왜 K정연인지 알았어요. 왜요? 키아누 리브스가 뉴욕타임즈 비평가 선정 21세기 가장 위대한 배우 4위인 거 아시죠? 키아누 리브스 생일이 9월 2일이거든요. 그리고 제 생일도 9월 2일. 지난 원고에 이 이야기를 쓴다는 걸 깜박했네요. 그걸 왜 써요…. 오늘은 오전에 나윤이(K정연과 박지은 사이에 태어난 딸을 뜻함) 문화센터에 데려다주고 작업실로 가는 버스를 탔거든요. 버스에서 상우씨가(이상우 소설가를 뜻함) 추천해준 젠하이저 이어폰을 끼고 넷플릭스로 <키드 디텍티브>를 보며 응암으로 가는데 문득 기분이 이상한 거예요. 세줄 뒤에 앉은 덩치 큰 중년 남자가 저를 쳐다보는 것 같더라구요. 그게 누군지 아세요? 키아누 리브스? 유운성 평론가. 헉. 그래서요? 그래서…. K정연이 말했다. 그래서… (다음 화에 계속) 1) <The Cinema of the Precariat: The Exploited, Underemployed, and Temp Workers of the World >(Thomas Zaniello, Bloomsbury Academic, 2020) *본문에서 괄호 안은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이다. 2) <내용 없는 인간>(조르조 아감벤, 윤병언 옮김, 자음과모음, 2017) 3)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정성일, 바다출판사, 2010) 4) <유령과 파수꾼들>(유운성, 미디어버스, 2018) 5) “섹스리스 K-시네마: 한국영화 속 젠더 배치의 문제”, <21세기 한국 영화>(손희정, 앨피, 2020)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유신체제기 | 1975~1979년 197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유신헌법에 근거해 1974년부터 발동된 긴급조치와 1975년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의 시행은 한국 사회를 더욱 경직되게 만들었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국회 동의 없이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는 행위다. 특히 1975년 5월 13일 시행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집회·시위 그리고 언론이나 표현물을 일절 금지했다. 물론 영화 검열도 강화됐다.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영화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1974년 41% 수준이던 수정·반려 비율이 1975년에는 80%에 이르게 된다. 한국영화산업의 수치도 불황을 증명한다. 한국영화 제작/상영 편수는 1975년 94/115편, 1976년 134/106편, 1977년 101/66편, 1978년 117/69편이었고, 외화 상영 편수는 1975년 70편, 1976년 71편, 1977년 47편, 1978년 41편, 1979년 68편이었다. 편수로는 한국영화와 외화가 엇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관람객도 상영 일수도 외화 쪽이 2배 이상 많았다(서울개봉관 기준). 명백하게 외화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다. 이 시기 제작사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국산영화를 만들었다. 1975년을 기준으로 보면 서울 소재 극장에서 일주일 이상 상영한 6편을 기준으로 수입권 1편을 부여하는 식이었다. 또 분기별로 5편을 뽑는 우수영화에는 각 1편의 수입쿼터가 주어졌다. 1976년부터는 정의조차 모호한 ‘우수영화’ 제작이 아예 의무화되었고, ‘국책영화’를 제작할 경우 수입쿼터를 주는 조항도 추가되었다. 제작사들은 일단 저예산 제작으로 작품 편수를 채우는 데 치중했으므로, 작품의 질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액션 장르를 중심으로 호스티스·에로영화가 판을 쳤다. < 바보들의 행진 >은 1975년 1월 말까지 진행된 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곳곳에 개작과 삭제 통보를 받았고, 그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2월부터 2개월간 촬영을 마친 후 4월 초 다시 본편 심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15군데의 삭제와 단축 통지를 받았다. 영화는 4월 3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 49일 동안 17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검열에 시달린 감독으로서는 예상조차 못한 히트였다. 그리고 당국은 이 작품에 ‘우수영화’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국가의 폭력과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온몸으로 새긴 영화를 통해 당대 관객들은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는 아이러니, 그 중심에 하길종 감독이 있었다. 뉴웨이브의 기수 하길종 1941년 4월 부산에서 태어난 하길종 은 1959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데모대의 최전선에서 4·19 혁명을 경험했다. 문학 활동을 했지만 후배 김승옥 등에 비해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졸업 후 항공사에 입사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를 만든다. 1965년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해 정규 영화교육을 받았고 M.A(이론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영화계 데뷔 전 하길종의 일부 이력에 대해서는 신화화된 점이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지만(안재석, 「하길종 감독 바로보기」, 『영화연구』, 2009), 그의 미국 체류가 이후 영화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 미국은 저항운동과 청년 문화가 주도한 변혁의 시기였고, 특히 그가 미국에 도착한 1960년대 중반은 미국영화의 뉴웨이브 즉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태동한 때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또 영화언어적으로 청년 하길종의 이성과 감성의 각 회로는 쉴 틈조차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1970년 한국에 돌아온 하길종의 연출 활동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김지하와 야심만만하게 개발한 시나리오 「태안전쟁」은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효석 원작을 동생 하명중 이 각색한 < 화분 >의 촬영도 예산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1972년 데뷔작 <화분>을 완성했지만, 영화가 내포한 정치성으로 대중적인 호응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시나리오들 역시 대중성 부족과 검열의 문제로 좌초되었다. 미학적 실험이 이어진 1974년 < 수절 > 역시 흥행에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하지만 1975년 세 번째 연출작 < 바보들의 행진 >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청년들의 감수성을 읽어내는 데 탁월했던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최인호 의 원작이었고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단성사 시사가 끝난 후 김수용 감독이 영화의 대중적 감각을 칭찬하자 하길종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는 그래서 유명하다. 검열로 인해 117분의 영화가 99분가량의 작품이 되었지만, 청년 관객들은 열광했다. 물론 감독 하길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지만, 그는 이 영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한국영화 10선으로 선정될 만큼 높게 평가받는 작품이고 하길종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대표작으로 <화분>을 뽑았다. 영화가 성공한 그해 하길종은 ‘영상시대’ 동인이 되었고, 서울예전 영화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그는 < 여자를 찾습니다 >(1976)와 < 한네의 승천 >(1977, 미개봉)으로 다시 주춤했고, < 별들의 고향(속) >(1978, 32만), < 병태와 영자 >(1979, 18만)로 흥행에 성공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세 작품 모두 최인호의 원작과 오리지널 시나리오라는 점은, 서구의 ‘뉴웨이브’ 영화언어라는 이상과 통속적 대중문화라는 현실 사이에 놓인 하길종의 복잡한 고민을 짐작하게 만든다. 1979년 2월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단 7편의 극영화를 남기고 요절한 하길종 감독 빛나는 감각 그리고 검열의 흔적 사운드 없이 대학생들이 팬티만 입고 연병장을 행진하는 장면으로 갑갑한 병영 사회임을 암시하며 시작하는 < 바보들의 행진 >은 검열과의 고투를 텍스트 곳곳에 노정하고 있는 영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102분 버전의 영화(블루레이 출시본)는 당시 개봉 때보다 2분 29초 더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네거티브(원본) 필름 자체에서 삭제된 15분 정도의 분량은 심의대본을 통해서만 상상해볼 수 있다. 병태( 윤문섭 )와 영철( 하재영 )이 참가한 입대 신체검사 장면이 끝난 후, 영화는 대학 캠퍼스로 자리를 옮겨 철학과 학생들이 인근 여대 불문과 학생들과의 미팅을 계획하는 장면을 담는다. 목욕탕에서 광을 낸 병태와 영철은 미팅 장소로 향하다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린다. 이 에피소드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영화 화법을 고민하고 완성시킨 하길종의 감각이 제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경찰과 마주친 순간 병태와 영철이 도망가기 시작하면 송창식의 ‘왜 불러’가 흘러나오고, 가사와 이미지가 맞아떨어지는 뮤직비디오 같은 화면이 계속된다. 촬영된 화면에는 구경하는 인파가 그대로 등장하지만 경찰과 장발 대학생들의 추격전이라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결국 둘은 경찰서로 잡혀가고, 경찰은 미팅이 있다는 둘에게 “흔해빠진 게 대학생인데 너희들은 혼이 나야 해, 너희들은 괴질이야”라고 나무란다. 이 장면의 아이러니는 경찰조차 장발이라는 점이다. “순경의 머리 긴 장면 클로즈업된 곳 단축”이라고 지시한 심의서류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연히 검열 과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102분 버전에는 살아있는 덕분에, 정부 권력에 대한 하길종 의 조롱과 야유를 읽어낼 수 있다. 둘은 경찰이 한눈판 틈을 타 경찰서에서 도망가고, 경찰이 “야 임마, 학생” 하고 둘을 부르자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 왜 불러”라는 가사가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온다. 이후 영화는 대학생들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분위기와 암울한 정서를 오가며 ‘파편적’으로 진행된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의 심의 사항을 반영한 117분의 텍스트에서 또 20분 이상 잘라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길종은 검열 당국의 요구 사항을 반영한 영화를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신을 흩트리고 다시 배치하는 과정을 수없이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초입의 ‘왜 불러’ 시퀀스가 보여주는 영화적 감각이, 전체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반부로 가면서 감독은 검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불균질한 텍스트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특히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이후 급격히 무너지는 리듬은 프랑스 누벨바그식의 형식 실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 포기한 채 단순히 나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유다. 심의대본에서 영화로 옮겨지며 크게 바뀐 장면 중 하나는 학생들의 시위로 휴강하는 신이다. 대본상으로는 학생들의 시위가 묘사되고(물론 이는 유신 반대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시위로 표현된다), 교수는 참가할 사람은 나가라고 말한다. 결국 교수는 휴강하겠다며 강의실을 떠나고, 칠판을 지우던 병태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상국가’의 획을 지우고 덧붙여 ‘사구라’로 바꾼다. 원래의 연출 의도는 학생들의 시위로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한 캠퍼스 풍경과 강의실에 홀로 앉아 고민에 빠진 병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에는 시위 장면을 모두 연고전으로 추정되는 여러 운동 경기의 실사 영상으로 바꿨다. 당국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통해 감독이 더 진전한 부분도 있다. 최종 대본(녹음대본)에는 아예 글자를 고친다고만 지시하며 한발 물러나 있지만, 사구라에서 ‘사쿠라’로 한 획을 더 쓰려고 하는 순간 커트하는 것이다. 이상국가에서 바뀐 사쿠라는 일본어로 벚꽃이기도 하지만 사기꾼, 야바위꾼, 한통속 같은 의미도 있다. 한국에서는 가짜라는 의미로도 즐겨 쓴다.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장면. 맨 아래 줄 왼쪽이 소설가 최인호, 오른쪽은 코미디언 이기동 한국의 ‘뉴 시네마’가 태어나다 < 바보들의 행진 >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비롯해 전 세계적 뉴웨이브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청년 문화를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그들이 놓인 배경을 다큐적 질감으로 제시하고 또 거칠지만 인상적인 숏 배열을 보여준다. 과감하게 줌을 쓰는 장면들도 그렇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기성곡을 영화음악으로 활용하며 뮤직비디오 신을 만든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 ‘고래사냥’ ‘날이 갈수록’을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해 영화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날이 갈수록’은 영화가 엔딩을 준비하면서 흘러나온다. 무기한 휴강이 결정된 캠퍼스에서 “들립니까”라는 외침이 들리고 병태는 구역질을 하는 듯 괴로워 보인다. 그리고 예쁜 고래를 잡겠다고 버릇처럼 얘기하던 영철은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떠난다. ‘고래사냥’이 힘차게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영철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신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뽑힌다. ‘그냥’ 입대를 선택한 병태는 빡빡 머리를 하고 입영열차에 타고 있고, 영자( 이영옥 )가 플랫폼으로 뛰어와 그를 찾아낸다.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 병태에게 영자가 키스하려 하고, 낭만적이게도 헌병이 그녀를 들어 키스를 도와준다. 심의대본에서 “입술을 맞추는 영자, 말리는 헌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영화는 당대의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한국영화의 뉴웨이브에서 가장 중요한 인자는 검열이었을지 모른다. 할리우드에서 작가주의 영화가 자본과 제작 현장의 소음을 뚫고 나온 것이라면 1970년대 한국영화의 작가주의는 당국의 가위질을 견디는 것까지 추가해야 했다. 하길종이 만들고 싶었던 ‘새로운 영화’는 당국의 집요한 검열로 파편화된 불균질한 텍스트가 되었고, 이는 당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의 ‘뉴 시네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검열과 자본과 창작자가 빚어낸 한국영화사의 비극적인 순간들은 1980년대로 이어졌다. 영철 역의 하재영(왼쪽)과 영자 역의 이영옥(오른쪽) 침체의 연속 1970년대 후반 한국영화가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낸 것은, 1960년대 대표적인 감독들과 영상시대 동인 덕분이었다. 유현목 , 이만희 , 정진우 가 각각 < 장마 >(1979), < 삼포가는 길 >(1975), < 심봤다 >(1979) 등을 내놓으며 각자의 자리를 지켰고, 김호선 , 홍파 , 이원세 등 영상시대 동인들의 작품이 또 다른 축을 버텨냈다. 특히 영상시대 활동은 동인으로 참가한 평론가 변인식 의 평가처럼 비록 ‘바보들의 행진’으로 끝났지만, 1980년대 초반의 사회비판적 리얼리즘 영화, 더 나아가 ‘코리안 뉴웨이브’의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 정권이 무너졌지만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신군부의 영화 정책은 유신 체제의 기조를 이으면서 반공안보영화의 제작을 추가했다. 당국의 요구대로 반공영화를 만들었지만, 반공영화가 아닌 반공영화가 등장한 것도 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장르영화로 연마한 임권택 의 구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