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IEANIFEST]코끼리와 거미줄 오귤낑
- 제작년도
- 2011
장윤미 감독으로부터 구미에 있는 KEC 기업의 민주노조를 촬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녀가 만들 노동 다큐멘터리가 어떨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KMDb를 통해 두 차례 소개한 장윤미 감독 영화의 뚜렷한 특징은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며 자유로운 카메라의 운용이다. 종종 찾아오지만 소박하거나 찰나적이기에 붙들기 어려운 아름다운 순간을 그녀의 카메라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 >(2014)의 거미줄이, < 늙은 연꽃 >(2016)에서 불쑥 틈입한 할머니의 미소가, < 공사의 희로애락 >(2018)의 아카시아가 흩날리는 순간이 그랬다. 궁금했다. 그녀의 카메라가 투쟁의 현장을 만나면 무엇을 보여줄까. 금속노조 KEC지회는 2010년 파업 이후 정리해고, 친기업 복수노조 설립, 손배가압류 등 사측의 지속적인 탄압에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를 지켜왔다. KEC지회는 교섭 대표 노조의 지위를 잃었지만, 2018년 임단협에 참여하기로 한다. < 깃발, 창공, 파티 >(장윤미, 2019)는 이 과정을 1년여 동안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KEC지회의 전략은 교섭 단체인 친기업 노조가 사측과 협의한 내용을 전해 듣고 이를 분석하여 전체 조합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친기업 노조의 조합원들까지도 설득해내는 것이었다. 전략은 성공했다. 사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나온 임단협 잠정합의안에 대한 전체 조합원 투표에서 60%의 반대를 끌어낸 것이다. 물론 이는 곧 새로운 싸움으로 이어진다. 같은 달, 교섭 대표 노조와 사측이 투표 결과를 따르지 않고 잠정 합의안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과 노동 다큐멘터리의 차원에서 볼 때, <깃발, 창공, 파티>의 중요성은 현 KEC지회를 이끄는 노조 간부이자 작품 주인공의 다수가 여성들이라는 데 있다. KEC지회의 지회장, 부지회장, 수석 부지회장 모두 여성 조합원이며 임원급 회의 자리에 참석한 대다수 또한 여성이다. 투쟁의 방식을 고민하고 전략을 짜는 브레인 역할도 여성이자 민주노총 경북본부 교육국장인 배태선이 맡고 있다. KEC의 노조 간 차별, 임금 차별은 물론 이 차별들의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이들의 목소리로 인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화적 차원에서 볼 때, 흥미로운 점은 역시 장윤미 감독이 택한 형식이다. 영화는 상당히 불친절한 방식의 재현을 시도한다. KEC지회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짧은 설명과 이 영화가 KEC지회의 입장에서 전개된다는 언급 외에 다른 설명적인 정보들은 없다. 정리와 요약 대신, 관객은 그저 그 상황에 던져진다. 이 회의가 무슨 회의이고 날짜가 언제인지, 발언하는 조합원의 직위는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개별 인물들의 인터뷰도, 상황을 설명해주는 내레이션도 없다. 카메라를 든 그녀 자신이 그랬을 것처럼, 회의를 하고 연대 투쟁을 하고 함께 산책하는 그들의 옆자리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시간이 걸린다. 복숭아, 감, 귤. 계절마다 다른 과일을 먹는 조합원들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정직하게 체험해야 한다. 관객들에게 뉴스를 보듯 상황을 단번에 파악하고 싶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인내심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영화.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163분(최초 상영이었던 부산영화제 버전은 168분이다)을 보내고 나면 가랑비에 옷이 흠뻑 젖어있듯, 전체가 한꺼번에 느껴진다. 그녀는 누구이고 그 마음이 어떠한지, 10년이 넘도록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큰 승리 혹은 패배에 초점을 둔 노동 다큐멘터리들에서는 삭제되었을 작은 승리와 세세한 고민이 전해진다. 이 모든 것들이 인터뷰를 통한 말로 발화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결을 간직한 덩어리 채 다가온다. 기존의 장윤미 감독의 영화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경이로운 순간은 한두 개의 솟아오른 이미지 혹은 쇼트에서 비롯한 마법 같은 것이었다. <깃발, 창공, 파티>에서 그녀는 자신의 장기를 절제한다. 대신에 KEC지회 사람들과 함께하길, 이들에게 익숙해지길 관객에게 요청한다.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긴 여정을 끝내고 나면 몇 가지가 선물처럼 주어진다. 연대, 존엄, 믿음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이는 기존에 그녀가 선사해준 영화적 순간들과 다르지 않다. 희미하고 찰나적이지만, 보석처럼 빛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사라진 프로그램 중 하나가 ‘대한 뉴스’다. 극장에서 본(本)영화를 보기 전 광고가 끝나고 나면 애국가를 상영했고 그런 다음 ‘대한 뉴스’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런 다음 기다리던 예고편들이 상영되었다.) ‘대한 뉴스’는 그때 프리미어 상영을 하는 개봉관이건 그 프린트를 받아다가 상영하는 변두리 재개봉관이건 관계없이 무조건 상영했다. 심지어 낡아서 비가 내리는 프린트로 상영하는 동시상영관에서 정작 ‘대한 뉴스’는 매주 방금 현상한 게 분명한 깨끗한 프린트로 상영했다. 기록에 따르면 휴전 직후인 1953년에 시작해서 1994년 12월까지 무려 2,040편이 제작되었다. 물론 ‘대한 뉴스’는 한국영화의 발명품이 아니다. 일제 식민지 강점하의 경성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동경에서 제작된 ‘일본 뉴스’를 영화 상영 전에 마찬가지로 상영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텔레비전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 무성영화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이걸 처음 시작한 것은 1909년 3월 31일 파리의 파테 계열 극장에서였다. 처음에는 그 이름을 ‘Path faits divers’라고 불렀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faits divers’는 관용구로 ‘일상사’라는 뜻이지만 통상적으로 (이제는 당신의 기억에서조차 가물거릴지도 모를) 종이신문에서 ‘사회면’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그런데 신문 편집국에서 1면이 가장 중요한 그날의 뉴스이고, (실제 페이지에 관계없이 신문에서는 관성적으로) 2면이 정치 기사, 그리고 3면을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소소한 사건들, 4면을 문화면으로 부르기 때문에 이 명칭은 ‘파테 3면 뉴스’ 혹은 ‘파테 세상 소식’이라는 뜻으로(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영미권 학자들은 이걸 ‘Path-Journal’ 혹은 ‘Path-Weekly’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파테 제작소에서 이걸 매주 만든 것은 아니고 격주로 제작했다. 물론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서 시작해 세상의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일상을 찍었지만 그들은 사회적인 사건이나 역사적인 순간의 장소에 가는 일에 별 흥미가 없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거나 공장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을 찍었을 뿐이다. 파테는 뤼미에르 형제와 달리 상업적 관점을 갖고 신문 저널리즘의 태도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텔레비전은 그때 SF 소설에나 등장하는 발명품이었다. 사람들은 신문에서 기사로 읽어야 하는 사건을 눈으로 보고 싶어 했다. 물론 파테 제작사는 신문사가 아니기 때문에 기자들에게 취재를 맡기듯 사건을 찍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 카메라는 무거웠고 필름은 여러 가지 기술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뉴스’는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때는 뉴스가 오늘 날처럼 그렇게 빨리 전달될 필요가 없었다. 파테 제작소는 카메라 기사 여러 명을 고용한 다음 그들을 화재나 살인사건이 벌어진 장소나 혹은 중요한 스포츠 게임이 벌어지는 경기장에 보냈다. 그들이 찍어오면 파테 제작소의 편집실에서 알베르 가보의 진두지휘 아래 이 ‘영상-기사’들을 마치 방송국처럼 편집을 하고 순서를 정해 오늘날의 방송 뉴스처럼 만들었다. 스포츠, 사회 등 다양한 소식을 다룬 파테뉴스의 장면들 이걸 다큐멘터리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파테 뉴스’는 텔레비전 뉴스의 ‘원시적’ 모델일 것이다. 하지만 ‘파테 뉴스’는 그때 큰 성공을 거두었고 뒤이어 영국에서는 ‘매일 매일(Day by Day)’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에서도 ‘파테 뉴스’를 수입해 유럽의 신기한 풍속을 소개하는 한편 미국의 일상사를 촬영해서 동시상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테 뉴스’를 가장 유심히 본 건 그때 막 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 모스크바에서 레닌의 위대한 승리를 문맹이었던 인민들에게 알릴 방법을 찾고 있던 공산주의 예술가들이었다. 소비에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적인 뉴스들. 분명히 지가 베르토프는 ‘파테 뉴스’를 보고 자신의 방법을 찾았음에 틀림없다. 아마 당신은 ‘파테 뉴스’에서 영화사의 또 다른 순간이 이어지는 계보의 선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영화사의 순간들은 점점 더 많은 거미줄을 펼쳐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말 그대로 거미줄의 역사.
주현숙 감독의 신작 < 빨간 벽돌 >을 보다 불쑥 떠오른 우화가 하나 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 돼지들이 각기 다른 재료로 집을 짓는다. 짚과 나무로 집을 지은 첫째 둘째의 시행착오를 거쳐, 셋째 돼지는 벽돌로 튼튼하게 집을 지어 늑대의 공격에 맞선다. <아기돼지 삼형제> 우화이다. 이 우화의 결말은 디즈니 버전은 좀 다르긴 하지만 두 돼지를 잡아먹고 셋째 돼지까지 잡아먹으려는 늑대를 막내 돼지는 끓는 물에 빠뜨려 잡아먹는다. 권선징악이자 먹고 먹히는 이야기다. 사실 <아기돼지 삼형제> 우화와 <빨간 벽돌>은 별다른 연관이 없다. 아마도 영화의 제목에서 셋째 돼지의 지혜와 생존전략의 도구인 벽돌이 연상된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실제 감독은 빨간 벽돌의 제목이 구로동맹파업 당시 구로공단을 둘러싼 벽이 붉은 벽돌임에 착안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아기돼지 삼형제>에서 시작하는 것은 연상 작용으로 비롯된 ‘의도적 오독’으로, 민중의 지혜와 생존전략을 담은 두 이야기를 벽돌로 이어내면서 둘의 비교를 통해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새롭고도 반가운 징후를 짚어보고자 함이다. 우화적으로 그리고 우회적으로. < 빨간 벽돌 >은 크게 두 축으로 아니 세 축으로 풀어볼 수 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지금은 중년이 된 여인들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다른 한 축은 2017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당시 구로동맹파업 언니들의 나이인 청년들의 인터뷰이다. 그리고 그 두 그룹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요청하는 감독이 존재한다. 큰 얼개로만 얼핏 보면, 구로동맹파업 사건을 중심으로 세대별 시선과 태도를 다루는 것 같지만, 영화는 예상과 달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부지런히 집을 지었고, 짓고 있는 아기 돼지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기돼지 삼형제>와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먼저, < 빨간 벽돌 >은 사건에 집중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건보다 인물에 주목한다. <아기돼지 삼형제>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들이 그렇듯, 사건을 중심으로 대상을 담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역시 은폐된 혹은 왜곡된 과거사를 다룰 경우,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인물은 당시 사건을 체화한 증거이자 증언자로 소환된다. 최근에는 사건의 공간 자체에 주목하면서 공간에 내재되고 축적된 기억과 감응을 전면화한 영화도 등장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인물은 부재하거나 전면화되지 않는다. 행동과 사건 중심 혹은 공간 중심의 이야기 구성에서 <빨간 벽돌>은 오늘을 살아가는 진행형의 인물에 주목한다.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 여분 동안 인물들의 일상을 나눈다. 몸이 마음 같지 않은 갱년기 증상에 대해, 솔 내음과 바람의 촉감을 느끼는 등산의 즐거움에 대해, 시어머니 병간호로 분주하고 힘들었던 마음에 대해, 나이 들수록 내면과 대화를 해야 할 때가 된 거 같다는 말을 통해 인물들의 오늘을 공유하고 동시에 낯가림을 풀어간다. 인물과 관계 맺기의 여정을 영화로 전반부 긴 시간 녹여낸 것이다. 참으로 낯가림 심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요 화두인 대상과 관계 맺음을 영화의 구조 속에 과감하게 기입한 것이다. 누군가를 알아가고 속내를 나누기까지 필요한 시간들을 영화 속에 기입한 것이다. 관계 맺음의 과정은 청년들과의 만남에도 같이 적용된다. 주어진 장소를 찾아오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시작해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를 말하는 감독의 모습이 삽입되면서 영화는 청년의 축이 시작된다. 다만, 중년의 언니들은 흘러가는 이미지(버스, 지하철, 자동차)를 따라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방식인 반면, 청년들은 세팅된 장소에서 감독이 무엇인가 요청하고 물음을 던지는 방식이다. 여기에 바로, 두 세대를 아우르는 감독의 위치와 태도가 담겨져 있다. 윗세대는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음 세대는 자리를 마련해 말 걸기를 시도하는 그 가교 역할이자 그 자리에 놓인 감독. 그러나 아무래도 감독은 윗세대가 조금 더 편한 모양이다. 중년 여성들의 말은 경청하고 맞장구를 치며 함께한다면, 청년들의 말은 요청되고 세팅되고 종종 유리벽 밖에서 그들을 담는다. 생략되어짐과 동시에 논의의 과정을 비춰내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청년들에게 정리해고 대상을 가려내라는 가상의 ‘나쁜 질문’을 던질 때, 감독은 386 세대의 이중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쁜 질문을 받고 싸웠지만 결국 그 질문을 더 공고히 전달하고 심지어 다그치게 된 그 위치. 그래서 이 마지막 장면은 가장 불편하고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묘한 장면이다. 영화는 이처럼 두 그룹을 담아내는 동시에 두 그룹의 사이에 위치한 감독의 위치 혹은 역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간간히 파편적으로 틈입하는 이미지들은 단순히 삽입 이미지라고만 보기 힘들 정도로 힘이 있다. 신발, 빨래, 운전사의 명찰 목걸이, 창틀 거미줄, 재봉틀... 감독의 시선이 일상 속 사물에 가 닿은 방식으로 읽힌다. 영화는 감독을 포함해 인물들의 오늘이 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여 분 지나서야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조금씩 풀어낸다. 영화는 조용히 우리들의 크고 작은 선택을 소환한다. 화장실이 급한데 지하철에서 내릴까 말까? 자고 간 남친의 팬티를 빨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다시 온 남친을 가라고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영화는 간간히 웃음을 유도하면서 살면서 마주하는 선택에 대해 말 걸기를 시도한다. 사실 숱한 선택을 해오면서 살아온 인생 아니던가. 어떤 선택은 여러 선택지 중에 나의 자의로 선택한 것도 있고, 어떤 선택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강요된 방식의 선택도 있다. 그리고 고스톱을 치고 돌아온 새벽녘 강명자 씨의 말처럼 “나 자신에게 쪽팔리지 않으려는” 선택도 있다. 영화는 선택의 수많은 결과 그 선택의 저변에 놓인 마음들을 섬세하게 짚어가면서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에 대해 다가간다. 구로동맹파업의 참가자들 더 나아가 수많은 민중항쟁과 오늘의 촛불 시위까지 “선택”으로 풀어낸다. 사건에 결박당한 인물이 아니라 인물이 선택한 사건과 경험에 대하여. 그래서 영화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장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던”, “구로공단에 언발란스 머리를 퍼뜨린 패션 감각”에 대하여, “넝쿨장미가 어우러진 공장 벽이 너무 예뻤던”, “기를 쓰고 벗어나려던 공장을 대학생이 공장에 들어왔다는 말에 받았던 충격”을, “50장을 하고 5장을 숨기던” 기억을 오롯이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 빨간 벽돌 >은 늑대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늑대의 악행이 말되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늑대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거나 늑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아기돼지에게 늑대의 악행에 대해 말을 하도록 묻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아기돼지의 일상과 기억을 공유하고 듣는다. 사실 늑대의 악행은 잘못된 사건과 문제를 고발하고 폭로할 때는 적절하고 유효하지만, 아기돼지의 입으로 악행을 말하게 되면 아기돼지는 사건에 결박당한 힘없는 피해자로 강제되어 버린다. “피해자의 피해자화”를 구축하게 된다고 할까. 영화는 아기돼지에게 늑대의 만행을 고발해 늑대의 피해자로 가두는 대신 아기돼지가 어떻게 벽돌을 선택했는지, 벽돌을 쌓아나갔는지, 지금도 열심히 쌓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피해자 서사의 프레임을 벗어버린 것이다. 우화 <아기돼지 삼형제> 역시 아기돼지를 피해자로만 가두지 않고 아기돼지의 지혜와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다. 그러나 우화는 결국 먹히거나 먹는 것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끝이 난다. 얼핏 보면 해피엔딩이지만 먹느냐 먹히는 구도 외에는 다른 여지가 없는 시스템이다.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가해자화 서사”는 우리 시대의 “나쁜 프레임” 중 하나이다. 피해자/가해자 서사 혹은 가해자화 서사는 결국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진흙탕 싸움을 유도하는 프레임이다. <빨간 벽돌>은 우리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걸고,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버틀러식 용어를 빌면, “박탈당한 주체”로서 우리를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박탈당했기 때문에 박탈당할 수 있는 것” 여기서 박탈은 자족성을 한계짓는 용어이자 우리를 관계적이고도 상호의존적인 존재로 확정 짓는 양가적 가치를 가진다. 영화는 사건을 겪은 혹은 겪어낸 인물들을 사건에 결박하기보다는 사건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속박하기도 하고 동시에 구성하기도 한 자율적 존재로 풀어낸다. 사람이 보이는 영화 <빨간 벽돌>은 우리 모두 유죄라는 집단적 대속 행위나 피해자에게 애도나 위로를 건네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사를 소환하고 기억하게 하되, 이를 통해 일상이 품은 정치적 수행의 가능성을 조용히 풀어낸 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