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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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제, 그리고 영화 시상식을 우리는 ‘영화인들의 축제’라고 부른다.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영화팬들 또한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그에 참여한 배우, 스태프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영화에 깃든 자신만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영화인 중 누군가가 “그저 상(賞)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상이라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거나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대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명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때, 정말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이 상에 어마어마한 보상이 붙어있어서 영화사에는 회사의 존폐가, 감독에게는 차기작의 유무가 걸려있었고, 이로 인해 매년 이 상을 둘러싸고 갖은 암투와 비리들이 횡행하며 영화계에 온갖 잡음을 만들어냈다. 대종상 타면, 그 상 타는 데서 심사위원들한테 로비를 해서 해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있었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영화계에 스캔들이 생기고 그렇지요. 또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심사위원 안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뭐 예술회원, 유명한 작가, 다 거의 심사시켜야 된다 그래 갖고. 또 (로비 받은 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추악한 일이 오랫동안 계속 돼…. - 호현찬 , 2004 영화평론가인 호현찬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에도 대종상에서는 수상작 선정 과정과 영화인들의 시상식 불참 등 해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1990년대 이전과 이후의 논란들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1980년대까지, 대종상 하나가 정말 중요했던 이유 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스캔들 에 집중할 것이다. 사실 1990년대와 그 이후 시기 대종상과 관련된 논란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아주 쉽게, 그리고 정말 훌륭하게 정리된 글들이 많아서 굳이 영화인들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에 비해, 궁금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 옛날 옛날에 대종상을 놓고 영화인들 간에 온갖 정치와 거래가 오갔다는데,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이를 알아보려면 우선 우리가 당시 대종상과 영화산업의 성격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결하게 하고 넘어가겠다. 나라에서 주는 상 대종상은 공보부 주최로 1962년 3월 30일 국립극장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을 포함해 총 16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상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서 가져가면서, 신필름은 훌륭한 스태프들을 데리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로 명성을 굳혀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에서도 이러한 신필름의 약진에 주목하는 한편, 처음으로 제정된 영화 시상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데에 대해 고무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62년 3월 30일에 열린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사진 하지만 이러한 찬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종상 시상식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제2회 대종상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영일 은 대종상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된 직후 신문 지면을 통해 대종상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버려야 할 전문가 기피증, 대종상 심사위 구성에 일언”, 《동아일보》, 1963. 2. 28. 6면 기사 *주1 ). 그렇지만 심사위원들의 교체 없이 제2회 대종상 시상식은 예정대로 3월 8일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대종상에 대한 논란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대종상 시상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 출품할 작품도 함께 선정했는데, 이게 영화제작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제작가협회에서는 며칠 후 아시아영화제 출품작 선정에 대한 건의서를 공보부에 진정했다. 11일 저녁 6시에 모인 제작가협회 이사회에서는 공보부 당국에 대하여 아시아영화제 및 백림영화제 출품작품 선정을 재심해줄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근본적인 저의는 이번 대종상심사와 영화제 출품선정의 결과에 대한 영화가의 비등한 반발 여론에 비추어 심사결과에 대한 불만불신의 표기로 짐작된다. 영화계 일부에서는 이번 심사를 ‘보이코트’하자는 여론도 높았으나, 재심으로 출품작품을 엄선하자는 결정에 이르렀다. - “아주영화제 출품작 재심 건의키로”, 《동아일보》, 1963. 3. 12. 6면 기사 이전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기된 불만을 의식한 것인지, 공보부는 제3회 대종상 시상식을 앞두고 영화평론가와 연극영화과 교수 등을 심사위원단에 포함시켰고, *주2 해외영화제 출품작의 경우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추후에 별도 선정하는 것으로 방식을 변경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1964년 제3회 대종상부터 “우수영화를 장려하는 보상책”으로 대종상 수상작에 대해 ‘외화쿼터’를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외화쿼터 주어, 대종상시상식”, 《경향신문》, 1964. 3. 5. 8면 기사). 대종상은 (공보부) 영화과에서 맹글었어요, 우리가. …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화제를 하나 맹글자, 영화상을’ 그래서 ‘상의 이름을 뭘루 허느냐?’ 게 생각허다가 ‘대종상으로 허자’ 이렇게 된 거예요. (우수영화) 장려를 말로만 허믄 또 시비가 되니까, 실제적인 실리를 주는 방향으로 허자. 그게 뭐냐? 쿼터. 우수헌 영화 장려하는 방법으로 쿼터를… 뭐 이렇게 된 거죠. - 이성철, 2009, 309~310쪽 1961년부터 공보부 공보국 영화과장으로 일했던 이성철은 대종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 덧붙여, 우수영화 제작 장려 및 그 보상의 일환으로 ‘쿼터’가 주어지게 된 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래도 ‘상(賞)’이니까, 무언가 그에 맞는 적절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쿼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쿼터란 국가에서 배정해주는 외국영화 수입 권한을 뜻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갈등의 씨앗은 바로 이 ‘외화쿼터’로부터 나온다. 외화쿼터라는 것은 왜 그렇게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억’ 소리 나는 쿼터의 가치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사와 외화수입업을 일원화시키는 동시에 이들 영화사의 수는 국가에서 등록제를 통해 조절하고 있었다(영화업 등록제는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으로 허가제로 바뀌며, 기존 20개사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12개로 줄어든다). 매 시기 영화법 시행령에 따라 허가된 영화사의 수나 외화수입쿼터의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산업은 소수의 영화사들이 제한된 ‘쿼터’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독과점 체제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국영화 수입편수 및 상영편수(1964~1985) 위의 표를 보면, 그래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는 1년에 50~70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배정⋅수입되었다(쿼터 수와 실제 검열을 받은 영화의 수가 다른 이유는 이전 해의 쿼터의 ‘이월’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표]에서 상영편수가 실제 수입편수보다 많은데, 이는 전 해에 수입되었지만 상영되지 못한 영화가 개봉하거나, 인기 있는 영화를 재상영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입추천(외화쿼터) 수가 줄면서, 외국영화의 수입이나 상영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외화쿼터를 둘러싼 각종 문제 역시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 더 심각해진다. 그때는 외화를 들여오면 1년에 20~25편이야. 그러니까 외국영화를 보려고 하면 하여튼 1년에 고것밖에 못 봐. 다른 작품은 들여오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아주 그건 정말 커다란 특혜지, 그냥. 그 대신에 쿼터를 어떻게 해서 얻느냐. 1년에 4작품을 해야 돼. 그래야 인정을 받아, 영화사 영업하는 걸. 그러고 저 우수작품 뭐, 대종상 에서 상을 탔다든지, 뭐 아세아영화제 이런 외국 가서 (상을) 탔다든지 그러면 쿼터 하나씩 나왔다고. … 또 뭐 반공영화를 만들면은 좀 점수를 줬고. … 그렇게 하고 인제 수출을 많이 해서 실적을 올려서 (쿼터를) 타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이 그렇게 돼 있었지. - 강범구 , 2011 , 268쪽 외국영화도 상을 타면 쿼터 하나. 근데 쿼터 값이 얼마냐면, 국산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700만 원 내지 800만 원인데, 쿼터 하나 값이 1,500만 원이었어 , 외화 들여오는 거. - 최경옥 , 2008, 143쪽 그게 내가 파라마운트(극장)에 있을 당시니까, 66년도부터 72년도까지 있었거든요? 나도 거기서 외화를 우리 사장님이 쿼타를 사오고 팔고 해가지고, 나도 그때 쿼타를 사가지고 네 편을 수입해 봤거든요. 쿼타를 사고 팔고 했지, 그때는. (쿼터 하나에) 천만 원 했나? 그거 하나 있음으로 해서 내가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니까. {그때 개봉관이 60원 정도할 때} 맞어, 60원. {그럼 억 단위네요, 지금은?} 크지. 그 당시에 60원 하면 요즘은 (입장료가) 6천 원이니까, 100배인가? 10억인가, 지금 돈으로? - 김성근 , 2010, 122~123쪽 그 대종상에서 작품상 타면 외화수입쿼터 하나 준 거야, 그냥. 그 외화쿼터 하나, 수입권을 얻으면 요새 가치로 봐서 약 한 50억 돼, 50억. 가서 외국영화 하나 괜찮은 거, 외국영화 수입을 무제한 개방해 놓은 게 아니고 1년에 20편, 24편 내외 수입쿼터로 맨들어 놨기 때문에, 우리나라 들어오면 그냥 어떤 거든지 그건 (관객이) 30~40만 들어간다니까? 음, 그러니깐 외국 나가서 한 10억 주고, 판권 10억 주고 외국영화 하나 사왔다 이거야. 근데 이게 여기서 100억이 되니 이게 얼마나 되냐, 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황금알 채 생긴 거위야. 그래서 그냥 서로가 별짓을 다하고, 인제 사회상은 그랬어요. - 김영효 , 2013, 430~431쪽 위의 구술도 대체로 이 시기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김영효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외화는 일단 상영을 하면 그게 어떤 영화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30~40만의 관객들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사들은 위험성이 큰 한국영화 제작보다 외국영화 수입⋅상영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최소의 비용만을 가지고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외화쿼터를 가지고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상영하거나, 아니면 그 쿼터 자체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자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강범구 감독의 구술에서 이 외화쿼터 획득 방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각 회사들은 할당된 한국영화 제작 편수를 채우거나, 우수영화로 선정되거나, 대종상을 수상하거나(시기에 따라 걸린 상의 개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최우수작품상,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하면 1편씩 쿼터가 지급됨), 해외 수출 실적이 있거나,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하는 방법으로 외화쿼터를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년 동안 영화사들은 최소한의 예산을 가지고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한다(제작권도 쿼터가 있어서, 이 숫자도 매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4편의 영화에는 우수(반공)영화 또는 대종상용 영화 1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외화쿼터 외에도 추가로 1편의 외화쿼터를 더 얻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신필름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구술자 최경옥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 1편 제작에 7~80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고도 이익을 남기려면 외화쿼터 2개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영효 감독이나 외화수입사와 극장에서 일했던 김성근의 구술을 보면 그냥 외화쿼터를 팔았을 때는 오늘날 물가로 약 10억 원의 가치가, 직접 외화를 수입해서 상영했을 때는 적어도 50억 원의 이익이 보장되었다(심지어 이 역시 10년 전 물가를 기준한 것으로, 2024년의 물가를 반영하면 더 큰 금액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은 최소 10~50억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수입해온 외화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김영효 감독의 말처럼 100억 이상의 가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종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대종상을 잡아라!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대종상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로비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대종상이 문제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예요. 형식은 이런 겁니다. 심사위원을 누가 맡았다 하면은, 그 심사위원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로비대상으로 정해 만나는 거예요 . 가령 당시 심사위원 가운데 소설가가 있다면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 하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영화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도 원작료를 주고 입수하는 거예요. 그거 안 받을 수 있어요? 명분이 있는데. 그게 시가(市價)보다 많아요. 그런 식으로 로비를 합니다. 그 당시 Y 모라는 유명한 심사위원이 있었습니다. 각계에 문어발식으로 관계했던 문화계의 마당발이었죠. 이런 사람들은 A영화상, B영화상 다 해요. 그럼 A영화상에서 로비 받아가지고 안 된 경우가 있어요. 로빈 받았지만 작품이 밀리니까. 그러면 B영화상 시상식 때 그것을 갚아요. 그럼 이쪽에선 불만이죠. 저쪽은 쿼터가 걸려 있고, 이쪽은 상금이 없다 보니까. 이런 식이에요. - 김종원 , 2008, 355쪽 누구한테 욕먹을 소리겠지만은, 대한민국 영화 대종상은 절대 정상으로 한 영화가 없어. 보믄 뒷거래가 다 있어. …내 누구라고 얘긴 하지 않지만은 대종상 시상날이야. 근데 인제 그날 6시부터, 6시 반부터 시상식을 하는데, 그날 최우수작품을 갖다 결정하는 날이 그때가 5시 반쯤 될 때, 막 거기서 회의를 하는데, 그 안에서 인제 투표를 허는 거야. 하기 직전에 누가 문을 탁 여는 거야. 문을 탁 열어가지고 “어이구, 죄송합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문을 닫은 거야, 그 사람이, 응? 그 사람은 왜 그거 문을 열었겠느냐? 자기가 만난 사람들 있잖아. 자기가 만난 사람들이 자길 잊을 수도 있잖어? 그니까 도장 찍을라고 문을 연 거야, 일부러. 그러구선 모르는 척하고 “어구, 이거 잘못 찾았습니다.” 문을 탁 닫은 거야. 그러니 그 만났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칠 거 아니야. 잘못했다간 나중에 탈이 날 거 아니야. 그 < 경찰관 >(이두용, 1978)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합동영화사. 그러구 우성영화사에서 < 세종대왕 >(최인현, 1978)이란 영화를 맨들었어. 막말로 대한민국 사람들 다 갖다 보여줘서, “이 영화가 좋으냐, 저 영화가 좋으냐?” 할 때 영화적으로 좋은 건<세종대왕>이 좋대는 건 다 인정될 거야. 돈도 많이 들었고. 그런 영화가 결과적으로 6:5로 졌어. … 쿼터가 걸린 데는 쫙 시커먼 게 쫓아댕겼으니까, 그때. - 양춘 , 2009, 210~211쪽 (상) 제1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경찰관> (하) 남녀조연상⋅미술상을 받은 <세종대왕> 위 구술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은 우성영화사에서 말 그대로 ‘대종상을 노리고 만든’ 제작비 2억 5천여만 원에, 등장 인원만 16,000명이 동원된 대작 사극이다. 거기에다 교육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부터 자료제공과 협찬을 받는 한편, 역사학자 10명의 고증⋅감수를 받았다. 그러나 흥행업자들로부터 영화적 재미가 없는 ‘교과서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외면당해, 완성한 지 4년이나 지난 1982년 3월 5일 대한극장 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열심히 구애를 했으나 대종상에 외면당하고, 심지어 극장과 관객에게까지 버림받은 비운의 대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영화제작자 양춘의 구술에서 언급된 합동영화사는 대종상 스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특히 우성사와 합동영화사의 대종상 경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더 앞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들어보자. 최훈 감독이 감독한 그걸 골랐는데, 얘길 들어보니깐 얘기가 쪼금 낯익은 것 같기고 해서 시나리오를 봤더니 시나리오가 표절이라. 그래서 이걸 좋은 영화로 만들 순 있지만 소위 대종상이나 우수영화로 내놓기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세 번인가를 뜯어 고쳤어, 시나리오를. 그걸 뜯어 고쳐가지고 < 수선화 >(최훈, 1973)로 결정을 졌어. 그 최훈 감독이 대종상을 한 번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을 고르자 그래서 최훈 감독을 줬고,또 출연자들도 좀 그렇게 대종상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고르자 그래서 장동휘 씨 뭐 이래 가지고 배역진을 골라가지고 시작을 했고. … {그런데 이게 감독상하고 몇 가지 상을 받기는 했는데, 작품상은 못 받았더라고요} 작품상은 아마 < 비련의 벙어리 삼용 >(변장호, 1973)이 받았나? - 박행철 , 2014 , 295~297쪽 그다음에 <비련의 벙어리 삼용>을 우성영화사에서 했더니… 아침에 사장한테 대종상에서 11개 부문이 상이라고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대종상에는 쿼터가 붙어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오니까 김용덕 씨가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밤에 대가릴 짤라 갔어요.” “그게 무신 소리요?” 그랬더니, 최우수작품상에만 쿼터가 붙어 있는데 나머진 다 놔두고 최우수작품상만 딴 데로 돌렸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요?” 그랬더니, 합동영화사에서 만든 < 홍의장군 >(이두용, 1973)이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태권도영홥니다. 그게 대종상 작품상 탈 영화가 못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엊그저께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에 대종상을 휩쓸어 버리면 우린 뭐냐! 이거 우리를 아주 그냥 밟어 버리는 거 아니냐!” 굵직굵직한 회사 다섯 사람이 안기부국장을 만나자고 그래서, “이건 말이 안된다. <벙어리 삼룡> *주3 은 포르노영화다” (웃음) 그때 국시가 ‘자국안보’ 이런 거였어요. 그럼 “대통령의 뜻을 따르려면 <홍의장군>이 상을 타야지, 어떻게 포르노영화 상을 주느냐.” 국장이 어떨결에 “<홍의장군>이 타야지.” 그래서, 그때 문공부에서 주관을 했으니까, 상당한 돈도 오고 갔대요. 그러니까 밤에 소집을 했어, 심사위원들. “다시 심사해라. 국책영화에다 상을 줘야지 말이 되냐?”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다시 투표를 해서 작품상을 <홍의장군>으로 바꿔쳤어요. 그러니깐 영화계가 “말이 되냐, 어떻게 <홍의장군>이 작품상이냐?”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우리는 <홍의장군>을 뽑은 일이 없다. 안기부가 동원을 했다” 막 시끄러워지니까 문공부도 골 아파지고. 이걸 수습할라고 그러는데 여론이 워낙 나빠지니까. 그래서 그러면 <벙어리 삼룡>도 쿼터를 하나 더 주자. 그래서 우수작품상까지 쿼터를 타 먹었어요. - 변장호 , 2016, 122~123쪽 <수선화>(좌)와 <비련의 벙어리 삼용>(우)은 모두 우성영화사 작품으로 제1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수선화>는 감독상⋅각본상⋅편집상⋅녹음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우수작품상⋅촬영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음악상⋅미술상⋅조명상을 수상해, 총 11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제작자 박행철은 1970년대 우성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수선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대종상을 노리고 기획된 것으로, 사실 일본영화 < 24개의 눈동자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4)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표절작은 대종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작과 차이를 만들기 위해 세 번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종상을 받지 못한 뉴 페이스 최훈 감독에게 기회를 주고, 캐스팅은 ‘대종상이 사랑하는’ 배우들로 뽑았다. 그 결과 <수선화>는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녹음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품상은 받지 못했다. 박행철은 자신이 작품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 빼앗겼다고 기억했다(<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같은 우성사 작품이다). 하지만 박행철의 기억과는 다르게 <비련의 벙어리 삼용> 역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최우수작품상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홍의장군>에게 돌아갔다(변장호 감독은 <홍의장군>을 태권도영화라고 표현했지만, 이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을 다룬 대작 사극영화이다). 변장호 감독의 구술은 한 줄 한 줄이 정말 흥미로운데,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을 비롯한 ‘친구들’이 달려가서 “엊그제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의 상을 휩쓸어” 버리는 것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 후, 한국영화제작업은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되면서 기존 영화사의 몇몇이 정리되고, 소수의 신생 회사들이 새롭게 인정받았다. 이중에서도 우성사는 가장 그 설립 시기가 늦었는데, 이를 가지고 기존 영화사 대표들이 몰려가서 텃새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 ‘텃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구술자가 들려준 다른 내용의 구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라 변장호 감독의 기억이 완전 거짓이나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변장호 감독 구술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홍의장군>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데 대해 온 영화계가 반발하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우수작품상인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도 쿼터 하나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종상에는 최우수작품상 외에도 쿼터가 주어지는 부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수반공영화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낙 이 부문도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영화제작자들은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각 영화사의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을 만한 작품으로 문예영화(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 예산이 많이 들어간 대작 역사영화, 새마을운동을 강조한 휴먼 드라마류의 영화들을 한두 편 제작하고,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린 전쟁액션영화나 첩보영화(이는 007 유행의 영향도 있었다)를 한 편 정도 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가 아주 막강한, 영화계에 못된 행세를 한 거지. 대종상에도 관여를 해가지고 뭐 뒤에서 압력해서 “이것 줘라” 이런 정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영화계를 좌지우지 했다고 해도 맞는 정도로. … {그 압박 수단은 주로 검열…} 그렇죠. 검열 가지고 하는 거죠. 그때는 검열해서 우수영화, 좋은 영화, 또 외국 나가서 상을 타고 그러면 외국영화 쿼터를 하나씩 주고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입김이 굉장히 셌다고 봐야죠. … < 지옥의 49일 >(이두용, 1979)이라는 이두용 감독의 울릉도 가서 찍은 영화가 있어요. 근데 그게 사실은 우수영화가 될 정도가 아닌데, 그게 반공영화라는 걸로 해가지고 그걸 압력을 좀 넣었다든지 뭐 어떻게 해가지고, 심사위원들한테 금일봉식으로 이렇게 나눠주고 어떻게 해가지고 그게 상을 탄 적도 있고 뭐 그런 예가 있어요. …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상을 타기 위해서 반공영화를 한 거죠, 그 당시에는. 그러고 이제 암암리에 “반공영화 좀 하나 해” {우수영화 타기 위해서?} 어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게 사실이에요. - 주종호 , 2017, 156~157쪽 < 땅울림 >(설태호, 1980)은, 대종상에서 다 휩쓸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됐어? 심사하는데 대종상에서, 박암 만 조연상 탁 타버렸어. 그리고 또 뭐 하나 타고 그랬어. 그러구 이 양반이 화가 났어요. 중앙극장 사장이거든? 그래서 중앙극장에서 약간 (상영)한 것 같아요. 근데 손님들이 잘 안 들지만, 군에서는 괜찮았어요. … 우리 대종상 못 탔잖아요? 다 되는 걸로 알았거든요? 근데 안됐어요. 근데 누가 됐는가 하면, 임권택 이 한 < 짝코 >(임권택, 1980) 있지요? <짝코>가 당선된 작품이에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이제 작품상 탔어요. … {결국에 제작자는 쿼터 받아서 외화 수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좀} 음, 그게 앞서는 거예요. 다! 그땐 다 그랬어요. 경제적으로 {수지를 맞추려면} 그렇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요. - 설태호 , 2010, 251~260쪽 <땅울림>은 제1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리고 있었지만, 남우조연상 하나를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설태호 감독의 <땅울림>은 대영영화사(영화사 대표 김인동 은 중앙극장을 운영했다)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군민 합작영화로, 제작 기간만 1년이 걸린 대작영화였다. 국방부로부터 제작비 일부와 각종 무기, 탱크, 전차, 화약 등을 지원받아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총격⋅폭파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비슷한 시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 인천(오! 인천) >보다 볼 만하다!). 그러나 그 경쟁 상대가 <짝코>라니.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지만, 엄청난 제작비와 시간을 들인 대영영화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당시 상황 속에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나의 상’을 빼앗는 가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대종상을 받을 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상을 겨냥해 만든 작품이 막상 그 상을 받지 못했을 때는 빼앗긴 것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사실 누가 상을 빼앗았고, 어떻게 상을 빼앗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당시 대종상을 둘러싼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이 느꼈던 자괴감과 그 자괴감을 뚫고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모종의 암투로 인해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느꼈을 좌절감 또는 그래도 ‘상을 받을 만큼의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자부심 사이에서 요동치는 이들의 양가적인 감정과 그 기억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이 시기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 주1. 이영일의 해당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공개된 제2회 대종상 심사위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강영수(대한일보 주필), 유건호(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유석진(의사), 최정희(작가), 김대현(작곡가), 남홍우(교수), 심태진(명성여중고 교장), 김정환(미술가), 신용성(경향신문 사회부장), 이용상(공보부 공보국장). 주2. 제3회 대종상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정충량(평론가), 유건호(언론인), 여석기(고려대 교수), 이청기(영화평론가), 김붕구(서울 문리대 교수), 양광남(중앙대 영화연극과 주임), 박권상(언론인),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이순근(교육평론가), 김진환(공보부 공보국장 서리), 강영수(언론인). 심사방식도 완전합의제로 변경되었으며, 기준 또한 이전보다 분명해졌는데 "①자기 목소리로 녹음하지 않은 연기 ②‘오리지널’이 아닌 음악 ③표절작품"은 수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6일에 대종상시상식", 《조선일보》, 1964. 3. 5. 5면 기사; "제3회 대종상 수상자 결정", 《동아일보》, 1964. 3. 7. 5면 기사 참조.) 주3. <비련의 벙어리 삼용>(변장호, 1973)을 의미한다. ※ 인용 구술 목록 한국영상자료원, 「호현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이채, 2005.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1: 최경옥⋅박행철⋅최승민⋅김갑의』, 한국영상자료원, 2008.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2: 임원식⋅이형표⋅이상현⋅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2008.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4권: 양춘』, 한국영상자료원, 2009.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이성철』, 한국영상자료원, 2009. 권용숙,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성근』, 한국영상자료원, 2010. 김승경,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설태호』, 한국영상자료원, 2010. 권용숙, 『2011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강범구』, 한국영상자료원, 2011. 김승경, 『2013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영효』,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승경,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권: 박행철』, 한국영상자료원, 2014. 이정아,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5권: 변장호』, 한국영상자료원, 2016. 공영민⋅송영애, 『2017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변동: 조관희⋅주종호』, 한국영상자료원, 2017.
<춘몽> 촬영 현장, 감독 유현목과 배우 박수정.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다 1965년 초 <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이만희, 1965) 사건으로 이만희 감독이 옥고를 치르고 반공법 위반 혐의 조사가 진행되며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도중 또 하나의 검열 관련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3월 23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한 ‘은막의 자유’라는 세미나에서의 유현목의 발언이 문제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현목 은 헌법 제14조 에 의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후진국이면서 ‘미묘한 사정’에 처해있는 나라의 국민은 아니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발언이 정권 당국자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 이를 즈음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반공사상을 보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제공․주입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일련의 반공법 위반혐의 사태는 이러한 때의 변화에 대해서 외면했거나 아니면 편협적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애국행위라 해둠이 옳을 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정치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반공이라면 언제까지나 영화예술의 차원을 높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예술의 차원 높은 표현의 수단을 빌지 않고 국시를 최고로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1 - 유현목,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 3. 24.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운운이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 정황 을 겨냥하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히 “반공을 국시로…” 운운의 발언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65년 초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상영이 중지되고 감독이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투옥된 첫 번째 사례다. 발표 후 3개월 반이 지난 7월 13일 유현목은 서울 지검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였다. 또한 그가 그간 감독한 < 오발탄 >(1961), < 잉여인간 >(1964), < 순교자 >(1965) 등 일련의 영화 역시 문제가 되었다. *주2 이러한 검찰의 입장 발표로 인해 유현목은 반공이 한국의 국시임을 부인한 감독으로 이후까지 유명해졌다. 당시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검사가 인용한 이 워딩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기사의 축약본에서 유현목은 반공이 국시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고, 이후 판결문 역시 검찰의 논고 내용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검찰 측이 문제를 과장하기 위해 인용문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검찰이 근거로 삼은 법규는 반공법 제4조 (“찬양 고무 등”)였는데 이는 이만희 감독에게 적용되었던 조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이 입건을 발표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반공법 위반과 함께 음란죄로 동시에 기소될 유현목의 연출작 < 춘몽 >(1965)이 개봉 중이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춘몽>의 검열과정 유현목의 연출작 <춘몽>은 일본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 자체가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포함하는 문제작이었다. 애초 유현목은 이 영화의 파격적 노출 수위가 부담되어 거절하였으나 표현상의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제작사 측의 설득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3 치과에 들렀다 잠이 든 남성이 꿈속에서 병실에 있었던 여성이 치과의사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구해내고자 하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과 노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성으로 주목받았다. 그 검열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 영화가 일본영화 <백일몽>의 번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춘몽>의 서류철 에 포함된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라는 내무 보고 문서를 통해 보건대 남아있는 제작신고 서류 이전(1964년 12월)에 이미 “일본인 원작 ‘백일몽’ 제작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듬해 1965년 1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반려되었다. 아마도 일본 원작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5년 2월 16일에 원작을 개작한 후 <춘몽>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작신고가 되었으나 4월 22일 공보부는 다시 <백일몽>의 표절이라는 점과 내용이 비속하다는 점을 들어 반려하였다. 이에 제작사는 “전위적인 영화 표현”이라는 작품의 취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열네 군데의 수정 사항을 기재한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공보부는 제작신고를 수리하였다. 영화 완성 후 본편의 검열신청은 1965년 5월 1일(접수는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본편 검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5월 26일에 있었던 초심에서 중앙정보부는 이 영화에 대한 재심을 판정했고, 5월 31일 재심에서 역시 허가를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공보부 자문위원회는 3개처 제한 후 상영허가를 하면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6월 5일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244조 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공보부는 “본 작품이 외설이라 판단되는 부분을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후, 상영을 허가했다. (좌)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백일몽>의 표절, 내용의 비속으로 제작신고를 반려한 문서) (우) "방화 '춘몽' 상영허가 경위" (<춘몽>의 본편 검열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내부 문서) 음란죄로 기소되다 지난한 검열과정을 거친 <춘몽>은 마침내 1965년 7월 3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가 개봉 중인 7월 14일 유현목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1966년 1월 4일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뿐 아니라 음화반포(혹은 제조)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하기에 이른다. *주4 한 감독이 반공법과 음란조항 위반으로 동시에 기소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이만희에 이어 두 번째, 음란죄로 기소된 것은 첫 번째 사례였다. <춘몽> 개봉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65. 7. 2.) 이 영화가 음화반포(제조)죄 혐의를 받은 구체적인 정황은 영화를 제작할 당시 신인 여배우를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만들어 그녀의 뒷면을 촬영, 음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혐의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했다. 촬영 당시 신체의 앞부분은 가린 상태였고, 뒷모습의 누드를 담은 6초 정도에 해당하는 이 분량은 검열 신청 전 이미 감독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5 즉 이 장면은 대중은커녕 검열관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유죄 취지로 구형한다. 판결은 1년이 지난 1967년 3월 15일 내려졌는데,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하였다.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원은 “①유피고인의 연설내용이 적성국가를 이롭게 할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고 ②영화 「7인의 여포로」에 대해서도 어느 특정 장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며 단지 예술가의 일반자세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반공법 위반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했던 반면, *주6 음화반포(제조)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유죄의 취지를 밝혔다. 이 영화는 상대방 여자에게 폭행, 린치, 전기고문 등 가혹한 행위를 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현상을 보고 또 이와 같은 행위를 당하고 남녀가 서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얻는 것을 그린 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변태성욕자에게 기어 완전 나체로 달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양식에 비추어 정상인에게 이상한 성적 자극을 주고 수치,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다고 인정된다. 헌법에서 보장된 학문•예술 및 표현의 자유도 헌법 제32조가 정한 공공복리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이 범위를 벗어난 권리행위는 권리 남용에 해당하여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주7 - 서울형사지법 판결, 1967년 3월 10일 선고. 이 판결에 대해 당시 언론을 비롯한 법조계와 예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된 장면을 검열 전에 삭제했다면 그것은 음화 반포로 볼 수 없고, 촬영 당시 불과 10여 명의 스탭 앞에서 나체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했던 점 역시 음란물의 전시에 해당할 수 없으며(제243조 관련), 해당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해도 검열 전 삭제된 이상 그것은 완성품인 영화라 볼 수 없으므로 음화 제조라 볼 수 없다(제244조)는 것이다. *주8 이에 검찰과 유현목 감독은 공히 항소하였고, 항소의 결과는 다시 2년이 훌쩍 지난 1969년 10월에 나왔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반공법에 대해서는 역시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영화예술에서도 예술성과 음란성이 양립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도 음란성이 있을 때는 외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취지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9 비록 선고유예이긴 하지만 유죄가 판결된 것이다. <춘몽> 중 한 장면 반공과 음란의 결합 “은막의 자유” 세미나 발표와 <춘몽>을 엮은 이 사례는 한 재판 대상에 반공과 음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한 별개 사건에 대한 병합 재판의 사례일까? 아니면 일정한 연관관계에 의해 검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일까? 굳이 음모론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세미나 발표의 불온성을 문제 삼고 싶었던 검찰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만으로 사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슷한 시기의 <춘몽>에 대한 음란죄를 함께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이러한 『춘몽』에 대한 판결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유감독을 반공법 위반으로 다루다가 우연히 인지하여 부산물(?)로 기소했던 것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산물인 반공법 위반 부분이 무죄가 되었으니 시무룩… - “춘몽의 일장춘몽, 음화라고 유죄판결 나오게 된 사연”, 《신아일보》, 1967. 3. 16. ‘주산물’과 ‘부산물’을 나누고 있는 위 인용문은 당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권당국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반공법을 비롯한 사상 혹은 사회적 문제는 정권당국이 ‘주’되게 관심을 가진 영역, 풍속은 ‘부’수적인 관심을 가진 영역이라는 의미일 터다. 이는 당대에 사상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졌던 반면 풍속에 대한 검열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었다는 검열 연구자들의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풍속에 대한 통제는 사상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거나 구실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은막의 자유”와 <춘몽>의 병합 사례라 할 것이다. 검열은 최종적으로 인적 통제를 통해 완성된다. 검열의 최후의 수단이자 목표는 창작자를 향해 있다. 그것은 단일 작품에 대한 검열과 달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사건의 유죄 판결 이후 동료인 김수용 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판결이 있은 이후 표현에 많은 심리적인 제한을 받게 되어 부득이 예술적으로 필요한 러브신이나 나체 면의 제작이 위축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10 그러나 이러한 위축은 유죄를 선고받은 음란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주1. 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발표문의 원본이 아니라 축약본이다. 주2.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발표”, 《동아일보》, 1965. 7. 14,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 7. 14, “만물상”, 《조선일보》, 1965. 7. 15 등. 주3. “인터뷰, 40년만의 감개무량한 복원, <춘몽>의 유현목 감독”, 맥스무비, 2004. 7. 29. 주4.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음란죄의 근거로 삼았던 조항은 형법 제243조(음화등의 반포)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감안컨대 음화 등의 제조를 규정한 244조 역시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 243조는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44조는 “전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주5.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 전 삭제했다는 기사와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힌 같은 신의 다른 대체 장면을 썼다는 기사가 병존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정황 서술의 구체성을 감안할 때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주6. “영화 춘몽 음화로 판결, 유현목 감독에 벌금 3만원 선고”, 《한국일보》, 1967. 3. 16. 주7. 김재훈, 「음란성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 주8. “영화 춘몽의 법 적용 시비, '공개 전 삭제... 유죄론 보기 힘들어'”, 《조선일보》, 1967. 3. 21. 주9. “춘몽은 '외설영화', 유현목 감독 선고유예”, 《서울신문》, 1969. 9. 25. 주10. “법 이전의 검열기구 활용을, 표현에 심리적인 제한”, 《동아일보》, 1967. 3. 18.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서영춘의 코미디와 검열의 관계를 살펴보는 두 편의 글 중 첫 번째 글이다. 서영춘의 코미디에 집중해서 검열 서류를 살펴보는 이유는 그가 악극이나 쇼 무대의 활동을 넘어 라디오와 영화 등 대중매체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난 뒤부터 끊임없이 ‘저속성’ 논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서영춘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저속 코메디언”으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최고의 체크 기록”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1) 말하자면 서영춘의 코미디는 ‘저속함’을 매개로 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의 통속성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검열은 코미디에서의 ‘저속’과 ‘건전’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글에서는 서영춘의 영화 출세작이었던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와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왔으며 공보부의 검열 강화 기조에 일조했던 <오대복덕방>(이형표, 1968)을 중심으로 검열의 추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글에서는 성적인 표현과 동성애 코드를 둘러싸고 검열에 재검열을 거쳐 상영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영화검열의 기조와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과 ‘통속’ 코드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본격적인 코미디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악극단의 인기 배우들이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끌던 시점이기도 했다. 식민지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제작되지 않았던 코미디영화들도 이 시기에 다양한 하위 장르를 이루며 쏟아져 나왔다. 악극단과 라디오에서 주가를 올리던 코미디 배우들은 영화에서 자신들의 장기와 퍼포먼스를 발휘하면서 코미디영화의 활황을 이끌었는데, 가장 먼저 스크린을 점령했던 것은 양석천과 양훈, 홀쭉이와 뚱뚱이 듀오였다. 뒤를 이어 등장했던 구봉서와 김희갑은 검증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수많은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서영춘은 다소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악극단과 라디오, 쇼 무대를 거쳐 1960년대 스크린 코미디의 총아가 되었다. 서영춘(1928~1986)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서영은의 동생으로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1952년 악극단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백금녀를 만나 뚱뚱이-홀쭉이 콤비를 이루면서 유명세를 탔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반 라디오 코미디의 전성기에 동양라디오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TV쇼의 사회자이자 백금녀와 함께 하는 만담의 출연자로 등장하면서 서영춘은 “여보 마누라 가갈갈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뿜빠라뿜빠 뿜빠빠”, “살살이, 요건 몰랐지?” 등등의 유행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로 시작되는 일종의 만요와 “시골영감 기차놀이”의 리메이크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스타 코미디언으로 발돋움했다. 서영춘의 영화 데뷔작은 1961년 <인생갑을병>(박성복)으로 여기서 그는 엑스트라 급 조연을 맡았으나, 1964년 <총각김치>(장일호),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서영춘은 이 영화의 흥행을 시작으로 라디오와 TV, 스크린,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면서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여자가 더 좋아>는 서영춘을 스타 배우로 만든 영화일 뿐 아니라 1960년대 후반 유행했던 여장남자코미디의 시초이자 이 시기 코미디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코미디, 즉 코미디언코미디의 활황을 선도한 영화였다. 여장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성전환 수술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주는 등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코미디이지만 검열에서는 거의 지적된 바가 없으며 오히려 흥행을 통해 재평가된 지점이 존재했다. 한편, <오대복덕방>은 서영춘이 여러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출연하는 영화여서 전체적인 비중으로 볼 때 ‘서영춘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온 영화였고 공보부의 검열강화 기조에 일조한 영화였다는 점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여자가 더 좋아>를 살펴보자. 코미디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였던 <여자가 더 좋아>는 오랫동안 유실된 필름이었다. 다행히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에 ‘한우섭-한규호 父子 컬렉션’이 기증되어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2016년 5월 31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최초로 일반 상영되었는데, 후반부 20여 분의 싱크가 맞지 않고 마지막 씬이 유실된 불완전판으로 공개되었다. 유실된 부분에 대하여 시나리오, 검열 서류 및 각종 기사들과 스틸 사진 등의 자료를 보충하여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는 흡사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남녀가 뒤바뀐 설정의 코미디 버전처럼 보인다. 여자직업학교에서 음악 선생으로 일하던 규철(서영춘)은 동거하고 있던 애인 영숙(최지희)이 자신을 배신하고 결혼하자 여장을 하고 그 집의 식모로 들어가 복수하고자 한다. 영숙이 규철을 배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의학적 소견 때문이다. 이를 인정할 수 없는 규철은 변심한 애인을 벌하고자 규화라는 이름으로 여장을 하고 영숙의 집에 식모로 들어간다. 시아버지(김희갑)의 못된 버르장머리 때문에 “식모란 식모는 모조리”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던 이 집에서 애교스럽고 일 잘하는 규화는 시아버지의 총애(를 가장한 성추행)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규철은 뛰어난 피아노 실력으로 영숙의 남편 박문기(남궁원)에게도 호감을 사며 문기의 동료이자 악극단의 지휘자인 선우광(양훈)으로부터는 적극적인 구애를 받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인하게 된 규철은 정체가 탄로 나자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질주한다. 현재는 유실되었으나 시나리오 및 신문기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엔딩 씬은 질주하던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는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 여성이 되어 병원을 나선 규철이 “교태를 부리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제시된다. 이 같은 파격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던 <여자가 더 좋아>는 그럼에도, 검열에서 큰 지적 사항 없이 영화화되었다. 시나리오 심사의견서는 이 영화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여자 같은 남자’ 콘셉트를 베꼈다고 지적하면서 코미디에 필요한 “건전한 웃음” 없이 “난잡”하고 “황당무계”한 것으로 “오로지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비예술적 태도를 지양할 것을 주문했다. (그림 1) 공보자문위원회 영화분과위원회, 「“여자가 더 좋아” 씨나리오審査意見書」, 1965.4.22. <여자가 더 좋아>의 시나리오 검토는 제작자에게 “건전한 웃음”과 ‘코미디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다소 추상적이고 훈계적인 내용의 ‘의견서’로 제출되었다. 그런데 건전한 코미디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공보부에서 ‘눈깔’ 등의 대사를 시정하라는 것, 선우광과 규철의 밀회 장면을 ‘주의 깊게 취급’해달라는 것 등 5개의 가벼운 지적 사항과 함께 제작신고 수리 통보를 받았다. (그림 2) 공보국 영화과, 「극영화 “여자가 더 좋아” 제작신고 수리통보」, 1965.5.31. 그리고 실사 검열에서는 위의 밀회 장면을 단축하라는 단 한 가지 지적을 받고 상영이 허가되었다. (그림 3) 공보국 영화과, 「국산영화 “여자가 더 좋아” 상영허가」, 1965.6.19. 상대적으로 ‘반공법’ 위반에 주목하고 있었던 이 시기의 영화검열은 아직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함’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만화조 넌센스의 소극” 2) 에 불과하다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평단에서 의외로 영화가 장기 흥행 하며 관객 몰이에 성공하자 이 영화가 일종의 사회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저속’함에 대한 면죄부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영화의 장기 흥행을 보도하면서 한 기사는, 남자였을 때 누릴 수 없었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을 여장을 하고 난 뒤에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성전환을 택한 “서영춘의 페이소스”와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는 비평을 실었다. 3) 같은 해 11월에 개봉한 영화 <주책바가지>(심우섭, 1965)를 혹평하면서, <주책바가지>에는 <여자가 더 좋아>의 “페이소스”가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한 기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한편, <여자가 더 좋아>가 제작되었던 1965년 이후, 1966년 2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검열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면서 코미디영화 검열 역시 강도가 높아졌다. 1967년 말에 제작하여 시나리오 사전검열과 제작 후 필름검열을 모두 통과하고 1968년 2월 개봉 중이었던 <오대복덕방>을 공보부가 재검열하겠다고 나서면서 이 영화는 검열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시나리오와 기사, 스틸 사진 등으로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오대복덕방>은 김해 김씨 일가 5대의 이야기로, 영화는 90세의 1대 용태 할아범이 서울에 와서 복덕방을 차려 성공하자 자손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면서 시작된다. 이후 전라도 무주에서 상경한 일가족이 한 동네에서 각자 복덕방을 차리면서 각종 해프닝을 벌인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정할 수는 없지만 추정하건대, 서영춘은 3대 김영근으로 등장하여 결혼 사기를 당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반목하며 경쟁하던 5대 일가족은 사기사건을 계기로 화해하고 개심하여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전라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 가족의 ‘저속한’ 행태와 말투로 인해 전라도 지역 영사기사들이 영사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전북극장협회에서도 영화 상영을 거절했다. 검열 서류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전라북도 내 영사기사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는 기사와 전북극장협회의 상영 거절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5) 뿐만 아니라 김해김씨 종친회 및 전라북도 도지사의 상영정지요청도 이어졌다. (그림 4)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 「영화상연중지요청」, 1968.2.5. (그림 5) 전라북도지사, 「영화 “5대복덕방” 상영 정지처분 건의」, 1968.2.9.) 김해김씨 종친회의 민원은 <오대복덕방>이 “우리종친인 김해김씨의 명예를 형언할 수 없을 만치 훼손한 스토리로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인 종친사회를 근본적으로 모욕한 것”이므로 즉각 상연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전라북도 도지사의 이름으로 발송된 건의서에는 이 영화가 “오락적 경지를 벗어나 전래의 미풍양속을 해하고 나아가서는 혈연의식과 지역적 파벌을 조장하는 결과를 자아내”어 “전북도민으로 하여금 격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게 하고 신문, 방송 등 이 고장 언론기관이 선두에서 이를 규탄하는 일대 쎈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동시에 본도 전도민이 항의에 기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중략)... 국민적 단합과 정신무장 면에 구열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면서 이 영화를 즉각 상영중지하도록 요청했다. 이 서류에는 전북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기사들도 첨부되어 있어 이 영화를 둘러싼 전북 지역의 여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에서 이 영화는 “건전하며 코믹한 오락작품이면서도 과욕과 허실된 생활을 다분히 경고적으로 풍자한 작의가 좋”다며 “극히 명쾌하고 코믹하면서도 ... 인간 본연의 자세와 선악을 도시 생활상의 일단면에서 풍자적으로 그려주고 있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저속한 대사나 장면 묘사에 주의하여 제작”하라는 주의 속에서 무수정으로 검열에 통과했고, 필름 검열에서도 판잣집을 서울의 명물이라고 보여주는 장면, 화장실 씬 등 세 장면을 삭제하고 대사 한 줄 정도를 삭제하라는 수정사항을 지적한 뒤 합격증을 배부했던 것이다. (그림 6)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각본심의위원회, 「“오대복덕방” 각본심의의견서」, 1967.12.14. (그림 7) 공보부, 「국산영화 “오대복덕방” 검열합격」, 1968.1.26.) 검열의 호평 속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이 시작되고 나자 앞서 언급했던 각종 투서와 건의서가 공보부에 답지했다. 이러한 여론이 비등해지자 영화의 제작자였던 주식회사 대한연합영화사의 대표이사 홍의선은 재검열과 재편집이 불가능하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서 홍의선은 상영허가검열에 합격하여 이미 상영을 시작한 지 열흘이나 경과된 시점에서 프린트를 회수, 재편집하는 것은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므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공보부의 “영화위원회의 심의에 회부”하여 검열해 달라고 요청한다. 또한 홍의선은 이 영화가 “정극과는 그 영역이 판이한 희극영화”로 사투리는 “코믹한 텃취로 극을 희화화해보려는 시도”일 뿐이고 전주김씨 17대손 운운은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성씨의 하나로 표현한 데 불과”하며 “예의 17대손은 4,500년 전에 존재한 인물로 가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현재 후손들에게 불명예스럽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그림 8) 「희극영화 “오대복덕방”영화위원회심의요청의 건」, 1968.2.6.) 결국 공보부에서는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영화의 재검열을 실시한다. 그런데 이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967년 4월 1일부터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신고시 첨부되는 각본에 대하여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각본을 검토하도록 했는데, 각본심의위원회는 영화법 저촉사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영화계 내부에서 스스로 조직한 단체였다. 각본심의위원회의 검토를 통과하고 나면 제작이 시작되고, 제작이 완료된 필름은 실사심의를 거치는 이중의 검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심의 제도는 1967년 12월 1일 공보부에 6인으로 구성된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설치되면서 3중의 제도로 변경된 바 있었다. 따라서 <오대복덕방> 상영 분쟁이 생긴 뒤 소집되었던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와 동일한 심의기구로 추정할 수 있다. 1968년 2월 7일 공보부가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재심을 한 결과 “사회적 물의와 진정의 대상이 되는 저속한 부분은 추가 제한 조처함이 가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일단 상영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추가제한 조치로 30여 곳을 삭제, 단축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가락중앙종친회에는 “종친을 특정하는 대사, 화면 및 저속한 대사, 화면을 추가 삭제 조치”했음을 알리는 공문을, 전라북도지사 공보실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대사삭제 29개처, 화면삭제 15개처, 화면 단축 2개처”를 제한조치하여 상영하도록 했다는 회신을 보냈다. (그림 9) 「극영화 “오대복덕방”의 상영 정지」, 날짜 미상(2.7-2.9일 사이로 추정) (그림10) “극영화 <오대복덕방>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 1968.2.9. (그림11) 「진정에 대한 회신」, 1968.2.9.; 「극영화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 1968.2.20.) 그런데 이때 재검열의 내용은 신문기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다소 저속”하지만 “넌센스 코메디임을 감안하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다”는 결과를 회신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서류는 확인할 수 없다. 6)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일종의 중재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추가제한 조치에 따라 이후 필름들이 회수, 수정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과 2월 말까지도 이 영화를 둘러싼 비난 여론이 계속되었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처음부터 상영을 중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재검열을 요구했던 여론의 흐름과 투서를 보냈던 단체들에 보낸 회신으로 미루어볼 때, 필름 회수 후 수정본을 다시 상영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재검열 소동 이후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필름의 상영본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대복덕방>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재검열 사건으로 인해 검열에 대한 여론의 문제제기가 한층 높은 강도로 진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가혹하기로” 이름 높은 검열에서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저의 태작”이라고 평가받는 <오대복덕방>에 별 다른 문제없이 상영허가를 내 준 것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7) 이처럼 상황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홍종철 공보부 장관은 이 영화의 상영허가가 “사무적 미스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고 변명하면서, 이 영화의 재검열 뿐 아니라 앞으로 더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2중, 3중으로 실시되는 영화검열의 엄격함과 그 자의성에 대한 비난이 거세짐에도 불구하고, 홍종철은 “반국가적 반사회적인 것과 윤리적 도덕적인 것에 위배되는 것은 계속 커트하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8) 그간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해 왔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이후 공보부의 실사 검열은 <오대복덕방> 검열 논란이 있었던 직후인 1968년 4월 1일부터 각본심의위원회와 영화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합동으로 사전 시나리오 검열을 실시하고 검열의 강도도 강화하는 방침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70년 2월 20일 극영화시나리오 검열 업무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으로 이관될 때까지 이러한 검열의 주체와 기조는 지속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재검열 소동이 벌어졌던 와중에서 <오대복덕방>은 <남자 식모>(심우섭, 1968)와 더불어 개봉관에서 10만 관객을 넘겼다. <남자 식모>가 18만, <오대복덕방>이 10만을 넘기며 그 해 흥행 순위 2위와 5위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들의 “크린 히트”와 함께 평단에서는 코미디영화 검열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검열에서 “대중적으로 건전”하다고 평가 되었던 <남자 식모>와 “저속”하지만 “코미디”이므로 “웃고 넘길” 수 있다는 정도로 평가 받았던 <오대복덕방>은 검열의 위계상 분명히 같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평론에서는 함께 엮여 “관객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마구잡이로 찍은” “저질 코미디”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었다. 9) 이 시기, 검열과 평가의 기준을 달리 했던 평단은 서영춘 코미디와 구봉서 코미디를 한 데 묶어 “저질” 코미디로 분류하였으나 검열은 “저질 코미디” 안에서 또 다른 위계를 설정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저속’에 대한 검열의 문제제기와 위계화에 대해서는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의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남자 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 미용사> 등 이른바 ‘남자 시리즈’의 검열서류를 비교하면서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본다. 1) “방송가에 또 하나의 불씨/ 막다른 골목에 이른 코메디 프로 방륜마저 가벼운 경고 정도의 조치 뿐”, 《서울신문》, 1966.9.15. 2) 만화조 넌센스 소극 여자가 더 좋아”, 《조선일보》, 1965.7.15. 3) “우울한 동정에 기대어 롱런 한달 째나 「여자가 더 좋아」”, 《신아일보》, 1965.7.20. 4) “희극배우들의 여성숭배열/ 주책바가지”, 《신아일보》, 1965.11.6. 5) “복덕방 상영거부”, 《대한일보》, 1968.2.10. 6) “말썽난 70여 곳 삭제 항의 속에/다시 검열대 앞에/ 「넌센스 코메디」 오대복덕방”, 《신아일보》, 1968.2.13. 7) “「오대복덕방」 시비를 계기로 본/ 영화검열의 문제점/ 무정견한 양식의 기준/ 제 나름의 주관/ 툭하면 가위질. 영화 드라마의 뼈대를 손상시키기도/ 윤리적 면서 타락, 검열은 계속 강화 공보부의 견해”, 《조선일보》, 1968.2.22. 8) 앞의 기사, 《조선일보》, 1968.2.22 참고. 9) “한계 흐린 가위질/ 영화검열 시비/ <처제>는 저속, <엄마기생>은 OK/ 귀걸이 코걸이 재단/ 업자 당국 반성하고 전문위 두도록”, 《중앙일보》, 1968.5.25.; “관객 동원수로 본 상반기 영화/ 이상기류/ 철저한 오락물 추구/ 난센스 코미디와 검객영화 판쳐/ 흥행서 실패한 올해 수확작”, 《대한일보》 1968.7.9.; “하반기의 영화제작 경향/ 소극, 합작물의 범람/ 거의 예술성을 외면 /아이디어 부족 소재도 저속/ 관람 성향에 편승/ 인니, 태국과 합작도 기획”, 《대한일보》, 1968.7.20.) * 참고문헌: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명랑’과 ‘저속’ - 서영춘코미디의 불온함과 검열의 문제」,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51집,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