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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몽> 촬영 현장, 감독 유현목과 배우 박수정.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다 1965년 초 <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이만희, 1965) 사건으로 이만희 감독이 옥고를 치르고 반공법 위반 혐의 조사가 진행되며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도중 또 하나의 검열 관련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3월 23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한 ‘은막의 자유’라는 세미나에서의 유현목의 발언이 문제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현목 은 헌법 제14조 에 의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후진국이면서 ‘미묘한 사정’에 처해있는 나라의 국민은 아니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발언이 정권 당국자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 이를 즈음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반공사상을 보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제공․주입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일련의 반공법 위반혐의 사태는 이러한 때의 변화에 대해서 외면했거나 아니면 편협적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애국행위라 해둠이 옳을 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정치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반공이라면 언제까지나 영화예술의 차원을 높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예술의 차원 높은 표현의 수단을 빌지 않고 국시를 최고로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1 - 유현목,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 3. 24.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운운이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 정황 을 겨냥하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히 “반공을 국시로…” 운운의 발언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65년 초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상영이 중지되고 감독이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투옥된 첫 번째 사례다. 발표 후 3개월 반이 지난 7월 13일 유현목은 서울 지검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였다. 또한 그가 그간 감독한 < 오발탄 >(1961), < 잉여인간 >(1964), < 순교자 >(1965) 등 일련의 영화 역시 문제가 되었다. *주2 이러한 검찰의 입장 발표로 인해 유현목은 반공이 한국의 국시임을 부인한 감독으로 이후까지 유명해졌다. 당시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검사가 인용한 이 워딩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기사의 축약본에서 유현목은 반공이 국시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고, 이후 판결문 역시 검찰의 논고 내용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검찰 측이 문제를 과장하기 위해 인용문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검찰이 근거로 삼은 법규는 반공법 제4조 (“찬양 고무 등”)였는데 이는 이만희 감독에게 적용되었던 조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이 입건을 발표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반공법 위반과 함께 음란죄로 동시에 기소될 유현목의 연출작 < 춘몽 >(1965)이 개봉 중이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춘몽>의 검열과정 유현목의 연출작 <춘몽>은 일본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 자체가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포함하는 문제작이었다. 애초 유현목은 이 영화의 파격적 노출 수위가 부담되어 거절하였으나 표현상의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제작사 측의 설득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3 치과에 들렀다 잠이 든 남성이 꿈속에서 병실에 있었던 여성이 치과의사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구해내고자 하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과 노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성으로 주목받았다. 그 검열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 영화가 일본영화 <백일몽>의 번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춘몽>의 서류철 에 포함된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라는 내무 보고 문서를 통해 보건대 남아있는 제작신고 서류 이전(1964년 12월)에 이미 “일본인 원작 ‘백일몽’ 제작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듬해 1965년 1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반려되었다. 아마도 일본 원작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5년 2월 16일에 원작을 개작한 후 <춘몽>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작신고가 되었으나 4월 22일 공보부는 다시 <백일몽>의 표절이라는 점과 내용이 비속하다는 점을 들어 반려하였다. 이에 제작사는 “전위적인 영화 표현”이라는 작품의 취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열네 군데의 수정 사항을 기재한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공보부는 제작신고를 수리하였다. 영화 완성 후 본편의 검열신청은 1965년 5월 1일(접수는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본편 검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5월 26일에 있었던 초심에서 중앙정보부는 이 영화에 대한 재심을 판정했고, 5월 31일 재심에서 역시 허가를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공보부 자문위원회는 3개처 제한 후 상영허가를 하면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6월 5일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244조 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공보부는 “본 작품이 외설이라 판단되는 부분을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후, 상영을 허가했다. (좌)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백일몽>의 표절, 내용의 비속으로 제작신고를 반려한 문서) (우) "방화 '춘몽' 상영허가 경위" (<춘몽>의 본편 검열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내부 문서) 음란죄로 기소되다 지난한 검열과정을 거친 <춘몽>은 마침내 1965년 7월 3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가 개봉 중인 7월 14일 유현목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1966년 1월 4일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뿐 아니라 음화반포(혹은 제조)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하기에 이른다. *주4 한 감독이 반공법과 음란조항 위반으로 동시에 기소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이만희에 이어 두 번째, 음란죄로 기소된 것은 첫 번째 사례였다. <춘몽> 개봉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65. 7. 2.) 이 영화가 음화반포(제조)죄 혐의를 받은 구체적인 정황은 영화를 제작할 당시 신인 여배우를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만들어 그녀의 뒷면을 촬영, 음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혐의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했다. 촬영 당시 신체의 앞부분은 가린 상태였고, 뒷모습의 누드를 담은 6초 정도에 해당하는 이 분량은 검열 신청 전 이미 감독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5 즉 이 장면은 대중은커녕 검열관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유죄 취지로 구형한다. 판결은 1년이 지난 1967년 3월 15일 내려졌는데,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하였다.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원은 “①유피고인의 연설내용이 적성국가를 이롭게 할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고 ②영화 「7인의 여포로」에 대해서도 어느 특정 장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며 단지 예술가의 일반자세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반공법 위반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했던 반면, *주6 음화반포(제조)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유죄의 취지를 밝혔다. 이 영화는 상대방 여자에게 폭행, 린치, 전기고문 등 가혹한 행위를 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현상을 보고 또 이와 같은 행위를 당하고 남녀가 서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얻는 것을 그린 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변태성욕자에게 기어 완전 나체로 달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양식에 비추어 정상인에게 이상한 성적 자극을 주고 수치,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다고 인정된다. 헌법에서 보장된 학문•예술 및 표현의 자유도 헌법 제32조가 정한 공공복리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이 범위를 벗어난 권리행위는 권리 남용에 해당하여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주7 - 서울형사지법 판결, 1967년 3월 10일 선고. 이 판결에 대해 당시 언론을 비롯한 법조계와 예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된 장면을 검열 전에 삭제했다면 그것은 음화 반포로 볼 수 없고, 촬영 당시 불과 10여 명의 스탭 앞에서 나체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했던 점 역시 음란물의 전시에 해당할 수 없으며(제243조 관련), 해당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해도 검열 전 삭제된 이상 그것은 완성품인 영화라 볼 수 없으므로 음화 제조라 볼 수 없다(제244조)는 것이다. *주8 이에 검찰과 유현목 감독은 공히 항소하였고, 항소의 결과는 다시 2년이 훌쩍 지난 1969년 10월에 나왔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반공법에 대해서는 역시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영화예술에서도 예술성과 음란성이 양립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도 음란성이 있을 때는 외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취지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9 비록 선고유예이긴 하지만 유죄가 판결된 것이다. <춘몽> 중 한 장면 반공과 음란의 결합 “은막의 자유” 세미나 발표와 <춘몽>을 엮은 이 사례는 한 재판 대상에 반공과 음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한 별개 사건에 대한 병합 재판의 사례일까? 아니면 일정한 연관관계에 의해 검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일까? 굳이 음모론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세미나 발표의 불온성을 문제 삼고 싶었던 검찰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만으로 사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슷한 시기의 <춘몽>에 대한 음란죄를 함께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이러한 『춘몽』에 대한 판결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유감독을 반공법 위반으로 다루다가 우연히 인지하여 부산물(?)로 기소했던 것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산물인 반공법 위반 부분이 무죄가 되었으니 시무룩… - “춘몽의 일장춘몽, 음화라고 유죄판결 나오게 된 사연”, 《신아일보》, 1967. 3. 16. ‘주산물’과 ‘부산물’을 나누고 있는 위 인용문은 당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권당국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반공법을 비롯한 사상 혹은 사회적 문제는 정권당국이 ‘주’되게 관심을 가진 영역, 풍속은 ‘부’수적인 관심을 가진 영역이라는 의미일 터다. 이는 당대에 사상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졌던 반면 풍속에 대한 검열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었다는 검열 연구자들의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풍속에 대한 통제는 사상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거나 구실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은막의 자유”와 <춘몽>의 병합 사례라 할 것이다. 검열은 최종적으로 인적 통제를 통해 완성된다. 검열의 최후의 수단이자 목표는 창작자를 향해 있다. 그것은 단일 작품에 대한 검열과 달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사건의 유죄 판결 이후 동료인 김수용 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판결이 있은 이후 표현에 많은 심리적인 제한을 받게 되어 부득이 예술적으로 필요한 러브신이나 나체 면의 제작이 위축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10 그러나 이러한 위축은 유죄를 선고받은 음란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주1. 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발표문의 원본이 아니라 축약본이다. 주2.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발표”, 《동아일보》, 1965. 7. 14,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 7. 14, “만물상”, 《조선일보》, 1965. 7. 15 등. 주3. “인터뷰, 40년만의 감개무량한 복원, <춘몽>의 유현목 감독”, 맥스무비, 2004. 7. 29. 주4.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음란죄의 근거로 삼았던 조항은 형법 제243조(음화등의 반포)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감안컨대 음화 등의 제조를 규정한 244조 역시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 243조는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44조는 “전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주5.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 전 삭제했다는 기사와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힌 같은 신의 다른 대체 장면을 썼다는 기사가 병존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정황 서술의 구체성을 감안할 때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주6. “영화 춘몽 음화로 판결, 유현목 감독에 벌금 3만원 선고”, 《한국일보》, 1967. 3. 16. 주7. 김재훈, 「음란성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 주8. “영화 춘몽의 법 적용 시비, '공개 전 삭제... 유죄론 보기 힘들어'”, 《조선일보》, 1967. 3. 21. 주9. “춘몽은 '외설영화', 유현목 감독 선고유예”, 《서울신문》, 1969. 9. 25. 주10. “법 이전의 검열기구 활용을, 표현에 심리적인 제한”, 《동아일보》, 1967. 3. 18.
한 작품의 두 제목: <남녀공학>과 <학창시절> 1976년 개봉한 영화 <학창시절>의 신문광고 포스터에는 작게 ‘原名(원명): 男女共學(남녀공학)’이라는 또 다른 제목이 표기되어 있다. 본 작품이 특정 영화의 리메이크작이거나 원작 소설 등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원명’이 따로 명기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까 <학창시절>이라는 작품명보다 원래 의도한 이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명기하는 것은 다소 의아한 일이다. 당시 영화제목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문공부에 서류를 제출하고 그 합당함을 인정받아야 했기에, <남녀공학>과 마찬가지로 <학창시절> 역시 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데도 굳이 제명을 변경한 것은 그 수고스러움에 비해 크게 얻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변경했다면, 그리고 이전의 제목까지 명기했다면 제명을 변경한 것은 적어도 제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겨 말하자면 영화 <학창시절>은 시나리오 표절시비사건에 휘말리면서 세간의 이목을 끈 작품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영화에서 표절시비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를 규제할만한 저작권법이 명확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표절은 그리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지 않았고,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문제시 되었던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표절에 대한 무관심이 이어졌다 1 . 이러한 상황에서 <학창시절>의 시나리오 표절시비사건이 대두된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작품의 표절시비 사건으로 인해 당시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 위원장이 사퇴의사를 밝히는 등 이 작품의 표절시비 사건은 표절을 여부를 가리는 문제를 넘어서는 데에 까지 확대되면서 당시 ‘민간심의기구’라는 예륜의 지위와 책임, 그리고 문공부가 이 심의기구를 대하는 태도 등을 매우 흥미롭게 보여준다. 영화검열에 있어 1970년대라는 시대적 레토릭이 발휘하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검열에 대한 상(像)이 고정되어 있는 것, 영화검열은 곧 삭제라는 행위로 간소화되고 이는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상식과 같은 생각들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에 따라 검열자는 국가라는 단일한 주체로 결정되고, 심의와 관련한 모든 기구의 의견은 국가의 것으로 간주된다. 특히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예륜, 1976년 5월 이후 이름을 바꾼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시나리오 심의는 폭력적인 검열을 행한 국가의 의견과 등치에 놓인 채 구분되지 않는 경향이 짙다. 물론 당시 민간심의기구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던 예륜이나 공윤은 예산이나 위원장의 임명 등을 문공부의 관리 아래에서 진행했지만, 이것으로 예륜이나 공윤이 국가 검열권력과 동등한 선상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학창시절>의 표절시비 사건을 파악할 수 있는 심의서류는 당시의 예륜이 수많은 돌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 쉽게 책임질 상황을 만들지 않는 국가 검열로 인해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지 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예상 밖의 검열의 이면을 바라보게 한다. 검열 질서를 깨뜨리는 돌발적 상황들 <학창시절>은 1975년 11월 15일 <고교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2 예륜에 심의 신청했던 시나리오가 수정 통과된 후, 같은 해 11월 21일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 12월 7일 문공부로부터 제작신고 수리를 통보 받은 후 영화제작에 착수한다. 이 과정은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영화검열의 기본적인 절차로 제작사는 예륜을 통해 먼저 시나리오 심의를 받은 후, 그 결과에 따라 문공부 측에 제작하겠다는 허가를 요청하며 3 , 문공부가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와 자체적으로 심의한 유의사항을 덧붙여 영화제작을 허락하는 절차에 따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문공부의 제작허가는 절차상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만약 시나리오에서 문제가 발생할 시 그 책임을 전적으로 예륜의 몫으로 미룰 수 있다는 점이다. <남녀공학>의 표절시비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문공부의 태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서 미성년자의 음주나 일탈 등에 대한 몇 군데의 지적에 그쳐 제작에 착수했던 <남녀공학>은 12월 5일 접수된 ‘대한민국 영화 애호가’의 투서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남녀공학> 표절 시비를 촉발시킨 청원서 문공부장관 앞으로 보낸 청원서에는 <남녀공학>이 소화34년(1959)년에 발행된 『月刊 シナリオ』(월간 시나리오)에 실렸던 <ハイティーン>(하이틴)을 ‘표절 각색한’ 작품이라고 지적하며, 이미 일본에서 제작·상영된 바 있는 이 영화의 허가·상영은 내년 ‘아세아 영화제가 개최되는 시기에’ ‘이 작품 내용을 아는 일본인들이나 그 외 사람들이’ 안다면 ‘엄청난 챙피’와 ‘국위를 손상 시킬 것’이며, ‘민족 고유 미풍양속을 저해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 덧붙인다. 이에 문공부는 곧바로 예륜 측에 청원서에 대한 의견 조회를 요청하고 해를 넘긴 1976년 1월 8일, 예륜은 「영화 1733-16853(청원서에 대한 의견조회)에 대한 결과보고」를 통해 ‘상황 및 디테일(부분, 항목) 설정이 전체적으로 흡사한 점이 많고’, ‘교사의 봉임과정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등 인물들의 설정에 유사성을 들어 ‘표절이라는 판정을 면하기 어렵다고 사료(인정)됨’이라는 의견을 문공부 측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예륜의 판정은 처음 시나리오를 심의 후 통과시킨 자신들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고 그 결과를 번복한 셈이다. 그러나 <남녀공학>의 문제는 표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표절시비에 휘말리면서 예륜의 의견서를 제외하고도 제출된 표절관련 의견서가 세 편에 이르는데 이 중 한국영화인협회(이하 영협) 시나리오 위원회라는 정확한 주체를 밝히고 제출한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출처가 불명확하다 4 . 이렇게 영화인들이 직접적으로 의견서를 제출한 데에는 이 작품의 각본을 담당했던 황영빈의 당시 지위가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남녀공학> 원작자 황영빈의 영화제작승낙서 <남녀공학>의 제작신고서에는 각본이 원작자 황영빈, 각색자 서인경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원작자의 영화제작 승낙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중 황영빈은 당시 영협의 시나리오 위원회 위원장이자 영협의 부이사장, 예륜의 윤리위원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시나리오 표절문제는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황영빈이 시나리오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당선된 직후 발생한 이 작품의 표절시비는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의 권력 다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었다. 표절이라 판단한 예륜의 의견서와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시나리오 위원회의 자체 의견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결정 두 기구 간의 의견도 엇갈렸지만,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에서도 80여명의 회원이 양쪽으로 갈려 치열한 논쟁이 오고갔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표절시비사건이었지만 그 내막에는 직전에 있던 시나리오 위원회 위원장 선거에서 패배한 측에서 보복으로 라이벌이었던 황영빈을 몰아세워 위원장직에서 사퇴시키려 의도가 도시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5 . 앞서 살펴본 청원서의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 그러니까 영화와 관련한 업무를 맡아보는 문공부와 예술국장을 명시하고 있으며, 현재 <남녀공학>을 찍고 있는 지역과 제작사 일시 등을 알고 있고, 각본가와 감독의 이름, 표절이 의심되는 작품의 출처와 상영의 여부 등을 명시한 것으로 보아 영화계 내부인사의 청원서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기에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의 표절에 대한 상반된 결정이 시나리오 위원회의 권력다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6 . 결국 이러한 다툼 속에서 제출된 보고서들은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내놓고 있었고, 작가들은 <하이틴>이라는 작품은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예륜은 이 작품이 표절이라 판단 내렸던 것이다. 예륜은 왜 표절 판정을 번복하는가? 예륜이 1월 8일 문공부 측에 보낸 「영화 1733-16853(청원서에 대한 의견조회)에 대한 결과보고」는 하루 전인 1월 7일에 작성된 것인데, 같은 날 작성된 「예륜 위원장 개인의견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서류는 1월 8일 문공부 측에 보내는 위의 공문과 작가들의 해명서와 함께 발송된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절을 인정한 예륜 위원장 개인의견서 결국 예륜 위원장은 이 작품이 표절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표절문제가 불거진 것이 ‘원작자의 직소(直訴)’, 즉 <하이틴> 원작자의 직접적인 호소에 의한 것이 아니니 선처를 베풀어 달라는 첨언을 한 것이다. 이는 예륜 위원장이 표절 자체를 중대한 문제로 삼는다기보다 사후적인 처리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시나리오 심의 결과를 번복하고 있는 예륜의 입장에선 문공부의 처분에 따라 자신들의 위상이 흔들릴 수도 있었기에, 「예륜 위원장의 개인의견서」라는 가장 정중한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에 대한 신뢰와 심의기구에 대한 존중을 요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공부는 이러한 예륜의 공문을 받은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월 14일, 「국산영화 시나리오 표절 여부에 대한 재조회」라는 제목의 공문을 예륜에 발송한다. 이 공문에는 예륜에서 보낸 재심의 결과 보고서로는 작품 전체의 표절 여부를 확정할 수 없으며, 이 영화는 예륜의 판단에 따라 제작 신고를 수리하여 이미 촬영이 완료된 작품으로 예륜의 판단이 이 작품은 물론 향후의 작품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니 확대 심의회의를 개최하여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령이 담겨 있다. 덧붙여 원작 대본과의 씬 별 대조표를 작성, 작품 전체 중 ‘유사 장면 수, 모방 장면 수, 표절 장면 수, 전혀 다른 장면 수’를 적고 ‘원작의 어느 정도를 모방함으로써 표절이라 판정할 수 있는 지의 기준’을 제시하라고 통고하고 있다. 조용히 넘어가 달라는 예륜 위원장의 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문공부는 누구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해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인 결과를 요구했다. ‘유사’, ‘모방’, ‘표절’을 장면별로 구분하라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표절을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문공부는 이 작품이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 결과에 ‘따라’ 자신들이 제작신고를 수리하여 영화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언급하며 영화가 겪을 불이익을 고스란히 예륜의 탓으로 돌리면서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도, 표절이라는 판단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이 사이 영화를 완성한 제작사는 영화 본편검열신청서와 미성년자 관람신청서 등을 제출하지만, 문공부는 표절여부를 조회 중인 작품이니 이후 진행하겠다며 검열 자체를 진행하지 않았고, 예륜은 약 2주가 지난 1월 28일 이 작품은 표절이 아니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문공부 측에 보내온다. <국산영화 시나리오 표절여부에 대한 재조회>에 대한 예륜의 결과보고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예륜이 얼마나 이 문제를 고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륜은 1월 20일 내부적으로 가졌던 재심의에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고, 1월 22일 긴급윤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외부 인사 3인을 위촉하여 재심의를 진행한다. 여기에서 예륜이 최대한 내부적인 의견 개진과 그로 인한 결정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인의 외부인사의 입을 통해서야 9개의 씬 일부와 인물의 설정과 배치, 배경 등의 유사성은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표절이 아니라고 판단 내린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이러한 번복에는 작품 자체의 비교를 넘어 다소 위압적인 문공부의 통고와 이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진 시나리오 위원회의 분란 등이 더욱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결정 후 문공부는 1월 30일 <남녀공학>의 제작사인 대영흥행 측으로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라는 공문을 보낸다. 문공부는 예륜이 표절로 판단했을 때에는 제작사 측으로 즉시 통고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재심의 요청을 한 것과는 다르게, 표절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에는 즉시 그 결과를 통보하면서 표절이라는 판단을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문공부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를 통해 자신들이 본 작품을 허가한 것이라 책임을 회피하지만, 제작신고 수리 공문에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 시 지적되지 않았던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어 문공부 역시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문공부는 이 모든 책임을 예륜으로 넘기며 영화검열 업무를 관장하는 문공부의 결정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에 명시된 보완사항에서 문공부가 주력한 것은 표절시비 사건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점에서 표절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공부의 의지가 더욱 명확하게 읽힌다.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 위의 공문에서 문공부는 세 가지의 보완을 지시한다. 하나는 ‘사회적 물의를 야기시’킨 제명을 변경하라는 것, <하이틴>과 유사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개작하라는 것, 수정한 부분을 명시하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지시사항은 문제가 되었던 부분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없었던 것처럼 만들라는 뜻으로 문공부가 문제가 생긴 영화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제작자는 이러한 지시를 받은 후 「<남녀공학> 제명사용에 관한 건의」라는 문서를 통해 이미 제작수리에 본 제목으로 들어갔으며, 본편과 예고편 등에 타이틀 화면을 다시 찍어야 하고, 이 제목으로 배급 계약을 마쳤기에 제목의 수정지시를 거두어 달라는 내용을 전달한다. 그러나 직후 「<남녀공학> 지시사항에 대한 복명」이라는 문서를 통해 제목을 <남녀공학>에서 <학창시절>로 바꾸겠다는 내용을 전달, 제작사의 요청은 거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남녀공학>은 <학창시절>로 그 제목을 바꾸어 개봉했고, 포스터에는 원제가 <남녀공학>이었다는 것을 작은 글씨로나마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공부가 영화검열 업무를 책임지는 법 결국 <학창시절>은 문공부의 예륜으로의 책임전가, 예륜의 판단 번복, 이로 인해 발생한 물의를 잠재우기 위해 최대한 원제와 유사하게 붙인 제목이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예륜 위원장은 사표를 제출한다. 일신상의 사정이라는 이유였지만, 시나리오 파벌싸움의 부작용이자 문공부의 예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7 . 상반된 표절 판정에 최종적으로는 문공부가 가려내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8 문공부는 어떠한 판정도 내리지 않은 채 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문공부가 내린 결정은 ‘여고생’ 소재의 영화 제작을 규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남녀 고교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정적으로 그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9 「표절시비 극영화 <남녀공학> 예륜, 윤리위에 심의위임」 10 이라는 기사와 바투 붙어 있는 이 기사는 문공부 결정의 이면을 상상하게 한다. <남녀공학>과 <하이틴>의 표절 여부를 판단할 때에 고교생활을 다루는 데에 있어 소재나 등장인물, 배경, 사건 등이 유사할 수밖에 없다는 난점이 의견서마다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던 것을 생각한다면, 문공부의 결정은 아예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문공부의 태도는 영화법이 시행된 이후부터 꾸준히 보인 것으로, 강압적으로 영화의 삭제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국가 검열에 대한 상(像)과는 거리가 있다. <학창시절>의 검열과정은 검열에 끼어든 상황과 주체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처가 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1. 이는 1970년대에 들어 표절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1970년대에는 수많은 합작영화로 표절에 관한 지적이 많을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의 언론에서 영화검열에 관한 언급 자체 줄어들었고, 검열과 관계 된 표절에 대한 언급 역시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영화검열의 언론 노출에 비한다면 1970년대 영화검열은 그 빈도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든다. 2. 이 작품은 <고교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제작신고 직후 <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제명변경을 신청하고, 제작신고수리가 된 이후부터는 <남녀공학>으로 명기된다. 이 글에서 역시 이 작품을 가리킬 때에는 <남녀공학>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고자 한다. 3. 시나리오 심의에서 통과 판정을 받지 못한다면 예륜의 요청에 따른 시나리오에 대한 수정과 심의가 반복된다. 이를 통해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 통과해야만 제작신고를 할 수 있다. 4. 출처가 분명치 않은 두 개의 보고서 중 하나에는 ‘익명의 영화인 제출’이라 수기로 표기되어 있다. 나머지 하나는 시나리오 위원회의 분열로 인해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하의 내용과 각주 6번 참조. 5. 「극영화 <남녀공학> 표절시비」, 《일간스포츠》, 1976.1.17. 본 신문기사를 비롯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는 6-7개의 신문기사가 심의서류에 스크랩되어 있다. 6. 당시 시나리오 위원회는 시나리오 문학회와 시나리오 위원회로 나뉘어 전자는 이 작품을 표절로, 후자는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며 첨예하고 대립했다(「극영화 <남녀공학> 표절논쟁 확대: 표절이다 아니다 상반된 보고서」, 《일간스포츠》, 1976.1.22.). 이 기사를 바탕으로 표절에 관해 의견을 제시했던 총 세 개의 보고서 중 출처가 분명치 않았던 두 개 중 하나는 시나리오 문학회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7. 「표절논쟁 2라운드 접어들어-판정 뒤집히면 책임소재 시비 또 일 듯」, 《일간스포츠》, 1976.1.24. 8. 「극영화 <남녀공학> 표절논쟁 확대: 표절이다 아니다 상반된 보고서」, 《일간스포츠》, 1976.1.22. 9. 「여고생소재 무절제 극영화-문공부 제작 규제」, 《일간스포츠》, 1976.1.23. 이 기사의 표제는 ‘여고생’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남녀’ 고등학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탈선이나 반항 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 이를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문공부는 ‘특히 여고생의 경우 담임 선생님을 사모하’는 설정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식, 탈선’등이 최근 남녀 고등학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문제로 꼽아 규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데, 이러한 설정은 모두 영화 <남녀공학>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10. 「표절시비 극영화 <남녀공학> 예륜, 윤리위에 심의위임」, 《일간스포츠》, 1976.1.23.
1. 영화검열이 선택한 ‘한국’영화의 풍경 1980년 개봉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오프닝 시퀀스는 한국영화의 분명한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 오프닝 타이틀을 지나 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차량 내부의 시점으로 높이 솟아오른 빌딩들을 보여주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카메라는 곧 그 시선을 낮추어 빌딩들 사이, 좁고 낮은 곳에 펼쳐진 난잡한 시장을 비춘다. 이후에도 이 작품은 도시로 상경한 세 청년이 도심 속 이 비루함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일하다 엉덩이를 맞으며 괴로워하는 춘식(이영호), 골목 구석 좁은 공간에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불을 피우며 연신 땀을 닦아대는 길남(김성찬), 위험한 가스통을 뒤로 하고 쪼그려 앉아 망치질을 바라보다 비명을 지르는 덕배(안성기)의 얼굴에서 멈춘 카메라는 그들이 현재 도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국영화사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사회(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 장면들에서 기인할 것이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나오기 전인 1970년대, 빈부격차가 극에 달한 시기였지만 한국영화에서 가난은 철저하게 가려져야 하는 것이었고 검열은 강박적으로 성장의 지표들을 영화에 등장시키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를 수행하고자 했다. 1970년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의 검열관들은 검열 시 법적 근거를 지닌 「영화법 시행규칙 제 9조 영화검열기준」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제공된 「국산영화제작권장방향」까지를 참고해야 했는데, 「국산영화제작권장방향」이 기본 방향의 첫 번째로 꼽는 것은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약진하는 한국의 발전상을 부각시킬 수 있는 내용’으로 영화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그 세부방향으로 제안된 것은 ‘가급적 고속도로, 웅장한 공장, 새로운 주택가 등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배경으로’하며 농촌을 소재로 하더라도 ‘가급적 농업의 기계화, 새로운 농지정리 및 지하수 개발’의 적극적인 노출이었다. 고향이 변화한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애잔함과 절망이 교차하던 정씨(김진규)의 얼굴에서 갑작스레 바다 위 거대한 다리를 건너는 버스의 줌아웃으로 넘어가 마무리되는 그 유명한 <삼포 가는 길>(1975)의 기형적인 엔딩은 1970년대의 성장에 대한 강박이 영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1970년대를 지나 도달한 1980년의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오프닝은 그래서 의미를 지닌다. 무작정 상경한 세 청년이 도시에서 겪어내야 했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그만큼 상징적인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사실 이 작품에 한정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돌출된 것이었다. 1980년으로 진입하면서 영화법 자체의 개정이나 검열의 기준이 바뀐 것은 아니었으며 검열의 방식 역시 이전과 동일한 상황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가난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예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서술되는 영화사와 마찬가지로 검열 역시 한 시대를 묶어 범박하게 설명되는 경향이 크지만 갑작스런 정치·사회적 전복의 순간들은 검열의 탄성(彈性)에 변화를 일으키며 흥미로운 흔적을 남긴다. 이 글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너무도 짧았던 ‘서울의 봄’과 함께 움직였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은 검열에 있어 1980년대‘적’이라기보다 1980년대 ‘찰나의 균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 짧았던 ‘서울의 봄,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이장호 감독이 1975년 말 대마초 파동 후 재기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이장호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기존 한국영화의 문제점에 대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이장호 감독은 활동이 어려웠던 4년 동안 연극계와 문학계 등의 인사들을 만나면서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 즉 한국영화가 현실을 그리지 못하고 정권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리얼리즘의 회복에 대해 고민했다고 이야기 한다. 1 이 시간을 보낸 이장호 감독이 1980년에 들어 착수하는 작품이 급격한 도시화와 그 안에서 황폐해지는 청년들을 다룬 최일남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다. <바보들의 행진>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정확한 일시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제작신고 전 이루어졌을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의 의견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청춘물’로 분류되어 있으며 ‘底邊靑春(저변청춘)을 不條理(부조리)하게 描寫(묘사)한 것은 아니므로 크게 問題(문제)될 点(점)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별첨으로 추가된 지적사항은 문틈으로 보이는 정사 장면이나 신음소리, 인물들의 상상 속 정사 장면 등의 외설적이라 판단한 부분들에 대한 것이었다. 검열관은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도심 속 밑바닥 청춘들의 모습이 사회 비판적이지 않다고 판단,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시킨 것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제작사는 1980년 3월 27일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하고 4월 19일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제작신고가 수리, 영화는 제작에 들어간다. 영화가 완성된 후 제출된 「예고편 영화 검열신청서」와 「영화 검열신청서」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작품의 예고편 심의에서도 가난에 관한 언급보다는 외설적인 부분에 치중했다는 것과 시나리오가 아닌 영화 필름의 검열이 문공부가 아닌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라는 민간심의기구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먼저 예고편의 영화검열을 위해 제출된 영화예고편 대본을 보면 안마하는 장면이나 안마하는 이를 만지는 장면 등에 삭제 표시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젊은이들. 그들이 이 도시에 뿌리내리려는 몸부림’, ‘사회부 기자의 눈으로 바라본 밑바닥 인생의 삶’, ‘한 판 즐겁게 놀아보자 그러나 이 놀이판에 깔려 있는 슬픔과 한을 잊지 말자’ 등의 자막에는 어떠한 제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가난’, ‘밑바닥 인생’, ‘슬픔과 한’과 같은 정서가 걸러내야 하는 감정으로 자리했던 1970년대와 비교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우울함보다 중요한 것이 외설적인 장면의 삭제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라 할 수 있다. <바람불어 좋은 날> 영화 검열신청서 위의 서류의 좌측 하단에 찍힌 파란 도장은 1979년부터 바뀐 영화시책의 시행을 방증한다. 정부는 문공부에서 맡았던 영화검열을 1979년 4월 10일부터 민간단체인 공윤으로 이관하고, 영화관계자와 각계 인사들로 영화검열심의위원회를 구성, 이들이 영화검열을 진행토록 했는데 2 , 이러한 계획은 그해 2월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정부주관 문화행사를 조금씩 민간기구로 넘길 것을 검토하겠다고 보고한 문공부의 첫 번째 실천이었다 3 . 하단의 도장은 영화검열심의 대본과 필름이 공윤 쪽으로 접수 완료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1979년 이후 이 시책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작사에게 영화검열이 늦어진다는 회신을 보내거나 영화검열의 합격을 통보하는 공문을 내리는 일 등은 문공부에서 진행, 1970년대 영화 실사 검열을 직접 진행하던 문공부가 1979년의 시책 변화 이후 제작사측에 결과를 통보하는 행정적인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공윤’의 심의를 거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 8월 22일 영화검열에 합격하는데 어떠한 제한사항도 없이, 그러니까 영화 실사검열에서 단 한 군데의 화면 삭제나 단축 없이 심의위원 8명의 전원 찬성으로 검열에 합격한다. 이장호는 당시의 검열 상황을 술회하면서 이러한 결과는 ‘서울의 봄’ 시기에 구성된 전향적인 심사위원 중 소설가 박완서의 강력한 주장에서 비롯되었다며 박완서가 <바람 불어 좋은 날>을 검열에 통과시키기 위해 열 시간에 걸친 회의를 하며 애를 썼다고 이야기한다 4 . 여기에서 주목해 볼 것은 민간 심의기구의 한 심사위원이 ‘가난’과 ‘밑바닥 인생’과 ‘슬픔과 한’이 담긴 이 영화의 무삭제 통과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다는 그 자체와 그것이 수용될 수 있었던 ‘서울의 봄’ 시기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이 정확하게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5 . 3. 다시 ‘고발성 우려’로 삭제되는 서민의 현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 3월 27일 제작신고서를 제출, 약 5개월 후인 8월 22일 영화 검열 합격증을 받았다. 민간 심의기구로 심의가 이관된 지 약 1년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그 사이 벌어진 10.26과 12.12 직후의 혼란과 무엇보다 아직 군사정권이 공식적으로 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던 최규하 대통령의 짧은 재임기간에 절묘하게도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때문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예로 들어 민감 심의기구로 심의가 이관된 후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흐름을 설명한다거나 1980년대에 들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검열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정말 짧았던 ‘서울의 봄’의 훈기를 탄 예외적인 작품이었다. 물론 <바람불어 좋은 날> 이후, <어둠의 자식들>(1981),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꼬방동네 사람들>(1982)와 같이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 가난한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줄줄이 제작·개봉되었다. 이러한 작품의 등장 자체가 이전 시기와는 다른 1980년대의 분위기의 예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의 작품들이 원작과는 분명한 차이를 지니며 6 영화 자체의 분위기나 설정이 어색하고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작품들이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예상컨대 이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이러한 작품들의 등장은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리얼한’ 소재가 무리 없는 검열을 지나 개봉한 전례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혼란스럽게 들어선 1980년대이지만 1970년대에 비해 자유로울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적으로 넘치고 있었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이를 잘 보여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검열과정을 살펴보면 1981년으로 들어서면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보궐선거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 남은 임기를 채우고 다시금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경색되었고, 검열 역시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 한 눈에 포착된다.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다르게 위의 작품들은 각종 사유서와 각서로 원작과는 다른 의도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증명해보이고 난 후에야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했던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개작사유서 가령 1981년 7월 21일자로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시나리오 심의가 통과되지 않아 개작의 개작을 거듭하고 유의사항까지 통보 받은 후에야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심의 의견서의 심의의견 첫 번째에 주목해보자. 심의위원은 이 작품이 ‘1970년대 중반을 시대 배경으로 명시하기는 했으나 가난하고 절박한 서민들의 생활상과 애환이 짙게 깔려 있어 많은 사회적 문제’의 가능성을 지녔다는 점을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로 꼽고 있다. ‘1970년대 중반’이라는 설정이 현재가 아니라고는 하나 철거의 문제, 빈부의 격차 등은 ‘현재’에도 분명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노출되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제작사는 ‘원 대본에서 완전히 탈피 현 사회에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기업의 공해문제로 사회 계도성 주제 설정을 내용으로 하는 계몽영화로 개작’하여 대본과 사유서를 제출한 후에야 영화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심 속 철거민, 난장이의 이야기가 아닌 염전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린다. 1981년 12월 10일자로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했던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도 사정이 다르진 않다. <꼬방동네 사람들>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회신 「<꼬방동네 사람들> 검토의견」에는 ‘서민촌 시민생활의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회질서 문란과 사회일면의 고발성 우려가 있음’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7 . ‘무허가 건물의 철거로 인해 쫓겨날 형편’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서민생활의 직설적인 표현’이 ‘고발’로 보인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있다 해도 감추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 작품 역시 ‘사회악적인’ 장면을 삭제하고, ‘서민층의 비관적인 삶의 묘사를 피하’며, ‘의지로 환경을 극복’, ‘가난한 판자촌의 애틋한 이야기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밝은 얼굴로 볼 수 있도록 서정적인 영상’을 활용하겠다는 개작 내용을 제출했고, 여러 번의 개작 끝에 엄격하게 실사검열을 진행하겠다, 문제가 생겼을 시 모든 책임을 제작사 측에 묻겠다와 같은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들은 후에야 영화를 제작·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들은 모두 1981년을 지나 제작신고서를 제출하면서 영화화를 시도한 작품들로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 진행과는 1년도 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류들에서는 민간 심의위원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찾아볼 수 없으며, 무엇보다 문공부와 내무부 등이 나서 이 작품이 품고 있을 위험성에 대해 직접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잠시 동안 꿈꾸었던 자유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이 검열서류들이 너무도 명징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후 가난을 그리는 작품들은 1987년을 지날 때까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옥외 광고탑에서 외치던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제 멋대로 해석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1980년대의 진실에 대해 풍자했던 가난한 청년들의 영화 <칠수와 만수>가 1988년 개봉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여타의 영화들이 놓인 시기적 차이와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검열의 탄성(彈性)을 결정짓는 것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갑작스레 밝은 노래로 마무리 되지만, 이 엔딩송이 흘러나오기 전 덕배는 좁은 사각 링 안에서 긴 시간 얻어맞는다. 이 장면에 깔리는 덕배의 내레이션은 희망찬 엔딩송과는 전혀 다른 편에 서 있다. 덕배는 이야기한다. 서울에 올라와 2년을 사는 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줄 곧 맞아온 것처럼 생각된다고. 누가 때리는 것인지는 모른 채 2년 동안 맞아온 상경한 청년의 이야기는 그렇게 잠시 스크린에 자리할 수 있었다. 1980년대를 설명할 때의 위 작품들은 시대의 변화에 등장한 하나의 경향으로 묶여 설명되곤 한다. 리얼리즘의 회복이라 설명되는 <바람 불어 좋은 날>과 그 이후 나온 작품들은 ‘현실’을 묘사한 작품들로 동등한 층위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었기에 영화에서 묘사하는 꾀죄죄함과 비루함에는 무수한 균열들이 도사린다. 그리고 이후 ‘서민’의 삶이 다시금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스크린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긴 시간이 지나야했다. 1. 김상민 엮음, 『박정희 시대와 한국 대중문화』, 선인, 2012, 34-48면. 2. 신문기사에 따르면 영화검열의 민간 이양은 4월 1일부터로 명시되어 있지만( 「영화검열 민간 단체에 이관」, 《경향신문》, 1979.3.9.) 당시 실제 영화검열 사무를 담당했던 공윤의 월보 『공연윤리』에서는 4월 10일자로 업무가 이관된 것으로 적고 있다(「영화의 검열 심의업무 공윤 민간 기구로 이관: 심의위원은 각계 인사 17명으로」, 『공연윤리』, 1979.4.(32호), 1면. 신문은 기사에 따라 민간이양 일자를 4월1일이나 4월 2일로 각기 다르게 적기도 하며, 실제 업무를 담당하던 공윤에서 명시한 날짜가 더욱 신빙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 영화업무의 민관이양 일자는 1979년 4월 10일로 서술하였다. 3. 「영화검열의 민간 이양」, 《경향신문》, 1979.3.24. 4. 김영진, 『이장호vs 배창호』, 한국영상자료원, 2007, 50-51면. 이 글에서 이장호는 몇 장면은 끝내 통과되지 못한 채 삭제되었다고 기억한다. 이장호는 영화에 삽입되어 있던 노래 가사가 문제가 되어 가사 부분의 사운드 트랙을 늘려 문제점을 해결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서류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서류와 구술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 그 상황은 구술자의 기억의 오류 등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서류에는 남아 있지 않는 심의위원과 창작자 간의 협상이나 검열의 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 좀 더 다각적인 접근과 확인이 필요하다. 5. 이장호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완성될 무렵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고, 유신정권 못지않게 억압적인 독재체제가 수립, 1980년대의 말과 상황이 달라져 있다고 술회하지만(김영진, 위의 책, 50면)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완성, 그 후 검열의 신청과 진행은 최규하의 하야(1980.8.16.) 이전이다. 이때에도 실세는 이미 군부로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공식적으로 정권이 교체되기 이전과 그 후는 사회적 분위기면에서도, 영화 내부로 들어온다면 영화 검열 서류상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6.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은 이동철의 동명의 소설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조세희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7. 서류에 적힌 ‘직절적인’은 ‘직설적인’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