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의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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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는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기독교반공문예영화다. ‘기독교·반공·문예’는 당시 정권과 순치되고 나아가 권장되었던 요소들이어서 일견 검열에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상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보부의 공식적인 검열 단계는 비교적 수월히 통과했지만 국방부, 중앙정보부, 내무부, 문교부의 개입이 이어졌다. 어떤 면에서는 국책과 순치되는 영화였기 때문에 관계기관들이 더 간섭하려는 면도 있었다. 또한 이 영화는 <7인의 여포로> 이후 국가가 영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통제하려던 분위기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엘리트들의 의견 역시 중요한 벡터로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순교자>를 둘러싼 논란과 검열 과정은 검열 관계기관들의 역학을 비롯해 <7인의 여포로> 이후 검열의 변화, 그리고 이로 인한 갈등이 당대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계층을 통해 봉합되는 국면을 드러낸다. <순교자>의 검열과정: 상영허가증 발급 이후 국방부, 정보부, 문교부, 내무부가 개입하다 1965년 3월5일 제작사(극동흥업)는 공보부에 <순교자> 영화 제작을 신고한다. 3월 20일에 “정부시책과의 관계-저촉 사항 없음”이라는 전제 하에 시정사항 4개가 지적되며 제작신고가 수리된다. 이후 영화가 완성되어 중도에 제작권한을 양도받은 합동영화주식회사 명의로 6월 10일 ‘영화상영허가신청서’가 제출된다. 6월 15일에 “보안상 유해로운 점 없음”이라는 검열의견서가 작성되고, 대사 1개처를 삭제하는 조건으로 6월 16일에 ‘영화상영허가증’이 발부된다. 그런데 상영이 허가된 6월 16일에 국방부에서 화면 1개처를 삭제하고 대사 1개처를 수정하라는 전언통신문을 보내온다. 공보부에서는 이미 영화상영허가증을 발부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고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18일 공보부 영화과 계장이 기안한 내부 결재 서류에 의하면 화면 1개처 삭제를 추가 제한사항으로 승인하지만, 이미 녹음이 끝난 뒤라 대사 수정은 불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방화 <순교자> 심사 의견 처리”라는 제목의 부전지에는 <순교자>는 “군사극영화가 아니고 종교극영화”로 “국방부 후원은 군장비 후원”이었고 공보부에서 “국방부에 심사 요청한 바가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에 결국 6월 18일 공보부는 국방부에 직접 “수정사항을 업자 측에 통보하시고 수정토록 조치”하라는 전언통신문을 보낸다. 공보부와 국방부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그림 1) 전언통신문: 국산극영화 “순교자” 심사의견 처리 검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순교자>가 아카데미극장에서 상영중이던 6월 22일에 중앙정보부는 “보안상 유해로운 것이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삭제 후 상영토록” 하라고 공보부에 통보한다. 그 내용은 화면 3개처와 대사 3개처를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지적에 대해서는 공보부가 보다 긴장하는 기색이 서류에서도 감지된다. 6월23일 ‘방화 <순교자> 제한조치의견 처리’라는 제목의 서류에서 중앙정보부를 CIA라고 칭하며 “토의가 요하다고 사료되옵기 공람하고 회신은 추후 기안”하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러면서 ‘참고사항’으로 “검열 당시 CIA 파견 검열관”이 “보안상 유해로운 점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내용을 부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6월 15일 합동검열에 중앙정보부가 참여하여 “보안상 유해로운 점 없다”는데 동의해 놓고 뒤늦게 다른 소리를 하는 것에 대한 난감함이 묻어난다. 1964년 중앙정보부의 입장 번복으로 감독이 구속되었던 <7인의 여포로> 사건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냥 반공영화가 아니라 ‘기독교반공문예영화’였다. 6월 26일에 공보부는 이 영화가 “세계 각국에서 다량 발매된 재미교포” 작가의 소설에 충실하였다는 점과 “당초 귀부와의 합동검열 당시 합의된 바” 있으며, “귀부 추가제한요구를 집행하는 경우에 예견되는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현행대로 상영토록” 하겠다는 의견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다. (그림 2) 방화 “순교자” 제한조치 요청에 대한 회신 이로써 국방부와 중앙정보부의 사후 검열은 일단락된 듯한데, 아직 등급을 정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6월 17일에 합동영화주식회사가 ‘학생관람허가신청서’를 공보부에 접수한 뒤 6월 26일에 문교부 측에서 제한사항 없이 ‘고등학생 이상’에 관람을 허용해도 된다는 의견을 공보부에 통보한다. 그런데 7월 2일에 문교부가 입장을 바꾸어 군인의 방에 걸린 태극기가 표준형이 아니므로 표준형 태극기로 화면을 수정해야 고등학교 이상 관람을 허용한다는 의견을 보낸다. 그리고 7월 6일에 내무부 치안국 보안과에서 ‘학생관람불가’ 의견을 공보부에 보낸다. 7월8일 공보부에서는 문교부와 내무부의 의견을 종합하여, 등급은 ‘미성년자관람불가’로, 문제가 된 태극기 화면은 표준형 태극기로 수정하여 필름과 대본까지 다시 제출하라고 제작사에 통보한다. <7인의 여포로> 사건, 유현목, 그리고 <순교자> 당시 정부의 정책 방향에 거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영화가 이렇게 수난을 겪게 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영화 한 편을 두고 문화 담당 기관은 물론 국가안보, 치안, 교육을 담당하는 복수의 행정기관들이 검열에 참여하였다는 데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 국책에 부응하는 영화라고 해서 검열을 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간섭하려는 기관이 많았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또한 <7인의 여포로> 사태 이후 중앙정보부가 영화 통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5.16쿠데타 직후에 설립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 내내 전방위적으로 권력을 강화해간다. <7인의 여포로> 사태는 영화계에서 하나의 변곡점이 된 사건이었고 <순교자>는 그 여파 속에서 검열을 받은 것이었다. 여기에 당시 기독교계의 반응은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였다. 유현목 감독은 자서전에서 <순교자> 개봉 당시 상영을 앞두고 기독교계가 반발했다고 회고한다. 목사들이 문공부장관을 찾아가 영화에서 신목사(김진규)가 ‘신은 없다’고 말하는 대목을 문제 삼으며 상영금지를 호소했다는 것이다. 개봉한 이후에도 기독교계의 반대는 계속되어서 지방 상영극장 앞에서는 신자들이 입장을 막기도 했다고 말한다. 1) 당시 신문을 보면 기독교계가 일방적으로 반대만 한 것은 아니고 찬반이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된 것은 영화만이 아니라 원작소설부터였다. 1964년 영문으로 출간된 『순교자』(The Martyred) 2) 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남한에도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소설 속 목사들의 죽음이 거룩한 순교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국내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김은국 작가를 “20세기의 가롯 유다”라고까지 비난했다. 유현목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화하자 큰 화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에 대한 비난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목사들이 공산당 앞에서 신을 부정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증언하는 인물이 북한군 소좌라는 것이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분단 이후 남한 개신교와 반공 이념의 강력한 결속이 ‘배교와 이단’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도 “현대 기독교의 문제를 제시하고 기독교적인 고민을 심화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목사들―문익환(한국신학교), 변선환(이화여고 교목), 김광우 목사 등―이 있었다. 3) 또한 언론에서도 “성직자의 고독을 묘파” 4) 한 “중량감 넘치는 역작” 5) 이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그러던 7월 13일에 유현목 감독은 돌연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다. 1965년 3월 23일에 ‘은막의 자유’ 6) 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본부 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이 뒤늦게 말썽이 된 것이었다. 7) 공안 검찰은 <순교자>뿐만 아니라 <오발탄>(1961)과 <잉여인간>(1964)도 용공적이라고 판단하여 유현목 감독을 소환했다고 전한다. 8) <7인의 여포로>의 이만희 감독에 이어 또 다시 영화감독이 반공법으로 입건되는 데 대해 영화계는 물론 보수언론에서도 우려스러워했다. 9) 이와 같은 논란 속에서 <순교자>는 더욱이 문제작이 되었고, 영화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다. 1965년에 베니스영화제에 처음으로 5편을 출품했는데, 그 맨 앞에 <순교자>가 놓였다. 10) 1965년 『실버스크린』 6월호에서는 “세계명작을 영화화한 영화예술의 극치”로 <순교자>를 소개한다. 11) 그리고 9월호에서는 종전에 영화학도들을 위해 연재해오던 학술적인 코너 3개를 합쳐 “내일의 영화인을 위한 쎄미너”라는 지면을 만들고 개봉된 영화 중에서 문제작 한 편을 골라 집중적으로 분석 검토하는데, 그 첫 번째 텍스트로 <순교자>를 선정한다. 1965년 말에 가면 <순교자>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평가는 “종교논쟁까지 불러일으켰던 작품”으로 “테마는 휴머니즘”으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유현목 감독은 공보부에서 주관하는 대종상 감독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유현목 감독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계속되어 1966년 1월 서울지검은 반공법 위반에 음화제조 혐의(<춘몽>)를 더해 유현목 감독을 불구속 기소한다. 1967년 3월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고, 음화제조에 대해서는 벌금 3만원 형이 확정되기까지 법적 논란은 계속된다. 일련의 과정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검찰이 중앙정보부와 함께 문화예술까지 재단할 수 있는 상위의 공권력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해 둘 것은 이런 가운데 <순교자>는 미국에 첫 수출되어 상영된 영화 13) 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매개로 한국전쟁과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 속에서 국내 공권력의 역학 밖에서 움직이는 힘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로 인한 박정희 정권과 기독교계의 충돌은 1970년대에 들어서며 본격화된다. 1) 유현목, 《영화인생》, 혜화당, 1995, 151-152쪽. 2) Richard E. Kim, The Martyred, George Braziier Inc., N.Y.C., 1964. 3) <기독교계에 순교자 파문>, 《동아일보》, 1965.6.29. 4) <[새영화] 성직자의 고독을 묘파>, 《경향신문》, 1965.6.19. 5) <[영화평] 중량감 넘치는 역작>, 《조선일보》, 1965.6.20. 6)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3.24.; <은막의 자유」, 《조선일보》, 1965.3.25. 7)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7.13. 8)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7.14. 9) <만물상>, 《조선일보》, 1965.7.15. 10) <<순교자> 등 다섯 작품 베니스영화제에 출품>, 《동아일보》, 1965.9.14. 11) <[이달의 문제작] 세계명작을 영화화한 영화예술의 극치>, 《실버스크린》, 1965년 6월호, 114쪽. 12) <[지상콘테스트 200자 시리즈(완)] 청룡상에 출품된 영화들-순교자>, 《조선일보》, 1965.11.28. 13) <영화 <순교자> 미에 첫 수출>, 《동아일보》, 1966.7.21.; <미주 등서 일제상영>, 《조선일보》, 1966.7.21.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날의 국가정보원, 80-90년대 국가안전기획부의 전신이자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핵심 권력기관, 수많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고문으로 악명높았던 곳. 바로 중앙정보부다. 그런데 국가안보라는 거창한 임무를 수행하던 이곳이 영화검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 심지어 공식적이고 제도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은 그저 원로영화인 몇 분들의 증언으로 전해져 왔을 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영상자료원이 검열서류들을 공개한 후에야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는 못했다. 이 글은 그 예비적인 시도로, 중앙정보부가 영화검열에 참여했던 역사와 방식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대 초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한 검열 개입 필자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선에서 볼 때, 중앙정보부가 검열서류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는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재검열 문서다. <오발탄>은 1961년 4월에 개봉하였으나, 5.16쿠데타 직후 상영중지가 되었다. 이후 7월 20일 재검열을 거쳐 상영중지가 공식화되는데, 이때 재검열의 주체 중 하나로 처음으로 중앙정보부가 등장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것이 1961년 6월이니, 한달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오발탄>에 대해 “치안면에 있어서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다분 내포하며 현 시국으로 보아서 상영불허함이 가하다고 사료됨”이라 밝혔다. 이후 <오발탄>은 1963년까지 상영정지 상태에 처하게 된다. 정보부가 영화검열에 개입한 최초 사례로 추정되는 <오발탄> 재검열 문서 다만 <오발탄>은 특수한 사례로, 아직은 정보부의 영화검열이 일상적이거나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전수조사를 해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략 1961년 9월경이 되면 정보부가 빈번하게 검열에 개입하는 것을 서류로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확인한 첫 사례는 < 붉은 두목 >(이영, 1961)이라는 반공영화의 본편 검열서류이다. 이후 정보부는 주로 국가 안보와 결부된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검열자로 참여했다. 1962년 영화법 제정 후 제작신고라는 이름으로 시나리오 검열이 점차 (준)제도화되면서, 정보부는 본편뿐 아니라 시나리오 검열에까지 관여하게 된다. 이들 영화가 국가 안보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앙정보부의 개입이 정당화되었던 것일 텐데, 역으로 보자면 중앙정보부가 관심을 가짐으로써 반공영화가 국가의 안보 이익을 해치거나, 나아가 불온한 영화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 *주1 사건일 것이다. 당초 공보부와 정보부의 합동 검열에서 이 영화는 소수의 제한사항만으로 통과되었으나, 이후 정보부의 입장 번복으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고 반공법 위반으로 감독이 구속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검열 후 돌연 <7인의 여포로>의 상영보류를 지시한 중앙정보부의 서류(전언통신문) 반공영화만이 중앙정보부가 개입하는 장르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임원식·나봉한, 1964)와 < 춘몽 >(유현목, 1965)의 사례를 들 수 있겠다.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는 내용상의 불온성이 문제가 되었다기보다는 제3공화국의 초기 위기를 낳은 한일협정 반대 시위라는 시국상황과 관련되어 영화의 반일적 톤이 민감하게 포착된 것으로 보인다. 서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1964년 12월, 공보부 검열을 마쳤으나 돌연 1965년 3월 6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중앙정보부가 추가 검열사항을 전달함으로써 검열 결과가 변경되었다. 이에 관해 신상옥 감독은 중앙정보부가 개봉을 반대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개봉이 가능해졌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의 검열이 반드시 서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춘몽>이 형법에 저촉되는 영화이므로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하라는 내용의 정보부 전언통신문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의 경우 그 맥락상 정보부의 개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란, 외설이 문제가 된 <춘몽>의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 영화의 검열에 참여한 정보부는 “자학적 변태성향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 국민 여론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 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할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제244조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 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보부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공보부는 문제 장면의 대폭 삭제 후 상영허가조치를 하였지만, 이후 감독 유현목 은 음화제조반포죄로 기소되어 유죄 취지의 판결(선고유예)을 받기에 이른다. 안보나 사상이 아닌 풍속 문제의 영화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이유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면 관계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유현목 감독이 반공죄로 투옥되었던 이만희 감독을 옹호한데 대한 보복성 조치로 이해되고 있다. 상시적 검열자가 되다(1968년 말~ ) 1968년 말에 접어들게 되면 중앙정보부의 영화검열 참여 방식이 전환된다. 개봉되는 모든 영화에 대한 상시적인 본편 검열자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정보부의 본편 검열이 제도화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0월 5일에 검열에 합격한 < 일본인 >(김수용, 1968)의 경우에는 기존 방식대로 검열이 이루어졌으나, 10월 15일 시행된 < 수전지대 >(김수용, 1968)의 검열서류에서는 정보부의 영화검열의견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10월 중순(늦어도 11월 초순)경부터 정보부가 검열에 참여하는 관행이 시작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수전지대>의 정보부 영화검열 의견서(삭제 대상으로 명시된 "집단 난투장면") 현재 시점에서 중앙정보부가 상시적인 검열자로 등장하게 되는 구체적 배경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김신조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같은 1968년의 안보적인 위기 상황, 1968년 7월 말 공보부가 문공부로 전환되었던 행정체제의 개편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새로 개편된 체제에 따라 상시 검열은 정보부 외 내무부(치안본부)와 주무부처인 문공부 세 곳이 담당했다. 이전의 주체와 비교할 때, 문공부(주)와 내무부(부)에 정보부가 추가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세 주체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1970년대 문공부의 영화검열 담당 직원이었던 이남기 의 증언을 참고할 수 있다. 근데 그 검열관 구성은, 국산영화 경우에 대개 인제 과장하고 국산영화 담당 사무관하고 그 실무자까지 들어가요. 에. 들어가서, 그러고 인제 외부에서는 인제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파견된 이 검열관들이. 그래서 문공부하고 중앙정보부하고 그 저 치안본부하고 결국 세 개 기관이 맡아 전담하게 되죠. 그리고 인제 ... 안기부(정보부의 착각)에서 온 분들은 주로 인제 국가안보에 그 위해, 저해요인 같은 거. 우리가 남북분단 된지도 참 오래됐지만은 이런 긴장관계에 있으니까북한을 찬양한다든지, 요즘 어떤 세태하고는 전연 틀렸죠, 그 당시는. 그 엄격히 영화든 처리할 때니까. 그 북한 찬양 이런 문제. 그러고 인제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나오는 거는 결국 인제 청소년의 유해여부, 이런 걸 인제 보고. 그리고 요즘도 그 하지만은 청소년 그 관람 등급가부 이런 걸 주로 결정하게 되고. 그러고 그 유해성 저 윤리성, 이런 문제도 그때는 상당히 그 시기에는 엄격히 다뤘어요. - 채록연구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147-148쪽, 강조는 필자 즉, 사상 및 안보에 관한 사항은 중앙정보부, 미성년자 보호(미성년자 관람가부 판정 포함)에 관한 사항은 치안본부가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공부는 전반적으로 검열 진행과정을 조율하고, 의견을 종합하여 제작사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공윤의 본편 검열 이후(1979년 4월~ ) 약 10년 이상 유지되었던 본편 검열 체제는 1979년 4월, 문공부가 본편 검열권을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에 이관함으로써 변경된다. 공윤의 1기 영화 심의위원은 20인 이내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심의위원 17인은 공윤위원장의 추천에 따라 문공부 장관이 위촉였고, 3인은 당연직으로 구성되었다. 이 당연직에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의 검열관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체제는 1980년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어느 시점에 종료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료의 미비로 확인되지 않는다. 보완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1979년 7월 24일, < 간첩잡는 똘이장군 >(김청기, 1979) 공연윤리위원회 위원별 검열의견서 중 하나. 검열자 임광수는 중앙정보부 검열위원이었다. 요컨대 중앙정보부는 1961년 설립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20여년간 영화의 검열자였고, 특히 1968년 하반기 이후에는 상시적으로 영화 검열에 참여했던 가장 중요한 검열자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정보기관이 영화검열에 제도적이고 상시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당시 정부가 대국민 선전전을 광범위하게 수행했고, 영화의 대중 영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초기에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만 관여하던 정보부가 1968년 말 이후 모든 영화의 본편 검열에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이 시기 국가 안보라는 것이 단순히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화가 다루는 국민의 일상에까지 확장해 가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는 1970년대 유행했던 “총력안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부기해 둘 사항이 있다. 간혹 검열서류에서 CIA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검열자료 연구 초기, 필자를 포함 관련 연구자들이 이를 미국의 정보부로 오인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CIA가 언급된 다양한 검열자료들을 볼 때, CIA는 KCIA(중앙정보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차후 연구를 통해 보다 분명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 주1.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1965년에 개봉했다.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서영춘의 코미디와 검열의 관계를 살펴보는 두 편의 글 중 첫 번째 글이다. 서영춘의 코미디에 집중해서 검열 서류를 살펴보는 이유는 그가 악극이나 쇼 무대의 활동을 넘어 라디오와 영화 등 대중매체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난 뒤부터 끊임없이 ‘저속성’ 논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서영춘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저속 코메디언”으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최고의 체크 기록”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1) 말하자면 서영춘의 코미디는 ‘저속함’을 매개로 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의 통속성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검열은 코미디에서의 ‘저속’과 ‘건전’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글에서는 서영춘의 영화 출세작이었던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와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왔으며 공보부의 검열 강화 기조에 일조했던 <오대복덕방>(이형표, 1968)을 중심으로 검열의 추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글에서는 성적인 표현과 동성애 코드를 둘러싸고 검열에 재검열을 거쳐 상영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영화검열의 기조와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과 ‘통속’ 코드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본격적인 코미디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악극단의 인기 배우들이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끌던 시점이기도 했다. 식민지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제작되지 않았던 코미디영화들도 이 시기에 다양한 하위 장르를 이루며 쏟아져 나왔다. 악극단과 라디오에서 주가를 올리던 코미디 배우들은 영화에서 자신들의 장기와 퍼포먼스를 발휘하면서 코미디영화의 활황을 이끌었는데, 가장 먼저 스크린을 점령했던 것은 양석천과 양훈, 홀쭉이와 뚱뚱이 듀오였다. 뒤를 이어 등장했던 구봉서와 김희갑은 검증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수많은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서영춘은 다소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악극단과 라디오, 쇼 무대를 거쳐 1960년대 스크린 코미디의 총아가 되었다. 서영춘(1928~1986)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서영은의 동생으로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1952년 악극단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백금녀를 만나 뚱뚱이-홀쭉이 콤비를 이루면서 유명세를 탔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반 라디오 코미디의 전성기에 동양라디오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TV쇼의 사회자이자 백금녀와 함께 하는 만담의 출연자로 등장하면서 서영춘은 “여보 마누라 가갈갈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뿜빠라뿜빠 뿜빠빠”, “살살이, 요건 몰랐지?” 등등의 유행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로 시작되는 일종의 만요와 “시골영감 기차놀이”의 리메이크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스타 코미디언으로 발돋움했다. 서영춘의 영화 데뷔작은 1961년 <인생갑을병>(박성복)으로 여기서 그는 엑스트라 급 조연을 맡았으나, 1964년 <총각김치>(장일호),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서영춘은 이 영화의 흥행을 시작으로 라디오와 TV, 스크린,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면서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여자가 더 좋아>는 서영춘을 스타 배우로 만든 영화일 뿐 아니라 1960년대 후반 유행했던 여장남자코미디의 시초이자 이 시기 코미디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코미디, 즉 코미디언코미디의 활황을 선도한 영화였다. 여장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성전환 수술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주는 등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코미디이지만 검열에서는 거의 지적된 바가 없으며 오히려 흥행을 통해 재평가된 지점이 존재했다. 한편, <오대복덕방>은 서영춘이 여러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출연하는 영화여서 전체적인 비중으로 볼 때 ‘서영춘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온 영화였고 공보부의 검열강화 기조에 일조한 영화였다는 점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여자가 더 좋아>를 살펴보자. 코미디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였던 <여자가 더 좋아>는 오랫동안 유실된 필름이었다. 다행히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에 ‘한우섭-한규호 父子 컬렉션’이 기증되어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2016년 5월 31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최초로 일반 상영되었는데, 후반부 20여 분의 싱크가 맞지 않고 마지막 씬이 유실된 불완전판으로 공개되었다. 유실된 부분에 대하여 시나리오, 검열 서류 및 각종 기사들과 스틸 사진 등의 자료를 보충하여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는 흡사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남녀가 뒤바뀐 설정의 코미디 버전처럼 보인다. 여자직업학교에서 음악 선생으로 일하던 규철(서영춘)은 동거하고 있던 애인 영숙(최지희)이 자신을 배신하고 결혼하자 여장을 하고 그 집의 식모로 들어가 복수하고자 한다. 영숙이 규철을 배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의학적 소견 때문이다. 이를 인정할 수 없는 규철은 변심한 애인을 벌하고자 규화라는 이름으로 여장을 하고 영숙의 집에 식모로 들어간다. 시아버지(김희갑)의 못된 버르장머리 때문에 “식모란 식모는 모조리”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던 이 집에서 애교스럽고 일 잘하는 규화는 시아버지의 총애(를 가장한 성추행)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규철은 뛰어난 피아노 실력으로 영숙의 남편 박문기(남궁원)에게도 호감을 사며 문기의 동료이자 악극단의 지휘자인 선우광(양훈)으로부터는 적극적인 구애를 받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인하게 된 규철은 정체가 탄로 나자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질주한다. 현재는 유실되었으나 시나리오 및 신문기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엔딩 씬은 질주하던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는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 여성이 되어 병원을 나선 규철이 “교태를 부리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제시된다. 이 같은 파격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던 <여자가 더 좋아>는 그럼에도, 검열에서 큰 지적 사항 없이 영화화되었다. 시나리오 심사의견서는 이 영화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여자 같은 남자’ 콘셉트를 베꼈다고 지적하면서 코미디에 필요한 “건전한 웃음” 없이 “난잡”하고 “황당무계”한 것으로 “오로지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비예술적 태도를 지양할 것을 주문했다. (그림 1) 공보자문위원회 영화분과위원회, 「“여자가 더 좋아” 씨나리오審査意見書」, 1965.4.22. <여자가 더 좋아>의 시나리오 검토는 제작자에게 “건전한 웃음”과 ‘코미디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다소 추상적이고 훈계적인 내용의 ‘의견서’로 제출되었다. 그런데 건전한 코미디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공보부에서 ‘눈깔’ 등의 대사를 시정하라는 것, 선우광과 규철의 밀회 장면을 ‘주의 깊게 취급’해달라는 것 등 5개의 가벼운 지적 사항과 함께 제작신고 수리 통보를 받았다. (그림 2) 공보국 영화과, 「극영화 “여자가 더 좋아” 제작신고 수리통보」, 1965.5.31. 그리고 실사 검열에서는 위의 밀회 장면을 단축하라는 단 한 가지 지적을 받고 상영이 허가되었다. (그림 3) 공보국 영화과, 「국산영화 “여자가 더 좋아” 상영허가」, 1965.6.19. 상대적으로 ‘반공법’ 위반에 주목하고 있었던 이 시기의 영화검열은 아직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함’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만화조 넌센스의 소극” 2) 에 불과하다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평단에서 의외로 영화가 장기 흥행 하며 관객 몰이에 성공하자 이 영화가 일종의 사회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저속’함에 대한 면죄부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영화의 장기 흥행을 보도하면서 한 기사는, 남자였을 때 누릴 수 없었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을 여장을 하고 난 뒤에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성전환을 택한 “서영춘의 페이소스”와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는 비평을 실었다. 3) 같은 해 11월에 개봉한 영화 <주책바가지>(심우섭, 1965)를 혹평하면서, <주책바가지>에는 <여자가 더 좋아>의 “페이소스”가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한 기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한편, <여자가 더 좋아>가 제작되었던 1965년 이후, 1966년 2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검열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면서 코미디영화 검열 역시 강도가 높아졌다. 1967년 말에 제작하여 시나리오 사전검열과 제작 후 필름검열을 모두 통과하고 1968년 2월 개봉 중이었던 <오대복덕방>을 공보부가 재검열하겠다고 나서면서 이 영화는 검열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시나리오와 기사, 스틸 사진 등으로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오대복덕방>은 김해 김씨 일가 5대의 이야기로, 영화는 90세의 1대 용태 할아범이 서울에 와서 복덕방을 차려 성공하자 자손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면서 시작된다. 이후 전라도 무주에서 상경한 일가족이 한 동네에서 각자 복덕방을 차리면서 각종 해프닝을 벌인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정할 수는 없지만 추정하건대, 서영춘은 3대 김영근으로 등장하여 결혼 사기를 당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반목하며 경쟁하던 5대 일가족은 사기사건을 계기로 화해하고 개심하여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전라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 가족의 ‘저속한’ 행태와 말투로 인해 전라도 지역 영사기사들이 영사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전북극장협회에서도 영화 상영을 거절했다. 검열 서류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전라북도 내 영사기사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는 기사와 전북극장협회의 상영 거절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5) 뿐만 아니라 김해김씨 종친회 및 전라북도 도지사의 상영정지요청도 이어졌다. (그림 4)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 「영화상연중지요청」, 1968.2.5. (그림 5) 전라북도지사, 「영화 “5대복덕방” 상영 정지처분 건의」, 1968.2.9.) 김해김씨 종친회의 민원은 <오대복덕방>이 “우리종친인 김해김씨의 명예를 형언할 수 없을 만치 훼손한 스토리로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인 종친사회를 근본적으로 모욕한 것”이므로 즉각 상연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전라북도 도지사의 이름으로 발송된 건의서에는 이 영화가 “오락적 경지를 벗어나 전래의 미풍양속을 해하고 나아가서는 혈연의식과 지역적 파벌을 조장하는 결과를 자아내”어 “전북도민으로 하여금 격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게 하고 신문, 방송 등 이 고장 언론기관이 선두에서 이를 규탄하는 일대 쎈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동시에 본도 전도민이 항의에 기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중략)... 국민적 단합과 정신무장 면에 구열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면서 이 영화를 즉각 상영중지하도록 요청했다. 이 서류에는 전북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기사들도 첨부되어 있어 이 영화를 둘러싼 전북 지역의 여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에서 이 영화는 “건전하며 코믹한 오락작품이면서도 과욕과 허실된 생활을 다분히 경고적으로 풍자한 작의가 좋”다며 “극히 명쾌하고 코믹하면서도 ... 인간 본연의 자세와 선악을 도시 생활상의 일단면에서 풍자적으로 그려주고 있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저속한 대사나 장면 묘사에 주의하여 제작”하라는 주의 속에서 무수정으로 검열에 통과했고, 필름 검열에서도 판잣집을 서울의 명물이라고 보여주는 장면, 화장실 씬 등 세 장면을 삭제하고 대사 한 줄 정도를 삭제하라는 수정사항을 지적한 뒤 합격증을 배부했던 것이다. (그림 6)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각본심의위원회, 「“오대복덕방” 각본심의의견서」, 1967.12.14. (그림 7) 공보부, 「국산영화 “오대복덕방” 검열합격」, 1968.1.26.) 검열의 호평 속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이 시작되고 나자 앞서 언급했던 각종 투서와 건의서가 공보부에 답지했다. 이러한 여론이 비등해지자 영화의 제작자였던 주식회사 대한연합영화사의 대표이사 홍의선은 재검열과 재편집이 불가능하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서 홍의선은 상영허가검열에 합격하여 이미 상영을 시작한 지 열흘이나 경과된 시점에서 프린트를 회수, 재편집하는 것은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므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공보부의 “영화위원회의 심의에 회부”하여 검열해 달라고 요청한다. 또한 홍의선은 이 영화가 “정극과는 그 영역이 판이한 희극영화”로 사투리는 “코믹한 텃취로 극을 희화화해보려는 시도”일 뿐이고 전주김씨 17대손 운운은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성씨의 하나로 표현한 데 불과”하며 “예의 17대손은 4,500년 전에 존재한 인물로 가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현재 후손들에게 불명예스럽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그림 8) 「희극영화 “오대복덕방”영화위원회심의요청의 건」, 1968.2.6.) 결국 공보부에서는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영화의 재검열을 실시한다. 그런데 이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967년 4월 1일부터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신고시 첨부되는 각본에 대하여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각본을 검토하도록 했는데, 각본심의위원회는 영화법 저촉사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영화계 내부에서 스스로 조직한 단체였다. 각본심의위원회의 검토를 통과하고 나면 제작이 시작되고, 제작이 완료된 필름은 실사심의를 거치는 이중의 검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심의 제도는 1967년 12월 1일 공보부에 6인으로 구성된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설치되면서 3중의 제도로 변경된 바 있었다. 따라서 <오대복덕방> 상영 분쟁이 생긴 뒤 소집되었던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와 동일한 심의기구로 추정할 수 있다. 1968년 2월 7일 공보부가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재심을 한 결과 “사회적 물의와 진정의 대상이 되는 저속한 부분은 추가 제한 조처함이 가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일단 상영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추가제한 조치로 30여 곳을 삭제, 단축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가락중앙종친회에는 “종친을 특정하는 대사, 화면 및 저속한 대사, 화면을 추가 삭제 조치”했음을 알리는 공문을, 전라북도지사 공보실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대사삭제 29개처, 화면삭제 15개처, 화면 단축 2개처”를 제한조치하여 상영하도록 했다는 회신을 보냈다. (그림 9) 「극영화 “오대복덕방”의 상영 정지」, 날짜 미상(2.7-2.9일 사이로 추정) (그림10) “극영화 <오대복덕방>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 1968.2.9. (그림11) 「진정에 대한 회신」, 1968.2.9.; 「극영화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 1968.2.20.) 그런데 이때 재검열의 내용은 신문기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다소 저속”하지만 “넌센스 코메디임을 감안하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다”는 결과를 회신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서류는 확인할 수 없다. 6)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일종의 중재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추가제한 조치에 따라 이후 필름들이 회수, 수정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과 2월 말까지도 이 영화를 둘러싼 비난 여론이 계속되었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처음부터 상영을 중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재검열을 요구했던 여론의 흐름과 투서를 보냈던 단체들에 보낸 회신으로 미루어볼 때, 필름 회수 후 수정본을 다시 상영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재검열 소동 이후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필름의 상영본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대복덕방>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재검열 사건으로 인해 검열에 대한 여론의 문제제기가 한층 높은 강도로 진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가혹하기로” 이름 높은 검열에서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저의 태작”이라고 평가받는 <오대복덕방>에 별 다른 문제없이 상영허가를 내 준 것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7) 이처럼 상황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홍종철 공보부 장관은 이 영화의 상영허가가 “사무적 미스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고 변명하면서, 이 영화의 재검열 뿐 아니라 앞으로 더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2중, 3중으로 실시되는 영화검열의 엄격함과 그 자의성에 대한 비난이 거세짐에도 불구하고, 홍종철은 “반국가적 반사회적인 것과 윤리적 도덕적인 것에 위배되는 것은 계속 커트하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8) 그간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해 왔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이후 공보부의 실사 검열은 <오대복덕방> 검열 논란이 있었던 직후인 1968년 4월 1일부터 각본심의위원회와 영화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합동으로 사전 시나리오 검열을 실시하고 검열의 강도도 강화하는 방침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70년 2월 20일 극영화시나리오 검열 업무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으로 이관될 때까지 이러한 검열의 주체와 기조는 지속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재검열 소동이 벌어졌던 와중에서 <오대복덕방>은 <남자 식모>(심우섭, 1968)와 더불어 개봉관에서 10만 관객을 넘겼다. <남자 식모>가 18만, <오대복덕방>이 10만을 넘기며 그 해 흥행 순위 2위와 5위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들의 “크린 히트”와 함께 평단에서는 코미디영화 검열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검열에서 “대중적으로 건전”하다고 평가 되었던 <남자 식모>와 “저속”하지만 “코미디”이므로 “웃고 넘길” 수 있다는 정도로 평가 받았던 <오대복덕방>은 검열의 위계상 분명히 같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평론에서는 함께 엮여 “관객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마구잡이로 찍은” “저질 코미디”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었다. 9) 이 시기, 검열과 평가의 기준을 달리 했던 평단은 서영춘 코미디와 구봉서 코미디를 한 데 묶어 “저질” 코미디로 분류하였으나 검열은 “저질 코미디” 안에서 또 다른 위계를 설정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저속’에 대한 검열의 문제제기와 위계화에 대해서는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의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남자 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 미용사> 등 이른바 ‘남자 시리즈’의 검열서류를 비교하면서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본다. 1) “방송가에 또 하나의 불씨/ 막다른 골목에 이른 코메디 프로 방륜마저 가벼운 경고 정도의 조치 뿐”, 《서울신문》, 1966.9.15. 2) 만화조 넌센스 소극 여자가 더 좋아”, 《조선일보》, 1965.7.15. 3) “우울한 동정에 기대어 롱런 한달 째나 「여자가 더 좋아」”, 《신아일보》, 1965.7.20. 4) “희극배우들의 여성숭배열/ 주책바가지”, 《신아일보》, 1965.11.6. 5) “복덕방 상영거부”, 《대한일보》, 1968.2.10. 6) “말썽난 70여 곳 삭제 항의 속에/다시 검열대 앞에/ 「넌센스 코메디」 오대복덕방”, 《신아일보》, 1968.2.13. 7) “「오대복덕방」 시비를 계기로 본/ 영화검열의 문제점/ 무정견한 양식의 기준/ 제 나름의 주관/ 툭하면 가위질. 영화 드라마의 뼈대를 손상시키기도/ 윤리적 면서 타락, 검열은 계속 강화 공보부의 견해”, 《조선일보》, 1968.2.22. 8) 앞의 기사, 《조선일보》, 1968.2.22 참고. 9) “한계 흐린 가위질/ 영화검열 시비/ <처제>는 저속, <엄마기생>은 OK/ 귀걸이 코걸이 재단/ 업자 당국 반성하고 전문위 두도록”, 《중앙일보》, 1968.5.25.; “관객 동원수로 본 상반기 영화/ 이상기류/ 철저한 오락물 추구/ 난센스 코미디와 검객영화 판쳐/ 흥행서 실패한 올해 수확작”, 《대한일보》 1968.7.9.; “하반기의 영화제작 경향/ 소극, 합작물의 범람/ 거의 예술성을 외면 /아이디어 부족 소재도 저속/ 관람 성향에 편승/ 인니, 태국과 합작도 기획”, 《대한일보》, 1968.7.20.) * 참고문헌: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명랑’과 ‘저속’ - 서영춘코미디의 불온함과 검열의 문제」,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51집,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