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트리아스
- 감독
- 델마 데이비스
- 제작년도
- 1954
- 출연
- 빅터 마추어, 수잔 헤이워드, 윌리엄 마셜, 배리 존스, 마이클 레니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라고 일컬어지는 프로레슬링은 독특한 형태의 공연 예술이며, 로마의 검투사 대결에 비견할만한 남성성의 신화를 과시하는 이벤트이다. 연행자와 청중이 합의한 사이비 스포츠이자 대중문화의 한 갈래로서 프로레슬링을 통해 전달되는 전언은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한 암시를 준다. 영화 < 반칙왕 >(2000)은 이 같은 프로레슬링의 함의 안에 IMF 경제위기가 야기한 여파를 깔아두고 직업인으로서 이중생활을 하며 평범한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소심한 은행원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 조용한 가족 >(1998)으로 한국 장르 영화의 지형에 변화를 몰고 온 김지운 감독이 얼마나 창의적인 이야기꾼이었는가를 입증하는 색다른 블랙코미디였다. 주인공 임대호(송강호)는 위기의 남자이다. 일상생활의 굴욕과 권태로부터의 안도와 더 큰 굴욕을 겪을 기회를 동시에 찾는 이 사내는 직장에서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욕도 없다. 실적을 쌓아서 연명해야 하는 직업적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은행의 부지점장(송영창)은 저조한 실적을 빌미로 그를 괴롭히며, 여자들은 그를 무시하고, 아버지는 그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엉뚱하고 유치한 이 남자의 성격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칙왕>의 핵심 서사는 자존감을 가진 어른이 되기 위한 대호의 여정에 동행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현대적이고, 고도로 엄격하며, 궁극적으로 온유한 금융의 세계에 견주었을 때 프로레슬링은 저급하고 극단적인 천박함으로 가득 차 있다. 마스크를 쓰고 레슬링을 하는 대호가 추구하는 남성다움의 시뮬라크르는 내러티브 안에서 양극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은행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는 복종적인 감성의 소유자이나 마스크를 쓰고 링에 올랐을 때에는 약속과 규율을 위반하는 반칙 레슬러이다. 대민 봉사 및 사무 조력에 익숙한 일상의 대호는 자신의 옛 영웅인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 가면을 쓰고 반칙왕이 됨으로써 내성적인 패배자에서 폭력적인 무법자로 변신한다. 새로운 페르소나의 가면을 쓴 그가 열광적인 대중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평소에는 소심하고 싸움을 기피하는 성격인 반면 반칙왕으로써 대호는 호전적인 싸움의 신이 된다. 헤드락을 걸고,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대호의 이중생활은 한 장면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코스프레를 하며 링 위에 선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반칙왕>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완벽한 시뮬라르크의 세계에서 프로레슬러들이 배우가 하는 일과 비슷한 과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는 경쟁의 과정에 본래 정체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가꾸고 가상의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를 해야 한다. 이는 허구의 드라마 안에서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비견할만하다. 마스크 퍼포먼스가 대호의 성격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묘사하는 김지운의 서술은 흥미롭다. 그의 나약하고 무기력하며 굴욕적인 일상과 비교했을 때 반칙 레슬러로의 변신은 자존심과 자존감을 향상시킨다. 따라서 개인은 현실 안에서의 열성 페르소나보다 영향력이 있는 수행적 페르소나를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요소는 <반칙왕>의 코미디 코드에서 핵심이 된다. 가면이나 변장이 왜소한 자아를 방어하는 심리적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정립된 심리학의 가설이지만, 일상에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대호는 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스크를 쓰고 코치의 딸 민영(장진영)과 데이트할 때조차도 마스크의 힘을 빌린다. 이야기의 밑그림을 제공하는 시나리오에서 은행 부지점장은 비열한 수단을 통해 관객에게 두려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악한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노골적으로 규칙을 위반하고, 경기 범위 밖에서 상대를 공격하고, 의도적인 부상을 입히고, 때로는 청중을 위협하기도 한다. 부지점장은 이 모든 악행, 내지는 그 이상의 악행을 저지르는데, 김지운은 이를 ‘공포의 헤드락’으로 묘사하며 악한의 시그니처 동작을 서사의 메타포로 만든다. 그의 독재적인 행동과 타인을 괴롭히는 신체적 억압은 비즈니스에 대한 냉혹한 통찰력.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잔인하고 굴욕적인 처벌을 특징으로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반칙은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대호에 대한 부지점장의 억압적인 처우는 스토리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는 <반칙왕>이 세기 전환기 한국의 경제위기를 바탕으로 한 우화적인 코미디임을 일깨워준다. 주지하다시피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한 업종 중 하나는 금융 업계이며, 이 환란의 시기 동안 은행 직원들은 실적과 과업에 과도하게 집착했을 뿐 아니라 오래되고 부패한 규칙들을 군말없이 따라야 했다. 현대화로 인해 국가는 새롭고 대안적인 문화적 이상을 환영할 수 있지만 은행과 같은 해묵은 기관은 여전히 검증된 계층적 비즈니스 문화 형태를 고수해 왔다. 이러한 코드 하에서 개인이 경영진의 억압에 저항하기 시작할 만큼 자아가 충분히 발달하면 조직에 역효과를 낳고 따라서 조직의 기능에 해를 끼치게 된다. 부지점장으로 특정된 악한의 성격화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대호와 부지점장의 갈등 구도를 TV 레슬링 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 vs 악당의 구도로 치환한다. 대호는 적어도 승리하기 위해 세상의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약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칙왕>의 파괴적 에너지는 반칙의 황제가 가장 위대한 싸움을 위해 링으로 향하는 종결부에서 절정에 오른다. 사각의 진혼곡’으로 이름 붙여진 영화의 마지막 챕터로 진입하기 전, 우리는 어어부밴드가 부르는 노래 ‘사각의 진혼곡’을 듣는다. “저기 왼쪽 구석에 주전자 바라보다, 일그러진 자신을 보네, 샌드백 흔들리고 흩날리는 먼지를, 혀에다 듬뿍 바르네 ... (중략)... 오버 액션 구경꾼 오버 액션 레슬러, 울트라 썬더 파워 붐 그의 이름은 레슬링 스타”로 이어지는 가사는 초라하고 내성적인 한 남자가 울트라 썬더 파워를 뿜어내는 레슬링 스타로 변신하는 과정을 예찬한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20분 동안 김지운은 스파게티 웨스턴에 등장할법한 상투적인 음악과 함께 대호와 유비호(김수로)의 긴장된 대결을 연출한다. 상황을 기술하는 쇼트의 기능에 관련하여 이 시퀀스는 다양한 옵션을 구사하는 연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탈의실과 복도를 가로지르는 화려한 스윕 쇼트, 신체 연기를 통해 슬랩스틱의 터치를 부여한 배우 송강호의 경이적인 육체 액션은 프로레슬링의 운동성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대호는 주먹을 치켜들고 앞으로 돌진하여 오랜 시간 수련한 백 드롭 기술을 시전하면서 링 너머에 사뿐히 착지한다. 이 비장한 순간조차 슬랩스틱을 유지했다면 영화의 진성성이 의심받았을 수 있었지만 여기엔 참된 레슬링 기술이 전시되어 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레슬링은 증폭된 신체 타격과 현란한 카메라 워크로 감각적 과부하를 제공하지만 여기서는 좀 더 절제되고 위엄 있는 안무를 선호한다. 이 신의 하이라이트는 유비호에 의해 대호가 쓴 가면이 찢기고 두 대결자가 링 바깥으로 굴러떨어져 계획하지 않은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다. 합을 맞추지 않은 마구잡이 싸움이 끝난 뒤 대호의 얼굴 위로 다시 한번 어어부밴드의 ‘슬픈 대호’가 흐른다. 가는 선율이 고통을 가르고 우울의 가면이 벗겨진 대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 링 위에서 사력을 다하는 대호의 페르소나는 무참스런 모양으로 벌거벗겨진다. 익살과 페이소스가 가득한 <반칙왕>은 진실된 삶 혹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대로 살지 못하는 삶을 전제로 한 만큼 표층과 심층의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원적 열망을 다룬다. 마스크를 쓰는 행위를 통한 자아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면은 그 안에 진짜 얼굴을 감춘 은폐의 도구이지만 숨겨진 야성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호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은행으로 출근하는 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이제 막 만개한 이중생활에 만족하며,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그의 카타르시스적인 여정은 직업적 세계의 속박을 초월하려는 소시민의 헛된 시도와 규율의 지배로부터 탈주하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 안에서 울트라 썬더 파워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6.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올해도 10편의 영화를 뽑았는데, 유감스럽게도 빈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벌새>는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부산 영화제에서 먼저 본 다른 필자들이 이미 작년 리스트에 올리는 바람에 올해 리스트에서는 누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몇몇 필자들의 올해 리스트엔 여전히 이 영화가 있다! 아, 다들 무시하고 버텼나보다.) 더 아쉬운 영화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사아마, 2019)이다. 영상자료원이 준 진짜 진짜 진짜 최종 마감일이 11월 8일.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내가 이 영화를 본 건 11월 9일. 어쩔 수가 있나. 안 본 영화를 미리 리스트에 올릴 수는 없다. 언제나처럼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일단 올해는 한국 영화를 많이 넣었다. < 우리집 >, < 아워 바디 > 그리고 < 벌새 >(!)는 올해 극장에서 상영한 영화 중 가장 내 뇌 속에 오래 남았던 영화들이다. 봉준호 의 < 기생충 >은 2019년에 나온 영화 중 가장 흉악하게 재미있는 작품일 것이다. 사악한 즐거움은 < 더 페이버릿 >도 만만치 않다. 극도로 개인적이고 거의 기이하기까지 한 특별한 개인사를 냉전시대 역사로 보편화시킨 심술궂은 영화 < 콜드 워 >도 있다. 리미티드 시리즈인 <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와 < 체르노빌 >은 영화와는 다른, 텔레비전 매체 고유의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경계선 >, < 어스 >, < 미드소마 >는 판타지와 호러 영역에 속하는데, 여기엔 내 취향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우린 이 영역의 영화들이 슬슬 게토에서 벗어나 진지한 목소리로 인정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워 바디>( 한가람 , 2019) 이야기를 하자. 이 영화가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였느냐. 그건 아니다. 하지만 가장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반응을 뒤에서 구경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재미있었다. 굉장히 심술궂은 재미를 방사능처럼 발산하는 영화이다. 여담이지만 올해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 대부분은 심술궂은 표정의 여자를 한 명 이상 품고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자영도 예외는 아니다. 설정만 보면 건전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시험을 포기해버린 8년차 행정고시생인 자영은 어느 날 동네에서 달리기를 하는 현주라는 여자를 만난다. 현주의 모습에 매료된 자영은 달리기를 시작하고 현주의 친구가 된다. 자영은 서서히 건강을 되찾고 친구가 소개해 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턴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열심히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으면 정직원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 이 정도면 거의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바탕을 둔 생활 체육 홍보 영화처럼 보인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는 로맨스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건전해보인다. 운동을 하면 건강도 얻고 사랑도 얻고 취직도 할 수 있다니 이렇게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영화는 그 방향으로 안 간다. 사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 도 원래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베날리스가 한 말은 기껏해야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들기를 기도하라’ 정도였다. 육체의 건강과 질병은 분명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건강한 몸의 영향이 건전한 방향으로만 향하는지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육체가 정신의 건전함이 뭔지 어떻게 아는가? 군인과 검투사의 나라에 살았던 풍자 시인이 설마 그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까. <아워 바디>는 유베날리스의 회의적인 관점을 충실하게 따른다. 영화는 자영에게 건강한 몸을 준다. 하지만 8년의 고시 생활 중 피폐해진 정신까지 치료하지는 않는다. 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정신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면 어떻게 될까? 슬슬 <위험한 독신녀>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토론토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몇몇 평론가들이 이 두 영화를 비교했었다. 다행히도 자영은 그 방향으로는 안 간다. 덜 뒤틀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뒤틀림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더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만 자영이 현주의 몸에 티끌만큼이라도 상처를 내는 건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워 바디>는 현주, 정확히 말하면 현주의 몸에 대한 자영의 욕망에 대한 영화이다. 단지 그 욕망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에서 이 영화의 재미가 있다. 자영과 현주는 당연히 모르고 관객들도 모르고 이들의 창조주인 한가람도 확신하지는 못하는 거 같다. 이해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흐름은 있다. <아워 바디>가 멀쩡하고 건강한 영화였다면 자영과 현주는 섹스를 했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의 구조를 보면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그게 유일하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워 바디>의 드라마는 영화가 이 당연하기 짝이 없는 지점으로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일탈하다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영이 이성애자이거나 이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영은 현주의 몸에 집요하게 집착하고 있지만 이것을 성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를 선망으로 정의하고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현주를 모방하려는 시도까지는 정상이다. 이는 얼마든지 건강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영화 중반에 현주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면서 자영은 죄의식에 휩싸인다. 이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영에게 불건강한 죄의식을 제공해주기엔 충분하다. 자영은 현주에게 정말 드물게 다가간 ‘여자친구’였다. 현주는 남의 시선을 받기 싫어 한동안 런닝 머신만 뛰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읽어주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만든 ‘여자친구’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남자들보다 자신의 몸과 외모에만 집착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아워 바디>가 두 사람이 나누는 섹스와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역시 건강한 진행이 가능했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이 이성애자여도 상대방과 자신의 몸을 사랑하며 같이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없다. <아워 바디>의 작은 세계에서 이성애는 모든 건강한 전개를 막는다. 그러고보니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멀쩡하고 건강한 섹스를 나눈 사람들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과 엘로이즈라는 게 생각난다. <아워 바디>에 대한 반응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영이 살아있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섹스는 매력적인 구석이 단 하나도 없고 대부분 불쾌하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전에 나눈 마지막 섹스는 비루하기 짝이 없다. 현주의 죽음 이후 달리기 모임의 남자와 한 섹스는 남자의 자기 도취와 그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자영 때문에 공허하다. 직장상사인 중년 남자와 나눈 섹스는 문장 자체가 불쾌한 이유를 품고 있다. <아워 바디>를 싫어하는 몇몇 관객들은 이 영화를 ‘중년남자와 섹스하는 영화’라고 부른다. 마치 젊은 여자가 중년 남자와 하는 섹스가 한국 영화에서 흔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고보면 마지막 섹스에서 영화는 이 상황이 얼마나 불쾌한지 인식하게 하는 뜻밖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의 섹스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동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고 이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이성애 섹스가 지겨울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리는 모든 이성애 섹스의 환멸에 찬 묘사가 더 신경 쓰일 것이다. 보다보면 숨이 막힌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믿는데 이성애엔 답이 없다. 그리고 다들 질겁하는 마지막 섹스는 따지고 보면 자영이 할 수 있는 가장 동성애에 가까운 섹스이다. 자영이 현주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욕망을 대신 실천한 것이니까. 이를 통해 자영과 현주는 한 몸이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현주가 자영에게 한 말들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영은 현주의 내면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현주가 정말 이성애자인지도, 자영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영이 뒤늦게 참회하며 스스로 재구성한 현주는 몇몇 의미없는 단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허구에 불과하다. 자영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의 브레이크는 걸리지 않는다. 아, 어쩔 수 없지. 우리의 몸과 정신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욕망은 결코 온전하게 납득이 가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아워 바디>는 엄청나게 심술궂다. 종종 심술궂기로는 만만치 않은 <기생충>을 능가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든 교훈은 파괴되고 두 주인공과 관객의 욕망은 단 하나도 실현되지 않으며 이들이 가는 길은 최악의 모양으로 배배 꼬여있다. 정말로 성격 안 좋은 이야기꾼이 킬킬 웃으면서 만들었을 것 같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아워 바디>는 우리가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처음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사각을 비춘다.
8월부터 12월까지 10회에 거쳐,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씨의 영화 리뷰를 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영화비평과 서평 분야에서도 활발한 글쓰기를 해 온 필자는 기존의 젠더(gender) 개념을 확장, 메타 젠더적 시각에서 새로운 영화 읽기를 시도하고자 합니다. 장르와 주제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를 대상으로 우리 시대 주요 이슈에 대한 필자의 '다른 목소리'를 기대합니다. <소셜네트워크> 너머, < 소셜포비아 > <소셜포비아>는 인터넷 세계를 다룬다. 이 시대에, 인터넷을 ‘진짜’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혹은 ‘가짜’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가상현실, 즉 ‘그럴듯한, 사실상의, 현실과 다름없는, 실질적으로, 잠재적인 현실’의 의미를 최대한 확장시키고 있다. 이제 가상현실은 ‘假像, 假想, 假相’이라고 해도 모두 말이 된다. 특히, 이 영화처럼 온라인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실제 오프라인의 상대방을 찾아갔다가 벌어지는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물론, 온라인 베틀과 달리, 여성 한 명 vs 무리의 젊은 남성들의 만남은 온/오프의 평등성을 무너뜨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이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현피', '키워', '안구 정화' 등의, 모르는 단어/험악한 표현/줄임말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나 인터넷 유저가 아닌 사람에게는 ‘어려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각본을 쓴 홍석재 감독도 인터넷을 따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체 사용 여부가 곧 매체의 특성을 인식할 수 있는 전제는 아니다. 문제는 찬반 논쟁, 유저인가 아닌가, 인터넷에 우호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도구(매체)는 인간의 조건을 바꾼다.”는 사실,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공유하는 실천이다. 인터넷 환경은 기술적, 담론적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 소셜포비아 > 제작 당시였던 2014년의 용어는 벌써 공용어가 되었고(‘현피’는 국어사전에 등재되었다), '흉자', '태일해', '세월호 어묵'까지 매일 새로운/끔찍한/기발한 용어와 이벤트가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은 접근하기 두려운 고통스러운 언어들이다. 이 영화가 불편한 관객층은 인터넷 용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기성세대가 아니라 인터넷 헤비 유저(heavy users)들일 것이다. 아이디(ID)를 몇 개씩 가지고 있으며, 거의 하루 종일 키워드 노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모르거나 볼 가능성이 작다. 이 영화가 불편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이들은, 서구를 추격해야 한다는 식민성에 기반한 발전주의자(progressives)이되 어느 정도의 공공성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진보 진영(progressives)일지도 모른다(물론,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 영화는 제작하는 인간(호모 파베르),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의 특성, 인류의 제작성(자기 몸의 확장성)을 직면하는 작품이다. 때문에 ‘환경 영화’이기도 하다. 체르노빌부터 후쿠시마가 남의 일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7월 말, 대한민국 서울의 기온은 40도에 육박하고 있다. 무엇인가가 도래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같다. <소셜포비아>는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외면하거나 무지한 분야인 매체의 정치경제학과 문화 권력에 관한 뛰어난 작품이다. 아마 바우만이나 프랑코 베라르디,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같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들이 묘사한 한국 사회를 다시 썼으리라. 그들은 “이 시대의 금융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악마는 이케아와 페이스북”이라고 했는데, 한국 사회 버전은 '다이소, 몰카, SNS' 쯤 되지 않을까. 영화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스토리텔링의 짜임새, 화면의 윤리성, 연기, 연출 모두 좋다. 2억 원의 제작비와 102분의 상영 시간으로 신자유주의, 매체 경제학, 변화하는 윤리와 자아, 개인의 개념, 젠더, 대중까지 근대성의 거의 모든 키워드를 연결(arrangement)한다. 그 연결도 매우 흥미롭다. 현피는 ‘현실’의 앞글자인 ‘현’과 ‘Player Kill’의 앞글자인 ‘P’의 합성어로, 웹(web)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 오프라인에서 실제 살인이나 싸움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떤 10대 학부모가 내게 한 말인데, 그들은 현피가 정기적으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피 덕분에 학교도 안 가고 친구도 없고 방안에만 처박혀 나오지 않던 아들이, 드디어 집 밖으로 나가 온라인 동료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갔다는 것이다(이 부모는 “아이가 강원도까지 갔다”며 흥분했다). ‘키워’는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의 줄임말로 컴퓨터 자판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戰士)를 말한다. 이들은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오프라인)의 무시’라는 더 큰 ‘권력’ 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다. 그들의 노동은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 '찌라시' 뿐일 수도 있다. 온라인의 물리력이 오프라인에서의 권력으로 계량할 수 있는 인식론이나 방법론은 ‘영원히’ 불가능하므로 온라인의 영향력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1인 매체와 인간의 조건 일본의 젊은 연구자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삼인, 2007)를 썼다. 원제 그대로 『不安型ナショナリズムの時代―日韓中のネット世代が憎みあう本當の理由』, 이 책의 주제는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닥친 실업 문제를 인터넷을 통해 어떻게 자체 해결(도피)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불안형 내셔널리즘 시대’라고 명명한다. 인터넷 한․중․일전(戰). 내 기억이 맞는다면, 세 나라 남성들이 ‘3국 여성 미모 콘테스트’를 열어 인터넷 투표도 진행했다(당시 한국 남성들은 배우 김희선 씨를 국가대표 미인으로 선정했다).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한․중․일 청년들이 각국의 본격적인 글로벌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저항 대신, 자신들을 해고 시킨 바로 그 기술(인터넷)을 사랑한다고 지적한다. 이 도구로 내셔널리즘만 한 것은 없을 것이고, 효과는 막강했다. 결국 자기 사회의 경제적 현실을 은폐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키보드 노동에는 시간과 열정이 필요하다. 그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들의 문화다. 게임 중독이나 혐오 발화는 “인간성 타락” 아니라 실업 문제다. 많은 이들이 SNS의 장점이자 단점을 속도와 순간적 영향력이라고 말한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극복하자? 하지만 매체, 미디어는 그 자체가 매시지 즉 정치다. 소위 ‘바람직한 방향’ 혹은 자신과 입장이 비슷할 경우에는 장점을 극대화하고(촛불 시위나 페미니즘의 확산...), 반사회적 현상(몰카, 혐오..)에 대해서는 법적 제재나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대책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누구도 타인의 도구 사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더구나 완전히 대중화, 개인 소지품이 된 컴퓨터를?) 또한, 그 어떤 도구도 장단점이 있다. 발명전부터 나쁜 동기를 가진 매체는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좋은 뜻이었거나 그런 의도였다고 강변한다(황우석 씨 사태가 좋은 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사람들의 고된 노동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기였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의 핵심은, 핵이든 콘돔이든 다이너마이트든 SNS이든 이 모든 ‘오브제’들이 인간의 삶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나는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발명품을 꼽으라면 인쇄술, 콘돔, 인터넷이라고 생각한다. 콘돔은 인구 조절과 인류의 반 이상인 여성을 평생 동안의 임신과 육아에서 해방시켰으며, 인쇄술과 인터넷은 인간의 언어와 그에 따른 총체적인 구조 변동(국가의 출현 등)을 가능케 했다. SNS는 혁신적인 매체다. 그만큼 중요하다. 은행 건물도 없는 아프리카의 내전 국가에서 스마트 폰을 가진 몇몇 부자들은 인터넷으로 국제 금융 시장에서 주식 투자를 하고 돈을 번다. 포스트스페이스, 포스트휴먼의 시대다. SNS의 평등주의? 몇 년 전 나는 SNS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느 ‘명망 있는 남성 지식인’이 내 글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혹평을 했고, 그의 페이스북에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 사건이 있었다. 지인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의 명단을 내게 보내주었는데, 내 친구까지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요지는 “당신(나)은 신문 지면을 갖고 있으므로 매체가 있는 기득권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SNS가 지면이므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이기적”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SNS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1인 매체의 등장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업이 SNS에 글을 쓰는 사람의 ‘인생고(capacity)’와 어느 정도 ‘평가받은’ 단행본을 10권 정도를 낸 사람의 삶은 같지 않다. 그러나 SNS 문화는 후자를 기득권자이자 '골고루 평등'을 위해, 더 이상 글을 쓰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간주한다. SNS가 필요한 사람들은 또 있다. SNS에서 자기선전 후 오프라인에서 픽업되어야 하기 ‘때문에’ SNS가 필수적인 사람들이다. 이미 신문 등 기존 매체들은 소위 오피리언 리더들의 페이스북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페이스북을 기사화한다. 취재가 필요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페이스북에 쓴 글을 책으로 묶어내는 일도 심심찮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이러한 현상의 바람직 여부가 아니라 자아실현, 자기 PR 도구로서 SNS의 절대적 유용성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몇 년 이상의 노력과 노동, 비용을 기울인 저작에 대해 '최악', '저질', '친일' 등의 댓글 테러로 그 텍스트들이 평가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그런 힘이 있다면, 디스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형태의 ‘자아실현’이 만연한 사회라면 공동체는 무너질 것이다. 이전 시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종이 신문이 인터넷으로, TV보다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에 개인(the person)의 노력과 능력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사회 정의로서 평등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individuals)인 인간은 모두 같다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평등(sameness)’, 즉 전체주의다. 평등은 지구상 70억 명 인구가 모두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등은 구조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것이지 개인들의 개별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평등. 이것이 역설적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가 허용되는 이유다. 성별, 인종, 나이에 따른 차별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차별을 인식하고 사회를 바꾸는 대신 차이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혐’이나 ‘여혐’이나 다 똑같고, 억울하면 너도 혐오 발화를 하라는 식이다.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이나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이나 모두 같은 페미니즘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페미니즘‘들’이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온라인에서 ‘차이’ 혹은 위계를 결정하는 요소는 단, 한 가지다. 강한 멘탈. 사회성과 타인, 인간관계를 무시하는 정신 승리,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강심장, 거침없는 뻔뻔함, 누가 더 ‘기’가 세고 거짓말을 잘하는가이다. 혐오 발화의 능력도 바로 이 무신경함에 달려 있다.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은 ‘루저’가 된다. ‘홍어’나 ‘오뎅’ 같은 슬프리만치 끔찍한 비인간적 발화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찬양하는 극한의 비윤리성에서만 가능하다. < 소셜포비아 >의 채팅 장면과 배우 류준열 의 명연이 돋보이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에 대한 감독의 비판 정신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의 시대 SNS가 ‘논쟁’, ‘민주주의’의 장이라고 거짓말하거나 믿거나 착각하는 사람은 마크 주커버그 말고도 많을 것이다. 내 경험(주로, '미투'와 성폭력, 젠더 관련 사안)에서 보면, SNS에서의 대화는 만나서 이야기하면 해결될 문제를 관중을 모셔놓고 마치 검투사처럼 논쟁(?)을 벌임으로써 공연을 하는 듯하다. 대화를 통해 ‘진실’을 밝히기보다 여론전에 주력하는 것이다. 이때 승패는 키보드 속도와 상대방에게 효과적으로 모욕을 줄 수 있는 능력, 꼬투리 잡기, 열 받게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SNS의 특징은 속도가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1인 미디어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인터넷 셀럽’이 때론 국영 방송사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트위터의 경우 어느 유명 지식인의 팔로워가 100만 명에 육박했는데, ‘6대 종합일간지’의 중 모 신문사의 팔로워는 60만 명선이었다. 노조원 만 명이 넘지만 (두 개의 노조가 있어서) 민주노조의 트위터 팔로워는 400명인데, 매스컴 플레이에 익숙한 ‘노조 활동도 하지 않는 스타 노동자’의 팔로워 수는 5만 명이었다. 문제는 이 노동자가 노조의 합의된 공식적 입장을 자신의 SNS 파워를 이용,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거짓 선전을 반복했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개인의 힘이 극대화된 시대가 존재했던가. 어느 누가 이 무한한 자기 만능 감을 선사하는 이 매체를 포기하겠는가. 스마트폰은 이미 우리 몸이다. 맥루한의 명언, 미디어는 우리 몸의 확장이다(extention of men). 게다가 별다른 규제도 없다. 근거 없는 비난, 혐오 표현, 신상털기 모두 완벽하게 가능하다.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무시해라, 집착 마라”, “탐라(타임 라인)일 뿐이다”, “SNS에 들어가지 말라” 등의 ‘위로’ 혹은 피해자 비난을 들을 뿐이다. SNS의 ‘부작용에 대한 무시’는 해결이 아니다. 홍석재 감독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이들을 괴물로만 보지 말아 달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이미 ‘괴물’이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끔찍했던 이가 오프라인에서 지극히 평범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인 사건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나를 포함, 인간은 모두 그럴 가능성이 있다. 사실 나는 온라인의 피해자도 피해자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용자(가해자)’가 SNS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 소셜포비아 >는 근대 초기 신분 사회로부터 해방된 자유주의적 개인이 이후 100년이 지나자마자, 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의 개인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통치자로서 개인의 힘은 막강해졌지만, 사회적 자아는 모두 자본에 종속되었다. 각자도생 시대의 개인의 자유는 통치 원리인 ‘힘센(비윤리적인) 개인’의 등장이며, 결국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파괴한다. < 소셜포비아 >의 착목 지점, 글쓰기 1인 매체의 시대. 매체만으로는 완전히 평등하고, 나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고, 어떠한 노력도 필요 없는 시대. 누구나 판관, 감별사, 평론가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런데, 이들이 오프라인으로 나올 때 혹은 두 세계를 병행할 때, < 소셜포비아 >의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등장한다. 감독의 영리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대사 그대로,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에고는 강한데, 그에 걸맞은 알맹이는 없는 사람. 타인을 비난하는 데 익숙하지만, 자신은 절대 견딜 수 없는 욕먹음(커멘트)”. 그녀는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 강의를 듣는 학생, 작가 지망생이다. 글쓰기의 정의는 이견이 없다. 글은 ‘자기’ ‘생각’을 ‘표현(재현)’하는 ‘노동’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법이고, 생각하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중노동이다. 글쓰기는 두렵고,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SNS에서의 글쓰기는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쉽고 이익이 막대한 돈줄이자 중우(衆愚) 정치다. 키보드 사용자의 노동과 시간은 고스란히 ‘구글’이나 ‘삼성’이 가져가지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바친다. 그 대가는? SNS에서의 글쓰기는 매체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자기 홍보, 자기주장, 자기도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기 조작을 넘어 자기 망상으로 진화하는 경우도 숱하다. 나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우며,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어느 축구 감독의 말대로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SNS 헤비 유저라면 ‘지식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SNS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요구받지도 않는다. SNS에서의 자아와 현실에서의 자아는 다르다. 일상적 공간에서도 다른데(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와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 관음증과 노출증을 전제로 하는 공간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는 불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여자 주인공이 타인의 커멘트를 극도로 기피하는 것은 조금도, 부분적으로도(타인에 비친) 자신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망은 포기하지 못해서 온라인으로 도피한다. 만일, 그녀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한 곳에서만 글쓰기에만 매달렸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는 대사를 보자. “한국에 간첩이 몇 명인지 알아? 오만이야. 오만. 그렇게 많은데, 왜 안 잡히는 줄 알아? 자기들끼리 서로 상대가 간첩이라며, 간첩을 잡으러 다니거든.” 이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이 각자 누구인 줄 모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라운드 제로에서 서로를 외면한 채 똑같은 제복을 입고 뫼비우스 띠의 선상(線上)을 헤매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우리는 자신이 ‘간첩’인 줄 모르는 간첩들이다. 모두 개성을 주장하는 개성 있는 다름(distiction)을 주장하는 개인들이되, 개별적으로 자본에 포섭되어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모두가 모두의 아바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쇄물(책)을 소환할 때다. 아, 책도 온라인에서 파는군. 지금으로서는 잠시 SNS을 중단하고 오프라인에서 글쓰기가 유일한 저항처럼 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 생각을 하라. 죽도록 연습하고 표현하라.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백미는 글쓰기 수업 파트다. 소셜 네크워크의 본질을 꿰뚫는 감독의 통찰력과 영화를 만드는 뛰어난 ‘작전 구사력’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