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규칙
- 감독
- 장 르누아르
- 제작년도
- 1939
- 출연
- 마르셀 다리오, 노라 그레거, 폴레트 더보스, 밀라 파렐리, 클레어 제라드, 장 르누아르, 가스통 모도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 본문에 삽입된 각주를 별도 페이지( 링크 )로 정리했습니다. 위 링크에 연결된 각주 페이지를 본 페이지와 나란히 놓아두고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이 글은 2000년 겨울, 언젠가 영화로 만들기 위해 써두었던 글을 2024년 겨울에 수정한 글이다. 과거, 문자로 남겨진 이 미완성 영화를, 현재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읽고 듣고 보며, 미래의 눈과 귀로 만들어지길 희망하였다. 이 가능성을 하나의 ‘포스트-시네마’ *주1 로 꿈꾸며 이전 글을 다시 손보고 주석을 추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면,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의 강과 산들을 둘러보셨으면 이제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그래야 모든 백성이 마음을 놓을 것입니다.” 1866년, 조선을 찾아온 이유를 그에게 물으니, 그는 ‘며칠 후에 있을 월식을 관찰하러 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주2 1958년, 그 *주3 는 다시 조선을 방문한다. 그는 시대에 취해 있지 않은 유예된 순간들을 좋아했다. 그는 지나가며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겼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그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취약한 슬픔을 바라보았다.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눈부신 어둠 속에서 월식을 관찰하던 그에게 ‘어떻게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는지’ 묻자, ‘빛나는 해와 그 빛을 반영하는 달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시간을 찾아보라’라는 말을 나에게 남겼다. 그리하여 나는 2019년 겨울, 어둠 속의 월식이 아닌 밝음 속의 일식을 찾아 스리랑카의 동쪽 해안 도시 트링코말리(Trincomalee)로 떠났다. 이 여정은 그의 시선에 대한 나의 답장이다. 그의 편지 *주4 는 ‘인간의 얼굴과 선한 고양이는 태양이며 달’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의 편지는 조선이라는 낯선 땅에서 그를 향해 돌아보던 하나의 얼굴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마주친 낯선 궤적을 사라져가는 우리의 언어로 담는다. 우리의 언어는 지진 통신(seismic communication)이다. 그중 영화는 움직이는 빛의 그림자로 태어났다. *주5 하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로 인해 영화는 빛을 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섬광을 더듬지 않는다. 그림자 없는 빛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희망과 절망을 엮어 어떤 기억을 다시 쓰고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트링코말리의 한 작은 마을, 이곳에서 우리는 2004년 12월 26일 *주6 에 일어난 금환일식을 추적한다. 어둠 나라에서 파견된 불개가 이번에는 태양을 삼켜보지만, 너무 뜨거워 다시 뱉어낸다. 일식의 그림자는 15년 후 같은 날 *주7 이곳을 휩쓴 지진 해일을 기억하며 노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를 부른다. 해와 달이 나뭇잎을 연주하며 지구에 떨구는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카말 알-딘 알-파리시(Kamal al-Din al-Farisi), 이븐 알-하이삼의 『광학의 서』 개정판 Kitab Tanqih al-Manazi (The Revision of Ibn al-Haytham's Optics) 필사본, 1309. “이것은 시각이 작동하는 원리- 수천 년 전 까마귀가 본 것을 중국에서 묵자(墨子) *주8 가 메기가 본 것을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주9 가 두꺼비가 본 것을 아랍에서 이븐 알 하이삼(Ibn al-Haytham) *주10 이 기록하였네” 까마귀는 쉬운 희망과 값싼 절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노래한다. 메기는 후퇴하여 돌아온 곳을 새로운 곳으로 만들며 다시 나아가기 위해 노래한다. 두꺼비는 동굴 신화 속 그늘 아래 은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래한다. 게임의 규칙 1. 세 개의 산(山) 정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바라본다. 2. 눈을 감는다. 겜마 프리시우스(Gemma Frisius), 천문학과 기하학 광선(De radio astronomico et geometrico), 1545. - 그 순간 색이 반전되고, 하늘은 어두워지며, 그림자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주11 어둠이 실종된 밤 - 구석과 구석 사이에서 우리는 귀 기울여 침묵을 끌어안는다. 새로운 것을 능숙하게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관점을 서툴게 취하며- 적정 거리를 찾기 위해 시선의 속도를 끊임없이 바꿔가며- 빛으로 시든 눈을 드러나는 어둠으로 씻는다. 우리는 절망과 희망을 엮고 찰나의 시간 축을 빌어 겹쳐진 실천적 기억 속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긴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코다(Coda) - 네 개의 벽 안에서 *주12 조용하고 소박한 작은 방, 뚫을 수 없는 그림자, 응답 없는 그림자; 깊은 생각, 슬픈 노래; 뛰는 마음 속 소중한 희망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먼 행복에 대한 움직임 없는 시선 많은 의심과 많은 인내심 여기, 나의 밤, 고독의 밤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 카메라 옵스큐라 광고 홍보물 (사진: Museum Crush )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덤프리스(Dumfries), 1836년 덤프리스와 맥스웰타운 천문학 협회 (Dumfries and Maxwelltown Astronomical Society)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인 풍차를 개조하여 핼리 혜성(Halley's Comet)을 관측하기 위한 망원경과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였다. *주13 우리는 이 오래된 어둠의 공간 안에서 실종된 밤을 탐색한다. 어두울수록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에서 우리는 물구나무를 서고 내부의 바깥쪽과 외부의 안쪽을 바라본다. 우리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취약한 슬픔들을 바라본다.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가운데,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우주의 구멍 아닌 구멍 지각할 수 없는 기묘한 천체 - 블랙홀로 만들어진 카메라 옵스큐라 우리는 이곳에서 블랙홀 *주14 의 그림자를 겹쳐가며 그 적정 속도와 거리를 찾는다. 어둠이 더 이상 빛을 증언하지 않는 이 위태로운 시대를 말하지 않고 말하며, 보지 않고 바라본다. 우리는 조용하고 소박한 이 작은 방 에서 우리의 회환을 감광제와 섞고 톱밥을 가득 채워 박제한다. 사건의 지평선 속 기억이 유일한 언어가 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공명하는 순간들을 현상한다. ‘너희가 눈멀었다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말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 *주15 라는 외침에 조응하며- 우리가 오랫동안 마음 속 깊이 새긴 기억조차 떠도는 섬망의 언어인 것을 기억하며- 광기로부터 반성적 성찰을 건져내 지나간 그림자의 반영을 이어 붙이며 - 언젠가 그는 행복이라 부르던 순간을 화산재로 짠 장막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들이 여기에서 행복을 볼 수 없다면 적어도 어둠을 볼 것’ *주16 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비균질적인 이미지의 표면 위에 어둠을 함께 밝힌다. 우리의 밤은 이 암흑의 빛 속에서 후퇴한 그림자의 목소리를 말없이 조절한다. 우리의 지각이 후퇴하고 탈선하고 겹쳐질 때 이 어둠 속 구멍 이면에는 어떤 잔상이 있을까? 우리는 이 유예된 그림자에 여전히 같은 감각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병렬하고 교차하는 시간은 우리의 취약한 기억을 다시 쓸 수 있을까? 겸허하면서도 눈부신 시선들 사이를 우리는 어떻게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이 여정의 끝에는 우정이 있다. 나머지는 침묵이다. *주17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경계는 없지만 한계가 있는 끝은 없지만 유한한 -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연다. 어둠과 침묵 속 다정한 밤 - 그 운동과 정지 사이 현전과 부재 사이 도둑맞은 우리의 편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필자 제공, 2019년 12월 29일 금환일식, 트링코말리 *** 주1. ‘포스트-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필름 매체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며 기술 장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선형적으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 산업으로 생산된 경제 상품으로서의 가치, 혹은 권력의 정치적 작동 수단으로 도구화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포스트-시네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영화의 원형으로 돌아가 다가올 ‘포스트-시네마’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주2. 앙리 쥐베르, 「조선 원정기」,《세계 일주(Le Tour du Monde)》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M.H Zuber)는 사관으로 강화도 원정에 출정하였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며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 및 풍습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을 남겼고, 그 기록은 1873년 프랑스 여행 전문 주간지 《세계 일주(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주3.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는 1958년 프랑스 대표단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다음 해 그는 이때 남긴 사진과 글을 엮어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을 쇠이유(Seuil)출판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한국에는 눈빛 출판사가 1989년 「북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집을 번역 출간하였다. 주4. 크리스 마커는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를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 마지막에 실었다. 주5. 움직이고 변하는 그림자로서의 영화; 끊임없이 여러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비추고 반영하는 영화.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 직물을 짜고, 풀고, 다시 짜기를 반복하는 영화. 우리 안의 타자를 위한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영화. 복수의 힘과 규칙이 복합적으로 배치되는 사회적 혼합물로서의 영화. 움직이는 시적 감각과 사유가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는 가변적 구성물로서의 영화. 주6.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진도 9.0 지진에 의해 발생한 쓰나미는 총 12개국에 전례 없는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쓰나미다. 사망자 숫자만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주7. 2019년 12월 26일 오전 8시 10분부터 11시 26분까지 스리랑카에서 금환일식이 관측되었다. 달이 태양의 중심을 완전히 가리지만, 달의 그림자가 태양보다 작아 태양의 가장자리가 원형 빛으로 남는 불의 고리는 9시 38분부터 2분 43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의 시점을 교차하여 이야기한다. 주8. 기원전 400년경 중국의 철학자 묵자는 빛이 바늘구멍을 통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대상의 반전된 이미지가 어두운 방 안에 만들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핀홀 현상(Pinhole effect)을 최초로 기록한 역사로 여겨진다. 주9. 기원전 350년경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나뭇잎의 겹쳐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핀홀 현상이 관찰된다고 기록하였다. 주10. 기원후 935년경 태어난 아랍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현대 광학의 아버지이다. 세계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어 일식을 관찰하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11. 『한국인(Coréennes)』의 여섯 번째 장 「아홉 뮤즈」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썼다. 주12.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의 연가곡 ‘태양 없이(Song cycle Sunless, 1874)’의 첫 번째 곡 ‘네 개의 벽 안에서(Within Four Walls)’를 인용하였다. 주13.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에는 1836년 이래로 지금까지 작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가 있다. 처음에는 천문학 협회의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851년부터는 박물관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였다. 주14. 1997년 크리스 마커는 『한국인(Coréennes)』을 재발간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간 후기를 추가한다. "알렉산더 메드베드킨(Alexander Medvedkin)에게 헌정한 영화에서 그는 이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인류 역사상 우리와 같은 세대는 없었습니다... 마치 천문학에서의 ‘검은 별들’과 같아요. 제 삶은 이런 블랙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블랙홀 반대편에서 폭탄을 맞을 수 있었던 우리는 블랙홀의 실패의 깊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주15.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주16. 1983년 크리스 마커의 영화 < 태양 없이 Sans Soleil (Sunless) > 속 문장을 다시 썼다. 주17. 크리스 마커의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 속 문장을 인용하였다. 임고은(영화감독, 시각예술가) l 영화를 둘러싼 시선의 주체와 객체,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구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엮어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최근에는 야생을 회복하기 위한 시적인 언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
서지환의 < 저 ㄴ(X)을 어떻게 죽이지 >란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궁금한 것은 ‘저 제목을 어떻게 읽느냐’다. 그냥 ‘저 엑스’라고 읽어야 할까. 아니면 X가 검열한 단어를 찾아서 읽어야 할까. 후자를 따른다면 아마도 X가 검열한 단어는 ‘년’일 것 같다. ‘놈’은 아무래도 덜 검열되는 단어이고 다른 비속어 욕들은 두 글자 이상이니까. 영화의 무대는 시골 전원주택. 중년 부부가 애 없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노동으로 돈을 버는 거 같지 않다. 영화 속에서 이들과 함께 사람들은 젊은 고용인 세 명. 여자 둘과 남자 한 명이다. 그러니까 이 부부는 정상적인 사회 시스템에서 격리된 공간에서 옛날 서양 유한계급 사람들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그건 이들이 ‘지나간 시대의 먼 나라’의 특정 계급 사람들이 다른 계급 사람들에게 가졌던 권력을 갈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이 이 역할극 안에서 선을 넘었고 다른 선도 넘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건 집에 있는 총기다. 대부분은 서바이벌 게임에서 사용되는 페인트건이다. 하지만 아닌 것도 있다. 그리고 지겨워진 남편은 고용인들에 사냥 게임을 제안한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영화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한다. 2021년작이다. 그라고 봉준호의 < 기생충 >은 2019년에 나왔다. 이 영화가 <기생충>의 자장 밑에서 나왔다고 짐작하는 건 타당하다. 하지만 그만큼 게으른 생각이기도 하다. <기생충>을 염두에 둔 영화라도 장 르누아르의 < 게임의 규칙 >의 영향을 더 받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엔 계급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 이 세계 속 갈등은 익숙해보인다. 여자 고용인 1번인 하윤은 새로 들어온 여자고용인 2번인 지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윤은 저택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영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렇다면 제목의 ’저 X’는 저 년’이 맞나? 그런데 요새 세상에 이런 제목 트릭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일단 이 영화는 프라이드 영화제 상영작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역학 관계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반영한 것 같은 그림을 그리다가 중반 이후에 뒤집는다. 그 뒤집음은 비교적 상식적인 생각에 기반을 둔다. 젊은 고용인에 대한 중년남자 상사의 치근거림은 불쾌한 성희롱이다. 당하는 사람도 괴롭고 옆에서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바라 보는 사람이 성희롱 당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불쾌함을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영화는 그걸 지켜보는 사람, 그러니까 하윤이 성희롱을 당하는 사람, 그러니까 지영을 처음부터 사랑하고 있었다고 친다. 이렇게 하면 진부해보였던 하윤의 행동이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진다. 여기에는 다른 기능이 있는데, 지금까지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남편의 위치를 사정없이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성애자 남자의 권력은 하윤이 지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겠다고 생각한 뒤부터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보니 남자의 권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약했다. 앞에서 나는 이 남자가 어떤 노동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건 남자의 사회적 기능이나 가치가 시시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정상적인 사회 시스템에서 격리된 이 세계에서 남자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여기에 대해 깊이 고민할 사람이 별로, 또는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는 발랄한 코미디지만 누군가에겐 정말로 무섭게 보일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단편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출연한 신인이나 무명배우들이 발표 이후 주목받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윤역의 하윤경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봄날의 햇살이고 곧 부산에서 공개될 < 딸에 대하여 >(편집자 주: 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공개되었다) 영화판의 레인이다. 지영역의 방효린은 < 지옥만세 >의 선우이고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에 캐스팅되었다. 두 배우의 경력이 이후에도 여성간의 관계 또는 퀴어의 주제를 품고 있다는 건 흥미롭다. 심지어 방효린은 <지옥만세> 개봉 이전인 ‘썸머 프라이드 시네마 2022‘에 이미 방효린 특별전이 가능할 정도로 꾸준히 퀴어 주제 단편들을 찍어왔다는 정보를 덧붙이고 싶다.
홍상수 의 열아홉 번째 영화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서 독일 함부르크 해변에 서 있던 영희( 김민희 )를 업고 간 (1부의) 검은 옷의 남자는 그녀를 (2부의) 강릉에 데려다 놓는다. 그곳엔 폐인처럼 지내다 겨우 신작 준비에 들어간 영희의 옛 애인인 감독 상원( 문성근 )도 와 있다. 사실 홍상수에게 강릉은 낯선 곳이 아니다. 그가 영화에서 공간이 아닌 ‘장소’를 선택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선택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 강원도의 힘 >의 주인공 지숙( 오윤홍 )도 강릉을 두 번 찾아간다. 지숙의 (첫 번째) 강릉행 여정은 상권( 백종학 )에 의해서 느슨하게 반복된다. 그런데 상권이 지숙과 같은 강릉행 기차를 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관객들은 지숙의 이야기(편의상 1부)와 상권의 이야기(편의상 2부)를 포개 놓고 ‘부지런히’ 빈칸을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지숙 일행이 지나쳤던 여자에게 상권은 ‘인상이 깨끗하다며’ 지분대고, 1부에서 사고사로 알려졌던 여자의 죽음은 2부에서 상권의 신고로 인해 살인 사건으로 밝혀진다. 낙산사를 찾은 지숙이 남긴 기와불사 메시지(‘어머니 건강하세요’) 역시 2부에서 상권이 발견하고, 지숙이 집 앞에서 발견한 낙서(‘조금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를 상권이 썼다는 것도 관객들은 나중에 알게 된다. 영화는 1부에서 던진 질문을 2부에서 답하기도 하고, 1부에서 무의미하게 보였던 것들의 의미를 2부에서 채워 주기도 한다. 두 개의 시간이 교차하고 공간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반복과) 차이를 발견하고, 그 공백을 능동적으로 메우는 것은 사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고, ‘부지런한’ 관객들은 이후 17편의 영화를 거쳐오면서 열심히 학습해 왔다. 실제로 그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라 관객들은 홍상수가 만들어 놓은 미로에 기꺼이 빠져들곤 했다. 홍상수의 영화들 20편 가까운 영화를 거치면서 홍상수 의 ‘차이와 반복’도 발전(혹은 변주)을 거듭해 왔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인물들에 의해 반복 재현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오! 수정 >) 꿈이나 판타지를 경유하여 반복되기도 하며(< 다른 나라에서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서로 다른/같은 인물들이 동일한/다른 공간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강원도의 힘 > < 생활의 발견 >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 하하하 >). 어떨 땐 현실이 영화를 반복하기도 하고(< 극장전 >), 영화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시간’이 반복되기도 하며(< 자유의 언덕 >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유사한 사건을 모르는 척 서로 다른 인물들이 반복하기도(< 북촌 방향 >), 서로 다른 사건이 같은 인물(배우)에 의해 반복되기도 한다(<극장전> <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 심지어 최근작 두 편(< 밤의 해변에서 혼자 > < 그 후 >)은 홍상수 자신의 현실을 영화가 스스로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차이-반복’의 틈새는 커지기도, 혹은 작아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영화 ‘내(內)’ 리듬 이외에 홍상수의 필모그래피를 가로지르는 영화 ‘간(間)’ 리듬도 흥미로운 고민거리이지만, 여기에서 논의하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차이-반복-틈새’라는 ‘운동’을 학습해온 관객들은 그 관성(慣性)으로 인해 (능동적이다 못해) 무리할 정도로 영화의 틈새를 메우려 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차이와 반복 사이에 남겨진 나머지, 잘 의미화되지 않는 ‘잉여’에 대해서는 슬며시 눈감아 버리고 만다. 홍상수는 날카롭게 (마치 퍼즐을 배치하는 것처럼) 이 점을 파고든다. 산에 오르다 지숙이 발견한 금붕어는 상권이 키우게 된 금붕어 일리 없다. 그리고 지숙이 산 채로 묻었기 때문에 상권의 금붕어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것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를 보는 관객들은 두 개의 사건을 지숙과 상권, 그리고 죽은 태아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고 싶어진다. 두 개의 우연한 독립 사건을 ‘차이-반복-틈새’의 운동 안에 슬며시 밀어 넣은 건 홍상수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관객들이다. 그러니 홍상수가 영화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매번 ‘관객들이 그렇게 봤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고 대답해 온 건 그냥 하는 말의 유희가 아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운동의 관성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쉬워진다는 점이다. 이건 마치 자전거 바퀴의 반복적인 회전 운동만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 자전거가 어디로 나가는지 절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도 홍상수이지만, 핸들을 잡고 있는 것 역시 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홍상수의 게임의 규칙, 그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운동이 어디로 향하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그것만이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홍상수 영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의 게임의 규칙의 출발점이기도 한 <강원도의 힘>을 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 강원도의 힘 >에서 지숙과 상권이 교차/반복하는 여정은 첫 번째 강릉행 일 뿐, 지숙의 두 번째 강릉행은 ‘차이-반복’의 패턴에서 벗어나 있다. 게다가 친구들과 함께 ‘우연히’ 결정한 첫 번째 여정과는 달리 두 번째 여정은 지숙이 오롯이 혼자 결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강릉행이 첫 번째 강릉행을 ‘반복’ 하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두 번째 강릉행은 앞서 언급한 홍상수 영화의 ‘잉여’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두 번째 강릉 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환기하기 위한 조금 자세한 줄거리. 대학생 지숙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1박 2일 강릉 여행을 떠난다. 민박집을 찾던 지숙 일행은 우연히 경찰관( 김유석 )을 알게 되고 도움도 받는다. 그날 저녁, 일행과 함께 술을 마친 경찰관은 술에 취한 지숙을 초소로 데려가 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다음 날, 지숙과 친구들은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지숙은 경찰을 만나겠다며 다시 강릉으로 떠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 한편, 강릉으로 가던 지숙 일행의 기차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대학 강사 상권이 타고 있다. 유부남인 그는 최근까지 이어왔던 지숙과의 연인관계를 정리하고 후배의 권유로 강릉 여행에 나선 것이다. 길을 묻는 낯선 여자에게 한눈을 팔고, 급기야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상권도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기다렸던 교수 임용 소식을 듣게 된 그는 지숙에게 다시 만나자고 연락한다. 목욕탕의 저울, 낙서 첫 번째 강릉행의 끝, 지숙일행은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다음 장면에서 지숙은 공중목욕탕에 가고 탕에 들어갔다가 나와 몸무게를 잰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적힌 (상권의) 낙서를 발견하고 수건을 꺼내 지운다. 다시 숏이 바뀌면 친구의 집에 찾아온 지숙이 다시 강릉에 가기로 했다고 말하며 거짓말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걱정스럽다는 친구의 모습을 뒤로하고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 지숙은 왜 다시 강릉에 가는 걸까? 가장 쉬운 답. 경찰을 만나기 위해서. 친구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강릉에서 돌아온 지숙은 그와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자신을 겁탈하려다 실패한,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경찰을 만나러 (지숙의 말에 따르면) 하루 만에 돌아올 수도 없는 길을 떠난다는 건 무리한 해석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첫 번째 강릉행과 두 번째 강릉행 사이의 두 개의 장면(목욕탕, 낙서)이 의미를 잃고 만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상수 는 숏을 낭비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장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목욕탕 장면. 탕에서 나온 지숙이 체중계에 올라간다. 그리고 자신의 몸무게를 한참을 바라본다. 카메라 역시 그녀를 따라 체중을 바라보다 심지어 그녀가 체중계에 내려선 다음 바늘이 영점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체중계 앞을 한참 지키고 서 있다. 그녀의 몸무게를 보여주는 것이 왜 이토록 필요했던 것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 지숙이 상권과 다시 만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2부의 상권 이야기가 한참 지나간 다음, 상권은 지숙에게 다시 연락한다. 그리고 둘은 (이전에 그래왔던 듯) 모텔로 가 섹스를 시도한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며 섹스를 하려는 상권에게 지숙은 ‘애 떼는 수술’을 했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지숙이 체중계 위에서 보고 있던 것이 자신의 몸무게가 아니라 자신의 체중에서 제거된 아이의 몸무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숙은 체중계 위에서 떠나간, 아니 자신이 ‘살해’한 아이의 몸무게를 참혹하게 바라본 것이다. 우리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지숙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아이의 빈자리를 홍상수 는 이 숏을 통해 보여준 셈이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중절수술 시점을 기준으로 첫 번째 강릉행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첫 번째 여정에서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와불사, 생매장 다시 처음. 강릉에 도착한 지숙과 친구들은 해변가에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광산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딸을 잃고 슬퍼하며 부르던 노래. ‘영영’ 인지 ‘너는’인지 가사를 놓고 반복하며 노래를 하는 친구들을 두고 지숙은 더 이상 부르기 싫다는 듯 가요집에서 가장 행복하고 신나는 노래를 찾아 선창하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행복하길...’ )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지숙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커피숍에 들어온 지숙은 고3 때 자신을 짝사랑하던 동네 친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간신히 살았지만 병원에 입원한 후 소식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를 지숙은 문득 강릉에 와서 떠올린 것이다. 온천에 가겠다는 친구들과 헤어져 지숙은 (굳이) 혼자 낙산사로 향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절에서 방생한 거북이 두 마리를 본다. 방생(放生). 불교 경전, ‘금광명경(金光明經)’에 나오는 유수장자는 늪에서 말라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구해낸다. 마치 영화는, 아니 강릉은 죽음으로 이끌리는 지숙을 삶으로 끌어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낙산사에 오른 지숙은 불상 앞에서 절을 한 뒤 기와불사를 한다. (1부에서 기와불사를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2부에서 상권이 지숙의 기와불사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가족을 향해 남긴 유서와 같은 메시지. 먼저 떠나는 자신 대신 오래 살아남아 달라는 기원. 혹은 죽지 말아 달라는 부탁.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길에서 발견한 ‘살아 있는’ 물고기를 그대로 매장해버리는 지숙의 단호함에는 어떤 결단의 공기가 서려 있다. 아이를 임신한 지숙은 어쩌면 (아이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기 위해 강릉을 찾아온 것은 아닐까? 자살이라던 낯선 여자의 죽음은 같이 있던 남자에 의한 살인으로 밝혀진다. 자살과 살인(낙태)의 흐릿한 경계. 지금 지숙을 그 경계에 서서 자신의 죽음을 막으려는 강릉의 ‘힘’과 겨루고 있는 중이다. “미안해” 하루밖에 남지 않은 강릉에서의 마지막 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은 (마치 지숙의 자살을 방조라도 하듯) 지숙을 ‘상투적’이라며 비난한 다음, 그 자리에 혼자 남겨두고 자리를 떠난다. (강릉역에 도착해 길도 알지 못하는 지숙을 덩그러니 혼자 두고 역에 숨어 그녀가 헤매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두 친구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오히려 그녀의 자살을 막는 건 그 자리를 지키는 경찰이다. 술에 취한 그는 지숙을 ‘초소’로 데려간다. 초소(哨所). 경계와 감시를 하는 곳. 혹은 죽음으로부터 지숙을 지키는 장소. 경찰과 함께 (어쩌면 덕분에) 지숙은 그 밤을 무사히 넘긴다. 이렇게 지숙이 죽음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 강원도의 힘 >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인 이튿날 아침 민박집 앞에서의 숏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마치 큰 병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듯 지숙이 민박집 앞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다. 어젯밤에 사라진 친구들은 지숙의 흐트러진 머리를 대신 묶어주며 지숙 앞에 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무엇이 미안해서? 너를 자살하도록 내버려 두어서 미안해.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이렇게 돌아온 서울에서 지숙은 함께 죽는 대신 아이만 죽게 하는 선택을 한다. (목욕탕 장면) 하지만 죄책감의 시달리는 지숙 앞에 상권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집 앞 낙서 장면) 지숙이 두 번째 강릉행을 결정하는 건 아마도 살고 싶어서였던 건 아닐까? 아이를 죽이고도 끝나지 않는 굴레, 이 ‘긴 호흡’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마도 죽음밖에 없다고 지숙은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자살)을 (다시 한번) 막기 위해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이 두 장면이 없었다면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이상한 장면(지숙이 자신을 늦게 데리러 온 경찰에게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화를 내는 장면)은 성립하지 않는다. 강릉에 도착해 경찰의 차에 탄 지숙은 사력을 다해 그에게 화를 낸다.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가긴 어딜 가?” 히스테리에 가까운 지숙의 분노는 ‘불안한 나를 혼자 죽게 하지 말아요.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라는 절박한 외침처럼 들린다. 그렇게 강릉에 찾아온 지숙을 경찰이 모텔로 데려가 (마치 상권처럼)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경찰의 머리를 마구 때리며 거부한다. 머쓱해 진 경찰이 ‘내가 술 깰게’ 라고 말하며 고쳐 앉고, 지숙이 잠깐 화장실에 가자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 베란다로 나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다. 하지만 난간 끝에 매달려 있던 경찰은 이내 다시 주섬주섬 방 안으로 들어온다. 생각해보면 홍상수 의 영화에서 섹스에 실패한 남자가 자살을 떠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니 차라리 섹스와 죽음이 가깝게 붙어 있다고나 할까? < 극장전 >의 상원( 이기우 )도 영실( 엄지원 )과의 섹스가 잘 되지 않자 깨끗하게 죽고 싶다고 말하고 수면제를 사와 (결국 실패가 예정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자살시도 자체가 아니라 이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실패한 자살의 반복. 경찰이 난간을 다시 기어 올라올 때, 우리는 안도하면서 영화 초반, 지숙이 이야기한 (자살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죽음을 생각하며 강릉을 다시 찾은 지숙도 아마 ‘살아’ 돌아갈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통곡을 하는 지숙의 울음 속엔 (자신이) 살았다는 안도와 (자신이 살기 위해 결국) 죽어야/죽여야 했던 아이에 대한 애도가 뒤섞여 있다. 그 후 상권이 다시 찾아와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임신시키려는 것이냐며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라고 말한다. 다시 강릉 행을 반복하며 죽음을 떠올리지/실행하지 않겠다는 지숙의 다짐은 병원을 나서며 담배를 끊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동수( 김상경 )(< 극장전 >), 죽음의 문턱에 선 영희를 업어 강릉으로 데려온 검은 옷의 남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 >), 과거의 애인 창숙( 김새벽 )을 반복하지 않고 출판사를 박차고 나와 눈을 맞으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아름( 김민희 )(< 그 후 >)(아직도 나는 아름이 출판사에 다시 방문하는 에필로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과 닮아 있다. 차이와 반복의 운동에서 벗어난 ‘잉여’는 차이와 반복의 운동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 ‘잉여’들이 홍상수 의 게임의 규칙의 단단한 힘의 균형에 균열을 가져오는 것이다. 상권은 과거를 반복하지만 그 자리에 지숙은 없다. 교수로 임용된 상권은 속물 같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에서 인사 온 여학생을 탐욕스럽게 바라본다.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상권은 지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그가 교수가 되든 되지 않든 강원도에서 어떠한 배움도 얻지 못한 상권의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이다. 상권도 지숙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그건 먼지가 만들어낸 ‘인공/가짜’ 눈물일 뿐이다. (“눈에 뭐가 들어갔었나 봐.”) 섹스에 대한 상권의 끊임없는 집착은 (죽음에 이끌리는 지숙과는 달리) 삶에 대한 집착에 다른 말처럼 보인다. ( 홍상수 의 남자들이 섹스에 실패할 때 죽음을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설악산 권금성 정상에서 아슬아슬한 산행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과는 다른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라며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런 상권의 모습을 횟집 수족관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와 병치시킨다. 살아 있지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 “임신시키려고 그래요?”, 사라진 금붕어 하지만 동시에 섹스는 그들에게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사랑해’라고 말하며 지숙과 섹스를 하려던 상권은 그녀가 “임신시키려고 그래요?”라고 말하자 멈칫한다. 이후 십 여 편의 영화를 돌아온 우리는 홍상수 의 남자들이 ‘사랑’라고 말할 때 이것이 곧 ‘섹스 하고 싶어’의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 밤과 낮 >의 성남( 김영호 )을 제외하면 이 말을 부인에게 한 (유부)남은 없었다는 점도 함께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성남조차 부인의 임신 소식에 불안해한다. (성남의 목욕탕 꿈 장면을 떠올려 보라.) < 극장전 >에서 상원에게 (부인도 여자친구도 아닌) ‘첩’이 되어주겠다는 영실의 말은 섹스는 하지만 부인/가족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여기엔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 오! 수정 >)이지만, 그 짝이 ‘부인-임신-가족’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어하는 일종의 저항감이 깃들어 있다. 마치 이 저항감을 반영이라도 하는 듯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족은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어딘가 한쪽이 비어 있는 형태(<극장전> < 하하하 > < 다른 나라에서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로 나타난다. < 그 후 >에서 창숙과 사랑에 빠져 새벽에 집을 도망치듯 나오던 봉완( 권해효 )은 ‘아빠’라고 부르는 (부인 혹은 딸, 결국은 가족) 소리를 못 들은 척 하고 떠나 버린다. (부인의 임신, 혹은 딸의 등장에) ‘집’으로 돌아온 성남과 봉완이 오래가지 않아 또다시 집을 떠날 것이라는 예감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상권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갑작스럽게 후진하는 차에 부인과 아들이 치일 뻔 하자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아이/부인이 죽을 뻔한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아이/부인이 죽었으면 하는 자신의 은밀한 소망을 깨달은 데서 오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이 장면에서 상권의 가족은 어디론가 외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이 외출은 주차장에서의 에피소드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상권에게 아이와 부인은 속물에 가까운 교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이유이자 ‘사랑’하는 여자들과의 섹스를 숨겨야 하는 번거로운 방해물에 불과하다. 강릉에 다녀온 다음, 사라진 한 마리의 금붕어가 어디로 갔는지 상권은 알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숙은 아마도 다시는 상권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다시는 죽지 않기 위해서. 어쩌면 죽음의 반대편에서 ‘산다’는 건, 탐욕스럽고(교수 임용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간 노교수는 상권이 잊고 놓고 간 우산을 흡족하게 바라본다.), 속물 스러운(상권은 자신의 심부름을 했던 여직원에게 잔돈을 가지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고, 지나가는 개에 물릴까봐 전전긍긍하며, 원했던 교수직을 힘들게 얻은 다음 동료들과 고작 취중 섹스의 쾌감이나 논해야 한다.)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 강원도의 힘 >은 말한다. 이 영화 한편으로 홍상수 영화 모두를 아우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누군가 (홍상수의 ‘베스트’가 아니라) ‘홍상수 영화는 결국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 강원도의 힘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20년을 돌아 이제 <강원도의 힘>을 다시 생각해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