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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여자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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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영화 最高 흥행작 10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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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Goer(무비고우어)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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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영화 "겨울여자" 제작신고 수리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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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케미스트리: 스타로 보는 한국영화사
지난해 12월 12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스크린 케미스트리: 스타로 보는 한국영화사”라는 제목으로 1950~1990년대 한국영화계 스타 커플의 관계성을 분석하는 시네포럼을 개최했다. 한국영화사 연구를 수행하는 아카이브로서, 영화연구자는 물론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가진 참여자들이 한국영화사와 관련해 새롭게 논의될 만한 지점을 발견하며 대화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영자원은 매년 이와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학술적인 분석 중심의 발제나 토론이 아니라 발표자들이 청중의 질문을 받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네포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내 주요 스타 커플이 등장한 시기를 네 구간으로 구분하고, 각 구간별로 등장한 스타 커플과 당시 한국영화나 대중문화의 특성 간의 상관관계를 조명했다. 시기별로 논의될 만한 스타들을 미리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이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발표자가 스스로 고민한 후 관객에게 제안하도록 열어뒀다. 1950~1990년대 급변한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영화산업의 지형을 참고하면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 대중에게 남긴 여운을 발표자와 참여자가 함께 추적할 수 있었던 포럼 현장을 요약한다. 1950~1960년대 스크린 속 스타 커플 영화평론가·영화사가 김종원 김종원 평론가는 1950~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커플로 등장한 스타들 간 케미스트리를 발견했다. 1950년대 스타 커플의 역사는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실제 부부가 되어 < 춘향전 >(이규환, 1955)에서 향단과 방자를 연기한 전택이 와 노경희 부터 시작한다. 배우 노경희는 < 내가 넘은 삼팔선 >(손전, 1951)을 비롯해 < 피아골 >(이강천, 1955) 등에서 해방 이후 스크린을 통해 강렬한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여성 배우로 거듭나고 있었으며, < 아리랑 3편 >(나운규, 1936)으로 데뷔한 전택이와 여러 작품에 동반 출연하며 20세기 중반 한국영화사에서 함께 활약했다. 이후 김승호 와 황정순 이 강대진 감독의 < 박서방 >(1960), < 마부 >(1961), 김수용 감독의 < 굴비 >(1963)에서 돋보이며 또 다른 스타 커플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 새로운 맹서 >(신경균, 1947)로 데뷔한 배우 최은희 는, 커플을 구성하는 인물들 간 관계가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당시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나, 케미스트리를 주도하는 여성 인물로 떠올랐다. 김진규 와 신영균 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신상옥 감독의 < 동심초 >(1959), < 상록수 >(1961), < 산 >(1967)과 같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한편, 스타 커플의 일원으로 거론된 적은 드물었지만 멜로드라마 위주의 문예영화 영역 밖의 상업영화 작품들에도 다수 출연하며 입지를 다진 김지미 배우의 행보도 독특했고, 그의 활약은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불나비 >(조해원, 1965)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60년대에 등장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 김종원 영화사가는 배우 엄앵란 , 윤정희 , 문희 를 꼽았고, 그들과 배우 신성일 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했다. 엄앵란은 < 청춘교실 >(김수용, 1963), < 맨발의 청춘 >(김기덕, 1964) 등에서 그와 함께 연기하며 ‘청춘영화’의 전성기를 불러왔으며, 두 배우의 호흡은 한국영화계에서 ‘스타’의 존재를 부각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외화에 치중됐던 국내 관객의 관심이 한국영화로 선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윤정희는 데뷔작 < 청춘극장 >(강대진, 1966)부터 < 안개 >(김수용, 1967), < 장군의 수염 >(이성구, 1968)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1960년대 한국 예술영화의 주축을 구성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문희 역시 이만희 감독의 < 흑맥 >(1965)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등에서 신성일의 상대역을 연기하면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서 영화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일 중심의 트로이카 구도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스타 커플 구조는, < 결혼교실 >(정인엽, 1970) 속 신성일과 윤정희, 문희, 남정임 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윤정희 X 신성일: 1960~19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밀고 당기기’ 영화평론가·영화연구자 금동현 금동현 평론가는 1960~1970년대 대표 배우이자 청춘스타였던 신성일과 윤정희가 동반 출연작에서 연기한 인물들의 관계를 ‘밀고 당기기’라는 용어로 재해석했다. 극중 그들의 배역이 점하는 위치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출연한 87편에 달하는 작품들에서 거듭 역전되고,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두드러진 <안개>와 < 야행 >(김수용, 1977)에서 이 점이 선명히 관찰된다. 배우 신성일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 아낌없이 주련다 >(유현목, 1962)로 데뷔한 이후 유수의 작품에서 줄곧 주연을 맡았고, 특유의 소년미로 ‘청춘의 영원한 아이콘’이자 현대사회에 완전히 정박하지 못한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도회적이고 지적인 여성 인물을 대표했던 배우 윤정희는 1972년 석사 논문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면서, 배우이자 여성인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는 면모를 보이며 ‘멜랑콜리’한 정서를 중심으로 스타 이미지를 갱신했다. <안개>와 <야행> 중 신성일, 윤정희 / © ㈜태흥영화 일례로, <안개>에서만 해도, 윤정희는 주변 소품이나 인물들 사이에 갇혀있고 신성일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야행>의 몇몇 장면에서 윤정희는 자신을 향한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기를 수행함으로써, 1970년대 한국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성취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신성일과의 케미스트리를 일으킴과 동시에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구축된 윤정희의 스타 이미지를 참고하면, 금동현 평론가는 그가 ‘보여지는(보이는) 여성’에서 ‘보여주고 보는’ 여성으로 변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60~1970년대 한국고전영화 중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두 작품의 영화사적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당대 형성된 두 배우의 스타 이미지를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는 관점도 공유했다. 더불어, 두 사람이 우울하지 않은 명랑한 얼굴로 콤비를 이룬 작품 < 아파트를 갖고 싶은 여자 >(정인엽, 1970), < 모범운전사 갑순이 >(이형표, 1972) 역시 언급하면서, 둘의 케미스트리를 다른 방식으로도 재조명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며 발표를 마쳤다. 장미희 X 안성기 198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 커플 영화연구자 이윤종 이윤종 영화연구자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 장미희 와 안성기 를 다루면서, 당대 한국영화 주요작에 출연하며 강력한 케미스트리를 발휘한 이들을 ‘황금 커플’로 지칭했다. 안성기는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 황혼열차 >에서 아역 배우로 데뷔해 연기 활동을 지속하다가 < 애수의 언덕 >(김대희, 1969) 이후 10여 년간 휴식기를 보내고 < 병사와 아가씨들 >(김기, 1977)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 바람불어 좋은날 >(이장호, 1980), < 적도의 꽃 >(배창호, 1983), < 고래사냥 >(배창호, 1984),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 등 1980년대 화제작의 주연으로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시기 장미희와의 동반 출연이 특히 빛났다. 장미희는 < 성춘향전 >(박태원, 1976)으로 데뷔하고 흥행작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에 출연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당대 여성 배우 트로이카에도 합류한다. 이후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등에서는 안성기와 상대역으로 만나 열연함과 동시에 흥행까지 거두면서 두 배우 모두 영화계 입지를 굳히게 된다. <적도의 꽃>와 <깊고 푸른 밤> 중 장미희, 안성기 / © ㈜동아수출공사 그런데 이들이 동반 출연한 1980년대 작품들에서 각자가 욕망의 주체(안성기)와 대상(장미희)으로 설정되면서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파국’의 결말을 통해 발휘된 점이 인상적이다. 안성기는 순수함부터 비열함에 이르기까지 중·하층민 남성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장미희는 세련된 외관을 지닌 채 심리적 결핍을 겪는 부유한 여성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적도의 꽃>에서는 중년 사업가에게 착취당하는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한 미스터 M(안성기)이 그를 구출하려 하지만 결국 화합에 실패한다. < 황진이 >(배창호, 1986)에서 황진이(장미희)에 대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갓바치(안성기)는 극단적 선택을 감행하고, <깊고 푸른 밤>에서는 미국 영주권과 돈벌이에 집착하는 백호빈(안성기)이 계약 결혼을 통해 제인(장미희)을 이용하며, 두 인물이 파멸로 치닫는 과정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 드러난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두 배우는 이렇게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한가운데 드리운 감정 소외나 우울감의 그림자를, 불행의 케미스트리로 스크린에 옮겨왔다. 김혜수 X 한석규: 1990년대 소비문화와 트렌드 신화, 도시의 얼굴 영화평론가·성결대학교 교수 정민아 이전까지 언급된 배우들의 활동이 과거 한국사회의 시대별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면, 정민아 평론가는 1990년대에 두각을 드러내 현재까지도 활발히 필모그래피를 갱신하고 있는 배우로서 배우 김혜수 와 한석규 를 조명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였지만 그들이 함께 출연한 작품은 사실 많지 않다.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 닥터봉 >(이광훈, 1995)에서 처음 협업한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 이층의 악당 >(손재곤, 2010)으로 다시 만났다. 그래서 그들이 한 작품에서 발생시킨 케미스트리보다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각자의 역량을 개발한 시간을 되돌아보며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감을 분석했다. (상) 영화 <쉬리>, 드라마 <신사장 프로젝트> 중 한석규 / (하) 영화 <첫사랑>, <내가 죽던 날> 중 김혜수 © ㈜필름쿡플러스, tvN 1990년대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민주화와 세계화가 본격화되며 대중문화 산업의 규모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에 부합하는 다양한 콘텐츠나 인물이 주목받았던 때로, 이때 등장한 스타들은 대체로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팬덤을 확보했다. 그중에서도 김혜수와 한석규는 외모와 목소리, 연기,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당시 대중이 선망한 ‘세련됨’을 구현했고, 데뷔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품 속에서 쉼 없이 대중과 호흡해왔다. 한석규는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도시 남성의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서처럼 냉정한 현대사회에서 불운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처연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기억된다. 이는 최근까지 그가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소시민적’ 영웅의 리얼리티와도 맞닿아있다. 또한 감독에 의해 ‘선택받는’ 배우를 넘어 자발적인 비전에 따라 작품과 장르를 선택하고 신인 감독의 성장까지 견인하는 흥행보증수표 영화인의 시초 격이기도 하다. 한편, 김혜수는 활동 초기에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나 영화 < 첫사랑 >(이명세, 1993)을 통해 젊고 발랄한 청춘스타의 면모와 특유의 건강미로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보다 다채로운 배역을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으며, 특히 2020년대 즈음에는 < 굿바이 싱글 >(김태곤, 2016)과 < 내가 죽던 날 >(박지완, 2019), < 밀수 >(류승완, 2023) 등을 통해 독립된 여성 자아가 돋보이는 씨네페미니즘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비디오 에세이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윤서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과 영자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은, ‘비디오 에세이’라는 작업의 의미를 소개하며 포럼 주제에 맞는 작업 결과물 한 편을 직접 제작해 선보였다. 이무언은 관객이나 연구자로 하여금, 각자가 작품에서 발견한 특별한 지점을 중심으로 연출과 편집을 주도하면서 영화와 한층 더 친밀해지는 기회로 비디오 에세이를 인식했다. 윤서연 연구원 역시 비디오 에세이가 주제가 되는 대상(물)과 이를 둘러싼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통찰”한 결과이자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한다는 논의 [1] 를 인용하며,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으로서 비디오 에세이의 영역이 지닌 비평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측면을 소개했다. 이날 소개한 작업은 영자원이 올해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 제작 및 배포 사업’을 수행하던 도중 두 사람이 기획하게 됐다.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는 영화사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한국영화 몇 편의 공통 소재를 제목으로 하여, 작품별 본편 영상과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막, 그리고 코멘터리 영상 등을 수록한다.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해외에 소개할 목적으로 매년 해외 공관이나 문화원 등에 비영리적으로 배포되고 있다. 작년에는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스타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DVD에, 한국사회의 일면과 시대의 감성을 머금고 있는 남성 인물들이 인상적인 한국영화 6편을 수록했다. 그리고 감상자들이 한국에 대해 간략히 소개받을 수 있는 짧은 콘텐츠를 기획해 부가 자료로 함께 수록하고자, DVD에서 다루고 있는 남성 배우 6인 중 한 명에 대한 비디오 에세이를 기획했다. 내부 논의 끝에 최종 선정하게 된 에세이의 주인공은, 순정과 헌신, 소시민의 나약함, 일그러진 욕망 등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한 국민 배우이자 고전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스타로 기억되는 한국영화의 얼굴, 안성기였다. 실제 연령대로 비춰볼 때, 안성기는 에세이를 제작한 이무언의 아버지 세대이면서 작품 촬영 당시에는 그(이무언)와 같은 또래였다. 또한 안성기가 극중 인물을 형상화하며 선보인 특유의 ‘얼굴’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각기 다른 국면을 관통함에 따라, 1980년대의 시절이 하나로 통합되는 듯한 느낌 역시 받았다고 이무언은 전했다. “이미지들의 느슨하고 싱거운 연결”을 통해 이러한 인상이 에세이를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반면 윤서연 연구원은 안성기가 각기 다른 영화에서 선보인 대사들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모아 1980년대 시대정신과 같은 특정 의미를 강조하여, 작품과 쇼트들의 의미를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2017년 시네마테크KOFA에서 그에 관한 특별전을 개최했을 때 제작된 영상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을 참고하고, 구술채록 사업 진행 중 그의 구술 내용이 녹음된 파일들을 다시 들어봤으며, 그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 중 10편을 골라 실제로 삽입할 쇼트를 신중히 선택했다. 쇼트마다 배어있는 정서를 자막과 음악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특히 서로 다른 작품에 속한 장면을 소품이나 장소 등을 매개로 연결하며 안성기가 작품과 작품 사이를 유기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출 중 하나는,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 중 덕수궁의 벤치에서 각각 아내( 황신혜 )와 딸에게 자상함을 베풀지만 냉대를 받고 마는 두 장면을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해 동시에 재생한 대목이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아내와 딸을 향한 그의 행동이 중첩되는 순간들이 보이는데, 이는 필름이 아닌 디지털 영상이 보편화된 시대에 두 개의 영상을 2채널로 나란히 배치하며 가능해진 실험이라고 윤서연 연구원은 덧붙였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이미지 클릭 후 재생) 관객과의 대화 (질문1)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스타’들에게는, 할리우드 스타들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국내 관객의 욕망이 투사되는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1990년대부터는 이들만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구축됐다는 느낌을 받는데, 한국영화의 각 시기가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에 대해 발표자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답변_이윤종 영화연구자)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산업은 몇몇 주류 영화 스튜디오가 제작과 배급, 상영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배우들 역시 각 스튜디오에 소속된 채로 활동했다. (하지만 1948년 미국 대법원에서 이러한 영업 활동이 ‘독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여러 스튜디오가 해체됐고, 여기에 소속됐던 배우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불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이러한 스튜디오 중심의 스타 시스템 자체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고, 할리우드의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해방 이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당시 국내 영화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에 근접한 운영 양태를 보였는데, 1970년대부터는 이마저도 쇠퇴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감독과 배우, 영화 스태프들 모두가 독립된 개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는 1990년대 이후에 비해, 영화를 비롯해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 역시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얻지는 못했던 시점인데, 와중에 안성기와 같은 ‘국민 배우’가 탄생했다는 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질문2) 20대 관객의 입장에서는 < 라디오스타 >(이준익, 2006)나 < 실미도 >(강우석, 2003) 등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안성기 배우를 기억하게 되는데, 과거의 다양한 출연작들을 통해 그의 활동을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돌이켜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비디오 에세이를 제작하면서, 여러 출연작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장면들을 구분해내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고 예상된다. 작업 도중 겪게 되신 고충 이 있다면 듣고 싶다. (답변_이무언 비디오 에세이스트) 감상을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장면을 확인할 때마다 영상의 일부를 이미지로 캡처해두고, 작품 안에서의 타임코드와 함께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메모했다. 에세이에서 다룰 모든 작품에 대해 이 작업이 완료되면, 캡처된 이미지들을 훑어보며 관련 장면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각 이미지를 연결하는 과정에서는, 안성기의 연기를 통해 전달되는 여러 가지 인상들(‘아버지’, ‘남성’ 등)이 쇼트들의 유기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지각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안성기 개인의 삶이 연상되거나 관객 스스로가 처한 ‘현실’ [2] 과 작품 속의 ‘허구’가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흥미로웠던 장면들도, 어렵지만 제시하고 싶었다. 또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안성기의 ‘얼굴’ 외에 다른 요소들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는 이미지, 수면 위에 반사된 이미지, 극중 시계를 비춘 이미지 등이, 매 장면 돋보이는 그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연결해줬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중 시계와 잔이 등장하는 쇼트 (질문3) 1960년대 한국영화의 멜랑콜리적 지식인 주체성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는데, 금동현 평론가의 발표에서 <장군의 수염>과 <안개>가 다뤄져서 반가웠다.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배우들이 담지하고 있는 멜랑콜리적 주체성 이 무엇일지에 대해 여쭙고 싶다. (답변_금동현 영화평론가) 오늘 분석한 작품들에서는 멜랑콜리를 자아내지 않고 ‘체현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물론 1960년대에는 멜랑콜리를 재현하는 몇 가지 요소가 발견될 뿐 멜랑콜리라는 감수성 자체가 이 시기에만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멜랑콜리의 흔적이 관찰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한 대목을 꼽자면, ‘코미디’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한국 코미디영화에서 웃음은 모종의 이유로 ‘경직되어버린’ 무언가를 조롱할 때 자주 발생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웃어야 하는 데 웃지 못하는 순간( 이봉래 감독의 영화에서의 몇 가지 장면이 예가 될 수 있다)이 어떻게 보면 멜랑콜리한 상태에서 받는 느낌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질문4) 오늘 언급된 배우 중, 배우 김혜수가 유독 눈에 띈다. 1990년대 당시 그는 확고한 ‘무비스타’로 자리매김한 상태가 아니었고, 광고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아직 다른 스타들만큼의 파급효과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김혜수 가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것이 독특한 지점이다. 이 시기 스타로서 김혜수의 부상을 분석하실 때 다른 배우들과 비교하여 어떤 접근법을 적용하셨는지가 궁금하다. (질문5)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배우 김혜수와 한석규가 선보인 연기 스타일이, 그들이 1990년대에 수행하던 방식과는 달라졌다고 말씀해주셨다.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기의 방향성이 재정립되는 데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욕망이 변화하는 현상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시대별로 이념이나 정치성, 관객의 욕망 등의 변화가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 변모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지 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답변_정민아 영화평론가) 두 질문에 대해 한 번에 답변 드리고 싶다. 말씀하신 대로 김혜수 배우가 영화계 스타로서 두각을 나타낸 시점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다소 늦다. 하지만 1990년대 화보와 예능, TV를 포함해 대중매체 전반에서 그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성장한 여정을 고려하면, 그리고 이 시기 관련 콘텐츠를 향유했던 경험을 되새겨보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김혜수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는 오늘날 스타가 탄생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영화’와 그밖의 영역(방송 등)이 명확히 구분됐던 과거와 다르게,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배우’의 활동 분야가 대폭 확장됐고 분야 간 경계도 거의 사라졌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분야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모두 ‘배우’로 호명되며, 그들이 연기를 선보이는 분야 역시 한 가지로 국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크린을 통해서만 스타로 거듭나기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파급된 각기 다른 매체에서 강렬한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만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한 김혜수가,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복합적 차원의 배우상을 1990년대부터 선구자적으로 확립한 이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현장 BEHIND CUT * *** [1] 박진희, “ 복혜숙과 석금성을 헷갈려하다 ”, KMDb 영화글, 2023. 7. 27. [2] < 개그맨 >(이명세, 1988) 중 이발사가 이종세(안성기)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 방면에 재능이 많으셨죠?”라고 물어 아역 배우 시절 안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거나, <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8) 중 “우리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라는 대사 이후 배우 박중훈과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 등이 있다.
[한국영화걸작선]겨울여자: 2월의 영화 Ⅱ
1970년대 대중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깊이 기억된 세 여성의 이름은 < 별들의 고향 >( 이장호 , 1974)의 경아, <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 1975)의 영자, 그리고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의 이화다. 세 작품은 공히 소설로 먼저 성공을 거두고 영화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별들의 고향>과 <겨울여자>는 소설로 발간되기 전 신문에 연재된 바 있다). 1) 그리고 당대의 영화는 물론 1980년대까지 여성영화의 어떤 기준을 만들어냈다. 혹자는 호스티스 장르에 무슨 여성영화냐고 물을 테지만, 그건 1980년대의 변질된 장르에 들이댈 질문이다. 특히 <겨울여자>는 호스티스 장르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한 인식은 안타깝게도 당대의 대중영화를 경험하지 않은 채 당연히 그러리라고 짐작하는, 그리고 쉽사리 범주화하는 데서 기인한다. 세 영화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1970년대 여성의 어둡고 외면당한 부분을 대중적으로 각색한 경우이며, 비록 한계는 분명할지언정 당시 여성의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하다. 잘못된 선입견을 또 하나 말하자면 현재 관객들이 1970, 80년대 한국영화의 수준이 낮을 거라고 여긴다는 거다. 조금 유치한 영화에 “요즘이 1980년대도 아니고” 라는 반응하는 걸 볼 때마다 과연 그 시대의 영화를 제대로 경험했는지 의심스럽다. 표현 기법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걸 감안하지 않고 냉소와 비웃음으로 예전 영화를 보는 관객이 적지 않다. <겨울여자>도 그런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임이 예상된다. 성우가 맡은 이화의 목소리, 순진한 건지 판단지 서지 않는 인물의 태도 등에 헛웃음을 터뜨릴 관객이 빤히 그려진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성공을 재연하려던 김호선과 당시의 제작진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전성기에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윌리엄 포크너가 각본을 썼듯이, 한국에도 그런 자세로 영화를 대하던 때가 있었다. <겨울여자>의 원작은 조해일이며,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김호선과 호흡을 맞췄던 김승옥이 각본을 썼다. 본격적인 사운드트랙의 출발점인 <별들의 고향>의 음반이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터라 <겨울여자>도 이에 부응했다. 김승옥처럼 김호선과 다시 작업한 음악가 정성조는 영화의 흐름에 맞춰 음악을 구상했고, 조해일, 김승옥이 직접 작사에 참여한 노래들도 대중의 사랑을 얻었다. 전체적인 톤은 프란시스 레이 풍의 유러피안 경음악이었으나, 익숙한 고전음악과 오리지널 사운드를 영화 전체에 펼쳐놓은 것은 인정할 만한 시도였다. 김호선은 여자 주인공을 ‘갇힌 존재’로 파악했다. 철조망을 근경으로, 서울의 고급 주택가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주택 중 하나의 계단을 오르면, 굳게 닫힌 철문 너머에 이화가 산다. 김호선은 그런 인상으로 이화의 공간을 그렸다. 그녀는 보호받고 있음과 동시에 폐쇄된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인상은 이후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전제 조건을 형성한다. 그녀가 어떻게 변하는가, 그것이 <겨울여자>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고생 이화는 누군가가 보낸 편지를 엄마에게 ‘고발’한다. 그녀는 자신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기며, 편지를 보낸 누군가를 불편한 감정으로 대한다. 임예진 의 ‘진짜진짜 시리즈’ - < 진짜 진짜 잊지 마 >(1976), < 진짜 진짜 미안해 >(1976), < 진짜 진짜 좋아해 >(1977) - 가 나올 때임을 감안하면 이화의 태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혼자 뾰로퉁한 표정을 지으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영화는 그녀가 어떻게 자라 왔는지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폐쇄성을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이화가 갇혀 있는 상황을 사회적인 조건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딸의 태도에 웃음을 지으며 ‘이런 편지는 혼자 간직하는 것이’라 일러두는 엄마의 태도에서 보듯, 이화가 지닌 도덕, 윤리관은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그녀 스스로 지키고 세운다는 느낌을 준다. 그 시기의 다른 여성 영화와 비교해, 이화라는 인물에게 바깥 상황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얕다. 이것은 이화라는 인물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 탓이기도 하다. 이화에게 영향을 끼치는 두 인물 – 요섭과 석기가 아버지와 맺는 관계는 사회적으로 읽을 여지가 다분하다. 요섭 부의 폭력성과 석기 부의 죽음은 1970년대의 사회정치적 특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영화에 가해질 검열을 의식해 영화화 과정에서 삭제되었을 확률이 높다. 특히 이화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주는 석기의 경우, 그가 하는 대사의 많은 부분은 ‘묵음’으로 처리돼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도록 처리되었다. 정학을 당했다는 부분에서는 소리가 거칠게 튀고, 강제로 징집을 당한 부분도 스스로 입대하는 것으로 알게끔 했다. 외출 중 교통사고로 죽은 것에도 의문사의 의혹이 끼어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이화가 형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광준이란 인물을 영화에서 아예 제거함으로써 그녀의 사회적 변신을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이화가 군인인 석기에게 보내는 편지에 “석기씨 덕분에 훌륭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이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꼭 알아야 할 것을 모른 채 대학을 졸업하고 말았을 거에요”라고 쓰는 것이 다다. ‘꼭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대를 반영한 이러한 각색으로 인해, 원작에서 드러나는 이화의 수동성이 오히려 상쇄되고 그녀의 내면과 자립적인 부분이 두드러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화의 청춘 시대가 몇몇 남자를 거치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겨울여자>는 얼핏, 남자들 사이를 전전하는 여성을 그린 당대 여성영화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고등학생이었던 이화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반에 이를 동안 요섭, 석기, 민이란 남자를 만나게 된다. 별장으로 초대한 요섭이 육체적으로 접근하자 당황한 그녀는 “이게 뭐예요”라고 말하며 뛰쳐나간다. 그 일로 상처를 입은 요섭은 자살하고, 이듬해 이화는 석기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운동권 학생이었던 그는 입대 후 죽음을 맞는다. 다시 이 년 뒤 이화는 고등학교 은사였던 민과 조우하는데, 이혼 후 혼자 살던 그는 이화의 등장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남자를 거치는 과정은 다를 게 없으나,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은 이 영화에 없으며 영화 또한 그들의 시선 아래 이화를 두지 않는다. 거꾸로 영화는 이화의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보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전개는 상당 부분 이화의 출신 계급과 상관이 있다. <별들의 고향>의 경아는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를 키우고 싶었으나 육체적으로 착취당하고 벼려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는 기술을 배워 돈을 벌고 싶었는데, 버스 안내원을 하다 팔을 잃은 뒤 뒷골목에서 몸을 팔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비극적 삶이 되풀이 되거나 비극적 삶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과 달리, 이화는 과잉 보호를 받으며 자랐으나 자기 삶의 결정권을 지닌 인물이다. 두 명의 남자가 맞는 죽음도 그녀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오히려 삶과 사회를 깨닫고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는다. 기실 세 남자 - 미성숙한 요섭, 삶의 열정이 넘치지만 아직 젊은 석기, 그리고 상처를 맛보고 중년을 앞둔 민 – 의 구성은 이화의 내면이 점자 성숙해지는 단계를 은유하는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자가 아닌 이화 자신이다. 이화는 과연 독립적인 여성인가. 최소한 이전의 여성영화에서 보던 편한 상대는 아니다. “난 남자가 곁에 없으면 잠시도 살 수가 없어요, 난 그래요. 난 그런 여자에요.“라던 경아는 요즘 여성 관객에게 ’속 터지는‘ 인물로 비칠 것이며, 남자들은 그런 경아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다 버린다. 이화는 그 시대의 영화가 꾀할 수 있는 나름의 방책이 아니었을까. <겨울여자>는 멜로드라마 장르의 특성 상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슬픔과 비극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화의 위대한 점은, 사랑의 상처로 인해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녀는 매번 더 큰 사랑의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간다. 한국 멜로드라마로선 아주 드문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웹을 둘러보다 한 관객이 ’<겨울여자>의 장르가 대체 뭔가요‘라고 질문한 것을 읽었다. 그만큼 전통적인 멜로와는 다른 영화다. 사실 <겨울여자>가 1970년대 관객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았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건 좀 이상한 멜로다. 세 남자와의 관계는 기능적으로 연결된 느낌이 강하다. 그녀가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누드 신을 삽입한 것도 그러하다. 인물 사이에 깃든 애정의 촉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자신은 가부장제를 거부해 결혼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민의 재결합을 도모한다는 설정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거기에서 역으로 이화의 정체를 더듬어야 할 것 같다. <겨울여자>는 세 남자와의 관계가 진행될 때마다 전혀 다른 톤으로 바뀌는 영화다. 흡사 세 편의 영화를 붙여놓은 듯하다. 그건 그 사이에 이화라는 인물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화는 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지속적인 성숙의 단계를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이화는 대담한 존재이며 자신이 믿는 바를 의심하지 않는다. 죽음과 상처에 주눅들지 않으며 남의 시선 같은 게 선택을 가로막지 못한다. 첫 외박을 한 다음 날, 이해심을 갖추었으나 목사로서 보수적인 인물인 아버지가 충고를 하려고 하자 이화는 “친구 집에서 자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사람이 자면 안 되는 곳에서 잔 건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성인이 돼 만난 옛 선생이 친구가 되자고 해도 서슴지 않는다. 당황해 거리를 두려는 건 도리어 선생 쪽이다. 그녀는 윤리나 도덕을 따르기보다 진실을 발견해 직시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윤리나 도덕은 관습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데, 인간다움을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건 때론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그런즉, 가족 이기주의를 이유로 결혼 제도에 거부감을 표현한다. 21세기의 관객의 시선으로 보기에, 이화는 빈 구석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요즘 만들어지는 한국영화의 여성과 비교해 봐도 그녀의 독립적인 기질은 신선하다. <겨울여자>가 한때 사랑받았던 옛날 영화가 아니라 여전히 흥미로운 텍스트인 건 그래서다. 1)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서 세 영화가 거둔 관객의 수는 <별들의 고향>이 46만명, <영자의 전성시대>가 40만명, <겨울여자>가 58만명이다. 전산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임을 감안하면 실제 관객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 겨울여자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한국영화사100년]변화의 시작 1985~1989년: 대중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와 영화계 1980년대 중반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은 양가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 그리고 반미 감정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권」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레이건의 재선 선거 전략과 맞물려 ‘광신적 애국주의’로 포장된 1984년 LA 올림픽은 한국의 신군부에도 매력적인 모델이 되었다. 또한 LA 올림픽이 보여준 미국 제일주의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한국은 최고 우방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이 개최한 올림픽에서 10위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고, 전 국민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방송국을 동원한 국민 축제로 열기를 이어나갔고, 이는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연결되며 1980년대 중후반의 한국 사회 전체를 취하게 만든다. 전두환 정권이 추진한 일련의 올림픽 이벤트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통치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이 미국이라는 타자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이은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 그것이다. 학생들은 광주민주화항쟁 5주년을 기해 학살의 책임자로 신군부를 지목하고 정권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를 지원한 미국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기회 삼아 학생운동을 국민 여론과 격리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해 부각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광주학살과 미국의 관련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간 것이다. 더 이상 반미는 운동권 대학생의 구호에만 머물지 않았다. 제5공화국의 영화 정책 설계도 미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절차적 정당성과 도덕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혹은 올림픽이라는 정권 차원의 과업 때문인지 특히 문화예술을 강조했고, 예산 지원과 규제 검열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가동했다. 1984년 영화 시책부터 반영된 영화예술 및 영화산업 활성화 방안도 당시 문화 정책의 맥락에 놓여 있을 것이다. 제5차 영화법 개정(1984. 12. 31)으로 영화제작업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었고, 전격적인 독립영화 제작 제도까지 신설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검열제도 심의제로 이름을 바꿨고, 주체 역시 반관반민 기구인 공연윤리위원회로 이관되었다. 이 같은 한국영화 육성 및 자율화 정책의 추진 배경에는, 1985년 시작된 한미영화협상이 있었다.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의 끊임없는 압력 끝에 한국영화는 전면적인 시장 개방이 예고된 상태였다. 결국 제6차 영화법 개정(1986. 12. 31)으로 1987년 7월부터 외국 영화사들이 한국에서 영업을 시작했고, 1988년 UIP의 <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 >(애드리안 라인, 1987)가 그 물꼬를 텄다. ‘한국의 스필버그’에서 미학적 야심가로 1953년생인 배창호 는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부터 자작 시나리오를 들고 충무로 영화사를 기웃거린 영화청년이었다. 당시 제작 명가 화천공사를 찾아가 자신을 기획실장으로 채용해주면 연간 3편 이상의 흥행작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복귀작 < 바람 불어 좋은 날 >과 < 어둠의 자식들 >(1981)의 조감독으로 현장 경험을 쌓은 후 1982년 < 꼬방동네 사람들 >로 감독 데뷔의 꿈을 이뤘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이동철의 원작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분위기가 강했지만, 영화는 문공부 검열 과정을 거치며 외견상 멜로드라마로 전향했고, 결과적으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배창호 자신도 대중적 화법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차기작인 < 적도의 꽃 >(1983)이 15만 관객 동원으로 흥행에 성공하며 충무로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했고, < 고래사냥 >(1984)의 40만 흥행에 이어, < 깊고 푸른 밤 >은 60만이 넘는 전대미문의 흥행 성공을 거뒀다. 지금이야 1천만 관객 흥행이 큰일도 아니지만, 당시 이 정도 흥행 성적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영화는 1985년 3월 1일 명보극장 한 관에서만 개봉해 7월 31일까지 무려 다섯 달 동안 상영했다. 매일 3,000명 이상의 관객이 들면서 5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때문에 다른 개봉관인 코리아극장으로 옮겨 최소 10만을 더 동원하게 된다. 이는 < 겨울여자 >( 김호선 , 1977)가 보유한 58만 기록을 깬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한국의 스필버그’로 불렸는데, 대중적 화법의 스토리텔링에 능하다는 평가와 흥행 감독이라는 가치가 합쳐진 표현이었을 것이다. 1985년 < 고래사냥 2 > 역시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는 불현듯 ‘왜 영화를 만드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지게 된다. < 황진이 > (1986)에서 시도한 탐미적 실험이 추석 프로를 기대한 관객에게 철저하게 충격을 주고 외면받은 후, 양식미는 유지하면서 서민의 일상을 따뜻하게 묘사한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로 다시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영화비평가 김영진의 표현처럼 배창호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이미지로 승부를 거는 작가의 길에서 주춤거렸고, 흥행 감독의 명성은 조금씩 잊혀갔다. 1990년대 이후 그는 미학적 야심을 투영한 작가주의 영화와 대중영화, 또 저예산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갔다. 전자는 < 꿈 >(1990)과 < 천국의 계단 >(1991), 후자는 < 러브 스토리 >(1996), < 정 >(1999)과 < 흑수선 > (200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관객과 평단 양쪽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받는 작품이라면, 1980년대의 그것은 배창호의 몫이었다. <깊고 푸른 밤>을 위시로 한 그의 1980년대 영화는 대중적 화법, 기술적 혁신 그리고 사회적 의미와 미학적 야심까지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성취는 그간의 한국영화가 기댄 멜로드라마의 상투성을 벗어난 것이었다. 황량한 풍경이 전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영화는 미국 서부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오픈카에 타고 있는 한 남자를 비추며 시작한다. 한 여성이 올라타자 차는 데스밸리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는 기이한 협곡의 구릉에 기대선 채로 관계를 가진다. 섹스가 끝난 후 남자는 돌변한다. 돈이 든 핸드백을 집어 든 그는 여자를 무자비하게 걷어차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둔 채 떠난다. 이 남자는 바로 기회의 땅 미국에서 영주권을 받고 부자가 되려는 백호빈( 안성기 )이다. 임신한 애인을 한국에 남겨둔 채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영주권을 받아 그녀를 초청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LA 도심의 화려한 야경을 배경으로 ‘깊고 푸른 밤’이라는 타이틀이 보이고, 이제는 술집이다. 한 중년 여성이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성 바텐더에게 다가가 위장 결혼을 권한다. 그녀는 더 이상 싫다고 거절하지만 한국 남자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뀐다. 그녀는 주한미군을 따라 미국에 왔다가 이혼한 후, 영주권을 받으려는 남자들과 위장 결혼해 돈을 버는 제인( 장미희 )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위장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전남편 마이클이 딸 로라를 무리하게 데려간 사건이 있던 밤, 호빈과 제인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고 제인은 점차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한밤에 이민국 직원들이 들이닥쳐 둘의 관계를 추궁하지만, 제인의 도움을 받은 호빈은 결국 영주권을 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한국의 애인을 불러올 생각에 들뜬 호빈은 제인의 집을 나서며 이혼을 요구하고, 그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그녀는 임신했다고 거짓말한다. 제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호빈은 그녀 역시 데스밸리로 데려가 폭행한다. 임신이 거짓말이었다는 제인의 말에 안심한 호빈은 이혼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고, 차에 탄 그녀는 호빈의 애인이 보내준 테이프를 들려준다. 아이도 지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목소리에 호빈은 정신을 잃고, 제인은 그의 머리를 쏜 후 자신의 머리도 쏜다. 어떤 의미에서 <깊고 푸른 밤>은 한국영화사상 가장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해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일 것이다. 데스밸리행 고속도로를 달리는 오픈카, 모래 계곡에서 벌이는 정사 등 작심한 듯 할리우드 영화의 질감으로 볼거리를 전시하던 영화는, 갑자기 여인을 무자비하게 발로 걷어차는 악마 같은 남자를 보여준다. 특히 오프닝의, 인물을 점처럼 두고 데스밸리의 전경(全景)을 잡아내는 압도적인 숏은 일품이다(촬영기사 정광석은 이 영화로 21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촬영상을 받았다). 영화의 엔딩 역시 데스밸리다. 호빈은 제인을 때리고 목을 조르며 모래산 밑으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다. 이때도 모래산 위의 두 남녀를 점처럼 잡아내며, 대자연에 비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신비로우면서도 황량한 모래 협곡과 사막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호빈과 제인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데스밸리로 상징되는 영화 속 미국은 이민자들의 꿈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일 뿐이다. 최인호 의 시나리오, 장미희의 호연 <깊고 푸른 밤>은 <적도의 꽃>에 이어 최인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오프닝 타이틀에 그의 소설 「깊고 푸른 밤」과 「물 위의 사막」을 원작으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시나리오는 두 소설의 주요요소와 구성을 합친 것이다. 전자에서는 한국에서 터진 대마초 사건으로 미국에 온 가수와 선배 소설가가 자동차로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요소를 취했고, 미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계약 결혼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후자에서 가져왔다. 사실 최인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극의 구성이나 인물의 성격 등 배창호의 영화 버전과는 꽤 다르다. 예를 들어, 데스밸리를 배경으로 한 사건은 시나리오의 엔딩에만 적용되고, 제인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한 여인으로, 또 그녀와 호빈도 더 깊은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는 제인을 차갑고 그늘이 있는 여성으로 묘사하는 등 둘의 관계에 거리를 만들고, LA와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과 데스밸리의 황량한 구도 속에 인물들을 배치해 공간과 분위기로 인물의 내면 풍경을 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 속 제인의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빚어진 것은 무엇보다 장미희의 역할이 컸다. 영화평론가 신은실의 평가처럼 전작 <적도의 꽃>이 배우로서의 안성기가 장악한 영화였다면 <깊고 푸른 밤>은 장미희의 아우라가 지배한 영화였다. 1980년 9월부터 방송출연금지 연예인으로 묶여 있던 장미희는 스크린 작업만 이어가다 1983년 9월부터는 거의 잠적에 가깝게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배창호의 끈질긴 설득으로 출연을 결심한 그녀의 요구 조건이, 미국 올로케이션과 동시녹음 등 기술적 투자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영화로 장미희는 <겨울여자>의 로리타 캐릭터를 넘어선 성숙한 매력의 여인으로 변신하며, 연기적 성장을 맞게 된다. 한국 대중영화의 주목할 만한 성취 당시 기사(「동아일보」 1985.10.14)는 <깊고 푸른 밤>이 관객의 주목을 받은 이유로, 소재의 참신성과 서구영화 같은 스타일을 든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국 이민 사회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영화 매체의 강력한 영향력, 특히 현재 1천만 영화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가 당시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관객들에게 외국영화 보는 기분을 맛보게 한 점”도 큰 매력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통상 제작비의 2~3배인 2억 5,000만 원가량의 제작비를 투입했고, 한국 배우는 4명만 출연시키며 미국 현지 올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배창호의 감각적인 연출과 속도감 있는 전개도 매력적이었지만, 테크닉 면에서도 발군이었다. 기존의 한국영화와 달리 영화 전체를 동시녹음으로 진행했고, 배창호의 스타일적 인장으로 꼽히는 360도 촬영 등 인물들의 감정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도 돋보였으며, 마치 재즈처럼 이미지와 조우하는 정성조의 세련된 영화음악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관객에게 서구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을 부여했다는 점은, 최신 렌즈의 카메라로 미국의 풍광을 담아낸 것이 이유였지만 할리우드 영화를 환기시키는 장면이나 분위기를 차용한 것이 주효했다. 여러 평론가가 언급하듯, < 차이나타운 Chinatown >(로만 폴란스키, 1974)의 필름 누아르적 분위기를 취한 것부터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마틴 스코세이지, 1976) 속 로버트 드 니로가 걷는 장면을 모방한 것도 그렇다. 하지만 당시 배창호의 언급처럼 미국영화에 대한 콤플렉스 차원이 아닌, 미국 현지에서 완성도 있는 대중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1980년대 중반의 시도 자체가 평가의 방점으로 찍혀야 할 것이다. 새로운 변화의 예고 1980년대 후반의 제작 자유화 물결과 정치적 유화 국면을 타고 한국영화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물결을 맞았다. 이장호와 배창호의 후예들이자 영화운동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장선우 , 박광수 , 이명세 , 정지영 등이 등장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사회비판적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국내외 영화학자들은 그들의 작품 경향을 묶어 ‘코리안 뉴웨이브’로 명명했다. 특히 장선우는 한국식 자본주의를 우화적 표현으로 풀어낸 < 성공시대 >(1988)를 내놓으며, 1990년대를 휘저을 파격적인 행보를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