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퇴(우리는 이렇게 싸웠다)
- 감독
- 이강천
- 제작년도
- 1956
- 출연
- 황남, 박노식, 최봉, 허장강, 독고성, 윤일봉, 안나영, 윤왕국, 남방운, 송돈상, 지용남, 최수경, 김원민, 박봉옥
“나는 본디 활동사진을 좋아하는 터에 단성사 신파 활동사진을 요새 가 보니까 참 조선에 처음 되는 것으로 어찌 마음에 상쾌하고 좋은지 모르겠어요.” -애활가(愛活家), 《매일신보》 1919년 10월 31일자 4면. 1919년 10월 《매일신보》의 독자 한 사람이 단성사에서 공개된 조선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김도산, 1919)를 관람한 후, 연쇄극에 삽입된 활동사진에 대한 감격을 신문에 투고했다. 그는 자신을 “애활가(愛活家)”라고 소개했다. 애활가란 ‘활동사진 애호가’를 가리키는 말로, 종로와 본정(本町)을 중심으로 극장이 들어서고 그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구경꾼이 늘어난 1910년대 중후반부터 신문지상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 용어다. 《매일신보》에 투고한 이 애활가는 연극과 영화가 결합한 연쇄극 <의리적 구토>에서 전성기를 지나 저물어가는 신파극의 긴 그림자보다 조선 사람들도 활동사진을 제작할 수 있다는 여명(黎明)을 보았다. 같은 해 12월 어느 날, ‘예술잡지’ 『녹성(綠星)』(편집 겸 발행인 이일해)이 발간되었다. ‘경성 죽첨정 1정목 39’에 발매소를 둔 『녹성』은 원래 문예지로 기획되었지만, 사정상 첫 호는 영화 분야의 재료만 다루었다. 근대 초기의 불안정한 출판 환경 속에서 나온 잡지들이 그렇듯 『녹성』도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는 불운에 처했고, 그러다 보니 『녹성』 창간호는 본의 아니게 ‘애활가’에 의한, ‘애활가’를 위한, ‘애활가’의 잡지가 되었다. 환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여배우를 표지 모델로 내세우고, 제럴딘 파라(Geraldine Farrar), 그레이스 커나드(Grace Cunard), 몰리 말론(Molly Malone)과 에디 폴로(Eddie Polo) 등의 권두 화보를 넣어 만들었지만, 본문 중에는 화보가 거의 없어서, 구경하기 좋아하는 애활가들의 욕구를 만족스럽게 채워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 애활가들을 실컷 울렸던 블루버드 영화사(Blue Bird Photoplay Inc.)의 신파영화 해설부터 “아무리 큰 우수(憂愁)를 안고 있는 우려객(憂慮客), 아무리 사경에 빠진 병자라도 그의 동작에는 큰 소리로 웃지 아니치 못”하는 중절모의 ‘잡후린(雜侯麟, Charlie Chaplin)’ 선생까지 모두 이 한 권의 책 속에 모았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으리라. 대중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물적 기반으로서 극장의 출현이 중요했듯이 그 공간을 향유할 수 있는 관객 집단의 등장 역시 주목할 장면이다. ‘애활가’라고 밝힌 이가 자신의 감상평을 직접 신문에 투고하고 애활가 집단을 겨냥한 잡지가 출간되는 등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초 서울의 분위기는 소박하나마 적극적인 관객층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애활가들은 문명국가에서 온 박래품의 신기함 때문에만 극장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활동사진 그 자체에 매료된 이들이었고, 그러한 스스로를 특별히 ‘애활가’라 칭함으로써 다른 관객과 자신을 구분 지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이라면 『활동사진계(活動寫眞界)』, 『활동화보(活動畵報)』, 『영화세계(映画世界)』와 같은 일본 영화잡지를 보고,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나 더글라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gbanks) 등 외국 배우들의 이름을 곧잘 입에 주어 담으면서 은근히 뽐낼 줄도 알았다. 영화를 보고 비평하며 그 자신의 고급한 취향을 과시하는 애활가. 이런 애활가가 된다는 것은 근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체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1920, 30년대의 잡지에는 애활가가 되려면 그에 앞서 극장에서 지켜야할 예법(禮法)을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마냥 「고급영화팬 되는 비결 십칙(十則)」 1 이나 ‘극장 예법’을 다루는 ‘모던 생활 강좌’ 2 같은 글이 잡지에 실리곤 했다. 조선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과잉의 형식을 설명하고 있는 예법 강의는 그런 매너가 몸에 배어야 ‘고급(high and noble)’한 모던 라이프를 진정 향유할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겼다. 극장을 찾는 자신을 특별히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글이지만, 애활가가 되고 싶은 이들의 귀는 이런 글에도 제법 솔깃했을 듯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애활가의 일은 먼저 신문광고에서 볼 만한 영화를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애활가는 그 영화의 감독과 주연배우, 스틸 컷 등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고 극장을 찾아야 하며, 극장에서 받아보는 프로그램 순서지의 도움 없이도 영화의 플롯이나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영사가 시작되었는데도 불빛을 훔쳐 프로그램을 읽으려 애쓰는 사람은 ‘영화팬’의 기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평소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영화비평을 정독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무릇 애활가라면, 이미 본 영화를 또 보더라도 옆 사람에게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며 프로그램 진행 중에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간혹 박수를 칠 만한 장면에서도 너무 흥분하지 말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그치기 전에 박수를 끝내는 것이 좋다. 프로그램 중간 ‘10분 휴식’ 시간에는 극장의 전속 악단이 음악을 연주해 주는데, 이때는 휴식 시간이므로 연주가 끝났다고 해서 손뼉을 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주악’에 너무 귀를 기울이거나 “헐하게 감격”하지 않는 것이 요점이다. 극장의 스크린 옆에는 유리등을 끼워놓고 호출할 사람의 이름을 적어 신호하는 통고등(通告燈)이 있는데, 여기에 이름이 비치면 전화가 왔거나 일행이 찾는 것이니 조용히 일어나 나가면 된다. 스스로가 활동사진 애호가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고 공공질서를 지켜가면서 조용히 영화를 즐기고 감상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사실 극장 예법을 잡지에서 배운 사람이 조선에서 그의 이상대로 조용하고 우아하게 영화라는 예술을 ‘고급하게’ 감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그려진 극장의 풍경은 무성영화가 상영되는 시대의 극장이 온전히 감상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암시한다. 변사는 때로 영화와 무관하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하고, 자막을 잘못 해설하기도 한다. 그런 변사의 해설에 관객들은 울고 웃고, 때로는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입에 손가락을 넣고 휘파람을 불어대거나 손뼉을 치거나 발을 동동 구르며 관객들이 한바탕 법석을 벌이는 것이다. 영화 상영 중에도 과자를 파는 사람이 객석을 돌아다니고, 전화 온 손님의 이름을 버럭 부르는 직원도 있다(극장의 전화 교환은 다른 관객들의 관람을 위해서 점차 통고등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 자주 정전이 발생하고, 영사가 돌연 중단되는 일도 많다. 어떤 관객은 옆 사람의 입에서 품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에 숨이 막히는 듯 했을 것이다. 냉난방 설비가 충분하지 않은 극장에서는 여름이면 겨우 몇 개의 부채, 겨울이면 화로 몇 점으로 더위와 추위를 견뎌야 했을 것이다. 결국 애활가의 극장 예법이란 극장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노하우, 그런 매너를 갖춘 관객이 되는 법이었다. 1) 스크린 빨-쥐, 『별건곤』 제 29호(1930년 6월), 108~11쪽. 2) 청의아(靑衣兒) 생, 「현대 신사 숙녀로서 알아 둘 모던 생활 강좌」『조광』 1936년 1월호, 222쪽. 상단 그림. 극장 안 풍경 출처: 석영 생, 「서울행진(5) 480석, 5년간 중학생 학비」 《조선일보》 1928년 11월 7일자 3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1. 「극장만담」『별건곤』 제5호(1927년 3월), 94~5쪽. (부분 발췌) 근일에는 극장을 가보면 관객의 변천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장내가 소란치 않은 것이다. 그리고 유년 관객이 적어진 것이니 그것은 입장료가 고가이고 예전과 다른 정도 높은 영화를 해득하기에 어려운 까닭이라 할지 가정에서 감독이 심한 까닭인지는 모르나 비판력이 모자라는 그들에게는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특별히 변한 것은 희소하던 부인석에 남자석 이상으로 매일 만원인 것이다. 노부인, 여염집 부녀, 기생 그리고 여학생들인데 진기한 일은 그중에서 성에 갓 눈뜬 여학생이 반 수 이상을 참렬한 것이다. 그 뿐 아니다. 경악할 인은 ‘키쓰’하는 장면–그 순간에는 반드시 질식할 듯한 외마디 소리가 부인석에서 의례히 돌발한다. 그런데 부인석 중에도 머리 틀어 얹은 젊은 여인들 모여 앉은 곳에서. 이 말은 거짓말인가. 거짓말이 아닌 것은 극장 출입 잦은 이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다. 어쨌든 세상은 변하였다. 극장 간판―이 간판도 수년 전에 비하면 여간 발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늘 보면 그 간판의 그림은 그림으로 보아서는 덜 추하나 그 영화 중에 그 영화 전편을 통하여 제일 주요한 신을 빼놓고 영화 자체에 있어서도 제외하여 버려도 실패가 안될 장면만을 그리는 때가 많은 것이 그 간판, 더욱이 극장 간판의 임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러한 극장 간판 중 좀 미안한 말이지만은 우미관 간판이 좀 천한 느낌이 있다. 그 간판은 입장료를 5전씩 받던 옛날 그 시절과 현재와 별반 차도가 없는 것이 그 관을 위하여 좀 불안하다는 말이다. 극장 내부―근일에는 단성사의 영화막(스크린) 상하좌우의 장치가 예전보담은 색채라든지 구성이 좀 아담한 듯하다. 그리고 조선극장은 옛날과 그리 현격한 변화가 없지만은 그저 추하지는 않다. 우미관도 그저 그러하다. 10분 휴식―10분 휴식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관객의 피로한 뇌를 쉬게 하는 데는 퍽 유효할 것 같다. 그러나 그때에 변사가 나와서 잔소리하고 서있는 것이다. 한마디도 들어서 유리할 데 없는 자기의 회포를 천 명이나 오백 명의 청감을 가진 관객에게 늘어놓아서야 미안치 않은가? 다음번에 갈릴 영화 예고를 한다는 목적이라 하더라도 무대 위에 예고간판을 세워놓고 프로그램지에 적어놓고 또 무슨 필요가 있을까? 물어본다. 그리고 10분 휴식 간에 오케스트라도 있으려니와 무슨 다른 여흥이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경영난인 현금의 극장에 주문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무도나 독창이나 독주나 있었으면 10분 휴식하는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음악―어느 극장이나 오케스트라는 좀 변화가 지체되는 감이 있다. 영화 차환할 때마다 새 곡조로 갈았으면 어떨지. 너무 들어서 도리어 감정을 괴롭게 한다. 그리고 좀 정도를 높였으면 어떨지 물어본다. 변사―변사 제군에 하나 제안한다. 다른 게 아니라 그 ‘하얐다’, ‘하얐었다’가 글 쓰는 데는 모르겠지만 말로 하는 때에 듣는 사람으로서는 어떨지? 처음 극장가는 노인은 대분개할 것이다. 그 조(調)를 고치고 ‘하였습니다’, ‘하였었습니다’ 하면 어른에게나 어린이에게나 퍽 다정하게 들릴 것이다. 더구나 인정극에리오. 그리고 변사계에 한 가지 유행이 있으니 ‘마음자리’라는 말이다. ‘마음자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마음의 돗자리라는 말인지, 마음이 깔고 자는 자리인지 어쨌든 해석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한참 긴장한 장면에 가서 농담(醜談)을 탁 터뜨리는 변사가 있다. 그 변사는 원래, 희극에는 더 우는 조로 하는 이인데 청승맞은 것은 좋으나 너무 그 음성이 청승맞아서 너무 천하게 들린다. 그리고 한 가지 우스운 일이 있으니, 어떤 변사는 한참 자기도취로 “자연의 의지와 우주의 이성이 아–슬프다!” 하니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러한 고상한 문자를 안 써도 능히 할 수 있는데 얼토당토않은 문자를 쓰는 것이 도리어 자기 폭로에 지나지 않을 줄 안다. 그리고 장면이 벌써 지났는데 지난 장면을 가지고 떠들고 섰으니, 그것도 자기 취미지만 관자(觀者)는 그러한 변사를 원치 않을 것이다. 특히 이 점에 생각 좀 하여 주었으면 고맙겠다. 전화―극장에 온 손님에게 전화가 올 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소리를 버럭 질러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당자는 (더구나 여자) 퍽 불쾌할 것이다. 여기에는 완전치는 못하나마 조선극장에서 하는 방식이 좋을 것이다. 스크린 옆 기둥을 뚫고서 유리등을 끼워놓고 그 유리에 부를 사람의 이름을 써놓고 전등으로 신호하는 방식이다. 1-2. 「극장만담」『별건곤』 제6호(1927년 4월), 108~9쪽. (부분 발췌) 모든 것이 구각(舊殼)을 벌어 젖히고 자체로부터 신생물의 싹을 좇는 이 봄에 근일에 각 극장에서는 2, 3년 전에 수입되었던 영화를 다시금 되풀이하고 있으니 여기에 극장경영자의 몰상식을 규시(窺視)할 수 있다. 설령 2, 3년이나 1, 2년 전에 일반 팬에게 호감을 산 영화이어서, 그것을 수십 차라도 되풀이하여도 매야(每夜) 만원의 성황을 이룰 수 있다치더라도―원래 수입되는 서양영화는 대개가 3, 4년 전 혹은 5, 6년 전 심지어 십 년 전 제작된 영화가 (기적적으로 1년 이내에 수입되는 것도 간혹 있지만) 상장되는 것인 그만큼, 먼 과거에 제작된 영화인 터에도 그것을 재삼 상장한대서야 시대 변천에 너무나 몰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영업 편으로 보아서는 유리한 방책이라 하더라도 일반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말이다. 여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새로운 경지를 향하여 움직이는 팬보다도 더 앞서 나아가지 않으며 어느 시기에든지 큰 실패를 맞이하리라. 근일에 영화열이 팽창함에 따라서 팬의 수효도 배전(倍前)으로 증가되어 어느 날이든지 극장은 대만원의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말할 것은 그러한 때에 좌석이 참도 불고(不顧)하고, 그저 공간만 있으면 관객의 눈에 스크린의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더라도 불고하고, 그저 우릿간에 송아지 몰아넣듯이, 막 쓸어 넣는다 하면 너무도, 관객에게 불친절이 지나치지 않는가? 그뿐 아니라 젊은 색시들이 남자의 틈에서 비명을 질러도 그저 쓸어 넣어서 한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하여서야 될 수 있는가? 그러한 까닭에 종차(從次)로는 입장권에 좌석 순차표를 첨부하여서 누구든지 먼저 입장한 이를 제일 좋은 자리에 앉히고 그 다음 순차대로 좌석을 정돈시킨 후 좌석만 차면 문을 닫아버리면 어떨까 하는 것을 참고로 말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관객의 피로를 덜어 주었으면 좋을 줄 안다. 그리고 입장권 매팔구(賣捌口) [필자 주: 판매소] 에는 써 붙이지 않고 내용으로 특등석을 설치하여 놓고 돈을 더 받으니, 이것은 경찰과 무슨 약속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경찰의 허가도 없이 비밀히 하는 일인가? 우리로서는 그 진의를 알 수가 없다. 그이들의 것 무슨 구실이 있다 할지라도 이상에 말한 방법으로 한다면, 특등석도 없어질 것이요, 따라서 그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당하는 창피도 없어질 것이다.(상층 하층을 구별치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변사와 대(對) 관객(특히 남녀 학생과 소년)과의 관계를 말하려 한다. 변사들이 영화대본(설명서)을 보지 않는지, 영화의 내용과는 아주 다른 추담을 베푸는 변사가 많은데, 항용 청소년 혹은 남녀 학생들의 염서(艶書)나 담화에까지 그 추담병이 전염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서 희극변사 최병룡 군(단성사)의 추담 없이도 점잖게 웃기는 그 비결을 좀 배웠으면 어떨지? 그리고 변사의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영화에 역할된 인물의 성명(영어나 기타 외국어에)을 어떤 나라말이든지 발음의 만능인 조선말을 하는 사람이 그대로 못하느냐, 모르면 누구에게든지 물어볼 수 없을까. 예(例)하면, ‘짹크’를 ‘짯구’라니 외국인의 웃음거리를 장만할 필요는 무엇 있는가. 일본 것이 아무리 좋대도 나쁜 것은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2. 강사 스크린·빨-쥐, 「고급영화팬 되는 비결 십칙」『별건곤』 제29호(1930년 6월), 108~11쪽. 현대청년이란 그 언어에 있어 행동에 있어 처신에 있어, 아니 손가락 한 개를 놀리는 데 있어서도 모름지기 고급이어야 한다. 고급! 얼마나 입맛이 당기는 말이냐! high and noble. 존 바리모어(John Barrymore)의 프로필과 같은 noble. 미국이면 마천루 꼭대기와 같은 high. 그러한 것을 집어삼킨 듯한, 자신과 같은 풍도(風度)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점잖으면서도 완미(頑迷)한 구석이 없고 경쾌연미(輕快軟美)하면서도 부경(浮輕)한 맛이 없어야만 소위 고급에 속하는 영광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고급의 시대 철학적 해석은 다음 강의에 미루고 오늘은 제군들 앞에서 영화의 고급팬 되는 비결을 해설하는 영광을 내가 먼저 가지기로 한다. 1 대개 수요일이나 목요일 석간신문에는 각 영화관의 사진 교체 광고가 다투어 난다. 제군이 고급영화팬이 되려면 먼저 그러한 광고 가운데서 한번 감상할 가치가 있음직한 영화를 선택한 다음에 그 영화의 감독이며 주연배우 등의 이름을 외워두고 사진 내용에 들어가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다소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위연만한 영화이면 봉절하기 전에 신문이나 잡지에서 「시사실에서」란 제(題)로 간단한 비평 비슷한 것이 실리는 법이다. 제군은 무엇보담도 먼저(1면 기사보담도) 그 기사를 통독해 두어야한다. 그러고 보면 제군이 제군의 연인과 더불어 산보를 나왔다가 “차나 한잔 마시려오, 극장엘 가시려오?” 할 때도 그러한 예비식견이 여간 유효한 게 아니다. 더구나 여자들이란 사진이 좋지 못하면 그 사진을 같이 간 사나이가 만들기나 한 것처럼 짜증을 내고 책망을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가령, 이를테면 “이까짓 걸 다 사진이라고 구경 오랬어요! 당신두 참 딱도 하시우!” 혹은 “인젠 두 번두 당신하고 같이 극장에 오진 않을 테야요. 내가 그래 겨우 이 따위 사진을 보러 왔단 말이요……?” 이런 매서운 선고 등이다. 무섭지 않느냐!? 또 설사 이러한 연애, 구애 관계 등의 이득을 도외시하고도 노상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질문에 응하여 시방 아무 영화관에서는 무슨 영화를 상영 중인데 그 영화는 운운, 이렇게 즉석에서 대답할 수 있는 이익이 따르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즉석에서 남의 질문에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일이고 간에 남의 찬탄을 받는 법이다. 또 그리고 만약 제군이 극이나 영화의 기맥에 다소간 통하는 바가 있다면 그 답을 할 때 살짝살짝 첨부 삽입 작용을 하고 보면 효험이 더욱 날 것이 틀림없다. 2 자, 그러면 제군이 광고의 안내로 (혹은 연인이나 친구들의 요청에 응해서든지 상관이 없지만) 이제 영화관의 한 좌석을 차지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때 제군이 가장 먼저 취할 방법 이 무엇일까? 제군은 무엇을 먼저 하여야 할 것인가!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저 변소에 가라는 게다. 우스운 말 같으나 이 변소에 가라는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다음 방책을 세우는 데도 필요한 것이다. 사진관에 들어가 보아서 시작하기까지에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는 변소에 갔다 나와서 유유름름(悠悠凜凜)한 태도로 당하나 통로 같은 데를 거니는 것도 흥이 있다. 이때 태도는 아주 침착하고도 무게 있게 보여야 하나니 하여간 일견지하에 남들이 짐짓 아마 놈이 영화계 명사인가 보다 하고 남에게 경계와 찬미의 탄사가 흐르게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지루해 못 견디어 하는 얼굴로 하품을 하는 것도 남의 주의를 끌기는 하나 이 방법은 도로히 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기가 쉬우니 이 방법을 택할 때는 기미를 잘 보아서 하지 않으면 실패다. 그리고 만약 제군이 사진관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는 사진쯤 상관할 것 없이 자리를 잡아 모자나 외투를 놓아두고는 변소부터 먼저 가야 할 것이다. 이미 시작된 사진일 것 같으면 2, 3분 동안 더 보나 덜 보나 마찬가지다. 그것보다는 변소에 다녀오는 게 더 필요하다. 한 사진이 끝나고 다시 다른 사진이 시작되는 짧은 휴식 시간에 부리나케 변소에 갔다가 황급히 자리에 돌아오는 사람을 많이 보는데 그것은 극히 졸렬한 행동이요, 적어도 고급에 있어서는 물론 사회도덕의 관념에서 말하더라도 그리 칭찬할 바 행동이 못된다. 3 그리고 사진이 시작되기 전에 급해 빠져서 프로그램이나 『위클리』에 쓰인 플롯을 읽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아름답지 못한 일이라. 대관절 영화를 보기 전에 그런 류의 해설을 읽지 않고는 영화의 스토리나 연락을 모른대서야 영화팬으로서 적지 않은 문제라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팬의 자격은 완전히 상실된다고 각오하고 있어도 좋다. 크게 주의할 일이다. 프로그램 같은 것은 집에 돌아가서 눈을 한번 거치면 그만이다. 더구나 기막히는 것은 사진이 시작되어 전등이 꺼진 뒤에도 그 캄캄한 불빛을 훔쳐서 프로그램을 읽으려 애쓰고 있는 친구들이다. 이렇게 되면 비참 우(又) 참담, 실로 언어도단이다. 영화란 원래 그 first scene과 아울러 최초에 나오는 자막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 제작역할을 일별하고는 미소를 띠어서 아래턱을 쓰다듬게쯤 되지 않고는 아직도 고급팬 되기는 멀었다. 그리고 모르는 친구들은 hero와 heroine이 서로 껴안기만 하면 벌써 다 된 줄 알고 일어나서 무엇이 그리 급한지 출구로 우르르 몰려나가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적지 않은 실책인 것이, 영화란 그 뒤에도 사건이 시작되는 수가 있으며, 첫째 last scene을 보지 않고 일어선다는 것은 영화팬으로 용서치 못할 일이다. 어떠한 일이고 첨이 있고 끝이 없는 법은 없다. first scene과 last scene은 영화를 논함에 있어서 반드시 팬들의 입에 오르는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4 그 다음 휴식 시간에 주악(奏樂)이 있을 때는 그것을 들어도 좋고 듣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단지 요점은 주악에 너무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더구나 끝난 뒤에 감격해서 손뼉을 치든지 하고 보면 남의 조소를 받을 우려가 많은 것이니 주의할 일이다. 하여튼 고급영화팬이란 그리 헐하게 감격해서는 견뎌나갈 수 없는 처세술(?)이다. 무엇이고 “정말 우스워 못 보겠네”라든지 “나 원, 기가 막혀 이걸 어떻게 듣고 있어”라든가 “이건 지독한데” 등등의 능청스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늘 머릿속에 명념(銘念)해 두어야 한다. 5 그러면 제군! 영화 중에 돌연히 필름(film)이 끊어질 때는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때는 크리스트와 같은 얼굴을 하고 묵묵히 앉아 있어야 한다. “사진 망했다”, “불 켜라” 하고 노호한다든가 영사실을 힐끗힐끗 들여다보는 것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또 정전이 되었을 때에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다. 그렇다고 너무 생각하는 척 하노라고 눈을 감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면 야단이다. 6 다음 해설자가 쓸데없는 것을 늘어놓는다든지 자막 같은 것을 오역했을 때는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면, 그때는 아주 무서운 얼굴로 해설자가 서있는 편을 노려보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주관적 견지에서 본다면 정의의 열혈이 끓어오르는 지사와 같은 흥분을 느끼게 되어 다시 없이 마음이 쾌(快)한 것이다. 7 자! 제군은 인제 영화를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비평할까가 나머지 문제일 것이라. 스토리는? 시나리오는? 감독은? 배우는? 이렇게 판에 박은 듯한 비평을 한다면 벌써 제군은 고급영화팬이 못된다. 그런 것을 지껄이는 도배(徒輩)를 가리켜 제군은 식소사번(食少事煩) [필자 주: ‘먹을 것은 적고 할 일은 많다’는 뜻.] 의 주문돌이 [필자 주: 미두장 등에서 주문을 대행해주는 브로커.] 라고 비소(鼻笑)하고 있어도 좋다. 그보다는 경구(警句)를 토해야 한다. 한 말로 그 영화를 차 던져야 한다. 기다란 변설(辯舌)을 농(弄)하여 내용의 공허를 폭로시킨다든지 자기의 부족처를 남에게 보이든지 하는 것은 모던 고급팬들의 관여할 바 못된다. 무엇이고 Make believe의 세상이니 말이다. 8 그리고 보면 금세의 고급영화팬 된 자 반드시 이름 있는 영화를 전부 다 보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아니, 보지 않더라도 고급팬으로 통할 수 있다. 그 대신 신문잡지에 실리는 영화비평을 정독해 두었다가 다른 사람들이 왜 안보느냐고 물을 때는 그 비평의 공격 부분만을 외워두어서 “결국 허잘 것 업는 스토리에 좌우된 영화였지 뭐야! 흥, 그까짓 걸 누가 보러간단 말이야” 하고 한마디로 격퇴해 버리면 고만이다. 그러고는 외국 영화잡지 등을 일별해두었다가 “그러나 이번 미국 ○○회사에서 제작하고 있는 △△란 영화만은 나로서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걸! 그것이 건너오기만 하고 보면 억만 사(事)를 제처 놓고도 보러 가겠네만은……”하고는 슬쩍 영화통인 점을 보여서 상대자의 간을 주물러 놓는 것도 속 시원한 노릇 아니냐. 9 복색은 너무 혼란해서는 못 쓴다. 너무 지나치게 화려하다든지 제법(製法)이 별나고 보면 부랑자나 모뽀로 잘못 보이기가 쉬워서 헛되이 명성을 떨어트리게 된다. 영위계구(寧爲鷄口)일지언정 불위우후(不爲牛後) [필자 주: 혹은 ‘영위계구 물위우후(寧爲鷄口勿爲牛後)’.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는 뜻으로 큰 집단의 말석보다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낫다는 의미이다. 줄여서 ‘계구우후’라고도 한다.] 로 맑스·뽀이로 보일지언정 모뽀로 잘못 보여서 쓸까보냐다. 또 그러고 촬영감독이나 카메라맨으로 보여서도 안 된다. 고급영화팬은 촬영소 인종들과 혼동되는 것을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피해야 한다. 비평가 부류의 인종하고도 혼동이 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촬영소 인종들을 자본가의 영리한 주구(走狗)로 보아 경멸하고 비평가를 기생충이나 어용 매문업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고 영화잡지 같은 것은 외국 것이면 몰라도 절대로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 요컨대 고급영화팬은 시네아스트의 긍지를 가지고 스넙 [필자 주: snob] 하면서 우울하여야 하고, 경멸할 줄을 알고 천학박식(淺學博識)이어야 하며, 또한 교묘한 궤변가여야 하며, 기타 여러 가지여야 한다. 10 끝으로 한 가지 부언해 둘 것은 요사이 유행 영화인 토키(talkie)에 대한 것인데, 우리 고급영화팬들은 그것이 사운드·픽처이면 상관이 없지만 불행히도 토킹·픽처일 때는 근신을 해야 한다. 하고(何故) 하면 제군이 뛰어난 어학자이거나 기막힌 즉흥시인이 아닌 이상 동반자(예컨대, 군들의 연인)의 질문에 응하지 못하여 천추에 회한을 남길 염려가 없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노니 고급영화팬은 광범 심원한 지식과 교양을 요하는 것은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덮어놓고 경이원지(敬而遠之)하고 그 대신 매멸(罵蔑)하는 것을 유일한 Motto요, 철학이요, 전술로 알고 굳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의 창립 40주년 기념 공연작 < 이국정원 >을 볼 기회가 있었다. 무대에 1958년 한홍합작 영화 <이국정원>의 화면이 보이고 배우들이 이 화면에 맞춰 더빙하는 모습을 재연하는 공연이었다. 재치로 좌중을 쥐락펴락하는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와 노래도 탁월했고 연주자들의 유려한 음악도 근사했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현장에서 영화 속 소리들을 만들어내는 폴리디렉터의 활약이었다. 후시녹음이 일반적이던 시기, 성우와 음향효과맨이 스크린을 보며 녹음하던 심야의 녹음실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물론 배우의 입 모양조차 잘 보이지 않는 너덜해진 러시필름도 아니고 밤샘 녹음 중 피워대던 담배로 연기 자욱한 공간은 아니지만, 말로만 듣던 영화의 마지막 공정을 대면하는 일은 근사했다. 심재훈 음향감독의 2009년 구술 내용을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음향감독의 길로 들어서다 심재훈 선생은 연극으로 시작해 영화, 방송을 넘나들며 활동한 음향감독이다. 192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고 경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7년 육촌인 유치진 선생의 다급한 부탁으로 극협의 연극 <자명고>의 음향을 맡으며 그의 음향 인생이 시작되었다. <마의 태자>(유치진), <뇌우>(유치진), <햄릿>(이해랑), <처용의 노래>(유치진) 등에 참여하며 1950년대 후반까지 극협(신협)의 음향감독으로 활동했다. 공연한 작품들, 피난지 대구에서 셰익스피어의 번역극으로 대성공을 거둔 이야기, 동인제로 수입을 배분하던 운영 방식 등 극협(신협)의 역사 또한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영화음향으로 활동의 폭을 넓힌 때는 1950년대 중후반 영화 제작 편수가 늘기 시작할 무렵이다. 영화음향 일 또한 신상옥 감독의 추천과 이강천 감독의 부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첫 영화는 < 격퇴(우리는 이렇게 싸웠다) >(이강천, 1956)로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투 장면이 많은 작품이었다. 총소리를 종류별로 나눈 뒤 각각의 숫자를 세고 그 숫자만큼의 소리를 녹음하고, 고개 숙이는 군인들 위로 떨어지는 모래 소리까지 세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믹싱 과정에서 모래 소리는 잘려 나갔다. 포탄 때문에 떨어지는 모래를 피하는 군인의 행동이라는 인과관계를 설명해주는 소리였지만 아쉽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감독의 과욕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 초설 >( 김기영, 1958)에는 불도저가 판자촌을 부수고 사람들이 울부짖는 장면이 있는데, 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꼼꼼한 성격의 김기영 감독은 화면에 보이는 모든 장면의 소리를 만들어 넣기를 원했다. 결국 여러 소리가 겹쳐져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장면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쌓아올린 열정의 기록 그는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음향은 현실감을 만들어내는 분석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이라 피력했다. 1950년대 음향 디스크가 없어 연극에 필요한 폭파음을 내기 위해 마그네슘 전선을 이어 터뜨리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녹음실에 마이크가 하나밖에 없어 성우와 같은 마이크를 사용해야 했고, 필름 값이 비싸 사운드필름을 반으로 잘라 쓰며 오직 두 번의 녹음 기회밖에 없는 긴장 속에서 일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단련된 음향전문가인 그는 연극과 영화뿐 아니라 방송에도 필요한 전문 인력이 되었다. 1960년대 민간 방송사들이 개국할 때 모두들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1961년 MBC라디오방송국에 들어갔지만 음향에 대한 방송국 측의 인식 부족으로 퇴사하고 신필름 전속으로 서울과 안양의 녹음실을 오가며 일하다 1963년 개국한 동아방송에 입사해 라디오방송의 음향감독으로 활동한다. 물론 입사 뒤에도 안양, 정릉, 만리동, 청맥 등 영화녹음실을 다니며 영화음향 또한 맡아 했다. 영화 더빙은 낮 시간에 방송국에서 일하는 성우들의 스케줄을 고려해 주로 야간에 이뤄졌기에 가능했다. 그간 쌓아온 실력은 동아방송국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영화는 화면이라는 기준이 있고 특히 합작으로 만들어진 홍콩, 대만 무협활극영화의 음향을 넣을 때는 홍콩이나 대만에서 녹음된 소리를 기준으로 작업해야 했기 때문에 구술자의 분석과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적었다. 그는 무협영화에서 무겁고 둔탁한 칼 소리를 넣은 것을 아직까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라디오방송은 영상이라는 기준 없이 오로지 소리로만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기에 구술자의 능력이 더 많이 발휘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바로 동아방송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제2차 세계대전>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73년 제1회 대한민국방송상 제작지원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75년부터 2007년 은퇴하기까지 방송음향에만 전념한다. 그의 구술이 독특한 점은 소리를 설명하다보니 다양한 의성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성어에는 해당 소리에 대한 그의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다그덩” 닫히는 문소리를 좀 더 세련된 “찰카닥” 때로는 “통” 하는 소리로 다양화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찰카닥” 하는 문소리가 “다그덩” 보다 더 세련됐다는 맥락이 언급되지만 구술자가 내는 소리 자체에 이미 소리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다. 1960,70년대 홍콩 대만 활극영화 속의 “자앙 자앙 장” “타앙 타앙 탕” 하는 칼소리에도 이미 대장간 소리라 질색하는 그의 평가가 담겨 있다. 구술에 대한 연구와 채록이 지속될수록 구술채록문 즉 활자를 중심으로 한 재현과 분석의 한계를 언급하는 주장이 제기되는데 소리가 특히 중요한 그의 구술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듯하다. 음향을 매개로 연극, 영화, 방송이라는 매체의 역사를 넘나드는 그의 구술은 중요한 사적 자료가 될 뿐 아니라 말과 소리라는 구술의 본질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흥미롭다.
한국전쟁 이후에 한국전쟁은 어떻게 기록되어야 할까? 영화는 처음에는 그렇게 물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가야만 했다. 그런 다음에는 한국전쟁은 어떻게 경험되는가, 라고 질문을 바꾸었다. 전쟁의 시간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한국전쟁을 장르영화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아마 그 자리에 < 태극기 휘날리며 >가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북한은 한국영화에서 신비로운 타자가 되었다. 추운 나라에서 따뜻한 남쪽 나라로 온 사람들은 할리우드 SF영화에서 나타난 ‘인간의 마음을 가진’ (포스트모던) 사이보그들처럼 보였다. 주체의 분열. 아니, 차라리 환자라고 부르고 싶은 증후들의 집합. 여기엔 무언가 우리가 합류할 수 없는 접근불가능이라는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논점을 놓치면 안 된다. 한국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전쟁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이차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적인 정치적 역학들. 아직도 베일에 싸인 배경. 그 대신 여기서는 전쟁 이후의 생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지금 프리모 레비를 떠올리고 있다. 여기에는 생명과 증언이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었고 그런 다음 다시 살아남았다. 구태여 다시, 라는 말을 쓴 것은 그 사이에 놓인 해방 직후의 좌우익 대립을 셈에 포함시킨 것이다. 역사의 자기 파괴적인 변증법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을 레비는 가라앉은 사람들이라고 불렀고, 여기서 남은 자들을 구조 받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물론 한국전쟁은 아우슈비츠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이데올로기로 둘로 나뉜 민족은 서로 무자비한 살육을 시작하였다. 기록들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참혹하다. 휴전이 시작된 다음 ‘빨갱이’는 시민권을 박탈당한 자처럼 처리되었다. 단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연좌제라는 법의 새로운 항목으로 그들의 가족들까지 그 범위는 확대되었다. 그들은 범죄자들보다도 더 가혹한 취급을 받았으며, 어쩌면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여기에는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제공되는 어떤 배려도 없이 삶의 공간으로부터 배제되었다. 그들은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했으며,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증언도 금지되었다. 나는 지금 임권택 을 말하는 중이다. 당신에게 다소 양해를 구한 다음 나는 약간 소설처럼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가 꾸며낸 이야기는 아니다. 임권택 감독님과 처음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이어진 긴 인터뷰를 하면서 < 증언 >에 이르렀을 때 한참을 멈춘 다음 몹시 고통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날이 며칠인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 기나긴 한숨소리는 바로 지금 곁에서 금방이라도 들리는 것만 같다. 이것만은 정말 내가 찍고 싶지 않은 영화였어요. 그 말이 첫 대답이었다. 나는 대답을 위해서 알리바이를 덧붙일 생각이 없으며 상황을 감상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영화진흥위원회인) 영화진흥공사는 1973년 4월 표면적으로는 ‘한국영화의 육성과 발전’을 위한 영화제작에 나섰지만 내용은 국책에 따른 반공영화 제작이었다. 국방부가 이를 후원했으며 사단병력과 화력장비를 동원하여 전쟁장면을 무제한으로 찍을 수 있는 조건이 주어졌지만 영화진흥공사로부터 허락받은 시나리오로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 거절하면 되지 않나요?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당신은 그때 막 유신정권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정부기관들은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는 것은 ‘반국가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여서 신고의 대상이 되었다. 임권택에게는 이중의 난관이 있었다. 하나는 이미 그 자신이 부모님의 빨치산 경력으로 인한 연좌제 보호관리 대상의 가족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단지 부모님만이 아니라 외가쪽의 친척들이 해방 직후 좌익 활동에 대부분 포함되었으며 그 중에 일부는 한국전쟁 동안 입산을 해서 빨치산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대구 교도소에서 총살을 당했고, 또 일부는 그 이후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실종되었다. 어떤 이는 ‘조선 인민공화국 해방군’이 후퇴를 할 때 함께 북에 올라갔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의 말로는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도 하지만 더는 안부를 알 수 없었다. 1973년은 전쟁이 휴전한 지 고작 20년밖에 흐르지 않은 다음의 일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 다른 하나는 그 자신에게 내면적인 고문이었다. 임권택이 제안 받은 영화는 한국전쟁에 관한 반공영화였다. 물론 임권택만이 그런 제안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만희 는 < 들국화는 피었는데 >를, 그리고 김수용 은 <전쟁의 얼굴>을 만들어야 했다. 어떤 의미. 1973년에 이르러 임권택은 긴 시간 동안 사극, ‘다찌마와리’ 영화, 만주 웨스턴, ‘나미다’ 멜로드라마, 홈 코미디, 첩보영화, 무국적 무협활극을 찍었으면서도 이만희, 그리고 김수용의 반열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임권택 자신의 말을 빌리면 “내가 비로소 영화감독이라는 책임을 갖고 만들고 싶었던” 영화, 그때 막 단 한 편 < 잡초 >를 연출했을 뿐이었던 그 해였다. 하지만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임권택에게 곤궁이 되었다. 자신이 국책의 도구가 되어 본의 아니게 부모의 선택을 비판하는 자리에 불려가게 된 꼴이 되었다. “내가 부모님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욕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임권택은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자리에 불려갔다. “영진공 사장이 보자고 불러서 갔죠. 처음에는 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생판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사장 옆에 앉아서 나한테 그러는 거예요. 그때는 공사 안에서 후반 작업들을 했기 때문에 직원들을 다 아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그 옆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나한테 오래 전에 나도 잊어버린 친척 이름을 대면서 그 사람 본 적이 있느냐는 거예요, 그 친척이 한국 전쟁 때 산에 올라간 분이거든요. 그러면 도리가 없는 거예요” 완전한 수동성 안에서의 최소의 능동적인 선택. 그는 하여튼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는 어떤 합리적인 논의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해야만 한다. 역사에서 칼을 배제하고 그것을 다루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칼을 손에 든 그 앞에 자신의 부모의 삶과 시간이 놓여있다. 나는 여기서 과도하게 정신분석에 기댄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임권택 의 트라우마. 임권택의 증후. 임권택의 오이디푸스. 임권택의 안티고네. 임권택의 늑대인간, 임권택의 억압. 임권택의 불안. 임권택의 대상-원인. 임권택의 (...) 등등. 대신 이때 임권택은 어느 자리에 놓여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다. 다시 배치라는 문제. 말하자면 영화의 실행 안에서의 푸념 섞인, 때로는 불안에 가득 찬, 그래서 종종 자포자기해버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끝까지 그 자리를 향해 이동하면서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내는 시네마틱한 역량의 위상기하학. 그 안에서 숨겨있을지도 모르는 예술의 조그만 힘은 어디로 이동하고 역사의 이면에 있던 개인의 작은 단위들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척하면서 어떻게 완만한 경사를 그리는가. 나는 약간 이 영화에 전략적으로 다가서고 싶다. 그 안의 불안정성. 몹시 위험한 말이지만 (대부분 버림받은) 1970년대 한국영화에 내가 매혹되는 순간은 과도할 정도로 요구되는 검열의 방어 속에서 그 틈 사이로 들어가 각자의 전략을 수행하는 내내 어쩔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그 불안정한 상태를 발견할 때이다. 그때 무언가 부서지고 있다. 나는 그걸 바라보면서 봉쇄 안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창조로서의 불안정성을 생각한다. 스피노자를 흉내 내서 설명하고 싶다. 거미처럼 칭칭 동여매고 감싸 안을 수 없을 때, 독수리처럼 날아올라 내려다볼 수 없을 때, 두더지처럼 그 아래로 파고 들어가고, 그래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밑바닥을 뒤흔들기 시작해야 한다. 그게 거의 무의미할 지라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자기가 실존할 자리의 확보를 위한 안간힘.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살아가기. 거기에서 우리가 보는 자기 삶에 대한 제작자로서의 역량. 이를테면 김기영 의 < 흙 >. 유현목 의 <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 김수용 의 < 웃음소리 >, 이만희 의 < 04:00 -1950- >. 아마 임권택도 그런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몹시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화의 제목은 < 증언 >으로 결정되었다. 임권택은 이 영화 안에서 아무 것도 증언해서는 안 되는 자리에서 김강윤 이 각본을 쓴 이야기를 진행해야만 했다. 그는 거기에 아무 것도 더하려고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재현(해야만)하는 자리에 있었다. 이 곤궁은 우리에게 예상했던 것보다 사태를 훨씬 불안하게 만든다. 아무 결정도 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영화를 수행해야만 한다. 수행의 역설.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하지만 당신은 해야만 합니다. <증언>은 단순한 역설에 대한 증언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따라가는 것은 영화에서 삶이 어떻게 통합되고 그 안에서 주체가 어떻게 분열되며 다시 그 안에서 고난이 어떻게 그 수행을 기록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시선과 광경 사이의 교차. 우리들의 관람과 영화의 광경. 물론 <증언>의 주인이 임권택이라는 식으로 등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비평의 수사학 안에서 그런 식의 순진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도식적인 작가주의 관점을 버린 지 오래이다. 임권택은 그 영화 안의, (그런 다음 다시) 그 중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증언>에서 이야기의 문자를 재현시키는 일을 수행해야할 임무를 지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임권택이다. 그것이 감독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상황을 조금도 과장하지 않았고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내 말의 핵심은 바로 여기서 이 상황을 일반론으로 환원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영화는 언제나 특수한 조건이며 일회적인 상황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언제나 이미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사건 안에서 모두 살아야 한다. 그 자리가 배우이건, 촬영이건, 조명이건, 프로듀서이건, 영화감독이건, 모두 마찬가지이다. 임권택은 <증언>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박순아 장욱 소위 < 증언 >은 임권택 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산산조각 난 영화이다. 이 말이 적절치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의 전체가 있었는데 그게 어딘가에 부딪쳐 마치 실수를 해서 떨어트린 거울처럼 깨져버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총체적인 관점? 거기서 참조할 대상이 사라져버렸다는 그 시대의 불행? 그 어떤 요구에 대한 어떤 두려움? 어떤, 어떤, 어떤, 대답할 수 없는 어떤, 이라는 지칭.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그런 것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증언>을 보는 내내 그게 한 편의 영화라는 내재적인 자기규정 말고는 마치 서로 다른 층위의 순간들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처럼 제각각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게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첫 인상이었다. 임권택은 영화에서 고전적인 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출의 계보에 속하는 방법의 자장 안에 있다. 언제나 그러했다. 하지만 그 어떤 영화도 이보다 더 동선이 반복해서 수없이 끊겨나가면서 마치 매번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경우는 다른 영화에서 본 적이 없다. 그게 검열 때문은 아니며 미학적인 이유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이걸 각본의 실패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게 보인다. 이 시나리오는 기능적으로 쓰여 졌다. 여기서 기능적이라는 표현은 제작에서의 역할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김강윤 은 <증언>의 제작 방법을 염두에 두고 연출의 입장에서 쓴 것이 분명해 보이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최소의 이야기.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전쟁을 도발하고 그날 정오 무렵 박순아의 연인인 17연대 장욱 소위는 잠시 데이트를 하다가 재빨리 귀대한다. 서울은 함락되고 한강다리를 건넌 박순아는 피난을 가면서 전쟁의 수많은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영화는 그 수많은 참상의 씬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심지어 이 영화는 줄거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좀 더 편리한 서술 장치는 끊임없이 개입하는 박순아의 설명(voice_over_narration)이다. 이 설명은 근본적으로는 <증언>에서 (이제는 사라진) 대한뉴스와 같은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상황을 설명하고 (주인공을 대신해서) 선과 악을 구별한 다음 평가를 내리고 때로는 신의 시점에서 전쟁에 대한 훗날의 역사적 평가까지 내린다. 종잡을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 그걸 이용해서 임권택은 때로 재빨리 전체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하고(master_shot) 갑자기 시간을 옮겨가거나 조건이 바뀌었을 때 보충을 하고(transitional shot) 그런 다음 다루기 까다로운 경험에 대한 감정적인 설명을 한다. 화면 바깥의 목소리는 때로 이 영화의 시제를 모호하게 만든다. 가장 쉬운 방법, 그만큼 나쁜 모델. 나는 여기서 간단하게 평가에로 달려가는 대신 잠시 머물면서 질문하고 싶다. <증언>을 보고 있으면 명백히 순서대로 찍지 않았고(못했고?) 그 해 여름 영화 현장에 도착하는 군부대의 조건에 맞춰 촬영이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 거의 모든 장면에는 대규모 군부대가 이동하고 있고 여러 장소를 이동하면서 찍었기 때문에 (아마도) 인근부대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시나리오는 큰 규모의 전쟁장면과 최소의 출연진으로 이루어진 배우들로 찍을 수 있는 소규모의 장면들이 번갈아 오가도록 이루어져 있다. 또한 그 중의 일부가 빠진다고 해서,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장면을 찍지 못했다 할지라도, 전체 구성에서 문제를 만들지 않는 진행을 염두에 두고 씬을 배치하였다. 물론 각자의 시퀀스 안에서 진행되는 유기적인 쇼트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아무 문제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과장될 정도로 이 영화는 시퀀스 단위로 나뉘어져 있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퀀스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진행될 때 여기서는 단지 사건의 조각난 단위가 아니라 경험의 파편이라는 내면의 붕괴에로 이끌린다. 이건 예기치 않은 재난이거나 아니면 이미 각오한 희생일 것이다.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증언>은 재난이거나 희생이다. 후렴구처럼 반복해보고 싶다. 재난이거나 희생. 어떤 피난처도 없을 때 맞이해야 하는 상황 앞에 서서 고스란히 느껴보는 고통. 영화가 시작할 때 정확하게 거기서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도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시계가 가리키면 포성이 울리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포를 쏘는 장면이 연달아 보여진다. 무료할 만큼 반복되는 쇼트. 아무런 긴장도 없는 쇼트의 연속. 우리는 이미 이 영화가 한국전쟁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게다가 이 전쟁은 북한이 시작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대포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장면은 대포가 포격을 하는 쇼트는 있지만 이 대포를 누가 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똑같은 의미에서 그 대포가 목표로 하는 대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시퀀스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 이외의 어떤 진술도 없다. 내가 여기서 읽어내고 싶은 것은 전쟁이라는 사건과의 사이의 거리이다. 그때 느껴보는 공포는 이 영화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1973년의 구호를 떠올려야 한다. “잊지 말자 6.25, 쳐부수자 공산당” 교실에서 아이들은 매일같이 이 구호와 함께 생활했다. < 증언 >은 만들어지고 난 다음 모든 학교의 학생들에게 의무 관람을 시켰다. 이때 <증언>은 한국전쟁에 대한 공포를 전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여기에 전혀 반대의 두 종류의 관람객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물론 한국전쟁을 본 적이 없는 전후 세대이며 다른 하나는 그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세대이다. 이때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고작해야 이제 막 스무 살이 넘었을 때였다는 점을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공교롭게도 어른들과 아이들로 정확하게 그 경험의 여부를 나눈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 사회 안의 절대적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경험. 그들은 그 경험을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경험? 그러나 전쟁이란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경험을 소유하는 것이다. 각자의 피난. 각자의 생존. 그 경험에 보편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이 가르치려고 한 것은 공포가 아니었을까. 이때 영화는 무엇을 증언해야 할까. 이야기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참 좋은 때로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새벽의 포격 시퀀스에 이어지는 장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필요 이상으로 평화로운 일요일을 보내고 있는 서울의 풍경이다. 주인공 순아가 하숙을 하는 집주인 아줌마( 황정순 )가 그걸 바라보며 한 마디 거든다. “참 좋은 때로구나” 좋은 때. 참 좋은 때. 그날 전쟁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 날이 좋은 때라는 것은 한국근대사 안에서 얼토당토않은 표현이다. 해방직후 대한민국과 조선 인민공화국은 각자의 방식의 권력투쟁에 몰두하면서 한 쪽은 무자비한 숙청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미군정 아래 좌우익의 대립이 피비린내 나게 이어지고 있었다. 좀 더 간단한 설명이 있다. 거의 같은 시기를 다룬 임권택 의 두 편의 영화 < 증언 >의 도입부와 < 깃발 없는 기수 >를 비교하면 된다. 전력의 대부분을 신의주 수력 발전소에 의지하던 한반도에서 해방 직후 북한은 남한에 공급을 중단했으며 경제적으로 남한은 북한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에 놓인 상태였다. 모든 것이 뒤숭숭하던 시절. 그냥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일요일은 참 화창했다. 그날 동대문 운동장에서는 야구경기가 있었고, 서울 시민들은 뚝섬에 나가 한가로운 한강에서 초여름 바람을 맞이하였다. 물론 그날 열일곱 살 임권택은 고향인 전라남도 장성에 있었고 이 모든 풍경은 시나리오를 쓴 김강윤 의 기억일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랐고 그날 서울에 있었다. <증언>에 얼마만큼의 역사적 고증과 그 시간을 경험한 사람들의 (객관적) 기록이 담겨있는 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건 이 글의 성격을 훨씬 넘는 작업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임권택의 ‘증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임권택의 ‘증언’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 태백산맥 >으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 영화로부터 30년 후의 이야기이다. 시민들이 휴일을 ‘즐기고’ 있는 동안 전쟁이 시작된다. 25일에 휴전선을 넘은 다음 북한군의 탱크는 이틀 후인 27일 미아리고개에 나타났다. 서울 시민들은 그제야 피난을 준비했고 (이승만 정부는 휴전선에서 ‘괴뢰군’을 격퇴시키고 있다고 방송을 했다) 28일 새벽 2시 30분 북한군의 남침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국군은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이승만 자신은 이미 피난 간 다음에도 서울을 “시민들과 함께 死守하겠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 작전은 후일 효과가 없었으며 피난민들만 서울에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판결에 따라 폭파 명령을 시행한 책임자 최창식 대령이 9월 21일 사형을 당했다. 영화 <증언>은 사형 판결을 다루지 않지만 최창식 대령을 둘러싼 한강다리 폭파에 대해서 주인공 순아를 버려두고 긴박하게 오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피난민 대열에 섞인 순아는 이 결정을 알지 못하며 순아의 애인인 장욱 소위는 (마찬가지로 그 결정을 알지 못한 채) 그 다리를 지키기 위해 남아있던 마지막 소대의 지휘관이다. 그리고 이 다리 폭파장면을 위해서 전조명 촬영감독은 일본 특수촬영 팀과 (그 당시 한국영화로서는 드물게) 미니어처 촬영을 별도로 하였다. (<증언>의 촬영감독은 서정민 이다) 지금 보면 이 장면은 매우 조악해서 전쟁장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본 괴수물의 세트처럼 보인다. 내 설명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이 장면은 공을 들였지만 효과적이지 않으며 기술적 수준 때문에 이야기 전체가 패배와 살육으로 가득 찬 이 영화의 무드에도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스펙터클로 보인다.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아직 디지털 특수효과가 도착하지 않았다. 게다가 (운이 나쁘게도) 그때 할리우드 영화는 < 에어포트 >를 시작으로 재난영화(panic films) 장르의 붐이 막 시작되고 있었으며 < 포세이돈 어드벤처 >, < 대지진 >, < 타워링 >으로 이어지는 영화들이 제작되고 있었고 이 영화들은 <증언> 맞은 편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어쩌면 <증언> 제작진은 이 영화를 전쟁영화이면서 동시에 재난영화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약간 바보같이 반문하고 싶다. 만일 그렇게 되면 여기서 한국전쟁에 대한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때 <증언>이 요구하는 진실의 효과는 무엇일까. <증언>의 메시지는 이 영화를 국책영화라고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과 달리 모호한 구석이 사방에 출몰하기 시작한다. 한강 다리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 증언 >은 전체적인 균형을 무시하고 긴 시간 동안 여기서 시간을 보낸다. 전체 상영시간 1시간 55분 중 한강다리가 끊어지는 순간은 30분 55초에 이르러서이다. 수많은 전쟁장면이 뒤에 기다리고 있으며, 게다가 한강다리 폭파장면에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 이것은 실패한 작전이며 여기서 피난을 가던 서울 시민들은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한밤중에 강을 건너다 죽음을 당했다. 이 장면에서 순아가 죽음을 맞이하면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시퀀스 전체는 순아의 동선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증언>은 한강다리 폭파 시퀀스를 전체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다리 폭파를 결정하는 장교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영화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음울하게 마치 저승에서 들리는 것만 같은 이승만의 목소리가 서울을 빠져나갈 때까지 여기저기 화면에 울려 퍼진다. 아마도 잡음과 함께 뒤섞인 소리들은 오래 전의 라디오 방송에서 가져온 테이프에서 고스란히 시간이 묻어나오기 때문이겠지만 반대로 <증언>에서 이 순간의 역사적인 실재는 오로지 이 목소리뿐이다. 시간의 결.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목소리는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라는 실재와 대면하는 인공적인 이미지로서의 영화. 게다가 이 장면은 밤에 진행되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기술적인 약점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실재와 외양, 경험과 풍문, 역사적인 증언과 인공적인 스펙터클, 영화와 라디오, 그리고 영화라는 훈련에 동원된 군대와 대본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들이 뒤섞여서 만들어내는 광경이 펼쳐진다. 광경? 그렇다. 이상하게도 서로 쌍을 이루면서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처음부터 끝까지 좁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보는 것은 그 둘 사이의 광경이다. 이를테면 피난민을 연기하는 엑스트라들의 무리와 진군하는 국군들이 교차하는 사이에서 김진규 와 엄앵란 이 마이크를 들고 군인들을 독려하는 웅변과 그들 곁에서 노래를 부르는 부인회의 모습은 얼마나 기괴한가.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지금 상황이 자신들과 상관없다는 듯이 한가롭게 위문공연을 하고 있는 중이다. < 증언 >은 그런 다음 순아가 한강을 도강해서 피난민 틈에 끼어, 때로는 남침하는 북한군 무리들과 함께, 그리고 위험한 순간마다 국군을 만나 구조를 받으면서, 낙동강을 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연인인 장욱 소위를 찾고 있으며, 장욱 소위는 그녀와는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와서 서울 수복을 하는 그 순간 시청 앞 광장에서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경례를 한다. 그 사이에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등장하고 그녀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죽음으로 퇴장을 한다. 그때마다 그 증인으로 순아는 매번 그들의 시신 곁에서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역할을 떠맡는다. 순아가 그걸 지켜볼 때 비분강개한 목소리가(voice_over_narration) 나타나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 그 목소리가 이상한 것은 그 주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순아가 그 증인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또 다른 증인이 어디선가 숨어 있다가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우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시간적으로 지금 화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탈구된 상태로, 그 목소리는 자율적으로 화면을 향해서 중계방송 하듯이 진행된다. 그러나 이것은 ‘證言’이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지금 눈 앞에서 전개되는 이미지가 일종의 주관적 착시라고 설명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조차 이 목소리는 우리들의 감정을 통제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원래 이 목소리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바라보는 우리들을 차갑게 만든다. 물론 이런 상황에 대해서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오작동을 일으킨 경우이다. 혹은 정확하고 올바르게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의 의도를 배신하고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목소리의 미학적인 차원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와 약간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장면보다 목소리가 먼저 울 때 슬픈 감정을 느껴보는 대신 자기의 기회를 빼앗긴 관객은 슬픈 영화를 쳐다보기 시작한다는 고전적인 시나리오 이론이다. 나는 단순하게 서투른 작법에 대해서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걸 반대 방향으로 생각해보길 제안하고 싶다. 이 순간과 마주할 때 이상하게도 이미지에 목소리가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목소리에 이미지가 설계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물론 이미지를 먼저 보여준 다음 목소리가 뒤따라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목소리는 마치 특이한 환상에 대한 보충설명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특이한 환상? 한국전쟁이라는 환상. 우리는 지금 이 전쟁이 순아의 피난길을 따라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그녀 앞에 적과 아군이 번갈아 나타나 전쟁을 연기하는 중인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나는 한강다리에서 연출된 이 우스꽝스러운 스펙터클을 본 다음부터 마치 전쟁을 연출하는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 되었다. 요점은 간단하지만 좀 기괴하다. < 증언 >은 곧장 전쟁에 들어가는 것을 한참 망설였다. 전쟁이 시작하고 나서도 한참을 “참 좋은 때”를 보여주는 데 시간을 보낸 다음 다시 한강다리에서 현실적인 감각을 완전히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서 다시 긴 시간을 보낼 뿐만 아니라 구성 자체를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만드는 씬들 사이의 교차가 몇 번이고 이루어진다. 여기서 한강 다리 폭파장면까지는 긴장감이 넘치는 대신 이상할 정도로 지루하고 길게 이어지면서 거의 지칠 만큼 늘려 놓았다. 그런 다음 갑자기 마치 일부 장면이 생략이라도 된 것처럼 순아는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진다. <증언>에는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한국전쟁을 경험적으로 재현하려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오히려 이것이 더 진정한 목표인데)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참 좋은 때”가 무너지고 언제든지 다시 지금 스크린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 같은 한국전쟁의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가능한 재현이다. 아마도 그것이 반공영화들의 목표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기치 않은 오작동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기억하라, 고 요구하는 대신 “참 좋은 때”로부터 시작해서 그 속에 숨어있었을 가능성의 환상으로 밀고 나아가는 방향으로 영화가 진행되기 시작할 때, 그래서 정확하게 그 문턱이라고 불러야 할 한강다리 미니어처의 폭파 장면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갑자기 전쟁은 “참 좋은 때”의 이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참 좋은 때”를 보완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쟁. 당신은 이때가 유신정권이 막 시작되었던 시기라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첫번째 예 두번째 예 이면의 수행성에 대해서 약간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마치 한강 폭파 이후의 장면들이 모두 “참 좋은 때”의 이면의 판본을 연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서로 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무대처럼 서로 연기를 하며 가장(假裝)의 시퀀스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첫 번째 예. 순아는 피난길에 오르면서 예기치 않게 장소위의 부대원이었던 김일병을 만나 함께 남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북한군의 진군 속도가 너무 빨라 그 두 사람을 앞질러서 그만 한밤중에 잠시 몸을 의탁하기 위해 찾아든 곳에 이미 그들이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한밤중에 찾아든 남녀가 자신들의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면서 먼저 받아들인다. 그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김일병은 재빨리 자신을 그들과 같은 북한군으로 위장하면서 자기 고향인 북한말을 쓴다. 여기서 순아와 김일병은 북한군을 자신들을 환대해 줄 상대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가장을 한다. 이때 거짓말은 그들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거의 불가피하게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에는 희미하긴 하지만 환대에 대한 배반이 숨어있다. 그들은 불균등하긴 하지만 각자의 방법으로 환대와 거짓말을 교환한다. 이때 그 둘 사이에 매개가 되는 것은 가장이다. 이것이 전적으로 공포스러운 상황이긴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어떤 아이러니한 익살이 감돈다. 두 번째 예. 추풍령을 넘으면서 북한군은 탱크 앞에 피난민을 내세운 다음 자신들은 그 뒤에 숨어서 지뢰를 피할 계략을 꾸민다. 그런 다음 피난민들에게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뒤에서 총으로 사격을 가할 것이라고 위협한다. 국군은 피난민들 때문에 매복해놓은 지뢰를 폭파시켜야할 지를 망설인다. 피난민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차라리 국군들에게 도움이 되는 편이 낫지 않느냐면서 (그러니 우리들은 북한군의 총알에 죽고 탱크는 국군의 지뢰에 폭파당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전진을 거부하는 이들과 그래도 어쩌면 지뢰를 피해서 요행수로 살 수도 있다는 생존의 가능성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로 나뉘어서 두 편이 서로 다툰다. 영화는 그들이 긴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도 마치 그걸 귀 기울여 듣기라도 하듯 일시적으로 전쟁이 중단된 것처럼 보여준다. 여기서 피난민을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얼룩이라고 설명하면 완전히 논점을 벗어나는 것이다. 상황을 완전히 아이러니하게 만들 수 있다. 피난민들이 두 개의 입장으로 나뉘어서 논쟁을 시작할 때 그 순간 누군가가 갑자기 난 지금부터 공산주의자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희생당하는 대신) 당신들의 탱크에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데올로기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나는 이 영화가 국책영화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다소 가혹하게 말하고 싶다. 여기서는 그들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질문할 때 이 시퀀스가 요구하는 것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 전쟁에서 올바른 역할을 위한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남겨진 것은 역할을 연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두 개의 역할을 동시에 연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예는 다소 까다롭다. 순아는 북한군에게 붙잡힌 다음 장교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취조를 당한다. 자신은 정직한 사람을 좋아한다면서 사실대로 말한다면 당신을 그냥 놓아줄 수도 있다는 제안을 한다. 그는 순아에게 자신이 가방을 뒤지는 대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한다. 이때 순아는 가방 속에 장욱 소위의 사진이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 사진은 발견되고 만다. 북한군 장교는 그 사진을 본 다음 잘 알았다면서 그녀를 그냥 풀어준다. 물론 순아와 또 다른 부녀자가 그들이 주둔하는 집을 떠나 발걸음을 옮기자 멀리서 조준사격을 가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또 다른 부녀자가 죽으면서 순아의 몸을 감싸 안기 때문에 그녀는 살아난다) 물론 여기서 북한군 장교는 처음부터 순아를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단지 이것은 그에게 일종의 게임인 것이다. 그걸 순아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진실을 고백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친절한 요구에 대한 거짓말이라는 대응이 이 씬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여기서 상황을 괄호 친다면 북한장교의 예의바른 제안에 대해서 순아의 거짓말은 무례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풀어준 다음 조준 사격하는 것은 그녀의 거짓말에 대한 벌로 읽힐 수도 있다. 물론 후자는 위장된 거짓 논리이다. 이 시퀀스의 일차적인 목표는 (누구라도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단순하다. 공산당들은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회유를 하며 우리들에게 친절을 베풀지만 그건 모두 거짓말입니다, 라는 경고이다. 하지만 여기엔 까다로운 미끼가 있다. 그냥 총살시키면 되는 상황에서 왜 이런 장면을 연출하게 되었느냐, 는 것이다. 단지 재미를 위해서?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장면이 정말 문제가 되는 상황은 북한군 장교가 오로지 자기의 예의바른 태도를 남한의 숙녀에게 전시하기 위해서 정말로 순아를 살려주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나는 약간 서둘러 방향을 틀어보고 싶다. 네 번째 예에 이 장면과 똑같은 순간이 반대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순아가 남하하다가 북한군들이 국군의 복장을 하고 길목을 지키고 서서 본대로부터 탈영하여 국군에 귀순하려는 북한군들을 기다리다가 총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자 순아는 정말 국군을 만났을 때 마치 자신이 북한군 정훈장교인 것 같은 연기를 한다. 국군을 만난 다음에도 자신이 북한군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여자를 만나자 국군은 순아를 체포하여 본대로 보낸다. 거기서 국군 정보장교가 순아에게 매우 친절푀옇凋응막?전후 사정을 들으면서 충분히 이해했다뇩옇뺐?함께 하지만 그걸 자신들이 믿기 어렵다는 말을 어렵게 꺼내든다. 여기서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순아는 전쟁 중에 체포한 북한 정훈장교이다. 그런데도 정보장교는 예의를 갖추어 (자신보다 어린 그녀에게) 경어를 쓰면서 기꺼이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인다. 만일 여기서 국군 정보장교가 북한군 장교와 똑같은 결정을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친절하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네, 당신 말을 충분히 들었어요. 하지만 믿긴 어렵군요. 게다가 지금은 전쟁 중이고 당신 스스로 자신이 북한군 정훈장교라고 소개한 것 말고는 다른 정보가 없군요. 당신의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고 우리는 후퇴하는 중이니 즉결 사형에 처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사정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자기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순아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국군 소위이자 순아의 연인인 장욱이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여기서 북한군 장교와의 장면에서 < 증언 >에서 사용된 장면을 N(north) 1이라고 하고 가정된 장면을 N 2라고 한 다음 마찬가지로 국군 장교를 만나서 사용된 장면을 S(south) 1이라고 하고 가정된 장면은 S 2라고 부르겠다. 만일 N 2가 사용된 다음 S 2가 대응한다면 그건 북한영화의 버전이 될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N 1이 사용된 다음 S 2가 사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는 몹시 부조리하지만 무언가 균형을 이루었다는 불편한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된다. 이 순간 여기서 한국전쟁을 괄호치고 오로지 주인공 순아가 두 개의 나라 사이에서의 전쟁을 오가면서, 이를테면 여기서 멀리 떨어진 발칸 반도라고 가정하고, 이 상황과 마주쳤다면 순아에게는 가혹한 결정이긴 하지만 영화 자체는 잔인하고 비극적인 방식으로 균형을 잡았다는 인상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난처해지는 것은 N 2가 사용된 다음 S 1이 여기에 대응하는 것이다. 물론 순아에게는 가장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여기서 남한이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두 번째가 아니라 이 네 번째 판본이다. 왜냐하면 이 네 번째 판본에서 북한은 무조건적인 용서라는 방식으로 순아의 실수를 교정한 다음 되돌려 보내지만 남한은 조건을 달고 실수를 교정한 다음 그녀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S 1을 고정시켜놓고 N 1과 N 2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단순하게 한 쪽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S 1이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이 N 1의 흉내를 내면서도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제도 안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N 2를 선택했을 때 가장 난처해지는 설명은 북한군 장교가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훨씬 미묘하게도 순아를 보고 어떤 감정적인 동요를 느낀 나머지 한편으로는 예의바르고 친절한 자세 뒤에 위태롭게 숨어서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에 주어진 임무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살려 보냈다는 멜로드라마적인 해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군 장교는 이 영화에 나오는 어떤 인물보다도, 심지어 순아보다도 더 인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북한군이 국군보다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국책영화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가정을 끌어들이게 된다. 그건 이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사람이라는 명제의 반복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놓았던 경계선은 무너지고 이제 이 전쟁에서 각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전쟁에서 살아가게 된다, 혹은 죽어가게 된다. <증언>은 기묘하게도 매번 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거의 의도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간 다음 진부한 국책영화의 흑백논리로 재빨리 되돌아온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몇 차례이고 임권택 의 전쟁영화, 혹은 국책영화에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때 망설이는 당신의 근심을 알고 있다.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함정 아닌가요.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보려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가, 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무시무시한 기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잠시 멈칫 거리면서, 그것이 의도라기보다는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매번 거기서 우울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마치 영화가 자기가 처해있는 영화 자신의 모습을 쳐다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거기엔 무언가가 추방되어 버렸다. 그저 광경만이 남았다. 단지 황폐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부서진 낮과 꺼져버린 빛 때문에 세상이 거의 지워진 밤. 그리고 낮보다 더 많은 밤. 그 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린 탓일까. 그런데 전쟁이 난 그해 비가 그렇게 내린 것일까, 아니면 촬영을 한 그 해에 내린 비 때문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 이상할 정도로 습도가 높은 화면들. 종종 젖어있는 것만 같은 폐허들. 그때 무엇이 출현하고 있는 것일까. < 증언 >이 거의 부서져가면서 가까스로 이어져갈 때 거기 끼어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고통이나 연민이 이야기 안에 넘쳐나면서도 그걸 영화가 느껴보는 순간이 없다. 나는 지금 유령 가까이 왔음을 느낀다. 이미 지나가버린 영화 안에서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을 기다리듯이 그저 길 잃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 같은 심정.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지금 그 시간을 다시 불러오고 있는 중이다. 두렵지만 이건 나의 사명이다. 그러니 <증언>을 향하여 소리 높여 질문한다. 말하라. 나는 너의 증언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계속) 약간의 첨언. < 증언 >은 판본의 문제가 있다. KMDb에 따르면 <증언>의 상영시간은 2시간 5분이지만 지금 내가 보고 이 글을 쓴 판본은 8분가량이 짧은 1시간 56분 58초이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증언>을 완성한 다음 이 판본에 대해서 제작사였던 영화진흥공사가 몇 가지 보충촬영을 지시했는데 이미 다음 작품을 촬영하고 있어서 그 부분을 제작 프로듀서였던 정진우 감독이 촬영하고 편집했다. 아마도 두 가지 버전 중에서 2시간 5분 버전은 정진우 감독의 보충촬영 추가 편집본일 가능성이 크다. 개봉은 이 버전으로 했을 것이며 현재 영상자료원 소장본은 짧은 임권택 버전(일 것)이다. 정진우 버전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기억하지 못한다. 1973년 125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일영화주식회사 각본 김강윤 촬영 서정민 조명 최의정 편집 김희수 음악 한상기 김창숙 신일용 박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