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
- 감독
- 최하원
- 제작년도
- 1978
- 출연
- 김영애, 한진희, 김희라, 김형자, 양성원, 최무웅, 신찬일, 이백, 김웅, 안진수, 박광진, 김기범, 이승렬, 김지영, 김경란, 강경자, 양일민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야.” 극 초반, 아들인 세자( 유아인 )에게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혐의를 물으며 영조( 송강호 )가 하는 말이다. 이는 < 사도 >의 선언이나 다름없다.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의 비극을, 영조와 사도 세자의 치밀한 인간 심리와 뒤틀린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탐구하겠다는 야심 찬 선언 말이다. 그간 여러 영화와 TV 드라마가 임오화변, 조선 왕실의 가장 비극적 사건을 끊임없이 호출해왔다. 하지만, 아비가 새파랗게 젊은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애증의 우주가 펼쳐졌는지, 그 관계의 복잡·미묘한 속살을 이렇게 인간적으로 해석한 작품은 없었다. < 사도 >는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 숨을 거두기까지 아홉 날을 하루하루 차례로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세자가 태어난 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그려 보인다. 아비와 아들은 원래 서로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숨 쉴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의 고유한 성격과 왕좌의 무게, 당대의 사회?정치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돌이킬 수 없게 돼버린 부자의 현재가 흐르는 가운데, 둘의 다단한 과거를 살펴보는 형식은 인간관계란 우물이 얼마나 그 속을 가늠하기 힘든 것인지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똑같은 장면에서 영조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지금 가장으로서 애비를 죽이려고 한 자식을 처벌하는 것이야.”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이 영화의 영조는 고유한 성격을 지닌 개인인 동시에 조선의 왕이다. 음모와 반정, 파벌 간의 알력이 끊이지 않는 궁중에서 일평생 살며, 임금으로서 자신의 말 한마디, 사소한 모습 하나가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지 누구보다 혹독하게 겪어왔다. 필연적으로 그는 왕좌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까다롭고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은 타고난 성질이자, 궁중에서 살면서 더욱 그러하게 깎인 것이다. 그건 세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총명하고 활동적이며 자유분방한 기질을 타고 태어났다. 그 총명함을 높이 사던 영조가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는 그에게 실망한 뒤로, 영조는 그에게 신경질을 부리듯 수시로 야단을 친다. 이에 피가 마르던 세자는 숨 막히는 궁궐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점점 더 엇나간다. 어떤 사람의 ‘꼴’이 완성되고 그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그의 의지 혹은 개성과, 환경적 요인 혹은 불가항력의 운명이 불가분의 함수 관계를 이루는 기묘한 풍경, ‘사도’는 바로 그 지점을 들여다본다. 한국 궁중 사극에서 그 미묘하고 복잡한 소우주를 이렇게도 또렷하게 포착해낸 작품이 또 있었던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어떠한 이야기든 인간관계라는 상호 작용, 그 미시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안타까움을 그릴 때 빛난다. 그가 연출한 또 다른 사극 < 왕의 남자 >(2005)만 떠올려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준익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조선 연산군 시대, 연산( 정진영 )과 두 광대( 감우성 , 이준기 ) 사이를 오가는 위태롭고도 애절한 감정을 그린다. 그 감정은 동성애 혹은 우애 혹은 애정, 어느 하나의 말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것이다. 오히려, 이준익 감독의 사극은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 집중하는 대신, 그 시대의 초상과 풍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려 할 때 빛을 잃는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이 그러한 경우다. < 사도 >에서 인간의 마음, 그 오묘한 천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제일 요소는 송강호 와 유아인 두 배우의 연기다. 특히, 사도를 뒤주에 가두라는 명령을 내리는 순간,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영조의 얼굴. 거기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군주의 결단과 아비의 회한, 자신의 명령에 신하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피는 예리함,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내다보는 명민함이 전부 어려 있다. 진정 놀라운 연기다. <사도>는 임오화변의 두 인물, 영조와 사도의 ‘개인’으로서 조명하고, 그들의 인간적 관계를 파고듦으로써 역설적으로 시대를 초월하는 일반성을 얻는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지만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애증이라는 감정,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진 인간관계, 강압적인 부모와 그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녀…. 이 영화가 그리는 영조와 사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그 복잡한 질서, 그 영원불멸의 미스터리를 투영하는 거울이 된다. 아쉬운 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개봉 당시 많은 이들이 지적했던 대로, < 사도 >의 결말은 그 전까지 이 영화가 그려 보인, 오묘한 세계를 스스로 쪼그라뜨린다. 영조와 세자의 그 모든 이야기가 사도의 아들이자 영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 소지섭 )를 위한 것이었다는 식의 결말 말이다. 영조와 사도 사이에 얽힌 온갖 감정의 실타래, 그 복합적 의미의 여운을 고스란히 비추는 결말이었다면 어땠을까. 조선 왕조의 가장 비극적인 역사에 인간 감정의 현미경을 들이댄 이 영화가 들여다본 그 넓은 세계에 걸맞은 결말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는 황순원 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이자 최하원 감독의 데뷔작이다. 또한 이 영화는 1960년대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이자 가장 데뷔작다운 데뷔작으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개봉 당시 기사에 의하면 이 영화는 “네임 밸류만을 존중하는 풍토를 박차고 단역에 이르기까지 기성 영화인들을 완전 배제” 1) 한 것에서부터 주목받았다. 또한 “처녀 연출자답지 않은 뛰어난 재능”과 “전체 연기진의 호연 가운데 그들의 개성미를 부각시킨 흑백화면의 효과” 2) 가 놀랍다는 극찬과 함께 “신인군의 의욕과 저력을 보여준 역작” 3) 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다가, 2015년에 발굴되면서 소문에 값하는 영화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모더니즘 영화로서의 의미, 문예영화로서의 위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전쟁으로 파괴된 개인의 내면을 표현한 본격 염전(厭戰) 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제작 신고 단계에서 ‘염전(厭戰), 반전(反戰)이 드러나지 않게 반공영화로 제작하라’는 권고를 받고 반려된다. 이에 영화의 오프닝에 “이 영화는 전쟁을 도발한 북괴에 대한 고발이다. ……”라는 자막을 명시하고, 역시 황순원 소설 원작인 < 카인의 후예 >와 함께 다시 신고하여 수리된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북한군은 나오지 않고 전쟁터에서 비정해져 가는 국군들의 심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내용은 그들이 제대한 이후의 정신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작에서는 전반부가 동호의 이야기로, 후반부는 현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해, 영화에서는 제대한 현태를 주인공으로 하여 제대 후 그의 생활을 주로 보여주는 가운데 그의 기억을 통해 전쟁 당시 동호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전후의 풍경이 나오는 대표적인 영화는 < 오발탄 >( 유현목 , 1961)이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오발탄>은 4.19 덕분에 제작될 수 있었던 행운의 걸작이다. 5.16 이후 한국 사회의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영화에서 그리는 것은 점점 더 규제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유럽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다루는 영화들이 적극적으로 제작되며 전후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거의 나타나지 못했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개인의 내면을 다루는 전후소설은 문예영화 전성기에도 몇 편―< 잉여인간 >, < 까치소리 > 등―만 영화화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이청준 의 「병신과 머저리」를 영화화한 < 시발점 >( 김수용 , 1969)과 같은 영화에서는 한국전쟁 설정을 굳이 중일전쟁으로 치환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냉전으로 인한 분단국가로서 겪은 동족상잔의 상처를 깊이 건드리는 것이 영화의 제재 차원에서나 정치적, 산업적 측면에서나 여러 모로 부담스러운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1968년을 기점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가 한층 강화되며 한국영화에서 우울이나 절망을 그리는 것에 대한 규제 또한 더욱 강화된다. ‘젊은이의 절망은 적을 이롭게 할 수 있으므로 용공(容共)’이라는 논리로 이만희 감독의 < 휴일 >이 상영되지 못한 것도 1968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 미워도 다시 한 번 > < 속 팔도강산 > < 춘향 > 등의 보수적 장르물이 국산영화 흥행의 수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게오르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 25시 >(앙리 베르누이, 1967)가 외국영화 흥행 1위에 오르고, 28살의 클로드 를르슈 감독에게 최연소 칸 그랑프리의 영광을 안긴 < 남과 여 >(1966) 같은 영화가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영감을 던진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이후 유럽 영화를 동경하며 지속적으로 갈구되었던, 참신한 형식으로 현대인의 고뇌를 구현하는 모더니즘 영화가 엘리트 집단에 의해 시도된다. 김승옥 원작의 < 안개 >( 김수용 , 1967), 홍성원 원작의 < 막차로 온 손님들 >( 유현목 , 1967), 이어령 원작의 < 장군의 수염 >( 이성구 , 1968) 등이 그러한 영화들이다.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는 그러한 영화들과 동궤에 놓여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근대화 드라이브 속에서의 현대인의 피로를 그리면서 현실에 대해서는 은유나 우의로 에두르고 있다면,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는 한국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원인과의 관계 속에서 젊은이의 비정과 고민을 묘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과 대면하는 모더니티를 구현한다. 전쟁 중 동호의 결벽성을 혐오하여 그의 순정을 파괴함으로써 그를 자살로 몰아넣은 현태가 제대 후 극도의 자기혐오 속에서 위악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외상의 병리를 드러낸다. 또한 돈에 집착하며 이익만을 추구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는 윤구( 김순철 )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석기( 김성옥 )의 모습은 전후(戰後) 증상의 유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는 전후 사회의 병리를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고, 숙( 문희 )의 결연한 의지와 현태의 속죄에 의해 증상에 대한 치유의 희망이 담보되며 멜로드라마적 비학으로 봉합된다. “이 일을,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숙의 결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 원작보다 더 낙관적인 결말이다. 최하원 감독의 행보로 보건대 이러한 결말에서 나타나는 건전한 윤리와 희망에의 지향은 이후 최하원 영화세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영화보다도 염전(厭戰) 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 영화가 검열을 통과하여 개봉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지향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 이 영화에는 참신한 면모들이 많이 들어 있다. 현태 역을 맡은 이순재 의 연기는 지금 봐도 매우 인상적이며 < 오발탄 >의 김진규 를 잇는 지적 성격배우의 계보에 놓을 만하다. 또한 감각적이면서도 고민이 드러나는 카메라워크는 흑백화면 속에서 오히려 돋보이며, 현태의 심리 묘사에서 사용되는 정묘한 몽타주는 현재의 관점으로 봐도 신선하다. 아울러 지금은 한국의 어머니를 대표하는 배우가 된 손숙 씨가 이 영화로 데뷔했다. 영화 속에서 그녀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1)《경향신문》, 1968.4.13. 2)《신아일보》, 1968.4.13. 3)《대한매일》, 1968.4.16.
김응천 (金應天)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영원한 청춘 감독의 이미지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전혀 늙은 티를 내지 않고 젊음을 유지한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응천은 32년생이다. 그러니까 올해 70 고희인 셈이다. 그 유명한 경기(京畿)출신이다. 요즘은 경기중고등학교가 한 지역의 평준화된 일개 학교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수재들만 모이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교였다. 그러니까 경기를 엄격이 따지자면 평준화 전(前)의 경기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그는 다방면에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고 아는 척 떠벌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김응천은 그러고 보니 작품수에 있어서도 84개 작품을 감독했는데 우리나라에서 1위가 김수용 감독, 2위가 고영남 감독, 3위가 임권택 4위가 김응천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작품 경향을 보면 중고생들을 그리는 하이틴 영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명랑하고 유쾌한 얘기들을 다루고 있다. 음악을 곁들인 빠르고 진취적인 주제가 그가 즐겨 다루는 세계이다. 아마 40대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이 김 감독이 영화 팬들이 되겠다.김 감독은 감독 데뷔를 28세에 했다. ' 영광의 침실 '이 데뷔작 타이틀이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빠른 출세였다. 김 감독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우울한 영화도 미래지향적이고 밝은 세계로 둔갑한다. 그것은 김 감독의 천성이 그렇기에 그런 영화들이 생산되지 않았나 싶다. 김 감독이 함께 일한 배우들을 얼른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떠올리자면 우선 이덕화 가 으뜸으로 떠오른다. 전영록 , 임예진 , 이상아 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청춘영화들을 간단히 훑어보면 ' 푸른 교실 ', ' 모모는 철부지 ', ' 꽃밭에 나비 ', ' 이 다음에 우리는 ', ' 고교 우량아 ', ' 여고 졸업반 ', ' 시집가는 날 ', ' 우리들의 고교시대 ', ' 청춘대학 ', ' 달려라 풍선 ', ' 내 이름은 마야 ', ' 대학얄개 ', '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 ' 스물하나의 비망록 ', ' 춤추는 청춘대학 ', ' 말괄량이 대행진 ', ' 87맨발의 청춘 ', ' 얄숙이의 전성시대 '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다고 김 감독이 청춘영화만 죽어라하고 만든 감독은 아니다. 성인영화도 수두룩하다. ' 지미는 슬프지 않다 ', ' 여인의 종착역 ', ' 진아의 편지 ', ' 목마위의 여자 ', ' 모르는 여인의 종착역 ', '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 ' 애처일기 ' 등등이 있다. 김 감독의 특징은 이른바 제작자를 배려하는 빨리찍기, 필름 아껴쓰기, 초스피드의 촬영 진행은 그로 하여금 제작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면서 흥행감독으로의 위치를 언제나 지키고 있었다. 그의 감독 친구는 본인 조문진 , 문여송 , 석래명 , 황학봉 , 김기 등이 아니었을까. 그중에서도 본인과는 무슨 얘기든 흉금을 떨어놓고 상의를 하곤 했다. 그는 외로운 사나이였다. 조실부모를 하고 형제도 없이 충무로 영화판에서는 비교적 외토리로 지냈다. 안동 김씨인 김 감독은 어릴 적에 부유한 집안에서 넉넉하게 자라온 걸로 안다. 그가 집안의 내력을 얘기할 때 보면 양반 집안에서 꽤나 잘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집안이 망하고 떠돌이처럼 지낸 건 그의 성격 자체를 변경시켰다. 그가 가족이 없으므로 해서 하숙집을 전전했는데 오랜 총각시절을 하숙집을 전전한 기억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새롭다. 김응천 이코르 하숙집 식으로 . 그러다가 마흔 가까운 나이에 부인 김정수 여사와 결혼, 총각의 딱지를 뗄 수 있었다. 그 당시 김 감독의 결혼은 명동 YMCA에서 올렸는데 이 착하고 점잖은 늦깍기 신랑의 결혼식에는 모든 영화인들이 참석 대성황을 이루었다. 부인 김 여사께서 김 감독의 영화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것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만큼 김 여사는 남편의 사업을 돕고 이해했다. 김응천 이 부인의 지원금을 행여 까먹을까봐 전전긍긍했던 걸 나는 기억한다. 좀 손해를 끼친 경우는 응천이 나와 밤새도록 술마시면서 속상해 했다. 그만큼 애처가였던 그였다. 무슨 고민이 있다 하면 나를 불러내 둘이는 맥주를 마셨는데 과묵한 그도 술로만 호소하기엔 역부족이었던지 하로는 날 부르더니 문진아, 이게 마지막 술일세 하고 선언하지 않는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한때 그만큼 폭주를 했던 그였다. 그날 그와 진탕 마셨다. 그후로 그는 단호하게 술을 끊었다. 술을 끊으니 자연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겼다. 그후로 그는 쭉 금주생활을 지켰는데 타계할 때까지 그 신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응천 그 신사 같은 사람도 한번 되게 화내는 걸 볼 수 있었다. 하길종 감독이라고 나하고도 친한 후배 감독 사이의 일이었다. 김 감독이 만든 ' 고교 우량아 '영화를 '뿌리깊은 나무' 잡지에 하길종이 비평을 했는데 그 비평 내용은 '고교 우량아' 영화가 웃긴다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애들 돈을 빨아 먹기 위해 알캉달캉 얍삽하게 만들었는데 어쩌구.......' 이 글을 김 감독이 어떻게 읽은 모양이었다. 인내심 많고 화를 안내는 김 감독이 분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길종 이 묵고 있는 충무로 경화장 여관을 쳐들어 갔다. 편집용 가위를 들고서였다. 방심하고 여관방에 있던 하길종은 불시에 문 열구 쳐들어 오는 김 감독을 피해 신발도 신지 못하고 여관을 뛰쳐 달아났다. 김 감독이 설마 찌르랴 했겠지만 김 감독의 분노를 나는 이해한다. 통상 영화감독끼리는 동업자임으로 해서 여간해서는 비평 안하는 게 예의이다. 그런데 하길종 그 녀석이(하길종이와 내가 친하니까 그 녀석이라고 표현한다)정신이 나갔지 남의 자존심을 그렇게 건드릴 수가 있는가. 하길종이 원래 비평적 독설가인건 사실이지만 영화계의 선배요, 더구나 고교 청춘물 같은 건 본격 비평에서 제외하는 게 상식인데 알캉달캉이라느니 얍삽하다느니 인격적인 모독을 주는 건 하길종이 백번 잘못한 것이었다. 김응천 감독이 무슨 비평을 예상하고 예술 작품입네 하고 거드럭거렸다면 비평의 잣대를 들여댈 수 있었겠지만 그냥 단순한 명랑물이잖은가. 그때 하길종은 그렇잖아도 충무로 영화계에서 마구 휘두르는 비평으로 인해 미운 털이 배긴 마당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하길종과 친했던 나까지 왜 그런 녀석과 사귀느냐고 압력이 심하게 들어오곤 했다. 하길종 은 이후 그를 혼내준다는 감독들이 벼르고 있어 충무로를 걸어다닐 때 조심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 감독이 아프기 시작한 건 10여 년 쯤 전이다. 수서에 살던 그는 우리들과 드문드문 만나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턱에 3개의 빨간 종기가 나서 무심코 낫겠지 했는데 그게 임파선 암, 그런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부인 김 여사으 극진한 간호가 시작되었다. 김 감독의 취미를 살려주기 위해서 김 여사는 컴퓨터 신종 기재에서부터 사진 스캐너니 뭐 아무튼 벼라별 기재를 아낌없이 뒷바라지했다. 남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김 감독이 운명하기 전 우리 친구들이 그의 집에 문병가려 전화하면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노쇄한 몰골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만큼 그는 깨끗한, 어느 면에선 결벽증이랄까. 그러나 난 이해한다. 그의 성격이 그토록 갈끔한데 어쩌랴. 지저분하게 인생에 미련을 남기는 것보다 얼마나 깨끗한가. 2001년 6월 1일 오후 그는 타계했다. 부인 김 여사의 지극한 간호는 부인으로 하여금 이번 감독협회총회에서 아름다운 감독 부인상을 드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응천 감독. 귀하는 깨끗이 인생을 살다간 우리들의 친구였오. 고맙소. 명복을 비오. 조문진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5. 3. 2 1959 < 영광의 침실 > 데뷔 작품명 1959 영광의 침실 1960 감나무골의 임서방 1962 사장딸은 올드 미스 1963 지미는 슬프지 않다 1964 밤에 걸려온 전화 / 눈물의 영도다리 1965 청춘을 변상하라 1966 귀신잡는 해병 / 청춘대학 1969 모르는 여인의 편지 1970 여인의 종착역 1971 3인의 검은 표범 1972 부부교대 1973 천사의 메아리 1974 진아의 편지 1975 애처일기 / 여고졸업반 1976 청춘을 이야기합시다 / 푸른 교실 1977 이 다음에 우리는 / 첫눈이 내리 때 / 고교우량아 / 시집가는 날 / 불타는 소녀 / 미스양의 모험 1978 우리들의 고교시대 / 개선문 / 고교명랑교실 / 제갈 맹순이 1979 목마위의 여자 / 너는 여자 나는 남자 / 꽃받에 나비 / 모모는 철부지 1980 낯선 곳에서 하룻밤 / 달려라 풍선 1981 내 이름은 마야 1982 갈채 / 깨소금과 옥떨매/ 대학얄개 1983 대학신입생 오달자의 봄 /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 스물하나의 비망록 / 대학들개 1984 불타는 신록 / 대학괴짜들 / 밤마다 천국 1985 춤추는 청춘대학 1986 말괄량이 대행진 / 87맨발의 청춘 1987 얄숙이들의 개성시대 1988 그녀와의 마지막 춤을 1993 밀월여행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