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티 뉴스 제422호
- 제작년도
- 1961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 중인 < Archives Korea 1930-1940 >은 여러 가지 의미로 어마어마한 기록영상 필름이다. 이 영상은 이미 2021년에 기록영상 컬렉션 의 일부로서 심층 해제와 함께 공개됐고 VOD 기획전 에서도 짧게 다룬 바 있지만, 1928년부터 1941년경까지의 방대한 시기를 촬영하고 두서없이 묶어놓은 꽤 불친절한 영상인 탓에 전체적인 맥락을 한 번 더 소개해 보려 한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서 트램 회사 ‘Market Street Railway’의 부매니저로 일하던 모리스는 28세가 되던 1899년에 서울로 건너와 한성전기회사가 부설한 전차 운행 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그의 여권(1910.2, 1918.4.)에 기재된 바대로 애초에 조선에 온 것은 '사업 목적의 임시거주'였지만, 근대적 시간 및 경제 개념이 부족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아웅다웅하면서 정이 들기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나다 출생의 미국인 여성과 결혼(1902)도 하고 딸도 낳아(1905)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 듯하다. 결국 그는 서울 정동의 외국인 공동체 속에서 정확히 40년을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1938년에 돌아가게 된다. 조선에 올 때는 중간 경유지인 일본 고베에서 제물포까지 이동하는 데만 해도 11일이 걸렸지만, 고국에 돌아갈 때 즈음엔 23시간 정도면 가능해졌을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1899년에 조선에 온 J. H. 모리스씨는 40년간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주소는 캘리포니아주 밀브래 하이랜드의 엘더 애비뉴 30번가입니다. 모리스 부부는 한국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변함없는 친절과 배려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 “Contributor's Column”, The Korea Mission Field 36 , no.2 (1940년 2월호) 그는 긴 조선 체류기간 동안 광산업, 자동차 수입 및 정비업, 램프 등 생필품 수입 판매업 등을 하며 미국, 일본, 중국 등을 수시로 오갔다. 한편으로는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재정 임원을 역임했고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RASKB)의 회원(회보 속 회원록 기준으로 1915년부터 1940년까지)이기도 했으며, 그가 1924년에 마련한 강당 공간을 외국인 대상의 초교파 연합 교회인 서울유니온교회(Seoul Union Church) 및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의 각종 예배 및 행사 용도로 제공하는 등 정동의 선교사 모임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리스 홀(Morris Hall) 앞 미국 장로교 조선선교회 연례 모임 기념 사진(1939)> 사진: Moffet Korea Collection (Photograph, Series 5, Box 33) “서울외국인학교협회는 작년에 매입한 건물 2층에 새로운 강당을 완공했다. 이 강당은 300명의 청중을 편히 수용할 수 있으며, 협회는 건립위원회 위원장 J. H. 모리스 씨의 봉사와 관대함을 기려 환호 속에 이 새로운 강당을 "모리스 홀"로 명명하기로 의결했다. 서울유니온교회는 준비되는 대로 이 강당에서 정기 주일 예배를 거행하기로 했다.” - “Notes and Personals” , The Korea Mission Field 20, no.4 (1924년 4월호), p.80 <정동 21번지, 모리스 상회(J. H. Morris & Co. Seoul) 전경> *주1 모리스 상회가 취급하던 물품은 자동차 및 부속들, 타이어, 모터사이클, 램프, 화재보험 등 다양했다. (좌)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20 no.2 (1924년 2월호), (우)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13 no.8 (1917년 8월호) 무엇보다도 사진광이었던 그는 유니버설 필름의 조선 내 수입 배급업을 하면서 필름 촬영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을 떠나는 순간까지의 왕성한 활동들을 필름 길이 기준으로 3시간 30분 가량(16mm 필름 7권), 적정 속도로 영사했을 때의 기준으로 5시간 15분 가량의 방대한 촬영본으로 남기게 된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2년 2월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니, 거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상으로 기록했던 셈이다. 4일 월요일. 구름. 쌀쌀함. 서울 집. 하디(Hardie) 박사의 집에서 케른(Kern) 및 그 일행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모리스(Morris)씨가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을 보여줬는데, 동쪽 궐 내, 금강산, 필리핀, 백두산의 모습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9시 반 경에 귀가했다. - 『윤치호 일기』(尹致昊日記) 10권 중 12월 4일 일기 J. H. 모리스의 일대기와 그를 둘러싼 정동의 선교사, 외교관, 사업가 공동체를 이해하는 것은 이 뜬금없는 푸티지 모음집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1930년대 초중반 전주와 함흥 일대의 선교 활동 모습, 뜬금없이 중국에서 촬영된 푸티지들(1920년대 중후반부터 선교공동체가 모색했던 중국 선교와의 관련성 등), 1936년 5월 28일 이화학당 개원 50주년 행사 등이 촬영됐던 이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194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됐던 “Bowl of Rice" 퍼레이드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인근의 풍경들이 1940년에서 1941년 즈음에 촬영됐던 동기 등 대략적인 맥락은 이제 그의 생애와 그가 속했던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Archives Korea 1930-1940> 중, 1940~1941년에 촬영된 푸티지들 (좌) 캘리포니아 레드우드(Redwood) 공원, (우) 샌프란시스코 “Bowl of Rice” 퍼레이드 특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상 속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정서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쉽게 구하기 어려운 극동의 한 나라에 자리를 잡고 서로 의지하고 갈등하며 3세대에 걸쳐 함께 했던 60여 년의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들은 마냥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선교지의 발전과 그 국민들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고민했던 흔적들이 기록 여기저기에 남아 있으며, 어려움 속에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였던 공동체로서 서로 간의 유대감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정동에서 태어난 2세, 3세들은 서로를 ‘Korea Kids’라고 칭했고, 1940년대 초 일제의 압박에 밀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최소 50여 년 이상 조선에서의 추억담과 서로의 근황을 Korea Klipper 라는 이름의 월간 소식지로 엮어 구독했으니 말이다. <J. H. 모리스의 사위(딸 Marion의 남편)인 스테판(C. H. Stephan)이 최근에 사망했다는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전언> 사진: The Korea Klipper vol.39, no.2 (1980년 2월호), 첫번째 소식. 모리스의 영상을 보면 이렇듯 서로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이 언뜻 비춰지는 장면들이 있다. 중일전쟁 직전의 긴장감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인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국 영사관에서 열린 1937년 5월 24일 대영제국 기념일(Empire Day) 행사 중의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고 공동체 친구들은 서로를 향해,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1935년 3월에 경복궁 후원이 특별 개방되면서 열렸던 야외 연회장에서는 붐비는 방문객들 사이로 다른 장면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이때 카메라와 이들의 정서적 거리는 매우 가까워 보인다. <Archives Korea 1930-1940> : 모리스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사람들 (상) 1935년 경복궁 후원 (3:48:24), (중) 같은 장면, 구세군 모자를 쓴 새뮤얼 모팻 선교사? (3:48:05), (하) 1937년 영국 영사관, 대영제국의 날 행사 (4:46:32) [참고] 이하 제시되는 타임코드(시:분:초)는 적정 속도로 조정한 KMDb VOD 버전 기준의 시간입니다. 모리스의 이 방대한 기록영상 필름은 모리스 사후 그의 딸 매리언(Marion)이 간직하고 있다가 친분이 있던 로스 H. 맥도널드(Ross H. Macdonald) 토론토 대학 교수에게 전달했고, 그의 사망 후 아내 리스(Leith Macdonald)가 캐나다 연합 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에 기증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모리스의 손녀와 친분이 있던 다큐멘터리 영화작가 마티 그로스(Marty Gross)의 도움을 통해 <Archives Korea 1930-1940>는 드디어 어언 80여 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도착했다. 진면목이 드러난 모리스 필름의 이모저모를 짧은 글 하나에 모두 설명하기란 무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이 영상에 등장하는 장소, 건물, 인물, 상황에 대한 식별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16mm 필름 품질 상의 한계도 있지만, 기록영상 속 정보를 새롭게 하나 식별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작 우리의 주인공 모리스 씨의 얼굴을 식별하는 데에만 해도 여러 근거자료를 교차 검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마저도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추정은 다음과 같다. (이외에도 미 감리교 디지털 컬렉션의 자료 를 함께 참고해 볼 수 있다.) (좌) J. H. 모리스의 여권(1918.8.21.) 속 가족사진 : 순서대로 모리스(47세), 딸 매리언(14세), 아내 마벨(45세) (우) 마벨(Mabel Clair Perkins)의 여권(1923.11.5.) 속 사진 <서울유니온 50주년(1939년) 기념사진 속 모리스(68세)> 사진: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위 사진 중 모리스 부분 확대>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 추정 인물 - (상) 3:21:18 (하) 3:16:17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의 가족들 (상) 모리스의 딸 매리언 부부로 추정되는 인물들 (3:14:08), (하) 맨 오른쪽은 모리스의 아내로 추정 (3:17:36) ※ 참고 문헌 Morris, J. H. “Early Experience with the Seoul Street Railway”,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Seoul: 26-27. Macdonald, Leith, “Rare Film Footage Captures: Korea in the '30s”, Korean Culture , vol.8, no.2. (Summer 1987). 33-37. Underwood, H. G. “An American Boy in Yesterday's Seoul - 'Golden Days' Fondly Recalled”, KOREANA vol.5, no.1, (Spring 1991), 19-26 Clark, Donald N. “Impermanent Residents: The Seoul Foreign Community in 1937”,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 vol.64, (1989) 19-37. *** 주1. 사진: Cameron, W. H. Morton. Present Day Impressions of Japan; the History, People, Commerce, Industries and Resources of Japan and Japan’s Colonial Empire, Kwantung, Chosen, Taiwan, Karafuto. Edited by W. Feldwick. Chicago: Globe Encyclopedia Co., (1919) p.854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복합문화공간의 진화 '에무시네마'는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시작된다. 종로구 중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에무는 3호선 경복궁역과 873m, 5호선 광화문역과 915m 거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중교통을 통한 접근성이 높다. 복합문화공간 에무를 기준으로 동쪽에는 세종문화회관과 광화문 광장이 위치하고 서쪽에는 서울특별시 교육청, 경희궁, 숭정전이 있다. 남쪽으로는 돈의문 박물관 마을과 고종의 길, 국립정동극장이 있으며 북쪽에는 동인시장과 운경고택, 배화여자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복합문화공간 에무의 가장 눈에 띄는 지리적 특성은 서울 중심에 있으면서도 자연적 환경과 가깝다는 점이다. 에무시네마는 건물 뒤편으로 펼쳐지는 경희궁 숲과 맞닿아 있어 복잡한 번화가를 잊게 하는, 한적하고 고요한 풍경을 선사한다. 2010년 사계절출판사 건물의 지하 1층을 확보한 복합문화공간 에무는 전시와 연극 등 실험적인 무대를 꾸리며 관람객을 위한 예술·공연의 장을 만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공간은 소규모 공연장과 갤러리로만 가능했으나, 2014년 건물 전체 리노베이션을 진행하며 복합문화공간 에무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가장 먼저 1층에 아름다운 숲을 등진 '카페 에무'를 오픈하고, 이듬해 2015년 지하 1층을 공연장 '팡타개라지'로 개조했다. 공연장 한편에 바(bar)를 만들어 술과 음료까지 즐길 수 있게 된 팡타개라지는 관객이 무대를 적극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건물 2층에 에무시네마 1관을 개관하고 3년 뒤인 2018년 여름, 3층에 2관을 개관했다. 복합문화공간에서 에무시네마의 탄생이 가장 늦었지만 현재 많은 관객을 활발하게 이끌며 복합문화공간 에무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지하 1층 공연장 팡타개라지의 공연 무대 복합문화공간 에무는 지하 2층부터 4층 옥상까지 차례대로 스튜디오 에무(B2), 공연장 팡타개라지(B1), 카페 에무(1F), 에무시네마 1관(2F), 에무시네마 2관(3F), 가르강 루프탑(4F)이 위치해있다. 에무시네마는 한 건물에 여러 문화 공간이 자리한 특성을 활용하여 위아래로 오갈 수 있는 입체적인 방식의 영화제를 진행하기도 했다. 작품을 보고 나서 카페에서 소모임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또 다음 작품을 보기 위해 다른 상영관으로 향하는 관객 주도형 형태를 고안한 것이다. 수직적 이동이 아닌, 수평형 이동의 문화 행사도 있다. 코로나19 중 선보인 '격조콘'은 사람들이 같은 주파수를 맞춘 헤드폰을 쓰고 원하는 위치로 이동하며 공연을 관람하도록 만든, 독특한 형태의 행사다. 관객이 건물 뒤편의 경희궁 숲길까지 따라가도록 유도하면서 에무시네마가 가진 공간적 여건을 십분 활용한 선례로 자리 잡았다. 에무시네마 1관 내부 1020세대를 위한 문화공간 한 건물에 여러 문화공간이 있는 덕에 복합문화공간 에무는 영화를 매개로 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해 왔다. 대표적으로 '시네마 브레이크'는 인근 직장인들을 위한 점심시간 상영회로 핫도그와 샌드위치를 제공하며 30분짜리 짤막한 단편영화를 선보였고, '살롱 데 뷰'에서는 전문가와 영화를 관람하고 1층 카페 에무로 내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모임을 진행했다. 또 건물 옥상을 활용한 '별빛 영화제'도 관객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얻었다. 상영관의 폐쇄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는 밤의 포근함으로 대체되고 딱딱한 극장 의자는 푹신한 캠핑용 의자로 바뀌었다. 맥주, 커피, 핫도그 등 스낵 옵션을 제공하며 영화를 누워서 관람할 수 있는 빈백도 제공한다. 야외 상영의 아늑한 분위기는 실내 생활이 장기화 된 코로나19 이후 더 각광받았고, 상영마다 1분 내 매진 행렬을 기록하기도 했다. 에무시네마는 세 시그니처 행사를 안정적으로 안착시키며 복합문화공간 에무만의 브랜딩 메이킹을 성공한다. 에무시네마 1관 앞 통로와 입구 에무시네마의 주요 관객층이 1020세대인 사실도 큰 상징성을 갖는다. 예술영화는 난해하고 어려울 거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에무시네마의 경우 이용자 대부분이 이제 막 예술영화·다양성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입문자들이다. 복합문화공간 에무의 운영 철학대로 누구나 예술을 쉽게 즐기게 독려한 결과다. 다채로운 행사가 관객을 복합문화공간 에무로 진입시켰다면, 흥미로운 기획전은 공간에 대한 관심을 관람의 실천으로 연결시켰다. 양인모 프로그래머는 실제 관객층 수요를 면밀히 분석하여 프로그램 기획에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5월에는 5월의 날씨를 연상시키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작품을 모아 <에릭 로메르 특별전>을 열었고,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프랑스> 관객과의 대화(GV)에서 언급된 <비브르 사 비>를 놓치지 않고 특별상영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에무시네마 관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으로 꼽은 크리스티안 페촐트 기획전을 열어 작은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낯선 작품을 1020세대 눈높이에 맞춰 콘셉트를 부여하거나 관객의 수요와 반응을 기반으로 프로그래밍을 구성한 결과 긍정적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에무가 이토록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원천은 복합문화공간에 반영한 브랜드 철학 때문이다. 16세기 유럽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에라스뮈스의 영향을 받아 엘리트주의에 저항하며, 남녀노소 모두가 공평하게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오직 교육받은 자만이 예술을 안다는 말에 반기를 들고, 모두에게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짚어주었다. 건물 외부 통로 "숲속의 오솔길에서 에라스무스를 만나다"라고 적혀 있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1가길 7, 복합문화공간 에무 2. 설립일: 2010년 11월 13일 3. 대표자: 김상민 4. 운영시간: 10:00 ~ 22:00 (시간표에 따라 유동적) 5. 입장료: 일반 9,000원, 청소년 8,000원, 경로, 장애인, 조조할인 6,000원 6. 공간 구성 1) 상영관 2개관, 2층·3층 2) 카페 에무: 1층 커피 및 음료 판매, 도서 판매, 20석 3) 팡타개라지: 지하 1층, 술과 음료를 마시며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연장 4) 스튜디오 에무: 지하 2층, 영화영상 콘텐츠 기획 및 미학 연구를 위한 공유 오피스 5) 가르강 루프탑: 옥상 가르강 루프탑. 단체 행사나 야외 상영회 진행 7. 극장 규모 및 구성 - 1관(2층): 좌석수 51석, 2015년 5월 개관 - 2관(3층): 좌석수 52석, 2018년 7월 개관 인터뷰: 김상민 대표(복합문화공간 에무 대표) 김상민 대표 이자연 _복합문화공간 에무는 팡타개라지, 카페 에무, 가르강 루프탑 등 다양한 공간 구성이 특징입니다. 지금 에무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상민 _복합문화공간 에무가 처음 설립됐던 2010년에는 사계절출판사가 자리해 있었어요. 지하 1층만 복합문화공간 에무라고 일컬으며 갤러리, 연극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진행했었죠. 2014년 무렵 리노베이션에 들어가면서 층별로 하나씩 자리를 잡게 되었어요. 비유하자면 강이 흘러 퇴적 현상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강줄기가 형성되잖아요. 그것처럼 순간순간 그 시기에 맞는 일을 해왔더니 지금의 복합문화공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1층에 '카페 에무'를 만들고 지하 1층에 '팡타개라지' 공연장을 설치하고, 지하 2층에 '갤러리 에무'를 두었어요. 영화관은 사실 뒤늦게 완성됐죠. 리노베이션 이후 2015년에 2층에 처음 자리를 잡았거든요. 그리고 2018년 여름, 3층에 2관을 만들었어요. 영화관이 첫 개관했던 2016년 5월 5일. 저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인 것 같아요.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이 생긴 덕에 재미있는 다양한 기획을 해볼 수도 있었어요. 오렌지필름과 단편영화제를 열거나 <프리즘오브> 잡지와 함께 영화 상영회를 진행하기도 했고요. 또 직장인을 위해 점심시간에 '시네마 브레이크'라는 상영회를 열기도 했어요. 이자연 _에무(emu)라는 이름은 16세기 유럽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에라스뮈스의 이름에서 따왔어요. 영화를 비롯한 인문학적 활동을 실행하고 싶다는 의미일까요? 김상민 _맞습니다. 처음 복합문화공간 에무가 만들어질 때 에라스뮈스의 철학과 사상을 기반으로 운영하려고 했어요. 에라스뮈스는 네덜란드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로 당시 <우신예찬>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현재까지도 교육 후원재단으로서 유럽에 자리매김하고 있어요. 에라스뮈스는 당시 권력자 간의 비리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풍자했는데, 이러한 맥락의 문제가 현대사회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잖아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누구나 편하고 자유롭게 예술을 접하고 향유할 공간을 만들자는 목표로 에라스뮈스의 철학을 반영하고자 했어요. 양질의 교육을 받고 학습한 자만이 예술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맥락이에요. 이자연 _영화관이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졌어요. 가장 늦더라도 에무시네마를 꼭 개관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나요? 김상민 _제가 무대 디자인을 전공한 터라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까지 배웠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와중에 이 공간을 디자인하기 위해 찾아오게 되었죠. 2014년부터 자연스럽게 팀장직을 맡아 일을 시작했고, 2018년부터 대표로서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사적 맥락에서 영화는 제 삶의 중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실험적인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요. 1층 카페 내부에서 바라본 테라스 이자연 _대표님은 무대 디자이너로서 꿈을 키우기 위해 공연예술의 메카인 뉴욕으로 떠난 이력이 있어요. 그때의 경험이 에무시네마 운영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김상민 _만약 사업만 했다면 실무적인 디테일은 잘 몰랐을 것 같아요. 실무를 함께 작업해야 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했겠죠. 무대 디자인은 커다란 목표를 산정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과의 협업과 조율이 필요해요. 기본적인 기틀을 함께 잡아나가는 과정이 에무시네마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공동체에서 내가 어떤 역할로 참여해야 하는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거든요. 또 명확한 무대 콘셉트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매일 작은 결정을 이뤄나가야 해요. 논리적 판단이 무척 중요한 순간들이었죠. 그때의 시간들이 극장을 운영하고 사업을 키워나가는 데 무척 유용했어요. 이자연 _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대표직을 맡았어요. 팀장으로 시작해 대표직에 오르기까지 책임감이 막중했을 텐데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김상민 _회사 운영이란 회사 전반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사업의 디테일을 잡아가야 해요. 굉장히 어려운 일이란 걸 잘 알지만, 실무자로서 느꼈던 결정권의 제약이 아쉬워서 직접 키를 쥐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누군가 방향을 제시하면 맹목적으로 따르고 실행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일을 선도하고 결과를 책임지고 싶었거든요. 문제가 생기면 그로부터 배우고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어려서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안 해본 게 아직 많기 때문에 어떤 것도 '해봤자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죠. 쉽게 도전할 수 있어요. 이자연 _에무시네마 자리는 종로의 중심으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어요. 언덕을 올라야 하기도 하고요. 이러한 지리적 환경이 에무시네마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나요? 김상민 _에무시네마는 도심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어요. 그래서 접근하기에 아주 용이한 공간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창조적이라는 것은 오히려 제한된 구도 안에서 나타나잖아요. 어떻게 하면 이 거리와 구조를 뛰어넘어 관객들을 유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니까 그런 점에서 에무만의 크리에이티브한 행사를 고안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이자연 _접근이 어려웠던 지점이 오히려 다양한 행사의 발판이 되었던 거네요. 그렇다면 어떤 행사를 진행했었나요? 김상민 _저희가 숲을 등지고 있거든요. 이 아름다운 숲을 강점화할 수 있었죠. 예를 들어 코로나19 중 '격조콘'이라는 콘서트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거리를 두고 무선 헤드폰을 쓴 사람들이 원하는 위치로 이동하면서 주파수에 맞춰 음악을 듣고 공연을 관람하는 행사예요. 이런 활동도 경의궁 숲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죠. 또 경희궁 문화길 '두둥-탁! 페스티벌'은 경희궁길에 위치한 문화공간을 살려보자는 취지로 진행한 행사였어요. 경희궁이 사실 사대문 안에서 파손이 가장 심한 궁이거든요. 우리가 복원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그 이야기와 의미를 살리는 활동을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복합문화공간 에무를 비롯한 다섯 단체가 모여 페스티벌을 구성했습니다. 또 '판타지아 에무'라고 아티스트가 추천한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아티스트의 단독 공연이나 짧은 특별 공연을 들어보기도 했어요. 이자연 _에무시네마의 조직 체계는 어떤 형태로 운영되고 있나요? 김상민 _먼저 시네마팀은 양인모 프로그래머를 중심으로 시네마 매니저와 코디네이터, 사원으로 구성돼 있어요. 에무시네마의 개봉작이나 기획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진행합니다. 거기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매니저와 사원이 함께 관리하고요. 한 단계 나아가 영업과 홍보까지도 다루고 있어요. 공연장 운영을 담당하는 공연팀이 있고, '카페 에무'를 관리하는 카페운영팀이 있습니다. 에무시네마 사무실 내부 이자연 _에무시네마에는 총 2개의 관이 있습니다. 멀티플렉스에 비해 적은 수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에무시네마만의 분위기가 있을 것 같아요. 김상민 _실험적인 영화나 개봉관을 찾기 어려운 작품을 위한 기획전을 경험할 수 있어요. 사실 큰 극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야 수지타산이 맞기 때문에 수익성이 높지 않은 실험적 기획은 위험하게 여기거든요. 하지만 에무시네마같이 작은 규모의 영화관은 그런 계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이익을 따지는 기준이 그보다 낮기 때문에 도전의 기회가 더 많습니다. 기획 방향도 이렇게 저렇게 바꿔 이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리만의 데이터를 쉽게 쌓을 수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예술영화 산업에 있어서 작은 동네 영화관이 더 많아지고 오래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간 구조 자체가 다양성을 독려할 수 있는 거죠. 또 영화관마다 개성과 색깔이 뚜렷해야 관객의 취향이 두루두루 분포될 수 있을 거라 믿고요. 이자연 _코로나19로 극장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위기를 겪었는데요. 에무시네마의 상황은 어떠했나요? 나름의 돌파구를 모색했다면 어떤 것이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김상민 _에무시네마는 2019년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훌륭한 예술독립영화를 상영하면서 최정점을 맞이한 느낌이었거든요. 영화 산업 자체가 굉장히 역동적이고 활발했죠. 특히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영화 산업 전반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높아졌어요. 그때 에무시네마는 외국인을 위한 <기생충> 영어 자막 상영까지 진행하면서 정말 많은 관객으로 붐볐어요. 영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기도 했고요. 그 이후에 코로나19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도달했죠. 2020년 2월까지만 해도 코로나19가 이렇게 오래갈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한 열흘 정도 쉬면 되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관객 수가 한 자릿수인 날도 많아졌고요. 상당히 무기력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그때 몇 번 진행한 공연장 대관 사업이 그나마 좀 힘이 됐던 것 같아요. 적자로 힘들어지면 공연장 대관 요청이 들어오고, 또 힘들어지면 정부 지원을 받고. 이런 식으로 근근이 이어져왔어요. 그러다가 '별빛 영화제'가 확 성장했죠. 다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억눌려 있어서 그런지 야외 상영을 적극적으로 찾아줬어요. 에무시네마에서 할 수 있는 활동들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습니다. 별빛영화제가 열리는 옥상의 야외 상영장 이자연 _한국예술영화관협회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어려움을 이겨내기도 했다고요. 김상민 _전 지역의 작은 예술영화관 사업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단체예요. 원래 그전에는 교류가 그렇게까지 활발하지 않았어요.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매달 모여서 이야기를 공유하고 나누게 됐어요. 서로 본받아야 할 점도 찾고 서로의 존재 자체로 위로를 많이 얻었던 것 같아요. 의지를 많이 했죠. 영화관들이 각자도생하던 시기를 넘어서 교감하고 협업하는 길로 나아가면서 어려웠던 코로나19를 서로 의지하며 버틸 수 있었어요. 인터뷰: 양인모 프로그래머(에무시네마 프로그래머) 양인모 프로그래머 이자연 _에무시네마를 소개해주세요. 양인모 _'복합문화공간 에무'는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요. 고요한 언덕길을 올라오다 보면 금세 발견할 수 있죠. 뒤편으로 울창한 숲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건물 자체가 영화적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대도시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살짝 벗어나 보이거든요. 또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관객들이 공간 경험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이곳만의 큰 장점이에요. 에무시네마에서는 주로 예술영화와 한국 독립영화들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자연 _프로그래머로서 상영작을 선정할 때 어떤 지점을 가장 눈여겨보나요? 양인모 _일단 개봉을 앞둔 신작 중 영화사적 맥락을 가지며 동시대성이 있는 영화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어요. 관객의 감각을 예리하게 하고 몸은 영화관에 있지만 어딘가 멀리 갈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하거든요. 또 관객들의 성향에 맞는 영화를 골라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에무시네마의 주요 관객층을 살피고 경향을 분석하는 일도 중요해요. 근래에는 관객 연령층이 조금씩 낮아지는 추세입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이 가장 많아요. 세대적 취향을 프로그래밍에 반영하기도 하고요. 옛날 영화 중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것 같은 작품을 골라 기획전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오래된 영화라도 누군가에겐 첫 영화죠. 새로운 관객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이들의 성향을 잘 파악해야 해요. 보통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관객들은 이제 막 영화에 입문하고 예술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들이 대부분이라 눈높이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자연 _가장 기억에 남는 에무시네마 기획전이 있다면요? 양인모 _1930년대에 제작된 프랑스영화를 모아 상영한 기획전이 있었어요. 그 당시가 영화사적으로 ‘시적 리얼리즘’으로 구분하던 시기였거든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막 이동할 즈음이라 영화가 말을 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고요. 영화사에 이런 중대한 변화를 잘 보여줄 줄리앙 뒤비비에, 장 비고, 장 르누아르 감독까지 함께 담아 보여줬어요. 장 비고의 <라탈랑트>는 언제 봐도 정말 아름답죠. 이것은 제가 에무시네마에 와서 처음으로 진행한 기획전이었어요. 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던 저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작품들이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시대의 영화다 보니 실제로 관객들로부터 새로웠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뿌듯했습니다. 이자연 _요새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 경험하고 체험하는 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무시네마 프로그램에 새롭게 적용하거나 전략을 세운 부분이 있나요? 양인모 _일단 극장에서의 경험 자체가 공간 경험이고 오프라인이잖아요. 한자리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그 자체가 물리적인 경험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희소해지고 귀중해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지점을 강조할수록 영화관의 지속성이 더 길어지지 않나 생각해요. 저희도 OTT 플랫폼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을 상영하기도 해요.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영화잖아요. 그런데 그걸 극장에서 상영하면 관객들이 찾아오거든요. 그 풍경을 보면서 거기에 바로 극장의 본질적인 희망이 있다고 봐요. OTT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경험들이 있는 거죠. 무엇보다 요즘엔 관객 사이에 적극적인 관람 문화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아요. N차 관람 인증이나 영화의 몇 장면을 SNS상에서 새로운 밈으로 만들어 재가공해 재미를 북돋는다든지. 그러한 관객 주도적인 현상을 공간에 접목시키도록 하고 싶어요. 에무시네마 매표공간 이자연 _코로나19 이후 극장 풍경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 변화를 언제 가장 크게 체감하시나요? 또 어떤 대안책을 고려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양인모 _저는 2020년에 입사했기 때문에 코로나19가 기본값인 상태로 일을 시작했어요. 오히려 그 전의 극장 프로그래밍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만의 희망적인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위기를 느끼고 관객이 드물게 오는 상황을 경험했지만 조금씩 회복하면서 긍정적 변화를 찾아낼 수 있었어요. 초반엔 영화인을 초빙해서 GV 등 다양한 행사를 시도했고요. 또 루프탑에서 상영하는 별빛 영화제의 경우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야외에서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진행했죠. 빠른 매진을 거듭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어요. 이 자리를 통해 관객들과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교감을 하다 보니 좋은 관계성이 생겨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항상 제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관객들과 더 직접적인 연결성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자연 _팡타개라지, 카페에무, 가르강 루프탑 등 건물 안에서 예술 활동과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게 구성돼 있어요. 이러한 환경이 관객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양인모 _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사적이면서도 공동의 경험인데요. 그 경험을 확장하려면 아무래도 영화관의 공간적 요소가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영화의 감상은 극장을 나와 돌아가는 길에서 정리되기도 하고요. 또한 관객들이 모여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동시에 같은 행위를 이루는 자리이기 때문에 에무시네마가 그 경험 그대로 이어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계적으로 영화만 보고 흩어지는 게 아니라 어디선가 어떤 새로운 일이 다시금 일어날 수 있게끔 하는 거죠. 극장에서 같은 시간에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 만남의 우연성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카페 앞 통로에 위치한 건물 층별 안내판 이자연 _공식 개관 이후 7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에무시네마를 생명력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양인모 _역시나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창작가가 있고 관객이 있어야 확인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죠. 제가 관객으로서 에무시네마를 처음 방문한 게 2016년이었어요. 이제 막 개관했을 때였죠. 어떤 GV를 듣기 위해서였는데, GV가 끝나니 아래 카페에서 회식 비슷한 자리가 마련되더라고요. 스무 명 정도의 관객과 감독이 함께 영화를 보고 회식을 한 거죠. 토론하듯 영화 얘기도 계속 나누고요. 이런 상황 자체가 굉장히 드물고 신기하잖아요. 거기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요. 그런 것을 지향해 나가는 게 에무시네마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해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도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요. ‘지금 여기서 뭔가가 일어났어.’ 그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야 하겠죠. 그게 없어지면 생명력이 희미해지는 것 같을 테고요. 10대 후반의 관객들이 세대적 흐름을 이어나갈 자리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자연 _청소년 관객을 위한 자리를 모색하고 계신 걸까요? 양인모 _그렇죠. 영화라는 게 영화의 경험과 극장의 경험이 뒤섞인 곳이잖아요. 청소년들이 낯설고도 새로운 경험을 에무시네마에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자기에게 영감을 주는 일상적 공간 하나만 생겨도 그 사람의 생에 아주 긍정적이고 큰 변화가 생겨나니까요. 게다가 10대 후반 때의 경험은 대부분 성인 때보다 더 크게 다가오잖아요.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즐거운 경험이 그들의 삶에 일어나도록 돕고 싶어요. 이자연 _에무시네마는 좋은 메시지를 담은 작은 규모의 영화들을 많이 상영하는데요. 숫자와 성적이 중요한 세상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작품을 계속 보이는 게 왜 중요한가요? 양인모 _박석영 감독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싶어요. 사람이 굉장히 다양하잖아요. 멋지고 세련된 사람도 있고 까칠하고 지루한 사람도 있어요. 영화도 사람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죠. 관객 각자에게 한 편의 영화가 모두 다르게 다가올 거라 믿어요. 그러니 그 다양성을 최대한 모두 반영할 수 있도록 작지만 다채로운 작품을 더 많이, 더 자주 보여주고 환대할 수 있는 공간인 극장이 세상에 하나쯤은 있어야겠죠. 에무시네마 2관 내부 이자연 _앞으로 에무시네마에서 준비 중인 사업이 있다면요? 양인모 _공간의 경험을 강조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예정이에요. 영화 감상 모임이라든지 영화 기반의 독서 모임이라든지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커뮤니티 비즈니스 쪽일 것 같습니다. 또 다양하고 흥미로운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고요,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장소가 되도록 신경 쓰려 합니다. 그래서 복합문화공간 에무가 비즈니스 활동이나 창작 활동을 유도하는 시작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창작 활동이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져서 에무시네마에 돌아올 수 있잖아요. 그런 선순환을 만들 수 있길 바라는 게 에무의 꿈입니다. 이자연 _2032년이 되었다고 가정해보면 2022년은 에무시네마의 프로그래머로서 어떻게 기억에 남을까요? 양인모 _일단 올해는 특별 상영전을 많이 했어요. 폴 토머스 앤더슨, 에릭 로메르, 짐 자무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등 익숙하지만 늘 크게 다가오는 이름들과 한 해를 보낸 것 같아요. 또한 별빛 영화제와 한국영화 기획전을 통해 <접속>,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예전 한국영화를 만나기도 했고요. 그때마다 관객들의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굿즈처럼 특별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걸 받아보시면 굉장히 좋아하세요. 특유의 밝은 표정이 있어요. 올해는 그 관객들의 표정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얼굴을 더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32년까지 쭉 이어가고 싶습니다. 필자: 이자연(씨네21) 사진촬영: 오계옥(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9월 21일
1987년에 도착한 < 영웅본색 >은 그 매혹의 강도에서 보자면, 적어도 어떤 세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 동시대의 그 어떤 한국영화도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저 고색창연한 대사는 소년들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그렇다. 의리는 땅에 떨어졌으나,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가치인 바로 그 의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의 ‘따거(大兄)’ 주윤발은 홀홀단신 적진을 향해 나아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소년들은 일시에 검은색 선글라스와 롱코트에 사로잡혔으며, 너도나도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어대고 싶어했다. 실상 <영웅본색>의 시작은 그렇게 창대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서울의 화양, 명화, 대지극장에서 1987년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개봉되었으며, 9만 4천 60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관에서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둔 이 영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뒷골목과 변두리의 ‘동시상영’ 프로가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급기야는 주인공의 웃차림과 제스추어를 모방하고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되풀이해 보는 1) 열광적인 팬덤을 낳았다. 팬덤은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새로운 매체를 기반으로 장르에 대한 탐닉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8년을 기점으로 VCR 대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영화는 비디오 가게 선반이 나눠놓은 분류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로 카테고리화되었다. 이 ‘장르’는 이제 가장 충실하고 열정적인 관객을 갖게 될 터이다. 비디오라는 새롭게 추가된 매체의 영향은 있었으나, 여기에는 분명 1970년대 이래로 동시상영관을 채워왔던 이런 영화들(이른바 1970년대의 홍콩 권격영화)의 관객의 세대적, 젠더적 상속이 있었다. 이들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것은 10대에서 20대의 젊은 남성관객들이었다. 장사치들은 발빠르게 이에 조응하였다. <영웅본색> 이후 단 1년 만에 홍콩영화의 한국 판권은 2배에서 3배까지 치솟았으며, 1988년의 시점에 홍콩영화의 주요 수출국 중 3위로 랭크된 한국은 1990년에 이르면 대만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오우삼과 서극과 임영동의 이름은 이제 막 등장한 ‘시네필’들의 경전에 올랐고, 주윤발, 장국영, 왕조현, 유덕화, 적룡, 이수현, 여명 등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통용되는 이름들은 그 발음만큼 ‘친숙한’ 스타가 되었다. 이 열광을 가능케 한 조건과 근원은 무엇인가? 왜 이곳에서 <영웅본색>은, 나아가 이로부터 촉발된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소위 ‘홍콩 느와르’ 2) 로 불려진 일련의 홍콩영화들은 그토록 강렬한 매혹을 불러일으켰는가? 왜 그때 한국의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은 이 세계에 그토록 ‘진지하게’ 심취할 수 있었는가? <영웅본색>은 1987년과 88년 사이라는 한국 사회의 기점적 시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된 홍콩 느와르에 대한 열기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분명 <영웅본색>이 불러일으킨 열광의 강도는 놀라운 것이지만, 누가 어떻게 향유, 소비했는가의 방식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 이후 이 지역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했던 (그러나 그 하위문화적 성격상 거의 담론의 영역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던) 홍콩산 액션영화(이거나 종종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 일대의 영세 영화자본들이 합종연횡하면서 만들어낸 출처 불분명의 ‘무국적’ 액션영화)가 소비되었던 방식을 답습하는 한편, 당연한 말이지만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사회적·미디어적 조건과 결부되어 향유되었다. 즉, 여기에는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했던 독특한 위상이라는 종적 맥락과 <영웅본색>이 도착한 1987년부터 이 장르에 대한 열광이 사그라드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이라는 횡적 맥락이 서로 연동되어 개입되어 있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의 영화관객이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계층별, 세대별, 젠더별 분화를 시작하던 무렵 이른바 무협영화의 형태로 처음 한국 영화시장에 도착한 이래 홍콩영화는 재개봉관, 도시 변두리 소극장과 같은 지극히 남성 동성사회적(homosocial)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소비되며 젊은 남성들의 주요한 하위문화적 자원으로서 기능하였다. 특정 공간과 특정 세대, 젠더가 결합되어 있는 이 향유의 방식이야말로 홍콩영화에 관한 한국 담론 특유의 세대적 노스탤지어의 감각이 생겨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홍콩영화에 관한 서술이 종종 개인적 기억과 그것이 놓여진 시간과 장소로 이끌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3) 10대, 20대의 남성 하위문화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던 홍콩영화에 관한 이해는 내셔널 시네마 히스토리에 기반한 영화사적 계보 이전에 개인적 기억과 결합되어 수용되어왔다. 강력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용되는 홍콩영화가 전시하는 친밀한 인종의 얼굴, 스타의 몸이야말로 바로 이 개인적 열망들의 투사체로 작용하였다. 이것은 홍콩영화의 향유 방식에 내재된 독특한 세대론적 감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세대적 응집성은 강렬한 체험의 강도를 동반한다. 홍콩영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들이 한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기묘한 위치이다. 홍콩영화는 일본영화가 전면 금지된 이곳에서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제외하고 같은 동양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유일한 영화였으며, 또한 한국영화와 가장 빈번하게 결합된 영화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내내 도시 변두리 극장에서 가장 긴 흥행 사이클을 보여주었던 액션영화의 절대 다수는 소위 한국-홍콩 혹은 한국-대만의 ‘위장합작’ 영화들이었다. 1986년의 외국영화 수입 자유화 이후에야 완전히 사라진 이 오래된 관행 속에서 종종 한국어 더빙 버전의, ‘한국영화’로 알려지기도 한 홍콩영화는 익숙한 풍경과 언어를 지닌 것으로 감각되었으며, 그 속에서 홍콩영화의 외래성은 습관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지워졌다.(홍콩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한국식 한자 독음 표기로 호명되었던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홍콩영화에 대한 이곳에서의 감각은 외화와 방화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이 친밀성이야말로 홍콩영화에 대한 한국에서의 ‘번역가능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4) 바로 이와 같은 친밀한 방식 속에서 이 영화들에 열광한 절대적인 관객층이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들이 이 시기 이들의 열망과 분노, 상상적 극복과 같은 것, 즉 어떤 정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절반쯤 토착화된 영 컬처로서 <영웅본색>은 이 영화가 도착한 바로 그 시간인 1987과 1990년대 초까지 들끓었던 혁명적 열망과 정념과 관련되어 있다. 1987년의 6월 항쟁이 이끈 직선제 개헌 관철의 결과 그해 1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6월 항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함을 보여주었다.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전대협 결성, 이듬해의 노동법 개정투쟁,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 1989년의 전교조 결성,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의 방북, 1990년의 전노협 결성 등 대규모의 노동자 투쟁과 통일 투쟁이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모순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 분출하고 있던 이 시기는 정확히 오우삼 영화에 대한 열광의 시간과 겹쳐져 있다. 한국영화를 포함해서 그 어떤 영화도 이 순간 그의 영화만큼 젊은 남성들의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1987년의 정치와 정동과의 예기치 않은 충돌 혹은 밀착을 이루어내고 있는가를 역설해주는 것일 게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 느와르는 이 영화들의 과도한 폭력성이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로 점철되었다. 그것은 심지어 구체적인 숫자까지 동반하였다. 당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폭력영화와 청소년 문화환경’이라는 심포지움의 발표에 따르면, 1988년 관객 28만명을 동원한 <영웅본색 2> 전체의 21.9퍼센트가 폭력장면이고 89년 25만명을 동원한 <첩혈쌍웅> 24.3퍼센트가 폭력장면이다. 5) 라는 ‘구체적인’ 퍼센티지까지 제시되고 있다. 이 영화들에 대한 히스테릭한 우려는 더 이상 저질이라는 모호한 어휘를 맴도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폭력’에 대한 과도한 염려였으며, 이 영화들에 대한 매혹 또한 액션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87년 6월 항쟁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죽음이라는 기폭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대중이 애도의 공동체로서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자, 또한 국가폭력이 저지른 이 무구한 죽음의 형상은 그 자체로 대항폭력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은 ‘87년을 전후로‘ ‘정당한 약자의 무기로 자리잡았’다(김원). 그것은 가두에서 백골단과 구사대가 휘두르는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는 화염병과 쇠파이프의 저항이었으며,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한 가장 치열한 무기’(최장집)로서의 분신이었다. 즉, 이 격렬한 대중투쟁의 시간은 도저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대항폭력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의 정당성이야말로 공안정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 정권으로서는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자 하루빨리 탈취해야 할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폭력의 카테고리 안에 묶인 <영웅본색>의 힘은 그야말로 거리의 힘의 상상적 투사물일 수 있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가 각계 주요인사들을 사찰한 ‘청명계획’이 내부고발자에 의해 폭로된 직후 국면전환용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노태우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범죄와 폭력이 ‘와’로 병렬되고 있는 이 연설은 대항폭력을 범죄화함으로써 이 폭력의 정당성을 삭제하고자 하는 언설 전략의 전형적인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폭력) 대 대항폭력. 한국에서의 홍콩 느와르 전성기와 함께 하는 이 두 폭력의 구도는 왜 이 영화들의 폭력이 어떤 이들에게 그토록 과잉 의식되는지 왜 이 영화들의 향유자들에게는 그토록 매혹적인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저 영화적 폭력이 죽음과 애도와 긴밀히 연결된 대항폭력의 영화적 형상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분명 폭력 형상이 있으며, 나아가 그것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쾌감이 있다. 게다가 그 폭력은 오로지, ‘형제’를 위해서만 발현되는 것이다. <영웅본색>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정념의 활극은 오로지 형제애에 기초해 있다. 한때 조직에 발 담갔으나 갱생의 의지를 다지는 남자, 그러나 그의 이전의 삶이 그의 발목을 잡아끄는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웅본색>이 느슨하게 관련된 1967년의 동명 영화로부터 비롯되었다. 감독 용강(龍剛)의 광동어 사회파 드라마인 이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오우삼은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크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였다. 오우삼은 이 인물을 구축하는 여타의 서사를 지우고, 이 캐릭터를 송자걸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마크는 오로지 이 관계의 도덕, 의리라는 하나의 정념으로 움직인다. 젊은 남성들을 열광케 했던 소위 이 영화의 ‘명장면’들이 마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위조화폐에 담뱃불을 붙이는 주윤발, 화분에 심어놓은 총을 꺼내어 춤추듯 유려한 동작으로 총을 쏘는 주윤발. 왜냐하면 이 캐릭터는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을 통해 제스추어와 표정으로 특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크에게 가족이 있는가, 그는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송자걸이 서사의 캐릭터라면, 마크는 제스처의 캐릭터이다.(197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배경으로 마크의 전사를 그리고 있는 < 영웅본색 3 >는 영화의 성취와는 별개로 이 시리즈의 팬들을 얼마나 실망시켰던가. 3편에서 마크는 땅으로 내려왔고, 심지어 여자와 ‘연애’를 한다.) 오우삼은 마크를 통해서 신화적 공간을 창출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 공간은 ‘협(俠)’의 세계이고, 이 ‘협’이라는 세계의 기본원리를 그 자체로 현현해내고 있는 마크-주윤발이야말로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형성시켜내고 있는 자이다. <영웅본색>을 비롯한 홍콩 느와르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는 이 세계가 ‘아버지’ 없는 세계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적 존재’는 행위의 동기 혹은 주체로서 기입되어 있지 않다. 이 세계에서 행위의 동기이자 주체가 되는 것은 동년배의 남성들이며 연대란 오로지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형제를 위해!).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구성해내는 원리라고 할만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 사이의 ‘의리’와 세계에 대한 ‘인의’이며, 형제를 배신하는 행위야말로 이 세계의 악이다. 오우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영화가 폭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의(仁義)와 형제애에 관한 영화임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영화가 과도하게 폭력적이라는 비난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 첩혈속집 >에 출연했던 쿠니무라 준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우삼은 진심으로 자신의 영화 모티브가 인의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소위 인의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 혹은 상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관계성의 극단과 같은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할까. 그것이 내가 영화를 찍을 때의 기본 모티브다.” 6) 오우삼이 인의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그의 영화 스승인 장철(張徹)이 ‘피의 형제애 blood brothership’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시킨다. 오우삼 스스로 경외를 바쳐 마지않는 영화사의 선배들 이름을 즐겨 거론하지만(이를테면 장철부터 샘 페킨파, 장 피에르 멜빌까지) 적어도 <영웅본색>에 한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장철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우삼이 장철의 영화적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다량의 피, 파열하는 신체, 죽음의 순간을 지속시킬 수 있는 영화적 장치로서의 슬로우모션 등을 반복할 때 그것은 단지 스타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장철 영화의 미학인 ‘비장’을 발현하는 데에 핵심요소들인 이 인장들의 반복이야말로 <영웅본색>을 그토록 비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철은 홍콩의 주류 장르를 젊은 남성들의 영화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홍콩 내의 산업적, 인구적 변화와 맞물려 등장한 젊은 남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영화는 젊은 남성이 말 그대로 ‘죽도록’ 싸우는 영화에 심취해 있었으며, 장철의 관심은 시종 이 싸우는 신체가 어떻게 파열되고 부서지는가에 있었다(<영웅본색>의 적룡은 장철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그 부서지는 젊은 신체 중 하나였다). 이 이야기는 단지 그의 영화가 얼마나 익스트림한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의 영화를 즐겨 ‘양강(陽剛)’ 영화라고 칭했던 장철에게 강력한 남성성(陽剛)은 비장미를 자아내는 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비장미는 세계와의 대결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미학이다. 이 대결은 패배를 예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장을 쏟아가며 선 채로, 끝까지 버티면서 죽음에 이를 때 비장미가 발현된다. 홍콩 영화 최초로 등장한 이 젊은 남성들의 영시네마가 홍콩의 가장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인 1967년과 1968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우삼이 장철을 다시금 불러오고 있을 때, 이 영화들은 마찬가지로 불의와 폭력의 세계에 대한 정치적 주체의 정동을 반영한다. <영웅본색>이 홍콩영화 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그해 홍콩은 다가오는 1997년을 어둡게 만드는 사건으로 들끓고 있었다. 1986년 홍콩 센트럴에서 약 50미터 거리인 다야만에 설립될 중국의 핵발전소 건립계획은 홍콩 내의 격렬한 반대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사건은 이 반대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 노동자, 시민단체 등이 결집한 ‘다야만 핵발전소 건설보류 연석회의’가 중국정부에 제출한 반대서명에는 참여한 숫자는 당시 홍콩인구의 1/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오우삼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 첩혈쌍웅 >은 1989년 천안문 사태와 ‘본토’의 폭력을 목격한 홍콩 시민들의 광범위한 불안을 반영하였다. 1987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홍콩 느와르에 대한 한국의 젊은 남성들의 열광은, 홍콩의 정치적 맥락과 전혀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정동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인의와 그 인의를 보장하는 투쟁중인 집단의 형제애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왜, 한국의 젊은 남성들에게 주윤발은 ‘따거(大兄)’가 되었는가? <영웅본색>이라는 저 정념의 활극의 핵심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감내하는 헌신적인 형제애이다. 주윤발의 몸이 말 그대로 무수한 총알구멍들로 뚫려질 때, 그는 온몸을 부서뜨리며 이를 수행한다. <영웅본색> 2편에서 죽은 마크-주윤발의 총알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코트가 등장할 때 그것은 형제를 위한 이 죽음의 순간을 거의 물신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죽음을 무릅쓰는 이 형제애의 감정경제는 1987의 저 광범위한 연대, 세계의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남성) 동지들의 연대와 그 속에 작동하고 있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젠더적 편향성까지를 모조리 담아낸다. 다시 말해 이 의리란 세계의 부정과 대치하고 있는 (남성) 형제들 간의 의리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웅본색>의 ‘번역가능성’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1987의 <영웅본색>은 한국과 홍콩영화 사이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일종의 외주제작된 정념의 ‘번안물’로서 이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형제애의 로망, 1987의 정동—<영웅본색>과 홍콩-한국 커넥션」을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1) ”구회영,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한울, 1991, 205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홍준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로드쇼에 연재한 글을 묶어 출간한 이 책은 새롭게 등장한 시네필들의 관람 실천의 안내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최초의 ‘컬트적’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이 관점에서 보자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 관객들이 처음으로 시네필이라는 ‘세계’관객의 시민성을 향유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영웅본색> 이후의 홍콩 갱스터 영화를 일괄했던 이 표현은 일본과 한국의 저널리즘에서 즐겨 유통되었다. ‘필름 느와르’라는 매우 특화된 역사성과 내러티브-이미지를 지닌 영화 장르명을 원용해오고 있는 이 용어에 대해 우다가와 코우요는 <영웅본색>의 일본에서의 공개 당시, 일본 배급회사 선전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전한다.(野崎歓・宇田川幸洋対談「香港犯罪映画の魅力」, 夏目深雪、石坂健治、野崎歓編, 『アジア映画で<世界>を見る』, 作品社、2013, p.110) 대개의 저널리즘적 표현이 그러하듯 엄밀한 의미를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직관적인 포착이 가능한 이 용어는 거의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즐겨 사용되었다. 한편, 홍콩에서는 <영웅본색> 이후 등장한 일련의 갱스터 영화들에 대해 ‘영웅편(英雄片)’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3) 홍콩영화 향유의 초기부터 있었던 개인적 기억과 결부된 ‘체험’으로서의 홍콩영화에 대한 매혹적인 서술의 사례들로는 다음을 참조. 오승욱, 「어느 장철교 신자의 신앙고백- 나는 왜 그렇게 장철 영화를 좋아하나?」, 『KINO』 2003.7/ 정성일, 「장철의 무협영화에 바치는 피끓는 십대 소년의 막무가내 고백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4) 1971년 쇼브라더스에서 장철의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오우삼 자신이 1970년대의 홍콩-한국 커넥션을 직접 경험한 자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의 공식적인 감독 데뷔작 <여자태권군영회 女子跆拳群英會>는 한국 관객들의 홍콩영화에 대한 저 친밀함이 1970년대의 어떤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저변화되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불어닥친 이소룡 영화의 붐 이후 국가적 전략으로까지 제시된 ‘태권도 영화’와 호응하여 만들어진 이 합작영화는 한국에서 올로케 촬영되었다. 김창숙과 남산식물원과 경복궁을 주된 시각적 재료로 삼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 1974년 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 감독 오우삼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동아수출공사가 제작하고 김명용이 감독한 ‘한국영화’ <위험한 영웅>으로 개봉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 오우삼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여자태권군영회>라는 원제목을 달고 한국에서 VHS로(세경) 출시된 바 있다. 5) 『동아일보』 1990.9.20 6) 「国村準インタビュー」, 宇田川幸洋編集, 『キネ旬ムック フィルムマーカーズ⑫ ジョン・ウー』, キネマ旬報社, 2000, p.74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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