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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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는 한국검열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반공법 위반, 최초의 감독 구속 사건을 초래한 유례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만희, 1963)의 비평적·대중적 성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만희 감독은 1964년, 새로운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를 연출한다. 전쟁 중 북한군에게 사로잡힌 간호부대 소속 7명의 여군 포로(정확히는 4명의 여군과 양공주를 포함한 3명의 민간인 여성, 그리고 운전병 1명으로 총 8명이다)를 호송하던 북한군 수색대 대원들이, 중공군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군들을 구하고 남한으로 귀순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는, 개봉 직전인 1964년 12월 중순 검찰에 의해 ①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② 무기력한 국군을 묘사했으며 ③ 북한괴뢰군을 찬양하고 ④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참상을 과장 묘사하는 등의 외세 배격 풍조를 고취했다는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때 검찰은 이만희 감독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당시 법원은 영장 발부를 기각했다. 이듬해 2월, 검찰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 청구가 받아들여져 이만희 감독은 3월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약 40일간 옥중 생활을 해야 했다. 1965년 12월, 결국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았지만, 그 사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채 1965년 7월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명으로 개봉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악명 높은 이 사건의 전개 과정과 결말은 당시 검열서류를 통해 상세히 남아있다. 1막: 석연찮은 상영보류 결정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검열서류 에 따르면 1963년 11월, 이 영화의 제작신고가 이루어졌고,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1964년 12월 7일, 완성된 영화의 본편 검열이 접수되었다. 12월 8일에는 실사 검열이 이루어졌고, 12월 10일에 상영허가가 승인되었다. 양공주의 노골적이고 비판적인 대사 및 여군이 “괴뢰장교에게 경례하는 장면” 등 화면 1개 처, 대사 3개 처에 대한 제한이 가해졌다. 통상적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서류는 다른 서류와 달랐다. 일반적으로 상영허가 서류가 영화제작사에 대한 공문 발송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이 서류는 내부 보고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상영허가 결정이 제작사에게 통보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약 열흘 후인 12월 19일 공보부 검열 실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검열경위서를 통해 밝혀진다. 12월 19일은 검찰이 이 영화의 감독 겸 각색자 이만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필름을 압수한 다음날이었다. 경위서에 의한 영화의 검열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글꼴: 경기천년바탕) 공보부 담당자에 의해 작성된 <7인의 여포로> 검열경위서 (1964. 12. 19.) 위 경위서에 따르면 1964년 12월 10일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통상적인 수준의 제한 및 개봉에 동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11일, 급작스럽게 보류방침 이 통보된다. 그 내막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중앙정보부의 상영보류 조치와 검찰의 기소가 결정되면서 공보부는 급히 움직여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2월 하순 공보부는 각 지역의 시도지사에 공문을 발송했고, 합동영화주식회사는 지역 극장에서 상영 중 혹은 상영 대기 중이던 예고편 필름을 반환받았다. 한편 공보부는 상영보류 후 검찰 기소에 들어가기 전인 12월 15일 공보부자문위원회영화분과위원회(위원장 이순근)의 자문 심의를 받았다. 이순근, 이청기, 여석기, 이진섭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이 12월 16일 제출한 장문의 보고서는 이 영화의 작품적 측면, 사상적 측면, 법적 측면을 고찰하였고, 종합적으로 군데군데 오해를 살 여지는 있지만 작품적으로 우수하고 반공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언론들 역시 공보부 자문위원들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했고, 이들의 입을 빌어 영화에 대한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월 21일,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는 감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하고 필름 압수영장만 발부했다. 물론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사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는 여전히 보류된 상태였고 이 영화의 수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2막: 감독의 구속과 논란의 확대(1965년 2월) 1965년 1월 검찰은 감독을 소환조사한다. 불구속 상태였지만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2월 4일 마침내 감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은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를 거론하며 앞서 언급한 네 가지 혐의를 거론했다. 감독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들은 앞다투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했다. 영화인협회 산하 영화감독협회 역시 공보부에 접수한 진정서를 통해 검찰의 공소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한 예술인의 인신구속이 앞으로의 창작활동을 심리적으로 위축케 할지 모르”며, “반공군사영화가 앞으로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추는 위기를 조성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만희 감독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인신구속을 계기로 검열당국은 2월 6일 합동영화주식회사에 영화상영허가 보류를 공식적으로 통보한다. 동 영화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수사 중에 있다는 이유였다. 구속 다음날 발 빠르게 작성된 서류였다. 1964년 12월 7일 신청된 서류에 대한 2개월 만의 공식적 답변이었던 셈이다(물론 당사자 간의 비공식적인 의사소통은 있었을 것이다). 이후 검열당국의 반응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3월 15일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보석을 허가하여 석방 결정했다. 사회적인 여론과 영화계의 반응이 부정적인 가운데 감독마저 석방되면서 영화를 살리기 위한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희 감독의 선처를 호소한 감독협회 진정서 (1965. 2. 10.) 3막: 천신만고 끝 누더기 상태의 개봉 합동영화주식회사는 4월 19일 작성하여 29일 접수한 민원에서 재편집과 보충촬영을 했으니 재심의 후 상영보류를 해제해주기 바란다는 취지를 밝힌다. 그런데 이 재편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대사 삭제 100여 개처, 화면 삭제가 10개 처에 달하는 대규모 수정판이었다. 편집의 대상은 대개 검찰의 공소장에서 거론된 네 가지 문제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반부는 양공주 관련, 후반부는 북한군의 언행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또한 북한 수색대장과 동료들이 “자유대한으로 월남귀순할 것을 모의”하는 장면이 보충촬영을 통해 추가되었다. 이는 귀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민원은 공식적으로는 4월 29일에 접수되었지만, 부속 자료를 감안할 때 실제로는 4월 20일에 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 검열 담당과 함께 4월 27일 재편집본에 대한 재심의를 진행했다. 재심의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은 2주가 훨씬 지난 5월 14일 전달되었다. 영화사 측의 대규모 편집에도 불구하고, 정보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우선 영화제명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고, “검찰에서 기소한 문제점을 완전 삭제치 않았으므로 이를 시정하고 반공적인 내용으로 대폭 보강할 것”을 요구했다. 완전 삭제치 않은 부분으로 거론된 것은 “괴뢰군이 양공주를 총살하는 장면, 중공군이 여포로를 겁탈하려 하자 인민군이 중공군을 사살하고 인민군이 영웅적으로 동족애를 발휘하는 장면” 등 6개 장면이었다. 나아가 영화의 장면들을 “삭제하고 재편집함에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뚜렷한 반공적 이념을 공고히 하도록 주의깊게 보강”할 것을 요청했다. 애초 제작사의 재편집을 거치며 원모습을 거의 상실했던 영화는 그 잔재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공보부에 보낸 「영화재심 의견통보」(1965. 5. 14.) 이에 영화사는 5월 25일 자로 영화검열보류재심 신청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성자와 작성일자를 알 수 없는 공보부 내부 메모(부전지)에 의하면 공보부가 “CIA”에 해당 영화에 대한 의사를 문의했고, CIA, 서울지검 등의 관계기관과 충분한 합의를 거친 후에 보류해제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간 필자를 포함한 몇몇 연구자들이 “CIA”를 미국의 정보기관으로 오해하는 일도 있었으나, 여러 정황을 감안하건대, 한국 중앙정보부의 영어식 약자로 생각된다. 합동영화주식회사는 5월 25일 상영보류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였으나, 공보부 내부 문건에 의하면 일부 필름의 재편집이 완료되지 못해 검열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편집 과정이 그렇게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쩌면 5월 25일 당시 필름이 재입고되었으나, 공식적인 서류에 드러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정부 측의 불만족 사항이 전달되어 필름이 반려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5월 26일 CIA 측에 재심을 통고했다는 공보부의 7월 5일 자 서류상의 내용을 감안할 때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어쨌든 재검열 대상 필름은 6월 23일 입고되었고, 6월 28일 중앙정보부가 참석한 가운데 재검열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보부는 7월 2일 “본 영화는 64. 12. 8 검열 당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후 동 작품이 수차에 걸친 수정으로 불온 부분을 삭제 또는 보강하여 건전한 반공영화로 재편집되어 보안상 유해로운 사항이 없음으로 상영보류 해제하니 상영조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7월 2일 중앙정보부의 입장을 전달받은 공보부는 7월 10일 마침내 영화 제명을 <돌아온 여군>으로 개제하고, 추가 대사 삭제 9개 처의 의견으로 상영보류 조치를 해제 하게 된다. 중학생 이상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이었다. 7월 10일 상영보류 해제를 통고받은 영화사는 드디어 7월 30일 자로 이 영화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검열로 화제가 되었던 사실을 강조하여 홍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5년 7월 28일 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상영금지되였든 화제의 전쟁드라마! 드디어 상영금지 해제”라는 자극적인 선전문구와 함께 “칠인의 여포로”라는 원명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제작사가 검열을 상업적으로 활용한다는 최근까지의 검열당국의 주장과 연계할 때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돌아온 여군> 광고 (경향신문, 1965. 7. 28.) 4막: 개봉이 끝이 아니었다-국방부의 참전 드디어 기나긴 과정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국방부 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국방부는 1965년 7월 30일 이 영화가 “여군 전체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군의 대외 위신을 손상하며 장차의 여군 모병에 큰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삭제 또는 수정하여 상영하도록 귀부에서 조치하여 주시기 의뢰”한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장면은 인민군 부관이 여군을 강간하는 장면과 관련 대사였다. 이 요구를 접수한 공보부는 검열 주무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주관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보부는 국방부의 요청을 자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국방부의 요청사항을 받아들일지를 중앙정보부에 문의한다.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자부의 의견은 이미 충분히 전달한 상태이므로, 국방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공보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하라는 답변을 보낸다. 공보부는 결국 8월 10일, 국방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작사에 추가제한 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제한이 어느 정도 실효를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7월 30일 자로 개봉을 했고, 8월 10일이면 이미 개봉 2주차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봉관에서 대략 2~3주를 흥행하던 당대의 관행을 감안할 때, 적어도 이 조치는 서울 개봉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후 지방의 개봉 등에는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국방부, 「군사극영화 “돌아온 여군”에 관한 삭제 의뢰」(1965. 7. 30.) 그리고 이만희 감독에 대한 법원의 판결 절차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법원의 판결은 1965년 12월 8일에 내려졌다. 처음 문제가 된 지 정확히 1년 만이었다.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무죄에 가까운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1심의 선고에 대해 검찰은 항소했고, 무려 4년 뒤인 1969년 3월에야 법원이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기나긴 이야기는 이제서야 끝이 났다. 영화적 반공이 본격화되다 우리는 막연하게 반공영화에 대해 정부가 추동 혹은 지원했던 영화 장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반공영화는 정부 정책을 지원하는 일종의 관제영화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검열 현장에서 항용 가장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장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반공영화이기도 했다. 비단 <7인의 여포로>뿐 아니라 1955년 작 이강천 감독의 < 피아골 > 역시 영화의 용공적 성격이 문제가 되었고, 조긍하 감독의 < 철조망 >(1960), 이만희 감독의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 이두용 감독의 < 최후의 증인 >(1980) 등도 검열과 관련하여 당국과 마찰을 빚은 영화로 회자된다. 당대 평자들이 <7인의 여포로>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밝혔듯, 영화감독과 같은 창작자를 포함한 영화계 인사들은 보다 흥미로운 반공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북한군 캐릭터,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전장에서의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 보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해석을 가해야 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자의 의도는 검열자가 보기에 때로 작은 뉘앙스의 차이만으로도 한국전쟁과 남한 정부, 혹은 냉전적 세계체제의 본성을 폭로하는 불온한 영화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과 북의 극한적 대결 구도의 선봉에 섰던 반공영화 장르는 뜻하지 않게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위험한 장르이기도 했다. 검열자의 시각에서 <7인의 여포로>는 이러한 반공영화의 잠재적 위험성이 현실화된 극명한 사례였다. 그리고 <7인의 여포로> 사건은 이후 ‘ 영화적 반공 ’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상징적이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3공화국이 안정되며, 냉전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정권의 권위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제 한국전쟁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당대의 냉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에 강고하게 포착되고, 관점과 캐릭터가 고정된다. 그와 함께 영화적 반공에 포착된 한국전쟁 영화, 스파이영화, 간첩영화, 문예영화 등은 점차 그 상업적 활기를 잃어갔으며, 1970년대에 이르게 되면 정부의 인위적인 “우수영화” 정책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해 가는 상황에 이른다. 그 중요한 분기점이 <7인의 여포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부록: <7인의 여포로> 사건 경과 ※
1967년 <청춘극장>(강대진)과 검열의 체계화 검열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때는 검열에서 위반사항이 발견되지 않을 때이다. 1967년 <청춘극장>은 바로 이러한 역설의 증거인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1965년 이후 왜색에 대한 검열은 강화되었음에도 1967년 <청춘극장> 검열에서는 왜색 문제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제작자가 미리 검열 기준을 의식하여 검열에서 문제가 될 만한 왜색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별 문제 없이 검열을 통과한다. 그런데 1967년 <청춘극장> 검열 과정을 들여다보면 왜색의 사전 삭제와 같이 제작자로 하여금 미리 자체 검열을 통해 제한사항을 최소화하게 만들도록 검열이 체계적으로 강고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법 제2차 개정(1966년 8월3일 개정)과 시행(1967년 4월4일 시행)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검열제도의 변화가 보다 잘 드러나기도 한다. 1966년 6월29일에 <청춘극장>의 제작신고서가 공보부 1) 영화과에 제출된다. 1966년 3월4일에 사단법인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한 것으로 되어 있고, 별첨되어 있는 공연권취득증명서가 3월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제작사는 3월부터 이 영화의 제작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7월7일에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사인 합동영화주식회사가 시나리오와 전속출연자 활용각서를 첨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를 제작사에 보낸다. 8월3일자로 개정된 영화법 에 의해 시나리오 검열은 법제화되는 반면 전속제는 폐지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는 과도기적인 중복으로 보인다. 제작사는 영화법이 개정되고 난 10월이 되어서야 공보부에서 요구한 보완서류를 제출한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2월6일에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시정사항 없음’으로 시나리오 검열 의견서가 기안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행정 절차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림 1) <영화제작신고서> (그림 2)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 (그림 3) <극영화 시나리오 내용 검토> 2차 영화법 개정 이후 신규영화허가신청서에 구비해야 하는 서류는 영화시나리오를 비롯해 납세완납증명서, 자립저축필증, 동시상영문화영화복사수속필증 등 13가지로 보다 복잡해졌다. 이를 통해 보건대 개정된 영화법의 시행은 1967년 4월3일이라고 하나 제출 서류에 대한 관리가 보다 엄격해짐으로써 실제로는 이미 개정된 영화법에 준하는 행정 검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보부 측의 미비서류를 제출해달라는 요청과 그에 따른 제작사의 보완 제출이 있은 끝에 1966년 12월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이 발부된다. (그림 4) <신규 영화상영허가신청서(구비서류목록)>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와 별첨 <영화검열합격증> 위 서류에 의하면 <청춘극장>은 “원작인 『청춘극장』을 영화화한 것으로서, 때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무렵, 우리나라 젊은 학도 백영민, 장일수, 신성호 등은 각자 풍운의 꿈을 안고 항일투사로 일본유학생으로 또는 국내에서 애국활동을 하던 청춘상을 그린 극영화”로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은 1959년의 것(“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한국청년들과 여성들의 활약상과 이들 젊은이들의 애정 문제를 묘사한 내용”)에 비해 항일운동과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일한 제한사항이 백영민이 학병으로 출전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군가를 단축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강화된 왜색 검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항일 애국주의의 강화와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에 대한 미성년자 관람 심사에서는 보다 많은 제한이 이루어졌다. 우선 등급은 중학생 이상 관람가가 되었는데, 그에 비례하여 겁탈 장면, 캬바레에서 무희가 춤추는 장면, 영민이와 유경의 정사가 암시되는 장면, 임신을 알리는 대사 등 주로 성적인 장면들이 삭제 대상이 되었다. 1965년 <춘몽>을 둘러싼 음화 논란 이후 공안에 가려져 있던 외설이 검열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다. <청춘극장>의 관람 등급 심사에서 제한된 내용은 성적인 표현에서도 검열이 보다 엄혹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6) <영화 미성년자 관람심사 결과 통보> 1975년 <청춘극장>(변장호)과 무너지는 검열 1975년 <청춘극장>은 사회가 유신체제로 이행되고 제4차 영화법 개정(1973년 2월16일)이 이루어진 이후, 게다가 긴급조치 이후에 제작된 영화다. 제4차 영화법 개정의 골자는 영화 표현 영역에서 유신체제의 기조를 관철하는 것이었으므로 표현의 자유는 더욱 통제되고 억압되었다. 통제와 억압의 강도는 긴급조치 이후에 나날이 심해졌으며, 그에 따라 영화 검열기준 또한 강고해졌다. 1975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975년 <청춘극장>에 대한 시나리오 검열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 이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의 등장이다. 예륜은 1970년부터 극영화 시나리오 검열을 전담한 기관이다. 제작사는 우선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을 거친 뒤에야 검열 담당 부처(공보부, 문화공보부 등)에 제작신고를 할 수 있었다. 이에 1975년 <청춘극장>의 시나리오 검열도 ‘예륜’에서 수행한 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청춘극장>의 제작사는 1975년 6월17일자로 시나리오 검열을 예륜에 신청하고, 예륜은 6월20일에 검열을 수행하여 공보부에 보고한 것이다.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는 이 영화의 내용이 “꼬마 신랑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동창생이었다.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의 길을 걸었던 민족의 불운을 되돌아보는 광복 3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수난’, ‘형극’과 같은 국가의 위기를 상기시키는 표현이 쓰이고 있고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 시국과 결부하여 생각할 때”라는 전제 하에 “비록 일제 때 있었던 학병 강제 동원 등[이라 하더라도] 일반에게 전쟁기피증과 반전사상을 주입시키는 악영향을 주지 않도록 세심 유의”하라는 의견이 첫 번째로 명시되어 있다. 당시는 남북한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한 이념이 강화되며 남북한 관계가 경색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고조시켜 사회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한편 언제든지 국민을 전쟁에 강제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 검열에서 항일정신의 구현을 영화의 미덕으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반전의식을 고취시켜서는 안된다는 모순적인 제한조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7)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그림 8) <종합의견 보충설명 및 부분시정사항>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 단계를 통과한 제작사는 제작에 착수하겠다는 신고서를 1975년 7월1일자로 문화공보부에 제출한다. 문화공보부에서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 의거하여 시나리오를 개작하라고 7월7일자로 제작사에 통보한다. 이에 7월12일 제작사는 문화공보부의 개작 요구에 따라 충실히 수정하겠다는 보고서와 함께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한다. 문화공보부 영화과에서는 개작된 시나리오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여 상부에 보고하면서 제작사에 수리 통보를 한다. 이때 “본 작품은 제작과정에서 사계 권위자의 고중을 받아 시대적 배경으로 뚜렷이 하여 전쟁기피증 및 반전사상과 대일 굴욕감정이 유발되지 않도록 특히 유의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에 대한 적대의식은 고양하되 염전(厭戰)의식은 지양하라는 지침이 다시금 강조된다. (그림 9)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통보> (그림 10)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보고의 건> (그림 11) <극영화 “청춘극장” 제작신고 수리 통보>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18일에 제작사는 방대한 제작규모에 비해 제작시일이 촉박하여 시나리오 검열에서 시정이 요구된 사항을 다 고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내용의 각서와 경위서를 제출한다. 이에 대한 별다른 조치 없이 이튿날인 9월19일에 이 영화는 검열에 합격한다. 이는 늘어나는 제한조치에 비해 그것을 위반했을 시의 조치는 의외로 탄력적이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영화 검열 의견서에서는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학교 동창생으로서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을 걸었던 민족의 수난사를 되돌아보는 내용”이라고 하면서도 또 다시 꽤 많은 제한사항을 통보하고 있다. ‘학생이 선생에게 대드는 장면’, ‘대통령 모독’, ‘성적인 표현’ 등이 주로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제한사항은 중학생 이상 관람할 수 있게 한 관람 등급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2) <국산영화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3) <영화검열 의견서> 1975년 <청춘극장>에서는 그 이전에 없었던 예고편에 대한 검열까지 이루어진다. 본편이 검열에 합격한 지 일주일 뒤인 9월25일에 제작사는 <예고편 검열신청서>를 제출한다. 이때에도 납세증명서가 첨부된다. 그리고 9월27일에 예고편 검열 합격이 통보된다. 여기에서도 주요인물의 별칭에 해당하는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삭제하라는 제한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림 14) <예고편 영화검열 신청서> (그림 15) <국산 영화 예고편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6) <청춘극장 예고편 검열대본> 중 마지막 페이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1975년 <청춘극장>은 대본 검열에서부터 예고편 검열에 이르기까지 보다 많은 검열 단계를 거치며 또 그만큼 많은 시정을 명령받았다. 한 마디로 1959년, 1967년보다 매우 엄격한 제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대통령’이나 ‘장군’과 같이 군부와 관련된 표현에 대해서는 히스테릭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민한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드는 것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음이 드러난다. 설사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선생의 관계라 하더라도 ‘하극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사항들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경직성은 ‘왜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일본 복색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일본어도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설사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일본어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규제되었던 것인데 이 시기에 이르면 민족주의가 강화되며 그 일환으로 국가 주도로 국어순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규제가 더욱 강화된다. 한편 “동경 가면 예쁜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는 표현도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삭제된 것은 주목을 요한다. 이는 당시 남한보다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일본은 영화 표현에서 경계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과하다고밖에 할 수 없어서 이러한 조치를 통해 오히려 당시 정권의 불안이 엿보이기도 한다. 앞서 검열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때는 오히려 검열 과정에서 제한 사항이 없을 때라고 말했다. 반대로 검열에서 제한 조치가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검열의 기준이 제작 과정에 관철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1975년에 이르면 시나리오가 예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반려되는 비율이 80%에 이르게 된다.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국가의 영화 통제는 영화산업과 회복할 수 없는 괴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유신체제 이후 그 괴리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리고 1975년 이후에는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된다. 금지하고 제한해도 검열에서 문제가 될 영화가 계속 기획되었다는 것은 검열이 무너지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1975년 <청춘극장>은 바로 그러한 변곡점에 놓인 영화였다. 1) 영화 검열 업무는 1961년 10월2일 이후 문교부에서 공보부로 이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