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워드
- 감독
- 박성범, 박성현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손병호, 권오중
장철과 호금전의 무협에서 이소룡과 성룡의 쿵푸 액션으로. 오우삼과 서극, 왕가위에 이르는 뉴웨이브까지. 20세기 중·후반 홍콩영화는 각기 다른 색깔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한국에 스며들었다.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 중국어권 영화 전반 역시 (정치, 외교, 경제 정책에 따른 변함은 있더라도) 예술과 산업의 측면에서 한국영화와 인연을 맺으며 그간 서로가 아시아영화의 한 종류로 자리 잡는 데 영향을 주고받았다. 한국영화가 중국어권 영화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어떻게 초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영화에 반영했는지를, 홍콩 시티대학교(City University of Hong Kong)와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이 공동으로 개최한 컨퍼런스 ‘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Destination Hong Kong: South Korean Cinema’s Encounter with Chinese-Language Cinemas) ’에서 되짚어보았다. 홍콩 시티대 이상준 교수와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학예연구팀장이 공동 의장을 맡았으며, 2025년 5월 16일과 17일,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각국의 연구자 및 아카이브 관계자들이 발표를 위해 홍콩 시티대를 찾았다. 중국어권과의 영화 교류의 흐름을 조망하는 자리가, 한·홍 합작의 주요 결과물 제작에 기여한 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설립자 런런쇼(Run Run Shaw)가 건립을 지원한 (홍콩 시티대 내) 런런쇼 창의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되어 더욱 뜻깊었다. 시티대 이상준 교수는 “1950년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홍콩,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 등과의 초국가적 및 초지역적 네트워크 속에서 한국영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본다”라는 컨퍼런스의 목적을 밝혔다. 초청 강연자로 함께 한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은 “기관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홍콩영화의 오랜 팬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더욱 감회가 깊다”라면서, “이번 행사는 한국영상자료원이 해외 학술기관과는 처음으로 공동 개최하는 컨퍼런스일 텐데, 관련 주제를 연구하는 작은 한 걸음이 위대한 도약의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라며 응원을 건넸다. 정종화 학예연구팀장 역시 본 컨퍼런스를 “한국과 중국어권, 특히 홍콩 간 영화적 교류에 대한 연구를 진작하는 특별한 기회”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번 컨퍼런스를 계기로 이상준 교수와의 협업을 지속하며 더욱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주최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며 컨퍼런스 이후에도 관계 기관과의 협력을 이어가며 연구 성과를 가다듬는 데 대한 의지를 밝혔다. 1950~60년대 한국과 중국어권 간 합작 사례부터 양국 21세기 감독들의 화제작까지, 시대나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이어진 양일간의 열띤 발표와 토론 내용을 기록한다. 먼저, 두 패널의 발표가 진행된 컨퍼런스 1일차 현장을 담았다. * 컨퍼런스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 개최 개요 및 프로그램 북( 링크 ) <패널 1>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 간 전후(戰後) 합작 1950년대 이후의 전후 한국영화계에서 중국어권과의 합작이 시도된 배경과 방식, 그리고 결과의 함의를 다뤘고, 홍콩 침례대학교 김신동 교수가 이끌었다. 한국영화인 강범구를 통해 본 1960년대 한국-대만 영화 교류사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학예연구팀장은 1960년대 액션 장르 흥행을 이끌었던 강범구 감독의 작품이 한국영화 최초로 대만에 수출되거나 대만과의 합작을 통해 제작된 과정에 집중했다. 1960년대 한국과 대만의 영화 합작에 관한 첫 번째 학술적 연구다. 냉전 시기 동아시아 정세를 반영한 대만의 정치적 상황과 반일 감정이 한국 영화산업의 현실과 맞물리며 두 국가의 영화적 교류의 토대가 마련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과거 양국과 식민지-제국 관계였던 일본의 영화기술이 필요한 현장이었음을 포착한다. 영자원이 2009년부터 2014년까지 강범구 감독을 면담해 기록한 구술채록문과 작품별 심의서류, 합작 계약서 등이 근거가 되었다. 전후 냉전 상황 속 동아시아에서 지정학적, 산업 및 기술적 요소가 상호작용하던 도중, 영화산업을 매개로 세 국가의 관계가 형성되는 한 지점을 재발견하는 연구였다. 강범구 감독은 1950년대 신상옥 감독의 현장에 촬영보조로 합류하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 지옥화 >(신상옥, 1958) 등의 작품에서 촬영감독으로 활약했다. 제작자 최관두 가 속한 한흥영화사와 협력하면서부터는 액션 스릴러에 초점을 두고 연출 활동을 시작해 독특한 액션 연출 및 촬영 기법으로 주목받았지만, 한국영화사에서는 아쉽게도 주변부 인물로 비춰지는 데 그쳤다. 그런데 그가 세 번째로 연출한 < 안개낀 거리 >(1963)는 1963년,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대만에 수출된 후 놀랍게도 흥행을 기록했다. 강범구 감독은 구술채록 당시 이러한 흥행의 비결이, (대만 역시 냉전 시기를 통과 중인 동아시아의 일부였음을 감안할 때) 상업적 장르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전후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묘사 한 데 있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양국 간 외교적 긴장을 야기한 지정학적 요인 [1] 의 영향으로 대만은 일본영화의 수입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안개낀 거리>는 이때 대만에 수출되면서 현지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얻고 일본영화의 빈자리를 메꿔 보다 쉽게 흥행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64년 6월, 대만의 일본영화 수입이 재개되면서 그러한 이점의 효력이 상실되었고, 대만에서 한국영화의 입지는 다시 변방으로 밀려났다. 강범구 감독과 박상호 감독 / <안개낀 거리>, <탈출명령> 포스터 하지만 1965년, 한국과 대만은 강범구 감독을 필두로 최초의 합작을 시도한다. 그의 액션 연출을 인상 깊게 바라본 대만의 감독 겸 제작자 가오 런허(Gao Renhe)의 제안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배경의 전쟁·액션 영화 < 탈출명령 >(1966) 제작을 위해, 대영영화주식회사와 대만 중흥영업유한공사(Chung Shing Films Corporation)가 합작했다. 계약서상 한국은 각본, 연출, 캐스팅을, 대만은 주로 재정 지출을 담당했음이 나타난다. 두 국가 간 최초의 합작은 한국의 창작적 리더십과 대만의 투자가 결합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탈출명령> 합작 과정에서 국내 영화인들의 작업 편리성이 일본 영화산업 의 기술을 통해 향상되었을 여지도 발견된다. 강범구 감독은 푸티지를 매일 일본 도요랩(Toyo Laboratory)으로 운송해 최신 기술을 바탕으로 현상·편집했으며, 본 합작을 계기로 일본의 영화 기자재와 소품용 총기가 항공편을 통해 본격적으로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했고, 촬영 현장에 중국어 통역사가 동반했음에도 일본 관계자가 소통을 도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러나 결과는 아쉬웠다. 제작비 규모가 계획한 예산을 초과해 대만 중흥영업유한공사의 재정적 부담이 컸는데, 박스오피스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흥행 불발에 더해 한국과 대만의 최초 합작 사례이다 보니 제도적 지원 역시 부족했던 터라, <탈출명령>은 한 번의 실험적 합작 시도의 결과물로만 남고 말았다. 하지만 정종화 팀장에 따르면, 해외 영화 수입 비율 충족을 위한 위장 합작이 만연했던 당시, 양국의 영화적 역량과 자본을 충실히 투입한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위 사례는 재조명될 가치가 있다. 정치, 외교, 기술적 측면에서 세 국가의 역할이 교차하며 쓰인, 동아시아 영화사의 독특한 협업 역사로도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한·홍 합작 멜로 속 여성 캐릭터의 민족 수행: <이국정원>과 <사랑의 스잔나>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 윤서연 연구원은 한국과 홍콩이 합작한 멜로드라마 영화의 여성 인물이 민족성이나 국적을 수행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현상을 소개했다. 나아가 동 시기 한국 정세의 영향으로 극중 인물들의 젠더가 국적을 대변하는 양상을 띠는 점 역시 짚었다.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한국의 경우 6.25 전쟁 포함) 후 한국과 홍콩의 역사·문화적 의식이 인물을 통해 알레고리화되는 합작 멜로드라마 중에서도, 윤서연 연구원은 주인공의 부모가 국적이 다른 남녀의 이성 교제를 허락하는 구조를 띤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과 < 사랑의 스잔나 >(김종용, 송존수, 1976)에 대해 설명했다. 두 작품에는 홍콩 출신 여성 인물이 한국문화를 경험하며 국적이나 민족성을 ‘유동적으로 수행’ 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2] <이국정원>에서는 한복에 가깝게 디자인된 주인공 방음(우민)의 의상이, 그의 민족성 수행을 암시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된다. 방음의 모친 역시 과거에 교제했던 한국인 남성과 찍은 사진에서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3] <사랑의 스잔나>에서 국휘( 이승용 )와 추하(진추하) 두 사람은 민속촌을 방문해 한국의 전통 혼례식이 치러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그 순간 국휘는 추하에게 청혼한다. 홍콩 출신 여성 인물과 한국의 민족성 간 격차를 좁히고 여성 인물의 적극적인 민족성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윤서연 연구원은 메리 앤 도안(Mary Ann Doane)의 “ 여성 가면(Female masquerade) ”이라는 개념을 빌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계기를 설명했다. 메리 앤 도안에 따르면, 영화 속 여성 인물들은 의상이나 몸짓을 통해 소위 ‘여성적인’ 특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가부장적 사회 체계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생존 전략을 추구한다. [4] 한·홍 합작이라는 특수한 맥락에서 이 생존 전략은 타국의 문화적 맥락에 적응 하는 데 필요한 의상과 몸짓을 선보이는 홍콩 출신 여성 인물들에 의해 연기된다. (좌) <이국정원> 중 과거 교제한 한국인 남성과 촬영한 사진에서 한복을 입고 있는 방음의 모친 (우) <사랑의 스잔나> 중 추하와 국휘 그렇다면 왜 한·홍 합작 멜로에서는 대부분 한국인이 남성으로, 홍콩 출신이 여성으로 설정되어있을까? 윤서연 연구원은 한국과 남성을, 그리고 아시아의 타국과 여성을 연결해 한국이 국가적 남성성(National masculinity)을 회복 하려고 했다는 이영재의 주장을 인용했다. 이영재는 한국인 남성이 외국인 여성과 교제하는 구도(이를 반영한 멜로드라마 영화의 합작에 한국영화계가 투자한 이력 포함)를,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전후 한국사회가 문화적 영향력을 분출함으로써 권력을 지닌 가부장적 개념의 남성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언급했다. [5] 국가로서의 주권을 되찾고 전쟁까지 거친 후, 아시아의 패권 다툼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열망이 극중에서는 젠더를 통한 국적 은유의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외에도 남성 인물의 한국적 민족성과 경제적 능력 보장 여부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는 양상도 언급하면서 인물과 내러티브가 설정된 맥락을 주제와 연관 지어 더욱 구체화했다. 가부장제의 한계를 반영한 젠더적 수행과 국가적 권력에 대한 당시 한국의 시각을 포착해, 한·홍 합작의 결과물로서는 깊이 분석된 적이 드문 멜로드라마 장르를 다각도로 관찰하는 계기를 마련한 연구였다. ‘자유의 꾀꼬리’ 정형의 스타덤: 1960년대 영광영업공사의 한·홍 합작 영화 네 편을 중심으로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아트·문화산업학부 연구 조교수 제시카 시우인 여웅) 제시카 시우인 여웅(Jesscia Siu-yin Yeung) 교수는 1960년대 광둥어권 지역의 영광영업공사를 중심으로 제작된 한·홍 합작 영화의 흥행을, 네 편의 작품에서 배우 정형(Ting Yang)의 역량과 연관 지어 설명했다. 그간 만다린어권이나 일본에 비해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한 광둥어권 아시아 여성 배우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리처드 다이어(Richard Dyer)의 스타 이론을 비롯해 정형 출연작을 다수 제작한 제작자 황척한(Wong Cheuk-hon)의 회고록, 그리고 각 작품의 전단을 참고했다. 정형은 황척한이 설립한 만다린어권 제작사 자유영업공사의 1960년대 작품에서 사실적이고 섬세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활약했다. 이후 황척한이 작품 심의 및 개봉 기준이 비교적 유연한 광둥어권에 영광영업공사를 세웠고, 영광영업공사 제작 작품 여러 편에도 주연으로 발탁돼 흥행에 기여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 서유기 >(김수용, 1962)의 경우 당시 한국에서 박정희 정부가 지원한 한양영화공사가 자유영업공사의 막 웡 헤이 감독과 협업하면서 김수용 감독이 연출에 나선 작품이다. 광둥어권에서는 이스트만 컬러 필름과 테크니컬러의 와이드스크린 포맷, 그리고 일본의 특수효과를 최초로 이용해 촬영한 작품이기도 하며, 이 작품에서 정형은 칠선공주로 분해 열연했다. 다음 합작 결과물인 < 에스 오 에스 홍콩(SOS 홍콩) >(최경옥, 1966)은 당시 아시아에서 열풍을 일으킨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유사한 첩보 액션 장르로 합작하기를 신상옥과 최은희 가 황척한에게 제안해 신필름과 영광영업공사와의 협업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정형은 이 작품에 주연 백민( 박노식 )을 돕는 요원 마리나를 연기했는데, 이때 배포된 전단을 보면 ‘대역 없이 정형 스스로 공중의 헬리콥터를 타고 오르는 모습에 주목해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제시카 교수는 주·조연 여부와는 관계없는 정형의 열연이 담긴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소규모 독립영화사로서의 영광영업공사을 대표하는 여성 배우 로서 그가 최선을 다해 연기했음을 보인다. 세 번째 작품은 멜로드라마 < 조용한 이별 >(정창화, 1967)이다. 정형은 이 작품에서 주연 정예화를 연기했고, 함께 연기한 남정임 은 당시 한국 최고의 여성 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콩 최고의 여성 배우 정형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임을 감안해 조연을 연기하라’라는 동료 배우 최은희의 조언에 설득되어 출연을 결심했다고 제시카 교수는 전했다. 마지막으로, 전쟁 블록버스터 < 장렬 509 대전차대 >(김동학, 1967)는 다른 배역들의 캐스팅은 황척한이 바라는 대로 진행하되, 주연으로는 반드시 신영균 과 정형이 캐스팅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제작되었다. 정형은 남매를 찾기 위해 군대에 합류한 간호장교 임수랑 역을 맡았고, 제시카 교수는 추운 날씨와 열악한 현장에서 노고가 많았다고 전한 정형의 발언을 강조했다. <에스 오 에스 홍콩(SOS 홍콩)> 중 마리나(정형) / <장렬 509 대전차대> 중 신성호(신영균)와 임수랑(정형) 광둥어권 관객을 타겟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소규모 독립영화사로 시작한 영광영업공사. 이를 이끈 황척한은 다른 대형 제작사에 대항해 경쟁력을 갖추고자 정형의 스타덤을 동원했다. 뿐만 아니라 이스트만 컬러 필름이나 테크니컬러의 와이드스크린 포맷, 일본의 특수효과를 도입하는 등 최첨단 영화 제작 기술까지 뒷받침되었음을 보이며, 제시카 교수는 영광영업공사가 1950~60년대 중국어권 영화계에서 정형을 필두로 차별화되기 위해 노력한 역사를 되짚었다. <반혼녀>와 신상옥·최은희의 기구한 운명: 홍콩 속 영화적 모험 (홍콩 침례대학교 영화과 조교수 케니 응) 케니 응(Kenny NG) 교수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가 홍콩 영화계에 입문하고 합작을 시도하게 된 계기를 해설했다. 신상옥은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로서 제작사 신필름을 운영했으며, 첩보, 액션 스릴러, 멜로드라마는 물론 초자연적 소재까지 다루면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연출을 이어간 유능한 창작자였다. 하지만 국내 영화검열의 강도는 1970년대 중반까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영화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주제와 표현 방식의 폭이 매우 좁아진 터라 한국영화의 질적 완성도는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자 했던 신상옥 감독에게는 불리한 환경이었으며, 그가 운영하던 신필름도 1975년에 폐업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신상옥 감독은 홍콩 제작사 쇼브라더스와 합작을 시작했다. 쇼브라더스가 제작한 작품에 한국인 배우들이 출연하도록 하는 ‘ 위장 합작(Counterfeit co-production) ’의 방식이었는데, 케니 응 교수는 이것이 신상옥 감독으로 하여금 제작 과정에서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양국 영화산업의 역량을 개발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6] <반혼녀> 중 한도령(이승용)과 연화(리칭) 한편, 신상옥 감독이 시대적 한계를 지닌 사회 제도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과 그를 에워싼 금기시된 사랑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케니 응 교수는 당시 검열을 비롯한 사회적 권력의 억압에 의해 억눌리고 은폐된 욕망이 분출되는 양상 을 관찰했다. 특히 한·홍 합작 영화 < 반혼녀 >(신상옥, 1973)에서, ‘유령’이라는 초현실적 소재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추구해 상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내러티브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고 봤다. 거액의 돈을 가지고 연인 연화(리칭)에게 가려고 했던 한도령(이승용)은 산적에게 기습을 당하고, 한도령과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다한 연화가 유령이 되어 그를 찾아와 사랑을 이어간다는 이야기이다. 케니 응 교수는 유령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라는 설정 자체가 사회적 통념에 반하려는 시도이며, 여기에 호러와 코미디 요소가 섞여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말한다. 또한 성과 폭력에 관한 묘사가 비교적 엄격히 규제되었던 1970년대의 시대적 한계를 그만의 예술성으로 극복한 방식 역시 인상적이라고 덧붙였다. [7] 신상옥 감독과 쇼브라더스 간 이와 같은 협력을 기점으로, ‘유령이 등장하는 로맨스’가 아시아 영화에서 장르로 인식되고 활발히 제작되는 데 기여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 토론 * 패널 1의 발표자 4인이 발표한 후,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아트·문화산업학부 연구 조교수 에녹 이욕 탐(Enok Yee-Iok Tam)이 아래와 같이 질문했고, 발표자들이 답변했다. Q. 제시카 시우인 여웅 교수에게 (질문1) 본 연구에서 정형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홍콩 자유영업공사와 영광영업공사의 설립자 황척한 이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한국과 홍콩의 합작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또한 영광영업공사 는 소규모의 독립영화 제작사에 가까웠음에도, 한국은 어떻게 이들과 합작을 고려하게 되었을까? (답변) 냉전 시기 홍콩과 대만, 한국(남한),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은 아시아의 반공 지역으로 구분되었고, 황척한은 이들 중 대만과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의 영화시장에 진입을 시도했지만 결과가 성공적이지 않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서유기>가 흥행하면서 제작자로서 그의 명성이 한국에 전해지고 합작 대상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당시 개최되어오던 아시아영화제도 아시아 국가들 간의 합작을 매개하는 장으로 기능했을 수 있다. (질문2) 한·홍 합작이 활성화되던 시기 아시아에서 ‘ 007 시리즈 ’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말씀하셨다. 007 시리즈 열풍을 중심으로 한 당시 첩보 액션의 인기가 황척헌과 한국영화계의 합작에 미친 영향이 궁금하다. (답변) 007 시리즈는 비슷한 시기 여러 문화권에 의해 이용된 영화적 트렌드였다. 세계 각지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유사한 그림을 연출하고 싶어 했고, 헬리콥터 액션 신 촬영에 동참한 정형 역시 이 트렌드에 합류하는 배우로 인식되려는 의지를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국가들 역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 시리즈와 유사한 장르에 안착해, 박스오피스 흥행을 보장하고 상업적 성공을 이룩하려고 했으리라고 본다. Q. 정종화 팀장에게 (질문1) 위에서 제시카 교수가 언급하셨듯이, 팀장님께서도 007 시리즈 개봉과 더불어 첩보 액션 장르의 인기가 합작 영화의 장르 설정 및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한국형 첩보 액션이 냉전이 진행 중이던 당시 대만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얻은 배경을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 (답변) 한국에서 개봉한 첫 007 시리즈는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 007 제2탄 – 위기일발 >(테렌스 영, 1963)이었다. 국내 개봉 연도인 1965년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엄청난 흥행 성과를 거뒀고, 당연히 한국 스타일의 첩보 액션 장르가 확립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특히 북한을 적대자로 설정하는 반공 기조의 내러티브가 결합되었다. 또한 스파이 출신의 여성과 한국 남성 요원이 연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이국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릴 넘치는 모험 등 여러 대목에서 007 시리즈의 흥행 공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007 시리즈의 자장 아래 제작된 작품들은 당시까지 제작 및 개봉된 한국영화에서는 관찰되지 않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강인하고 생기 넘치는 남성 주인공 이 등장하며, 서구의 007 시리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족’에 대한 강한 집착 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만을 포함한 해외 국가에서 제작된 작품들과 대만 박스오피스에서 경쟁해야 했던 강범구 감독의 관점에서, 007 시리즈 첩보 액션의 이러한 특징들은 대만 관객을 사로잡는 데 유용한 기회로 작용했다. 그는 장르영화에 관한 새로운 미학 을 추구하고, 빠른 편집 을 시도했으며,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액션 내러티브 를 고안했다. 그 결과, 같은 시기의 대만 장르영화들에 비해 그의 작품이 국제적 감각을 지녔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코멘트_패널 체어 김신동 교수) 개인적으로, 007 시리즈는 첩보 액션 스릴러임과 동시에, 세계 각지의 생활 모습을 노출하며 낯선 지역의 풍경을 매혹적인 소재로 소비하는 이국주의(Exoticism)의 관점에서 제작된 관광 영화 (Tourism film)에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한국영화계 역시 이러한 시각적 즐거움이 전시된 영화를 만들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1960~70년대에는 멀리 위치한 해외 국가에 접근하기가 여의치 않았고, 홍콩을 비롯해 일본의 오사카, 필리핀의 마닐라, 대만 정도가 그들이 지리적 배경으로 선정할 수 있는 ‘외국’의 범위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홍콩은 그중에서도 한국영화계와 관객 모두가 매력을 느낀 공간이었다. <패널 2> 아시아 영화 속 경계 허물기 일본 교토대학교 김수현 연구원이 이끈 패널로, 동시대 중국어권 영화가 서로 다른 국적이나 지역성, 젠더 등의 ‘경계’를 사유 또는 표현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중국어권 동아시아의 ‘악센트 차이니즈 시네마’: 장률의 <야나가와> 등 트랜스내셔널 영화 제작을 이론화하기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 박사 수료자 클로이 원셴 장) 클로이 원셴 장(Chloe Wenxian Zhang)은 영화 속에서 관찰되는 억양과 방언이 작품의 형식과 미시적 담론, 그리고 인물들의 자기 정체성 인식의 측면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를 연구했다.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재중동포 3세로서 국가나 민족의 경계에 관한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를 선보였던 장률 감독의 < 야나가와 >(2021)를 텍스트로 선정했다. 장률 감독은 ‘국적’을 주제로 디아스포라 감성을 일깨우는 비주류 독립영화, 하나의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경계를 가로지르는(Border-crossing)’ 영화를 발표한 초국가적 작가(Transnational auteur)로 알려져 있다. 클로이는 장률이 대사의 ‘ 억양(Accent) ’을 사유하는 방식을 통해 본 작품이 색다른 트랜스내셔널 시네마가 될 수 있음을 보였다. <야나가와>에서 주인공 아추안, 그리고 형제 리동과 리천은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표준 중국어로 인식된 ‘부동화’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고, 이에 대한 인물들의 기억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같은 중국인이더라도 표준 중국어인 부동화를 구사하지 못하는 이는 소외되도록 하는 관습으로서의 ‘내부 타자화(Internal othering)’를, 클로이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 타자의 단일언어주의(Monolingualism of the Other) ’ 개념을 적용해 설명했다. 데리다는 인간은 오직 한 가지의 언어를 모국어로 습득하지만 이는 본래 ‘타자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타자는 권력을 바탕으로 그의 언어만을 말하도록 교육하거나 강요하고,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은 언어를 배우고 소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베이징 방언을 사용하던 아추안이 부동화를 선호하는 다수로서의 ‘타자’가 지닌 권력에 의해 소외되자, 그가 공동체 안에서 존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리동이 자신 역시 베이징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타자가 강요한 언어에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야나가와> 중 아추안과 리동 한편, 클로이는 억양이 단순히 누군가의 정체성을 재단하는 지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실존하는 행위 로 인정할 수 있음을 보였다. 억양이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열망하고, 그에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방식을 가리킨다고 설명한 문화비평가 푸자 라간(Pooja Ragan)을 인용했다. <야나가와>의 후반에 아추안과 일본인 여성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지만 상대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고 표현한 장면과, < 후쿠오카 >(2019)에서 한국인과 중국인(만다린어 구사), 일본인이 단어가 아니라 발화의 톤과 몸짓을 통해 소통하는 모습이 그 예다. 단어가 무너지면, 삶의 방식으로서 실존하는 억양과 몸짓 등이 비로소 언어를 초월해 공명을 일으키고, 장률의 작품에서처럼 아시아 국가 간의 친밀감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클로이는 <야나가와>를 내셔널,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라는 개념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선택한 ‘억양’의 색다른 의미를 철학적 차원에서 발굴해 장률 작품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소개했다. 내러티브를 매개하고 인물들의 감정을 증폭하는 핵심 요소로서, 그리고 언어로는 극복할 수 없는 서로 다른 화자 간의 장벽을 친밀감으로 허무는 행위 그 자체로서 ‘억양’을 상정한다. 언어의 형태가 아니면서도 영화에서 인물 간 본연의 소통을 돕는 실천적 행위로서 ‘억양’의 지위를 재정립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소속감의 한계를 질문하기: 동시대 한국영화 속 화교 인물 연구 (홍콩대학교 현대언어문화학과 방문 교수 김소혜) 김소혜 교수는 동시대 한국영화가 화교 또는 조선족 출신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한국영화가 인물들의 다양한 정체성을 재현하는 데 여전히 한계를 보임을 지적한다. 화교와 조선족은 내/외국인을 가르는 이분법에 도전하고, 민족적 동질성에 관해 일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을 흔든다. 이렇게 국적이나 민족 인식에 관한 긴장을 논의하는 장이,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통해 마련되기 시작했다. 김소혜 교수는 화교를 이주 시점을 기준으로 두 종류 [8] 로 구분하고, 그중에서도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와 < 극한직업 >(이병헌, 2018), 그리고 < 신세계 >(박훈정, 2012)를 사례로 연구했다. 인천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성 다섯 명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낙후된’ 지역으로 묘사되는 인천은 번화한 서울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동시에 화교 인구가 이주한 공간이라는 이미지도 덧붙여지면서 작품 전반에 ‘소외’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더불어, 인물 다섯 명 중 화교의 후손으로 설정된 일란성 쌍둥이 비류( 이은실 )와 온조( 이은주 )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개성을 지닌 주체로 비춰지지 않는다. 일란성 쌍둥이라는 인물 설정에서 나타나듯,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으로서의 캐릭터는 그들에게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인물들 모두가 불확실한 미래를 찾아 떠나고, 그들이 함께 돌보던 고양이가 유일하게 인천에 남은 비류와 온조에게 건네진다는 내러티브 역시, 두 인물이 인천에게 입혀진 ‘소외된 지역’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함을 암시한다. 비류와 온조는 다른 인물들과 같이 몸소 성장을 경험하는 주체가 아닌 그들의 성장에 기여하는 주변적 인물 로만 그려진다. 2000년대 이후 화교 인물은 특유의 언어적, 문화적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국과 더욱 광범위한 중국어권 사회 사이의 소통을 매개하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문화에 더욱 잘 동화된 ‘ 안전한 비주류 ’로서의 화교 인물이 형성된다. 배우 진선규 는 매우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인물로 그려진 전작 < 범죄도시 >(강윤성, 2017)에서의 역할과 다르게, <극한직업>에서는 전직 유도 국가대표이자 현직 경찰로 등장하며 유순하고 정직한 이미지를 표방한다. 한국인 여성 장 형사( 이하늬 )와의 로맨스까지 등장하면서 그가 민족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내 위치를 점한다는 인식이 강화된다. <신세계>에서 이자성( 이정재 )은 화교 출신 인물이지만 이를 이용해 폭력 조직에 잠입하며 한국 경찰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반면, 이 작품에서 정청( 황정민 )이 일시적인 폭력 행사를 위해 불러들인 조선족 인물들은 의상과 말투 등에서 한국인과 크게 대비되도록 설정되어있다. 게다가 후반부에는 이자성마저도 끝내 경찰 조직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폭력 조직에 동화되고, 한국의 공식적인 사회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 진입한 지하세계에서 소속감을 획득한다. 한국영화에서 화교 인물이 배경으로만 소비되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낸 사례임을 인정하더라도, <극한직업>과 <신세계>와 같은 동시대 작품은 그들을 ‘한국에 동화되기 쉬운 덜 잔인한 비주류’라는 이미지로 재단한 후에 소환하려고 한다. 김소혜 교수는 이러한 설정이, 화교 인물들을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주장한다. 화교 인물들에 대한 가시성은 확보되었지만, 한국사회의 다양성 담론의 한계와 더불어 한국영화가 긴 시간 침묵을 강요받은 비주류 공동체를 재현하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경계 위의 여성 동성애: <녹야>와 <블루 송> 속 한·중 퀴어의 조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 미디어학과 박사 수료자 앤디 주) 앤디 주(Andy K. Zhu)는 중국 퀴어영화에서 한국과 중국의 퀴어적 조우가 발생하는 맥락을 설명한다. 특히 최근 발표되는 중국 퀴어영화 중 다수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성을 아우르는 중국 북동부의 ‘ 동북(Dōngběi) ’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9] 여기에 퀴어 연구를 접목해, 이분법적인 사고로부터 탈피해서 국적과 젠더 등에 관한 복잡한 질문을 사유하는 공간으로서 동북이 지닌 가능성 역시 제안하고, 관련 영화로는 < 녹야 >(한슈아이, 2023)와 <블루 송>(경즈한, 2023)이 언급됐다. 중국의 퀴어영화의 배경으로 동북이 부상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앤디는 영화의 본질이자 단어 자체에도 반영되어있는 ‘ 움직임 (Kino)’의 개념을 퀴어에 적용했다. 그는 다수의 퀴어영화가 인물들의 퀴어한 욕망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국경을 초월한 ‘움직임’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퀴어영화 연구에 필요한 방법론으로 ‘ 키노정치학 (Kinopolitics)’을 선택한다. 나아가, 두 작품에서 특히 돋보이는 퀴어한 인물들의 움직임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 경계 위의 여성 동성애 (Bordering lesbianism)”를 소개했다. 국가의 중심지로부터 소외된 지역에서 역시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여성 퀴어 인물들이 관계를 맺고 특유의 움직임을 실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녹야> 중 중국인이지만 한국으로 이주해 공항에서 세관 직원으로 근무하는 진샤(판빙빙)는 가정폭력과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로 고통 받던 중에 초록머리 여자( 이주영 )를 만난다. 두 사람이 공항 보안 검색 중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이방인이자 이주 노동자인 진샤에게 한국인인 초록머리 여자는 그를 유혹하듯이 미소를 지으며 가깝게 다가온다. 퀴어적 접촉의 시도 이후, 두 인물은 서로를 위협하는 존재들을 제거함으로써 국경, 젠더, 권력의 경계를 넘나들며 폭력에 저항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을 함께 실천한다. 작품에서 인천·서울은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한 이주 노동자와, 마약 밀매에 연루되며 불안정한 삶을 지속하는 한국인이 동시에 머무는, 역시나 역동성이 가득한 공간으로 표현된다. <녹야> 중 <블루 송>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인 하얼빈에 거주하며 서로 다른 민족적 정체성의 공존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소녀 루시엔이, 조선족 소녀 밍메이를 만나며 퀴어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극중 루시엔은 교내 공연을 준비하며 한복을 입어야 하는 장면에서 그가 입을 차례가 되자 여성용 한복이 모자라 남성용 한복을 입게 되고, 한복 자체의 질감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한국의 민족성을 상징하는 한복에 익숙하지 않은 것과 여성용 한복에 접근하지 않는 설정은, 국적과 젠더의 측면에서 루시엔의 정체성이 고정되어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또한 루시엔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만나 그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밍메이는 하얼빈에서 조선족이 머무는 공간으로 루시엔을 안내하며 또 다른 민족성의 경험을 유도하기도 한다. 두 작품은 퀴어적 인물에 대해 널리 각인된 이미지를 재확인하지 않는다. 대신 장르적 혼종성(네오 누아르인 <녹야>, 성장과 멜로를 섞은 <블루 송>)과 언어와 의복의 뒤섞임, 키노정치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역동적 공간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조우하는 장면을 짚으며 이들 작품의 ‘악센트 시네마(Accent cinema)’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특히 동북과 한국, 북한의 경계에서 퀴어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퀴어영화를 지리적 공간과 연결했다는 점이 독특했다. 이러한 지리적 경계가 지닌 영화적 가능성을 향후 중국어권 퀴어영화에 대한 연구에서 주목할 주제로 남겨두기도 했다. * 토론 * 패널 2의 발표자 3인이 발표한 후,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아트·문화산업학부의 박지희 조교수가 아래와 같이 질문했고, 발표자들이 답변했다. Q. 클로이 원셴 장에게 (질문1) <야나가와>의 배경이 되는 일본 후쿠오카현의 야나가와시는 국제적으로 활동한 일본의 예술가 오노 요코의 고향이자 일제강점기 조선의 윤동주 시인이 생을 마감한 지역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 역사의 상흔이 남아있는 장소 이다. 이를 배경으로 극중 인물들이 중국어의 암묵적 위계와 그로 인한 차별, 차별이 낳은 상처와 분투한다는 설정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이러한 배경 설정이, 클로이가 언급한 ‘악센트 시네마’가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품이 되는 데 기여하는 것일까? (답변) 시간 관계상 장률이 야나가와를 식민지의 상흔을 간직한 역사적 공간으로서 어떻게 사유해냈는지를 다루지 못했다. 오노 요코와 윤동주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역사적 또는 언어학적으로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많았다. 주목할 점은, 장률의 작품은 언어학적, 영화적, 역사적으로 풍부한 의미를 지닌 기호들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억양(악센트)’은 그러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역사적 핵심 주제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꼭 적용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Q. 김소혜 교수에게 (질문1) 한국영화에서 화교 인물들은 말씀해주신 대로 배경의 일부 또는 단일민족주의에 관한 고정관념을 연상시키는 객체로 소비되기도 한다. 하지만 ‘ 장르영화 ’의 문법 속에서 이들은 또 다른 종류의 매력이나 잠재력 을 발휘하기도 한다. 예시로 드신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발견하셨을지 궁금하다. (답변) 본 연구에서는 화교 인물들이 그간 작품의 주요 인물의 뒤편으로 물러서는 존재로 묘사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말씀해주신 대로 그들은 한국의 역사와 지역성을 깨닫는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성장 장르라고 할 수 있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비류와 온조를 일란성 쌍둥이로 설정해 서로를 거울에 비춘 대칭적 이미지로 제시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주의 역사와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세계>에서 역시 화교에 대한 편견을 답습하는 장면이 많이 발견되지만, 이자성의 경우 화교 출신이자 한국 경찰로 근무하는 양가적 정체성을 지닌 인물로 설정되어, 갱스터 누아르·언더커버 장르의 문법 안에서 모종의 자율성(또는 모호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기존의 경향을 전복할 만큼의 위력을 지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추후 화교 인물의 재현을 시도한 다른 작품들의 사례에서 지속적으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신세계> 중 *** [1] 1963년 10월 7일 발생한 주홍칭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도쿄에서 주홍칭(周洪景)이라는 인물이 정치적 망명을 위해 대만 입국 허가를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가 그를 중국 공산당으로 보내면서 대만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긴장이 발생했다. [2] 이는 다른 작품에서 여성 인물에 대한 한국인 남성 인물의 기대로도 표출된 바 있다. < 비련 >(정창화, 1967)에서 양일환( 남궁원 )이 한국 여성의 옷은 아름답고, 상대 여성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고 언급하거나, < 조용한 이별 >(정창화, 1967)에서 이상현( 신성일 )이 극중 유학생인 정예화(정형)와 창덕궁에서 만나 한복을 입도록 하고 시부모님께 절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예가 된다. [3] 하지만 모친은 현재 다른 남성과 결혼해 홍콩에 정착했는데, 이렇게 중년 여성 인물은 현 가정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다른 국적의 남성과 과거에 맺은 연인 관계를 숨기는 경향이 짙다. < 나는 비밀이 있다 >(김용덕, 1963)에서도, 차경녀( 주증녀 )는 홍콩에서 결혼한 적이 있지만 이내 한국으로 넘어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며 홍콩에서 낳은 자녀의 존재 역시 부정한다. [4] Doane, M.A., Film and the masquerade: Theorising the female spectator , Screen, 1982. [5] 이영재, 『아시아적 신체』, 소명출판, 2019. [6] 대표적으로 < 대폭군 >(임원식, 1966)이 있다. 한국어 버전에는 최은희가, 중국어 버전에는 리리화가 출연했다. 컬러로 촬영되었으며 홍콩 쇼브라더스 스튜디오와 서울 교외 지역 모두를 로케이션으로 하여 약 25,000여 명이 촬영에 임했다. 제작에는 오백만 홍콩 달러라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어, 양국 영화산업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 보은의 구름다리 >(최경옥, 1963), < 달기 >(최인현, 악풍, 1964) 등 신필름과 쇼브라더스가 합작한 작품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7] 이외에도 < 꿈 >(신상옥, 1955)은 전후 한국 여성이 맞닥뜨린 사회적 제약을 조신( 황남 )과 달례( 최은희 )의 금기시된 로맨스, 그리고 클로즈업과 몽타주 등의 장치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승려와 여성 간의 사랑과 성적 욕망을 다루며 사회적 금기에 도전한 1950년대 영화적 실험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8]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국 산둥 성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중국인을 ‘구화교’로,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92년에 한국과 수교를 맺은 뒤 한국으로 대거 이주한 한국계 민족, 즉 조선족을 ‘신화교’로 칭했다. [9] 동북은 1990년대부터 국영 공장들의 폐쇄로 중국에서 쇠퇴와 폐허의 상징이 됐지만, 앤디는 영화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수십년간 중국사회의 변천사를 반추하게 하는 공간으로 이 지역을 재조명한다.
1. 1973년 3월 31일자 중앙일보의 파리 특파원이 쓴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은 울분에 찬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국에서 로케 촬영한 <당수태권도>란 영화가 <변증법은 벽돌장을 깨뜨릴 수 있는가>라는 선전 문귀와 함께 완전한 공산주의 계급투쟁을 위한 영화로 둔갑, 파리에서 상영되고 있어 자유민주주의 한국이라는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다.” 이 성실한 특파원은 그저 소문만 듣고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직접 영화를 보고(“<당수태권도>의 토키가 중국어이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 영화에 대한 관련 평들을 찾아보고(“‘역사적 계급투쟁의 전위이다’라는 유력지 르몽드의 평까지 받았다”) 제작자까지 꼼꼼히 살펴본 후(“이 작품은 비공산계인 Ngay Hong에 의해서 제작된 영화이다”)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프랑스의 많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무조건 공산주의 선전물”로 받아들이게 했는지에 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문제의 묘는 상황의식을 가한 자막의 번역이 이 비공산주의 영화에 색채를 바꾸게 한 데 있다. 즉 완전히 자막 번역을 임의로 해 관중을 오도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또한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을 달아 이곳에서 상영중인 이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들이 등장하고 특히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삼고 있다는 데 큰 문제점이 있다.” 1)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내세운 공산주의 선전영화라니! 『중앙일보』의 보도 직후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경찰서, 문공부가 일제히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후속 기사에 따르면 진상은 다음과 같다. 문공부에 따르면 이 영화는 “합작영화가 아닌 순수한 우리나라 영화” < 정도 >인데, <정도>의 제작사 한진흥업은 제작에 앞서 홍콩의 장강영화사에 이 영화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여기에는 동남아지역상영권 양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수출신고절차를 밟기 전에 한진에서 장강으로 필름을 보냈고, 장강이 <당수태권도>라는 제목의 중국어 더빙 버전을 프랑스의 ‘계급투쟁촉진회’에 이중수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심각한 ‘오용’은 장강이라는 홍콩 영화사의 농간의 결과인가? 마침 영상자료원에는 이 영화 <정도>의 검열서류가 남아있다. 이 서류들에는 영화제작신고서, 진홍열, 백표(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진호 세 명의 홍콩배우들이 출연을 요청하는 국산극영화 외국배우 출연 승인 신청서와 장강과의 매도계약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매도계약서에 따르면 한진흥업과 장강영화사 사이의 계약은 1972년 2월 27일에 이루어졌다. 영화제작신고서는 이 영화의 제작기간이 1972년 10월 10일부터 1973년 1월 30일까지라고 명기하고 있다. <정도>는 1972년 12월 22일 문공부로부터 검열승인을 받고, 1973년 5월 12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그런데 홍콩 필름아카이브에 따르면 <당수태권도>가 홍콩에서 개봉한 것은 이보다 만 1년 가까이 앞선 1972년 6월 20일이다. 이 검열 서류는 극히 의심스럽다. 만약 홍콩 필름 아카이브의 기록이 맞는다면 한진은 이미 존재하는 영화의 허위 제작 신고를 한 셈이다. 덧붙이자면 <정도>의 감독은 강유신, 오리지날 시나리오 및 심의대본의 작가는 유일수이다. 홍콩영화 <당수태권도>의 감독은 도광계(屠光啟), 시나리오는 예광(倪匡)이다. 강유신은 한진흥업의 전신인 대양영화사의 < 낙조 >(1968)로 감독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도>는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감독 작품이다. 1930년대말 상하이 시기부터 영화를 찍은 도광계는 1950년대 홍콩 우파 내셔날리스트를 대표하는 감독이었으며, 이후 쇼브라더스 전속으로 활약한 관록의 베테랑이다. 2) 1960년대 중후반 신필름 영화들의 각본을 담당했던 시나리오 작가 유일수는 이 시기 ‘용팔이’ 시리즈로 박노식이 그의 독특한 스타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는데 공조하고 있었다.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獨臂刀 >(장철, 1967)의 작가로 시나리오 경력을 시작한 예광은 < 보표 保鏢 > < 철수무정 鐵手無情 > <십삼태보 十三太保> < 복수 報仇 > 등 이 시기 장철 영화의 가장 중요한 공헌자이자, 홍콩영화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필과 다작의 스타 작가였다.(그는 이소룡의 < 정무문 > 각본에도 참여하였다.) 이쯤에서 당신은 물을 것이다. 그럼 대체 <정도>/<당수태권도>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만들었다는 말인가? 적어도 서식의 완비라는 관료들의 꿈과 장사꾼의 야합이 만들어낸 저 서류들 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무망해 보인다. 진정한 ‘위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 서류 양식들 안에서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정도>/<당수태권도>는 1970년대 한국-홍콩, 한국-대만 여타 등지에서 횡행했던 ‘합작’의 전형적인 형태에 다름 아니다. 이 결합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아열대 기후의 홍콩은 가을과 겨울이 포착가능하며 오래된 중국적 풍경을 대체할 수 있는 장소가(고궁과 절) 있는 한국에서의 야외 촬영을 선호했으며, 스튜디오 촬영은 홍콩 쪽에서 담당하였다. 각자의 인건비와 상호 체류비를 담당하되 한국 내 배급권은 한국 회사가, 그 외 지역의 배급권은 광대한 화교 문화권 전역에 배급망을 연결해놓은 홍콩 회사에 귀속되었다. 크레딧, 특히 영화의 주요 창작 주체로 상정되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은 각각의 지역 버전에 따라 그곳의 관객들이 선호하거나 익숙한 이름만을 남기고 그 외의 이름들은 지웠다. 무엇보다 한국 같은 강력한 국가통제와 외화 유출 억제가 영화 정책의 이름으로 자행되던 장소에서 한국인 감독(제작자,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을 단 합작영화란 국내법과 산업적 재생산 모두를 충족시키는 기획이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복수의 기원의 영화가 발생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진정 <정도>/<당수태권도>의 사례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에 이미 내재된 포스트프로덕션적 탄력성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이 영화(들)는 이 부류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서로 다른 편집의, 서로 다른 더빙 버전으로 각각의 영화가 상영되는 지역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하였다. 당시 후시녹음은 다양한 언어권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홍콩 영화산업의 중요한 관행이었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 후시녹음의 탄탄한 스킬을 갖추고 있는 나라 중 하나였다. 여기서부터 더 확장된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더빙까지의 거리는 한 끝 차이다. 즉, <정도>/<당수태권도>는 조금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 부류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서로 다른 편집의, 서로 다른 더빙 버전으로 각각의 영화가 상영되는 지역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영화(들)은 무수한 전용 가능성을 향해 이미 열려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전용 가능성이란 소비되는 지역에 따른 더 적절한 상품으로의 교체 가능성에 지나지 않지만. 2.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이를테면 “착취당하는 자를 위해서는 건배를, 착취하는 자에게는 절멸을”과 같은 자막을 본 1973년의 파리 특파원이 느꼈을 기함을 한번 상상해보라)으로 점철된 르네 비에네의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한국인과 중국인 대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공분을 국가-자본주의의 앞잡이인 관료들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항거라는 계급적 대립으로 옮겨온다. 이 “이 최초의 전적인 전용영화”는 1967년 비에네가 『인터내셔날 상황주의자 제11호』에 기고한 「상황주의자들과 정치 및 예술에 반대하는 새로운 행동형태」 3) 라는 글에서 제시한 방법론의 현실태로 등장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전 세기의 혁명투쟁에서 이어받은 형식과 카테고리를 사용하여 체제 전복활동에 힘써왔다. 나는 과거로부터의 어떤 준거도 갖지 않는 수단을 통해 우리들의 이의 제기에 관한 표현을 완성할 것을 제안한다”는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선동적인 글에서 비에네는 ”스펙타클의 명제 그 자체를 전용(détournement)”할 것을 주장한다. 스펙타클 사회에 대항하는 실천이 그 자체로 스펙타클이 되어간다면, 여기에 회수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스펙타클의 미디어를 전용할 것. 전용의 대상으로 적절한 것은 포트로망과 포르노 사진, 대중잡지, 코믹스, 그리고 예술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업영화와 같은 것들이다. “특히 상업영화를 우리의 것으로 하자.” 르네 비에네는 자신이 공언한 바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이어서 이시이 테루오의 <불량누님전>과 스즈키 노리부미의 <공포여학교>를 전용한 <카마레로부터 온 여자들 Girl from Kamare>(1974)이라는 또 한편의 ‘전용’ 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 초 일본의 도에이 영화사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섹스와 폭력의 결합태로서 소위 ‘포르노 액션’으로 불리웠던 이 영화들은 노골적인 여성 신체의 전시와 착취, 그리고 젠더적 불안까지를 겸비한 포스트 68적 일본 대중문화의 급진성을 입증하는 실례였으며 또한 전세계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 시장의 중요한 공급물로 기능하였다. 즉, 이 영화들 역시 이 시장에서 빈번히 이루어졌던 바, <정도>/<당수태권도>와 마찬가지로 상영장소와 형태에 따른 부단히 탄력적인 대응이 강제되었으며 더빙과 재편집에 자유로웠다. 즉 전세계 대중들에게 가장 싸게 공급되는 염가의 상품으로서 이 영화들은 도작과 도용의 가능성에 활짝 열려 있었다. 르네 비에네는 이 두 번째 전용영화를 통해 국가와 시장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전복을 꾀하였다. 말하자면 이 상황주의자의 실천은 1970년대적인 의미연관은 차치하고라도 상품으로서 어떻게 상품에 대항할 수 있는가, 혹은 상황주의자의 어법을 따라하자면 스펙터클로서 어떻게 스펙터클에 저항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동어반복이지만 영화가 전적으로 ‘상품’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상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정도>/<당수태권도> 같은 영화를 두고 국가적 귀속을 혹은 오리지날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보인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영화를 보는 자들은 이 귀속의 문제에 거의 무감하기 때문이다. 누가 상품을 만든 자를, 상품의 국적을 따지겠는가?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왜 1970년대 한국에서 이와 같은 영화들이 그토록 유독한 저질영화로 자리매김되었는지, 또는 (거개가 골계로 끝나버렸지만) ‘태권도’라는 국가적 기표를 덧씌우는데 그토록 희화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지가 아닌 담론적 차원에서) 매달렸는지를 해명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이 영화들은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고급 산물들의 반대편에 놓인 가장 싼 상품으로서, 싼 값에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잘라지고 이어붙여지는 것을 대가로, 이 지역 영화 중 최초로 말 그대로 글로벌한 이미지-상품으로 소비되었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비 속에서 이 영화들은 상품의 형태를 얻고 비로소 세계성의 획득에 성공하였다고. 이 싸구려 상품은 고급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염가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들, 전세계의 하위계급자들이 향유하는 이미지-상품으로 기능하였다. 아마도 20세기 영화의 위계 중에서 가장 최하위에 위치해 있을 이 영화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한 열정과 분노, 그리고 장사꾼들의 잇속(과 1970년대 한국이라는 저 유신 시대가 낳은 기괴한 이미지의 유통)으로 형성된 기이한 야합의 산물인 이 이미지-상품은 말하자면 ‘빈곤한 이미지’(히토 슈타이얼)의 영화적 전신이며, <벽돌은 변증법을 깰 수 있는가>라는 상황주의자의 실천은 그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혹은 상황주의의 시효와도 상관없이 무한한 도작과 도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의 가능성으로 읽혀져야 한다. 3. 2000년대 이후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한국어로 처음 소개한 글은 2004년 4월 『씨네21』에 실린 아드리앙 공보의 「영화의 유용? 그 위험한 변신」이다. 4) 유운성은 아드리앙 공보가 전용의 ‘원본’으로 제시한 <당수태권도 唐手跆拳道>와 <정도 正道>의 관계를 밝혔다. 5) 또, 이 글을 보완, 확장한 글(「전용의 계보: 당수태권도는 변증법의 정도(正道)일 수 있는가?」 6) 에서 유운성은 이 영화의 ‘혼란스러운’ 창작주체에 관한 추측을 <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비교 및 <정도>의 심의대본과 오리지날 시나리오의 비교를 통하여 꼼꼼하게 수행한 바 있다. 7) 특히 상황주의자들의 실천에 관한 포괄적인 논의를 전개해가는 멕켄지 와크는 프랑스 마오이즘과 중국학 연구자 르네 비에네 사이의 긴장, 그의 두 편의 ‘전용’ 영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와 <카마레로부터 온 여자들 Girl from Kamare>(1974)을 논하는 데 책의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한편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68혁명과 영화’라는 주제하에 상영된 바 있으며, 2019년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당수태권도>는 worldcinemacentral.com이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 Wu Tang Collecti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8) 르네 비에네의 ‘전용’ 영화들은 우부웹(UbuWeb)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토 슈타이얼은 에세이 영화 <11월>에서 그녀의 매혹적인 개념 ‘빈곤한 이미지’와 ‘여행하는 이미지’를 전개해나가면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인용해오고 있다. 또한 당신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한국어 자막 버전과 중국어 자막 버전을 각각 유투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자막은 물론 어떤 한국어 화자와 어떤 중국어 화자의 노고 덕택이다.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은 계속된다. *** 1) 주섭일, 「프랑스서 공산주의 선전영화로 둔갑한 합작 무협영화」, 『중앙일보』, 1973.3.31 2) 국공내전의 와중에 홍콩으로 이주해온 도광계는 특히 1950년대 홍콩에서 1930년대의 상하이 좌파 영화들을 우파 영화로 ‘전용’해오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경력을 생각한다면 프랑스에서의 <당수태권도>의 운명에는 명확한 시적 정의가 있다.” Morris, Meaghan. “Transnational Imagination in Action Cinema: Hong Kong and the making of a global popular culture,”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5, No. 2, 2004. 도광계는 1957년에 만들어진 한국/홍콩의 첫 번째 칼라 합작영화 <이국정원>에 전창근, 와카스기 미츠오와 함께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당수태권도>는 그가 감독 크레딧에 올라 있는 마지막 영화이다. 3) Viénet, René. “The Situationists and New Forms of Action Against Politics and Art”,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No.11, October 1967. 이 글을 포함한 상황주의자들의 글은Situationist International Online(https://www.cddc.vt.edu/sionline/si/against.html)에서 읽을 수 있다. 4)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23961 5) 「<정도 正道>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가 된 사연」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7/10/causerie.html 6)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9/01/blog-post.html 7) 그 외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관한 영어 문헌으로는 다음을 참조. Wark, McKenzie. The Spectacle of Disintegration: Situationist Passages out of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Verso, 2013. 프랑스어 자막을 입힌 이 독특한 전용의 형태에 대해서는 Shochat, Ella and Stam, Robert. “The Cinema After Babel: Language, Difference, Power”, Screen, vol.26 no.2, 1985. 8) https://www.youtube.com/watch?v=ZmM2-SZV3Rs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어쩌면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할지 모르겠다. 할리우드 영화사에 거대한 영화사들이 그렇게 차례로 설립되었을 때는 눈길도 주지 않다가 왜 갑자기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에는 관심을 기울이는 건가요, 혹시 유명한 스타들과 감독이 여기에 참여했기 때문인가요. 위대한 이름들, D. W. 그리피스. 찰리 채플린, ‘미국인들의 스위트 하트’ 메리 픽포드. ‘남자 중의 남자’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만일 그렇게 질문했다면 당신께서는 오해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오해가 영화사의 순간들 중의 이 순간의 핵심이기도 하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이르기까지 짧은 우회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화가 대중들과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벌어진 일은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게 전개되었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손을 떠나자마자 자본으로 전화하였다. 단순하게 돈을 내고 영화를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는 시장에서 유통과정을 통해 가치를 구현하는 상품에서 출발하였다. 이 상품이 자본을 가진 자들에게 유리했던 것은 여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자유로운 예술가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고할 필요도 없는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엄청난 주급(週給)을 받는 몇 명의 스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용직 비정규 노동자들이었다. 영화에서 이윤은 대부분 초과 잉여가치를 바탕으로 발생시켰으며 심지어 이 착취과정은 오늘날까지 일반화되었다. 1917년, 미국 영화산업이 전국적인 규모가 되었을 때 26개의 독립적인 체인을 운영하고 있던 극장주들이 모여 합병 형태의 퍼스트 내쇼널 배급체인(First National Exhibitors Circuit)을 만들었다. 그들은 개봉작과 재개봉작으로 이원화된 극장 배급 시스템에서 개봉일정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려고 했다.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졌으며 채플린의 야심작이었던 <개 같은 삶>과 <어깨 총!>의 흥행을 좌지우지하자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를 준비하면서 이들을 <키드>의 촬영현장에 초대하여 이 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설득시켜 상영 일수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퍼스트 내쇼널은 미국 영화사에서 메리 픽포드와 채플린 영화를 내세워서 첫 번째 백만 불 흥행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아직 용어가 등장하진 않았지만 최초의 블록버스터를 독점적 배급체인의 기반 위에서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규모를 확장시켰고 1919년 전국 5,000개 극장을 체인화 시켰다. 물론 이 과정을 이미 할리우드를 장악한 제작사들은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파라마운드 영화사의 아돌프 주커는 공격적인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본의 회전속도는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합병과정과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대응 과정에서 복잡한 일이 벌어졌다. 이 과정은 그것만으로 영화라는 자본은 어떻게 자기 축적의 과정을 형성하였나, 라는 셀 수 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희생자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계약서 바깥에 놓여있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들과 출연하는 배우들은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당시의 계약 관례에 따라 영화사와 5년 단위의 주급 계약을 맺었고 그들의 이름이 아니라면 아무 가치도 없을 계약서를 그들의 동의 없이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영화사를 만들어서 영화를 제작하자는 이야기를 처음 나눈 사람은 찰리 채플린과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그리고 메리 픽포드였다. 여기에 데이빗 W 그리피스와 서부극 영화의 스타 윌리엄 S 하트가 가세하였다. 이들이 모여 영화사를 세운다는 것은 할리우드 전체가 긴장할만한 사건이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돈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스튜디오에서 안전하게 주급을 받으면서 영화를 연출하고 출연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영화 프로젝트를 그들 자신의 뜻에 따라 거절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이제까지 할리우드는 감독과 배우에게 그런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계약은 숫자로 이루어졌고 작품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와 배급업자의 판단에 따라야만 했다. 그들이 영화사 이름을 ‘(하나로) 맺어진, 뭉친, 결합한, (다소 과장해서) 단결한 예술가들(United Artists)’라고 지은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서명 직전에 윌리엄 S 하트는 파라마운트가 편당 20만 불로 인상하면서 여기서 빠졌다. 그때 윌리엄 S 하트는 일 년에 평균 여섯 편의 영화를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 픽포드와 찰리 채플린은 퍼스트 내쇼널 배급체인과 아직 계약이 남아있었다. 그리피스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자기 지분을 높이기 위해서 퍼스트 내쇼널과 별도로 세 편의 계약을 했다. 단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만이 아무 계약조건의 단서 없이 자유롭게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함께 사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다음 아름다운 이야기만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영화사의 순간들, 의 다음 순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돈의 문제이다. 하지만 돈의 이해관계로만 움직이던 할리우드에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이 정신을 이어받은 것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조에트로프 영화사를 차릴 때였다. 스필버그도 자신의 영화사를 가지기를 원했다. 그렇게 뉴 시네마 이후 감독들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기 위해서 하나 둘씩 영화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자본의 순환 안에서도 누군가는 영화가 예술가의 선택의 문제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 가지 후일담은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마이클 치미노의 어마어마한 야심에 찬 서부극 <천국의 문>의 박스 오피스에서의 재난으로 1981년 MGM에 매각되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거기서 시작했고 거기서 끝났다. 60년에 걸친 역사. 하지만 이 영화의 예술적 야심을 그리피스,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는 탓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