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고
- 감독
- 이준섭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김성곤
언제나처럼 열편의 영화를 골랐다. 작년 말에서 올해 초에 개봉된 아카데미 영화나 영화제 수상작 상당수는 뺐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필자들이 해줄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 중 < 우연과 상상 >과 < 나의 집은 어디인가 >를 골랐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년 최고 히트작은 < 드라이브 마이 카 >였지만 스토리텔링의 도구로서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보여주었던 영화는 <우연과 상상>이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 번’는 내 머릿속에 아주 오래 남을 것 같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애니메이션이면서 다큐멘터리이다. 이 기법을 이 영화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올바르고 정확하게 사용된 영화는 극히 드물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올해 뽑은 네 편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이다. 그 중 두 편인 < 미싱타는 여자들 >과 < 수프와 이데올로기 >는 한국사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이다. 그리고 지금이야 말로 한국 근대사를 <삼국지>스러운 관계성을 파는 양복입은 중년남자들 주인공의 유사조폭영화로만 그리는 것만큼 나태하고 부정직한 것은 없고 누군가는 이 따분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외칠 때다. <미싱타는 여자들>과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 지루함의 풍요로운 실제로 그런 영화들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올해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충무로에서 나온 대부분의 극영화보다 더 재미있었다. 리스트엔 넣지 않았지만 < 성덕 >은 올해의 한국 코미디 영화 중 하나였고 < 작은새와 돼지씨 >는 올해의 한국 로맨스 영화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 넬리와 나딘 >도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절절한 로맨스이다. 많이들 ‘허구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라고 할 텐데, 사실은 대체로 같은 시공간을 그린 허구보다 더 다채롭고,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은 종종 이를 놓친다. 씨네필의 심금을 울리는 영화가 두 편 있었다. < 놉 >과 < 썸머 필름을 타고! >인데, 망설이다가 <썸머 필름을 타고!>를 골랐다. 영화쟁이의 광기를 보여주는 인물로 <놉>의 앤트러스 홀스트도 멋지지만 <썸머 필름을 타고!>의 맨발만한 캐릭터는 없다. 일본 청춘영화의 대단한 팬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장르가 정말 완벽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제목을 제대로 적었는지?)>는 올해의 SF이다. < 애프터 양 >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는데, 인형눈을 이마에 붙인 양자경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완벽성’은 훌륭한 영화에게 필수조건이 아니다. ‘완벽성’과 상관없이 재미있고 좋은 것이 엄청나게 많은 영화들이 있고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도 이에 속한다. 이제 한국 극영화가 세 편 남았다. 모두 재미를 기준으로 골랐다. < 헤어질 결심 >을 제외하면 충무로 영화가 한 편도 없는데, 그건 올해 나온 기획 영화들 대부분이 더럽게 밋밋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이들은 제대로 나쁘거나 지루하지도 못했다. 실패할 위험부담이 없는 도전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영화들은 심지어 실패도 따분하다. < 성적표의 김민영 >은 올해의 코미디다. 사실이더라도 한국 독립영화스럽게 실없게 웃기는 영화가 아니냐고 따질 수 있을 텐데, 맞는 말이지만 그 실없고 의뭉스러운 웃음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곡을 찌르고 더 웃긴다. 어떤 관객은 이 영화 유머의 ‘충청도스러움’을 지적했는데, 이게 ‘요새 애들’의 유머 감각이라는 분석보다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리고 훌륭한 코미디 대부분이 그렇듯 그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헤어질 결심>은 좋은 고전 영화들이 가진 복잡하고 다층적인 매력을 잔뜩 가진 영화로, 정말로 로맨틱하고, 정말로 어이없고, 정말로 변태스럽고, 정말로 서스펜스 넘치고, 정말로 웃긴다. 하지만 이 불균질적인 매력이, 감독이 박찬욱이라는 대스타였기 때문에 ‘허락되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가 없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영화이다. 폭력적인 모녀 관계를 다룬, 유명한 배우는 한 명도 안 나오는 2시간 20분짜리 한국독립영화를 도대체 왜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재미있으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말이다. 올해 나온 한국 극영화 중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만큼 자극적이고 생생한 재미를 가진 작품은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꼭 즐거운 경험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트리거 워닝이 필요하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니까. 하지만 그런 경고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 관객들이 이 영화를 건너 뛰어야 한다는 말은 되지 않는다. 반대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바로 그런 관객들에게 최적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상당수는 (전부일 수는 없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며 극장문을 나설 것이다. 제목부터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영화이다. 이정과 엄마 수경은 서로에게 진저리를 치면서도 같은 아파트에 살며 같은 속옷을 공유한다. 이정은 벌써 20대 후반이지만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교통사고에서 시작된다. 언제나처럼 마트에서 치고받고 나왔는데, 그만 수경이 탄 차가 이정을 들이받은 것이다. 수경은 차가 급발진했다고 주장한다. 이정은 엄마가 자기를 일부터 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오싹한 건 후자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정은 그런 주장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이정이 견뎌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의 원인 대부분은 엄마다.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모성 서사와 여성 서사라는 용어를 끄집어 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어권에서 이와 관련된 용어는 언급이 꺼려질 정도로 오염되었고 이상할 정도로 납작하게 사용되고 있어 나로서는 쓰고 싶지가 않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모성 신화를 깨부순다’나 ‘모녀 서사의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같은 말을 들으면 ‘과연 그런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익숙한 ‘모성 신화’를 깬 ‘모녀 서사’인 서사 예술은 원래부터 엄청나게 많았고 여성창작자들의 접근성이 높아진 영화 매체에서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중년여성으로서의 엄마를 내세운 영화는 올해만 해도 꽤 여러 편 나왔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도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는 수많은 다양한 영화들 중 하나이지, ‘모성 신화 파괴’의 전위를 걷는 작품은 아니다. 그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다. 스코빌 지수를 따지는 매운닭발집도 아니고, 그렇게 보면 오히려 영화들이 납작해지는 것 같다. 영화가 세게 나가는 것은 사실이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딸을 차로 둘이받았을 수도 있는 엄마가 등장하면 아무래도 관객들은 긴장하게 된다. 영화의 재미를 주는 것 대부분은 바로 그 강한 자극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강한 감정과 자극의 연속 속에서 캐릭터를 다루는 고유의 방식에서 진짜로 완성된다. 김세인 감독은 종종 인터뷰에서 엄마인 수경이 비호감으로 보일까봐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정도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수경이 심각할 정도로 비호감인 사람인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경은 영화 내내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온갖 다양한 행동을 한다. 이정에게는 당연히 끔찍하고 남자친구의 딸에게는 더욱 끔찍하다. 단지 이런 캐릭터를 만들 때 창작자는 딸 캐릭터에 100퍼센트 몰입해서 엄마를 공격하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게 김세인의 첫 의도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영화는 이정도 수경 못지 않은 비호감으로 만든다. 특히 이정이 친구가 되고 싶어 접근하는 소희에게 이 사람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면 공감성 수치 때문에 질식할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이정에게 치우친 채로 영화를 본다. (아니, 딸이 그 꼬라지가 된 건 엄마 잘못이 맞다니까!) 하지만 이정과 수경을 붙여 놓고 일정 거리에서 떨어져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의 풍경이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동안 두 사람이 특별히 좋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불꽃처럼 강렬한 캐릭터들은 존재하기 위해 굳이 우리의 애정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 변명과 타협없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그 과정 중 관객들에게 엄청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가 들쩍지근하고 익숙한 타협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완벽한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김세인이 이 둘, 그리고 이들이 속한 세계를 그릴 수 있는 완벽한 관찰자 시점을 찾아냈음을 의미한다.
(본문 속 사진을 클릭하시면 링크가 열립니다.)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 이 어두운 세계에서 희망 가득한 긍정의 말로 이 글을 시작하는 걸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영화의 현재는 참으로 좋지요! 이보다 좋을 수 없습니다! 최상이죠! 그런데 내 생각보다 더 좋다면 어떡한다. 하지만 호들갑 떨진 맙시다. 그것도 좋지만 누구도 심장 마비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쇼크받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요즘 내가 LP를 자주 듣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브릿팝을 듣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더라도 뉴오더는 전혀 브릿팝이라고 할 수 없다. 1993년에 나온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Republic]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브릿팝은 90년대 영국에서 유행했던 다소 복고적인 기타 팝을 가리키는 다소 두루뭉술한 용어다. 전설적인 60년대에서 패션과 태도, 분위기와 멜로디를 빌려온 브릿팝은 그런지로 대표되던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20년 넘도록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차게 식은 차를 후후 불어 마시던 영국인들의 자존감을 채워주었다. 1997년 신노동당을 표방하며 18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토니 블레어 정부는 브릿팝의 흥행을 등에 업고 쿨 브리타니아라는 이름으로 음악과 영화, 패션과 축구를 아우르는 일종의 문화 캠페인을 벌인다. 실제로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던 블레어는 하원 파티에 브릿팝 밴드들을 부르며 힙한 모습을 과시하기를 즐겼다. 하지만 훗날 펭귄북스에서 3권으로 출간된 대변인 알라스테어 캠벨의 일기에 따르면, 다우닝가에서 열린 총리 취임 기념 연회에 비비안 웨스트우드, 랄프 파인즈와 함께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참석할 거라는 소식을 전달받은 TB(토니 블레어)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그를 초대한 건지 모르겠군. 그는 분명히 미친 록큰롤 같은 소동을 일으킬 거고 나는 전설적인 사건의 희생양이 되겠지. 앨런 맥기(*오아시스를 발굴한 크리에이션 레코즈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야겠어. 노엘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받아내야 해. 맥기는 떨고 있는 총리에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노엘은 괜찮을 거라고, 오아시스의 다른 반쪽(리엄 갤러거)을 초대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연회 당일, 아내를 대동한 노엘이 맥기와 맥기의 여자친구와 함께 총리 관저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타리스트를 마주한 블레어가의 아이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얗게 굳어버렸다. 노엘은 블레어의 성공을 축하했고, 블레어는 노엘의 성공을 축하했다. 그리고 둘은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고 싶지 않다… 영상 1. 다우닝가에 도착하는 노엘 갤러거 그날 노엘은 술을 진탕 마셨고, 별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으며, TB와 쿨 브리타니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물론 영원한 적은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수상을 지낸 제3대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의 말이다. 1997년은 브릿팝이 이미 프로파간다로서의 동력을 잃어가고 있던 해였다. 오아시스와 함께 브릿팝 전쟁의 당사자였던 블러가 브릿팝의 죽음을 선언하며 미국적인 향취로 가득한 다섯 번째 앨범 [블러]를 발표했고, 80퍼센트에 달했던 블레어의 지지율은 어느새 52퍼센트로 급락했다. 1999년 노엘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옵저버’에 입사한 햇병아리 기자였던 닉 패튼 월시에게 신노동당은 변장한 토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불평을 쏟아냈다. 아무 것도 바뀐 게 없어, 그렇잖아? 똑같은 똥들이 있는 다른 날들일 뿐이지. 그 뭐야, ‘우리는 이제 모두 중산층입니다We’re all middle-class now’? 그건 정말 모욕적이었어. 중산층이 된다는 건 좀 있으면 자살할 거라는 말이잖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루한 일이 바로 중산층이 되는 거라고! 그럼 애초에 총리가 주최한 파티에는 왜 참석한 거냐는 신참 기자의 질문에 노엘은 조금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난 그냥 이렇게 생각했지. 영국 총리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젠장, 내가 빌어먹을 괴짜라도 된 것 같군. 나는 그날 밤에 기사 작위라도 받으려는 모양이라고 확신했어. 누구나 살아가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잖아, 안 그래? -한 마디로 하면 이거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불역열호. -…정연씨,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떠오르지 않나요, 지돈씨? 케이팝으로 시작해서 < 기생충 >과 < 오징어 게임 >으로 그리고 다시 BTS와 청와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랑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겠어요? JD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그보다는 딸기와 퍼지로 코팅된 쇼트브레드가 들어간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떠오르는군요. 먹고 싶다 벤앤제리. -아니, 저기요. 과거에서 배운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전세계가 K-문화에 열광하는 지금… 음악 1 ‘Ice Cream as Main Course’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들려온다. 자비스 코커와 칠리 곤잘레스의 ‘Ice Cream as Main Course’ 전주다. 갑자기?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JD를 바라본다.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 핀 조명을 받으며 건반을 두드리고 있던 JD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먹을 꼭 쥔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길을 닦은 사람들입니다 ♪쓰레기로 가득한 오늘날의 거리 말예요 ♪타투 바와 스포츠 바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생각을 들을 수 없죠 ♪그것들이 가라앉으며 내는 잘랑잘랑잘랑 소리뿐 ♪에너지 드링크를 섞은 보드카 한 잔 더 ♪그치만 옛날로 돌아가면 ♪우리도 쿨했었는데 ♪헐리우드의 Musso and Frank’s에서 ♪우리는 메인 코스로 아이스크림을 시켰죠 ♪실크로 된 터번을 쓰고 ♪초코 우유를 마시면서 ♪물론 럼주 한 잔은 옆에 두고서 ... ... ... 노래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우리는 후렴을 함께 소리높여 합창했고, 아마 어느 부분에서는 눈까지 감았던 것 같다. < 어바웃 어 보이 >에서 휴 그랜트가 그랬던 것처럼. 영상 2 <어바웃 어 보이>의 한 장면 정말이지 나는 뮤지컬 영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슬프게도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나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콜라를 본다, 라고 정지돈은 [영화와 시]에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영화를 소비할 때는 배스킨라빈스나 벤앤제리스를 보는 거라나 뭐라나. 나는 다른 많은 이름들처럼 벤앤제리스라는 이름도 정지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벤앤제리스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출신의 두 친구 벤 코헨과 제리 그린필드가 1978년 설립한 회사다. 2000년 다국적 기업 유니레버에 매각되었지만 독립적인 운영 방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벤과 제리는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샌더스를 위해 2016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버니의 열망(Bernie’s Yearning)이라는 한정판 아이스크림을 출시했는데, 민트향 아이스크림을 덮고 있는 얇은 초콜릿 막을 숟가락으로 깨부수고 마구 뒤섞음으로써 상위 1퍼센트가 소유한 부를 99퍼센트에게 골고루 돌려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할까요? 벤은 곧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이 아이스크림의 맛을 표현하자면 참여(participatory)의 맛이 난다고 하고 싶군요. 참여하시겠습니까? 깔끔한 폰트와 배색이 돋보이는 벤엔제리스의 홈페이지에는 맛의 무덤이라는 섹션이 있다. 그곳에는 화석 연료(초콜릿 쿠키 조각, 공룡 퍼지 및 퍼지가 물결무늬로 스월된 스윗 크림 아이스크림), 거북이 수프(퍼지로 코팅한 캐러멜 캐슈넛과 물결무늬로 스월된 바닐라 아이스크림), 둔감한 신성(밀크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화이트 퍼지 우유가 스월된 화이트 초콜릿 아이스크림 그리고 다크 퍼지 우유), 도시의 혼돈(코코넛 아몬드 퍼지 칩과 뉴욕의 슈퍼 퍼지 덩어리가 스월된 초콜릿 아이스크림의 만남 그리고 코코넛 아이스크림과 화이트 및 다크 초콜릿 덩어리, 피칸과 구운 아몬드의 조화), 악랄한 조합(피칸, 아몬드, 건포도와 초콜릿 칩이 들어간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은퇴한 아이스크림들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쿨 브리타니아의 것도 있다. 그림 1 쿨 브리타니아 묘비 쿨 브리타니아 1995~1998 이 맛은 엄청난 강타자였지만 - & 파울로 아웃되었습니다. 딸기 앤 쇼트브레드 - 독실한 사랑의 조합 하지만 슬프게도 마땅히 누려야 할 명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즐기기엔 너무 영국스러웠나 봅니다. 말라버린 강둑의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블러의 베이시스트이자 ‘알렉스 제임스 제공Alex James Presents’, ‘좋은 웨일스 공녀 모드Good Queen Maude’, 그리고 뉴오더의 노래 제목을 딴 ‘블루 먼데이Blue Monday’ 등 빛나는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다수의 치즈를 생산하는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성공적인 영농기업인 알렉스 제임스는 브릿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냐는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브릿팝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제 일부가 죽어요. 이런 식의 사카즘은 영국의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조너선 스위프트에서 로렌스 스턴, 토머스 드 퀸시,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G.K. 체스터턴 등으로 이어지는 두터운 계보(절반 이상이 아일랜드계로 이루어졌다는 게 특히 영국적이다)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리씨는 자신이 이끌었던 전설적인 밴드 더 스미스의 재결합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꾸한 바 있다. 스미스라고? 그 이름은 내게 말라버린 강둑에서 죽어가는 물고기를 연상시킬 뿐인데? 브릿팝이요? 그건 그냥 똥처럼 들리는 소리죠. 펄프와 프로젝트 밴드 JARV IS...의 리더이자 최근 웨스 앤더슨의 영화 < 프렌치 디스패치 >와 함께 하는(companion) 샹송 커버 앨범을 발표하며 뜨뜻미지근한 솔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또 한 명의 영국 전통 사카즘 전수자 자비스 코커는 2017년 피치포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민족주의적인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깃발을 흔드는 음악 같은 게 아니었어요. 브릿팝이라고 불렸을 때는 정말로 불쾌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어떤 대안적인 문화를 전용해서 거기에 유니온잭을 꽂고 크레딧을 모두 가져가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심지어 다섯 번째 회고록을 출간한 유명인들이 득실득실한 영국의 문화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코커의 첫 번째 회고록은 2022년에야 출간된 예정으로, 책소개에 따르면 이것은 자비스의 독특한 삶, 펄프, 20세기 대중문화, 좋았던 시절과 그가 차라리 잊고 싶은 실수라고 말하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일생 동안 축적된 파편들은 글쓰기와 뮤지션십, 퍼포먼스와 야망, 스타일과 연출 기법 등 그의 창작 과정을 보여준다. 이건 인생 이야기(life story)가 아니다. 다락방 이야기(loft story)다. 회고록의 제목은 [좋은 팝, 나쁜 팝Good Pop, Bad Pop]이라고 한다, 세상에. 혼톨로지, 혹은 지나간 미래/도래할 과거의 유령 그림 2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한 장면 그러니까 문제는 책이고 음반이고 영화다. 닉 혼비의 소설(책)을 각색한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Fidelity>(영화)에서 챔피언십 바이닐이라는 이름의 레코드점(음반)을 운영하는 존 쿠색은 말한다. 정말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다. 책들, 음반들, 영화들—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날 얄팍하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것이 빌어먹을 진실이다. 블라블라블라. (어디선가 자비스 코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나는 내가 깊다고 말한 적 없어, 나는 아주 깊게 얄팍하지 ♪내 지식의 부재는 광대하고, 내 지평은 좁다 ♪난 내가 크다고 말한 적 없어, 똑똑하다고 말한 적도 없지 ♪만약 네가 내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영원히 기다려야 할 거야 ♪여어엉원히 말이야 -책들, 음반들, 영화들은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는지의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JD가 이어 말했다. -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책들, 음반들, 영화들이 중요한 건 우리가 그것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요. -같은 말 아닌가요? -아니요. 존 쿠색의 말을 생각하세요. 같은 영화에서 쿠색은 화면을 바라보며 이렇게 묻죠. 불행하기 떄문에 음악을 듣는 걸까, 음악을 듣기 때문에 불행한 걸까? 그 둘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정지돈에 따르면 그것들이 우리를 매혹하는 이유는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는 늘 심령 현상을 전달해왔다고 키틀러는 말했습니다. 라캉에 의하면, 실재계에서는 시체라는 단어조차도 완곡어법이기 때문입니다. 정지돈은 계속해서 키틀러를 인용했다. 1837년 모스 부호가 발명된 후, 영매 강령술자들의 ‘노크를 하는 영혼들’이 망자의 영역에서부터 각자의 메시지를 가지고 즉각 뒤이어 등장했습니다. 또한 사진 건판들이 영혼이나 유령의 모상들을 지체 없이 전달하기 시작했고요. 1878년 에디슨이 ‘북아메리카 리뷰North American Review’에 자신이 최근에 발명한 축음기가 어디에 사용될 수 있을지를 예견했을 때, 그 열 가지 목록 중 하나는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말”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뤼미에르는 영화를 가리켜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도구에 불과하며 미래 없는 발명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책은 어떨까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제논이 델포이 신전에서 무엇이 가장 훌륭한 삶인가에 대해 신탁을 청했을 때, 그가 받은 대답은 죽은 이들과 교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필로소피아라기보다는 네크로필리아에 더 가까운 신탁을 듣자마자 고대인의 글을 읽으라는 뜻이라고 이해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컴퓨터로 편집한 자료와 샘플을 구식 신시사이저 음색이나 어쿠스틱 악기와 뒤섞고, 라이브러리 음악과 영화음악에서 영감받아 만들거나 통째로 훔친 모티프를 인더스트리얼 드론과 추상적 노이즈에 엮으며 낭송이나 습득한 소리를 신비한 뮈지크 콩크레트/라디오 드라마풍으로 삽입해서 음악을 만드는 혼톨로지의 전략은 이미 고대에도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편집과 전유, 샘플링과 빙의, 그리고 아카이빙은 최근에야 발명된 게 아니라 기록 그 자체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조건이라는 거죠.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사태를 명료하게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예요. 우리의 영화에도 혼톨로지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이용… 과거를 새롭게 상상하는 동시에 미래를 새롭게 기억… 다중적인 시간 축을 동시에 나열… 일종의 피드백 루프를 통해… 어째서일까? 그의 말은 마치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렸고,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꽤나 길게… 꿈에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죽은 존재들의 무언의 호소에 민감해지는 게 아닐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미래가 과거의 미래, 곧 역사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이론적으로 순수한 선행 기억상실 모든 것은 시간 문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원고를 마감하는 것도 시간 문제고, 밀린 책을 쓰는 것도 시간 문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돈? 물론 중요하지. 그렇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만 하다면. 시간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관련된 문제는 또 있다. 뭘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건 약간의 시간만 흘러도 까맣게 잊혀진다는 사실이다. 정지돈이 말하는 몇몇 고유명사들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역자 유현주 선생을 모시고 출간 기념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내개 전혀 새롭게 들렸다. 혼톨로지? 물론 알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물론 혼톨로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을 두어 번은 읽었으니까.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읽었다. 반쯤. 나원영과 강덕구가 번역한 마크 피셔의 글들도 읽었고, 큰 상관은 없지만 베리얼의 첫 두 앨범을 최근 LP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들은 내게 매번 새롭게만 느껴지는 걸까? 내게 아주 많은 시간이 있다면 책상 앞에 앉아 이것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볼텐데. 하지만 나는 시간이 없다 그리고 나는 마감을 해야 한다. 마치 나는 입이 없고 그리고 비명을 질러야 하는 것처럼! 그럴 때면 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몇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구글링을 하던 나는 시간에 쫓기는 흔들리는 눈으로 검색 결과들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내가 찾는 줄도 모르고 절박하게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한다. 유레카. 나는 정지돈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한다. -자, 들어보세요 지돈씨. 혼톨로지 음악 경향의 창작 방식에는 작곡, 연주, 녹음 과정이 생략되어 있고 타인의 음반을 샘플링한 후 이를 편집하고 아날로그 음반의 노이즈를 증폭 혹은 삼입시키는 식으로 창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창작 과정은 작곡은 쓰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빙의되게끔 허용하는 것의 문제라는 트리키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Maxinquaye]는 정해진 구조 없이 트리키 본인의 맘에 든 몇몇 단편적 소리들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생략… 또 생략…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어때요, 제가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차용했는지 알겠어요? -빙의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홍상수에? -아니요, 근데 좋은 아이디어이긴 하네요. 그건 일단 키핑 해둘게요. 제가 꽂힌 구절은 이거에요. ‘정해진 구조 없이’ ‘본인의 맘에 든 몇몇 단편적 소리들을 토대로’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저는 이게 이번 원고뿐만 아니라 우리 영화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구태여 매끈하게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단편들로만 채우는 거죠. 장면들, 인물들, 대사들, 장소들, 소리들, 작은 이야기들. 그러니까 고다르가 언젠가 자신의 영화에서 한 인물이 단순히 여기에서 저기에서 이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길을 걷는 장면을 찍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 것처럼요. 대신 우리는 그걸 다른 사람들의 작업에서 가져오는 거고요. -그게 뭐지? 어떤 건지 잘 와닿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요? -이렇게 하는 거라니까요. -??? -바로 이렇게요! (다음 회에 계속) *이 글은 다음 글들의 크고 작은 부분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졌다.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감기도령, 문피아, 2021) [참을 수 없는 가우초](‘크툴루 신화’)(로베르토 볼라뇨, 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2013) [영화, 축음기, 타자기](프리드리히 키틀러, 유현주.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Ice Cream as Main Course'(Jarvis Cocker and Chilly Gonzales) [영화와 시](정지돈, 시간의흐름, 2020)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아이스크림, 무슨 맛?'(오마이뉴스) 'Tony Blair was worried Oasis would trash Downing Street'(NME) 'Noel looks back in anger at drinks party with Blair'(The Observer) <디스 이즈 팝>(S01XE05)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The 50 Best Britpop Albums'(Pitchfork)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스티븐 프라이스, 2000) <레트로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최성민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7)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전주국제영화제 엮음, 프로파간다, 2021)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 '크래클의 형이상학- 아프로퓨처리즘과 혼톨로지'(마크 피셔, 420 옮김, 네이버블로그 '좋습니다') '레이브 이후의 런던'(마크 피셔, gkd 옮김, 네이버블로그 'K-atacccombb') '트릭놀로지의 유령들'(이엔씨, 포스타입 '알 수 없는 평론가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할란 앨리슨, 신해경.이수현 옮김, 아작, 2017)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햄릿이 연출한 선왕 시해의 비밀이 담긴 극중극 《곤자고의 살인》이 나온다. 햄릿은 공연을 위해 극단원들에게 연기를 지도한다. 햄릿: 부탁하건대 그 대사를 읊을 때 내가 보여줬던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네.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러하듯이 고함에 과장에 야단법석을 떨 바에는 차라리 장사꾼에게 배역을 맡기겠어. 손놀림도 허공을 휘젓지 말고 점잖게 움직여야 해. 폭풍처럼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더라도 평정을 잃어서는 안되네. (…) 그렇다고 너무 단조로워서도 곤란해. 각자 맡은 역할에 신중을 기하고 행동에 어울리는 말을 하고,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하게. 자연스러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알겠나? 햄릿이 연기에 대해 피력한 견해들은 16세기 영국의 연기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들을 담고 있다. 햄릿의 입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생각한 당시 연기술과 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그리고 추구하는 연기술을 집약적으로 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에 작가 자신의 견해를 투영하는 것을 작가의 자기반영적 기법이라고 한다. 몇 가지 예시를 더 살펴보자.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는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한다. 관찰자이므로 화폭에서 모델이 될 수 없는 작가가 자신을 정면으로 표현한 것은 회화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의사 출신인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작품마다 의사 역을 넣어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위폐범들』에서 주인공 에두아르를 「위폐범들」을 집필하는 소설가로 설정한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일기와 수첩에 「위폐범들」의 창작에 관한 구상을 기록하는데, 여기서 수첩의 내용은 지드의 실제 작품일지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 속에 작가가 등장하거나, 페르소나를 통해 작가의 견해를 대변하거나, 작품 속에 작품 제작에 관한 내용을 드러내는 것 모두 자기반영적 기법이다. 이는 작품 밖 작가 차원의 영역을 작품 안에 개입시키면서 작품 스스로 허구임을 드러내고, 관객은 작품 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모호한 상태로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즉, 작품 속에 현실을 현실 속에 작품을 견인해 오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 영화에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잘 드러난다. 초창기 영화에는 감독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하며 영화 안에 영화 제작자인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욕망의 법칙>에서 계산원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 내가 뭘 잘못했길래 >에서는 주인공들이 보는 TV속의 배우로 나타나 관객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한다. 관객은 영화에 몰입하다가 작품에 등장한 감독의 모습을 통해 이것이 영화였다는 사실을 각인하게 된다. 그리고 다수의 작품에 영화감독 역을 등장시킨다. <욕망의 법칙>, < 욕망의 낮과 밤 >(원제: 나를 묶어줘!)에서는 상대에 대한 집착과 욕정을 가진 감독으로, < 나쁜 교육 >에서는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을 그렸다. < 브로큰 임브레이스 >는 감독 역할에 알모도바르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기 시작한 작품이다. 영화감독 마테오(루이스 호마르 扮)가 시각장애인이 된 다음에 온전히 음성으로만 듣고 편집한 장면을 돌려보는 앤딩의 대사는 마음을 울린다. “중요한 건 영화를 끝내는 거야. 비록 앞이 안 보여도 영화는 끝을 봐야 해.” 2020년 작 < 페인 앤 글로리 >는 알모도바르가 자기반영적 기법을 집약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는 영화를 두고 “나의 70년 인생을 담은 이야기”라고 밝혔다. 영화의 포스터는 주인공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 扮)의 그림자를 알모도바르의 그림자로 배치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자전적 영화임을 드러낸다. 알모도바르는 배우 반데라스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는가 하면 자신의 집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처럼 세트를 재현했다. 심지어 미장센으로 사용된 살바도르의 부모님의 사진을 자신의 부모님 사진으로 배치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감독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나 어머니와의 관계, 건강상태 역시 알려진 사실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1) 2) 1)<페인 앤 글로리> 포스터-살바도르의 그림자는 알모도바르이다. 2)<페인 앤 글로리> 살바도르의 어머니 방에 있는 가족사진은 알바도르의 실제 부모님(안토니오 알모도바르와 프란체스카 카바예로)의 사진이다. 영화는 살바도르의 현재,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꿈, 그리고 첫사랑에 관해 고백하는 연극이라는 세 가지 구조를 통해 전개된다. 현재의 살바도르는 척추 융합 수술 후유증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의지를 상실한 휴직상태의 영화감독이다. 32년 전 개봉한 자신의 영화 <맛>을 리마스터링 한 기념으로 영상자료원에서 상영과 GV를 제안하는 바람에, 영화 이후 인연을 끊은 <맛>의 주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 扮)와 32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알베르토로 인해 접하게 된 헤로인은 살바도르를 어린시절 고향의 기억으로 인도한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살바도르에게 영화적 감수성과 어머니에 대한 애절함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카톨릭 학교는 무신론자가 되게 하는, 미장이 형 에두아르도는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하는 계기가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꿈에서의 어린 시절은 현재의 살바도르의 모든 원천이자 심연의 일부인 것이다. 살바도르의 자전적 이야기인 극중극 《중독》은 살바도르의 청년 시절, 동성애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모노로그 형식으로 전하는 연극이다. 살바로드의 집에 방문한 알베르토는 우연히 살바도르가 집필한 《중독》을 읽게 되고 매료되어 연극 무대에 올릴 것을 제안한다. 처음에 살바도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고해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거절하나, 결국 알베르토의 뜻대로 대본을 넘겨주며 자신의 대리자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살바도르는 연극 무대와 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한다. 살바도르: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게 좋겠어. 스크린 하나, 의자 하나. 팔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의자에 앉아. 알베르토: 팔다리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거든! 살바도르: 수정하고 나서 좀 멜로드라마틱 해졌어. 알베르토: 걱정마, 내 전공이 멜로드라마니까. 멕시코에 있었던 게 도움이 되겠네. 살바도르: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거야. 감정을 좀 죽여야돼. 감정을 조절해. 울지마 배우들은 울 기회만 있으면 울더라. 잘 하는 배우는 눈물 흘리는 배우가 아니라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배우니까. 알베르토: 뽀뽀해줘야겠다. (…)이번엔 셰익스피어도, 체호프도, 로르카도 아냐. 너를 연기하는 거야. 살바도르: 이상하게 하면 내 기분이 엉망이 될 거야. 잘 하면 훨씬 더 엉망이겠지. 《중독》에서 자신의 역을 맡은 알베르토에게 원작자로서 지시사항을 전하는 부분이다. 살바도르의 연극에 관한 견해는 곧 알모도바르의 견해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피력한 것처럼, 알모바르도는 자전적 영화 <페인 앤 글로리>의 살바도르를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내비치고 있다. 《중독》 무대에는 살바도르의 조언대로 스크린을 하나 놓았는데 그것을 통해 어린 시절 살바도르가 살던 동네, 보던 영화, 연인과 갔던 추억의 장소 등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비춘다. 이는 실제 알모도바르의 장소이기도 하다. 감독은 현재의 살바로드, 꿈속 어린 살바도르, 연극의 알베르토를 통해 자신을 대리하게 한다. 관객은 세 가지 버전의 알모도바르를 중첩시키면서 영화 내내 알모도바르를 상기하게 된다. 영화의 디제시스는 독립적이지 않고 현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영화의 정수는 앤딩 장면을 통해 구축된다.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한 살바도르는 다시 꿈을 꾸고, 영화 초반 등장한 기차역 꿈 장면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줌 아웃 되면 붐 마이크를 들고 있는 스텝과 바닥의 조명판이 드러나고, 살바로드가 컷을 한다. 스텝이 등장해 마지막 슬레이트를 치는데, 슬레이트에 적힌 영화 제목이 <첫 번째 열망>이다. 이 장면은 살바도르가 영화감독으로 제기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영화에서 두 시간 동안 보여준 모든 내러티브가 촬영의 일부였음을 암시하게 한다. 즉,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수미상관의 구조를 갖춤으로써 영화 속 세계의 층위가 무한히 순환하고 있는 구성을 취하는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실제를 바탕으로, 영화제작 과정, 영화적 현실, 꿈 그리고 연극이 상호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순환한다.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과 같다. 막이 내려도 관객은 영화의 무한 순환 세계 속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페인 앤 글로리>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총 망라되어있는 영화다. 현실과 영화, 영화와 현실을 순환시키며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유니버스에 관객을 가둔다. 팩트인지 픽션인지 모호한 상태, 그의 영화는 팩션이다. 어머니: 그 이야기꾼 표정하지 마라. 이런 얘기 네 영화에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웃들 이 영화에 나오는 건 싫어. 난 팩션이 싫단다. 살바도르: 팩션에 대해 뭘 아신다고! 어머니: 네 인터뷰에서 들었다. 이웃들도 영화에 나오는 건 싫을 거야. 시골 무지렁이처럼 표현한다고 생각할거다. 살바도르: 말이 왜그래요 엄마. 존경과 정성을 담아서 표현하는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엄마 얘길 한다고요. 엄마와 이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요. 전부 그분들 덕택이라고 하는데.. <페인 앤 글로리> 중. 지금까지 영화와 영화를, 영화와 연극을, 그리고 영화와 현실을 연결하며 형성하는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1편 「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편 「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3편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을 통해 알아보았다. 글을 읽고 영화를 다시 관람하고 싶어졌다면 알모도바르 팬으로서 절반은 성공했다 자평하고 싶다. 그리고 알모도바르 영화에 대해 엉켜있던 날실과 씨실이 조금은 풀렸기를... 감상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시각이 있다면 나눠주시길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