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영웅
- 감독
- 이반 나기
< 후쿠시마 내 사랑Gruße aus Fukushima >은 독일 감독 도리스 되리에의 신작이다. 국내의 씨네필 관객들은 도리스 되리에를 아마도 여전히 < 파니 핑크 >(1994)라는 로맨틱 코미디로 많이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되리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그 작품 이후로도 극장용 영화뿐만 아니라 TV 영화, 다큐멘터리, 문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15여 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꾸준히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중견작가가 되었다. 되리에는 <파니 핑크>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관계에 서툴고 어설퍼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여성 캐릭터를 낙천적이고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특별한 재능을 보여 왔다. 그 외에 그녀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으로는 < 내 남자의 유통기한Der Fischer und seine Frau >(2005)과 <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Kirschbluten-Hanami >(2008)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과 충돌을 들 수 있다(특히 일본 문화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유명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유쾌한 소동극을 만들며 해방적 순간의 찰나적 즐거움을 선사하곤 한다. 고백 하나를 하자면, 사실 나는 되리에 영화를 한 번도 온전히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사회에서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여성들이나 서로 다른 소수자들 간의 우정과 연대를 끈질기게 그려온 그녀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해소되지 않는 불만을 가져왔다. 되리에 특유의 낙관주의가 유발한 순진함은 그녀의 인물이 겪는 좀 더 구조적이고 심각한 갈등을 개인들 간의 위로나 오리엔탈리즘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간문화적 조우의 클리셰로 손쉽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 후쿠시마 내 사랑 > 역시 이런 비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요 몇 년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였고, 그야말로 ‘사사롭게’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도리스 되리에가 던지는 ‘작가성’에 대한 질문 때문이었다. 되리에는 우리가 흔히 ‘작가적인 것’으로 범주화하는 관습적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진지하지만 날카로운 성찰, 냉정한 거리 두기, 비극적 영웅주의, 폭력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극단을 추구하는 예술적 의지, 묵직한 울림,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이라는 성별 같은 것 말이다. 반면 그녀는 여성 감독이고, 사안을 가볍게 다룬다고 가정하는 ‘로맨스가 섞인 소품 드라마’와 코미디의 장인이며, 심각한 상황에서도 낙천적이고 유쾌한 태도를 유지하고, 고독한 영웅보다는 늘 우정이나 연대에 집중하며, 때로는 둔감한 문화적 클리셰를 사용한다. 하지만 정말로 되리에의 친밀한 낙관주의와 유쾌한 코미디는 진지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에 부적절한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코미디를 만들어낸다면 정말로 작가적인 것 아닌가? 일관된 작품세계를 구성해온 그녀는 왜 작가로서 진지하게 잘 논의되지 않는가?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다룬 < 후쿠시마 내 사랑 >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주는 영화다. 놀랍게도 되리에는 몇 년 전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대규모의 비극적 재난을 코미디로 다룬다. 심지어 이 영화에는 실제 지진 당시의 푸티지가 간헐적으로 삽입되기도 하다. 그럼에도 집단적 트라우마와 코미디를 융합해 ‘트라우미디(traumedy)’ 또는 재난 블랙 코미디를 만들어낸 그 상상력과 대범함은 놀랍다. 독일 여성 마리는 자신의 잘못으로 결혼을 망치고, 상실감을 치유하고자 후쿠시마에 온다.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불안정한 마리는 ‘Clowns4Help’ 소속의 광대로 지진 피해 지역의 피난민들을 위로하는 자리에 자원한다. 그러나 광대 공연은 거의 대부분 여성 노인들로 구성된 캠프의 피난민들과 소통되지 않고, 마리는 좌절감에 빠진다. 되리에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불통을 낯선 세계에서의 외국인의 이질감을 일방적으로 전시하는 ‘번역불가능성(lost in translation)’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구 1세계 백인 여성의 위선이 그녀 스스로를 어떻게 함정에 빠뜨렸는지를 부조리 코미디를 통해 드러낸다. 마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를 찾는 정서적 하이에나다. 그녀는 공연에서 냉정한 반응을 얻은 후 마을의 중과 사케를 마시며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곳에 있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여행의 이유를 털어놓는다. 개인의 고통이 가장 커서 자기 상처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자신의 영향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이 서구의 백인 여성은 자신의 도움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도, 그럴 만큼 약해 보이지도 않는 피난민들과 애초에 조우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웃음’은 뛰어나게 표현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성찰 또한 깊이 있게 서사화된다. 로우 앵글의 바스트 쇼트로 어색하게 개별 인물들을 포착하는 방식은 환경의 부적응자가 된 주인공들의 당혹감을 만화적 프레임으로 표현한다. 이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낯선 땅과 언어와 사람들에 둘러싸인 마리만이 아니다. 자신의 일상적 공간이 방사능측정기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제한금지구역이 되고 유령이 출몰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사토리 또한 환경의 부적응자가 된다. 광대는 스스로를 희화하하며 공연하는 동안에는 자신을 보고 웃을 권한을 타자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마리는 자기 중심성과 힘의 우위를 놓지 않는다. 마리가 진정으로 광대가 되는 순간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폐허의 집으로 돌아간 사토리와 함께 기거하면서부터다. 그 집에서 마리는 게이샤였던 사토리에게 끊임없이 타박을 듣는다. 어설프게 마루를 닦고 차 마시는 법을 교육받을 때,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힐난을 들을 때, 그리고 마리가 “You are elegant”라고 사토리를 칭찬하자 “You are like elephant”라는 어이없는 답을 들을 때. 힘의 역학 관계가 바뀌면서 마리는 의도치 않게 사토리와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그러나 흑백의 단조로움과 불협화음의 묵시론적인 피아노와 전자음들은 마리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사토리의 무례함을 불쾌하거나 우스꽝스럽지 않은 시적 부조리로 승화한다. 특히 절제되어 있고 단호한, 작은 몸의 나이든 아시아 여성과 일본의 전통적 가옥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덩치와 발걸음을 지닌 거침없는 몸짓의 젊은 백인 여성의 신체언어가 문화, 세대, 지역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관찰하는 카메라는 그야말로 스펙터클하다. 여성의 신체언어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그것의 사랑스러운 활용은 심지어 문화충돌 클리셰의 진부함을 가볍게 넘겨버리게 만든다. 3 핵 독성 폐기물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들이 가지런히 대칭을 이루며 쌓여있는 가운데 인형, 가구, 침구 등 일상의 흔적이 흩어진 초현실적, 묵시론적 폐허를 배경으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 둘 사이의 우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함께 집 앞의 나무에 매달려있다 쓰나미가 덮치면서 쓸려나간 애제자 유키를 사투 속에서 자신이 밀어낸 것 같다고 토로하는 사토미의 비통함과 죄책감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재난의 여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삶은 왜 계속되어야 할까? 영화는 그 답을 절대로 마리가 찾도록 하지 않는다. 그 답은 오히려 사토리에게 있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되리에는 반핵 피켓을 들고 발전소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나이든 일본 여성들의 다큐 사진을 몽타주해 보여준다. 이 비극은 단순한 자연적 재앙이 원인이 아니다. 마리가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덜대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떠나는 것처럼, 일본 3.11 재난도 인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살아갈 삶도, 미래로의 시간도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송전탑 반대 시위에 나선 밀양 할머니들처럼 이 여성들은 삶의 터를 떠나지 않고 책임을 지고 바꿔나가고자 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말한 것처럼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은 공범자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직접적으로 오마주하고 있는 < 히로시마 내 사랑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알렝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히로시마와 느베르라는 공간으로 은유화 된 두 남녀, 침묵을 매개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시간여행, 기억과 영화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등 진지하고 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 후쿠시마 내 사랑 >은 침묵의 자리에 여성신체의 언어를, 시간여행에 실수를 인정하고 미래를 책임지려는 나이든 여성들을, 영화이미지의 존재론에 웃음에 대한 성찰을 놓는다. <후쿠시마 내 사랑>의 코미디와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연대하는 여성들 간의 연대는 <히로시마 내 사랑>의 침묵의 미학과 묵직한 성찰만큼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곧 오랜 경력 속에서 장인의 능숙함과 지혜를 갖게 된 한 작가가 어떻게 어떤 순간에도 낙관주의를 잃지 않는 코미디의 대가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영화나 다 기구한 사연이 있기 마련이지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 터커 >를 만들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우여곡절을 넘겨야 했다. 애초 계획은 < 대부 2 >가 끝나는 대로 말론 브란도를 주연으로 촬영할 생각이었으나, 이는 < 지옥의 묵시록 >으로 인해 바뀌고 만다. 시대를 앞서 나간 천재의 좌절과 전후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 기치가 전쟁의 광기와 내재된 악마적 본성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코폴라는 두 번째 터커 역으로 버트 레이놀즈를 낙점하지만 배역을 맡기에 너무 어렸고, 시나리오가 지연되고 다른 프로젝트가 개입되면서 <터커>가 재개되었을 땐 불행히도 그 역을 맡기에 너무 늙어버린다. 최종 촬영이 들어갔을 때 터커 역을 맡은 이는 <지옥의 묵시록> 오디션에서 떨어진 바 있던 제프 브리지스였다.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 청춘낙서 > 때와는 반대로 조지 루카스가 제작을 책임지며 간신히 영화를 마칠 수 있었지만, 2,300만불의 제작비를 들인 <터커>는 본전도 회수하지 못한 채 망해버렸고, 이 실패로 코폴라는 16년 만의 속편, < 대부 3 >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코폴라의 꿈의 프로젝트였지만 좌초해버린 영화의 운명은 기가 막히게 실제 주인공인 프레스톤 터커의 삶과 닮았다. 1940년대 장삿속 위주로 판매에 몰두하던 미국 자동차 빅3, GM과 포드, 크라이슬러에 대항해 순수한 열정으로 안전과 편의에 입각한 자동차를 만들고자 했던 터커는 사기혐의로 몰려 오랜 기간 법정싸움을 벌여야 했고, 간신히 재판에서 이기지만 그로부터 6년 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그 도전의 좌절과 시련을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활력 넘치게 그려내는 코폴라의 유려하고 리드미컬한 연출은 인상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저평가되고 대중들마저 외면해 쓸쓸히 잊혀진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터커에 의해 처음 주창되고 채택한 안전벨트와 연료분사장치, 디스크 브레이크와 패디드 대쉬가 현대 자동차의 기본 장비로 쓰이고 있고, 혁신적인 공기역학 스타일의 디자인 역시 현재 유행이 되었듯, 코폴라가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창조적인 열정과 무한한 도전정신, 그리고 꿈과 아이디어는 생생히 남아 두고두고 곱씹게 만든다. 물론 조 잭슨이 담당한 들썩들썩 흥겨운 영화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조 잭슨.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라 느껴진다면, 맞다. 그는 펑크와 뉴웨이브가 약동하던 1970년대 후반 신성처럼 등장해 세련되고 도시감각 넘치는 스타일로 단숨에 주목받은 영국의 뮤지션이다. 펑크, 뉴웨이브, 스카와 레게, 팝, 블루스 그리고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들을 재해석하고 혼합해 자신만의 사운드를 창조한 그는 뛰어난 연주자이자 보컬리스트로, 어린 시절부터 로큰롤과 베토벤, 재즈 등 다양한 장르에 심취해 여러 악기들을 연주하고 작곡했던 수재였다. 영국 왕립음악 아카데미를 장학금 받고 다녔고, 졸업 후 연주활동을 하던 그의 데모 테이프가 듀란듀란과 트레이시 채프먼, 브라이언 아담스 등과 작업한 바 있는 음반 제작자 데이비드 커센바움 눈에 들며 데뷔하게 되었다. 고전을 경배하지만 한 장르에 안착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꺼리지 않는 그의 과감하고 진보적인 사운드는 익숙하면서도 모던한 경향을 띠는데, 90년대 이후 클래식과 연주 음악으로도 행보를 넓히며 더욱 원숙해진 음악성을 발휘하고 있다. 처음 영화음악을 담당한 건 1984년 <마이크의 살인>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영화가 재편집되며 존 배리의 음악으로 대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잭슨 자신도 영화 후반의 타이트한 작업일정에 많은 부담을 느꼈다고 토로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터커>에선 원래 내정됐던 존 윌리엄스를 제치고 그의 스코어가 간택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조 잭슨 Joe Jackson 그래서 그런 걸까. <터커>는 일반적인 스코어와는 조금 다른, 자유분방함과 실험적인 면모를 동시에 지닌, 복고 지향적인 컨템포러리 재즈 앨범 같다. 빅밴드와 스윙, 딕시랜드, 랙타임 그리고 부기우기 등 초기 뉴올리언즈 재즈 스타일을 기조로 밝고 명랑한 사운드를 영화 전반에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자칫 암울하고 무거운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 터커의 실패담을 희망차고 상징적인 신화로 반전, 격상시키는 효과를 준다. 담합과 관료주의 앞에 무릎 꿇은 시련에 찬 기업가 모습을 담기보다 낭만적인 영웅의 도전기로 비치길 원했던 코폴라의 감상적인 연출은 그래서 조 잭슨의 고색창연하지만 감미로운 사운드와 더 잘 어울린다. 만약 존 윌리엄스의 고전적인 심포닉 스코어였다면 이처럼 다양하고 색다른 분위기로 전환하거나 변화를 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과거 뉴스릴이나 징글(이른바 CM송)에서 쓰였던 스타일을 카피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장기인 블루스와 뉴웨이브 등을 가져와 재즈와 결합시키며 조 잭슨이란 이름을 명확하게 각인시킨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공장을 인수해 자신의 터전으로 삼게 되는 장면에서 흘러나온 ‘Factory’는 여백과 퍼커션, 공장에서 들릴법한 소음들로 공간감을 극대화시킨 상상력이 돋보이는 큐이고, 하워드 휴즈와 만나는 짧은 씬에 흘러나온 ‘Hangin’ in Howard Huges’ Hanger’는 그 당시 SF영화에서 유행처럼 사용된 테레민 사운드를 흉내 낸 센스가 일품인 트랙이다. 여기서 코폴라는 거대 세력에 맞선 고독한 영웅의 심리를 앙각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모노톤의 표현주의 스타일을 활용해 인상적인 씬을 만들어냈다. 터커가 자신의 주제가처럼 시도 때도 없이 부르며 호랑이 힘(?)을 불어넣는 ‘Tiger Lag’은 밀즈 브라더스나 루이 암스트롱이 불러 유명해진 올드 넘버를 잭슨 자신이 직접 부르고 있으며, 그 외 아들 영화라면 빠짐없이 작곡가든 지휘자로 참여하는 아버지 카마인 코폴라가 작곡한 ‘Tuker Jingle’도 멋진 조화를 이룬다. 이 이전부터 재즈의 매력에 빠졌던 잭슨이지만, 이 사운드트랙이 기점으로 보다 진일보한 인스트루멘털 앨범들을 선보이며 아티스트 반열에 올라선다. 실패한 영웅이자 아메리칸 드림의 다른 신화 프레스톤 터커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는 비록 코폴라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이처럼 훌륭하고 뛰어난 응원가를 남겨주었다. 그해 그래미상 최우수 영화음악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던 조 잭슨의 긍정적이고 희망찬 스코어는 타인에게 쉽게 전염되는 달콤한 꿈처럼 강렬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성공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찬가로 더할 나위 없다. Track List 1. Captain of Industry (Overture) 2. The Car of Tomorrow-Today! 3. No Chance Blues 4. (He's A) Shape In a Drape 5. Factory 6. Vera 7. It Pays To Advertise 8. Tiger Rag 9. Showtime In Chicago 10. Lone Bank Loan Blues 11. Speedway 12. Marilee 13. Hangin' In Howard Hughes' Hanger 14. Toast of the Town 15. Abe's Blues 16. The Trial 17. Freedom Swing / Tunker Jingle 18. Rhythy Deliv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