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몽뉴스 : 극동, 남한의 선거
- 제작년도
- 1948
<레닌> 몇 번이고 망설였다. 내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을 설정한 것은 아닐까. 이 날짜는 다른 자리에 맡기는 편이 나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순간들을 기록하기 위해서 자본가들의 이름을 열거해야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 이 순간을 말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렸다.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블라다미르 일리이치 율라노프. 우리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람. 지구상에 최초의 노동자 국가를 건립한 인물. 나는 레닌이 언제 처음 영화를 보았는지에 관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영화가 처음 파리에서 상영되는 그때 1895년 12월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계급 해방투쟁 동맹’을 결성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갔고 그런 다음 1897년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 1900년 레닌은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을 갔다. 그는 정치적인 팸플릿을 끝없이 써서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러면서 런던을 오가면서 정치적인 집회에 참가하였다. 일시적으로 1905년 9월 8일 러시아에 돌아가기는 했지만 (이른바) 2차 망명길에 올라 1917년까지 해외에 머물렀다. 왠지 저녁에 망명지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레닌의 모습은 잘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레닌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을 듣고 난 다음 눈물을 글썽이면서 막심 고리끼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이라도 듣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곡은 초인적인 음악입니다. 나는 인간이 정말 경이로운 일을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음악을 너무 자주 들을 수는 없습니다. 음악은 신경을 자극하여 멍청한 멋진 말을 하고 싶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끔찍한 지옥에 살면서 그런 아름다운 창조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게 만듭니다. 하지만 누구의 머리도 쓰다듬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손을 물리게 될 것입니다” <전함 포템킨> 1917년 10월 혁명에 성공하였다. 전세계가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본가들은 두려움에 질렸고 노동자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혁명에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즉각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미국은 한 편으로는 동맹을 맺고 다른 한 편으로는 러시아 내의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였다. 지도자 레닌은 물론 이 혁명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과도기라는 테제를 제출하였다. 문제는 과도기라는 정식화에 대해서 볼쉐비키 내부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트로츠키와 부하린은 과격하게 혁명의 실천을 요구하였다. 그들이 정치적인 사상투쟁을 벌이는 동안 여전히 자본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부르주아들과 지주들이 연합하여 외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개시하였다. 레닌은 안과 바깥에서 싸워야만 했다. 이때 레닌은 다시 한 번 인민의 결집이 승리를 향한 전진이 될 것으로 믿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도시의 노동자들과 달리 혁명의 사상을 충분히 학습하지 못한 농민들에게 혁명의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인 장애는 농민들의 다수가 그 당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문맹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때 레닌은 ‘혁명적으로’ 농민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민들)을 위한 학습 도구로 영화를 선택했다. 그래서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세상을 농민들에게 영화를 통해 알리고 또 한 편으로 농민들의 농촌에서의 투쟁을 기록하여 다시 도시에서 배급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공장위원회와 소비협동조합을 통해 상영하면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새로운 탄생을 알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지가 베르토프> 1918년 8월 13일 모스크바 역에서 그 당시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볼가강 유역의 카잔 지역으로 첫 번째 혁명 프로파간다 열차가 출발하였다. 이 열차에는 볼쉐비키 군인들과 노동자들, 인민들을 위한 7,000권의 책과 팸플릿 문건을 인쇄 수 있는 인쇄기. 영사장비, 편집실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열차에는 (훗날 에이젠쉬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촬영한) 에두아르드 티세와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 카우프만, 훗날 자기 이름을 지가 베르토프라고 부른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카잔 지역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으로 매주 신문을 편집하였으며, 그리고 일부 순간들을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그리고 촬영 분량들은 ‘키노 네델리아(주간 영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구성되었다. 아마도 고몽영화사에서 시작한 ‘시네 주르날’이 그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들 각자의 역사. 그들 각자의 상황. 그리고 그들 각자의 영화. 영화사의 순간들은 단지 국경을 넘어서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념,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그렇게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영화에서 스튜디오의 역사는 그 자체로 그 나라 영화의 역사의 하부 토대이며 동시에 대중영화의 정치경제학이다. 돈의 역사. 아무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스튜디오의 의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할리우드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독점자본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 고몽 파데의 스튜디오가 세워졌다. 그러나 독일에서 세워진 UFA는 다른 설명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베를린에 세워진 UFA(Universum-Film Aktiengesellschaft) 스튜디오는 독일 영화사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화가 지닌 상품적 성격에 따른 해외배급의 맹렬한 경제적 지역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독일은 군소영화사들이 흩어져있었고 할리우드 영화와 프랑스 영화, 이탈리아 영화들이 독일 영화시장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다. 1913년 독일에 개봉한 독일영화는 1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대중들은 전시 상황에서 구경거리를 원했고 수요는 폭등하고 있었으며, 사회는 전시경제로 불안하기만 했다. 이 상황을 근심한 것은 영화인들이 아니라 루르지방의 중공업자들 대표였던 알프레드 후근베르크였다. 그는 19·16년 독일 소규모 제작사를 중심으로 한 카르텔 형태의 도이치 리히트빌트(Deutsche Lichtbild)를 세웠다. 이것이 하나의 출발이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연합체는 불공정 거래를 했으며 경쟁 영화사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다. 여기에 개입한 사람은 독일 군(軍)장성이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었다. 전시체제였고, 아직은 바이마르 공화국 전야의 빌헬름 2세가 이끌던 프로이센 왕국의 마지막 황혼기였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놀랍게도 영화가 지닌 정치적 오락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간파했다. 그는 국방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국의 극장을 외국의 영화에 내주어서는 안 되며 외세의 영화들로부터 방어해야 합니다. 영화가 지닌 특별한 힘을 우리는 전시 중에 보았습니다. 이제 대중들을 집중시키고 통제해야 합니다” 아마도 루덴도르프 장군이 염두에 둔 것은 (정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전시 중에 내내 프랑스 국민들에게 유리하게 편집된 뉴스 릴을 통해서 영화의 프로파간다 홍보 활동을 했던 고몽영화사 ‘주르날 시네마’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아직 등장하기 전인 그 시절 영화보다 더 강력하게 전쟁의 현장을 전달하는 다른 수단은 없었다. 아마도 영화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그렇게 독일의 정치적 전술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치 문화상이었던 괴벨스는 어린 시절 그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루덴도르프 장군이 나서서 새로운 독일 영화사들의 연합체를 설립하였다. 이 연합체인 UFA는 합병형태(consolidation)로 서로 결합했는데 정확하게 동일한 형식은 아니지만 트러스트의 협약방식을 따랐다. 그들은 트러스트 협약형식처럼 서로간의 경쟁형태를 피하고 서로 간의 수익을 거두기 위하여 독점적 지위를 갖기는 했지만 각자의 독립적 위치를 포기해야했다. UFA의 경제적 협력방식을 규명하는 설명에는 영화학자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이견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환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UFA는 처음부터 프로이센 왕국의 군부 산하 명령을 따라야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된 다음에는 국방부에서 이 스튜디오를 관리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문화부에로 이관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장점도 있었다. 처음 UFA 스튜디오를 출범할 때 국가가 보증했기 때문에 독일은행인 도이체 방크가 거액의 기금을 내놓았다. 1917년 12월 13일 베를린에서 거의 기습적으로 UFA 출범을 발표하였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영화사들이 당황했지만 이 스튜디오를 주관한 사람이 루덴도르프 장군이라는 사실을 앍고 모두 침묵하였다. 군부는 그 당시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반대를 표명하는 것은 반국가적인 행위가 되었다. 처음 출범할 때 노르디스크 영화사. PAGU, 메스터 GmbH를 합병하였고, 1921년까지 21개 영화사를 UFA 스튜디오 아래 집결시켰다. 그러면서 바벨스베르크 스튜디오를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오늘날 영화사에서 프릿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무르나우의 <최후의 사람>을 보면서 감탄해마지 않는 UFA 스튜디오가 되었다. UFA는 거의 모든 영화를 제작했다. 극영화, 다큐멘터리, 민족지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매주 상영되는 뉴스 릴 영화를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 출발이 영화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UFA는 바이마르 문화의 위대한 꽃이 되었다. 여기서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독일 영화감독들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영화인들도 이곳으로 합류하였다. 프릿츠 랑, 빌헬름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조셉 폰 스턴버그, 에른스트 루비치, 빌헬름 디터, 로베르트 시오드마크(훗날 할리우드로 망명한 로버트 시오드마크), 심지어 빌리 빌더(훗날 할리우드에 간 빌리 와일더)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위대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릿츠 랑이 UFA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을 최면으로 조종하는 마부제 박사의 이야기 <마부제 박사>를 찍고 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감옥에서 자신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쓰면서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와 역사는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
그리피스가 도착하긴 했지만 영화는 아직 짧은 단편영화의 상영시간 길이로 만들어지고 있었고 그게 성공하면 그걸 마치 연속극처럼 이어가는 연쇄극(Serial films)의 형식을 산업은 선호하고 있었고 대중들도 사랑했다. 그건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보였다. 극장에는 세 가지 형식의 프로그램 모델이 공존하게 되었다. 여러 편의 서로 상관없는 단편영화들을 묶은 프로그램. 성공적인 연쇄극 영화를 중심으로 다른 단편영화들을 함께 상영하는 동시상영의 프로그램. 그리고 한 편의 장편영화. 상영시간이라는 문제는 영화사에서 생각보다 꽤 까다로운 주제이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며, 미학의 문제이며, 영화라는 제도에 관한 학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사법은 상영시간에 관여하지 않았다. 프랑스 고몽영화사는 이 형식이 시장에서의 좀 더 안정적인 성공을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루이 푀이야드는 이때 영화에 도착했다. 아마도 연쇄극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시네아스트는 루이 푀이야드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의 바람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결혼을 하면서 중단되었다. 여전히 글 쓰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루이 푀이야드는 저널리스트가 되려고 했다. 그때 신문은 세상의 소식을 한 지면에 모으는 장소였고, 사람들은 거기서 정보를 얻고 세상의 사건을 알게 되었다. 1902년 파리에 온 그는 아무 것도 잘 되지 않았고, 글재주가 있었던 그에게 1905년 시나리오 제안이 들어왔다. 그런 다음 고몽영화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 영화는 복잡한 테크닉과 영화문법을 요구하지 않았다. 현장을 지켜보던 루이 푀이야드는 그 이듬해부터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루이 푀이야드 루이 푀이야드는 자신의 연출방법의 경제학을 발명했다. 소설을 쓰려고 했던 그는 시나리오에서 전체 씬을 쓴 다음 구체적인 디테일은 배우에게 맡겼다. 아마도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의 대사는 나중에 편집하면서 자막으로 작업해도 시간적으로 충분했다. 루이 푀이야드는 무성영화 초기의 연극적 거리와 깊이를 유지하는 고정된 화면의 롱 테이크를 받아들이면서 그 앞에서 배우들의 동선을 씬의 변화와 연결시켜 나갔다. 이 방법론으로 <판토마>를 성공시킨 루이 푀이야드는 <흡혈귀 강도단(Les Vampires)>를 만들었다. 제목으로 오해하지 마실 것, 이 영화는 당신이 떠올릴지 모르는 ‘뱀파이어’와 아무 상관이 없다. 파리에서 신출귀몰하면서 공포로 몰아넣은 강도단 ‘흡혈귀’와 그들의 정체불명의 지도자인 이르마 벱(Iema Vep)의 이야기. 영화에서 현상범으로 이르마 벱을 보여주면서 이 이름이 강도단 ‘흡혈귀들(Vampires)’의 철자를 멋대로 뒤섞은 애너그램 임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루이 푀이야드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단순하게 시작한다. 저널리스트인 필립은 취재를 하다가 그만 ‘흡혈귀 강도단’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 이야기에 파리의 대중들은 이상할 정도로 매혹되었다. 고몽영화사는 연달아 후속편을 원했고 루이 푀이야드는 연재소설을 쓰듯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아마도 그때 루이 푀이야드는 마치 마감에 쫓기듯이 개봉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거의 초인적인 노력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능이 발휘되었음에 틀림없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풀려나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흡혈귀 강도단’은 파리 건물들의 미로와도 같은 건축구조 속에서 종종 동선은 미로처럼 이어지고 그 속에서 경찰들과 신비로운 추적을 벌인다. 게다가 수많은 장면들을 파리의 길거리에서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찍어나가면서 일차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의 음울하고 불안한 공기가 그대로 담겨졌다. <흡혈귀 강도단>은 모두 열 개의 연쇄극(Episodes)으로 이루어졌다. 제 1화 <잘려진 머리>(1915년 11월 13일 개봉, 상영시간 33분), 제 2화, <살해하는 반지>(1915년 11월 13일 같은 날, 15분), 제 3화 <붉은 암호>(1915년 12월 4일, 39분), 제 4화, <유령>(1916년 1월 7일, 30분), 제 5화 <죽은 자의 탈옥>(1916년 1월 28일, 35분), 제 6화 <최면을 거는 눈>(1916년 3월 24일, 54분), 제 7화 <사타나스>(1916년 4월 16일, 46분). 제 8화 <천둥의 주인>(1916년 5월 12일, 52분), 제 9화 <독살범>(1916년 6월 2일, 48분), 제 10화 <피로 물든 결혼식>(1916년 6월 30일, 60분) 뮈지도라와 장만옥 여기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는 ‘흡혈귀 강도단’을 이끄는 지도자 이르마 벱을 연기하는 뮈지도라이다, ‘뮤즈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뮈지도라(Musidora)라는 예명을 지은 잔느 로끄는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와 페미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19세기에 태어나서(!) 연극배우가 되었다. 뮈지도라는 연극 무대에 섰고, 신비로운 눈 화장을 하고 부모에게 배운 대로 망설임 없는 발언을 하면서 순식간에 파리 문화에서 노동계급 운동의 아이콘이자 부르주아 문화의 팜므 파탈이 되었다. 그래서 <흡혈귀 강도단>에서 뮈지도라가 연기하는 이르바 벱과 그녀의 일당들이 부자들의 집을 털고, 종종 과격한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은 테러로 보였고, 경찰들을 골탕 먹이는 장면들은 사법과 싸우는 모습으로 읽히기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흡혈귀 강도단>이 담고 있는 신비로움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은 비평이 아니라 한 편의 영화일 것이다. 비평가로 시작해서 감독이 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1996년 <흡혈귀 강도단>에 오마주를 바치는 영화 <이르마 벱>을 찍었다. 놀랍게도 뮈지도라가 한 역할을 여기서 홍콩배우 장만옥이 한다. 그때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장만옥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의 신비로운 감정으로 검은 라텍스 복장을 하고 파리의 옥상에 올라가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장만옥을 찍었다. 몇몇 장면에서 맛보는 설명하기 힘든 황홀감. 그렇게 영화사의 순간들은 섬광처럼 오가고 또 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