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우
- 감독
- 조정호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김승호, 김희갑, 노경희, 이대엽, 서애자, 김정옥, 지학자, 김종규, 추석양, 김신재, 이종철, 후라이보이
우리나라 희극은 왠지 감상적이다. 희극이 갖는 밝은 웃음과 축축한 눈물은 상관이 없을 성 싶은데 우리 희극에선 그것이 이상하게 동거 하고 있다. 1) 김희갑은 1945년 반도악극단에서 데뷔했다. 무대 뒤에서 배우들의 대사를 읽어주던 프롬프터였던 김희갑은 김대봉의 대역으로 코미디 배우의 길에 들어서서, 노인역과 코믹한 조연, 고복수, 현인 등의 모창에 재능을 보이며 악극단에서 눈에 띄는 배우로 성장했다. 한국 전쟁 무렵부터는 ‘웃기는 역을 도맡아’ 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는 반도가극단의 스타 코미디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1957년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에서 그의 특기인 현인, 남인수, 고복수 등의 모창을 선보이면서 영화계에 진출했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비공식으로 700여 편, 공식적으로 약 300여 편의 출연기록을 남기며,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작품에서 활약했다. 김희갑은 1950년대 후반, 약 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 중 18편 가량이 코미디로 분류되며 그 외에도 <선화공주>(최성관, 1957),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 <인생극장>(김지헌, 1959), <사랑이 가기 전에>(정창화, 1959), <유관순>(윤봉춘, 1959), <박서방>(강대진, 1960)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조연 혹은 단역을 맡았다. 1950년대 후반, 양석천이나 양훈, 구봉서 등의 동료 코미디언들이 코미디영화의 주연 혹은 비코미디영화의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할 때, 김희갑은 비교적 비중이 작은 조연이나 단역도 가리지 않고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늘려갔다. 이 시기, 김희갑을 코미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1958)였다. 이 영화에서 김희갑은 이종철과 석금성의 네 명의 아들들(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여, 연애담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와 코미디를 선보였다. 이 영화는 개봉관인 국도극장에서 제작비를 다 걷어 들일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함께 발매되었던 <오부자>의 사운드트랙 음반 역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이 영화의 성공은 1950년대 말의 코미디영화 붐을 이끈 기폭제가 되었다. 양훈과 양석천이 이미 인지도 있는 라디오 및 영화계 최고의 스타였던 데 비하여, 이제 막 영화에 발을 들인 악극단의 작은 스타였던 김희갑과 구봉서는 이 영화를 통해 ‘합죽이’와 ‘막둥이’라는 평생을 따라다닌 애칭을 얻으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사진1) <오부자>(권영순, 1958) 포스터. 왼쪽부터 구봉서, 양석천, 이종철, 양훈, 김희갑. ‘뮈지칼코메듸’, ‘음악희극영화’라는 장르 명칭이 포스터 왼편 위쪽에 명시되어 있다. 김희갑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코미디영화의 공동주연뿐 아니라 비코미디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성춘향>(신상옥, 1961))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밖에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박서방>(강대진,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하거나 단역으로도 출연(<청춘쌍곡선>,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선보였다. 1960년대 초반, 양석천․양훈의 활동이 뜸해지면서 코미디영화의 인기 상승곡선이 소강상태에 이르고 제작 빈도가 줄어들던 시기에 오히려 김희갑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김희갑은 이 시기 코미디영화의 명실상부한 주연배우로 자리매김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제작되었던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들에서 코믹 릴리프 역할을 수행하며 가장 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양석천과 양훈, 구봉서나 곽규석 등의 코미디언들이 코미디영화와 코믹 시퀀스를 통해 '코미디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냈다면, 김희갑은 코미디 장르나 코믹함을 넘어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즉, 김희갑은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보다는 공동 주연을 맡거나 극의 코믹한 성격을 불어넣는 조연 역할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연기 초반에는 그의 특기였던 모창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영화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로 갈수록 코미디보다는 드라마적 성격이 강한 영화에 출연했는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 <팔도강산>(배석인, 1967), <속 팔도강산>(양종해, 1968),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등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1970년대까지 계속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를 거치며 본격적인 TV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을 때, 코미디 배우들이 대부분 <웃으면 복이 와요>나 <쇼쇼쇼> 등의 코미디, 쇼 프로그램 등을 주 무대로 삼았던 것과 달리, 김희갑은 <꽃피는 팔도강산>, <제삼지대>와 같은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사진2)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김희갑과 구봉서는 춘향이를 잡아오라는 변사또의 명을 받아 춘향의 집에 가는 포졸 역할로 등장했다. 춘향의 수난이 시작되는 시점에 등장한 두 사람은 점차 고조되는 춘향과 변학도 간의 긴장을 잠시 완화시켜 주는 ‘코믹 릴리프’의 역할을 수행했다. 1950년대가 홀쭉이와 뚱뚱이, 즉 양훈과 양석천의 시대였다면, 1960년대는 구봉서, 김희갑, 서영춘 등의 코미디가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김희갑 코미디의 특성 역시 1960년대 영화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1950년대 김희갑은 다수의 코미디영화에 출연했지만, 주연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는 많지 않았으나 1960년대 영화들에서부터 김희갑이라는 캐릭터와 김희갑의 코미디 스타일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장르'로서 ‘김희갑’의 독특하고도 연속적인 관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영화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워낙 다작이었기 때문에 김희갑의 코미디를 몇 가지 경향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글은 1960년대 김희갑이 주연 혹은 주연급 조연으로 출연했던 코미디영화들로 텍스트를 한정하여 김희갑 코미디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인용했던 신문기사가 언급했듯이 "왠지 감상적"이고 밝은 웃음과 축축한 눈물이 동거하며 희극의 페이소스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이 '한국형 코미디'의 큰 특징 중 하나였다고 한다면, 여기에 가장 가까운 것은 김희갑의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김희갑의 코미디들은 1960년대 초반 영화계를 휩쓸었던 홈드라마에 근사(近似)한 것으로, 김승호 주연 홈드라마의 '코미디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60년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와룡선생 상경기>나 <팔도강산> 시리즈는 드라마적 성격이 강화된 코미디들로,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코미디들은 '엎치락뒤치락'의 활기로 표현되는 양석천 양훈의 코미디나 '청춘 코미디'의 성격이 강한 구봉서의 코미디와 달리, '페이소스'를 내세워 감상적이고 구구절절한 사연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누선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김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은 동아방송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인 <김희갑쇼>를 영화화한 것으로, <김희갑쇼>는 김희갑이 시골에서 올라와 성공을 하게 되기까지의 인생사와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어가며 흘러간 옛 가요를 이야기 중간에 끼워 넣는 뮤지컬 코미디극형식이었다. 라디오극에서 비롯된 영화 <김희갑의 청춘고백>은 김희갑의 장기인 모창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출세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뛰어든 가난한 청년과 그를 의지하는 고아 자매의 이야기를 큰 축으로 하는 '애조 띤' 코미디로 제작되었다. (사진3) <깁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 포스터. 김희갑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에서 김희갑은 시골에서 올라와 ‘몸부림’빠의 전속밴드 멤버로 취업한 ‘김희갑’을 연기했다. 코미디언들의 성공담을 허구로 재구성한 코미디영화는 1960-70년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감상성이 가미된 김희갑 코미디의 경향은 천경자가 썼듯이 "카이젤 수염의 센티멘탈"과 "친근감을 주는 한국적 체취"를 갖는 "그야말로 코리언적인 체취가 풍기는 좋은 개성의 코미디언"2 ) 이라는 그의 페르소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공감과 풍자 김희갑이 출연했던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는 총 18편이었다. 이 중, 확인 가능한 작품에 한하여 김희갑이 주연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은 <오부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복도 많지 뭐유>, <구혼결사대>, <부전자전>, <청춘배달>, <오형제> 7편이다. 이 7편의 영화에서 김희갑은 구봉서 등과 함께 공동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들은 로맨스가 가미된 청춘코미디에 가까웠다. 김희갑 역시 구봉서의 형제 혹은 친구 역을 맡아 취업과 연애에 성공하는 인물로 등장했는데, 단 한 편 <부전자전>에서는 김희갑이 구봉서의 아버지로 출연하여 중심 서사에서 제외되었다. 구봉서가 1960년대까지 이러한 청춘코미디의 경향을 이어가 자신의 장르로 만들었다면, 1960년대 김희갑은 매우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1950년대의 명랑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감상성'이 1960년대 김희갑의 코미디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진4)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포스터. 김승호를 주연으로, 허장강과 김희갑은 그의 친구로 등장하여 코믹한 노인 3인방을 연기했다. 기본적으로 코믹한 캐릭터였지만, 김희갑은 가족도, 돈도 없이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는 가련하고 초라한 노인의 감상성을 보여주었다. 1950~60년대 코미디영화에서 김희갑이 맡은 내러티브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경우에서 모두 김희갑은 공감을 하거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관객들과 심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첫 번째 경우는 김희갑 단독 주연 영화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경향으로, 김희갑을 주연으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가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이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 <합죽이의 신혼열차>(황외천, 1962), <희갑 목욕탕 개업하다>(안성찬, 1963),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색무지개>(조긍하, 1963) 등의 영화에서 김희갑은 주연이되, 논평하고 공감하는 관찰자 입장에 더 가까운 역할을 맡아 다른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내러티브 사건들에 개입하여 화해를 이끌어내는 인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주요 내러티브 사건이나 사연들은 주인공 김희갑이 방문하는 서울의 제자들, 개업한 목욕탕의 손님들 혹은 김희갑이 소유주로 있는 아파트의 입주자이거나 김희갑의 자식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김희갑은 은퇴한 선생, 목욕탕 주인, 여행자, 아파트의 소유주, 아버지로서 대면하는 이들이 일으키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함께 겪고 공감해주는 인물이 된다. 김희갑의 초기 대표작 <와룡선생 상경기>를 비롯하여, 1960년대 후반에 제작되어 1970년대까지 속편을 거듭하고 TV 연속극으로도 제작되었던 <팔도강산> 시리즈 역시 이 계열에 속한다. <와룡선생 상경기>는 은퇴한 와룡선생이 서울 사는 제자들을 둘러보기 위해 상경하는데 대기업의 중역이거나 사업가로 성공한 제자들은 와룡선생을 박대하지만 소매치기, 빠 걸, 가난한 과부와 상이군인 등 근대화된 서울에 적응하지 못한 제자들만 와룡선생을 따뜻하게 맞는다. 그리고 '너무 출세하면 인간미가 없어진다'던 와룡선생의 교훈에 따라 잘못을 뉘우치고 제각기 변화한 제자들이 한 데 모여 와룡선생을 전송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제시된다. (사진 5)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의 한 장면. 영화가 시작되면, 와룡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년퇴임을 하고 정들었던 ‘신도국민학교’를 떠난다. (사진 6)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의 한 장면. 서울에 온 와룡선생. 제자(이대엽)가 결혼하게 될 여성(엄앵란)의 아버지(양훈, 왼쪽)와 계속 소동으로 얽히게 되는 와룡선생(김희갑, 오른쪽). <팔도강산>(배석인, 1967) 역시 ‘팔도’에 사는 자녀들을 방문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전국 일주에 나선다는 큰 틀을 가진 이야기로, 김희갑과 그의 부인(황정순)이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이되 내러티브 사건은 이들의 자녀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한 서사 전략을 취한다. <팔도강산>의 김희갑 부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에 적합한 음악 및 풍물을 소개하면서 근대화된 조국의 모습에 감격하고, 어렵게 살고 있는 자식을 도와주고 버릇없는 자식에게는 깨달음을 주면서 여행을 마감한다. 그리고 마지막 회갑연에서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을 불러 모아 우애 있게, 효도하며, '조국의 역군'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이러한 영화들에서 김희갑은 여타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크게 공감하고 안타까워하고 깨달음을 주기도 하면서 화해와 중재를 이끌어 내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사진 7) <팔도강산>(배석인,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 이후 속편과 3편, 문화영화에서의 다양한 변주 시리즈들을 거친 뒤, 텔레비전에서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지속되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김희갑의 아버지 역할의 전형이 된 작품이었으나,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친정부적이고 선전적인 색을 드러내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공처가, 난봉꾼, 촌로, 구두쇠 등 일상적인 생활인으로서 코믹한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로, 김희갑이 출연한 코미디영화의 대부분이 이런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전자전>, <오형제>, <월급쟁이>, <마이동풍>, <신사는 새 것을 좋아한다> 등의 주연작 뿐 아니라 <고바우>, <구봉서의 벼락부자>, <로맨스그레이>, <남자조종법>, <남자식모>, <특등비서>, <신세 좀 지자구요> 등 조연으로 출연했던 대부분의 코미디영화 및 여타 장르의 드라마에서도 김희갑은 주로 코믹 시퀀스를 연기하는 일상적 생활인으로 등장했다. 이 경우, 김희갑은 평범한 인물이지만 숨기고 싶은 비밀 혹은 결함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관객들의 공감과 함께 웃음을 이끌어내는 인물로 기능한다. 즉, 김희갑은 밖에서는 바람을 피우지만 집에서는 부인에게 꼼짝 못하는 공처가(<마이동풍>, <로맨스 그레이>, <남자식모>, <특등비서>), 급사를 사랑하는 회사 중역(<오형제>), 식모를 사랑하는 어리숙한 노인(<약혼녀>),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문제에 처하는 아버지(<부전자전>) 등의 역할을 맡아 소동을 벌이면서 웃음과 함께 페이소스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비극과 달리 코미디에서는 아무리 큰 결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물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통합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김희갑이 맡은 인물들은 의미심장하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바람난 공처가는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급사와 식모를 사랑하던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사랑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며,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야기되었던 문제는 돈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해결된다. 김희갑이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러한 인물형을 연기했던 것은 그 인물형이 코미디나 코믹함의 표현에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8) <마이동풍>(이봉래, 1961)의 한장면. 주당 3인방 김희갑, 구봉서, 양석천의 금주 소동을 다룬 영화로 김희갑은 ‘천하의 공처가’ 역할을 맡았다. (사진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의 한 장면. 도금봉과 김희갑 콤비의 사랑 이야기가 소소한 웃음을 주면서 현실적인 사랑의 모습을 그렸다. 공감하는 관찰자의 형상이든, 결함이나 비밀을 가진 채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이든 김희갑은 평범하면서도 코믹한 인물들의 캐리커처에 누구보다 강점을 보였던 연기자로, 김희갑이 그려냈던 인물들은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보다는 갈등을 해결하고 통합을 이루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코미디 속에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했다. 불과 세 살 차이지만 항상 연애 서사의 중심에 선 청년을 연기했던 구봉서에 비해, 30대 후반부터 중년 혹은 노년을 연기했던 김희갑은 선량해 보이는 얼굴과 인생의 희노애락을 알 법하게 겉늙어 보이는 외모,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과 코믹한 애드리브 능력을 바탕으로 평범한 중년/노년의 일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배우였으며 그의 눈물과 웃음을 통해 관객들은 그와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2) ‘생활과 윤리감, 그리고 페이소스’ 양석천과 양훈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 코미디가 무질서의 활력을 이야기하는 '아나키즘적 코미디'의 경향을 보였고 구봉서가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청춘코미디'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했다면, 김희갑의 코미디는 애상적 정서를 띤 코미디로 196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홈드라마와 깊은 친연성을 가진 것이었다. 1960년대 초반 김희갑과 김승호가 짝을 이루어 등장하던, 홈드라마에 가까운 일련의 코미디들에 대해 이영일은 "생활이 있는 희극" 혹은 "풍속적 희극"이라고 칭했다. 이영일에 따르면 풍속적 희극이란 일상인들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코미디로 "소시민 상인, 말단 샐러리맨, 말단 회사간부, 시골선비"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일상을 통해 세태풍속을 그리는 동시에, 세태를 풍자하고 페이소스를 표현한 희극을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생'과 '사회'가 "충실하게" 그려져야만 한다. 김희갑의 1960년대 초반 코미디들은 이영일이 가장 높게 평가했던 '풍속코미디'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3) 지금까지 살펴본 김희갑의 코미디들은 김희갑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혹은 김희갑 자신이 겪는 일상 속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했다. 그리고 공감의 중심에 서 있는 김희갑을 통해 가족 안에서의 화합과 더 나아가 새 시대의 질서 안에서의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희갑 코미디의 '통합'은 근대화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졌지만 '충', '효', '예'와 같은 전근대적 가치관을 간직하고 있는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는 인물들과, 속악한 근대화의 과정을 거쳐 '성공'한 희화화된 인물들 사이의 물질적 중재와 가치관의 중재를 포함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근대화된 환경들–구획된 도시, 서구적 생활환경, 개발 중인 팔도강산 등-의 전시를 통한 물질적 근대화가 강조된다. 특히 <팔도강산> 시리즈에서는 국가의 근대화 정책에 대한 찬양과 동조가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예컨대 <내일의 팔도강산(제3편)>(강대철, 1971)에는 전라도 농촌에 사는 사위 노식을 찾아간 희갑이 도시보다 농어촌이 더 많은 혜택을 입고 있다고 설교하는 장면이 삽입된다. 농어촌의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을 오히려 "혜택"으로 둔갑시켜 위로하는 한편, 사대강 개발이라는 국책을 편향적으로 선전하는 이 장면은 김희갑 코미디가 근간하는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분명히 적시한다. 또한, 물질적 근대화, 세속적 성공을 긍정하기 위한 전략으로 '남존여비', '엄한 가부장', '형제간의 우애'와 '동료의식' 같은 전근대적 가치관의 '회복'이 주장된다. <내일의 팔도강산>의 후반부에는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려다 망하게 된 허풍장이 첫째 사위 장강과 그를 도우려는 성실한 넷째 사위 영균,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모 정순과 훈계하는 장인 희갑이 등장한다. 즉, <팔도강산> 시리즈는 '근대화' 자체는 긍정하되 희화화된 인물들을 통해 그려지는 '속악한 근대화'만이 지양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면서 "올바른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합당한 '중재'와 '화해'로 나아가는 전략을 택한다. 그리하여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거나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물질적 "성공"을 긍정하여 그것을 추구하도록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지배질서에 편입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김희갑 코미디의 주제의식의 표명은 '근대국가' 형성의 논리를 앞세우던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책으로 후원되고 장려되었던 김희갑의 <팔도강산> 시리즈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지속되었다. (사진10) <속 팔도강산 – 세계를 간다>(양종해, 1968) 포스터. <팔도강산> 시리즈의 두 번째 편 (사진11) <내일의 팔도강산 – 제3편->의 한 장면. 전라도 사위 노식에게 농촌이 받고 있는 혜택에 대해 설명하는 희갑. 왼쪽부터 김희갑, 박노식, 황정순. (사진12)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 <팔도강산> 시리즈의 4번째 편 포스터 (사진13)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 <팔도강산> 시리즈의 5번째 편 포스터 1950년대 코미디를 대표하는 양석천과 양훈의 코미디가 무질서의 활력을 이야기하고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던 구봉서의 코미디가 낙관적 전망을 보여주면서도 점차 지배질서에 순응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제작되었던 김희갑의 코미디는 좀 더 생활밀착형 인물들을 등장시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이 인물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는 애상적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지배질서로의 통합을 보다 정교하고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신영화] 소시민적인 인정희극/ 이봉래 감독 <월급장이>”, 《한국일보》 1962. 7. 22. 4면. 2) 천경자, "웃는 얼굴 웃기는 얼굴 - 김희갑 편“, 《한국일보》1963.1.1.14면. 3)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소도, 2004, 360쪽. <참고문헌> “[신영화] 소시민적인 인정희극/ 이봉래 감독 <월급장이>”, 《한국일보》 1962. 7. 22. 4면. 천경자, "웃는 얼굴 웃기는 얼굴 - 김희갑 편“, 《한국일보》 1963.1.1.14면.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소도, 2004.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 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
영화 <오발탄> 검열 과정 개요 유현목에 따르면 영화 <오발탄>의 제작은 4.19 발발 직전에 기획되었다. 이범선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그 암울한 내용 때문에 제작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감독 유현목, 촬영기사 김학성, 그리고 조명을 담당했던 김성춘이 동인 프로덕션을 구성하고 어려운 여건 하에서 제작을 시작했다. 제작비 조달 문제 때문에 제작 기간이 길어져서 결국 영화는 제작이 시작된 지 1년 여가 지난 1961년 2월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당시는 4.19의 발발로 출범하게 된 영화윤리전국위원회에 의한 ‘민간 자율심의’가 시행되던 때였기 때문에 <오발탄>은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의 심의를 거쳐 1961년 4월 13일에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었고 같은 달 20일까지 8일간 상영되었다. 4.19 이후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개봉을 마쳤지만, 1961년 5월 16일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오발탄>은 상영금지 영화가 된다. 내무부의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로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재검열의 결과 1962년 3월에 <오발탄>을 포함한 7편의 영화에 대한 상영금지 처분이 최종 확정되었다. <오발탄>의 제작자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을 시작으로 6월 11일(7월 8일), 8월 1일, 8월 21일 등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8개월에 걸친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노력은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자막 및 화면을 추가하는 등의 자진 개작을 포함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오발탄>은 여섯 군데 화면을 삭제하거나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8월 23일 상영을 다시 허가받았다. 이렇게 개작된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어 25일까지 14일 간 총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10월 말에는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오발탄>은 4.19와 5.16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을 통과하였고, 이 영화에 대한 검열서류들에는 그와 같은 정치적 격변에 따른 영화검열 제도 및 운영 방식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오발탄> 검열 서류는 매우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료라고 하겠다. 검열 서류를 통해 본 영화 <오발탄>의 검열 과정 첫 번째 국면 1961년 2월 9일자로 작성된 “국산영화 상영신고서”부터 첫 번째 개봉을 마친 4월 말까지를 첫 번째 국면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서류는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1961년 2월 9일) (2)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3)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4일, 문화 제1623호) 및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등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에는 원작자 이범선과 작곡자 김성태가 작성한 저작권 관련 서류와 한국은행이 발행한 국채소화증명서가 첨부되어 있다. 상영신고서는 (사)한국영화제작가협회를 경유(2월 13일)하고 영윤의 심의(2월 13일 접수)를 거쳐 문교부 장관에게 제출되었다. (2)의 서류는 (1)의 상영신고서를 접수한 후 문교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여기에는 영윤의 “심사논평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심사논평서에서 영윤은 “개천 하수도에서 어린이를 업은 여인이 목 매단 장면을 삭제하기를 희망”한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이와 같은 영윤의 의견은, 그것이 민간의 자율심의기구였기 때문에 명목 상으로는 행정적 강제력을 갖지 않았지만, 문교부는 이 권고사항을 수용할 것을 전제로 상영허가를 내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강제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 (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첫 번째 국면에서 쉽게 해명되지 않는,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상영 중이던 4월 14일에 문교부가 내무부 치안국장과 법무부 검찰국장 앞으로 <오발탄>에 대한 심의를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영화에 대한 정권의 통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4.19 이후의 국면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미 적법한 절차를 거쳐 상영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영화검열의 주무부처도 아닌) 내무부와 법무부의 사후 심의가 왜 필요했던 것일까? 특히 “사회윤리적인 책임성이 전무“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선전자료가 되는 것으로 관취“되므로 ”추천키 난“하다는 내무부의 부정적인 의견이 <오발탄>의 상영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림 2] 국산영화 <오발탄> 심의 의뢰의 건 (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다만 당시 영화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에 대해서 한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오발탄>이 아직 개봉하기 전이었던 1961년 3월 31일에 문교부는 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을 심사, 결정하는 국제영화 심사위원 12명을 위촉했다. 정부 관료가 다수 포함된 이 심사위원회 1) 에서는 4월 21일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으로 <마부>(강대진, 1961)를 선정했다. <오발탄>을 제치고 <마부>가 선정된 것은 무지한 관제 심사가 낳은 불공정한 결과라는 영화계의 여론이 형성되면서 국제영화제 출품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문교부가 내무부와 법무부에 <오발탄>의 심의를 의뢰한 4월 14일은 베를린영화제 출품을 위한 심사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영화 <오발탄>이 영화계 내에서는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유력시되었기 때문에, 문교부로서는 공식적인 심사위원회를 개최하고 출품작을 결정하기 전에 내무부와 법무부의 의사를 미리 타진해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국가기관에 의한 영화의 사전검열이 폐지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오발탄>에 대한 내무부의 부정적인 견해가 영화의 상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겠지만 국제영화제 출품작을 결정하는 데는 반영되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 추론이 맞다면 4.19 국면이 야기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별개로, 관이 주도하는 국제영화제 출품작 선정은 사실상 또 다른 검열의 관문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국면 5.16 쿠데타가 발발한 지 일주일만인 1961년 5월 23일에 내무부는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를 문교부에 보냈다. 이 문서로부터 촉발된 대대적인 재검열이 한국영화 <오발탄>을 비롯한 총 7편의 상영금지 처분으로 마무리될 때까지가 두 번째 국면이다. 두 번째 국면에서 <오발탄>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데, 그것은 <오발탄>의 재검열이 내치정 제3846호 문서에서 언급한 총 57편(한국영화 35편, 외국영화 22편)의 영화들에 대한 재검열과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발탄>의 재검열 과정을 담은 서류는 <오발탄> 검열서류철 뿐 아니라 외국영화 <폭력교실 Blackboard Jungle>(1955) 검열서류철에도 남아 있다. 따라서 쿠데타 세력에 의한 대대적인 재검열 과정의 전체상은 문제가 되었던 57편 영화들의 검열서류철 모두를 검토함으로써만 구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오발탄> 검열서류철에 남아 있는 이 시기의 서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 및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그림 3]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 (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내치정 제3846호 서류에서는 1958년 이후 개봉된 국산영화 35편과 외국영화 22편이 이른바 “불순영화”로 분류되어 있다. 재검토 대상의 광범위함과 문건 작성에 소요된 짧은 시간을 감안한다면 이 “불순영화” 목록에서 드러나는 지향점은 놀랄 만큼 분명하다. 대상에 오른 외국영화는 대개 영윤 시절에 풍속의 차원에서 문제가 되었던 작품들이었다. 한국영화의 목록을 보면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전기영화 두 편과 ‘의적’을 다룬 <의적 일지매>(장일호,1961)를 제외한다면 사극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사회상이나 서민의 일상생활을 다룬 영화들이 집중적인 재검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옥화>(신상옥,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아름다운 악녀>(이강천, 1958), <종말 없는 비극>(이강천, 1958), <철조망>(조긍하, 1960)처럼 한국전쟁의 여파를 다룬 영화들, 그리고 <돈>(김소동, 1958)과 <오 내 고향>(김소동, 1959), <하녀>(김기영, 1960), <3등 과장>(이봉래, 1961)처럼 1960년대 초 가족 드라마의 보수적 관점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 있는 영화들이 포함되었다. 5.16 직전에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결정되었던 <마부>까지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도시 빈곤층의 일상을 다룬다는 점이 중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밖에 <춘희>(신상옥, 1959), <쟌발쟌>(조긍하, 1961), <카츄샤>(유두연, 1960) 같은 외국 번안물과 외국으로부터 유래한 ‘투명인간’을 소재로 한 작품이 ‘사회불합리’의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장르적으로는 미국 갱영화의 영향을 현저하게 받은 범죄영화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내치정 제3971호의 서류는 불순영화 목록을 전달한 지 5일 만에 다시 내무부 치안국장이 문교부 문화국장에게 보낸 <오발탄>에 대한 별도의 의견서이다. 이 서류가 지적하는 <오발탄>의 핵심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의 조장과 “반미감정의 극단화”,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절망적 비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오발탄>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및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보류의 건”(1961년 7월 20일, 문화 제2412호) [그림 4]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 (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7월 18일자 서류에서는 내치정 제3971호에 표명된 내무부 치안국장의 의견에 따라 <오발탄>의 재검열을 위한 시사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재결을 요청한다. 1961년 7월 20일 3시에 문교부 시사실에서 열릴 시사회에는 내무부 치안국장, 법무부 검찰국장(정보과장), 중앙정보부 제3국장, 재건국민운동본부 예능과장, 문교부 문화국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7월 20일자 서류는 시사회 결과 <오발탄>의 상영보류가 결정되었음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시사회에 참석했던 법무부,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정보부의 관계관들이 제출한 “검열 의견서”가 첨부되었다. 내무부는 5월 28일에 제출한 내치정 제3971호의 견해로 검열의견서를 갈음하였다. (3)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1962년 3월 22일) [그림 5]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 (1962년 3월 22일) 영화 검열 사무가 문교부로부터 공보부로 넘어온 후이기 때문에 이 서류는 공보국 영화과에서 작성하였다. 이 서류는 1961년 5월 23일 내무부에서 작성한 총 57편의 “불순영화” 가운데 공보부에서 재심을 결정한 11편(국산영화 3편, 외국영화 8편)에 대하여 1962년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한 심사의 결과를 담고 있다. 내무부의 “보류 작품 영화 심사결과 통보”(1962년 2월 10일, 내치보 제65호)와 중앙정보부의 “검열의견서(종합 재검열 분)”(1962년 2월 6일로 추정)가 첨부되어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당시 공보부의 재심 대상으로는 한국영화 <하녀>, <고바우>(조정호,1959), <오발탄>, 그리고 외국영화 <템페스트 La Tempesta>(1958), <챠타레부인의 사랑 Lamant De Lady Chatterley>(1960), <로마의 여성 La Romana>(1954),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954), <폭력교실>, <위험한 고빗길 Les Tricheurs>(1958),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J'irai cracher sur vos tombes >(1959), <비트 걸 Beat Girl>(1961) 등이 올랐다. 이 가운데 재심에 참석했던 내무부, 문교부, 중앙정보부, 공보부 등 네 기관 가운데 다수가 상영불가 의견을 낸 7편, 즉 <오발탄>, <템페스트>, <챠타레 부인의 사랑>, <로마의 여성>, <적과 흑>, <위험한 고빗길>,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이 최종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세 번째 국면 <오발탄>의 제작사인 대한영화사 대표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 첫번째 탄원서를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1963년 8월 23일 마침내, <오발탄>의 상영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기간 동안 일부 화면의 삭제와 자막 및 몇몇 화면의 추가 등의 자진 개작을 하고 탄원서를 제출한 외에, 제작자 김성춘은 감독 유현목과 함께 여러 비공식적인 루트로 로비를 펼치는 등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했다. 서류들에 나타나는 공식적인 발화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성춘과 유현목의 ‘비공식적인 노력’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구술자료 및 여타의 자료들을 참조함으로써 공식적인 서류가 발화하지 않는 이면의 맥락까지 가급적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 국면의 검열 서류들은 다음과 같다. (1) “국산영화 재심사 신청의 건”(1963년 1월 23일 김성춘 작성, 26일 공보부 접수) 및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1963년 2월 25일, 435호) [그림 6]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 (1963년 2월 25일, 435호) 첫 번째 탄원서는 접수된 지 한 달 만에 반려되었다. 제435호의 “반려” 서류에서는 “해(該) 기간 중에 재심사에 불응한 작품 및 불허가 조치된 작품은 일체 재심 청구를 접수치 않기로 하였으므로 재심이 불가”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심 신청과 반려 사이에 <오발탄>의 재심이 있었던 사실은 외국영화 <폭력교실>의 검열서류철에 철되어 있는 <오발탄>의 재심 관련 서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공보부는 2월 13일 외국영화 <폭력교실>과 <오발탄>의 재검열 시사를 열었고 재심위원으로 참석한 최유현과 백영석은 두 작품 모두 상영을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재검열 의견서”, 1962년 2월 13일) 그런데 두 작품 모두 상영보류 판정이 내려진 지 3일 만인 2월 16일에 문교부 문화국장은 <폭력교실>은 2개 처를 단축하고 상영을 인정해도 무방하지만 <오발탄>은 “현실과는 너무나 부합되지 않은 비참한 스토리”라면서 상영보류 의견을 표명하는 공문을 공보부 공보국장 앞으로 보냈다. (“<폭력교실> 및 <오발탄>의 재검 시사의 건”, 1962년 2월 16일) 결국 <오발탄>은 상영보류가 해제되지 않았고 두 차례의 합동심사를 거쳐 외국영화 <폭력교실>은 7개 처를 삭제 또는 단축하는 것을 조건으로 상영이 허가되었다. (2)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1963년 7월 8일 중앙정보부 접수), “부전지”(1963년 6월 13일), “민원서 이첩”(1963년 7월 10일, 중비서 060), “부전지”(1963년 7월 22일),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날짜 및 작성자 불명)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01),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내무부),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민원서 처리결과에 대한 통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2),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1) [그림 7] 진정서 (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그림 8]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 (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김성춘이 작성한 진정서 두 통이 공보부(6월 13일)와 중앙정보부(7월 8일)에 접수되었다. 이 진정서에서 노모의 “가자” 대사를 “저 푸른 벌판의 양떼를 따라가자”로 바뀌는 개작이 처음 언급되었다. 이 진정서 이외의 서류들은 이 진정서가 접수되고 나서 이루어진 공보부와 중앙정보부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6월 13일자 “부전지”는 진정서를 공람 처리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1962년 1월 26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재심결과 불허가 조치되었지만 “영화내용은 건전하다”는 담당관의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 담당관은 공보국 영화과 행정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신봉승으로, 그는 검열관이라는 자신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역시 신봉승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7월 22일자 “부전지”는 제작자 스스로의 개작과 “예술적 가치”에 대한 “신문 및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맥칸 박사 등”의 견해를 언급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를 해제할 것을 주장한다. 이 “부전지”의 내용을 참조하면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 또한 같은 시기에 신봉승이 작성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신봉승은 자신이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신문기사 등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여 서류 기안 당시 첨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첨부 자료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리처드 다이어 맥칸(Richard Dyer MacCann)이 당시 공보부 공보국장 이성철 앞으로 보낸 “베니스영화제 출품작(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이라는 문서다. 미국 남가주대학교(USC) 영화과 교수였던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학자로서 미국무성의 지원을 받아 1963년 4월부터 8월까지 4개월 간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국립영화제작소와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강의를 하고 한국의 여러 영화인들과 접촉했다. (박익순 구술증언, 김정옥 구술증언) 신봉승은 국립영화제작소의 감독인 배석인이 소개하여 리처드 다이어 맥칸과 만났고, 특히 그와 <오발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구술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베니스영화제에 출품할 한국영화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달라는 공보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 추천 두 작품(<굴비>(김수용, 1963)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사적인 경로(미국으로 돌아간 후 맥칸이 쓴 글에 따르면 <오발탄>을 그에게 추천한 것은 극작가 이근삼이었다.)를 통해 보게 된 <오발탄>에 대한 평가를 적은 보고서를 냈다. 이 글에서 맥칸은 <굴비>는 일본 영화 <도쿄 이야기 東京物語>(1953)를 표절한 작품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미국의 전쟁영화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베니스영화제 출품작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썼다. 대신 그는 <오발탄>이야말로 “세계 수준에 있는 작품”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뿐만 아니라 <오발탄>에 대한 맥칸의 견해를 인용한 기사들이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고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가 해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영화 <오발탄>에 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에 첨부된 것은 당시의 이 같은 여론을 보여주는 기사들 중 일부이다. [그림 9] 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 (발신 : Richard Dyer MacCann, 수신 Lee Sung Chul) 요컨대, 1963년 7월 당시에 검열관 신봉승, 국립영화제작소 배석인을 포함한 공보부 내 인력들, 그리고 이근삼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미국의 영화평론가까지 합심하여 <오발탄>의 해금을 위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공보부는 7월 22일 노인의 “가자” 대사 및 화면 삭제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을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을 허가하는 공문을 작성했다. <오발탄>의 상영을 허가한다는 결정은 제작자 김성춘, 그리고 이미 7월 10일자 “민원서 이첩”(중비서 060)에서 “상연 허가함이 가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던 중앙정보부와 <오발탄>의 상영금지를 결정하는데 참여했던 내무부에도 통고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3일 후, 결정이 뒤집혔다. 중앙정보부와 제작자 김성춘을 수신인으로 한 7월 25일의 서류 두 종에는 <오발탄>의 상영을 불허가한다고 적혀 있다. 전후 맥락을 이해할 만한 다른 서류들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갑작스럽게 결정을 번복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이 사례는 검열제도가 일관된 원칙에 따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서 작동하기보다는 여러 우연적 요소들(예컨대, 검열관의 자의적 판단이나 외부의 정치적 압력, 또 피검열자와 검열자 간의 협상 등과 같은)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자의성’은 사실 검열제도가 작동하는 근본적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극영화 <오발탄> 상영에 대한 탄원서 회신”(1963년 8월 5일, 분류기호 1733.01 3226) [그림 10] 탄원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오발탄> 상영보류 해제를 위한 탄원서가 한국영화인협회에 의해서 제출되었으나, 공보부는 7월의 재심 결과에 따라 상영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회신하였다. (4)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21일 공보부 접수),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 해제”(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증 교부”(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3473),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8월 23일 작성, 28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 3543과 1733. 3544) 8월 21일 한국영화인협회가 탄원서를 제출하자 곧바로 공보부는 <오발탄>의 상영허가 보류를 해제하고 상영허가증을 교부했다. 이어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결정에 참여했던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이같은 사실을 통고한다. 상영허가 보류 해제 문서에서는 미국 MGM 및 영화업자들이 <오발탄>의 수출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 리처드 다이어 맥칸의 고평과 국내 언론들에 의한 상영허가 여론 등이 해금의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유로 든 사실들과 관련한 근거 자료는 이미 1963년 7월에 제출된 바 있고 8월 21일에 한국영화인협회가 제출한 탄원서도 이미 거부되었던 8월 1일자 탄원서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그리고 시사 및 재평가 같은 재심의 절차 없이 탄원서가 제출된 날 바로 허가증교부 절차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 해제에는 어떤 다른 힘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다른 힘이 무엇이었든 간에, 최종 허가 당시에 제한사항은 여섯 군데의 화면 및 대사 삭제와 화면 단축이다. 이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가자” 대사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 외에 상이군인이 소변을 보는 장면이 추가로 삭제되었는데, 감독인 유현목은 이 삭제 처분이 소변을 보는 장소가 한국은행 앞이었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4) “영화상영허가 신청서”(1963년 10월 18일), “국산영화 <오발탄> 복사판 상영허가”(1963년 10월 19일, 분류기호 1733.12 4096), “영화상영허가증”(1963년 10월 19일) 상영을 허가받은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었다. 이 서류들은 재개봉에 사용된 프린트 외에 별도로 한 벌의 프린트(복사판)의 상영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의 검열제도에서는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그 복사판은 원칙적으로 별건으로 처리되어왔다. 이는 원본과 복사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우려와 더불어, 영화 검열이 내용에 대한 검토 뿐 아니라 프린트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까지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재개봉 이후의 서류들 1963년 10월의 재개봉 이후에 작성된 서류들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대한영화사 김성춘으로부터 영화 <오발탄>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양도받은 동원영화사 김진문이 이를 공보부에 통보하고 새롭게 상영허가서를 받는 과정에서 생산된 서류들이고 둘째는, 세계문화자유회의에서 유현목 감독이 이만희 감독의 영화 <7인의 여포로>(1965)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일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던 당시에,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과거 <오발탄>의 상영금지 이력과 관련한 사실조회를 요청하는 문서이다. 1.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한 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권순영(서울지법 소년부 지원장), 이병일(제협 회장), 김은우(이대 교수), 홍승면(한국일보 편집국장), 오종식(영륜위원장), 오영진, 서정덕(문교부 문화국장), 최운조(외무부 방교국장), 노태준(문교부 예술과장), 문총사무국장, 법무부 국사처 영화과장. 《동아일보》, 1961.03.31.석간 3면.
한국영화의 또 한번의 꽃이 활짝 핀 1950년대 중반에 노경희 란 여배우의 위치는 든든했다. 흔히들 해방 후 1세대 글래머 스타가운데 노경희를 꼽지만 그는 역시 탄탄한 연기자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 는 뭐니뭐니 해도 < 피아골 >의 ‘노경희’이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이 만든 <피아골>은 지리산의 피아골을 무대로 하여 한 여자 빨치산을 둘러싸고 빨치산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그리고 빨치산의 귀순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한국영화의 수작’으로 영화사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피아골>에서 노경희는 바로 여주인공인 여자 빨치산 ‘애란’역을 훌륭히 해냈다. 이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작품성과 함께 연기진의 연기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남자 주인공 김진규 는 이 작품으로 영화 데뷔를 했으며 이예춘도 이 작품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허장강 은 역시 이강천 감독의 < 아리랑 >으로 데뷔하여 뒤이어 이 작품에 출연했다. 노경희를 포함하여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악극단 출신 연기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현직 경찰관이 각본을 쓴 이 ‘반공영화’ (당시 용어)는 빨치산의 생태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죄(?) 때문인지 한동안 용공성(容共性) 시비가 없지 않았다. 군부에서도 의견이 갈려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상영불가론,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는 우수작품론을 펼쳤었다. 신문지상에도 군인과 평론가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문학평론가 임긍재는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을 평가했다. “…< 피아골 >은 선전적 가치로 보나 영화예술성으로 보나 아직까지 한국영화로서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피아골>을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가령 부상공비 A가 무기를 버리고 왔다고 해서 대장 아가리는 총살을 명령하고 뒤이어 만수로 하여금 잔인하게 돌로 쳐 부셔죽이는 것이다…”(동아일보 1955·8·12)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인 먹물 든 빨치산 철수( 김진규 )를 사랑하는 골수 공산주의자인 여자 빨치산 애란 역을 멋있게 해낸 노경희 는 이 < 피아골 > 한 작품으로 당당하게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노경희 자신도 세월에 상관없이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는 < 피아골 >이지요. 대표작입니다.” 회갑을 1년 앞둔 87년 7월 노경희 (당시 영화인협회 연기위원회 부위원장)가 한 말이다. (주간조선 87.9.13) 노경희 는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피아골 다음으로는 < 춘향전 >(1955)과 < 망나비비사 > (1955)가 연기력을 평가받고 많은 화제를 남겼다. 한국영화사의 거목인 이규환이 생전 “각본 감독 편집을 손수 내 손으로 한<춘향전>은 나의 영혼이 깃든 작품이었다”(김화: 이야기 한국영화사)고 말한 작품. “…1월 설날 프로그램으로 개봉된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전국 흥행계를 강타했다. 해방 후 최초의 춘향전 영화이다.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의 길목에 가끔씩 나타나 마치 구원의 여신과 같이 한국영화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다…”( 호현찬 : 한국영화 100년) < 춘향전 >은 노경희 의 연기 길목에도 큰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춘향= 조미령 , 이도령= 이 민 , 향단 = 노경희, 방자= 전택이 …. 당시로서는 다시 맞출 수 없는 ‘호화배역’이었다. 더구나 노경희·전택이는 부부사이었으니 향단·방자역을 얼마나 멋있게 해냈겠는가. 두 사람이 깡충깡충 뛰는, 활력 넘치는 장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흥행은 ‘대박’이었다. 개봉관인 서울의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20일 상영에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2백여만 명 ( 이규환 감독의 기록)이었으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춘향전>을 본 셈이다. 2년 동안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 면소재지에서까지 상영되었다고 하니 향단이 노경희의 연기가 그만큼 평가되고 인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춘향전>의 히트로 한국영화계에 사극 붐이 일었다.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도 노경희는 남편 전택이와 함께 출연했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비사(슬픈 역사), 슬픈 이야기이다. 전택이가 망나니 ‘먹’역을, 노경희는 술집 작부‘달’로 분했다. “…얼굴 가득 불안스러움을 내비치며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먹을 다루는 노경희는…”(여성영화인사전:여선정) 성격 배우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지적했듯이 노경희는 역시 글래머 스타라기보다는 단단한 연기자로 대접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는 1955년 한해동안 < 피아골 >, <춘향전>, <망나니 비사> 3편의 작품에 출연하여 그 연기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이 세 작품만으로 노경희의 연기자로서의, 배우로서의 위치는 굳혀진 셈이다. 노경희 는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배화여고를 졸업했다. “…배화여고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극장에 다녔던 노경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극장대장’으로 통했다…”(여성 영화인사전) 노경희는 17세 때 감독 최인규와 배우 전택이 가 제작준비 중이던 <마의 산> 히로인 역에 음모하여 뽑혔다. 그러나 <마의 산> 촬영이 자금난으로 중단되자 노경희는 길을 잃었다. 전택이 선배를 찾아갔다. 그의 소개로 약초가극단 (단장 김해송)에 들어갔다. 이 가극단 동기생으로는 김진규 , 이예춘 , 허장강 이 있다. 신청년악극단에서도 활동하는 등 무대생활은 모두 6년이었다. 1948년 < 수우 >에도 출연한 기록이 없지 않지만 본인이나 한국 영화사 기록에서는 1950년의 < 흥부와 놀부 > ( 이경선 감독)을 노경희 의 본격적인 데뷔작품으로 꼽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2편의 영화가 만들어져 서울에서 개봉되었는데 그중 1편이 바로 <흥부와 놀부>이다. 노경희는 한국전쟁 중 종군다큐멘터리 제작에 연기자로 참여했으며 1954년 홍성기 감독의 < 출격명령 >에 출연했다. 공군 조종사간 사랑의 삼각관계와 전우애를 그린 이 영화에는 전택이도 출연했다. 그리고 앞에서 특기한 < 피아골 > < 춘향전 > < 망나니 비사 > 3편이 1955년의 노경희를 빛냈다. 뒤이어 다음과 같은 작품에 출연했다. < 인생역마차 > < 자유부인 > < 애인 > < 여성의 적 > (이상 1956년) < 실락원의 별 > < 애원의 고백 > (1957년) < 산넘어 바다건너 > < 돈 > < 실락원의 별 2 > < 유혹의 강 > < 애정무정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1958년) < 고바우 > < 내일 없는 그날 > < 백만장자가 되면 > < 별하나 나하나 > < 삼여성 > < 애련의 꽃송이 > < 젊은 안내 > < 푸른 날개 > < 황금의 상처 > (1959년) < 버림 받은 천사 > < 어느 하늘 아래서 > < 울지 않으련다 > < 청춘화원 > < 추억은 영원히 > (1960년) <애정행로> (1961년) < 양귀비 > <어딘지 가고싶어> <흑태양> (1962년) < 거지왕자 > < 검은 꽃잎이 질 때 > < 약혼녀 > < 연애주식회사 >(1963년) 노경희 가 출연한 100여 편의 영화를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다. 위에서는 주요 작품만 열거해 본 것인데 1950년대 중반이후 196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 영화계에서 노경희가 얼마나 ‘맹활약’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영화에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노경희가 거의 출연하다시피 했다. < 자유부인 > < 애인 > < 실락원의 별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 삼여성 >등은 연기면에서나 이야기거리로나 노경희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애인>에는 전택이가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노경희는 이 작품을 ‘전택이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곤 했다. <삼여성>에서는 당시의 스타 최은희 이경희 그리고 노경희 세 사람의 연기 대결을 보여주었다. 왕성하게 영화 출연을 하지 않게 된 뒤로도 노경희 는 선배로서 후배들의 연기지도 또는 영화인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열심히 뛰어 다녔다. 회갑을 넘기고도 그의 왕년의 글래머 스타의 건강을 여실히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노경희에게는 지병이 복병처럼 숨어 있었다. 1995년 7월 17일 제헌절 날 새벽 서울 을지병원에서 노경희는 세상을 떠났다. 67세였다. 당뇨와 심부전증이 사인이었다. 당시 83세인 남편 전택이와 4남1녀를 남겨 두고 갔다. 전택이는 3년뒤인 1998년 3월2일 86세를 일기로 아내 노경희 곁으로 갔다. 두 사람은 영화계의 선배·후배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전택이가 본 부인과 이혼한 뒤 1954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말년에도 잉꼬부부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동아일보 1998·3·4) 신우식(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본명 : 노숙진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 출생 배화고녀 졸업 1950년 이경선 감독의 < 흥부와 놀부 >로 데뷔 1995년 7월 7월 타계 <주요 작품> 인생 역마차 , 애인 , 삼여성 , 자유부인 , 망나니비사 , 실낙원의 별 등 <수상 경력> 1955년 < 망나니비사 > 제1회 금룡상 여우주연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