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나빌레라
- 감독
- 현진식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고아라, 이원우
“집중, 집중.” < 저지 프리스트 > 첫 장면에서 초상화처럼 정면으로 찍힌 윌리엄 프리스트 판사(윌 로저스)는 의사봉을 두들기며 카메라를 향해 꾸짖듯 말한다. 그런 다음 정작 자신은 쥐고 있던 신문으로 눈을 돌린다. 다소 당황스런 이 장면은 이어진 크레딧 시퀀스 다음 장면에서 흑인 제프 포인덱스터(스테핀 펫칫)의 닭 절도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법정 시퀀스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프리스트 판사는 검사의 열띤 논고가 이어지는 동안 방청객에게는 잘 들으라고 호통을 치면서도 자신은 재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태평스럽게 신문 읽기에 계속 몰두하고 있다. “포드는 가장 브레히트적 영화감독이다. 그는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제시한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이 말을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보다 더 잘 예시하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방청객에게 경청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경청하지 않는 판사, 사건 자체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과시하듯 딴청을 피우는 판사, 피의자가 실제로 절도를 했는지 여부보다 그가 메기 낚시 미끼로 뭘 썼는지가 더 궁금한 판사. 피의자가 자리에서 졸고 있자 “깨워. 이 법정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판사. 첫 장면에서 프리스트 판사가 카메라를 보며 호통 칠 때, 그 호통은 법정의 방청객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의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실한 책무 이행자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이 장면은, 프리스트가 성직자를 뜻하는 그의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자신을 법 위의 존재, 도덕적 확신의 존재, 그리고 서사적 규율 밖의 존재로 제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엉뚱한 희극처럼 보이는 첫 재판 시퀀스는 법정 공방도 생략된 채, 프리스트 판사와 피의자가 낚시를 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어눌한 흑인이 어떻게 절도 혐의를 벗게 되었는지, 아니 혐의를 벗었는지 여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프리스트 판사처럼 존 포드도 재판에 무관심하다. 서사 전체를 통틀어 프리스트의 관심사는 두 가지밖에 없다. 낚시(혹은 크리켓 게임)와 조카의 로맨스. 존 포드는 이 게으른 판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직무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 뒤, 사랑의 중재자로서의 면모에 서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19년 뒤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자 걸작 < 태양은 밝게 빛난다 >(1953)에 필적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지 프리스트>는 포드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이 영화엔 소란과 신명에 대한 포드의 도취가 처음으로 온전히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직분과 임무를 잊은 듯 혹은 서사가 자신이 제시한 사건을 잊어버린 듯 발산되는 디오니소스적 파토스의 원형이 여기 있다. 이 도취는 역시 윌 로저스가 주연을 맡은 이듬해의 < 굽이도는 증기선 >(1935)에서 폭발하듯 분출하며, 이후 포드 영화에서 가까스로 억압될지언정 결코 삭제되지 않는 정념의 용암이자 영화적 활력의 원천으로 쉼 없이 작동한다. 이와 연관된 다른 하나는 포드의 주인공의 도덕적 이중성이 이 영화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포드의 주인공에게는 공동체로부터 도덕적 책무가 부과돼 있지만, 그는 자신의 책무에 은밀히 저항한다. 그는 신성한 책무를 훼손(< 젊은 날의 링컨 >)하거나 일시적으로 망각(< 황야의 결투 >)하거나 그로부터 도피(< 도망자 >)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대개 갖가지 방식으로 실패한다. 포드 영화에서 공동체적 도덕과 사적 윤리는 끝없는 내적 교전을 벌이며, 그의 서사에는 임무의 완수를 향한 필연적 전개라는 표면 아래, 이 내적 교전의 자의적 혹은 우연적 해소로 귀결되는 부조리와 비합리가 음각되어 있다. 프리스트 판사의 이중성이야말로 공동체의 의무를 짊어진 이후 포드의 주인공들의 숨겨진 분열증을 예기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윌리엄 프리스트는 순회재판소 판사(선출직)로 30년간 일해 왔지만 요즘은 낚시와 크리켓이 일과의 대부분이다. 죽은 형의 아들 제롬이 법률공부를 마치고 뉴욕에서 돌아온다. 제롬은 엘리 메이를 사랑하지만, 제롬의 어머니는 엘리 메이가 아버지도 알 수 없는 고아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주 상원의원이자 법률가 호레이스 메이듀의 딸 버지니아와 결혼시키려 한다. 프리스트는 제롬과 엘리 메이를 맺어주기 위해 갖은 꾀를 낸다. 그러던 중 폭행 사건과 재판이 벌어지고, 프리스트는 피의자 밥 길리스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카 제롬과 함께 프리스트는 판사가 아닌 변호사로 법정에 나서 그를 변호한다. 영화의 배경은 1890년대, 켄터키 주의 한 소도시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프리스트를 포함한 이곳 주민들은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살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북군(Union)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한 남부 연합(Confederate)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프리스트는 남부인의 기질을 발휘하고 이용해 밥 길리스의 방면 및 제롬과 엘리 메이의 결합이라는 숙제를 해결한다. 몇몇 포드 영화뿐만 아니라 남북전쟁을 소재로 다룬 미국 영화를 볼 때, 우리 같은 외국 관객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남부적인 것에 대한 동경에 가까운 향수다. 미국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만 바라보면 이 향수는 노예제도 옹호와 같은 터무니없는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다. 여기엔 제도의 선악과 무관하게 남부 연합이 표상하는 모종의 모럴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미국 학자의 견해를 빌려야 할 것 같다. 노예옹호론자들 뿐만 아니라 남부 충성파들의 생각은 대체로 이러하다. “북부인들은 기록과 돈에만 눈이 먼 야비하고 궤변적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반면 남부인들은 “관대하고 기사도 정신이 뛰어나며 친절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남부 연합에 대한 향수에는 성문법이 지배하는 북부의 합리적이며 근대적인 생활방식에 대항해 명예와 관습법을 존중하는 “남부의 생활방식에 대한 옹호”라는 면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다니엘 부어스틴, <미국사의 숨은 이야기>, 범양사) 켄터키 주는 남북 전쟁 때 중립을 표방했으나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고 주민들은 남부와 북부로 갈라져 싸웠다. 하지만 켄터키 주엔 남부 연합에 대한 호의를 지닌 주민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리스트 판사와 주민들 대부분은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에 소속돼 싸웠으며, 남부 연합 참전군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친밀함을 지니고 있다. 그 친밀함은 프리스트 판사에겐 법리는 물론 사건의 사실관계에도 앞서는 것이다. 반면 웅변하기 좋아하고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엄격한 법률가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호레이스 메이듀는 북부의 태도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상한다. 요컨대 프리스트의 남부적 모럴(관습법과 명예)과 판사라는 직책(성문법과 합리)은 불화가 예정된 것이며,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은 이 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엄격한 사실에 근거해 판정해야 하는 판사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위반하면서까지 흑인 혹은 사회적 소수자에 편에 선다는 점에서 그를 일반적인 노예제도 옹호론자와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우리로선 긍정적인 의미의 남부적 모럴을 황야의 율법에도 문명의 규율에도 속할 수 없는 서부사나이의 모럴과 겹쳐놓고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프리스트의 정치적 모호성은 곧 존 포드의 모호성이다. 이 영화에서 위대한 남부인의 초상을 그린 포드는 5년 뒤에 가장 위대한 북부인의 초상을 담은 <젊은 날의 링컨>을 만든다. 아마도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포드 자신의 범주화할 수 없는 이런 내적 모순을 투영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드의 첫 유성 서부극 < 역마차 >보다 5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저지 프리스트>를 포드의 또 다른 유사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판 시퀀스로 시작한 <저지 프리스트>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재판 시퀀스로 끝난다. 앞서 말했듯 첫 재판에서 프리스트 판사는 제프의 절도 여부는 무시하고 그가 옛 북군 장군의 하인이었다는 것과 메기 낚시를 잘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후의 서사 전개는 마지막 시퀀스인 두 번째 재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내 생각에 두 번째 재판은 포드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시퀀스의 상위에 오를만하다. 이 재판의 피고는 “많이 일하고 말이 없는” 타지 출신의 일꾼 밥 길리스이다. 프리스트와 목사 외엔 그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엘리 메이 자신을 포함해, 알지 못한다. 밥은 엘리 메이에 대한 동네 남자들의 험담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고 이 때문에 법정에 선다. 프리스트 판사는 주먹다짐 현장에서 밥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판사석에 앉지 못한다. 증인석에 앉은 밥은 왜 주먹을 휘둘렀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의 살인 전과와 종신형 선고 전력을 알아낸 검사의 심문에 일체 답하지 않는다. 이때 프리스트가 변호사로 등장해 기막힌 계략을 실행한다. 증인석에 앉은 목사는 비밀엄수 약속을 깨고 입을 연다. 전쟁 당시 남군의 포병대 대위였던 목사는 남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종신형 선고자들로 부대를 충원했다. 목사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출한 경험담 그리고 이제껏 그가 딸을 위해 매달 생활비를 자신을 통해 전달해온 사실이 목사의 입으로 진술된다. 대부분 남군 병사였던 노인들로 채워진 배심원석은 목사의 증언이 진행되면서 술렁이기 시작한다. 이때 프리스트의 신호에 따라 재판소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프는 하모니카와 북으로 남군의 행진가였던 ‘딕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목사가 일어서서 그 병사가 바로 밥 길리스라고 지목하자, 배심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제프 데이비스(남군 연합의 대통령) 만세’ ‘밥 길리스 만세’를 외치고 재판은 중단된다. 법정은 난장판이 되고, 흑인들은 흥겨운 딕시 연주를 계속하며, 이 소란은 곧바로 남군 베테랑들의 떠들썩한 축하 행진으로 이어진다. 행진하던 베테랑들은 주민들 틈에 있던 밥 길리스를 행렬에 끌어들이고 행진을 계속한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 부동의 재판은 역동의 난장으로 바뀌고, 작은 사실들의 오점은 큰 정신적 우위로 무화된다. 엄격한 정신이 소유자라 해도 이 벼락같은 난장의 활기와 신명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저지 프리스트>는 세부적 규칙과 사소한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북부인의 모럴 혹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침 뱉는다. 이것은 포드 중기작에서 ‘주정뱅이 천사’라는 전형적 역할로 등장해온 포드의 형 프랜시스 포드의 침 뱉기로 구현된다. 호레이스 메이듀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멀리 떨어진 타구(침통)에 정확히 침을 명중시켜 법정을 번번이 웃음바다로 만들던 이 주정뱅이 배심원은 남부군 베테랑들의 행진에 경의를 표하는 호레이스의 모자 안에 다시 한 번 정확히 침을 명중시킨다. 포드는 예의와 매너로 자신을 치장하는 호레이스 같은 인간을 포용할 생각이 없다. 오늘의 눈으로 이 마지막 재판 시퀀스의 결함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이 재판에서는, 첫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폭행 사건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 피의자의 삶에 대한 도덕적 판단으로 대체된다. 이는 사실상 근대적 법체계에 대한 부정이다. 더구나 이 도덕적 판단은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 일종의 선동으로 이뤄진다. 두 재판에서의 프리스트의 선택이 모두 약자를 구하기 위한 시도라 해도 이건 위험한 포퓰리즘 아닐까. 또 다른 문제는 딕시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흑인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흑인들이 자신들의 해방을 반대한 남부 연합의 군가를 연주함으로써 남부인의 찬미에 가담하는 이 장면에는 만든 사람의 인종주의적 시각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지 프리스트>에는 이런 비판을 논박할 증거가 없다. 태그 갤러거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분노에 사로잡힌 주민들의 흑인 린치 장면과 프리스트가 린치 중단을 호소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스튜디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존 포드>, 이모션북스) 리메이크 작인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되살아난 린치 장면이 삭제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보다 모호하고 복합적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고 그 장면이 변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저지 프리스트>는, 개봉 당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당대의 진보적 관객이라면 온전히 긍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영화였을 것이다. 80여년이 지난 오늘의 관객 그리고 외국 관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대답은 존 포드가 오히려 결함과 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판사의 직무 태만을 통해 근대적 재판에 대한 무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딕시의 연주를 굳이 흑인들에게 맡김으로써, 포드는 결함을 최소화하거나 위장하는 게 아니라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말대로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드러낸다. <저지 프리스트>는 엄숙한 재판을 신명의 축제로 순식간에 탈바꿈시킨다. 이 축제는 얼룩과 오점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누군가는 그 얼룩과 오점 때문에 이 영화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그 얼룩과 오점의 성찰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해도 최종적 판단은 미루는 게 좋을 것이다. 존 포드의 본격적인 필모그래피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람들에게 그 기억이 공유되지 않으면 ′사건′은 없던 일로 되어버리고 만다. (…) ′사건′의 기억이 타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기억 서사』 중에서, 오카 마리 - 1990년대 이후 한국 공포 영화의 출발은 1998년 개봉한 < 여고괴담 >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개봉 당시 전국 200만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의 흥행으로 충무로에도 본격적인 ‘젊은’ 공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 자귀모 >(1999) < 링 >(1999)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1999) < 해변으로 가다 >(2000) < 찍히면 죽는다 >(2000) < 가위 >(2000) < 세이 예스 >(2001) 등의 공포 영화들은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제작된 공포 영화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공포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좋을 이 시기를 지나 2003년에는 < 장화, 홍련 >이 역대 공포 영화 중 최고 흥행을 기록하고,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에 공포영화 < 아카시아 >가 선정되면서 그 부흥기는 정점을 찍었다. 그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그 흐름은 다소 주춤해졌지만 여전히 관객의 사랑을 받는 공포 영화들은 종종 제작되어 < 알포인트 >(2004) < 기담 >(2007) <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 등의 작품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한국 공포 영화의 계보에서 이상하게 대중에게 잊힌 작품이 있다. 바로 윤종찬 감독이 2001년에 만든 < 소름 >이다. < 소름 >이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비단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소름>으로 데뷔한 윤종찬 감독은 이후에도 (공포 영화와는 전혀 관련 없는) < 청연 >(2005)과 < 나는 행복합니다 >(2008) < 파파로티 >(2012) 등의 영화를 만들어서 커리어를 이어온 대중 영화감독이며, <소름>의 주인공을 맡은 두 배우. 장진영 과 김명민 은 누구나 다 아는 배우들임에 틀림없다. 거기다 이 영화는 2014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 영화 100선에도 선정이 되었는데, 신기한 것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이 영화로 영화 데뷔를 한 배우 김명민이나 혹은 어떤 평론가도 이 영화가 마치 사라진 것처럼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2001년에 만들어졌고 그런 의미에서 대중과 평단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소름>을 다시 본 후에 나는 이 영화가 잊힌 것이 이 영화의 불길한 느낌과 교묘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 영화는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들에게 회자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묘하게 이 영화가 공포를 그려내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소름>이 취하고 있는 공포의 방식은 피가 난무하는 슬래셔 방식이거나 관객의 트라우마를 자극 시키는 심리적 방식이거나 혹은 한국 영화에서 흔히 취하는 혼귀의 방식이 아니라 기억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용현( 김명민 )이 504호에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는데, 그 504호는 전 입주자인 광태가 불타 죽은 곳이다. 그런데 광태는 마치 용현과 선영( 장진영 )의 과거 사연을 알기라도 하듯, 미금아파트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었고 그 소설을 완성하기 전에 죽어 용현이 그 집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광태가 그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왜 그 자리에 용현이 찾아오게 됐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허구를 완성하기 위해 그 이야기의 실체적 기억이 들어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가상의 허구와 실체적 기억 사이를 맴돈다. 영화에 세 번 등장하는 롱테이크는 그런 허구와 기억 사이를 더욱 몽롱하게 만드는 뛰어난 장치이다. 재밌는 것은, 이 롱테이크 장면이 나올 때 주인공들은 본인의 기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기억은 허구 같은 느낌이고, 불길하고 누설하면 안 되는 금기와도 같은 것이다. 용현과 선영의 기억은 차이가 있다. 용현은 자신의 기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용현은 차라리 기억을 덮어버리면서 그 기억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용현은 동급생을 죽인 후 산에 파묻었고, 선영이 죽인 선영의 남편을 본인 손으로 매장하고 선영을 죽인 후 선영마저 산에다가 매장한다.(그리고 직접적으로 묘사는 안 됐지만 형사들이 용현과 전에 만난 여자의 행방을 찾는 것이나, 용현의 이야기를 미뤄보았을 때 용현의 전 애인도 매장하여 실종된 것으로 보인다.) 용현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기억은 본인이 고아라는 사실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용현이 가지고 있는 원(原)기억은 자신이 고아라는 것이다. 반면 선영은 그 기억을 용현처럼 묻지 못하고 잊지 못해 고통받는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것도, 아버지가 도망간 것도 기억하며 자신이 아들을 잃어버렸다는(죽였다는) 것도 기억하며, 남편을 죽인 것도 모두 기억한다. 그래서 선영이 죽고 나서도 그녀의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죽어서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묻히는 것은 본인 자신이다. 영화의 전환점은 바로 용현이 그 기억을 다시 떠올렸을 때다. 글의 처음에 언급한 오카 마리의 글처럼 용현은 사건의 기억을 외부와 함께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억은 없던 사건이 되었지만 선영이라는 타자에게 자신의 기억을 하나 둘 씩 공유하게 되자 그의 비밀은 이 작가(그리고 504호에서 불타 죽은 광태)에 의해 소설의 형태로 완성된다. 미금아파트를 둘러싼 용현과 선영의 비밀을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려고 한 사람은 죽거나 미쳐버린다. 영화는 기억을 잊지 못해 고통받는 선영의 기억과 기억을 묻어버리는 용현의 기억 중에서 용현의 기억. 다시 말해 소설의 발간이 실패하고, 용현이 선영을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영화가 용현의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은 이 영화에서 밝혀지는 기억의 실체가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길하고 끔찍한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미금아파트라는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미금아파트의 불빛이 깜빡거리는 모습을 찍은 롱 샷을 마지막 쇼트로 장식한다. 용현은 그 기억을 묻어두려고 했지만 미금아파트라는 공간은 이 기억을 덮지 못한 것이다. 곧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폐가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살아 있지만 죽은 공간이고, 기억을 머금고 있지만 곧 사라지는 공간이다. 이 영화가 불길하고 음침하며 떠올리고 싶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그 끔찍한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영화 스스로가 잔존하게 만드는 결론으로 완성했을 때 그것은 이 저주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영화 스스로 되새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소름 >은 그 저주를 덮어버리지 않고 다시 되새기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비극적 진실의 공포를 직면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잊고 싶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 끔찍한 기억은 결국 잊을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에 다다르게 만든다. 어쩌면 이 이유가 이 영화를 누구도 다시금 기억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일까?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소름>은 한국 영화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저주받은’ 걸작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북아현동의 금화아파트는 2015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물리적 공간은 실제로도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철콘 근크리트? 개봉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건만, 좀처럼 입에 찰싹 달라붙지 않는 몇 안 되는 제목 중 하나이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철근 콘크리트를 잘못 발음하는 것에 착안해서 붙여진 제목이란다. < 철콘 근크리트 >는 일본만화계에서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3부작 동명 만화 원작을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 속 세상은 캐릭터와 배경뿐 아니라 대사와 성우 목소리까지 하나하나 섬세하게 묘사되면서 동시에 독창적인 스타일과 연출로 작품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마츠모토의 개성을 그대로 뿌려 놓았다. 여기에 신의 한 수는 그의 작품이 스튜디오 4도씨와 만났다는 것이다. 스튜디오 4도씨는 전통적인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극복한 독창적인 디지털 애니메이션 테크닉으로 가장 주목받아 온 일본의 크리에이터 집단이다. 이들은 모리모토 코지 감독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2D 기법과 3D 디지털 기술을 넘나들며 독특한 화면구성과 실험성 짙은 영상미를 선보여 왔으며, 일본 내에서도 차별화된 스타일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특히 이 작품은 스튜디오 4도씨 설립 이래 처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하에서 미국 LA 출신의 마이클 아리아스 감독에게 연출을 맡긴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물의 밀도가 가장 높은 온도가 섭씨 4도씨라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스튜디오 4도씨’라고 작명한 것처럼 밀도 높은 작품을 창작하겠다는 이들의 의지와 철학이 이 작품 곳곳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원작이 기괴한 카메라 앵글을 통해 초현실적인 톤을 보여줬다면, 애니메이션에서는 인간의 눈으로 그릴 수 없는 세상을 광각 렌즈의 독특한 화각으로 도시의 건물들과 거리의 골목골목을 사실적으로 변주하며 빼곡히 담아내고 있다. 이야기는 불량배들과 노숙인들이 모여 사는 다카라쵸라는 곧 개발을 앞둔 무방비 도시에서부터 시작된다. 집도 절도 없이 거리를 떠돌며 지내는 고아 소년 쿠로와 시로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이다. 도시의 빌딩 옥상과 철제 난간을 놀이터 삼아 자유롭게 휘젓고 뛰어다니는 두 소년의 모습은 흡사 파쿠르 선수를 연상시킨다. 쿠로(흑)와 시로(백)는 폭력과 순수, 어두움과 빛의 양면성을 동시에 상징한다. 둘 사이에는 단순히 고아라는 관계 그 이상의 끈끈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마음속 ‘검은 그림자’를 품고 사는 쿠로는 ‘순수’를 상징하는 시로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시로에게 더 많은 정신적 위로를 받는다. 혼자 떨어져 있을 때 둘은 서로 불안하다. 이들은 뭉쳐야 비로소 하나로 완벽해진다. 상처받고 병들어가는 타락한 도시에서 생존을 위한 고아 소년의 몸부림은 아이러니하게도 잔혹함을 일삼는 어른들보다 때때로 더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온갖 부조리의 온상이 되어버린 악의 도시에서 타락한 어른들의 이기심은 더 이상 이들을 순수한 세계에 남아있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병들게 한다. 오염된 사회에서 인간성 회복의 실마리는 고아 소년들의 유일한 바람인 비행기를 타고 바닷가 어딘가에서 살고 싶은 꿈으로 치환된다. 다행히 상처받은 어린 영혼들은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깨닫고 다친 마음을 치유하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그 과정 속에서 소년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폭력은 상당히 잔혹하고 가학적이다. 이 때문일까? 이 작품과 만나는 내내 컬러풀하고 환상적인 연출과 영상미로 눈의 호사는 맘껏 누렸지만 가슴 한구석을 파고드는 먹먹함은 아직도 오랜 잔향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