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섬
- 감독
- 송일곤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최지연, 정승길, 박길수, 김홍수, 백현진, 류동원, 조영찬, 임유진, 김혜나, 손병호, 서주희, 유인수, 장영규, 볼빨간, 김일, 김주복, 최민금, 고용하, 김다은
① 황금관 1913년 1월 1일 개관한 황금관은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가 세웠다. 위치는 지금의 을지로 4가인 황금정 4정목에 있었는데 루나파크(Luna Park)인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활동사진관으로 시작되었다. 설립 초기 황금관은 필름 수급의 어려움과 운영상의 미숙으로 고전하였으나 대정관 매점을 운영하던 하야카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가 운영을 맡게 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하야카와는 대정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영화를 상영했음에도 조선 내 일본인 관객들에게 가장 큰 인기가 있던 변사 유모토 교하(湯本狂波)와 여자 변사 아시자와 하쓰에(蘆澤初江) 등을 고용하여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황금관은 하야카와의 이름을 딴 하야카와연예부(早川演藝部)를 통해 운영되었다. 1914년 하야카와연예부는 텐카츠(天活, 천연색활동사진회사의 약칭)의 선만대리점으로 텐카츠에서 수입, 제작한 2색 칼라영화인 키네마칼라를 본격적으로 상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의 우미관을 비롯해 인천의 표관, 평양의 평안극장 등 지방의 영화관에 필름을 공급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필름 값이 폭등하게 되자 일반 영화보다 필름을 두 배 더 사용하는 키네마칼라 필름을 대신하여 활동사진의 일부를 변사들의 실연으로 보여주는 연쇄활동사진을 도입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야카와연예부의 영향력은 당시 조선의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대정관의 닛다연예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황금관은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위해 만들어진 연예관(演藝館)을 사들여 기존 건물 옆에 옮겨지은 후 1916년 6월 10일 새로운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황금관은 1917년 황금관 소유자인 다무라와 하야카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유락관으로 그 본거지를 옮긴 하야카와연예부를 대신하여 낭화관의 운영자 니시다 가조(西田嘉三)를 급하게 운영자로 섭외한다. 하지만 니시다는 영화관 운영 경험이 없었기에 영화관이 운영될 수 있게 틀만 잡아 두고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에게 운영권을 넘기게 된다. 아라키가 운영하던 시기 황금관의 가장 큰 성과는 극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1919년 2월 21일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가부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가 바로 황금관에서 제작한 극영화이다. 이 영화는 경성일보사 기자의 지도하에 제작되었으며, 각본은 황금관 운영자인 아라키가 썼다. 이 영화는 조선거주 일본인들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로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재조선 일본인들의 삶을 소재로 삼았기에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황금관이 인수한 조선물산공진회 연예관 1919년 텐카츠가 해산되어 국제활영주식회사(國際活映株式會社, 곳카쓰[國活])로 바뀌면서 황금관에서는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했으나 고전하게 된다. 1921년 말, 황금관은 유니버설 영화만을 상영하는 서양영화 전용관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전환하는데 앞장선 이가 새롭게 황금관을 운영하게 된 황금관 전무인 변사 난고 기미토시(南鄕公利)였다. 그는 서양영화의 설명에 능한 인물로 한때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운영되던 유락관에서 근무하다가 황금관으로 옮겨온 바 있다. 황금관은 1922년 9월 다이카츠 쇼치쿠와 계약을 맺고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되다가 1924년 1월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조선 봉절장으로 있었다. 1925년 9월부터 다시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1926년 2월에 하야카와 마쓰타로가 조선에서의 활동을 접으면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도아키네마, 제국키네마 등이 직영하게 된다. ②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8년 4월에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외화 수입업자로 활동하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德永熊一郞)가 황금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직속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는데 도아키네마 영화뿐 아니라 다른 중소회사의 영화들도 상영했다. 동아구락부의 운영자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규슈 출신으로 1920년대 초반 대구로 건너와 흥행업에 뛰어 든 이후 1920년대 중반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외국영화 수입회사인 덕영상회(德永商會)를 설립하고 고베의 동서영화주식회사(東西映畵株式會社)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워너브러더스와 FBO영화사의 영화를 수입 배급했다. 덕영상회에서는 외화 수입 외에 도아키네마를 비롯해 중소 규모 영화회사의 필름을 상영했고 덕영프로덕션을 통해 영화제작도 했다. 덕영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영화로는 토성회와 함께 제작한 이규설 연출, 복혜숙 주연의 <홍련비련>과 <순정은 신과 같다>와 같은 관청 납품용 교육(문화)영화들이 있다. 동아구락부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인기 있는 작품들이 아니어서 저렴한 입장료를 매기는 대신 자주 프로그램을 바꾸면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동아구락부는 일본인 상설관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던 극장이었다. 1930년부터 조선에서 토키영화가 본격 상영되기 시작하자 닙튼 영사기를 구비하여 토키영화를 상영하였다. [사진] 1936년 신축되어 1999년 사라진 국도극장(1961년 경, 출처: 국가기록원) ③ 쇼치쿠좌(松竹座) 1934년 3월 말로 계약이 끝나는 쇼치쿠 영화에 대한 대정관의 독점권을 두고 서울의 극장들이 쇼치쿠 개봉관이 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주도권을 쥔 것이 동아구락부였다. 동아구락부에서는 쇼치쿠 개봉관의 지위를 얻게 되자 이를 기회로 극장 이름도 동아구락부에서 쇼치쿠좌(松竹座)로 바꾸었다. 1934년 7월 13일이었다. 쇼치쿠좌는 정원이 1,033명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극장으로 보통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시설이 낙후하여 1935년 6월 토키영화관으로 신축이 결정된다. ④ 황금좌(黃金座) 쇼치쿠좌와 그 뒤 과거 광무대가 있었던 곳을 합하여 총 600평의 부지에 건설비 30만원에 무대장치 완비하여 건설되었다. 개관 당시 쇼치쿠의 흥행권이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마키노영화를 상영하게 되자 극장 이름을 쇼치쿠좌에서 황금좌로 바꾸었다. 개관일은 1936년 11월 15일이었고 정원은 1,136석이었다. 도쿠나가가 운영하던 황금좌는 1937년 12월 도와(東和)상사 조선지사의 고인문(高仁文)으로 운영자가 바뀌게 된다. 파라마운트를 비롯해 각종 외화를 수입하는 도와상사가 황금좌를 운영하게 되면서 황금좌는 서양영화를 비롯해 조선영화의 상영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최남주의 조선영화사는 공식적으로 황금좌를 자사의 봉절관으로 정하게 된다. 당시 외국영화와 일본영화를 함께 상영하도록 했기에 도와상사가 운영하던 황금좌에서는 닛카쓰 영화를 상영하며 닛카쓰 개봉관이 된다. 전통적으로 닛카쓰영화를 개봉하던 희락관은 2번관으로 바뀌게 된다. ⑤ 경성보총극장(京城寶塚劇場)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수입제재가 장기화되면서 도와상사의 고인문은 황금좌 운영에서 손을 뗀다. 황금좌 소유자 다무라 미네(다무라 기지로의 미망인)는 황금좌의 운영권을 회수하여 요시모토 흥업과 보총극장이 제휴한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에 넘긴다. 황금좌는 1940년 5월 1일부터 이름을 경성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은 극장 운영을 위해 자본금 85만원의 주식회사를 성립하게 된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의 진용은 사장 하타 도요키치(秦豊吉, 동보), 전무 하야시 히로타카(林弘高, 요시모토), 취체역 나와 미쓰마사(那波光正, 동보), 하야사 쇼노스케(林正之助, 요시모토), 감사역 온다 다케이치(恩田武一, 요시모토), 마나베 야치요(眞鍋八千代, 동보측)이었으며 실무는 지배인 우메미야 사부로(梅宮三郞)가 맡았다. 1940년대 경성보총극장은 성보극장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이 영화관은 조선영화의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는데 <집 없는 천사>(1941), <복지만리>(1941), <창공>(돌쇠의 개제)(1941), <그대와 나>(1941), <신개지>(1941) 등이 경성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연예를 통한 선전활동이 강화되면서 1942년 9월 20일 경성보총극장 직속의 성보연예부가 신설된다. 연예보국의 영역을 확장키 위해 만들어진 성보연예부에서는 동보연예배급사 요시모토흥예배급부(吉本興藝配給部)의 지원과 만주연예협회와의 연락을 통해 내지 연극연예단을 조선에 소개하고 조선의 연극연예의 배급과 흥행을 맡았으며 그 산하에 성보이동연예봉사대를 조직하여 각종 위문연예를 제공했다. 경성보총극장은 1943년 7월 30일 조선흥행연합회에서 1급에서 11급까지 등급을 나누었을 때 서울의 영화관 중 명치좌와 약초극장과 더불어 1급관으로 80전의 입장료를 받을 수 있었던 대표적인 영화관이었다. 해방 직전 화재로 인해 문을 닫은 성보영화극장은 해방 이후 내부를 수리하며 재개관하게 되는데 이때 이름을 국도극장(國都劇場)으로 바꾸었다. 국도극장은 1999년까지 운영되었다가 폐관하였다. 현재 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황금유원 설립자 다무라 기지로(『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경성일보≫,1919.02.21. 淚の家 全五卷 當館封切 黃金館 京城日報記者指導 黃金館主 荒木大助 脚色 釜山出征軍人 中淵仙太郞氏の家族 ▲夫の出征後妻は貧0の身に又一兒を産み産後の患ひより遂に歸らぬ旅0 の人となる、頑是なき七人の子は飢に泣き水よ飯よと取0る0他の見ろ 目 0實に哀れ悲慘の淚なり ●六人の子は飢に泣き妻は臨月の腹を抱つて病床に臥す出征軍人の大 悲慘なる家族、 噫々薄命なる勇士 ●0の難を見て惻隱の情を勤かすは仁の端と云ふ大方の士御觀覽の上一 掬御同情あらん事を43)(0은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경성일보≫, 1919.02.23. 初日 二日 滿員 黃金館 荒木大助 脚色 事實悲劇 淚の家 ▣ 當館特別撮影 大阪樂天地に京都京座に名古屋新守座に於て連日大盛況の本0は劇以上 に出色せしめたる實に現在釜山にある大悲慘事 此哀れなる寫眞を見られて誰れか泣かれぬ方ありや 本日 晝夜 開演 黃金館45)(0는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연기관의 대소요, 연극 즁에 큰 소동, 일반 연극의 주의" 《매일신보》, 1913.2.22. 십구일 오후 십시에, 남부 산림동(山林洞) 황금유원 안 연기관에셔, 한 소요 일이 잇셧 , 연기관에 , 혁신단 림셩구(林聖九) 일 이, 신파연극을 흥 즁, 그 시각에, 그곳에셔 고용 , 광도현인 포 신조(廣島縣人 蒲生信造) 삼십륙셰된 쟈가, 왼편 손에 연극에 쓰 , 폭발약을 만히 쥐고 셧다가, 그릇 불이 이러나, 굉쟝 형셰로, 젼부가, 폭발되얏슴으로 그 근쳐에 잇던, 흔 고용인, 즁셔, 쇼숑, 쇼뎐(中西, 小松, 小田) 등, 삼인도 즁샹을 입어, 젼귀 명을, 즉시 그 부근 지샹의원(池上醫院)으로, 메여다가 치료 즁인 , 그 즁 포 은, 왼편 손이, 젼부가 파괴되얏슴으로, 지샹씨의 집도로, 대슈슐을 시작 야, 팔을 버혓 , 지금 형샹으로 , 명에 , 관계가 없슬 듯 나, 눈망울과 기타 크게, 화샹 곳이 만아, 보기에 우 참혹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8.07.05. 日本天然色活動寫眞株式會社 技術部 新案 米國式 스데-지 기네오라마 應用 事實劇 船長의 妻 黃金館은 新築二週年 記念 特別 大大興行으로 右 天活會社 技術部員 拾數名을 招 야 七月五日부터 公開 다 歐洲戰亂以來 敵 潜航艇으로 因 야 商船의 遭難이 不... 바 昨年 我 日本最初의 武裝船 ○○會社 ○○丸도 其 慘禍에 罹 얏더라 今回 黃金館은 其 巨大 舞臺 一面에 前記 天活會社 獨得의 「스데-지 기네오라마」를 應用 고 電氣仕掛로써 當時의 實況을 看客 諸君에 示코져 今 基 光景을 略述 지면 英國 包台 不飽히 探照燈을 照 야 獨히 潜航艇 並 飛行機의 襲來를 監視 月은 皎皎 야 海 照 고 金波 銀波 靜動中에 我 ○○丸은 警戒 中 航行 天候 俄然히 變 야 數千의 星은 急히 其 光을 沒 야 一天은 忽然 暗黑 敵艇 及 飛行機 其 機를 乘 야 「 버」海峽에 馳來 야 我 ○○丸을 發見 고 .....水雷를 發射 고 又 爆彈을 投下 ○○丸 其 ....의 活躍인 實로 慘劇 其 物을 目擊 에 不異 고 誰何든지 科學의 進步 光學 應用의 巧妙 에 驚치 안이치 못 이라 「스데-지, 기네오라마」에 就 야 內地에 旣히 定評이 有 고 今 玆에 ....言을 不要 고 黃金館은 鮮人 各位의 觀覽에 供 기 爲 야 特히 此 一團을 招聘 얏더라 米國 단호자會社 作 連續 二十三編 四十六卷 連續 大活劇 百萬弗의 秘密 第一 第二篇 上場 臨時觀覽料 特等 七十錢 一等 五十錢 二等 三十錢 軍人學生各等半額 黃金館.
“어떻게 보면 가짜 인생이지요. 스크린 의상은 모조품이니까요. 진짜 옛날 장군복을 배우가 입으면 무거워서 움직이지도 못해요.” (의상 이해윤) 1) ‘진짜’가 아닌 ‘가짜’를 관객이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매체인 영화. 영화에서 의상은 의복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등장인물의 나이, 직업, 성별을 드러내주는 이미지 기호이다. 더 나아가 영화 의상은 등장인물의 심리와 내면을 시각화하고 장면마다의 분위기, 즉 사랑, 환희, 갈등, 절망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영화 의상은 이렇게 미학적 기능을 하는 동시에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경제적인 효과의 확산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192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산업화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영화 의상도 전문적인 부서로 독립했다. 인기 있는 배우를 만들어 내고, 스타가 된 배우를 관객이 지속적으로 보러 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 줄 아름다운 의상을 입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영화에서 배우 스스로가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입던 영화 의상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인력이 생겨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가짜 인생’을 위한 ‘모조품’이라고 자조하지만 삼오장 저고리와 금관조복으로 스크린에 조선 시대를 그럴싸하게 펼쳐놓은 이는, 충무로에서 ‘짱구’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이해윤(1925~ )이었다. 그녀가 일을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사극 영화나 시대물에서 이해윤의 의상을 가져다 쓰지 않은 영화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는 400여 편의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게 대본을 쪼개어 의상을 구상하는 것은 물론, 대규모 몹신(mob scene)을 위해 삼백 명, 사백 명 의상을 준비하는 일도 도맡았다. 50여 년 동안 배우에게 옷을 해 입힌 이해윤은 남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충무로에서 몇 안 되는 여성영화인이었다. (사진1) <춘향전>(이규환, 1955)의 포스터. 이해윤은 동대문 성터에서 촬영하는 변 사또 부임행차에 기생 역할로 영화배우(?) 데뷔를 했다. (사진2) <자유전선>(김홍, 1955) 광고. 김홍의 조감독 백호빈과 알게 되어 <자유전선>에서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활약했다. 이때 배우 임운학을 알게 되어 이후 영화 의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해윤은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웠는데 남달리 여기에 손재주가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군 병참군 사령부에 취직해서 군복 수리하는 일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빨랫감을 받아 세탁소를 차린 적도, 편물점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영화계에서 일하던 친구를 통해 이규환의 조감독이던 유현목, 김홍의 조감독이던 백호빈과 알게 되었다. 2) 동대문 성터에서 몹신을 촬영하던 <춘향전>(1955, 이규환) 구경을 갔다가 변 사또 행렬에 동원된 기생 역할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자유전선>(김홍, 1955)에서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배우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역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보다는 바느질에 재주와 관심이 있던 터, 그녀는 <단종애사>(1956, 전창근)부터 영화 의상을 담당하게 되면서 평생을 재봉틀 앞에서 실, 바늘과 함께 했다. (사진3)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어린 단종을 연기한 배우 황해남 (사진4)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단종비를 맡은 엄앵란. 황해남과 엄앵란은 이 영화를 통해 데뷔했다. 당시 영화에서 의상이란 배우가 자신의 출연료의 일부를 할애하여 옷감을 끊어다가 역할에 맞도록 바느질집이나 의상실에서 직접 맞추어 입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해당되는 것이었고, <단종애사> 같은 사극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이광수 원작의 작품을 유치진이 각본화하고, 전창근 연출, 한형모 촬영의 <단종애사>는 가히 초호화 캐스트를 동원했던 당시 사극영화 상 최대 규모로 이루어진 대작이었다. 바느질 솜씨만 좋았던 이해윤은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던 배우 임운학과 김일해의 지도와 도움으로 잿물에 머리카락을 삶아 직접 망건을 뜨고 수염을 만들었으며, 또 배우들을 머리 빗기고 분장하는 일까지 직접 도맡아 해냈다. 제작부장의 소개로 운현궁 나인 출신을 만나 실물 크기의 도복과 관복, 당의 등을 얻어 확실한 고중을 거쳐 궁중 의복을 재현해냈다. 이 작품을 위해 이해윤은 제작사였던 삼일영화사에서 꼬박 1년을 살았다. 1950년대 후반 한국전쟁 이후 안정을 찾은 영화계는 이규환의 <춘향전>이 흥행에 성공한 후현대극(물론 <자유부인>(한형모, 1956)이 있었지만)보다 사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56년부터는 명승고적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야외 촬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정교하고 거대한 세트에서 화려한 의상으로 스크린을 수놓아 관객을 사로잡는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기획들이 나타났다. 조선시대는 물론 상고시대까지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가히 사극 전성시대였다. <단종애사>를 시작으로 이 해에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마의태자>(전창근), <논개>(윤봉춘), <사도세자>(안종화)에 이르기까지 노장과 중진들이 총동원되면서, 사극 영화는 오락성과 대중성을 장착해 관객의 눈과 귀를 충족시켰다. 비록 16미리이긴 했지만, 1958년 안종화가 국내의 기술과 시설로 <춘향전>을 컬러영화로 제작하면서부터 사극 영화는 점점 더 의상과 소품에도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사진5) <춘향전>(안종화, 1958) 포스터. 사극이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점점 더 의상에 세심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이해윤이 의상을 처음 담당한 <춘향전>이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사극은 기본적으로 해당 시대의 민속, 언어, 음악은 물론 의상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것이었고, 여기에 의지한 작품이라야 예술성도 살릴 수 있는 법이었다. 이해윤이 그 시작부터 사극 의상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의상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영화의 예술성과 ‘역사적 고증’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익숙한 서사와 화려한 볼거리로 관객들이 구름같이 모이는 “사극이 과연 한국영화예술의 어떠한 위치에서 우리들의 현실에 무엇을 제시해 주고 무슨 예술적인 감명을 줄 수 있느냐”는 비평적 문제 제기 속에서, 종종 고증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영화 의상은 해당 작품의 예술적 결점으로 치부되었다. 3) 오늘날까지도 사극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완벽한 ‘역사적 고증’은 고질적인 딜레마로 남아 있다. 박물관과 도서관의 고서적을 파헤치고 궁중 나인의 도움을 어렵게 받더라도, 이해윤에게 그나마 조선시대는 고증을 통해 제작하기 수월(?)했다. 별 자료 없이 벽화를 들여다보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상고시대의 의상들은 특히 그녀를 힘들게 했고, 종종 각각 감독들의 까다로운 미학적/경제적 요구와 좀 더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자하는 배우들의 욕망 어딘가에서 ‘역사적 고증’과 절충해야만 하는 이해윤의 난제는 단 한 번도 속 시원히 해결된 적이 없었다. (사진6)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이해윤이 이 영화의 의상을 담당했지만, 주인공 춘향의 의상은 최은희가 직접 지어 입었다. (사진7,8) <춘향전>(홍성기, 1961) 이 영화에서는 춘향 역의 김지미 의상을 비롯, 모든 등장인물의 의상을 이해윤이 담당했다. 홍성기 감독은 이후 이 영화에서 제작한 의상을 모두 이해윤에게 주었다. 1961년은 홍성기와 신상옥의 ‘춘향전 경작’이 단연 화제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되는 이 두 영화의 춘향,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최은희와 떠오르는 스타 김지미를 두고 ‘어떤 춘향이 연기를 더 잘할 것인가, 어떤 옷을 입고 나올 것이냐’에 관심이 쏠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작품의 의상을 모두 이해윤이 담당했다는 것이다! 최은희는 직접 옷을 지어 입어 신상옥의 <성춘향>에서 이해윤은 엑스트라의 옷만을 담당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에서 김지미의 의상을 비롯해 모든 출연자의 의상을 담당했다. 이 경작에서 신상옥이 성공적인 흥행결과를 얻었지만, 이해윤은 의상만큼은 김지미의 것이 아름답고 정교했다고 자부한다. 이렇듯 혼신의 힘을 들여 의상을 제작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이 실패하는 통에 그녀가 손에 쥔 것은 무더기의 한복뿐이었다. (사진9,10,11) <연산군(장한사모편)>(신상옥, 1961) 이해윤이 신필름에 입사해 금관조복을 제작해 촬영한 장면들. (사진12,13,14)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 1962) 이 영화에서도 역시 수려한 의상 덕분에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평을 받았다. ‘춘향전 경작’ 이후 다시 활기를 띤 사극영화의 황금시대에 그녀는 역사적 고증이 확실히 된 의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홍성기 감독이 건네 준 의상을 손에 쥐고, 본격적으로 영화 의상에 매진하리라 다짐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춘향>이 끝난 후, 신상옥은 이해윤에게 신필름 의상부 소속으로 함께 일하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신필름에 들어가 처음 촬영한 작품이 <연산군>(1961)과 <폭군 연산>(1962)이었다. 두 영화는 실물에 가까운 세트에서 당시의 풍속, 기예, 생활을 고증을 통해 잘 살렸고, 특히 소도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과감하게 재현하고 수려한 의상으로 인해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사진15) <왕자호동>(한형모, 1962)에서 사열해 있는 고구려 병사들의 장면 (사진16) <인목대비>(안현철, 1962)의 한 장면. <왕자호동> 병사들의 옷에 단을 대어, 다음날 <인목대비>의 조선 병사들이 입고 찍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해윤이 의상을 담당했다고 하면 주요 등장인물들 것만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사극의 경우 조연을 비롯한 엑스트라까지 포함하여 기본 200벌(많으면 500벌) 정도의 다양한 의상을 손수 만들어야했다. 한해에 영화 의상을 열 편 이상 담당하는 그녀에게 ‘의상 바꿔치기’(그리고 세탁)는 시간과 공간을 고려해 머리를 써야하는 고난도 기술이었다. 1962년 한해를 예로 들면, 그녀는 <왕자호동>(한형모), <인목대비>(안현철),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의 의상을 동시에 맡았다. <왕자호동>은 삼국시대, 나머지는 두 영화는 조선이 배경이었다. 수백 벌의 의상을 영화마다 각각 제작할 비용도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한 영화에 쓰인 의상을 조금 다듬어 다른 영화에서 촬영하고, 다시 가져와서는 고쳐서 또 다른 영화에 빌려주는 식이었다. 조선시대 의상은 바지나 저고리, 두루마기에 단을 대는 게 특징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단이 없었다. <폭군 연산>을 위해서는 손바느질로 단을 대고, 같은 의상으로 <왕자 호동>을 찍을 때는 부지런히 그 단을 떼야했다. 그리고 다시 촬영 일정에 따라 <인목대비>를 찍는 수원성에서는 단을 붙인 채로 찍고, 밤새워 단을 없애 다음날에는 남한산성의 <왕자 호동> 현장으로 의상을 날라야 했다. (사진17, 18) <칠공주>(정창화, 1962)의 포스터와 스틸 사진. 통일신라의 일곱 공주가 등장하는 이 영화의 의상을 각각 다르게 개성을 살려 만드는 일이란, 의상 담당자 이해윤에게 녹녹치 않은 일이었다.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 되자 관객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사극 배우의 의상은 특히나 중요해졌다. 신라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의 희비극인 정창화의 <칠공주>(1962)는 무려 일곱 공주(문정숙, 이빈화, 전계현, 방성자, 차유미, 김명희, 엄앵란)가 주인공이라 의상이 까다로울 수밖에는 없었다. 조선이 시대적 배경이었다면 치마저고리 일곱 벌의 색깔만 달리해 공주 각각에게 입혔겠지만, 신라가 배경인 컬러 시네마스코프였기 때문에 색감은 물론 옷깃이나 장식 모양을 조금씩 달리해 각 공주들의 성격을 반영하면서 복식을 재현해야 내야했다. (사진19, 20)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의 군인 복장. 이만희 감독과의 논의 끝에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만들었던 이해윤 역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군사영화에서도 오랫동안 군복을 수선하던 이력의 소유자 이해윤의 바느질 솜씨가 필요했다. 반공법 위반으로 신문지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만희의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1965)>은 감독 뿐 아니라 의상 담당이던 이해윤까지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남한 출신 여자 포로들을 호송하는 인민군 장교의 인간적인 면을 묘사한 이 영화에서 이해윤이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지었기 때문이었다. 기세등등한 공산당과 인민군을 표현하기 위해 하얀 망이 아닌 새 망으로 탱크 위장망을 치고, 장교 군복을 멋지게 지어 세무(suede) 반장화까지 신겼던 것이 문제였다. 중앙정보부는 이해윤의 의상 창고도 샅샅이 조사하고, 인민군과 중공군 의상에 대한 교육을 한 달이나 받게 해 향후 의상 제작에 있어 반영하도록 했다. (사진21) <하얀전쟁>(정지영, 1992)의 베트남 현지 로케이션 장면. 급히 필요한 미군 작업복을 현지 인력을 직접 고용해 만들어 촬영을 했다. 그 후에도 <8240 K.L.O>(정진우, 1966), <증언>(임권택, 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아벤고 공수군단>(임권택, 1982)을 비롯한 수십 편의 군사영화에서 이해윤은 국군과 인민군, 미군과 중공군의 옷을 지었다. 베트남에서 촬영했던 정지영의 <하얀 전쟁>(1992)에서는 예순이 훌쩍 넘은 이해윤은 홀로 로케이션 현장에서 의상을 챙겼다. 필요한 장면에 따라 연기자들의 의상을 모두 제작해 갔지만 막상 현지에서 미군 작업복이 필요했고, 무작정 사이공 시장으로 내달린 그녀는 말도 통하지 않는 현지 여성들을 고용하여 의상을 만들어 촬영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진22,23) <난중일기>(장일호, 1977) 이해윤이 쇠미늘을 오리고 두드려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꿰매 만든 갑옷을 볼 수 있다. 장일호의 <난중일기>(1977)는 그녀로 하여금 영화 의상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사극과 군사영화를 전문으로 20여 년간 의상을 담당했다지만 이 영화에서 이순신의 갑옷을 제작하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갑옷을 입고 호령하는 모습을 통해 당당한 영웅의 면모를 표현하고 올곧은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연구의 연구를 거듭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우선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뜯어보며 흉내는 내봤지만 어쩐지 입체감이 영 살지 않았다. 생각 끝에 프레스 공장을 찾아가 갑옷에 달 쇠미늘(鐵札)을 오리고 두드린 다음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엮어 철갑 두 벌을 만들었다. 한 커트를 찍고 나면 날카로운 쇠미늘에 무명실이 끊어져, 이순신 역의 김진규가 한 벌을 입고 찍고 있는 동안 이해윤은 촬영장 한편에 앉아 나머지 한 벌의 쇠미늘을 다시 꿰매야 했다. 이때의 연구와 노력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새겨져 관객 앞에 펼쳐진 그 순간, 그녀는 영화 의상 담당으로서 새삼 긍지를 갖게 되었다. (사진24)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정창화, 1968) 포스터 (사진25)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포스터 (사진26) <무림악인전>(김정용, 1980) 포스터 합작이 시작되고 중국, 홍콩영화가 들어오면서 ‘참바라(ちゃんばら)’ 또는 ‘으악새’로 불리던 검술영화가 많아지면서, 이해윤은 영화 의상에서 ‘고증’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토로했다. 4) 공보부에서는 사극이나 시대극영화에서 사학을 전공한 인력을 고증 담당 스태프로 참여시켜 근거 없는 언어, 의상, 풍습을 시정하라고 지시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상영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아보기도 했지만 지켜질 리 만무했다. 5) 궁중을 배경으로 했던 이전의 정사극과 달리 시대적인 배경만을 빌린 야사나 서민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이들 영화에서는 화려한 액션과 오락성이 더 강조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이시기 보편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옷감 나일론(nylon)은 빨아도 구겨지지도 않고 색깔도 선명했다. 면이나 비단처럼 툭하면 찢어지고 구김이 심해 관리가 힘들었던 기존의 의상과 달리 나일론으로 제작한 의상은 공중을 날아 차고 칼을 휘둘러야하는 액션 연기자들이 활동하기에는 적격인 소재였다. 이해윤 역시 ‘중국 건지, 한국 건지, 현대 건지’도 모르게 의상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나일론 같은 소재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연기자들이 연기하기 편한 의상을 만들고자 했다. (사진27,28) <토지>(김수용, 1974) 이 영화에서 이해윤은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하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지었다. 특정한 장르 영화 제작에서 의상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영화계 내에서 그런 수고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여러 영화제에서 공로상과 의상 부문의 수상 트로피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중 그녀가 자랑스럽게 꼽는 의상상은 <토지>(김수용, 1974)로 받은 파나마국제영화제 의상상이다.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경남 하동의 만석지기 가문을 지켜가는 서희의 일생을 그린 이 영화에서 주인공 김지미는 어린 서희에서 나이든 서희까지 연기해야 했다.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해야 했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공들여 지어야만 했다. (사진29,30) <어우동>(이장호, 1985) 이해윤은 이 영화에서의 의상에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를 주어 개성을 가미하려 시도했다. (사진31)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내면을 드러내 주는 팥색 저고리 그녀에게 <어우동>(이장호, 1985)의 의상은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들을 주어 신선한 개성을 가미하려고 애썼던 것이라,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붉은 팥색 저고리는 두루마기를 뜯어 방망이로 종일 다듬어 반질반질한 비단의 느낌을 살려서 만든 것이라 소중하다. 한 겨울 장면이라 엑스트라들 안에 입는 옷들까지 모두 누벼 주어야 해 너무나 고생스러웠던 작품 <개벽>(임권택, 1991), 그리고 연일 40도를 웃도는 멕시코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했던 작품 <애니깽>(김호선, 1996) 역시 이해윤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사진32,33,34) <개벽>(임권택, 1991) 이해윤이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영화라고 소회하는 <개벽>은 겨울 장면이 많고 엑스트라가 다수 등장해 특히 공들여 의상을 지었다. (사진35,36) <애니깽>(김호선, 1996)은 1900년대 초 멕시코로 이주 노동을 해온 조선인들의 생활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해윤은 현지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해 가며 촬영에 임했다. 이해윤처럼 많은 영화에서 꼭 필요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의 뒤에 또 영화사의 뒤안길에만 존재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현장에서 이들은 ‘뒷 스태프’(편집, 미술, 특수효과, 소품, 녹음, 의상 등)라고 불렸는데 오랫동안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연출, 촬영, 연기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만큼 대우받지 못했고, 정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과 작가 위주의 연구 경향으로 인해 영화사적으로도 거의 주목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뒷 스태프’에 대한 문헌자료도 충분치 않은 것은 물론 그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다. 2004년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은 ‘원로영화인 구술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가려져있던 많은 ‘뒷 스태프’의 역사가 발굴, 기록되고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해윤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영상 뒤에 숨은 여성마술사들, 의상전문가 이해윤 씨’, 《경향신문》 1986년 1월 29일 7면. 2) 「이해윤 : 바늘 하나로 영화를 아름답게, 40여 년간 충무로를 지켜온 영화의상 디자이너」, 『이야기 여성사: 한국여성의 삶과 역사2』, 여성신문사, 2000, 263~264쪽. 3) ‘신영화 : 사적 고증이 결여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한국일보》 1956년 6월 14일 4면. 4) <이해윤 은막의 스타, 그 날개를 달다>(나윤희, 부동산 TV, 2001).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이해윤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www.koreafilm.co.kr에서 볼 수 있다. 5) ‘[연예계스냅] 사극 고증 철저히’, 《경향신문》 1967년 12월 23일 4면.
이번 글이 마지막 수다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내가 왜 어떤 책에 대해 좀 더 특별하게 할 말이 많다거나, 어떻게 해서 그 책이 내 마음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관해 주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아직은) 그 이유가 내 창작의 비밀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눈치껏 알아서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분량은 채워야 하고 비밀은 숨겨야 하니까, 다소 수박 겉핥는 식의 이야기가 되더라도 그에 관한 수다를 산만하게 떨어볼까 한다. 그러니 앞으로 이어지는 글은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계획적이고 (조금은 의뭉스러운) 중간정리 정도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이다. 얄밉겠지만 어쩔 수 없고, 그 대신, 소개되는 책들은 다 읽어버린 것이 인생의 황량한 구멍을 남겨놓은 느낌을 줄 정도로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니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장바구니에 넣어둘 것을 조심스레 추천하는 바이다. 그레이엄 그린, 「Travels with My Aunt 이모와의 여행」 첫 번째는, 죽은 엄마의 화장터에서 처음 만나 자신을 ‘이모’ 라고 소개하며 내 손에 (당신이 직접 꺾어온) 들꽃 무더기를 쥐여준 그분과의 몇몇 일화를, 그레이엄 그린의 「Travels with My Aunt 이모와의 여행」 처럼 각색해보는 프로젝트이다. 첫 번째 칼럼, 「펀 홈」 에 대한 글 에서 소개했던 엄마의 활력 넘치는 여자 친구들.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그분의 얼굴은 그 옛날, 아마도 스물 몇 살이었던 것 같은 엄마의 여행 사진 속에서 처음 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의 독사진을 똑같은 앵글로 하나씩 찍어준 그 장소는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해변처럼 보였고, 한껏 포즈를 잡은 그들은 고전 흑백영화 속의 주인공들, 그러니까 마치 캐서린 헵번과 나탈리 우드처럼 당당하고 우아했다. 그중에서도 캐서린 헵번처럼 후리후리한 아름다움을 조용히 뿜어내던 그 여성이 바로 내게 들꽃 무더기를 쥐여준 바로 그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쓰인, 그레이엄 그린의 「Travels with My Aunt 이모와의 여행」에서도 은퇴한 은행 매니저인 주인공 남자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화장된 유골함을 기다리며, ‘난생처음 보는 이모’의 접근을 받아 인사한다. 메리 여왕처럼 차려입고 등장해, 죽은 엄마가 사실은 그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알려준 그 이모란 여자는 조카와 함께 파리와 이스탄불을 함께 여행한다. 물론, 이런 에피소드까지 내 경험과 닮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웃기고 재밌는 책이고 언젠가 (초현실적이다 싶은) 기회가 오면 꼭 영화로 만들고 싶다. 그런 기회 속에는 (내가 이모로 캐스팅하고 싶은) 틸다 스윈튼이나 케이트 블란쳇이 캐릭터의 나이와 얼추 맞는 시기가 되었다는 조건까지 포함되어 있다. 존 어빙의 「가프가 본 세상 The World according to Garp」 은 내가 준비도 못 하고 갑작스레 세상을 뜨지 않는 한, 죽기 직전에 몇 장이라도 다시 들춰보며 감상에 빠지고 싶은 그런 책일 것이다. 아마도 그때 나는 이 책을 4부작 시리즈로 만들 기획안을 평생 가지고 살았고, 죽기 일보 직전인 지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흐뭇하고 슬플 것이다. 오랫동안 내가 상상한, 러닝타임 240분의 4부작 텔레비전 시리즈에선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가프’였지만, 몇 년 전 그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이후부턴 세스 로건으로 슬그머니 얼굴이 바뀌었다. 아무리 내 머릿속의 극장이라지만, 죽은 사람을 캐스팅해 계획을 굴려보는 것까진 잘 안 되더라. 그리고 그 책의 실질적인 심장(heart)이자 또 다른 주인공인 (가프의 어머니) ‘제니’가 있다. 존 어빙, 「가프가 본 세상 The World according to Garp」 ‘가프’의 어머니, ‘제니 필즈’는?세계대전 중에 부상병을 치료하던 간호사였고, 평생 간호사복을 입고 지낸, 열혈?여권 운동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며,?죽기 전까지 소설가 아들 ‘가프’를?열성적으로?지원하고 격려했던 멘토이자, 그의 인생을 쥐고 흔들었던 강한 어머니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저 커버 사진을 볼 때마다 매번,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간호사복은 결국 ‘제니 필즈’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가프’의 인생도 종말을 고한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난 ‘가프’가 벽 앞에 우두커니 서서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 듯한 이 커버를 볼 때 마다 마음이 짠해지고, 러닝타임 240분의 4부작 텔레비전 시리즈에 대한 (소명에 가까운) 계획을 다듬는다. 그 (초현실적인) 기회 속에서 나는, 이를테면, 넷플릭스 임원 회의에 참석해 4부작 정도의 시리즈의 기획안은 얼마든지 피칭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기회 속의 나는 제2의 봉준호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초현실적인’ 기회 속에서 말이다. 찰스 포티스, 「트루 그릿-진정한 용기 True Grit」 세 번째 프로젝트는, 이미 존 웨인이나 제프 브리지스 주연의 영화 <더 브레이브 True Grit>로 유명해진 찰스 포티스의 「트루 그릿-진정한 용기 True Grit」. 나는 이 책의 1인칭 주인공 화자인 ‘매티 로스’의 목소리를 정말로 좋아하는데, 책을 펼칠 때마다 매번 그의 대사를 소리 내 따라 읽어볼 정도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친 자를 처치하고 복수를 완성하고자 먼 길을 떠나는 14살짜리 소녀라는 인물 설정 자체도 끝내주게 흥미진진하지만, 무엇보다도 미치도록 깐깐하고 자기 앞가림에 능숙하며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그 당당한 애티튜드의 목소리가 너무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 복수를 완성시켜줄 사람을 찾아다니던 ‘매티’가 악명 높은 연방보안관 ‘루스터 코그번’을 고용하기 위해 찾아온 장면 속, 두 사람의 대화는 볼 때마다 두근두근하다. “저를 영 하찮게 생각하시는 군요, 코그번 씨.” “아니, 난 네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네 생각 따윈 아예 하질 않아.” “정부로부터 2달러, 이동 거리에 따라 1.5km당 10센트씩, 거기에 사례금으로 50달러를 드릴게요.” “제법 열심히 조사했군.” “그럼요, 애들 장난이 아니니까요.” 비교적 근작이라고 할 수 있는 코엔 형제의 영화 버전이 내게 특히 좋았던 것은, 이런 ‘매티’를 거의 완벽한 캐스팅으로 만들어 냈다는 점이었다. 스크린에 ‘헤일리 스테인펠드’의 고집불통스러운 얼굴이 나오는 그 순간의 쾌감이란.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이 책의 스토리라인을 느슨하게 각색한 이야기를 조금씩 굴려보았는데, 내가 상상하는 이 책의 각색 버전은, (좀 어이없을 수도 있겠지만) 무신란(1170년)이 일어나고 몇 해 지나지 않은 시기의 고려를 배경으로 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벽란포구 뒷골목의 좁은 길을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비틀대며 걸어가면서 이 영화는 시작한다. 매섭게 불어대는 을씨년스런 바닷바람에도 거친 모시 적삼과 홑겹의 천 바지, 볏짚을 대충 엮은 도롱이를 걸친 채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열 몇 살짜리 아이. 품에 꼭 끌어안은 작은 봇짐을 귀한 보물이라 생각해 달려든 거지 사내아이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좀처럼 밀리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이 작은 몸집의 소녀에겐 보이는 것과는 다른 단단하고 비범한 면모가 숨어있다. 그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란 소년들 중에 대장 격인 아이의 어깨춤을 붙잡은 이 여자아이는 비상식량인 도토리 수십 알을 던져주며 소원을 이루어주는 불상이 있다는 다원(茶園)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자아이가 천릿길을 걸어 벽란포구를 찾은 것은 이곳에 있는 한 다원에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불상이 있어 거기에 진실로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문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상이 있는 다원에는 이 아이는 물론이고 포구에 사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원에 사는 세 명의 여자들에 관한 것으로, 사실 이들은 무신란에서 공을 세워 신분이 해방된 여인 무사들이다. 그들은 불상이 있는 방의 뒷벽에 숨어 억울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몰래 듣고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해결을 해주는 해결사 노릇을 틈틈이 하고 있었던 것. 어느 골목에 숨어있듯 자리한 다원을 찾아낸 여자아이는 불상 앞에 엎드려 자신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그러면서 점차, 당상역관 외동딸의 몸종이었던 이 아이가 어떤 연유로 자신이 모시던 아씨와 그의 집안을 멸문지화 시킨 좌우승 장군의 목을 베고 싶어 하는지가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여자아이는, 이 영화의 ‘매티’이고, 세 명의 여성 무사들 중 캡틴이 ‘루스터 코그번’, 두 번째 무사가 (현상금을 노리고 합류한 특수경비대원) ‘라뷔프’ 인 셈이다. 책의 내용을 생각하면 좀 억지스러운 연결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상관없지. 나는 그야말로, ‘grit / 용기, 근성, 끈기, 담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니까. 즉, 이 영화가 ‘매티’처럼 당당하고 용감한 여자들이 메인이 되는 여성주의 무협 드라마가 되는 것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좀 더 그럴듯하게 완결된 형태의 트리트먼트와 초고 수준의 시나리오도 있지만, 이런 기획에 대해 슬그머니 수다를 떨어본 친구들의 반응이 내 기대에 조금 못 미쳐서 더 이상 개발시키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이런 글의 분량을 채우며 머릿속으로 한 번 더 정리해 보는 것으로 만족. 일단락. 마지막으로 수다를 떨어보고 싶은 프로젝트의 원작은, ‘희곡 (drama)’ 으로, 2010년 퓰리처상 ‘drama’ 부문의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브라이언 요키, <넥스트 투 노멀 Next to Normal> 퓰리처상 drama 부문 수상작은 대부분 ‘play (연극)’ 대본일 확률이 높지만, 가끔씩 <렌트>나 <해밀턴> 같은 뮤지컬 대본이 탈 경우도 있다. 2010년에도 심사위원들이 추천한 최종 후보작들은 모두 연극 대본이었으나, 브라이언 요키의 <넥스트 투 노멀 Next to Normal> 이 깜짝 수상작이 되면서 여러 말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거나, 조울증에 시달리며 약 없이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한 중년의 가정주부가 주인공인 이 희곡은 그가 전기충격요법을 받는 부분을 클라이맥스로 두고, 결국 혼자 집을 떠나는 결말로 마무리되는, 이례적으로 어둡고 심각한 스토리라인의 ‘가족 뮤지컬’이다. 이 이야기에서 독특하게 흥미로운 설정은 주인공 다이애나가, 갓난아이 때 죽은 아들(게이브)을 십몇 년 동안 자신의 환상 속에서 무럭무럭 키워왔으며 두 사람끼리 대화를 나눈다는 것으로, 이는 극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밝혀진다. 그에겐 “난 살아있어! I’m alive!”라고 끊임없이 외쳐대고 노래를 부르는 ‘환상 속의 아들 (imaginary son)’는 물론이고, (학교에선 굉장한 수재로 주목받아도) 집안에서는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딸(나탈리)도 있는데, ‘수퍼보이와 투명소녀 Superboy and the Invisible Girl’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나탈리의 시그니처 테마이다. 결국, 나탈리는 엄마의 처방약을 몰래 훔쳐 복용하기 시작하고 환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캐릭터가 아버지이자 남편인 ‘댄’이지만,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한숨 나오긴 마찬가지다. 결국 그에게도 환상 속의 아들이 찾아와 노래를 주고받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희망을 소원하고 기대하는 엔딩치고도 참 가차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 ‘긴 밤이 지나면 빛이 찾아올 거야.’라고 합창하는 등장인물들의 마지막 노래로 끝나는 이 작품의 엔딩은 다음과 같다. ALL: (sung) Day after day We’ll find the will to find our way knowing that the darkest skies will someday see the sun DAN: When our long night is done DAN and NATALIE: There will be light DIANA: There will be light ALL: There will be light When we open up our lives Sons and daughters, husbands, wives Can fight that fight There will be light There will be light There will be light There will be light (Lights fade.) End of Act 2. Curtain. 마치,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21세기 록-뮤지컬의 형태로 다시 쓴 듯한 이 이야기는 지금의 한국을 배경으로 각색하기에도 별 무리가 없을 만큼 보편적인 구석이 있다. 물론, 메이저 투자사 피칭 자리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가지고 왔냐’는 무언의 비아냥과 놀림 같은 걸 받을 수 있겠지만, 독립영화의 시스템 안에서라면 격렬하고 흥미진진한 작가 정신을 발휘하기에 매우 좋은 아이템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뮤지컬이 될 것이니까. <레미제라블>같이 현장에서 모든 노래를 레코딩한다는 계획에 많은 예산이 들어가겠지만, 그것이 이 작품만의 영화적 전략이기에 포기할 수 없다. 자, 이번 글이 마지막 수다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내가 왜 어떤 책에 대해 좀 더 특별하게 할 말이 많다거나, 어떻게 해서 그 책이 내 마음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관해 주로 이야기했어야 했지만, (아직은) 그 이유가 내 창작의 비밀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눈치껏 알아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도 분량은 채워야 하고 비밀은 숨겨야 해서, 다소 수박 겉핥는 식으로 그에 관한 수다를 산만하게 떨어보았다. 지난 몇 회간 이 코너를 통해 주절대본 영미문학 각색 프로젝트는 사실상 나에게만 의미 있고 재미있지,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그냥 대부분 시답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도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코너에서 소개한 몇 권의 책들은 분명히 장바구니에 넣어둘 만한 재밌고 좋은 작품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왜 그런 거 있잖나, “그 책을 다 읽어버린 것은 내 인생에 황량한 구멍을 남겼다. David Copperfield, the last novel I read, and the completion of which has left a devastating hole in my life”, 고 감상을 얘기할 만한 경우들. 사실, 저 말은 「데이빗 커퍼필드」를 읽은 후 ‘닉 혼비’의 표현인데... 마음에 들고 오래 기억하고 싶다. 이 몇 개의 각색 프로젝트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초현실적인) 기회가 찾아와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저런 표현이 가능한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end. #1 펀 홈 #2 안녕, 내일 또 만나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4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