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
- 감독
- 그레타 거윅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로리 멧칼프, 트레이시 레츠, 시얼샤 로넌, 루카스 헤지스, 티모시 찰라멧, 비니 펠드스타인, 스티븐 헨더슨, 로이스 스미스, 오데야 러쉬, 캐서린 뉴튼, 로라 마라노, 제이크 맥도만, 앤디 버클리, 다니엘 조바토
올해 초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외국어 영화상’ 부문은 3파전이었다. 먼저 웃은 영화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가져간 러시아 영화 < 리바이어던 >이었다. 그리고 오스카의 승자는 폴란드에서 온 < 이다 >였다. 그렇다면 두 영화와 경합을 벌였지만 ‘강력한 후보’로 만족해야 했던 나머지 한 편은 어떤 영화였을까? 바로 < 텐저린즈: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이하 <텐저린즈>)다. 에스토니아의 자쟈 우루샤제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1992년 조지아(그루지야) 지역의 내전을 배경으로, 전쟁의 본질을 묻는다. 그렇다고 철학적이거나 심각한 질문은 아니다. <텐저린즈>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에피소드에 가까울 만큼 간단한 구조다. 여기서 감독은 그 단순성 속에, 마치 실화 같은 사실성을 부여한다. 전쟁 초기의 분쟁 지역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바로 <텐저린즈>다. 먼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역사적 사실과 지리학적 상식들. 이 영화는 1992년에 조지아에서 발생한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할 즈음, 수많은 민족 국가들이 생겨났다. 흑해 연안의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위치한 조지아도 그러한 나라들 중 하나다. 하지만 조지아 내부에도 민족 문제가 있었으니, 지도에 녹색으로 표기된 압하스, 보라색의 남오세티야, 그리고 왼쪽 구석의 아자리아가 조지아로부터 분리되길 원했던 것(이 지역들은 현재 사실상의 독립 국가인 자치 공화국인 상황이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압하스 전쟁(1992~93)이며, 이때 러시아는 압하스와 연합하여 조지아와 대결했다. 조지아 지역 지도.(출처: 위키피디아) 한편 압하스 지역엔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거주지가 있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와 핀란드 사이에 있는, 발트해 연안의 작은 국가. 20세기 들어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에 드디어 독립한 국가다. 19세기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에스토니아 사람들 중 일부가 코카서스 산맥 근처로 이주한 적이 있었는데(2,500킬로미터 이상 가야 하는 먼 길이다), 조지아의 압하스 지역도 그런 지역 중 하나. < 텐저린즈 >의 주인공 이보(렘비트 울프삭)도 에스토니아계로, 압하스에서 목수 일을 하며 살아간다. 이때 조지아 정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전쟁이 일어나니,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것. 마을은 순식간에 텅 비고, 이보와 마르구스(엘모 뉘가넨)만 남는다. 마르구스는 텐저린(‘작은 오렌지’인데 ‘귤’로 이해하면 될 듯. 영화에선 ‘만다린’이라고 부른다) 농장 주인. 수확을 앞둔 농장을 도저히 떠날 수 없었고, 목수인 이보는 탠저린을 담을 나무 상자를 만든다. 영화는 두 명의 군인이 이보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아메드(조르지 나카시제)와 이브라힘(카카 아레바제). 다소 무례한 그들은, 이보가 건네는 빵을 들고 사라진다. 잠시 후, 마르구스의 농장 근처에서 총격전이 일어난다. 압하스 군과 조지아 군의 충돌이 있었던 것. 이보는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군인들 중에서, 방금 자신에게서 빵을 얻어 갔던 아메드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치료해준다. 그리고 죽은 병사들을 매장하려던 중, 한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니코(미샤 메스키)라는 군인이었고, 머리에 파편이 박히긴 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이보는 니코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이때부터 < 텐저린즈 >는 < 웰컴 투 동막골 >( 박광현 , 2005)을 연상시킨다. 아메드는 압하스 군, 니코는 조지아 군이었던 것. 큰 덩치만큼이나 거친 아메드는 상처가 아물어 거동할 수 있으면 니코를 죽이겠다고 공언하고, 다소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강단 있는 니코도 만만치 않게 맞받아친다. 식탁을 가운데 놓고 유치한 설전을 벌이는 두 명의 환자 혹은 군인. 이보는 그들의 적개심을 경계하며, “내 집에선 아무도 죽일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 텐저린즈 >는 전쟁터를 배경으로, 적과 아군을 넘어 다 같은 ‘인간’이며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역설하는, 휴머니즘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사연을 듣다 보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부조리극이 다가온다. 압하스 군에 속해 있긴 하지만, 아메드는 체첸 출신의 용병이다. 그는 단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고, 조지아 사람들과는 그 어떤 원한이나 관계도 없다. 니코는 연극배우였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군인이 된 사람이다. 게다가 그들을 거둬들이는 이보는 압하스도, 조지아도 아닌 에스토니아 사람이다. 그의 이웃인 마르구스는 전쟁과 상관없이 “저 아름다운 탠저린들”을 버려두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까워서 에스토니아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이다. 사실 그들은 모두 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서로 죽이려 하고, 이보와 마르구스는 그들을 살리려 한다. 만약 여기서 멈추었다면 < 텐저린즈 >는 전쟁의 허망함 혹은 부질없음 정도를 설파하는 반전 영화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자쟈 우루샤제 감독은 전쟁이 비극이면서 동시에 ‘관계’라고 생각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적’이라는 악연을 맺게 되지만, 그들은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만나면서, 놀랍게도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보의 집에 들이닥친 압하스 군은 아메드를 조지아 군으로 오해한다. 아메드는 자신이 체첸 출신의 용병임을 증명하려 하지만, 압하스 군 장교는 아메드를 죽이려 한다. 이때 침대 밑의 총을 꺼내 든 니코는 아메드를 살리기 위해 압하스 군을 공격하고, 아메드도 니코의 엄호 아래 (자신의 아군인!) 압하스 군을 공격한다. 오로지 ‘적과 아군’으로 나뉘는 전쟁터의 이분법적 논리가 무너지는 이 장면은, <텐저린즈>가 도달하려 했던 순간이다. 영화는 비극이다. 전쟁 통에 팔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텐저린을 모두 수확하고 싶어했던 농부 마르구스는 압하스 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 니코도 총격전 중에 목숨을 잃는다. 살아남은 이보와 아메드. 이보는 나무 상자를 만들던 일터에서 두 사람의 관을 만들고, 아메드와 함께 땅에 묻는다. 니코를 묻는 곳은 이보의 아들이 묻힌 무덤 곁. 그의 아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키겠다고 압하스 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도 아니”라는 이보의 만류도 소용 없었던 것. 그는 헛된 죽음을 한 아들 곁에, 역시 헛된 죽음을 한 조지아 군의 병사 니코를 묻는다. < 텐저린즈 >가 특히 울림을 주는 건, 한국 (IPTV) 개봉시 부제였던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에 요약되듯, 전쟁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 때문이다. 특히 분단 체제를 사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교훈을 준다. 남과 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늘어가는 전쟁의 소문 속에서 공포를 느껴야 하는 우리들. 하지만 그 전쟁은,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의 것도 아니며 그들이 일으킨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를 미워해야 하고, 잘 알지 못하는 그들을 비난해야 한다. 전쟁보다 더 두려운 건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맹목적인 증오이며, <텐저린즈>는 전쟁이라는 적대 관계에 의해 유린되는 인간 관계와 무의미하게 파괴되는 생명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