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은 알고 있다
- 감독
- 김기영
- 제작년도
- 1961
- 출연
- 박승진, 김추남, 정경선, 이예민, 라정옥, 김신명, 석귀녀, 공미도리, 김운하, 김진규, 주증녀, 김지미, 이예춘, 김승호, 박암, 김석훈, 박노식, 이상사, 양훈, 정문각, 조석근, 유춘수, 추석양, 최삼, 주상현, 고설봉, 임운학, 지방열, 하룡, 안성, 박현철, 김완택, 이림, 설재희, 김정조, 노위진, 이행복, 김용대, 신정식, 정현익, 이근성
< 현해탄은 알고 있다 >는 1944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 나고야 시의 육군부대로 끌려간 조선인 학도병들의 고난을 그린다. 그중에서도 반항심이 강해 일찌감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주인공 아로운(김운하)은 일본 군인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유일한 위안은 일본 여자 히데꼬(공미도리)와의 연분뿐. 하지만 그마저도 앗아갈 파병의 날이 다가온다. 안 봐도 어떤 영화인지 알 것만 같은 줄거리다. 조선의 청년이 고초를 겪는 과정에 비분강개하고, 그에게 반한 일본 여자의 ‘조국을 배반하는’ ‘올바른’ 연정을 응원하다가, 전쟁의 폭압에 짓밟히고 마는 둘의 섬약한 사랑에 눈시울을 붉히라고 만든 영화 아니겠나. 곧 시네마테크 KOFA에서 열릴 김기영 전작展 프로그램 에서도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의 수탈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 시각이 탁월하게 녹아든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얼마나 유효할까?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정치적 태도는 설명만큼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적어도 민족적 수난에 대해 울분을 토해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손쉬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정도는 아니다. 아로운의 병영 생활은 수난사라고만 말하기에는 헐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고, 히데꼬와의 관계는 ‘불온’하기까지 하다. 히데꼬가 일본 옷을 입은 아로운에게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일본 사람과 다름이 없어요.”라고 말한다든지, 아로운이 파병 직전에 “히데꼬 상을 위해 훌륭한 일본 군인이 돼주고 싶어!”라고 말한다든지, 히데꼬의 어머니가 아로운 옆에서 일본 헌병의 칼을 맞아 쓰러지면서도 “일본은 진다! 난, 난 그게 보기 싫다!”라고 말하는 대목처럼 친일 영화의 기억을 환기하는 순간들도 있다. 하기야 인간의 사회적 외피를 발가벗기고 동물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데에 주력했던 김기영이 새삼 민족혼에 불타 ‘고통 받는 조선인들/사악한 일본 놈들’이라는 구도에 매혹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관객의 감각에 호소하는 대립 구도는 따로 있다. ‘실내 세트 촬영분’과 ‘삽입 화면’의 대립이다.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첫 장면의 공간은 현해탄을 건너는 배 안이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실내 세트에서 촬영했음이 분명하다. 카메라가 선실들을 가로질러 격벽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이곳이 실내 세트임을 공개한다. 이어 출렁이는 바다 위로 오프닝 크레딧과 “1944년 일본 나고야”라는 자막이 지나간다. 다음으로 나고야 항구를 수직으로 내려다 본 항공 촬영 화면이 등장하고, 나고야 시내 정경이 뒤따른다. 이 두 풍경은 보는 이를 움찔하게 하는 데가 있다. 우선 작은 실내 세트에 머물러 있던 영화가 갑자기 거대한 규모의 실외 공간을 항공 촬영이라는 사치까지 누리며 펼쳐 보이는 데에서 오는 충격이 있고, 이어서 동시대의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본의 북적이는 시가지가 느닷없이 끼어든다는 데에서 오는 충격이 있다. 이후에도 이런 삽입 화면은 여러 차례 등장하면서 나고야 시의 정경을 보여주기도 하고, 전투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스튜디오 세트 촬영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가 공간 배경을 제시하기 위해 로케이션에서 따로 찍은 화면을 삽입하는 것은 무척 흔한 수법이다. 대공황이나 전쟁 등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요약 전달하기 위해 다른 극영화나 기록 영화를 인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삽입 화면들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까닭은 실내 세트에서 촬영한 영화의 나머지 대목들과 잘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공간 배경을 제시하는 삽입 화면은 앞뒤 장면과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스포츠 경기가 벌어지기 전에는 경기장 외관을 보여주고, 번화가의 술집에서 다툼이 벌어지기 전에는 시끌벅적한 도심 풍경을 보여주어야 자연스럽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이런 논리에 무심하다. 병영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도 병영을 배경으로 하는데 굳이 둘 사이에 고성의 전각이 우뚝 선 평화로운 나고야 시 전경을 삽입한다. 세트에서 찍은 유곽 장면이 끝나자 웬 절 풍경이 들어가더니 다음 장면은 히데꼬의 집이다. 유곽이나 히데꼬의 집이 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세 공간들의 정조도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풍경이 삽입될 때마다 영화는 중단된다. 전황을 담은 삽입 화면도 맥락이 희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전황이 이렇게 전개되어 등장인물들에게 이런 변화가 찾아왔다’는 식의 서사적 흐름은 잘 짚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 삽입 장면은 전장을 담은 기록화면과 다른 전쟁 영화에서 가져온 듯한 명백한 연출 장면을 뒤섞어 파괴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고 있어 한층 당혹스럽다. 문자 그대로 다른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다른 영화를 보는 장면도 있다. 아로운을 헌병대 본부로 호출한 헌병 대장은 돌아가는 길에 찬바라 영화를 보고 일본도가 얼마나 잘 드는지 확인하라고 말한다. 아로운은 정말로 극장에 가서 찬바라 영화를 보다가 견딜 수 없다는 듯 도중에 밖으로 나온다. 이제 앞서 ‘실내 세트 촬영분’과 ‘삽입 화면’의 대립이라고 했던 것을 다른 말로 고쳐 보자. ‘안’의 실내 세트에서 아로운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전개되는 사이사이 ‘다른 영화’가 무심하게 끼어들어 드라마 ‘밖’의 세계를 환기한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그 바깥 세계를 차단하려 애쓴다. 바깥은 위험해. 안에 있어야 해. 본디 대립 관계에 놓여야 했을 병영과 히데꼬의 집은 오히려 폐쇄적인 실내라는 점에서 닮았다. 히데꼬 집의 미닫이문이 창살처럼 닫히는 모습은 병영의 영창을 떠올리게 하는데, 여기서 영창은 수난의 공간이 아니라 피난의 공간이다. 영창은 아로운이 일본 군인들에게 반항하다 갇힌 뒤 동료와 웃음을 터뜨리는 곳이며, 영창에 들어가면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되니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실제로 포로로 붙잡힌 미군 병사들은 영창에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을 탈출시켜 주었더라면 아로운도 일본군들의 함정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 갇힐수록 안전하다. 바깥은 위험하다. 어떻게든 미루어 왔던 안과 밖의 만남이 아로운의 탈영 결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로운의 탈영을 숨기기 위해 폭격으로 죽은 이름 모를 사람의 시체가 동원된다. 아로운과 히데꼬가 찾은 피신처는 아마도 폭격으로 무너졌을 공장의 폐허다. 병영과 히데꼬의 집을 오가며 느긋하다 싶을 정도로 통속적인 드라마를 전개하던 영화는 이제 순식간에 결말로 나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 결말. <이어도>의 악명 높은 클라이맥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이 말문이 막히는 결말은 직접 보아야만 하기 때문에 자세한 묘사는 피하겠지만, 에둘러서라도 말해 보자. 그간 애써 차단했던 바깥세상이 드라마가 진행되던 안전한 내부로 기어이 쏟아져 들어오고야 만다. 또는 답답한 실내 세트에서 전개되던 드라마가 갑자기 <독일 영년>을 방불케 하는 폐허로 나간다. 이 영화를 위해 미술팀이 준비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한 폐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묘사도 남다르지만, 일단 폐허의 정체에 관심이 쏠린다. 중간 중간 나고야 시의 풍경이 들어갔다지만 영화 전체를 일본에서 촬영했을 리 없다. 한국일 것이다. 대체 저긴 어디지? 왜 저런 폐허가? 그제야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발표 연도를 찾아본다. 1961년 11월 개봉. 6.25가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폐허는 전국에 흔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봉 한 해 전에 4.19가 있었고, 개봉 여섯 달 전에 다시 5.16이 있었다. 가능하면 안에 머무르고 싶었을 테지만 살기 위해 죽음의 공간으로 나간 사람들이 있었고, 너무 많은 시체들이 나왔고, 그 시체들을 제대로 수습하기 전에 세상이 또 뒤집혔다. 그리고 지난 글에서 김보년 필자도 언급했듯,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것은 김기영의 장기다. 그러니 다시금 묻는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의 수탈에 대한” 영화인가?
김기영 감독의 1961년 작 < 현해탄은 알고 있다 >는 학병을 싣고 가는 군함으로 시작한다.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이 위의 정보를 전한다. 정면으로 군함의 풀 샷이 보이고 , 조타 중인 조정실이 보인 인 후 숏이 바뀌어 일본 장교(김승호)와 등을 보이고 앉은 군인이 보인다. 일본 장교가 묻는다. 네 이름이? 아로운입니다. 일본 장교는 아로운! 이라고 말한 후 그가 요주의 인물로 분류 되어있음을 알린다. 군함에 경계경보가 울리고 선실의 병사들은 경계 태세로 들어간다. 처음부터 거의 인물들을 정면 숏으로 프레임에 넣고 기둥 등으로 프레임을 정확하게 나누는 이 영화는 군인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는 이 장면을 트레킹을 처리하는데, 카메라가 트레킹으로 두 선실을 수평으로 가로지름으로서 그 두 선실의 한쪽 벽이 카메라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 세트임을 명백하게 전경화 한다. 연극 무대 장치처럼 한쪽 벽이 없는 혹은 그 벽이 관객에게 열려있는 세트장 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어 바다가 보이고 현해탄(玄海灘 )이라는 타이틀 자막이 뜬다. 배우를 비롯한 스탭 소개 크레딧이 물결치는 바다 위로 중첩된다. 일본에서는 현계탄(玄界灘, 겐카이나다)로도 부르는 이 현해탄을 아로운( 김운하 )을 비롯한 학병들이 1944년 나고야로 가기 위해 건넌다. 공중 샷(aerial view)으로 도열한 군함들이 미니어처 촬영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세트의 전경화와 미니어처 촬영으로 어느 정도의 비평적 거리감 혹은 반대로 어떤 영화적 위용(spectacle)이 만들어진 후 , 우리는 이들 학도병이 나고야의 수송 부대로 배치되고 내무 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일본군 모리 ( 이예춘 )는 다시 문제아로 아로운을 호명한다. 이후 영화는 모리가 아로운을 새디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보게 된다. 마구 구타하고 , 자신의 똥 묻은 군화를 혀로 핥고 삼키게 하는 등의 군대가 아닌 수용소의 전쟁 포로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아로운은 비인간으로 전락한다. < 현해탄은 알고 있다 >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개의 중요한 참조틀이 있다. 우선 이 영화의 원작자인 한운사 의 이 영화 관련 소설 TV , 라디오 방송극 등이 있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 < 남과 북 >, < 아낌없이 주련다 >,< 빨간 마후라 >,< 잘돼갑니다 >,<나루터 3대>등의 작품이 있으며 노래 <잘 살아보세>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1) < 현해탄은 알고 있다 >의 주인공 이름을 딴 아로운(아큐정전의 그 아(阿) 다)삼부작 『현해탄은 알고 있다』(정음사, 1961), 『현해탄은 말이 없다』(정음사, 1961), 『승자와 패자』(정음사, 1961)의 연작은 “현해탄 3부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 1. 활유법과 현해탄 한반도의 지리적 경계이자 정동의 장소인 두만강, 압록강, 황해등과 더불어 보면 현해탄은 두만강과 더불어 현해탄 서사라 불릴 만큼 사연이 많다. < 현해탄은 알고 있다 >의 주인공 학병 만이 아니라 수많은 청년들, 중장년들이 현해탄을 건넜다. <현해탄> 이라는 시집을 쓴 임화 역시 1929년 도일했다. 한운사의 현해탄 서사는 임화의 『현해탄』보다 몇 년 뒤에 일어난 학병 경험을 소재로 하고 4.19 혁명이라는 청년 정치의 파고 속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배열, 거울 쌍을 만들뿐만 아니라 소설, 라디오, 영화 등의 멀티미디어로 다종다기, 파생하는 예를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40년대 중반과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의 두 시간 대가 만나 역사적 짝패(pairing)를 이루고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생성되고 , 역사적 쌍과 거울 쌍은 소설, 라디오, 다매체를 횡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복합성 속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화자의 문제다. 곧 시대를 종단하고 매체를 횡단하는 복합적 텍스트가 되는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제목에서 소위 활유법, 무생물을 생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식을 택하고 비유법인만큼 이것은 당연히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무생물인 현해탄이 정보나 지식을 가질 리 없다 .인지나 지각을 할리 없다. 그럼에도 현해탄은 알고있다 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한 많은 식민지 역사의 목격자로서의 위치를 현해탄에 부여하는 것이며 , 식민지 역사의 앎의 장소로서 현해탄을 호명하는 것이다. 활유법(prosopopeia)에 대해 미셀 리파테르 (Michel Riffaterre)는 퐁텐니에(Fontanier)의 활유법에 대한 글쓰기를 환기시키면서 이것이 의인화와 달리 부재한 것, 죽은 것, 초자연적인 것 혹은 비생물적 존재들을 무대화 한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것처럼 이것들이 행동하고 말하고 대답하게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 증인, 고소인, 복수하는 사람, 판사 등등이 된다고 설명한다. 2) 『현해탄은 알고 있다』에서 현해탄은 목격자, 증인, 일종의 식민지의 침묵, 무언의 아카이브지만 언젠가는 입을 떼고 , 문을 열 아카이브가 된다. 왜 현해탄이 살아있는 것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 예컨대 앎의 주어 일 뿐만 아니라 , 잠재적으로 말할 수 있고 증언할 수 있는 생명체로서 기능이 부여되는 - 활유법을 증여받는가는 명백하다. 살아있는 것, 식민지의 하위 주체, 서벌턴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나 식민화된 주체는 오히려 말할 수 없는 비인간이 되고 생명을 갖지 않는 현해탄은 활유를 통해 살아난다. 이런 역설을 드러내기 위해 현해탄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해탄이 알고 있다는 것은 또한 훗날 복수의 근거가 된다. 현해탄이 증인이고 증언이기 때문이다. 2. 고백, 진실, 섹스 김기영 감독 영화는 학병 아로운을 다루면서 활유의 공간으로서의 현해탄과 대구를 이룰만한 하나의 양식을 적절히 활용한다. 그것은 고백이다. 아로운은 평범한 일본 여성 히데꼬( 공미도리 )와 연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의 관계가 시작되고 지속되고 발전되는 방식은 아로운이 히데코에게 자신이 일본군에게 구타당하고 학대받은 것에 대한 고백을 하는 것이다. 히데코 역시 처음에는 조선인들이 도둑질을 일삼는 민족이라는 인식을 가진 일본 여자 였으나 아로운이 당한 폭력의 내용을 듣고 그것을 지켜봄으로써 아로운을 사랑하게 된다. 위의 활유화된 현해탄이 학병으로 끌려가는 조선인들을 지켜본 무언의 증인으로 설정되었다면, 일본 여성 히데코는 증언을 듣는 자, 청자로 설정 되어 있다. 인종적, 권력적 폭력이 매개한 이 관계는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고백과 진실과 섹스가 식민지의 담론으로 배치되는 순간이다. 이 담론의 복잡한 역학을 사실 현해탄인 들 알 수 있었겠는가? 주 1) 한운사의 작품에 관한 연구로는 윤석진,<방송극 작가 한운사의 ‘통일 연습 시리즈’ 고찰1: 반전 드라마를 중심으로>,한국문학연구 39집 , 김예림의 <치안, 범법, 탈주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전후(前後>, 대중서사 연구 제 24호 , 이 경숙의 <한운사의 ‘아로운(阿魯雲)’ 삼부작 연구>,『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 33집 (10권 4호) 등이 있다. 2) Michael Riffaterre,“Prosopoperia”,Yale French Studies, No.69,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