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부양
- 감독
- 김사언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김단비, 윤혜진, 강영일, 윤현길, 조성환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육체다. 아아. 저 한마디 뱉는 순간 벌써부터 무수한 항변과 반론들이 들려온다. 기실 땅바닥만 찍지 않는 이상(헤어조그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재반론하고 싶지만 참는다) 육체를 찍지 않는 영화는 1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체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corpus”) ‘물체’로 조금만 확장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피사체가 이미 육체다. 심지어 카메라도 육체이고, 그걸 찍고 보는 작가도 관객도 죄다 육체다. 하지만 고전적 육체와 현대적 육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의 변화를 표현하는 주인행세를 함에는 어떤 차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의 담지자로서 먼저 나타난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적 가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드레이어와 베리만의 영화에도 육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얗게 지워져서 지금이라도 얼른 복원되어야 할 정신의 심도보다 먼저이진 않다. 그저 정신이 심도를 복원할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여주고, 그에 필요한 말씀(<오데트>)을 전달해주면 그만이다. 고전육체는 정신의 수단인 셈이다. 반면 현대적 육체는 (신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즉 진짜 육체는 피 흘리고 다칠 수 있는 육체다. 진짜 육체는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팔다리만 있다고 육체가 아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 있어야, 그에 비명 지르고 펄쩍 뛸 수 있어야 진짜 육체다. 프레이밍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잔 다르크의 가멸력을 화형대로 옮겨놓은 브레송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육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심도?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심도 타령일까. 온몸의 신경이 화염에 불타오를 때 심도보단 비명이 먼저다. 요컨대 고전적 육체가 불멸의 정신적 가치(정의ㆍ믿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현대적 육체는 소멸의 물질적 가치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누구 말을 빌리면, 진짜 육체는 가멸성의 “순수수단”이다. 표표히 사라지는 서부극 인물 죽을 수 있는 육체만이 진짜 육체라고 한다면, 고전 서부극엔 육체가 없다. 아무리 역마차의 속도가 빨라 봤자 그 종착지는 아메리카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인과 링코 키드는 죽지 않는다.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물론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추가해석이 가능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사례는 종교영화들의 경우다. 종교적 상황들을 다루었던 고전시대극들에서 육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휘황찬란한 의상들로 가려져 있다. 드밀과 와일러의 영화에서 육체보다 색깔이 먼저인 이유는 다시 색깔이 정신의 심도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테크니컬러 총천연색에 모세의 남루한 넝마주이 패션이 극한의 대조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가열차게 기도 모드에 돌입할 수 있음이다. 즉 고전종교영화에서 의상은 정신의 척도만을 내어주지, 육체의 척도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는 것마저도 그나마 파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육체가 죽었단 사실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의 폭정이 죽었단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육체의 출현을 방해하던 고전적 문법은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 한 방이면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서 표현되고 있었다. 베리만은 이걸 한껏 즐겼다. 클로즈업은 육체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영혼의 가속도로 대체한다. <잠입자Stalker> (1972) 반대의 상황들로 가보자. 웨스턴을 지나 네오웨스턴으로 가보면, 거기엔 육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어도 너무 육체만 있다. 정의감이나 신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금 한 덩이 차지하기 위해서 동물적 본능만 남은 네오웨스턴의 육체들은 가히 ‘사막의 좀비들’이라 할 수 있다. 페킨파의 < 와일드 번치 >에 한 총잡이는 기관총 드립에 사망하여 널부러진 한 시체에서 금니를 캐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적 넝마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적 넝마주이다. 심지어 페킨파는 육체의 가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까 슬로우모션으로 죽는 순간을 찍어댔고, 많은 평론가들에게 상욕을 들었다. 페킨파의 슬로우모션은 클로즈업이 표현하던 영혼의 가속도와 대비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가속도다. 헐. 현대의 신학영화는 그렇지 않을 거야! 여전히 신학은 정신이다, 육체가 아니라! 라고 울부짖는 그대에게 일독을 권장하는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다. 비록 그가 인터뷰에서 열심히 “영성”과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거기엔 안개와 유황 가스를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육체,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봐 초원 위에 마치 비디오데크가 고장 난 것처럼 일시 정지된 상태로 몇 분이고 서 있는 육체, 무엇보다도 공중부양하는 육체가 있다. 이른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정신성의 회복을 위해 타르콥스키에게 먼저 고양되어야 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물론 이건 인간의 육체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타르콥스키는 클로즈업을 마뜩잖아 했다. 클로즈업이 보고 싶나? 말씀을 쏟아내던 입이 삭제된 뒤통수 클로즈업이나 봐라(< 스토커 >). 현대적 육체는 클로즈업을 경멸한다. 얼굴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다. 얼굴들을 겁나게 이어 붙여서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낸 후 맥놀이 하듯 겁나게 흔들면 다시 육체가 나타난다. 이것이 카사베티스의 경우이고 그의 독특성이었다. 천의 얼굴은 하나의 육체와 맞먹는 셈이다(<얼굴들>). 오발탄 (1961) “가자...가자..” 요컨대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모든 영화를 고전적이라고, 고통이 있는 모든 영화를 현대적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현대 신학영화는 이 기준의 반대급부이기는커녕, 이 기준을 가장 먼저 밀고 나갔던 고통의 첨병들이었다. 유현목 의 영화들이 타르콥스키보다 이른 현대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근만근의 짐짝”에 짓눌릴 때의 압사의 통각이고, “가자...가자..”의 환청에 고막이 찢어지는 통각이다(< 오발탄 >). 아무리 클로즈업과 의상으로 가려봐도 이 고통의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안에 충치는 하나쯤 박혀있기 마련이고, 파동은 육체의 신경과 힘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다. < 막차로 온 손님들 >에서 도마질 소리에서 괘종시계 소리로의 이행을 들어보라. 모세가 듣는 신의 목소리는 노래방 마이크에서와 같은 에코라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세계는 노래방이 아니다. 십계현판이라는 마이크도 없는데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 마이크는 내 뇌 속에, 내 신경 속에 이미 있다. 이건 거의 고막의 화형식이다. 너는 죽는다. 육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에 대한 통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압력이 되었다(타르콥스키는 “시압time-pressure”이라 불렀던 그것). 이것이 유현목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순교자 >에서 신부를 휘어 감는 문제는 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그건 신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있느냔 것이다. 저기에 우뚝 서서 이 폐허를 압박하고 있는 파동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가. 이 모든 측면들이 유현목을 한국최초의 육체적 작가로 만든다. 유현목이 영화는 “체험”이라고 강조함을 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경험인 것이다.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신념의 상태.
1. 어렸을 때, 영화 속에서 조금이라도 무섭거나 긴장되는 장면이 나오면 엄마는 내 두 눈을 가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그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이티와 자전거와 소년이 처음 날아오르던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자전거가 절벽으로 살짝 떨어지는 듯하다가 존 윌리엄스 스코어의 도움을 받아 다시 공중으로 부양할 때, 사람들은 박수를 쳐대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만 그랬던 게 아니다. 아저씨 아줌마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랬다. 그 시절의 극장 풍경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지금이야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관객으로서의 의무이지만 그땐 소리를 내며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난 엄마의 손가락 사이로 그 광경을 목격했다. 인디아나 존스가 굴러오는 돌을 피해 달아나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는데, 소중한 모자가 아직 동굴 안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존스는 손을 뻗어 결국에는 모자를 구해낸다. 바로 그 순간에도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모과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 그렘린 >)과 배낭 속에서 튀어나온 권투 글러브가 악당의 얼굴을 때리는 장면(< 구니스 >)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순간마다 엄마의 손가락과 사람들의 환호성과 열정의 박수가 겹쳐져 있었다. 그때마다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2. < 구니스 The Goonies > 아마도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였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일간지 신문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구니스 대개봉’ 광고가 실리자 외출 일정을 잡았다. 그러나 스크린이 밝아지고 스태프 롤이 떠오를 때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가 아니었다. 또 한 번 속았다. 80년대의 많은 영화들이 그런 전략을 취했다. 메인 포스터에 커다랗게 ‘스티븐 스필버그’라고 쓰여있으면 그건 일종의 재미 보증서 같은 역할을 했다. < 피라미드의 공포 >도 그랬고, < 그렘린 >도 그랬다. 그 사기 행각의 결말은? < 구니스 >는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 영화에는 정말 멋있고 매력적인 소년 소녀들이 잔뜩 나온다. 구니스의 리더, 션 오스틴은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아이들의 주장에 맞서 천식 호흡기를 들고 버텼다. “지금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면 그곳은 우리의 하늘이 아니야, 하지만 이곳은 우리의 세상이지. 구니스의 세상.” 뭐 이런 식의 대사를 하고 천식 호흡기를 휙 빨아들이는 그 모습, 카스리스마가 엄청나다. 난 케 후이 콴의 배낭 속이 궁금했다. 어린 아이계의 맥가이버라고 할 만한 발명 소년의 핵심기술이 그 가방 안에 모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미끄러지고, 달리고 물에 빠지고 하는 모험의 세계에서, 케 후이 콴의 손재주가 더 즐거운 길을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도 저마다 멋진 선택을 하며 마을을 구해내는 데 일조한다. 그런데 < 구니스 >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나온다. 모험이 끝나고, 션 오스틴은 담요를 두르고 상념이 잠겨있다. 그때 그를 리더로 인정해준 형의 여친이 다가와 볼에 뽀뽀를 해주는 것이다. 동굴 속에서는 누군지 모르고 키스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예쁜 누나의 뽀뽀를 받은 션 오스틴은 천식기를 던져 버리고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풍문에 따르면 그렇게 소년들은 성장한다고 한다. < 빅 Big > 어느 날, 동네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비디오 가게에 < 빅 > 이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물건이라고. 처음엔 관심이 없었지만 친구가 비디오를 빌리는 데 성공하자, 어느새 그의 집 소파에 앉아 상기된 표정으로 영화의 시작을 기다렸다. 어느새 비디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이야기였다. 어른이 된 톰 행크스는 어린이의 감각으로 장난감을 만들어 어른들의 세계에서 능력을 인정받는다. 아이들의 욕망을 완벽하게 건드리는 스토리 라인, 톰 행크스의 당황하는 연기가 포인트다. 흠뻑 빠져 2시간이 지나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은 건 톰 행크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을 때였다. 데이트를 마치고 두 사람은 같이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웃옷을 벗는다. 그리고 불을 끈다. 그렇게 암전인가, 싶은 그 찰라, 그러나 톰 행크스가 다시 불을 켰다. 우리는 소년들의 취향을 확실히 저격하는 페니 마셜의 연출기법에 혀를 내둘렀다. 나와 친구들은 다시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갔지만, 공차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그 장면이 떠나질 않았다.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렸다. 그 어둠 속에서 공을 차며 나는, 또 한번 어른이 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 이티 E.T.: The Extra-Terrestrial > 내 기억에 < 이티 >는, 우리나라에서 개봉하기 전부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웬만한 동네 형들 집에는 이티 인형 하나쯤은 다 있었고, 식빵같이 생긴 이티의 머리라는 노래를 다들 부르고 다녔고,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티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아이들도 존재했다. 이티는 뒤뚱거리며 소년에게 다가왔고, 뒤뚱거리며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친구가 된 이티와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온갖 모험을 벌이다가 공중부양을 하며 이 세계를 내려다본다. 꿈 같은 일이었다. 눈을 감으면 그 꿈결 같은 공기를 만끽하던 그 첫 번째 관람체험이 아직도 생각난다. 내 생각에 < 이티 >는 영화사상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영화이며, 외계에서 온 생명체의 마음에까지 동화시키는 거의 유일한 영화이다. 난 관객의 감정 컨트롤을 이렇게까지 잘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즐거움과 슬픔, 공포와 불안을 요리조리 오가는 이 영화의 연출에는 경외감 마저 든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엘리엇이라는 소년에 동화되었다. 몇 년 뒤에 봤을 때는 이티에 감정이입이 되었고, 그다음엔 열쇠남(피터 코요테)에 공감했다. 지금은 소년의 엄마에 정이 간다. 이런 식이다. 언제나 다른 각도에서 영화를 보게 만드는 힘으로 < 이티 >는 2016년 여기까지 왔다. 또 한 번 영상자료원 스크린에 도착할 이티를 생각하니, 또 얼마나 두근거리는지 모른다. 3. 돌이켜 보니, 애초에 설렘이라는 감정이 있었다. 엄마의 손가락 사이에서 시작된 영화 관람 모험이,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어린 세대들은 어떨까? 그들만의 레전드가 따로 있을 것이고, 생각만 해도 설레는 영화 목록 또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여기, 이 영화 리스트가 정답이다. 이번 기획전이야말로 당신을 다시 설레게 할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세대에게는? 내가 보증한다. 이 리스트는 단순한 추억거리가 아니다. 영화 각각의 흥분지수가 워낙 높아서 2016년 관객들에게도 먹혀들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 뭘 해야 할까? 꿈과 모험과 낭만이 가득한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400(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지하 1층으로 지금 당장 달려가야 할 것이다.
< 가족의 탄생 >(2006)은 그 자체로 좋은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2000년대에 만들어진 ‘가족영화’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더더욱 그 의미가 돋보이는 영화다. 내게 <가족의 탄생>은 2007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가족영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한 해 동안 한국영화에서 폭발적으로 분출했던 ‘아버지의 귀환’ 현상을 목도한 이후 소급적으로 그 존재가 더욱 소중해졌던 영화다(2007은 < 아들 >, < 날아라 허동구 >, < 즐거운 인생 > 등 줄잡아 9편의 ‘아버지 영화’가 극장에 걸린 해다). 수많은 아버지 영화들이 불가능한 아버지의 귀환(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부장 자리의 귀환)을 퇴행적으로 호소하고 있을 때, <가족의 탄생>은 그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새로운 ‘가족(윤리)의 탄생’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것은 IMF 이후 가속화된 가족(자본주의적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해체에 대한 서로 다른 영화적 반응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감성의 대결이자, 그것과 조응하는 영화적 양식과 미학의 대결이었다. 2007년의 아버지영화들이 주로 ‘고전적 리얼리즘(또는 한국적 남성멜로)’에 기대고 있을 때, <가족의 탄생>은 일종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다. 새로운 감성은 새로운 미학을 요청하는 법이다. 김태용 감독의 필로그래피 속에서 보자면, < 가족의 탄생 >은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의 장르 또는 판타지의 차용과 < 만추 >의 모던 리얼리즘이 식별불가능하게 혼합된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가족의 탄생>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 커플(또는 가족)의 탄생을 그리고 있다. 미라( 문소리 )-무신( 고두심 )-채현( 정유미 )라는 아마조네스적 가족의 탄생, 선경( 공효진 )-경석( 봉태규 )이라는 씨다른 남매 가족의 탄생, 그리고 채현-경석이라는 미래의 예비 가족의 탄생이 그것이다. <가족의 탄생>에는 리얼리즘적 요소와 판타지적 요소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진지함과 유쾌함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촬영은 그 연기 스타일과 때론 조응하고 때론 어긋나면서, 디지털-리얼리즘에 가까운 핍진성과 장르적 환상성의 경계를 넘나든다. 각각의 에피소드 안에서의 단호한 컷은 절제와 생략의 미학을 보여주지만, 각 에피소드는 몽환적인 환상성을 통해 연결된다. 미라와 무신이 마루에 앉아서 마당에서 뛰어노는 채현을 바라보는 놀랍고 아름다운 액자 구성의 첫 번째 판타지는, 10년 후 그들이 어떻게 아마조네스족이 될 수 있었는지를 긴 말 필요 없이 설명해 준다. 너무 늦게 엄마의 진심을 알게 된(또는 받아들이게 된) 선경이 오열하는 순간 등장하는 공중부양의 두 번째 판타지 역시, 선경과 경석이 어떻게 10년 후 어떻게 모자 같은 남매가 되어 함께 살게 되었는지를 말없이 설명해 준다. 영화의 7명의 주연 중 형철을 제외한 6명의 인물이 모두 등장하여 만들어내는 노골적인 판타지(TV 속에서 현실의 하늘로 공중부양하는 선경과 그 밤 하늘에서 펼쳐지는 갑작스러운 불꽃놀이)는 다소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웅변적으로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바깥에서 생성되어가고 있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 가족의 탄생 >에서의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 아버지가 배제된 상태에서 엄마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를 ‘모계중심의 대안가족 형성기’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단서를 달아야만 한다. 미라, 무신, 선경이 ‘엄마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엄마들은 근대적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모성’과는 매우 거리가 먼 엄마들이다. 그녀들은 여성적 섹슈얼리티의 억압을 대가로 보장 받을 수 있는 가부장제 하의 어머니(가모장(家母長))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조신했던 미라는 무신에게 감염되어 질펀해졌고, 정상적인 엄마가 아니어서 자신의 엄마를 미워했던 선경이 엄마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그 엄마처럼 살고 있다. 소녀 채현은 자신에게 엄마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미라와 무신을 ‘마녀들’ 또는 ‘엄마들’이라고 부르는 채현), 소년 경석은 자신에게 엄마가 없다고 생각한다(엄마이자 누나인 선경을 ‘구질구질’하다고 말하는 경석).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정상적인 가부장제의 표상 안에 갇혀있던 소년 경석이 그 가부장제 외부의 풍요로움 속에서 ‘헤프게’ 된 소녀 채현을 받아들이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즉 한 ‘찌질남’의 정서적 성장기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 <가족의 탄생>이 꿈꾸는 새로운 가족윤리의 핵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