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걸어가는
- 감독
- 신민재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임현성, 이승철, 박남희
<그래도, 사랑해.> 중 /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흔히 문화의 역할이란 지하철역 구내에 보다 세련된 의미있는 장식물이나 걸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에서 문화란 그런 작은 디테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문화의 역할입니다.” - 이창동 , “처음 드리는 인사말”, 문화체육관광부 열린장관실, 2003년 3월 14일 영진위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는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으며, 2004년 이래 최초로 연간 관객 수 1억 명 시대가 붕괴한 해다.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종말 ...... 물론 이건 시장 얘기다. 업계에 발을 담그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인상적으로 보았던 작품들을 주루룩 고른 다음, 개별 작품들로부터 몇몇 자질을 선별해 자율적으로 테마화한 뒤, 안온하게 정리해도 그만일 것이다. 그렇지만 비행기 타본 기억이 까마득한 토종 한국인이자, 비평가 이전에 관객일 수밖에 없는 나는 OTT가 새롭지 않은 이 시기에도 어두운 극장에서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양새를 자막 없이 보고 듣는 일상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애국자 아닙니다). 통계를 근거로 한 종합적인 분석과 전망이라면 이미 숱한 기사와 글이 많으니, 엄격한 틀은 내려놓되 몇몇 영화 안팎으로 사적인 근심과 관심을 조금 얹고 싶다.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거나 화가 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니 많았지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보았던 영화는 김준석 의 < 그래도, 사랑해. > 뿐이다.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향기를 풍기며 사랑스럽고 여유롭게 걷는다. 올해 한국영화들이 내게 신통치 않았던 것은, 대개 상업영화라면 지독할 정도의 장르적 콘셉트가 부여되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독립영화판에서는 형식적 장치에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반대로 소재에 기대어 특정 환경에 놓인 인물의 처지를 강조하며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방벽을 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선에서 <그래도, 사랑해.>는 2025년의 한국영화들 중 현실과 영화가 자연스레 길항할 수 있으며, 그 사진적 이미지에 기반한 20세기적 시청각 경험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 거의 독보적인 사례다. 게다가 이 영화의 세계는 내가 쓰는 언어와 내가 갈 수 있는 장소와 내가 어쩌면 만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에 의해 전달되기에 친밀함마저 느끼게 된다.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것은 난장과 자극이 아니라 이런 기복 없는 흐뭇함과 상쾌함이 아닐까? 물론 <이혼숙려캠프>(JTBC)가 인기 좋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부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욕지거리와 패악질의 향연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인 일상적 규모의 상황과 마음들이다. 관객은 우리를 닮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미소 지을 권리가 있다. <그래도, 사랑해.>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 돌아보면 올해 세상은 그리 돌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연초 우리네 봄날의 콘텐츠였던 ChatGPT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에서부터 10월 말 젠슨 황의 깐부치킨 회동에 이르기까지, 2025년을 지배한 키워드가 있다면 어딜 가도 들려오는 AI일 것이다. 영화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영화제에서는 AI 관련 이벤트와 컨퍼런스가 열렸고, 극장가에도 적극적으로 AI를 활용한 시험작 < 중간계 >가 개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 과정에서의 실제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통과하며 AI 프롬프트의 예제본처럼 뻣뻣한 인간형이 여기저기서 출몰했다고 느낀다. 그 대표 주자라고 한다면, 초기에는 대안적 움직임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 상업영화와 함께 또 다른 제도로 딱딱하게 굳어진 독립영화라는 포지션을 기회주의적으로 활용한 연상호의 < 얼굴 >이다(이 영화는 KOBIS 상에서 ‘일반영화’로 분류된다). 2억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는 이 가성비 좋은 저예산 영화 속 유명 배우들의 몸짓과 얼굴에서 유연함과 여유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기실 생성형 AI 이미지에 가까운 그 1차원적 자질은 시장주의에 입각하여 경제적 효율성의 늪에 빠진 동시대 이미지의 사멸적 풍경을 저절로 돌아보게 만든다. < 좀비딸 >, < 야당 >, < 히트맨2 >, < 보스 >, < 승부 > ...... 성급히 땜질하듯 만들어진 올해의 몇몇 한국영화들은 창작자의 존재 유무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야기의 유기적인 흐름은 수시로 중단되고, 유튜브 숏츠 시대에 걸맞은 단발적 자극만이 연쇄적으로 나열되는 작중 내 세계에서 인물은 극단적으로 캐리커처화된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야단스럽게 선보이는 개인기 섹션의 한 토막처럼 위축되며 실재감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쯤 되면 실사는 그저 명목적 알리바이이며, 우리는 우연과 돌발의 가능성을 품은 사진적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폐지된 AI 영화라는 미래를 이미 살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올해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의 흥행권 진입은 그 무의식에 대한 반영일까? <중간계>, <얼굴>, <좀비딸>, <야당> 중 / 사진: 네이버 영화( 1 , 2 , 3 , 4 ) 그런가 하면 이제는 한국영화의 기성세대권으로 진입한 두 아버지, 봉준호 와 박찬욱 의 인물들은 중심을 잃고 허둥댄다는 느낌이다. < 미키 17 > 속 인물들에게는 슬랩스틱과 삑사리의 미학으로 불리던 봉준호의 미시적이고도 생활밀착적인 신체의 율동과 액션이 온데간데없으며, 메인 빌런은 느긋함을 갖추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른 초보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독재자의 전형적 모델을 대문자적으로 모방하며 허우적거릴 뿐이다. 인물의 결심과 행동 전개로 극이 진행되는 < 어쩔수가없다 >는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긴장의 끈을 풀어버리기 일쑤이며, 인물의 내면적 특질은 구체적으로 조성되기보다 외삽적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리얼리즘을 표방했음에도 인물들의 욕망과 주관은 앙금처럼 애매하게 남겨지고, 다소 과장스럽게 발생하는 코미디와 요란한 촬영과 편집 너머로 연출자의 불안만이 느껴질 뿐이다. 두 편 모두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내세우고 있지만, 웃지 못한 내가 감지한 것은 화면 너머에 있는 조급함이었다. 게다가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들은 개봉 전후로 방송인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며, 온갖 유튜브 채널과 TV 프로그램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았던가. 개봉 이후 좋지 않은 평가로 인해 박찬욱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화를 해설하는 <알려줄 결심>이 제작된 것은 갈 데까지 가 버린 올해의 한국영화계를 요약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관객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 이들을 ‘거장’으로 호명하는 일 아닐까? 왠지 무한히 재생되어 죽지 않는 복제 인간과 AI에게 대체될 위기에 놓인 인물이 이들 영화의 중심으로 설정된 것은 OTT가 스크린을 대체해가는, AI가 실사를 대체해가는 이 시기에 그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올해의 한국영화들 중 시선, 거리, 말투 등 대화의 미시적인 결이 생생히 살아있는 이재원 의 < 두 시간 >, 서울의 달동네 풍경과 오래된 골목을 주름진 노인들의 육체와 함께 화면에 담은 < 사람과 고기 >가 사사롭게 다가온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미키 17>, <어쩔수가없다>, <두 시간>, <사람과 고기> 중 사진: MUBI , 네이버 영화 , 전주국제영화제 , 네이버 영화 기술이 발전하고 정서가 침잠함에 따라 신체도 변화해간다. 두 편의 미국 블록버스터를 보면서도 그 무의식적 징후가 스크린에 투영된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서사적으로 두뇌의 작동을 철저히 둔화시킨 이 영화는 눈과 귀의 즐거움에 올인할 뿐, 가족영화라는 설정임에도 일말의 정서적 울림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숏츠 시대에 걸맞은 무지성 블록버스터가 되었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는 촌철살인으로 비평했다. “이 영화 속 사람들한테는 뼈가 없는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일종의 지점토처럼 인체를 연성화하는 작업을 거쳐 리얼리티를 제거한 화면을 보며 관객은 스크린 속 사태와 전혀 연루되지 않은 채, 시원하게 깔깔댈 수 있다. 영화 속 인체는 연양갱이나 하리보 젤리보다도 말랑한 지방이인데, 이들은 거의 AI ASMR에서 엿볼 수 있는 액체괴물이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비슷한 것이 되어 신나게 터지고 짓뭉개진다. 이에 반격하듯 아날로그 신체에 불굴의 책임의식을 강박적으로 수혈한 블록버스터 <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은 AI와 맞서는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의 눈물겨운 원 맨 쇼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구한다”라는 거창하지만 피상적 맥락 외의 사적인 욕망이나 목적이 제거되어 캐릭터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차력쇼의 단원이 된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잠수함 신은 숏츠 시대에 훈시하듯 대사마저 소거한 채 느린 호흡을 가져가는데, 여기에는 에단이 대적해야 할 상대도 없으며, 그에 따른 액션영화의 장르적 쾌감도 불투명하다. 영화는 잠수복을 벗고 알몸으로 헤엄치는 톰 크루즈의 몸짓을 고요한 바다 배경과 조명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팔다리를 태아의 형상처럼 구부려 ‘에단 헌트-톰 크루즈’라는 ‘인물-배우’를 거룩하게 비추지만, 어느 누구와도 합이 맞지 않는 듯한 이 영화 속 톰 크루즈는 마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인간계를 떠나는 유령처럼 보인다. 시리즈 내내 “리얼한” 액션을 제 몸으로 수행해 온 그의 강박이 올해는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사진: IMDb , © 2025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중 / 사진: IMDb AI가 도래한 마당에 내가 떠올리는 리얼리즘은 이런 것이다. 그곳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얼마간의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간격이 설정되는 세계이며, 실천적으로는 출퇴근길 과속과 욕설로 버스를 몰고 가는 어떤 중년 기사의 심통 맞은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깊게 팬 주름들 사이로 상상을 끼워보듯, 일상 속 적대와 부재, 거절을 맞대며 이해력과 상상력을 기르는 내면적 과정이 동반되는 장소다. 타자라는 낯섦과 불편함은 리얼리즘의 조건 중 하나였지만, 그것들이 편리함으로 제거되어가는 테크놀로지와 디스플레이의 시대에 리얼리즘은 이제 그 의미를 서서히 재정립해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올해의 영화들 중 마이크 리의 < 내 말 좀 들어줘(Hard Truths) >가 딸려온다. 이 영화는 소통 불가와 심리적 불안이 일상화된 우리 시대의 수축된 시공을 에두르거나 외면하지 않고 길바닥과 노동자의 리얼리즘으로 정면 대결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영화의 빛나는 사례가 되었다. 정답 없이 문제의 구체적인 양상만을 현미경처럼 충실히 제공하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내려치는 탓에, 마땅히 극장에 몸이 묶여 봐야 할 영화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이 들 정도다. 결말부 사각 프레임을 가득 채운 두 얼굴, 그들을 잇는 숏-역숏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마음이 그렇게 된다. ...... 어쩌면 이건 다 옛날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일상 속 원격 만남과 딥페이크 범죄가 여전하고 이미지의 사실성이 의심받기 일쑤인 작금에, 인간의 얼굴이 신비와 기적을 발생시키는 특권적인 장소라던 벨라 발라즈의 말을 과연 언제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 지나치게 발전한 미래에서 한때의 리얼리즘은 환상이다. <내 말 좀 들어줘> 중 / 사진: IMDb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 비평의 편지 ’ 필진.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대로 인간의 역사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은 없다. 인간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휴머니즘, 이성, 합리, 교양 등 번지르르한 의미들이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진 사례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미국 사법재판 중 가장 기괴한 판례로 꼽히는 O.J. 심슨의 ‘세기의 재판’ 역시 야만 중의 야만의 기록이었다. < O.J.: 메이드 인 아메리카 >(이하 ‘<O.J.>’)는 이 야만적 기록의 속살을 들추어내는 영화이다. 영화감독 에즈라 에델만은 1995년 10월 3일 초조한 마음으로 TV 앞에 앉아 O.J. 심슨 사건에 대한 최종 평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사학 석사 출신의 에델만은 심슨에게 무죄가 선고되기를 기도했다. 당시의 에델만에게 심슨 스캔들은 범죄 스토리가 아니라 인종재판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4년 전 네 명의 백인 경찰관이 과속을 하고 도주하던 흑인 건설업자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사건에 무죄가 선고된 후 에델만은 흑인 남성이 강고한 미국의 인종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순간을 고대해왔다. ‘심슨에게 힘을 주세요!’ 에델만의 기원은 현실이 되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에델만은 스스로의 신념을 근본으로부터 뒤집는 영화를 만들게 된다. 그 자신의 편협과 무지에 대한 반성적 고백성사라고 할 수 있는 < O.J. >를 통해 에델만은 비열하고 치욕적인 속임수에 의해 각색된 역사를 도발적으로 전복한다. O.J. 심슨은 누구인가? 전미풋볼리그(NFL)을 호령했던 최고의 스포츠 스타이자 흑인으로서 가장 높은 단계의 명사로까지 도약했다가 일급 살인혐의를 받고 급속히 추락한 사나이. 천부적인 신체 능력을 타고난 ‘하드 바디’ 스포츠맨인 심슨은 인종의 장벽을 초월하여 전국구 지지를 받았던 슈퍼스타였다. 스포츠계에서 얻은 명성을 후광으로 삼아 심슨은 TV와 광고, 영화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전시하면서 영향력 있는 셀러브리티로 진화해간다. 그러나 심슨의 유명세를 정점에 올려놓은 사건은 따로 있었다. 전 부인 니콜 브라운과 내연남을 도살한 혐의로 기소된 후 치른 이른바 ‘세기의 재판’을 통해 심슨은 낯선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총 3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 O.J .>는 심슨의 흥망사를 추적한다. 거칠게 분류하면 1장은 심슨의 성공기, 2장은 ‘세기의 재판’을 둘러싼 논쟁, 3장은 심슨의 현재에 해당한다. 서사시적인 웅장함을 유지하면서 에델만은 백인 중산층을 동경했던 말썽꾸러기 흑인 소년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택의 기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득적인 운동능력, 흑인 시민권 운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심슨의 정체성 부정, 미식축구 선수로서 성공 가도와 영예, 범죄용의자로의 전락, 그리고 돈과 권력, 편향된 여론에 의해 불의하게 결론이 난 재판의 과정을 훑는다. 이 30여 년의 시간은 흑인의 영웅이 아닌 미국의 영웅으로 이미지를 육성해가는 심슨의 수완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한 인물의 생애에 대한 전 방위 지도 그리기에 동참하면서 관객들은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보게 된다. 심슨의 인생유전에는 ‘반(反)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인종혐오도 포함되어 있다. 한 인물을 구성하는 이토록 다채로운 이미지는, 새로운 관점에서 심슨 사건을 조망하는데 탄력을 줄 뿐 아니라 미국 사회를 장악한 무의식, 합법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을 통해 유지되는 신화를 전복하려는 이 영화의 토대가 된다. 전기적 인물을 따라가는 연대기적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 O.J. >는 인물연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은폐된 사건의 진상을 밝혀가는 진실탐사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1994년 6월 17일 심슨이 벌인 사건,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자동차 추격전은 명백하게 그가 살인을 했다는 증거였으나 심슨 재판의 최종 결과는 ‘무죄’였다. 8개월 넘도록 이어진 재판, 100명이 넘는 증인, 4만 5천 페이지가 넘는 입증 기록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어떻게 무죄를 받았는가? 그러나 에델만의 관심은 심슨이 유죄인지, 무죄인지가 아니었다. 대서사의 초점은 어떻게 재판이 인종주의라는 이슈를 따라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는가로 모아진다. 스포츠맨으로서의 재능 외에도 미디어에 의해 재현되는 심슨은 가공할 매력의 소유자로 포장된다. 심슨은 유명인사가 되기 위해 사인을 하고, 자동차 렌탈 기업 ‘헤르츠’의 모델로 활약하면서 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번개 같은 달리기 능력을 뽐냈다. 그는 백인 소비자들에게 어필한 최초의 흑인 모델이었다. 인종의 경계를 넘은 우상이 희대의 살인 용의자로 나타났을 때 미국이라는 다인종 공동체는 다시 정의된다. 백인들이 심슨을 품어준 것은 아량일까, 신화에 대한 그들의 강박일까? 관대함과 카리스마를 갖춘 스포츠맨이자 셀레브리티로서 심슨의 모든 활동이 겨냥한 것은 미국의 백인 중산층에 내재된 무의식이었다. 심슨의 영웅적 풍모가 절정에 올랐을 때 미국인들은 그가 의도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카데미시상식 역사상 가장 긴 러닝 타임을 기록한 수상작이자 첫 TV 시리즈 수상작, 800시간에 달하는 푸티지, 72명의 인터뷰,’ 2017년 2월 치러진 89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고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 O.J .>가 뿌린 미증유(未曾有)의 기록들은 이 영화에 내포된 웅대한 야심을 모두 말해주지 않는다. 7시간 47분에 달하는 이 매머드 시리즈는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형성과 몰락, 거짓과 광기로 유지되는 가짜 이미지, 끝내 드러나고야 말 이면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최근 미국영화의 화두 중 하나는 ‘블랙 무비’이다. < 노예 12년 > < 국가의 탄생 > < 문라이트 > <O.J.> < 겟 아웃 >으로 이어지며 러시를 이루고 있는 ‘블랙 무비’에는 미국 사회 안에서 흑인들이 공유한 체험, 의제들이 진하게 녹아 있다. <O.J.>는 지나치게 많은 자료와 의미가 들어있는 서사 다큐멘터리의 맹점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길을 잃지 않고 논점을 유지한다. 에델만은 한 나라에 대한 초상을 그려내기 위해 신화가 발아하고 진화하는 과정, 그 아성이 깨어지기를 두려워하는 무의식, 그 위에 똬리를 튼 허구적 이상화를 폭로한다. <O.J.>는 미학과 윤리, 양식의 측면에서 강력한 논쟁을 야기한다. 아마도 그 잔향을 숙고하는 데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에델만은 여기서 심슨의 전기를 통해 인종 차별, 가정 폭력, 뉴스 매체의 과잉 등 미국의 모든 병들어가는 신경세포를 건드렸다. 심슨을 매개로 묘사되는 폭력의 역사는 차별과 특권의식, 화합할 수 없는 인종갈등의 골을 파헤쳐 보인다. 또한 최고의 논픽션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대상에 매몰되지 않는 거리 두기, 성실한 리서치, 그리고 다루고자 하는 테제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빈틈없는 조사와 핵심을 찌르는 인터뷰, 자로 잰 듯 정교한 편집이 이루어낸 위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세기의 재판’ 과정은 내레이션 하나 없이 심슨의 친구와 적, 동료들의 인터뷰로만 중계된다. 상세하게 기술되는 에피소드들의 태피스트리는 심연의 구조와 시스템을 건드리고 몇몇 이미지들에서는 몽상적인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심슨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그는 강도와 유괴 혐의로 3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2017년 10월 가석방되었다)인 상태로 묘사된다. 세기의 재판이 종료된 후 심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장은 보기에 고통스럽다. 타블로이드 잡지에나 등장할법한 누추한 범죄자로 네바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심슨은 참혹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심이 가득한 초로의 노안(老顔), 그의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푸석해 보인다. 이 세세한 여정의 끝에 목격하게 되는 것은 미국이 조형한 신화의 엔트로피이다. 한 흑인 스포츠 스타의 영락을 보여주기 위해 8시간이 필요했는가? 그 불가피함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할 수 있다. 4시간 40분에 달하는 마르셀 오퓔스의 < 슬픔과 동정 >(1968), 10시간 동안이나 상연되는 클로드 란츠만의 < 쇼아 >(1985) 같은 기나긴 다큐멘터리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가로질러 무의식의 밑자락을 드러내기 위해 시간의 누적은 필요조건이었다. 또한 그것이 인종갈등과 정치, 미디어, 쇼 비즈니스가 혼재된 이 비극적 서사 드라마의 성취를 보증하는 힘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영화와 자동차에 관해 글을 써보겠다고 달려들긴 했는데 우습게도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다소 황당한 무면허(?) 칼럼 연재를 감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방에 뒹굴고 있는 수백 대의 자동차 모형 장난감 때문이다. < 고스트버스터즈 > < 배트맨 > < 빽 투 더 퓨처 > 등의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을 나이 들어 다시 보면서 그 영화의 감동을 소유(?)할 수 있는 캐릭터 피규어나 장난감 구매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모형 자동차 역시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영화 굿즈의 품목 중 하나였다. ‘배트모빌’이나 ‘엑토-1’, ‘범블비’ 같은 가상의 자동차들을 보며 모형을 구매할 생각만 했지 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아무튼 < 007 >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몰던 ‘애스턴 마틴 DB-5’나 < 분노의 질주 > 시리즈에 등장하는 브라이언(폴 워커)의 분신 같은 ‘토요타 수프라’ 등의 실제 자동차 모형을 구매하려면 적어도 제조사와 모델명은 알고 있어야 했다. 나의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상의 캐릭터 자동차를 제외하고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실제 자동차 가운데 가장 먼저 장난감 모형을 찾아보기 시작한 모델은 1968년 작 < 블리트 >의 포드 머스탱이다. 피터 예이츠 감독이 연출하고 스티브 맥퀸이 출연한 이 영화를 보자마자 배우뿐만 아니라 그가 몰았던 자동차에도 푹 빠져들었다. 해외 쇼핑몰을 뒤져 장난감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 차가 영화 제작연도 즈음에 포드사에서 만든 머스탱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1967~8년형 머스탱은 뒷좌석 천장이 짧고 경사져 있는 ‘쿠페’식인데 전체적으로는 날렵한 디자인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묵직하고 위협적으로 생겼다. 차체의 전면은 보닛과 범퍼에 잘못 부딪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신체 일부분이 뜯겨져 나갈 것 같은 위압감이 흐른다. ‘패스트백’ 형태의 뒤꽁무니에서 부다다다 울리는 시끄러운 배기음은 마치 제멋대로 사건을 추적하는 영화 속 주인공 형사 프랭크 블리트(스티브 맥퀸)의 성격이나 태도와 닮아 보였다. 혹시 류승완 감독의 영화 < 베테랑 > 개봉 당시 일부 관객들이 조태오( 유아인 )가 ‘포드 머스탱 GT’라는 차를 모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던 걸 기억하시는가? 영화의 설정상 조태오 정도의 재력가라면 초고가의 스포츠카 ‘맥라렌’이나 ‘부가티’ 정도의 차는 타고 다닐 것 같은데 왜 상대적으로 저렴한 머스탱을 썼는가? 라는 물음이었다. 류승완 감독은 이에 두 가지 뜻이 있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예산 문제 때문에 비싼 차를 섭외할 수 없었던 탓이 크고, 두 번째는 피터 예이츠 감독의 <블리트>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기왕이면 극 중 스티브 맥퀸이 몰았던 자동차와 같은 차로 선택하고 싶었다고. 류승완 감독다운 선택이었다.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또 이야기하도록 하자. < 블리트 >의 1968년형 포드 머스탱, 스티브 맥퀸 피터 예이츠 감독의 < 블리트 >는 카체이스 영화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영화다. 카체이스가 이 영화의 주요 소재는 아니지만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카체이스 촬영과 편집, 거기에 스피드광이었던 스티브 맥퀸이 만나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요즘 관객들은 < 분노의 질주 > 시리즈 같은 영화에 나올법한 멋진 할리우드식 카체이스 장면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영화들의 카체이스 장면은 화려하긴 하지만 <블리트>처럼 거칠고 과감한 박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 제이슨 본 >(2016)에서 본(맷 데이먼)을 뒤쫓던 킬러(뱅상 카셀)가 탱크에 가까운 거대한 차량을 이끌고 라스베이거스 도로를 질주하며 엄청난 양의 차량을 산산 조각내는 장면이 있다. 엄청난 물량 공세에 감탄이 나올 법도 한데 별 맥락도 없이 액션에 힘을 주니 아무런 박력이 느껴지지 않은 실패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단지 많은 수의 차가 부서지는 것만이 카체이스 액션 영화의 전부가 아니다. 카체이스 장면의 생명은 화려함보다는 박력이고 그 박력의 대부분은 어떤 차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블리트>는 카체이스 영화, 더 깊게는 머슬카의 매력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머슬카는 8기통(VB) 엔진과 같은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고성능 자동차를 일컫는 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유행하던 경주에 적합한 고성능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 모델로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의 유럽형 슈퍼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머슬카는 가격 면에서 대중적인 차는 아니었다. 당시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사의 부사장이었던 아이아코카는 1960년대 초에 미국 자동차 시장 경제를 주도하던 베이비붐 세대를 겨냥해서 ‘포드 팔콘’이란 차를 새로운 스타일로 재창조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그렇게 당시 급변했던 소비자 구미에 맞는 차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는데 그 차가 바로 포드 머스탱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전투기 ‘P-51 머스탱’의 이름과 야생마라는 의미가 담긴 로고를 박고 등장한 포드 머스탱은 1964년 첫 모델을 본격적으로 출시한다. 웬만한 자동차 애호가는 다 알만한 개념이겠지만, 포니카라는 용어가 있다. 일반 소비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머슬카 즉 작은 차체에도 고성능 배기량을 가진 차를 뜻하는데 포드 머스탱은 시장 변화를 제대로 내다본 아이아코카가 만들어낸 작은 머슬카, 포니카였다. 이른바 ‘포니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블리트 >에 등장하는 1968년형 포드 머스탱은 여러 머스탱 시리즈 중에서 성능보다는 디자인을 중요시했던 머스탱 라인의 초창기 1세대 모델이다. 피터 예이츠 감독은 머스탱의 매력을 영화에 담기 위해서 10분이 넘는 카체이스 장면에 엔진과 타이어 소리 외에는 어떤 음악도 삽입하지 않았다. 당시로써는 무모한 카체이싱 장면에 도전한 것인데 일단 이 장면 자체가 대본에도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대본의 도시 배경은 로스앤젤레스였으나 갑자기 배경이 샌프란시스코로 바뀌면서 주택가 언덕 추격 장면을 찍을 여건이 마련된 것. 예이츠 감독은 또 스티브 맥퀸이 평소 ‘과속 촬영(운전)’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촬영을 밀어붙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스티브 맥퀸의 모든 운전 장면은 배우 자신이 직접 운전했다. 예이츠 감독에 따르면 그는 예전부터 운전할 때는 대역을 쓰지 않는다는 연기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고. 참고로 극 중 블리트 형사(스티브 맥퀸)의 머스탱과 경쟁하듯 질주하다 전소되고 마는 ‘닷지 차저’를 운전한 배우는 빌 힉맨이란 사람인데 그는 당시 카체이스 전문 스턴트맨이기도 했다. 스티브 맥퀸과 함께 빌 힉맨의 멋진 스턴트 주행이 없었다면 <블리트>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 블리트 >의 카체이싱 당시에는 또 이런 카체이싱 촬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장소 대여 관계로 2주라는 짧은 촬영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이츠 감독은 이 기간 안에 10여 분 넘는 장면을 모두 찍어야 했기 때문에 두 대의 카메라를 뻗쳐놓고 찍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때 현장에서 맥퀸이 탄 머스탱이 언덕 위에서 질주하며 내려오다가 사거리 코너에 설치해놓은 카메라와 부딪쳐 카메라가 박살이 나기도 했는데 해당 장면은 영화에 그대로 삽입됐다. 카메라와 부딪친 이후에 이어서 멈춘 차를 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맥퀸이 후진을 하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후방을 살핀다. 예이츠 감독에 따르면 맥퀸이 현장에서 촬영을 구경하는 일반인들에게 차를 운전하는 배우가 자신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일부러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라는 거다. 스티브 맥퀸의 여유롭고 허세 섞인 열연에 힘입어 포드 머스탱은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서 카체이싱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는 데 일조했다. 영화 매체를 통해 미디어 마케팅의 재미를 톡톡히 보게 된 포드사는 바로 이어서 애스턴 마틴 DB5를 상징적으로 몰던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에게도 포드 머스탱을 안겨준다. 1971년 작 <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는 악당 블로펠드(찰스 그레이)가 다이아몬드로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가 잠입해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이야기다. 제임스 본드는 영화의 주요 배경인 라스베이거스에서 본드걸 티파니(질 세인트 존)가 몰던 차를 대신 몰고 다니는데 이 차가 바로 새빨간 색상의 ‘머스탱 마하1’이다. 이 모델은 기존 68년형 머스탱의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 모델이다. 극 중 본드가 경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옆으로 세워서는 두 바퀴로 달리는 곡예를 선사하는 명장면도 탄생시켰다. 1960년대와 70년대 당시 한국 최고의 스타였던 배우 신성일은 국내 수입차 1세대인데 그가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리무진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릴 때 탔던 수입차가 인디언 레드 컬러의 ‘머스탱 마하1’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식스티 세컨드>의 쉘비 GT 500 1960년대 후반 머스탱을 만들어 1년 사이에 60만대가 넘는 차를 팔아 치웠던 포드사는 당시 1세대 모델보다 성능이 더 좋은 스포츠카 형태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의견을 수용해 유명 레이서였던 캐럴 쉘비와 협업해서 제품 개발을 진행했다. 이때 1세대 모델에는 없던 8기통(V8) 엔진을 튜닝해서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 ‘쉘비 GT350’, ‘코브라 G.T.500’ 등의 모델이 만들어졌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스포츠카 절도단 이야기를 다룬 액션 영화 < 식스티 세컨드 >는 전설적인 머슬카 ‘쉘비 GT 500’을 스포츠카의 끝판왕처럼 묘사한다. 영화 내내 유럽산 슈퍼카들이 쏟아지듯 등장하지만 주인공인 절도단들은 ‘쉘비 GT 500’을 훔치는 것을 자신들의 최종 목표라고 말한다. 미국산 머슬카의 아름다움 혹은 위대함을 널리 알릴 목적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다고 해야 할까. 조지 밀러 감독의 1973년 작 < 매드맥스 >는 또 어떤가. 주인공 맥스(멜 깁슨)의 차는 머슬카의 상징과도 같은 고성능을 탑재한 ‘8기통(V8) 인터셉터’로, 1970년대 초반에 개발된 ‘팔콘 XB GT 쿠페 1973‘가 실제 모델이다. 황량한 허허벌판 대륙을 질주하며 횡단하기에 더할 나의 없이 좋은 성능을 지닌 차들이다. 또 1969년에는 포드사가 머스탱을 업그레이드한 ‘보스’라는 제품을 출시해 모터스포츠 계에서 활약하는데 이 모델은 ‘보스 302’, ‘보스 429’ 등의 모델로 나뉘어 제작된다. 특히 보스 429 엔진은 표기된 출력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유명해졌다. 왠지 이름이 낯익은 모델이라고?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 존윅 >에서 동네 건달들의 자존심에 금을 가게 해준 차가 바로 존 윅이 애지중지하던 1969년형 ‘머스탱 보스 429’다. < 존윅 >의 1969년형 머스탱 보스 429 포드 머스탱으로 대표되는 미국산 포니카는 천둥소리 같은 배기음을 쏟아내는 8기통의 박력이 다른 모든 자질구레한 성능의 장단점을 잊게 만든다. 사실 이 머스탱은 한국 실정에 비추어 보면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차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연비를 자랑하는 통에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베테랑 >의 조태오는 왜 포드 머스탱을 몰았을까? 머슬카 특유의 가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명동 한복판 8차선 도로를 꽉 막은 차들 사이로 육중한 차체를 들이밀며 홍해 가르듯 부수고 지나갈 수 있는 힘 좋은 자동차로 포드 머스탱만 한 차가 또 있을까? 설정상 조태오가 벤츠나 아우디를 몰았다면 재벌의 리얼리티 정도는 살려줬을지라도 후반부 명동 카체이스 장면에서의 머스탱 전용 박력은 사라져 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 베테랑 >의 포드 머스탱 GT, 조태오 최근에 포드 머스탱과 관련한 흥미로운 뉴스가 공개됐다. 얼마 전 포드사가 전 세계 기자들을 말리부 해안가로 불러모아 2018년형 신모델의 시승식을 가졌는데 이때 많은 기자들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당황했다고 한다. 8기통 5.0L의 가솔린 엔진에 회전 한계를 7500rpm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엔진 성능 때문이 아니라 머스탱 역사상 최초로 반자율주행 기능을 탑재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고. 포드사는 긴급제동 보조 시스템(ASBS), 차선이탈 경고시스템(LDWS), 차선이탈 방지 시스템(LKAS) 등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을 중시한 모델임을 강조했다. 물론 세계적인 흐름을 따른 당연한 결과이자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지만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머스탱 정신’과는 조금 다른 행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소식은 지구에서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던 < 블리트 >의 실제 촬영모델 머스탱을 발견했다는 소식이다. <블리트>에서 스티브 맥퀸이 직접 몰았던 차량 소품 머스탱은 총 2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 대는 개인 소유 차량이고, 나머지 한 대는 자취를 감춘 채 사라져버려 찾을 수 없었다. 스티브 맥퀸이 죽기 직전까지 평생 동안 이 차를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연은 자동차 애호가 사이에서 유명하다. 멕시코에서 발견된 < 블리트 >의 머스탱(기사 보기) 그런데 최근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주의 어느 폐차장에서 자동차 커스텀이나 복구를 취미로 즐기던 두 남자가 녹슬어 폐차된 머스탱 잔해를 찾아냈다. 그들은 이 잔해를 가지고 < 식스티 세컨드 >의 쉘비 GT 500으로 커스텀 제작을 하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들이 남아있던 원본 부품을 포드사에 문의한 결과, 이 망가진 차의 잔해가 실제 < 블리트 > 촬영에 썼던 머스탱임이 밝혀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식스티 세컨드> 대신 <블리트>에 등장했던 원래의 모습 그대로 차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최신식 머스탱 모델의 변화 소식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음을 몸소 보여준 유물 머스탱의 발굴 소식이 기가 막히게 대비된다. 이제 포드 머스탱은 8기통 엔진을 마음껏 돌려도 석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던 호황기의 유물로서 DVD와 장난감 모형 속에 영원히 갇혀 버렸지만 그 끝내주는 ‘가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장난감을 사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돈이 없어 못 사지, 가오가 없어 못 사나?”